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앞에 있던 정유진은 결국 발걸음을 돌리고 돌아서서 자리를 떴다.대문에서 사람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을 본 방경숙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조금 전, 누가 온 거 아니에요?”문밖을 지키던 하인이 말했다.“사모님이 왔었어요.”방경숙의 얼굴에 기쁨의 희열이 넘쳤다.“그럼 사모님은요?”“다시 갔어요.”말을 들은 임미연은 조심스럽게 강지찬의 눈치를 살폈다.하지만 아예 못 들은 사람처럼 행동하는 강지찬에 임미연은 참지 못하고 입꼬리를 올렸다.정유진은 술집에 가서 술을 여러 병 주문했다.마시기 전에 임우연에게 전화를 걸어 강지찬의 인수인계를 맡겼고 앞으로 회사 일도 강지찬에게 직접 보고하고 내일부터는 K그룹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휴대폰 너머로 임우연이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정유진은 전화를 끊었다.그리고 옆에 서 있는 장형준에게 말했다.“오늘 밤 내 옆에서 마지막 근무를 하고 내일은 그 사람 곁으로 돌아가세요.”“사모님, 왜 대표님과 이야기하지 않는 거예요?”장형준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정유진은 아무 말 없이 웃으며 술잔을 기울였다.감히 물을 수가 없었다.그렇게 많은 일을 겪었지만 지금의 오히려 겁쟁이가 되었다.그녀는 강지찬에게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혹시라도 그의 입에서 무정한 말이 나올까 봐 두려웠다.그렇게 한 잔 한 잔 술잔을 비웠다.주량이 센 정유진은 취하지 않을까 봐 일부러 독한 술을 주문했다.그런데 반병밖에 안 마셨지만 벌써 취했다.이때 한 남자가 그녀 앞에 앉았다.“강지찬?”머리를 세게 흔들어 정신을 차리고 눈앞의 사람을 보았다.“아, 또 당신이야.”장형준은 강지현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돌아서서 나가 전화를 걸었다.“대표님, 사모님이 많이 취했어요.”강지찬의 목소리는 기복이 없었다.“네가 있잖아.”장형준이 말했다.“둘째 도련님이 왔어요.”전화기 너머로 잠깐 침묵이 흐르더니 강지찬이 전화를 끊었다.술집으로 돌아오니 계산을 마친 강지현이 정유진을 안고 나오고 있었다.“둘째 도련님, 사모님은
강지찬이 사람들 앞에서 정유진 망신 주는 것과 다름없다.정유진을 보는 이들의 눈빛이 확연히 달라졌다.“새언니, 괜찮아?”강지아가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달려들어 임미연의 얼굴을 찢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다.괜찮을 리가 없다.정유진은 곧장 강지찬과 임미연을 향해 걸어가더니 옆 종업원 쟁반에 담긴 샴페인 한 잔을 집어 들어 강지찬의 얼굴에 뿌렸다.샴페인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상대방의 얼굴에 뿌리는 동작은 정말 능숙했다.온 장내가 떠들썩했다.“정유진. 미쳤어?”임미연이 비명을 지르며 옆의 사람에게 수건을 가져오라고 했다.내연녀에게 이런 행동을 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쓰레기 같은 남자에게 직접 이런 행동을 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의아해하는 마음과 함께 현장에 있던 사모님들은 또 한 번 호들갑을 떨었다. 여기 있는 여자들 중 또 누가 이런 패기를 가졌는지 묻고 싶었다.이 바닥에 더럽지 않은 남자가 몇 명 있겠는가? 바람피우는 사람은 비일비재하다.그녀들이 쓰레기 같은 남자를 미워하지 않아서일까?당연히 미워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감히 남자에게 함부로 하지 못하고 내연녀를 괴롭힐 수밖에 없었다.남편의 불륜에 시달리던 여자들은 정유진의 행동에 피가 끓어올랐고 덩달아 같이 손에 땀을 쥐었다.강지찬이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그 누구도 알고 있다.깜짝 놀란 강지아는 혹시라도 누가 새언니를 괴롭힐까 봐 얼른 다가와 정유진의 편을 들었다.웨이터가 재빨리 수건을 가져오자 임미연이 손을 뻗기도 전에 강지찬이 덥석 잡았다.그리고 얼굴을 닦으며 차가운 시선으로 정유진을 바라봤다.이 틈에 임미연이 말했다.“정유진 씨. 너무한 거 아니에요?”“여기에 네가 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강지아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임미연을 노려봤다.“닥쳐! 안 그러면 다음엔 너에게 샴페인을 뿌릴 테니.”임미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그녀는 정유진이 두렵지 않지만 유일하게 두려운 사람은 강지아이다.강지아는 답답해 죽을 것만 같았다. 기다리던 오빠가 겨우 돌아왔는데 인제
