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진은 강지찬이 양보할 줄은 정말 몰랐다.하지만 그가 말한 말들은 정명학뿐만 아니라 정유진도 약점을 찾아낼 수 없었다.‘그나저나 집에 와서 밥 먹자는 건 도대체 무슨 면목으로 말하는 거야?’강지찬과 관계가 좀 회복되자 온미정도 드디어 휴가를 마치고 돌아왔다.돌아오자마자 온씨 가문의 어르신께 호되게 꾸지람을 들었다.상록수 별장.봄인데도 바람이 거세차게 불었기 때문에 강지찬은 거의 집안에 틀어박혀 밖에 나가지 않았다.스튜디오 예담은 요즘 좀 힘들었다. 그전에는 강지현의 빚을 메워주기 위해서 조예원은 자기 돈을 모두 털어 넣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와 성원 그룹과의 관계 때문에 현재 스튜디오 예담도 영향을 받고 있었다.조예원은 강지찬이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의심했지만 증거가 없었다.집에 돌아오자 집안은 아주 조용했다. 주방에서 나는 향기가 없었더라면 조예원은 집에 아무도 없는 줄 알았다.그녀가 돌아오는 소리가 나자 한 하인이 웃으며 나왔다.“아가씨가 돌아오셨군요. 저녁밥은 거의 다 되었어요. 오늘은 아가씨가 좋아하는 해삼죽을 끓였어요.”조예원은 위층을 올려다보면서 물었다.“지현이는 오늘도 내려오지 않았나요?”하인은 고개를 내저었다.“안 내려왔어요. 점심은 여전히 제가 가져다드렸지만 아주 적게 드셨어요.”조예원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날 강지현이 밖에서 돌아온 이후로 그는 자신을 방에 가두고 나오지 않았다.2층으로 올라가니 은은한 한약 냄새가 났다.강지현은 지난해 중병을 앓다가 퇴원한 후 줄곧 한약으로 몸을 챙기고 있었다. 그는 밥도 많이 먹을 수 없었지만 한약은 한 모금도 빼놓지 않고 계속 챙겨 먹고 있었다.사람은 역시 살려고 애쓰는 동물이다.조예원은 오늘 공사장으로 갔다. 그녀는 방으로 돌아가서 간단하게 씻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는 강지현의 침실 문을 열었다.밖에는 큰바람이 불고 있었으나 강지현은 담요를 뒤집어쓰고 침실 바깥 베란다에 앉아 있었다.“이곳에 얼마나 오래 있었어요?”조예원이 가보니 그는 고양이 한 마리를 품에 안
정유진은 강지찬이 앞으로 매주 집에 와서 밥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자 짜증이 났다.정명학과 이명자는 강지찬이 그녀를 심하게 괴롭힌 일을 몰랐고 정유진도 말할 면목이 없었다. 지금 이 상황은 그녀가 원했던 게 아니라 완전히 그놈 자식의 계획대로 되고 있었다.강지찬은 한편으로 정유진에게 온갖 협박과 회유를 퍼붓고 다른 한편으로는 또 어르신과 아이앞에서 좋은 사람 흉내를 내고 있었다. 역시 강지찬답게 인심을 장악하는 능력이 뛰어났다.쿵 하는 소리와 함께 추호는 의자를 끌어당겨 맞은편에 앉으며 정유진을 쳐다보았다.“왜요?”정유진은 컴퓨터를 켜고 일을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날 그 미친 계집애는 제 여자 친구가 아니에요.”추호는 다시 한번 강조했다.정유진은 그제야 그가 누구를 말하는지 알아차렸다.“그 여자분은 활발하고 사랑스럽고 얼굴도 예쁘던데 왜 싫어하는 거죠?”“좀 어설프고 점잖지 못하죠. 전 숙녀를 좋아해요.”추호는 두 눈을 뜨고 정유진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정유진은 사무실 책상에 있는 서류뭉치를 그의 얼굴에 툭툭 치며 말했다.“딴소리 말고 일을 시작하죠. 이 서류들을 보내고 일단 강예중 씨를 오라고 하세요.”그러자 추호는 서류를 들고 풀이 죽은 채 떠났다.정유진은 커피 한 잔을 끓이고 강예중이 오자 계획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정유진은 추민해가 준 민박 계획서를 아랫사람에게 맡기려고 했다. 그녀는 정말 할 시간이 없었기에 디자이너를 불러서 회의를 열려고 했고 강예중이 이 일을 도맡아 하게 되었다.새해가 되면 K그룹 쪽의 프로젝트도 곧 시작될 것이기에 프로젝트 부서가 오후에 회의를 하자고 통지했다.사실 정유진은 별로 회의에 참석하고 싶지 않았다. K그룹의 일에 발을 들여놓으면 바로 손해를 볼 것 같았다.하지만 또 어쩔 수 없이 가야 했다.오후가 되자 정유진은 추호와 소미를 데리고 K그룹으로 갔다.도시 중심에 위치한 이 두 프로젝트는 올해 K그룹에서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였고 이런 종류의 프로젝트는 무조건 강지찬과 연
