욕실에 콸콸 쏟아지는 물소리를 들은 온유한의 팽팽했던 몸이 드디어 풀렸다.강지아보다 거의 열 살이나 많은 그는 방금 자신이 강지아에게 할 뻔했던 일을 생각하면 자신이 정말 짐승처럼 느껴질 정도로 술렁거립니다.냉장고에 가서 맥주 한 캔을 가져와 몇 모금 마셨더니 차가운 식감이 그를 점점 냉정하게 만들었다.강지아가 술을 마셨다는 생각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온유한은 다시 침실로 들어가 기다렸다.예전에 강지아의 병이 낫지 않아 그들은 그녀를 어린애처럼 총애했다.그러다 보니 나중에 병이 나은 후에도 그를 대하는 마음은 여전히 고쳐지지 않았다.강지아가 그를 남자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방금 그 에피소드가 없었다면 온유한마저도 자신이 강지아를 성숙한 여자로 여긴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강지아의 침대에 앉아 있는 게 전혀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았다.물소리가 그치고 잠시 후 강지아가 나왔다.하얀 가운에 드라이 헤어캡으로 머리를 감싼 그녀는 온유한을 본 순간 어리둥절해 했다.“아직 안 갔어?”말투에 짜증 나는 기색이 역력했다.목욕하고 난 강지아는 머리가 많이 맑아졌는지 온유한을 보면 짜증이 났다.“가, 빨리 가.”말을 하면서 온유한을 잡아당겼지만 온유한은 침대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고 손에 힘을 살짝 주며 오히려 강지아를 품에 안았다.“어디 가라고?”“어디를 가든 가!”“오늘 밤은 여기서 잘 거야.”강지아는 눈이 휘둥그레졌다.“여기서 자겠다고? 지금 뭐 하는 거야?”강지아는 무의식적으로 가운을 움켜쥐었다.온유한을 오해하는 말에도 그는 해명하려 하지 않았고 렌즈 뒤의 눈동자는 알 수 없을 정도로 그윽하고 애매모호했다.“지아야, 시간이 늦었는데 정말 나를 쫓아낼 거야?”평소보다 부드러운 목소리에 강지아는 저도 모르게 그녀가 미쳤을 때를 떠올렸다.그때도 그는 지아를 품에 안고 다독였다.“지아야, 괜찮아. 다 괜찮아, 유한이 오빠가 있으니까.”온유한이라는 사람은 강지찬과 최의현보다 존재감이 떨어진다. 세 사람의 역
다음날 강지아는 향기로운 음식 냄새에 잠에서 깼다.어젯밤에 별로 취하지 않았기에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던 그녀는 답답한 마음에 머리를 감싼 채 침대에서 뒹굴었다.잘생긴 얼굴만 보고 이렇게 쉽게 온유한을 용서하다니!게다가 집에 묵도록 내버려 뒀다.휴대전화를 보니 벌써 11시를 훌쩍 넘었다.천천히 일어나 씻은 뒤 옷을 갈아입고 꾸물거리며 나오니 온유한은 이미 점심을 다 차려 놓았다.이 인간은 외모로 그녀의 눈을 유혹할 뿐만 아니라 음식으로 그녀의 위마저 유혹했다.“능구렁이 같으니라고!”때마침 환풍기를 끄던 온유한이 그 말을 듣고 물었다.“누가 능구렁이인데?”이때 강지아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지만 전해 어색한 얼굴 없이 의자를 당겨 앉았다.온유한이 웃으며 말했다.“속이 안 좋을까 봐 죽을 끓였어. 새우와 옥수수를 넣고 야채도 조금 넣었으니 먹어봐.”테이블에 놓인 죽은 진하고 부드러워 강지아가 좋아하는 식감이었다.도도한 흉부외과 주임이 요리까지 잘하다니!밥을 먹는 강지아는 점점 더 우울해졌다.이렇게 능글맞은 사람과 어떻게 어제 일을 따지냐 말이다.맞은편에 앉은 온유한은 강지아의 얼굴색이 이리저리 변하는 것을 보고 이 계집애가 분명 속으로 욕설을 퍼붓고 있다고 짐작했다.“요즘 쉬는 김에 놀러 갈지 않을래?”“싫어. 요즘 바빠.”강지아는 고개도 들지 않고 거절했다.얼마 전까지 학생들과 같이 공부, 회의, 수술, 논문 등 일 때문에 바삐 돌아다녔던 온유한은 겨우 숨돌릴 시간이 났고 며칠 휴가를 내어 강지아와 같이 보내려 했다.“작업실이 거의 다 완성됐지? 내가 도울 건 없어?”“없어.”온유한도 그녀가 아직도 어제 일로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경찰을 통해 어제 일의 경과를 알게 되었는데 완전히 그의 어머니가 일부러 트집을 잡은 것이었다.그는 여러 번 최신애에게 말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고 모자 둘은 결국 사이가 틀어졌다.뾰로통해 하는 강지아의 얼굴을 본 온유한은 참지 못하고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힘을 별로 쓰지