앞에 놓인 손을 본 정유진의 표정은 조금씩 차가워졌다.잠깐 정말로 손을 올리고 싶었지만 강지찬이 그렇게 한다고 도저히 똑같이 할 수 없었다.많은 사람들이 이쪽을 보고 있고 댄스 플로어 쪽에서도 한기를 띤 시선이 그들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유진 씨, 같이 춤을 출까요?”강지현이 말했다.“아니요. 관심 없어요.”정유진이 대답했다.정유진은 춤에 관심이 없을뿐더러 강지현과 강지찬의 싸움에도 관심이 없다.하지만 강지현은 오늘따라 고집을 부렸다.“나를 이용해도 돼요. 괜찮아요.”어리둥절한 정유진은 하마터면 그 말에 동요되었다.하지만 머릿속에 조예원과 아이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여전히 독한 마음을 품을 수 없다.“아니에요.”강지현을 또 한 번 거절한 정유진은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세수를 한 후, 휴지를 뽑아 립스틱을 닦았다.갑옷을 입은 듯, 옷이 천근처럼 무겁게 느껴져 세면대를 짚은 채 숨을 헐떡였다.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나더니 곧이어 임미연의 작고 야리야리한 얼굴이 나타났다.득의양양한 승리의 미소를 띤 작은 얼굴이다.“내가 그쪽이었다면 오늘 밤 사람들 앞에서 창피당하지 않았겠죠.”임미연의 말에 정유진은 허리 펴고 거울로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만약 내가 너라면 정실부인 앞에 와서 위세를 부리지 않았겠지. 임미연 씨, 보아하니 아직도 내연녀가 되기에는 부족한 것 같네.”“무슨 뜻이에요?”정유진은 차가운 얼굴로 뚫어지게 바라봤다.“내가 이혼하지 않으면 너는 평생 볼썽사나운 내연녀로 살 수밖에 없어. 너의 배 속의 아이도 평생 사생아라는 뜻이야.”임미연은 코웃음을 쳤다.“아이고. 난 또 얼마나 대단한 줄 알고. 정유진 씨, 자신이 뭐라도 되는 줄 알아요? 이혼하기 싫으면 안 하게 될 것 같아요? 잘 들어요. 지찬 오빠가 약속했어요. 그쪽과 이혼하고 나와 결혼하겠다고요.”말하면서 시위하듯 반듯한 배를 내밀었다.“뱃속에 아들이에요.”“그럼 해볼까. 내일 오전 9시. 가정 법원 앞에서 보자고 전해줘.”말을 마친 후 가방을
강지찬은 한참 숨을 고른 후에야 좀 나아졌다. 하지만 정유진은 이미 자리를 떴다.입꼬리를 올리더니 옷매무시를 가다듬은 후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한규진 등 여러 남자들이 같이 모여 있었고 다 그의 사람들이라 말도 거리낌 없이 했다.“대체 무슨 짓이야? 정말 형수님과 헤어질 거야?”최의현은 마음을 가다듬고 말했다.“형수님이 얼마나 고생했는데. 금방 사고 났을 때 하루 종일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잤어. 비쩍 말랐는데 아직도 살이 안 찌잖아.”경은우도 말했다.“바깥에 떠도는 유언비어는 사실이 아니야. 형이 없는 동안 형수님은 본가에도 가지 않고 계속 친정에서 살았어.”한규진은 혀를 찼다.“내가 볼 때 지금 저 여자는 너무 평범해. 너의 마누라가 앞에 서면 하녀 같잖아. 역시 너의 마누라가 제일 예쁘고 패기가 넘쳐.”강지찬은 저마다 한마디씩 정유진을 거드는 말에 대꾸도, 반박도 하지 않았다.그들의 말이 다 끝나서야 입을 열었다.“하지만 이 여자는 날 즐겁게 해 주잖아. 남자는 말이야, 즐겨야지? 불을 끄면 어차피 다 똑같아.”묵묵히 술을 마시던 온유한은 순간 정색했다.“아무리 그래도 형수님과 아이에게 너무 미안하잖아.”이 말이 나오자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하지만 강지찬은 화를 내지 않았고 전혀 개의치 않아 하는 것 같았다.모두가 강지찬이 아내와 사이가 틀어져 이혼할 것이라 생각했다.정유진은 이날 밤 또 잠을 이루지 못했다.요 며칠 동안 잠을 잘 못 잤지만 오늘 밤 술을 마셔도 전혀 졸리지 않았다.다음날 파운데이션을 듬뿍 발라 다크서클을 가린 탓에 얼굴에 핏기 하나 없이 잘 다듬어진 인형 같았다.곧 새해가 다가오는 데다 요 며칠 날씨도 추워 이명자와 정명학은 외출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외부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직 모른다.엄마의 관심 어린 눈빛에 정유진은 미안해서 견딜 수 없었다.부모님께 강지찬과의 이혼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아이에게 엄마, 아빠가 함께 있지 않을 거라는 걸 어떻게 말해야 할까?“어젯밤 잠을 못 잔
정유진은 가정 법원 앞에서 9시 반까지 강지찬을 기다렸지만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이때 임우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정 대표님, 강 대표님과 연락이 안 되는데 어떡하죠? 회의가 곧 시작됩니다.”정유진 그제야 오늘 임직원 회의가 열 시에 시작한다는 것이 생각났다.강지찬이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이혼하러 오지도 않고 회사도 가지 않았다.중요한 것은 오늘 회의가 아주 중요하다. 몇 가지 계속 논의된 문제를 대표이사가 결정해야 하는 날이다.“그 사람 지금 어디에 있는데요?”임우연은 잠깐 멈칫하더니 말했다.“지금 쇼핑몰에 있다고 들었습니다.”