세 식구가 처음으로 함께 식사했고 가장 기뻐하는 사람은 당연히 연우였다.연우는 철이 들었고 아주 어른스러웠지만 어쨌든 아이였다. 엄마와 아빠가 함께 있는 건 모든 아이의 소망이었다.소원을 이루었기에 연우는 저녁밥도 반 그릇을 더 먹었다.연우는 밥 다 먹은 다음 또 피아노 치러 갔다. 분명히 아빠 엄마랑 좀 더 있고 싶어서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는 것이었다.정유진은 강지찬과 딱히 할 말이 없어서 일어나 룸 안에 있는 화장실로 갔다.손을 씻자마자 화장실 문이 열리며 강지찬이 걸어들어왔다.그러자 정유진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솔직히 말해서 그녀는 지금 강지찬과 단둘이 있는 게 조금 무서웠다.철커덕하는 소리와 함께 강지찬은 문을 걸어 잠갔다.“뭐 하는 겁니까?”강지찬은 갑자기 팔을 벌려 정유진의 허리를 안고 그녀를 들어서 세면대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몸을 가까이하면서 정유진에게 키스했다.정유진은 놀라서 멍해졌다.막 소리를 지르려는데 입이 꽉 막혔다.강지찬은 굶주린 늑대처럼 그녀에게 폭풍 키스했다.정유진의 셔츠가 강지찬의 손놀림에 풀렸고 강지찬의 뜨거운 손바닥이 그녀의 몸에 닿자, 정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정유진은 필사적으로 키스를 막았지만 강지찬은 오늘 욕망이 이만저만이 아닌 것 같았다. 그는 다시 자기 입술을 정유진의 몸에 갖다 댔다.“강지찬 씨, 미쳤어요?”그녀는 자기 가슴 앞에 있는 강지찬의 머리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도무지 밀어낼 수가 없었다.더 심각한 건 강지찬의 입놀림 때문에 그녀의 몸도 점점 뜨거워지면서 호흡이 흐트러지고 가빠졌다.정유진은 정말 울고 싶었다.“연우가 밖에 있다고요. 빨리 풀어줘요.”강지찬은 또 자기 입술로 정유진의 입술을 막으며 말했다.“아빠 엄마가 서로 사랑해야 연우도 행복하지.”“누가 지찬 씨랑...”강지찬이 정유진의 몸을 꼭 쥐고 있었기에 그녀는 아무리 힘을 써도 강지찬을 밀어내지 못했다.정유진은 비명도, 신음도 내지 못하고 나중에 강지찬의 뜻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이게 다 뭐
정유진은 집 앞에서 한참을 멍때리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과 강지찬의 관계에 관해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이게 다 뭐야? 사람들 앞에서는 부부고, 둘이 있을 때는 섹스 파트너야?’차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한 여자가 비틀거리며 걸어왔다.조예원이었다.지금은 초봄이었지만 밤 기온은 아직 영하였다. 조예원은 밖에 아무렇게나 코트 하나 걸치고 나왔다.화장도 하지 않았고 긴 머리는 대충 묶었다.정유진은 조예원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보았기에 미간을 찌푸렸다.대학 시절부터 조예원은 모든 사람의 눈에 빛나는 존재였다. 밝고 열정적이었다.솔직히 말해서 정유진은 그녀에 비하면 평소에 말수도 적었다. 조예원은 중천에 떠 있는 태양처럼 항상 긍정적이었다.조예원은 문을 당겨 차에 올라탔고 정유진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 입을 열었다.“어디 가서 술이나 한잔하자.”정유진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시동을 걸었다.지엘 별장 밖에 바로 한 술집이 있었다. 보편적인 술집이었고 들어가 보니 안은 꽤 조용했다.헤드라이트를 켜지 않았고 테이블마다 촛불을 한대 켜고 있었다. 조용하게 술을 마시고 고민을 말하기는 아주 적합한 장소였다.술을 마시는 사람은 적었다. 