밥을 먹은 온유한은 다시 식탁과 부엌을 치우기 시작했다.이때 서원준이 강지아에게 전화를 걸었다.“바보야, 깼어?”“진작 깼어. 왜?”“어제 같이 술 마신 에이미 누나 기억나? 방금 나에게 전화가 왔는데 에이미 누나가 조만간 패션쇼를 열 거라면서 관심 있냐고 너에게 물어달래.”강지아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뭐? 에이미 언니 패션쇼 디자인을 나에게 맡기겠다고?”“왜? 못 하겠어?”강지아는 사실 자신이 없었다.“그렇게 큰 패션쇼를 맡아본 적이 없어. 지금까지 그냥 작은 패션쇼만 했어.”전화기 너머의 서원준은 껄껄 웃었다.“겁쟁이, 그냥 평범한 패션쇼야. 에이미 누나도 네 예전 작품을 보고 네 능력을 믿어서 널 찾은 거지. 원래 외국 디자이너를 고용할 계획이었지만 그 사람은 태도가 너무 오만하고 우리나라 패션계를 너무 무시해서 에이미 누나가 그 사람과 협력하고 싶지 않대. 어젯밤에 밤새 너의 작품을 보고 네가 아주 적합하다고 생각했나 봐.”강지아는 너무 흥분되었다.애만 산하의 패션과 주얼리는 국내외 시장에서 평판이 아주 좋다. 다만 다른 글로벌 브랜드에 밀려 해외에서 인지도가 높지 않았다.강지아는 당연히 애만과 협력할 의향이 있다. 단지 자신의 능력이 에이미의 기대를 저버릴까 봐 걱정되었다.“한번 해봐.”옆에 있는 온유한의 말을 들은 서원준은 순간 멈칫했다.이제 보니 온유한이 바로 옆에서 그녀에게 작업을 걸고 있었던 것이다.“바보야, 겁먹지 마. 에이미 누나의 연락처 줄 테니까 얘기해 봐. 걱정하지 말고. 에이미 누나가 너를 많이 좋아해.”강지아는 긴장하고 설레는 마음에 안절부절못했다. 에이미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함께 브런치를 먹기로 했다.온유한도 강지아를 따라갔고 그가 온씨 가문 사람이라는 말에 에이미는 조금 놀랐다.“이런 우연이. 우리 엄마도 며칠 전 태안 병원에서 아주 젊은 주임 의사에게서 수술을 받았다고 했는데 설마 그 사람이 온 선생님이에요?”온유한은 웃으며 말했다.“인제 보니 장 교수님의 가족이셨군요.”에이미는
“유한이가 전화를 안 받아?”주유정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네, 많이 바쁜 것 같아요.”최신애는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바쁘긴 뭐가 바빠. 요즘 쉬는데. 또 강지아를 찾으러 갔을 거야.”그러자 주유정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아주머니, 제가 잘못했어요. 그때 내가 떠나지만 않았어도 유한 씨와 헤어지지 않았을 텐데... 지금까지 계속 후회하고 있어요.”최신애도 사실 마음속으로 그때 주유정이 온유한을 매정하게 떠난 것을 원망했다. 게다가 온유한과 헤어진 뒤 남자친구까지 사귀었다.자신의 아들은 그 뒤로 다른 여자친구를 사귀어 본 적이 없었기에 이 생각만 하면 최신애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주유정은 그런 최신애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마음에 늘 유한 씨가 있어서 다른 남자를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유한 씨를 잊기 위해 억지로 두 사람을 만나봤지만 도저히 내키지 않아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다른 남자를 만났었지만 마음은 늘 온유한에게 있었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거나 잠자리를 가져본 적이 없다는 뜻이었다.최신애는 그제야 안심한 듯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해. 내 아들은 내가 제일 잘 알아. 정이 들어서 그러는 것이니까 좀 있으면 마음을 돌릴 거야.”그러고는 주유정의 손을 툭툭 치며 한마디 더 했다.“게다가 나도 도와주잖니.”주유정과 최신애는 온유한의 마음을 되돌릴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한편 온유한은 강지아와 같이 집으로 들어간 뒤 외투를 벗더니 바로 소매를 걷어붙이고 부엌으로 향했다.온유한이 셔츠와 바지를 입고 있은 것을 본 강지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그런데 오전까지 잠옷을 입고 있지 않았어? 이 옷은 어디서 난 거야?”“차에 있던 거야.”온유한이 말했다.“그래?”강지아도 더 이상 따지지 않고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이번 애먼 패션쇼는 반드시 성심성의껏 준비해야 했다. 그녀의 스튜디오가 설립된 후 첫 번째로 하게 된 패션쇼이고 또한 아주 큰 패션쇼다. 이번 한 번만 잘해도 앞으로 큰 문제가 없