그 인간이 이혼하러 오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 정유진은 차를 몰고 회사로 향했다.이번 임직원 회의에는 최의현도 있었다. 몇몇 늙은 어르신들은 말다툼을 벌이다가 화가 나서 의자를 걷어차려 했다.정유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핏대를 세운 채 말하는 고지식한 늙은이들의 의견을 부결시켰다. 늙은이들이 뭐라고 말해도 그녀는 결정한 방안을 단호하게 밀어붙였다.영감들을 강력한 기세로 제압하는 정유진의 모습에 최의현은 왠지 강지현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이것은 분명 천생연분이다.최의현은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강지찬에게 전화를 걸어 쉴 새 없이 말했다.“나 진짜 정유진 같은 여자는 처음 봤어. 회의할 때 너처럼 말이 많지 않은데 본인이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절대 결정을 바꾸지 않아. 그 늙은이들이 미쳐 날뛰는데 대표이사가 몇 마디로 최종 계획을 확정하니까 말이야. 강 대표. 형수님 정말 좋은 사람인 것 같아. 그때의 네 모습과 많이 닮았어.”목걸이를 고르고 있는 임미연을 멀찌감치 바라보는 강지찬은 정유진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고 대신 화제를 돌렸다.“강원훈은 회사에 있어?”“아니. 요즘 회사 미팅에도 참석하지 않아. 왜?”“아니야. 그냥 좀 물어보느라”최의현이 언제 회사에 올 거냐고 묻자 강지찬은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정유진은 점심에 일이 있어 식당에 가지 못했다. 대신 비서가 그녀에게 점심을 배
강지찬이 임미연에게 대저택을 사준 것으로 서울이 떠들썩했고 이내 정유진의 귀에 들어갔다.강지아는 화가 나서 죽을 지경이다.“그 천한 년에게 왜 그렇게 좋은 집을 사주는데요? 오빠가 언니에게는 집을 사준 적이 없잖아요.”직설적으로 말하는 이 계집애 때문에 정말 마음이 불편했다.“새언니, 이 바닥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언니가 가장 억울한 정실부인이라고 해요. 안 되겠어요. 새언니. 내가 집을 뺏어올게요. 그 집은 원래 언니 거예요.”정유진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도 않고 말했다.“시간 없어.”강지아는 고집을 꺾지 않고 화가 난 얼굴로 온유한을 찾아갔다.온유한이 수술 중이라 강지아는 그의 사무실에서 기다렸다.심심하던 차에 서랍에서 휴대전화 진동음이 들렸다.온유한이 수술할 때면 휴대전화는 학생이 가지고 있거나 사무실에 놔뒀다.강지아는 별생각 없이 서랍을 열고 핸드폰을 꺼냈다.발신자는 주유정, 온유한의... 첫 여자친구이자 첫사랑이다.강지아는 순간 뜨거운 냄비를 만진 것처럼 이내 휴대폰을 서랍에 던졌다.진동이 멈춘 뒤 휴대전화가 다시 한번 울렸다. 아무도 받지 않아 메시지가 온 것 같다.강지아의 봐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다가 결국 호기심에 못 이겨 휴대전화를 꺼냈다. 능숙하게 비밀번호를 입력해 잠금을 풀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주유정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나 귀국했어. 환영해 줄 거지?]사실 지난번에 강지아는 온유한이 첫사랑과 연락을 끊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주유정의 전화번호를 지우지 않고 있었고 카톡도 차단하지 않았다.대화창을 위로 올리자 온유한과 주유정의 추석 인사 대화 내용도 볼 수 있다.물론 그저 풍성한 한가위 보내라는 내용이었다.잠깐 생각에 잠겼던 강지아는 결국 메시지를 지우고 통화 기록도 지운 뒤 휴대전화를 다시 서랍에 넣었다.수술을 마친 온유한이 강지아가 왔다는 말을 듣고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소녀는 이미 자리를 뜬 상태였고 책상 위에는 다 먹지 못한 간식이 놓여 있었다.강지아는 지난번에 본가에서
새집으로 이사 온 강지아는 출근 중인 정유진을 한사코 괴롭혔다.새집은 상권에서 가장 번화한 큰 평수 아파트이다. 그녀가 퇴원한 후 강지찬이 선물한 것이다.이런 핫플레이스에 100평 남짓한 아파트는 적어도 몇십억 원이다.K그룹에서 그리 멀지 않다.“이렇게 좋은 곳에 혼자 살면 무섭지 않아?”강지아는 베개를 껴안고 뾰로통한 얼굴로 말했다.“그 사람들 보고 싶지 않아요. 강지찬도 보기 싫어요.”점심시간이 지났지만 정유진은 보아하니 아직 먹지 않은 것 같다.“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 배달시킬게.”“화가 나서 배가 고프지도 않아요.”강지아가 이렇게 말했지만 정유진은 그녀가 좋아하는 반찬 두 개를 시켰다.“방씨 아주머니더러 하인 두 명 보내 달라고 할까. 여기에 혼자 어떻게 살아?”강지아야말로 진짜 재벌 집 아가씨이다. 정유진은 그래도 토마토 계란볶음 정도는 만들 줄 알지만 강지아는 가스레인지를 어떻게 켜는지도 모르는 평생 부엌에 들어온 적이 없는 아가씨이다.“싫어요. 매주 사람을 보내 청소만 하면 되니까 혼자 살고 싶어요.”강지아는 아직도 화가 잔뜩 난 상태이다. 