정유진은 창가 자리에 가서 앉았고 칵테일 두 잔을 주문했다.조예원도 당연히 술만 마시러 온 것이 아니었다.한참 동안 잠자코 있다가 이번에는 정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상록수 별장에서 산다고 했잖아. 왜 이렇게 된 거야?”조예원은 조용히 정유진을 바라보다가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난 가끔 그런 생각을 해. 왜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항상 네 곁에서 맴돌고 있을까? 학교 다닐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사이가 틀어질 때마다 항상 내가 먼저 고개를 숙이고 내가 먼저 널 찾으러 갔지. 네 잘못이든 내 잘못이든 넌 항상 제자리에서 침착하게 기다리고 있었지. 한빈, 강지현, 그리고 강지찬까지 그들은 모두 네 주위에서 맴돌고 있었고 널 가지기 위해 머리가 깨지고 피가 흐를 정도로 싸웠었어.”정유진이 곰곰이 생각해 보니 조
강지찬이 점점 더 파렴치해지자 정유진은 의도치 않게 그를 피하고 있었다.공식석상에서 두 사람은 여전히 금슬이 좋은 부부 연기를 하고 있었지만 주변에 다른 사람이 없다면 정유진은 온갖 방법을 다 생각하며 강지찬을 피하려고 했다.이날 저녁 정유진은 강지찬과 함께 중요한 연회에 참석했는데 참석자의 대부분은 정계 요인이거나 서울시의 재계 거물들이었다.정유진이 손에 끼고 있는 다이아몬드 반지와 흰색 드레스는 강지찬이 그녀를 위해 특별히 제작한 옷이었다. 자세히 보면 그들 둘이 입은 옷은 커플룩이었다.온미정은 온씨 가문의 어르신과 함께 왔지만 줄곧 강지찬을 피해 다녔다.남자들끼리 중요한 이야기를 하러 간 후에야 온미정은 정유진에게로 찾아왔다.“저 녀석의 눈빛은 마치 날 갈기갈기 찢으려하는 것 같아. 정말 무서워 죽겠네.”그러자 정유진이 말했다.“정말 무서웠다면 이곳에 오지도 않았겠죠.”온미정은 정유진의 귓가에 대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말투로 말했다.“내가 임신했어.”“...”정완유는 멍해졌다.“뭐라고요?”온미정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내가 임신했다고.”정유진은 눈이 휘둥그레졌다.“놀랄 것 없어. 난 너에게만 알려줬어. 당분간 비밀로 해줘. 알았지? 누구한테도 말해서 안 돼. 그 자식도 안 돼.”“비밀을 지킬게요.”한참이 지나서야 정유진은 이 소식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궁금했던 정유진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누구 아이예요? 혹시 시험관 아이에요?”“당연히 아니지.”온미정은 얼굴에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그 사람의 아이야.”그 말을 들은 정유진은 더욱 놀랐다.왜냐 하면 온미정이 말한 그 사람은 정유진은 모르고 있었다.온미정은 분명히 언급하기 싫어하는 과거가 있었다. 정유진은 그녀가 정말 사랑했던 연인이 있었다는 건 알았지만 그 사람이 누군지는 몰랐다.두 사람이 헤어진 지 이렇게 오래되었는데 온미정이 갑자기 그 사람의 아이가 생길 줄은 전혀 몰랐다.솔직히 말해서 정유진은 그 사람이 정말 궁금했다.정유진이 묻고 싶으면
정유진은 오늘 갈아입을 옷을 가져오지 않았고 지금 입은 드레스는 쉽게 구겨지는 재질이었기에 결국 강지찬은 그녀를 문에 눌러서 진하게 키스했다.그 짓거리는 하지 못했다.사실 일 때문에 두 사람은 자주 만났지만 사적으로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다.정유진이 마치 자신을 물어뜯을 정도로 화가 난 표정을 본 강지찬은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입가에 묻은 침을 닦아주면서 약간 경멸의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 짓거리를 하려고 널 찾은 것 같아?”정유진은 화가 나서 이를 갈았다.“정말 뻔뻔하네요. 저도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강지찬은 가서 그녀에게 와인 한 잔을 따라주며 말했다.