온유한은 조심스럽게 사슴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출근하기 전에 끝내서 다행이야. 어때? 네가 말하던 그거 맞아?”가까이 가서 본 강지아는 흰 사슴의 몸에 약간의 흠집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온유한은 어색한 표정으로 안경테를 밀며 말했다.“가까이 오지 마. 윤 선생님이 그랬는데 한 번 깨진 작품이니 아무리 보정한다고 해도 흔적이 남을 거라고 했어. 내가 직접 보정한 거라 어떻게 될지 몰라.”강지아는 깜짝 놀랐다.“이거 오빠가 직접 고친 거라고?”온유한은 난감한 듯 말했다.“사람의 심장도 완벽하게 봉합할 수 있는데 공예품을 수정하는 것은 너무 어려웠어. 지아야, 나 진짜 최선을 다했어. 정말 마음에 안 드니?”강지아는 엉겁결에 그의 손을 보았다.메스를 잡던 손이 언제 이런 조각을 해봤겠는가?그저 가슴이 막힐 뿐이었다.강지아는 사슴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마음에 들어.”“그럼 지난번에 한 약속도 잊지 않은 거지?”온유한은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여자친구가 되어주기로 한 거?”강지아는 순간 심장이 떨려 그 자리에 멍해졌다.온유한의 여자친구가 되어달라고?오랫동안 바란 일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오랫동안 그를 좋아했고 때로는 두 사람이 이미 커플이 되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하지만 최신애를 떠올리자마자 강지아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됐어.”강지아는 온유한의 눈을 쳐다볼 수 없었다.온유한과 연애하는 것은 애만의 패션쇼를 준비하기보다 더 어렵다.온유한도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그럼 나중에 다시 얘기할까?”일단 그의 친어머니부터 설득해야 했다.사실 온유한도 지금 당장 두 사람의 관계를 약속하자는 게 아니다. 그저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밝히고 싶을 뿐이었다. 강지아가 억울한 일을 당했으니 우선은 잘 달래야 했다.괜히 다른 사람이 이 틈을 비집고 들어오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무슨 걱정을 하는지 알아. 걱정하지 마. 내가 방법을 생각해 볼게.”온유한은 긴 팔을 뻗어 그녀를 품에 안
정유진과 강지아가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 밖에서 술렁이는 소리가 들렸다.평소 조용한 K그룹 직원들이었기에 강지아는 참지 못하고 밖으로 나가 물어봤다.“강지아 씨, 맞은편 카페에서 누가 쓰러졌다고 그러네요.”강지아가 어리둥절해 하고 있을 때 정유진이 그녀 뒤쪽으로 다가왔고 그 말을 들었다.“새언니...”“우리가 가서 보자.”두 사람이 내려갔을 때 마침 구급차가 도착해 있었고 들것에 실린 강지현이 타는 보습이 보였다.정유진과 강지아는 구급차를 따라갔고 가는 길에 조예원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가 강지현을 인근 병원으로 옮겼고 응급실에 도착하자마자 정유진은 의사에게서 강지현의 몸 상태를 들었다.응급실에 들어가자마자 의사 선생님이 미처 응급처치를 하기도 전에 강지현이 깨어났다.강지현이 한사코 퇴원하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의사마저 말리지 못하자 정유진이 한마디 했다.“이 병원이 싫으면 태안 병원으로 가요.”결국 그녀와 강지아는 강지현을 태안 병원으로 보냈다.차 안의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강지아는 정유진과 애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태안 병원에 도착한 강지현은 마침내 검사를 받으러 갔다.정유진은 별 느낌이 없었지만 강지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휴, 방금 너무 어색해서 정말 숨넘어갈 뻔했어요.”강지아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오빠가 만약 강지현이 K그룹 맞은편 카페에서 쓰러진 걸 알면 또 질투할 거예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조예원이 뛰어왔다.세 사람이 이렇게 마주치자 강지아는 또 어색해했다.정유진은 별일 아닌 듯 먼저 입을 열었다.“정신은 다시 차렸고 지금 검사하고 있는 중이야.”조예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검사실 문만 쳐다봤다.“오빠가 왔어요.”강지아가 갑자기 정유진을 잡아당겼다.고개를 돌려 보니 강지찬이 장형준을 데리고 그녀에게 걸어오고 있었다.당연히 강지현을 보러 온 것이 아니라 그의 아내를 데리러 온 것이다.강지아는 오빠가 혹시라도 또 정유진과 다툴까 봐 먼저 강씨 본가에 가서 밥을 먹겠다고 했다.