강지찬뿐만 아니라 온유한에 대한 화도 있다. 무슨 말을 하든 하루 종일 싫다는 말만 하고 있다.“새언니, 얼른 가서 오빠를 되찾아와요.”강지아는 정유진의 팔을 안으며 불쑥 말했다.그녀의 성격상 다른 여자의 남자를 뺏는 일을 할 수 없다. 비록 이 남자가 지금 그녀의 남편일지라도 말이다.“나는 내 것만 챙겨. 뺏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이 말에 강지아는 무슨 생각이 든 듯 무릎을 껴안고 중얼거렸다.“내 것만 챙겨... 뺏는 일은 할 필요가 없어...”요 며칠 매일 외출한 탓인지 임미연은 태기가 발동하여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강지찬이 외출한 틈을 타 개인 병원에 검사받으러 간다는 것을 감히 강지찬에게 말하지 못했다.병원에서 나온 임미연의 얼굴은 창백해 보였다. 유산기가 보인다는 의사의 말에 임미연은 무서워서 걸을 수조차 없었다.낙태 방지약 한 봉지를 들고 차에 오르
정유진은 강지아가 밥을 먹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자리를 떠서 연우 인테리어에 들렀다.현재 연우 인테리어는 기본적으로 조우민에게 맡겼고 정유진은 가끔 돌아와 회사 상황을 확인할 뿐 회사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K그룹에 할 일이 많이 남았기에 아예 식당을 찾아 밥을 먹은 뒤 야근하러 가려고 했다.혼자서 먹는 밥이었기에 좋아하는 메뉴 두 개로 충분했고 음식도 깔끔한 편이었다.다만 혼자만의 조용함은 오래 유지하지 못했고 몇 입 먹지도 않았는데 맞은편에 한 사람이 왔다.강지현이다.정유진은 짐짓 놀랐지만 계속 밥을 먹었다.강지현은 컵에 물을 따라 마시더니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강지찬을 빼앗아 올 수도 있어요.”정유진은 순간 멍해졌지만 강지현은 계속 웃으며 말했다.“농담 아니에요. 진심이에요. 강지찬을 사랑하잖아요. 내가 뺏어줄게요.”정유진은 이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밖은 잔뜩 어두워져 있었고 식당 안의 불빛 때문인지 뭔지 몰라도 강지현의 안색은 조금 초췌해 보였다.몸도 얼굴로 깡마른 그는 강씨 가족 특유의 깊은 눈동자가 그의 얼굴에서는 구멍이 두 개 나 있는 듯했다.정유진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괜찮아요. 필요 없어요.”잠시 멈칫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본인 몸 잘 챙겨요. 옆에 아이를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도 잊지 말고요.”그녀를 바라보는 강지현의 눈빛은 정유진이 알 수 없는 미련과 아쉬움이 서려 있었다.그는 아이에 대해 말을 하지 않고 하던 말을 계속했다.“농담이 아니에요. 진짜로 도와줄 수 있어요. 그동안 강원훈을 미행했는데 조금 전 강원훈이 임미연을 만나러 간 것을 확인했어요. 임미연의 아이에게 문제가 있는 듯 보여요. 아무도 몰래 아론 병원에 갔어요.”그 말을 들은 정유진의 머릿속도 빠른 속도로 회전했다.“강원훈이 임미연을 만나러 갔다고요? 두 사람이 언제부터 만났는데요?”임미연이 예전에 강씨 본가에 잠시 산 적은 있지만 강원훈과는 전혀 딴 세상 사람이라 친분이 있을 리 만무했다.강지
“지찬아, 유한이가 미친 거 아닐까? 임유희를 집에서 쫓아내고 현채영을 온씨 저택에 데려갔어. 최신애가 엄청 화를 낼 것 같은데?”최의현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현채영에게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는지 몰랐네... 그때 지아를 신경 쓰는 것보다 더...”강지찬이 힐끗 바라보자 최의현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지만 이내 참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임유희 때문에 온씨 가문과 임씨 가문 사이도 안 좋아졌어. 임씨 가문이 체면을 완전히 구겼잖아. 아마 이번 기회에 단단히 복수하려 할 거야. 그 임씨 부부도 생각이 있는 어른들은 아닌 것 같아. 온유한이 임유희에게 관심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든 딸을 이용해 온씨 가문에 바싹 달라붙어 가문의 지위를 올리려 했으니 말이야. 하지만 최신애만 그걸 모르고 어떻게든 유한이와 임유희를 엮어주느라 골머리를 앓았지. 온유한은 임씨 가문의 속셈을 알았을까?”한규진이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코웃음을 쳤다.“그 자식 계속 약속 펑크내서 이제 어떻게 생겼는지도 까먹을 것 같아.”경은우가 말했다.“유한이 형에게 다른 생각이 있는 것일 거야. 유한이 형이 절대 함부로 누구를 대하는 사람이 아닌데 요즘 하는 행동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니까.”최의현이 말했다.“며칠 전 만났을 때 임씨 가문 얘기를 몇 마디 했는데 알아들었는지 모르겠어.”몇 사람이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강지찬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밤 10시가 넘은 시각. 하루 종일 잠을 잔 현채영은 가방을 들고 외출 준비에 나섰다.“잠깐!”거실에 앉아 있던 최신애는 현채영의 화려한 차림을 보고 화를 냈다.온유한이 석식이 있어 집을 비우니 현채영은 한밤중에 외출을 하려 했다.현채영이 뒤돌아서서 웃으며 말했다.“어머님, 무슨 일 있으세요?”“어디 가는 거야?”“친한 여자친구들과 술 약속이 있어 오늘 밤엔 안 들어올 거예요.”그 말에 최신애는 바로 화를 냈다. “친한 여자친구들? 부잣집에 시집갈 생각밖에 안 하는 날라리 여자들?”현