“며칠 후에 강지현과 담판을 할 거야. 나와 함께 가자.”정유진은 깜짝 놀랐다.‘K 그룹이 성원 그룹을 인수하는데 나랑 무슨 상관이야?’정유진을 불러서 함께 강지현을 만난다는 건 분명히 강지현을 자극하기 위해서였다.정유진은 가고 싶지 않았고 흥취도 없었다.“노을빛 프로젝트를 원해?”“...”성원 그룹은 파산했고 노을빛 프로젝트는 이미 중단되었다.뜻밖에도 이 프로젝트는 결국 강지찬의 손에 넘어갔다.하지만 그녀는 그걸 원하지 않았다.“우리 회사는 지금 규모가 작아서 할 수 없을 것 같아요.”강지찬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말했다.“할 수 없는 거야? 아니면 하기 싫은 거야? 흥. 멍청하기는.”정유진은 할 말이 없었다.“그 프로젝트는 너 말고도 원하는 사람이 많아. 잘 생각해 봐.”강지찬은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오피스텔 인테리어가 다 끝나지 않았어? 집세와 직원은 원래의 몇 배인데. 그 돈은 어쩌려고?”정유진은 말이 막혔다.하지만 정유진은 그렇게 쉽게 속일 수 없었다. 강지찬이 그녀를 데리고 강지현을 만나자 하는 건 그에게 모욕감을 주는 것 외에 정유진을 이용해 강지현을 협박해 성원 그룹의 인수를 추진할 계획일 것이다.정말 상인 중에 좋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그래요. 다음 달에 새 회사로 이사할 예정이에요.”정유진은 잠시 강지찬을 전남편이 아닌 협력 대상
엄청나게 큰 사무실에 강지현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데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찼다.그들 중 일부는 매우 격식이 있게 전부 회색 양복의 옷차림이었다. 보기만 해도 실력이 꽤 있어 보였다.최의현은 고개를 돌려 강지찬에게 말했다.“저 사람들이 내가 말한 서경시에서 온 고씨 가문의 사람이야. 다른 사람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런데 강지현도 참 대단해. 모든 사람을 이곳으로 불렀다니. 경매라도 할 생각인 거야?”그때 고씨 가문의 한 사람이 강지찬을 향해 걸어왔다.그 사람은 매우 젊고 잘생겼다. 나이는 스물다섯쯤으로 보였고 키가 매우 컸고 심지어 강지찬보다도 20cm 정도 더 커 보였다.그는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강 대표님, 저 기억하세요?”그러자 강지찬이 그 남자와 악수하면서 말했다.“물론 기억하죠. 지난번에 서경시로 회의하러 갔을 때 그쪽 아버님이랑 와인을 마셨어요. 뜻밖으로 구 대표님의 아드님이 이렇게 혼자 이런 장소에 나설 수 있을 줄은 몰랐어요. 기회가 되면 함께 한잔하죠. 제가 살게요.”고남준은 웃으며 대답했다.“서울에 왔으니 당연히 강 대표님을 찾아야죠. 아버지께서 강 대표님께 드리라고 좋은 술을 주셨어요.”두 사람은 몇 마디 인사를 나누었고 또 다른 사람이 와서 강지찬에게 인사했다.이제 겨우 조용해지자 최의현이 말했다.“이 녀석은 서경시에서 평판이 매우 나쁘다고 들었어. 발이 넓은 사람이라고 해. 보기에는 순해 보이지만 속은 엉큼하다고.”이런 사람이 서울에 발을 들여놓으면 앞으로 큰 문제가 있을 수도 있었다.강지찬은 서울에서 세력이 가장 강한 사람으로 살아온 것이 이제 익숙했고 서울에 다른 굶주린 늑대를 들여오고 싶지 않았다.성원은 그가 무조건 차지해야 했다.그때 강지현이 들어왔다.다른 사람은 모두 얇은 셔츠를 입었지만 그는 아직 두꺼운 코트를 입고 있었다.그는 문을 들어서자마자 강지찬의 옆에 앉아 있는 정유진을 발견했다.정유진은 베이지색 셔츠를 입었는데 정말 아름답고 기품이 넘쳤다.특히 강지찬의 옆에 서 있으니 완