강지찬이 정유진을 데리러 간 이유는 술자리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강지현 대체 무슨 일이래? K그룹 밖에서 쓰러졌다고?”“네.”강지찬의 눈빛이 잔뜩 어두워졌다.왠지 지금의 강지현은 무엇인가에 더 힘을 쓸 것 같은 모습이다.강지현이 예전처럼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수작을 부린다면 두 배로 갚아줄 것이다.그런데 이 인간이 병에 걸린 후 갑자기 얌전해졌으니 강지찬은 어떻게 손을 쓸 수 없었다.정유진의 손을 잡고 조물딱거리는 모습을 보아 강지찬의 마음이 얼마나 불편했는지 알 수 있었다.밥을 먹고 나온 정유진은 졸린 듯, 돌아가는 길에 강지찬의 어깨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가 차가 멈춰서야 깨어났다.강지찬은 그제야 오늘 아내를 힘들게 했다는 것을 깨닫고 다음 날 함께 K그룹으로 출근했다.변호사가 도착한 뒤 정유진이 사인을 하자 강지찬은 강원훈으로부터 받은 주식을 전부 정유진의 명의로 넘겼다.이후부터 그녀는 K그룹 대표이사 직무대행이 아니라 K그룹의 주주이다.이 소식을 들은 강홍식은 화가 나서 회사로 달려가 한바탕 소란을 피웠다.“주식을 이렇게 쉽게 주다니, 너 정말 통이 크구나.”강지찬은 일부러 강홍식을 화나게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나야말로 내 주식 전부를 유진이에게 주고 싶네요. 그런데 유진이가 싫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제가 갖고 있어요. 원래 부부 사이에 네것 내것이 없다고 하는데 우리 집안 사람들은 항상 유진이를 남으로 생각하니 나야말로 별수가 없네요.”강홍식은 화를 내며 사무실을 나섰다.다시 연우 인테리어로 돌아온 정유진의 어깨가 한결 가벼워진 것 같았다.커피 한 잔 타서 갖고 오던 소미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정 대표님, 보고 싶어 죽을 뻔했어요. 정 대표님은 모를 거예요. 조 대표님이 얼마나 엄격하신지. 그동안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았어요.”정유진은 웃으며 말했다.“그래요? 그런데 왠지 살이 좀 찐 것 같네요.”소미는 얼굴을 만지며 우울한 듯 말했다.“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먹는 것으로 풀어서 그래요.”커피를 한
“호송 담당 교도관도 다쳤다고 하던데 상태가 어떤지 모르겠네요.”“수배 영장이 전국에 배포되었으니 요즘 장 보러 나갈 때 우리 다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그 사람이 설마 복수하러 오지 않을까요?”“글쎄요. 너무 무섭네요. 빨리 잡혔으면 좋겠어요.”말이 끝나자마자 화단 뒤에서 심한 기침 소리가 들렸다.숨어서 잡담하던 두 하인은 깜짝 놀란 나머지 ‘도련님’이라고 외치고는 도망쳤다.뜨거운 차를 들고 오던 조예원은 마침 강지현이 휴지로 바닥을 닦는 것을 보았다.빨갛게 물든 휴지를 본 조예원은 깜짝 놀란 얼굴로 찻잔을 내려놓고 그의 손에서 휴지를 빼앗았다.하얀 휴지에 빨간색 덩어리가 있었고 바닥에는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휴지통에 버려요.”강지현이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덤덤히 말했지만 조예원은 떨리는 손을 멈출 수 없었다. 이게 바로 강지현이 기침을 하면서 나온 것임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강지현의 표정을 보니 이번이 처음이 아닌 것 같다.조예원은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강지현 씨, 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강지현은 담담하게 말했다.“약은 계속 먹고 있어요. 죽고 사는 게 다 운명이겠죠.”조예원은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당신 아직 젊어요. 충분히 살 수 있다고요. 계속 항암 치료하면 돼요. 우리 해외 나가서 치료하고 와요!”강지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예원은 이런 말을 수없이 했고 그녀조차도 스스로가 너무 무력하다고 생각했다.“내가 어떻게 당신을 설득할 수 있겠어요. 유진이를 부를게요.”“가지 마세요.”강지현의 눈빛이 순간 달라졌다. 워낙 마른 강지현인지라 지금 조예원을 보고 있는 눈빛은 마치 칼날처럼 그녀의 온몸을 갈기갈기 찢는 것 같았다.“유진 씨에게 말하려면 강씨 집안에서 나가세요!”이날 밤 조예원은 혼자 술을 마셨고 만취한 상태로 바닥에서 자다가 아침에 깨어났다.깨어났을 때 머릿속의 드는 첫 번째 생각은 뜻밖에도 차라리 강지현이 죽었으면 좋겠다였다.죽으면 그녀도 해방이