임유희도 온유한에게 쫓겨난 후 몸져누워 열이 끊이질 않고 있었다.임유희는 이제 주위에서 웃음거리가 됐다.이 때문에 임씨 부부와 임유희 오빠는 온씨 가문에 화가 많이 난 상태였다.바쁜 일과를 마치고 병원으로 향한 온유한은 문 앞에서 온혁진과 최신애가 다투는 소리를 들었다.“그때 임유희를 집에 데려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잖아...”싸움에 휘말리기 싫은 온유한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병실에서 최신애가 병상을 두드리며 큰소리로 외쳤다.“그럼 내 탓이란 말이에요? 당신 하나뿐인 아들이 현채영 그 여자와 엮이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요?!”“당신이 그렇게 만든 거잖아? 강지아가 어때서? 본인 마음에 안 든다고 그렇게 하니까 그렇지! 최신애, 우리 온씨 가문을 망치려고 작정한 거야?”온혁진의 말을 들은 최신애는 기가 막혔다. 자기가 평생 사랑한 이 남자가 그녀를 이렇게 생각할 줄 몰랐다.“내가 그런 거라고요? 다 유한이를 위해서 그런 거잖아요!”온혁진은 더 이상 이 일로 최신애와 입씨름을 하고 싶지 않았다.“처음부터 얘기했잖아. 유한이의 일은 본인이 알아서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라고. 당신이 기어코 유한이와 지아를 갈라놓으니 이렇게 된 거잖아. 강씨 가문과 원수가 되었고 임씨 가문의 미움도 샀어. 만약 임씨 가문이 그때 강지찬처럼 작정하고 우리를 괴롭힌다면 이번에는 누구에게 부탁해서 도와달라고 할 거야?”집안 사업과 관련된 일이었기에 온혁진의 말에 최신애도 바짝 긴장했다.“투자자들도 돈을 더 벌기 위해 투자하는데 임씨 가문 때문에 우리에게 뭐라고 하겠어요?”“당신이 뭘 알아? 정책이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어. 우리보다 우수한 의료 회사들도 점점 더 많아지고 있고. 경쟁업체에서 얼마 전에 외국에서 새로운 의료기기를 도입했다고 들었어. 우리가 올해 주력으로 추진하려고 했던 프로젝트였는데...”온혁진은 말을 할수록 화가 났다.“이런 얘기를 당신에게 해봤자 당신이 뭘 알겠어. 어쨌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임씨 가
강지아도 명성 빌딩에 오래 묵을 생각이 없었기에 아침을 먹자마자 서원준과 함께 집을 나섰다.현관문 너머로 서원준의 목소리를 들은 온유한은 그제야 어젯밤에 서원준도 이 이곳에 머물렀다는 것을 알고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벽을 내리쳤다.한편 기분이 좋아진 서원준은 일부러 온유한을 도발하기 위해 한마디 했다.“지아야, 이 집 어차피 비어 있는데 우리가 이사 오는 게 어때?”강지아는 서원준을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꿈 깨.”서원준이 일부러 다가가서 강지아를 품에 꽉 껴안자 강지아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뭐 하는 거야?”서원준은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내 여자친구에게 뭘 하겠어? 어젯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중요한 걸 못했네.”강지아가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치며 말했다.“함부로 행동하기만 해 봐!”강지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쳐다보자 무언가를 기대하던 서원준은 순간 주눅이 들었다.이런 상황에 사랑하는 남녀들이라면 분명 저도 모르게 끌려서 그다음 진도로 넘어갔을 것이다.놀라움만 가득한 눈빛으로 서원준을 바라보는 순수한 강지아에 그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손을 놓았다.하긴 강지아가 왜 고백을 받았는지 서원준은 잘 알고 있었다. 그저 온유한을 속이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서원준은 아쉬운 마음에 강지아의 볼을 꼬집은 뒤 말했다.“내일 나 출장 가. 저녁 비행기인데 같이 갈래? 꽤 재미있는 곳인데.”서원준은 연예계 활동 때문에 출장을 가야 했다. 강지아가 연예인은 아니지만 연예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기에 거기에 가면 많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안 가. 요즘 작업실에서 현지 수주를 받은 게 있어서 자리 비우면 안 돼.”“알았어. 그럼 빨리 갔다 올게.”두 사람 모두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매일 만날 수는 없었다.오늘 서원준은 석식 약속이 있었고 내일도 바쁘기에 출장에서 돌아온 뒤에야 강지아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차에 타기 전에 서원준은 우물쭈물하더니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한마디 했다.“여기