“왜요? 강지현 씨가 마치 상갓집 개처럼 보여서 마음이 안 좋아요?”강지찬의 눈빛은 가시가 돋친 듯했다.하지만 정유진은 따지기 귀찮았다.가뜩이나 화가 치밀어 올랐던 강지찬은 정유진의 이런 모습에 더욱 자극을 받아 더 크게 화냈다.“꺼져!”정유진은 어리둥절했다. 자기에게 얘기를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차에 타고 있던 장형준과 최의현은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며 바로 내렸다.상황이 심상치 않다.정유진은 성원의 문 앞에서 이 사람과 엮였다는 것을 소문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강지찬이 그녀를 아래로 누르고 말했다.“말해봐요. 마음이 아파요?”정유진은 그저 어이가 없을 뿐이다.“도대체 어디에서 내가 마음 아파한다고 느낀 거예요? 강지찬 씨, 어디 아프세요? 오늘 나더러 오라고 한 것은 당신이에요. 강지현이 망신당하는 것을 못 봐서 서운해요? 그러면 강지현 씨나 찾아가서 따져요. 여기서 나 같은 여자를 괴롭히는 게 무슨 재주인데요?”강지찬은 그녀의 턱을 움켜쥐고 독기를 잔뜩 품은 채 말했다.“강지현과 눈짓을 주고받는 것을 내가 못 본 줄 알아요? 모두가 내 아내가 시동생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뒤에서 말해요. 내가 우스운 꼴을 당하니까 기분이 좋아요?”알고 보니 이 사람이 화를 내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정유진은 더욱 어이가 없었다.“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강 대표님, 한 번만 더 말할게요. 우리는 이미 이혼했어요. 내가 강지현 씨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해도 강지찬 씨와는 상관이 없어요!”강지찬 눈썹 치켜세우며 말했다.“뭐라고요? 다시 한번 말해봐요?”한 번 더 말하라고 하면서 이 인간은 갑자기 정유진의 입술에 강한 키스를 퍼부었다.성원의 대문 앞에서 강지현은 고남준이 함께 걸어나왔다.강지현은 장형준이 차 옆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그리고 다가와서 차창을 두드렸다.정유진은 깜짝 놀라 강지찬을 힘껏 밀쳤다.하지만 그녀의 힘으로 어찌 강지찬을 이길 수 있으랴! 정유진은 초조하다 못
다행히 주방에서 매일 죽을 끓였기에 현채영의 앞에 죽 한 그릇이 놓여졌다.그러나 한 입 맛본 현채영은 미간을 찌푸렸다.“맛이 이상해요. 음식 재료를 안 좋은 거 쓰신 거 아니에요?”화가 난 최신애는 테이블을 탁 하고 쳤다.“먹기 싫으면 먹지 마! 여기가 네 집인 줄 알아? 교양이 하나도 없네!”최신애의 이런 모습에도 현채영은 전혀 화를 내지 않았고 그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어머님이 안 좋은 거 드실까 봐 걱정돼서 그러죠. 어떤 사람들은 안 좋은 물건을 좋은 것이라고 속여서 팔아요. 먹는 음식은 자기가 즐겨 먹는 음식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음식 재료 자체도 좋아야 하는 거 아니겠어요?”말을 마친 현채영은 죽을 내려놓으며 옆에 있는 하인을 향해 말했다.“집에 두유 있나요? 없으면 따뜻한 우유 한 잔 주세요.”성격이 좋은 온혁진도 자리가 가시방석이라 밥을 먹자마자 출근했다.최신애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임유희 앞인지라 뭐라고 말하지 못했다.두유와 찐만두 두 개를 먹은 현채영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온유한에게 말했다.“어젯밤 늦게 자서 난 조금만 더 잘게. 안 그러면 피부가 안 좋아져.”그 말에 온유한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마디 했다.“방 앞까지 데려다줄게.”“어머님, 유희 씨, 그럼 전 먼저 일어날게요.”현채영은 온유한의 팔짱을 끼며 한마디 인사하고는 온유한과 같이 자리를 떴다.그 모습에 화가 난 최신애는 옆에 있는 임유희를 다독이며 말했다.“너무해! 유한이가 일부러 나 화나게 하려고 그러는 것이니 넌 신경 쓰지 마.”임유희는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 그런데 어머님, 유한 오빠가 저를 점점 더 차갑게 대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최신애도 한숨을 내쉬었다.“3년 전 그날, 너희 둘이 진짜로 잤더라면 좋았을 텐데… 유한이가 어떤 애인지 내가 제일 잘 알아. 그때 강지아가 아무리 좋아도 널 건드린 이상 분명 책임지려 했을 거야.”사실 그 일은 임유희에게 언급하기조차 싫은 인생의 오점이었다.