현채영은 입꼬리만 올리며 말했다.“내가 왜 그쪽 체면을 세워줘야 하죠? 누구신데요?”그 사람은 눈을 가늘게 뜨며 현채영을 바라봤다. 가뜩이나 못생긴 눈이 이상하게 변해 더 못 생겨 보였다.“현채영, 네 주제 파악 좀 해.”그 남자는 옆에 있던 온유한을 쳐다보더니 일부러 도발적으로 말했다.“온유한 부원장이 얼마를 줬는데? 내가 두 배 줄 테니 하룻밤만 나와 같이 있는 거 어때?”현채영이 앞에 놓인 술을 그의 얼굴에 뿌리자 그 남자는 온몸이 젖었다.안 그래도 멀리서나마 현채영과 온유한을 구경하던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자 더욱 그들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천한 년, 감히 나에게 술을 뿌려?”창피를 당한 그 남자는 화가 나 자리에서 일어나 현채영을 향해 주먹을 날리려 했다.그러나 주먹이 현채영에게 닿기도 전에 옆에 있던 온유한이 그를 잡았다.그 남자는 술 범벅이 된 얼굴을 손으로 쓱 닦은 후 말했다.“온유한 부원장님, 이 여자 편을 드나 봐요?”말없이 그를 응시하는 온유한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솔직히 말해서 예전에 강지찬과 친할 때 아무도 함부로 그에게 덤비지 못했다.그들은 서울에서 연예인 같은 존재였다. 사람들은 그들 무리에 끼어들고 싶어 안달이 났기 때문에 아무도 감히 그들을 도발하지 못했다.이제 그 무리를 벗어난 온유한인지라 사람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가 확실히 이전과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그를 괴롭히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몇 초가 지난 후에야 온유한이 입을 열었다.“내 여자에게 집적거리는데 내가 안 나서면 누가 나서?”말을 마친 온유한은 그 남자를 옆으로 홱 뿌리쳤다.큰 소동에 달려온 강지찬과 정유진 그리고 강지아 모두 이 말을 들었다.온유한은 현채영을 자신의 반대편으로 끌어당긴 뒤 그 남자를 향해 말했다.“꺼져!”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창피를 당한 것을 강지찬과 그 가족이 봤으니 그 남자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일부러 온유한을 도발했다. 이 또한 강지찬에게 충성을 표하는 의미이기도 했다.“온유
현채영을 데리고 온 온유한은 연우와 우빈에게 준비한 선물을 정유진에게 직접 건넸다.“그냥 오면 되지 이렇게 비싼 선물까지 왜 사 갖고 와요.”정유진은 단아한 자태로 평범한 친구 맞이하듯 그를 대했다.“작은 성의로 봐주세요.”온유한이 대답했다.한편 온유한이 왔다는 말에 신이 나서 찾아온 최의현은 현채영을 본 순간 얼굴이 파랗게 질렸고 이를 악물며 겨우 한마디 했다.“왜 여기까지 데려온 거야? 내가 말했잖아, 지아가 돌아왔다고.”그러더니 팔을 번쩍 들며 자랑하듯 말했다.“봤지? 커프스. 지아가 준 거야.”고개를 옆으로 돌린 온유한은 강지찬과 경은우 모두 지아가 준 커프스를 착용한 것을 발견했다.서원준도 같은 커프스를 하고 있는 모습에 온유한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예쁘네.”온유한의 표정을 본 최의현은 순간 재미가 없어졌다.“지찬이에게 인사하러 안 갈래?”온유한이 말했다.“됐어, 난 꼬맹이 보러 온 거야. 그때 그러지 않았더라면... 나를 삼촌이라고 불러야 하겠지?”온유한의 얼굴을 본 최의현은 그의 말이 진심인지 농담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그냥 강우빈을 보러 온 거라고?많은 시선들이 온유한과 현채영에게 쏠렸다.그런 눈빛에 익숙해진 현채영은 웃으며 말했다.“매번 나와 같이 오니까 사람들이 어려워하잖아. 그래서 혼자 가라고 한 건데 내 말 안 듣고 말이야.”“미안해.”온유한이 말했다.“난 괜찮아. 이까짓 게 뭐라고?”현채영은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우리 집안에 일이 생겨서 그렇지 뭐. 그래서 내가 돈밖에 모른다고 생각하지. 내 옷 안에 카드를 넣으며 같이 술을 마시자고 하는 사람도 있어.”온유한도 전에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고 현채영의 난처한 상황을 지켜본 적도 있었다.두 사람은 창가 자리를 찾아 앉았다.자리에 앉자마자 잘 차려입은 남자가 술잔과 술병을 들고 다가왔다.번지르르한 얼굴의 그 남자를 온유한도 잘 알고 있었다. 졸부의 아들이며 집안에서는 강지찬에게 빌붙기 위해 온갖 방법을
강우빈이 태어나던 해 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은 인연을 완전히 끊었고 강지찬과 온유한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강지찬도 기분이 나빴다.아들이 태어난 후 백일잔치도 하지 않은 채 집안 식구들끼리만 축하를 했다.어느덧 우빈이는 세 살이 되었고 강지아가 때마침 귀국했기에 못 해준 축하를 이제는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이번 강우빈의 생일잔치는 성대하게 치르기로 했다.생일파티는 강씨 가문의 식장에서 열렸고 강지찬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손님들이 많이 왔다.정유진과 강지아는 하객 대응을 맡았다. 사람들은 오래간만에 나타난 강지아를 보고 깜짝 놀랐다.하지만 강지아는 사람들의 이상한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친구들이 한 명씩 올 때마다 반갑게 맞이했다.온씨 가문과 최씨 가문에는 초청장을 보내지 않았지만 화령은 강지아와 절친이었기에 생일잔치에 왔다.