오늘 기분이 좋은 서원준이 술을 너무 많이 마시는 바람에 강지아는 진수혁의 도움을 받아 서원준을 명성 빌딩에 데려다줬다. 그나마 여기가 가장 가깝기 때문이었다.진수혁은 이미 자신의 물건을 모두 옮겨갔기에 집은 예전 상태로 되었으며 먼지 하나 없이 깨끗이 청소까지 했다.두 사람은 서원준을 게스트 룸, 즉 진수혁이 묵었던 방에 데려다 눕혔다.이불을 끌어안은 서원준은 계속 웃고 있었다.“지아야... 나 너무 좋아... 정말 기뻐...”강지아는 진수혁에게 말했다.“이 집 어차피 비워둘 건데 그냥 있어도 되는데.”“여태까지 묵은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고마워.”진수혁은 부엌을 가리키며 말했다.“전기와 가스 카드는 모두 원래 있던 곳에 놓아뒀어. 비용은 이미 지불했고.”말을 마친 진수혁은 오래 머물지 않고 이내 자리를 떴다.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진수혁은 온유한에게 명성 빌딩에서 이사를 했기에 더는 가지 않을 거라고 메시지를 보냈다.온유한은 휴대전화를 힐끗 본 뒤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병상에 누워있는 최신애는 최씨 가족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울분을 토하기 시작했다.“이 자식 머릿속에 온통 그 여자 생각뿐이야. 우리 온씨 가문과 이 엄마는 안중에도 없다니까! 내가 죽는 꼴을 보고 싶어 그러나 봐. 내가 죽어야 본인을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내 팔자야! 힘들게 키운 아들이 얼마 전까지 멀쩡했는데 지금은 원수나 다름없게 되었어. 하느님, 제가 살아서 뭘 하겠습니까?”온유한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얘기하고 계세요. 야식 좀 사 올게요.”황은숙도 더 이상 여기에 있고 싶지 않았다. 시간은 벌써 한밤중이고 최신애의 하소연을 한참 동안이나 들으니 지칠 대로 지쳤다.“됐어. 나도 금성이 집에 가봐야 해. 유한아, 엄마 화나게 하지 말고 잘 모셔.”황은숙과 최금성은 서둘러 자리를 떴다.병실에는 온씨 모자만 남아 있었다.최신애의 얼굴에 있던 슬픔이 어느새 원망으로 변했다.“왜, 나와 같이 있기도 싫은 거야?”온유한이 말했다.“채영이 집
강지아의 인터뷰는 아주 재미있었다. 사회자가 묻는 말에만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화령이 차를 우리면서 잡담을 나누는 형식으로 인터뷰를 했다. 그러면서 강지아의 다도 실력도 선보이게 되었다.녹화가 끝난 후 점심시간이 되어 화령이 강지아에게 점심을 사주기로 했다.“얼마 전에 온씨 집안이 떠들썩했던 거 알아?”강지아가 고개를 갸웃하자 화령이 말을 이었다.“나도 금성 씨한테서 들은 얘기인데 아직 외부로 알려지진 않은 것 같아.”국물을 한 모금 마신 강지아는 무슨 일이냐고 묻지도, 화령이 말하는 것을 제지하지도 않았다.“두 가지 일이 일어났어. 첫 번째는 최신애가 온씨 가문에서 며느리에게 물려줄 가보를 현채영이 훔쳤다면서 누명을 씌웠지. 그래서 경찰까지 불렀대. 온유한이 최신애와 싸우고 나서 경찰이 갔고 현채영은 별일 없었대. 두 번째 일은 어젯밤 온유한이 현채영을 위해 최신애가 집을 비운 틈을 타 임유희를 온씨 저택에서 쫓아냈고 최신애는 한밤중에 화를 내며 병원에 입원했대.”강지아는 국물을 삼킨 뒤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잘됐네. 두 사람 다 힘든 것보다 낫네. 적어도 현채영 씨는 힘들지는 않으니까.”강지아가 별 반응이 없자 화령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온유한이 많이 변했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강지아가 말했다.“좋은 사람을 만났나 보지 뭐. 현채영 씨, 괜찮잖아.”화령은 온유한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작업실로 돌아온 강지아는 커피 한 잔을 끓였다.서랍을 열어보니 서원준에게 선물할 넥타이를 아직 전달하지 않아 그대로 있었다.나중에 기회를 봐서 그에게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휴대폰이 울려서 수신자를 보니 진수혁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새집을 찾았기에 명성 빌딩에서 묵지 않겠다고 했다.월세도 내지 않고 강지아의 집에 산 것에 대해 저녁을 사겠다고 했다.“남자친구 데려가도 돼?”“당연하지. 단골 술집에서 만나. 사장님더러 십몇 년 동안 간직해온 술을 오픈하라고 해야겠네.”“그래.”강지아