최신애는 건강상의 이유를 대면서 임유희더러 온씨 저택에 머물라고 했다.하지만 뜻은 분명했다. 온유한과 자주 부딪히면서 정을 쌓으라는 것이었다.일찍 최신애의 이런 수법을 경험한 온유한은 두 번 다시 그녀에게 휘둘리지 않았다.“어머님이 편찮으시니 저도 남아서 모실게요.”현채영이 웃으며 말하자 온유한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사람 많으면 시끌벅적한 게 좋지 뭐. 우리 어머니도 시끌벅적한 거 좋아하니까 승낙할 거야.”최신애는 또 한 번 테이블을 내리칠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고 싸늘하게 말했다.“아니야. 유희만 있어도 돼.”현채영이 웃으며 말했다.“어머니, 어려워하지 마세요. 임유희 씨는 일도 나가야 하잖아요. 저는 시간이 많으니 어머니와 같이 쇼핑도 하고 꽃도 기를게요. 모르시겠지만 제가 차도와 꽃꽂이, 그리고 장기까지 다 배웠어요. 참, 피아노와 바이올린도 칠 줄 알아요. 답답하시면 피아노 한 곡 쳐 드릴게요.”최신애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이렇게 뻔뻔한 여자는 처음이라 최신애는 순간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온유한은 최신애가 뭐라고 하기 전에 옆에 있는 하인에게 지시를 내렸다.“뒤에 있는 두 객실을 치워 주세요. 당분간 임유희 씨와 현채영 씨가 묵을 거예요.”하인은 최신애의 눈피를 살폈고 최신애는 이내 화를 냈다.“온유한, 대체 뭘 어쩌려는 거야?”온유한이 최신애를 바라보며 말했다.“아니면 채영이는 나와 같은 방 쓰게 할까요?”“너 정말!”최신애가 임유희를 집에 남겨두겠다고 하는 한 온유한도 현채영을 집에 남겨둘 것임을 주위 사람들은 이내 알아챘다.최신애는 화가 났지만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임유희의 부모님은 화가 나서 밥도 먹지 않고 가버렸지만 임유희는 온유한의 집에 남겨 뒀다.결국 최씨 가문 사람들만 온씨 저택에 남아 밥을 먹게 되었다. 하지만 최신애는 여전히 최금성이 온유한을 설득하기를 바랐다.“대체 무슨 생각을 하기에 형더러 와서 나를 타이르라고 하는 거야?”최금성은 피식 웃었다.“그러니까, 나도 몰라.”
분위기가 싸늘해졌고 임유희 부모님의 안색도 매우 어두웠다.임유희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3년 동안 좋아했던 온유한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정말 가슴이 찢어질 듯했다.온유한은 주위 사람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현채영을 끌어안고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온씨 집안 하인들도 현채영을 쫓아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임근우가 테이블을 치며 말했다.“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요? 이 집 사람들은 내 딸이 안중에도 없나요?”최신애가 일 처리를 제대로 못 하긴 했지만 임근우가 면전에서 책상을 두드리는 것을 온혁진은 참을 수 없었다.애초에 임씨 가문이 대놓고 온씨 가문의 뒤를 쫓아다니지 않았더라면 온씨 가문은 임씨 가문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 모든 일은 최신애가 저지른 것이었기에 온혁진은 최신애에게 이 난장판을 넘기고 본인은 찻잔을 들고 빠져나왔다.최씨 가문 식구들도 마찬가지로 좌불안석이다. 보다 못한 최금성의 엄마 황은숙이 최신애를 도와 상황 수습에 나섰다.타이르고 위로하느라 거실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이때 임유희가 일어서더니 온유한에게 다가갔다.그나마 안색은 조금 전에 비해 한결 누그러졌다.“유한 오빠, 나가서 얘기 좀 해요.”온유한이 다리를 꼰 채 말했다.“우리가 할 얘기가 있나? 그리고 그쪽과 같이 나가면 우리 채영이가 질투할 거야.”옆에 있던 현채영이 한마디 했다.“가봐, 질투 안 할 테니.”온유한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정말 질투 안 할 거야?”현채영이 콧소리를 내며 말했다.“내가 질투할지 말지는 가보면 알 거 아니야?”두 사람은 앞에 서 있는 임유희를 아랑곳하지 않고 대놓고 대화를 주고받았다.주먹을 꽉 쥔 임유희는 기가 막혀 숨이 안 쉬어질 정도였다.“그래. 하고 싶은 말이 뭔데?”온유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다.임유희는 심호흡을 여러 번 하고 나서야 온유한을 향해 말했다.“일부러 그러는 거죠? 날 난처하게 하고 어머니와 맞서는 이유, 다 강지아 씨 때문이죠?”온유한은 피식 웃었다.