편집장으로 승진한 화령은 옛날의 풋풋함이 사라졌지만 아름다운 미녀의 기질을 한껏 풍기고 있었다.“여기 온 것을 나중에 시어머니가 알면 어떻게 해?”강지아가 한마디 물었다.황은숙은 아직도 자기 아들 최금혁을 아프리카로 보낸 강지아와 화령이 미워 죽을 지경이었다.강지아의 말에 화령이 긴 웨이브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며 말했다.“시어머니는 무슨, 그리고 진짜 시어머니라고 해도 내 일에 간섭할 수 없어.”“아이고, 우리 화령 편집장님 점점 폼이 나네. 어쩐지 최금성이 3년이나 아끼더라니, 다 이유가 있었어.”강지아의 장난기 가득한 말투였지만 화령의 얼굴에 있던 웃음이 옅어졌다.“전엔 얘기 안 했나? 작년에 유산했어.”“어?”“아기가 싫대.”화령이 최금성을 너무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강지아인지라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아팠다.좋아하는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는데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을 것이다.최금성이 아이를 키우지 못할 형편도 아닌데 말이다.“왜 싫대?”“난 그냥... 뭐랄,. 파트너니까. 애인 대역이라고 할 수도 없지.”화령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며 말을
“당연히 아프지. 문신을 할 때보다 훨씬 아파. 지난주에도 예쁜 여대생이 왔는데 울면서 문신을 지웠어. 하도 울어서 눈이 다 부었어.”“아파서 우는 건 아닐 거야.”“그렇지. 헤어진 사랑 때문에 우는 거겠지. 나도 남자이긴 하지만 어떤 남자들은 진짜로 못 돼 먹었다니까.”강지아는 잡지를 하나 집어 들어 펼쳐보았다.“네 사장님께 얘기해줘. 지금 작업 끝나면 내 다리 문신도 지워달라고.”“그래.”대답을 하고 난 뚱보는 그제야 반응했다.“뭐라고?”강지아가 말했다.“예쁜 그림 있어? 어디 좀 봐봐.”“응? 아!”뚱보는 멍한 얼굴로 노트 하나를 가져왔다.“이건 사장님이 직접 그린 그림이야. 마음에 드는 게 있는지 봐봐.”여기까지 말한 뚱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한마디 물었다.“아니, 지아 누나. 무슨 일 있어? 남자친구와 헤어졌어?”“응.”입이 무거운 진수혁이 보아하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 같았다.물론 말을 했든 안 했든 강지아는 상관하지 않았다.검은 장미꽃 한 송이를 본 강지아는 그 그림을 가리키며 말했다.“이걸로 하자. 섹시해 보이네.”그러자 뚱보가 말했다.“이 그림은 몇 년 전 거야. 요즘 젊은 여자들은 흑장미 문신을 하지 않아.”“난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이걸로 할게.”뚱보는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30분이 지나자 진수혁의 하던 작업도 끝났다.강지아의 차례가 돌아오자 진수혁이 한마디 했다.“올 줄 알았어.”강지아도 한마디 했다.“걱정 마. 울지 않을 테니.”그녀는 정말로 울지 않았다. 지우는 게 정말 아팠지만 참고 견뎠다.“지우자마자 바로 다시 문신할 수 있어? 그림은 이미 선택했는데.”“안 돼. 약국에 가서 소염제 같은 걸 사서 매일 바르고 상처가 완전히 회복해야 다시 문신을 할 수 있어.”강지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좀 이따 퇴근한 다음에 단골 술집에서 봐. 내가 한턱낼게.”진수혁이 말했다.“문신 지우자마자 술 마시면 안 돼.”강지아가 웃으며 대답했다.“그래. 안 마실게.”그녀를 힐
강지아는 오늘 돌아온다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 그저 연회장을 한 번 둘러본 뒤 바로 빠져나왔다. 강지찬과 정유진을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강지아가 집에 들어가자 집사들은 깜짝 놀라더니 얼른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다음 날 아침, 강지아는 선물 꾸러미를 들고 새언니가 있는 마당으로 갔다.“고모!”“고모.”두 아이가 달려와 강지아에게 안겼다.“우리 연우가 더 예뻐졌네. 우빈이도 점점 귀여워지고 있어.“귀여운 게 아니라 멋진 거지!”강우빈이 가슴을 치며 말했다.“그래그래, 멋지네. 역시 우리 우빈이야!”녀석은 거만한 수탉처럼 가슴을 앞으로 내밀며 어깨를 쭉 폈다.“새언니, 이 녀석 누구를 닮은 거예요? 새언니도 아닌 것 같고 우리 오빠도 닮은 것 같지 않네요.”정유진은 호호 웃었다.“어렸을 때 오빠 사진 봐봐. 가슴을 저렇게 펴는데 꼬리가 있었더라면 하늘 높이 치켜올렸을 거야. 두 남매 모두 네 오빠 닮은 것 같아. 어쨌든 나는 아니야.”그러자 연우가 말했다.“내 미모는 그래도 엄마를 더 많이 닮았지.”집안 분위기는 아주 화기애애했다.하인들이 아이들에게 아침을 먹이기 위해 데리고 간 후에야 강지찬이 입을 열었다.“어젯밤에 돌아온 거야? 연회에 갔었어?”강지아는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귀신은 속여도 우리 오빠는 못 속인다니까. 가서 한 번 둘러보고 나왔어.”“볼 게 뭐가 있다고?”강지찬이 어두운 안색을 보이자 정유진은 혹시라도 강지아가 서운해할까 봐 얼른 강지찬을 툭 친 뒤 화제를 돌렸다.“방씨 아주머니가 아침에 네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좋아하는 크리스털 찐만두를 했어. 오랜만에 먹는 거지?”강지아는 정유진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새언니, 내 눈치 보지 않아도 돼요. 난 괜찮아요.”아침밥을 먹은 뒤 강지아는 잠깐 눈을 붙이고 나서 집을 나섰다.진수혁의 기존 문신 가게는 오래된 동네에 있었기에 지금은 대부분 철거했다. 그러면서 진수혁도 이사를 가게 되었다.가게 때문에 형편이 빠듯해 강지아의 빈 집에서