순간 임유희는 오늘 밤 온유한의 손에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천천히 다가가 온유한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했던 임유희였다.임씨 가문이 온유한을 몰아세우면 그녀는 온유한 앞에서 이해심 많은 모습을 보여주며 그에게 점수를 딸 생각이었다.임근우와 장희수도 잘 협조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변고가 생겼다.“콜록... 유한 오빠... 그게...”“봤냐니까?”온유한은 다시 한번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안경을 쓰고 있지 않아 표정이 매우 사나워 보였다.“아니, 아니...”임유희는 미친 듯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눈물을 흘렸다.“방금 본 건 잊어버리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네네, 알겠어요!”임유희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지금 이 순간 온유한의 얼굴이 너무 무서워서 미칠 지경이었다.온유한이 한참 후에야 손을 뗐고 임유희는 숨을 크게 몰아쉬며 바닥에 쓰러졌다.하마터면 온유한의 손에 죽을 뻔했다.이 남자는 더 이상 3년 전 그녀를 설레게 했던 온유한이 아니었다.지금의 온유한은 강지아를 위해 미쳐버린 상태였다.그는 심장이 있는 왼쪽 가슴에 ‘지'자를 문신했다.미친 거 아닐까?너무 무섭다!현채영을 집으로 데려온 목적은 분명했다.강지아를 위해서라면 친엄마도 신경 안 쓰는 사람이다.이런 남자를 그녀가 어떻게 옆에 둘 수 있겠는가?감히 엄두도 못 낼 것이다.임유희는 기다시피 하며 온유한의 방을 뛰쳐나갔다.자기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혹시라도 온유한이 따라올까 봐 서둘러 문을 닫은 뒤 방문을 잠갔다.화장실로 가서 세수를 한 뒤 거울을 보니 목에 빨간 자국이 생겼다.온유한이 진짜로 그녀를 목 졸라 죽일 뻔했다!침대에 몸을 웅크린 뒤 장희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입술을 깨물며 울음소리를 내지 못했다.“엄마, 온유한이랑 결혼하기 싫어. 집에 가고 싶어.”장희수는 지금 한창 신이 난 상태였다. 최신애가 장희수와 친해지기 위해 카드도 많이 양보했다.“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 거야?”장희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
“진짜 열받아 죽겠어. 정말!”화가 난 최신애는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느껴졌다.“엄마인 나를 점점 안중에도 안 두는구나. 같이 지옥에 가자고?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온혁진은 이런 최신애가 너무 귀찮았다. 낮에 임씨 가문 사람들과 만나면 그들은 온유한과 임유희의 혼사를 언제 치를 것이냐고만 물었다.지금 이런 상황에서 온유한이 임유희와 약혼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다.“애초에 임씨 가문을 건드리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잖아. 우리가 오히려 발목이 잡혔어.”온혁진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임씨 가문 사람들에게 어떻게 얘기하는지 모르겠지만 유한이 결혼에 대해 나는 상관하지 않을 거야. 경고하는데 당신도 좀 똑똑하게 굴어, 나중에 이도 저도 아닌 꼴이 되지 말고. 임씨 가문 사람들도 속셈이가 이만저만이 아니야.”최신애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속셈이가 있어 봤자 무슨 속셈이가 있겠어요? 유희를 우리 집 며느리로 들이고 싶은 것뿐이겠죠. 걱정하지 마세요. 유희가 유한이만 바라보고 있으니까요. 임씨 가문도 그저 말로만 재촉하는 것이니 별일 없을 거예요. 게다가 나라고 상관하고 싶겠어요? 현채영 같은 여자가 강지아보다 훨씬 못한데 어떻게 우리 온씨 가문에 들이겠어요? 그런 여자를 들였다가는 서울의 웃음거리가 될 거예요.”온혁진은 골치가 아팠다. 말로는 상관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온유한이 진짜로 현채영과 결혼하려 한다면 절대 허락할 수 없었다.그래서 이 일은 최신애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이날 오후 최신애는 장희수와 함께 미용실에 갔다. 대화가 잘 통했는지 저녁에는 카드 놀이하러 함께 갔다.온유한이 집에 돌아왔을 때, 집에는 임유희만 있었고 현채영은 다른 일이 있어서 현씨 저택으로 돌아갔다.“유한 오빠, 아직 밥 안 먹었죠?”온유한이 ‘응’이라고 대답하자 임유희는 얼른 하인을 시켜 밥을 차리게 하더니 웃으며 말했다.“어머님이 일이 있으셔서 밖에서 저녁 드시고 오겠대요. 아버님도 석식이 있으시다고 했고 현채영 씨도 저녁에 늦게