온유한이 일부러 맞서는 것을 최신애는 알 수 있었다.어젯밤에 온유한에게 보여주려 했던 사진을 그의 앞에 던지며 말했다.“그럼 네 눈으로 봐! 이 여자와 결혼할 거야?”온유한은 힐끗 보고 말했다.“안 될 것도 없죠.”“개자식아! 너 요즘 이런 여자와 어울리느라 매일 늦게 들어온 거야? 집안 상황을 몰라서 그래?”“그래서 뭐요?”온유한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현씨 가문이 지금은 파산했지만 예전에 잘나갈 때는 가장 바랐던 며느릿감 아니었어요?”“예전은 예전이고! 예전에는 현씨 가문 딸이었지만 지금은 돈만 주면 뭐든 다 하는 여자야. 그때와 지금이 같아?”온유한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예전에는 어떤 사람이었든 지금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어요.”“무슨 뜻이야?”최신애는 순간 멍해졌다.“설마 진짜로 데리고 올 것은 아니지?”“안 될 이유라도 있나요?”“당연히 안 되지!”최신애는 화가 나서 테이블을 쳤다.“죽는 한이 있어도 이런 여자를 우리 온씨 가문에 들일 수는 없어. 잘 들어, 오늘 퇴근하자마자 바로 집에 들어와. 오늘 유희와 결혼 날짜 잡을 거야. 이것은 임씨 가문에 대한 우리의 약속이기도 해. 잊지 마. 임씨 가문이 아니었더라면 지금의 온씨 가문도 없었을 테니.”“그래요?”온유한은 여전히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온씨 가문과 강씨 가문의 인연을 끊게 된 게 누구 때문인데요? 그런데 지금 나더러 임유희와 결혼하라고요? 내 인생이에요.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세요. 내가 그렇게 쉽게 말을 들을 사람처럼 보여요? 순진하네, 온 여사. 더 이상 강요하지 마세요!”온유한은 밥도 먹지 않은 채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한편 최신애는 화가 나서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성격상,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저녁 식사에 그녀는 온씨 가문 사람들뿐만 아니라 최씨 가문 사람들까지 초대했다.최신애는 온유한을 설득하기 위해 최금성도 불렀다.이제 모든 사람이 다 도착했지만 온유한만 오지 않았다.최신애는 끊임없이 그에게 전화를 걸
“집에 돌아올 줄은 알아?”벽에 걸린 시계의 시간을 본 최신애는 더욱 화를 냈다.“지금 몇 시인지 좀 봐! 하루 종일 무엇을 하기에 점점 늦게 들어오는 거야?”하지만 오늘 심하게 취한 온유한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그저 눈앞의 사람이 귀찮다고 생각했고 빨간 립스틱을 바른 저 입은 벌렁거릴 때마다 섬뜩하게 느껴졌다.“누구야, 비켜! 막지 마.”운전기사는 제대로 서지조차 못하는 온유한을 붙잡으며 말했다.“사모님, 도련님이 많이 취했으니 할 말이 있으면 내일 하세요.”최신애는 가슴이 아프면서도 화가 났다.“얘 오늘 어디 간 거야?”“최의현 도련님의 약혼식에 참석했다가 끝나고 에이프릴로 갔습니다.”“거기서 여태껏 술을 마셨다고?”“네...”최신애는 머리가 지끈거렸다.“얼른 방으로 데려가 눕혀... 아줌마, 내일 유한이에게 해장국을 끓여줘...”온유한을 방에 눕힌 뒤 최신애는 지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돌아갔다.일찍 잠이 든 온혁진을 본 최신애는 화가 치밀어 손바닥으로 때려 그를 깨웠다.“아들이 이 꼴인데 잠이 와요?”온혁진은 싫증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누가 이렇게 만들었는데?”“무슨 뜻이에요?”그 말에 화가 난 최신애는 모든 불만을 온혁진에게 쏟아냈다.“다 유한이를 위해서 그런 거잖아요. 당신, 아버지로서 유한이를 위해 한 게 뭔데요?”온혁진은 더 이상 잘 수 없어 침대에서 일어났다.“아들 일, 관여하고 싶지 않아. 어차피 언젠가는 온씨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텐데 평생 의사로 살 수는 없잖아. 왜 그렇게 유한이를 핍박하는 거야? 죄만 안 짓고 사고만 안 치면 상관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당신도 신경 쓰지 마. 예전의 우리 아들이 아니라고.”하지만 최신애는 다른 일을 생각했다.“강씨 가문에서 투자를 회수한 후 임씨 가문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버티지 못했을 거예요. 유희가 3년째 유한이를 기다리고 있다고요. 우리 아들도 이제 서른 다섯이에요. 유희 집안에 정식으로 결혼에 대해 얘기해야 하지