최신애가 깨어났을 때 온유한과 현채영은 옆에 없었고 임유희만 그녀 옆을 지키고 있었다.“유한이는?”“유한 오빠는...”임유희의 안색이 안 좋았다.“접대가 있다며 현채영 씨를 데리고 갔어요.”화가 난 최신애는 또다시 기절할 뻔했다.“친엄마가 기절했으면 병원에서 효도하고 반성할 생각은 안 하고 또 그 천한 년을 데리고 술 마시러 갔다고?”최신애는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았고 머리도 어지러웠다.옆에 있던 임유희가 그녀를 위로하며 말했다.“어머님, 진정하세요. 유한 오빠 아마 중요한 술자리가 있어서 그런 것일 거예요. 어머님의 혈압이 낮아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갔어요.”“내가 죽어야만 나를 엄마라고 생각할 것 같구나!”임유희도 그녀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몰랐다.본인도 매우 슬펐기 때문이다.그녀도 아무런 명분 없이 온씨 저택에 머무른 것을 매우 후회하고 있었다.그녀와 현채영이 한집에 사는 것을 아는 외부 사람들이 뒤에서 어떻게 비웃을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중요한 것은 온유한이 현채영을 데리고 다니면서 사람들 눈에 자주 띄었지만 정작 본인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현채영 같은 여자와 비교당한 생각만 하면 임유희는 속이 울렁거렸다.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현채영에게 졌다는 것이다.강지아에게 진 것은 인정할만했다. 막강한 강씨 가문이고 온유한과는 어릴 때부터 친했기에 그럴만하다고 생각했다.하지만 현채영은?집안이 망해 명예도 없는데 온유한은 그녀를 보물처럼 아끼고 어디나 데리고 다닌다.임유희는 손톱이 손바닥에 박힐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연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고 서울의 명망 있는 대갓집 규수들은 거의 다 왔다.강지찬은 정유진을 데리고 왔고 한규진도 연예계에서 잘나가는 아역 배우였던 여자친구와 함께 왔다.최의현은 약혼녀를 데리고 왔고 최금성은 당연히 화령을 데리고 왔다.온유한이 현채영과 함께 나타나자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쏠렸다.이 자리에 현채영의 옛 애인도 있었기 때문이다.반면 온유한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현
대화를 나눈 후에야 온유한은 강지아에게 문신해준 사람이 진수혁이라는 것을 알았다.그녀가 타투이스트와 친구가 된 것을 온유한은 모르고 있었다.“지아가 그쪽 이름을 문신으로 새긴 거 보면 많이 사랑한 것 같은데 왜 헤어진 거야?”온유한은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지아에게 내가 어울리지 않으니까.”맥주를 다 마신 뒤 온유한은 다시 집으로 돌아갔고 진수혁은 쓰레기를 치운 뒤 샤워를 했다.진수혁은 이 집에 살고 있긴 했지만 강지아의 안방이 아니라 게스트 룸에 묵었다.샤워를 마친 뒤 강지아에게 문자를 보냈다.[네 전 남자친구와 한바탕 싸웠어.]강지아에게서 바로 답장이 왔다.[누가 이겼어?][당연히 내가 이겼지, 네 전 남자 친구 몸도 별로 안 좋았어. 반쯤 취했거든.][앞으로는 손 쓰지 마. 감당 못 하니까.][마음이 아픈 거야?][내가 마음 아플 게 뭐가 있겠어. 진작 헤어진 사람인데.][언제 돌아와? 단골 술집 가서 술이나 한잔하자.][곧 갈 거야, 돌아가면 연락할게.]이날 밤 온유한과 현채영 두 사람 모두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다음 날 오후가 되어서야 온씨 저택에 얼굴을 비쳤다.현채영이 종이백을 들고 있는 걸 보니 쇼핑을 하고 온 모양이었다.임유희를 본 현채영은 반갑게 인사했다.“임유희 씨, 퇴근했나 봐요? 오늘 쇼핑하다가 임유희 씨와 잘 어울리는 치마가 있어서 샀어요.”현채영은 치마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마음에 드는지 한 번 봐요.”이런 체면치레에 임유희는 순간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아니요. 괜찮아요.”약간 울먹거리는 임유희의 목소리에도 현채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우리 사이에 왜 예의를 차리고 그래요. 이 치마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산 거예요. 유희 씨가 나보다 날씬해서 안 입으면 나도 못 입는단 말이에요. 나와 유한 씨가 특별히 임유희 씨를 위해 산 건데.”그러자 옆에 있던 최신애가 종이봉투를 바닥에 내던지며 말했다.“누가 이따위 치마가 필요하대? 너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지? 온유한이