온유한이 회의를 마치자마자 전성호가 휴대전화를 들고 급히 사무실로 돌아왔다.“선생님, 집에 일이 생겼습니다!”온씨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마당에 경찰차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최신애는 임유희의 손을 잡고 경찰에게 사건 경위를 말하고 있었다.“보석이 박힌 그 장신구를 지금 사람들은 잘 안 써요. 다만 온씨 가문 며느리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물건이라 정말 돈이 급할 때 쓰기 위해 남겨둔 것이에요. 오늘 전문적인 청소 담당자를 불러서 청소를 할 때 금고를 깜빡하고 안 잠근 채 주방에 가서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위층에 올라가 보니 가보와 장신구 몇 점이 보이지 않았어요. 몇천 만원 현금은 그대로 있었고요. 경찰분들, 아마 분명 이런 물건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훔쳐 갔을 거예요. 현채영이 아니면 누구겠어요? 집이 파산해 돈이 부족한 여자예요. 이 여자가 보석들을 방에서 가지고 나오는 것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혹시나 인정하지 않을까 봐 동영상까지 촬영했어요. 증거까지 있는데 계속 발뺌할 수 있을까요?”경찰 몇 명은 서로를 쳐다봤다. 이제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온씨 가문 사모님은 억울한 척하며 말했지만 말 한 마디마다 빈틈이 있었다.진짜로 규칙에 따라 일을 처리한다면 이 집안사람 모두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아야 했다. 그 장신구들의 가격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이 사건의 이상함을 느낄 수 있었다.한창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온유한이 돌아왔다.현채영은 그가 돌아오자 웃음을 지을 뿐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최신애는 흥분하며 앞으로 걸어갔다.“아들아, 마침 잘 왔어. 이 여자 손버릇이 아주 나빠. 빨리 내보내.”온유한은 경찰 몇 명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더니 어두운 얼굴로 최신애를 바라보며 말했다.“돌아오는 길에 대충 들었어요. 하지만 채영이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채영이를 믿어요.”“또 이 여자를 감싸고 도는 거야?!”이렇게 좋은 기회가 눈앞에 있는데 가만히 있을 최신애가 아니었다.“이
현채영이 잠에서 깼을 때 최신애는 점심을 거의 다 먹은 상태였다.“어머니, 점심 먹을 때 부르라니까요. 왜 안 부르셨어요?”최신애는 우아한 모습으로 식사를 하며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알아서 깼잖아?”“그래도 불렀어야죠. 그러다가 배를 곯으면 유한 씨가 어머님을 나무랄 거예요.”최신애는 테이블을 내리치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그리고 현채영이 밥 먹으면서 음식 투정을 하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야채가 너무 많네요. 이 음식은 아무 맛이 안 나요.”최신애는 겨우 화를 참았다.“내가 나이가 들어 입맛이 담백해졌어. 못 먹겠으면 이 집에서 꺼져도 돼. 널 불잡을 사람 아무도 없을 테니.”현채영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유한 씨가 얘기했잖아요. 저는 짭짤하면서도 단 것을 좋아해요. 탕수육 같은 거 좋아하니까 다음번에는 그런 것으로 만들어 주세요.”하인은 최신애의 눈치를 살피며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현채영은 젓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더니 한마디 했다.“왜요? 밥 먹는 것조차 어머님이 허락해야 먹을 수 있는 거예요?”현채영이 젓가락을 두드리는 소리에 최신애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젓가락을 테이블에 ‘탁’하고 놓았다.“네가 뭔데 감히 내 앞에서 테이블을 내리쳐!”최신애가 격노했다.“현씨 집안이 이 지경으로 전락한 게 다 이유가 있었어. 정말 교양이 하나도 없네!”그 말에도 현채영은 화를 내는 대신 ‘흥’하고 콧방귀만 뀌었다.“최씨 가문 식구들은 교양이 있어서 성격이 이렇게 모났나 봐요. 유일한 친아들마저도 엄마라고 부르지 않고.”“너 정말...”최신애는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여봐라, 어른은 안중에도 없는 이 여자를 쫓아내라.”“누가 감히 할 수 있는지 나야말로 보고 싶네요.”현채영은 절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어머님,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제가 여기에 있는 걸 힘들어하면 유한 씨도 같이 나간다고 했어요. 집도 이미 다 장만했어요.”“뭐라고?”최신애는 어리둥절해 했다.“너에게 집도 사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