임유희가 돌아오자 최신애는 얼른 하인더러 저녁 식사를 차리라고 지시했다.마침 현채영이 없으니 임유희와 온유한에게 좋은 시간을 마련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런데 음식이 다 나오기도 전에 온유한이 술을 마시러 나가자 임유희도 밥을 먹지 않고 바로 방으로 들어갔다.최의현과 단둘이 술을 마시기로 약속한 온유한인지라 강지찬을 부르지 않았다.“현채영을 집으로 데려갔다면서?”“응.”최의현은 순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그럼 집안이 시끌벅적하겠구나, 임유희에 현채영까지.”술을 한 모금 마신 온유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룸을 예약하지 않고 밖에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며칠 후면 지찬이네 아들 생일인데 갈 거야?”온유한은 양복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최의현에게 건넸다.안에는 순금에 보석을 박은 금 자물쇠가 들어있었다. 뭘 선물해야 좋을지 몰라 비싼 것으로 선택했다.선물을 받은 최의현이 물었다.“안 갈 거야? 지아가 올지도 모르는데.”술을 마시던 온유한은 한참 뒤에야 말했다.“안 가.”최의현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너 설마 진짜로 현채영과 그런 사이야? 일부러 네 엄마 화나게 하기 위해 만나는 줄 알았는데... 아니,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인데?”온유한은 술을 한 모금 더 마신 후 말했다.“지아와 진작 헤어졌고 강씨 가문과도 인연을 끊었는데 내가 가서 뭐해?”“너 이 자식...”최의현은 당장이라도 욕설을 내뱉을 기세였다.“너 그냥 화가 나서 이러는 거지?”온유한이 피식 웃었다.“서원준과 약혼하면 내가 큰 선물 보낼게.”“너 정말 미쳤구나.”최이현이 한마디 했다.두 사람은 적당히 마신 후, 에이프릴 홀에서 나왔다. 시계를 보니 아직 열한 시가 되지 않았다.최의현은 약혼녀의 전화를 받고 먼저 가버렸고 온유한은 차 열쇠를 운전 기사에게 건넸다.관자놀이를 주무르며 눈을 감은 온유한은 집만 생각하면 짜증이 났다.“오늘은 집에 가고 싶지 않아요.”운전 기사는 백미러로 그를 힐끗 쳐다본 뒤 말했다.
현채영은 두 손가락으로 카드를 집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어머님, 카드 안에 얼마 있는데요?”“20억.”현채영이 입을 삐죽거리자 최신애가 냉소를 지었다.“왜 적어? 네 집에 20억은커녕 2천만 원이라도 있긴 해?”현채영은 어깨를 한 번 들썩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어머님, 제가 바보 같아 보이나요? 유한 씨에게 시집오면 온씨 가문 사업이 모두 내 것이 될 텐데 고작 20억으로 유한 씨를 포기하라고요?”그러자 최신애가 현채영에게 삿대질하며 말했다.“유한이에게 시집가고 싶어? 꿈 깨! 눈치가 있으면 돈 들고 꺼져.”현채영은 카드를 최신애 앞으로 밀며 말했다.“제가 나갈지 말지는 어머님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 유한 씨가 결정하는 거예요.”“너!”이때 마침 현채영의 휴대전화가 울렸다.전화를 받은 현채영은 전화기 너머의 사람을 향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오 대표님이시네요? 오랜만이에요. 오 대표님... 생각이요? 당연히 했죠. 너무 보고 싶어요... 저녁이요? 알겠어요. 그럼 저녁에 뵐게요.”최신애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다.“너! 너 다른 남자와 노닥거리는 걸 유한이 알아?”현채영이 웃으며 말했다.“어머님, 유한 씨는 당연히 모르죠. 하지만 오 대표님은 그저 친구일 뿐이에요. 오랜만이라 만나서 술 한잔 마시는 거니까 유한 씨도 뭐라고 하지 않을 거예요.”이런 여자를 온유한이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집으려 데려왔다니! 최신애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정말 가문이 망하는 꼴을 보고 싶어 환장했나...“너 이거, 이거...”화가 난 최신애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도 잇지 못했다.“유한이에게 네 민낯을 똑똑히 알리고 말 거야. 널 내쫓게 할 거야.”그 말에도 현채영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대꾸했다.“말하세요. 유한 오빠가 어머님을 믿을까요. 아니면 저를 믿을까요?”최신애는 말문이 막혔다.오후에 꿀잠을 잔 현채영은 온유한이 퇴근하기 전에 메이크업을 하고 집을 나섰다.온유한이 돌아오자마자 최신애는 바로 가서 고자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