최의현의 약혼녀도 서울에서 유명한 재벌 집 딸로 이 결혼은 가문에서 맺어 준 것이었다.여자는 단아한 외모의 전형적인 재벌 집 숙녀로 최의현의 전 여자친구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최의현 같은 남자가 평소에 아무리 날라리라고 해도 배우자는 절대 본인과 비슷한 사람을 선택하지 않는다.온유한이 조금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최의현은 그가 안 오는 줄 알았다.“한참을 기다렸잖아. 네 자리는 지찬이 옆인데 괜찮지?”최의현은 두 사람을 화해시키기 위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응.”강지찬과 한규진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발견한 온유한은 본인 자리가 두 사람의 중간임을 알았다.정말 최의현다운 섬세한 배치였다.그 테이블로 다가간 온유한은 예전처럼 한 명씩 인사했다.“지찬아, 규진아, 은우야...”강지찬만 빼고 그의 인사를 다 받아줬고 온유한도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한규진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물었다.“요즘 뭐 해?”“별일 없이 바쁘기만 하지 뭐.”온유한은 말을 아꼈다.몇 년간 수술대에 서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병원은 다니고 있었다. 온혁진의 나이가 많아 온유한이 병원과 공장 양쪽 모두 돌봐야 했다.강지찬이 투자를 회수한 후 공장 건설이 하마터면 무산될 뻔했다.그러다가 최신애의 예상처럼 임씨 가문에서 투자를 한 덕분에 간신히 버텼다.다만 투자라는 것은 원래 접대도 많은 법, 온씨 부자는 매일 같이 각 투자자들을 접대했다.한규진이 온유한의 옆에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아가 곧 온대.”깜짝 놀란 온유한이 손을 심하게 떨었다. 그 바람에 술잔에 든 술이 쏟아질 뻔했다.몇 초 후, 그는 간신히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그래?”“서원준과의 관계를 명확히 발표한다는데 약혼하러 오는 것인지 모르겠어.”온유한은 계속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지아도 이제 나이를 먹었으니 시집갈 때가 되었지. 서원준 씨, 사람 괜찮은 것 같아.”일부러 목소리를 낮추지 않고 말했기에 옆에서 그 말을 들은 강지찬은 온유한을 흘겨봤다.약혼식이 끝난 후 온유한
“온 선생님, 제발요. 주임님이 의사를 데려오기 전에 오지 말라고 하셨어요.”구원 의사를 찾으러 온 젊은 간호사는 울음을 터뜨릴 지경이었다.온유한은 아무 말 없이 일어나 밖으로 나간 뒤, 전성호의 책상을 한 번 두드렸다.“따라와.”전성호는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진료를 시작했다. 그는 예전에 응급실에 근무한 적이 있었다.오늘 대형 교통사고 때문에 응급실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모두들 바삐 돌아쳤다.온유한을 발견한 응급실 주임은 마치 구세주를 발견한 듯 눈을 반짝였다.“온 선생님, 잘 왔어요. 흉부를 수술해야 할 환자가 생겼는데 온 선생에게 맡길게요.”늙은 주임 의사가 피 묻은 장갑을 벗자 조수가 급히 새 장갑으로 갈아끼워줬다. 그러고는 다시 수술실로 들어갔다.온유한은 전성호를 데리고 수술실로 향했다. 안에는 보조 의사가 기다리고 있었다.“온 선생님, 수술대에 설 수 있겠어요?”전성호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온유한이 3년 동안 메스를 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네가 같이해.”“네?”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두 사람은 손을 씻고 소독을 하기 시작했다.무균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준비를 마칠 때까지 전성호는 온유한이 수술대에 선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환자는 이미 마취한 상태로 모든 것이 준비되었으며 모두가 온유한만 바라보고 있었다.온유한은 전성호를 보고 턱을 한 번 치켜들며 말했다.“이 수술은 네가 해.”“뭐라고요?!”전성호는 어안이 벙벙했다.“선생님, 저는 선생님과 주임님의 조수로만 해봤습니다.”온유한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그러니까 지금이 기회야. 환자의 상태를 봤는데 그렇게 심각한 것은 아닌 것 같아. 안 할 거야?”“저...”전성호는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외과 의사라면 언젠가는 큰 수술을 집도할 수 있어야 했다.온유한이 3년 동안 퇴폐적인 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가장 우수한 학생인 전성호는 진작 수술대에 섰을 것이다.“내가 옆에서 도와줄게.”온유한의 말에 전성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지만 이내 머리를
3년 후.밖에 문 여는 소리가 들리자 최신애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새벽 한 시가 되기 전, 오늘은 그나마 이른 편이다.문이 열리더니 비틀거리며 들어오는 그림자가 보였다.하인이 얼른 가서 그의 손에 있는 차 키 등을 받은 뒤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도련님, 사모님이 아직 안 주무시고 기다리고 계십니다.”오늘 저녁, 온유한은 평소보다 덜 취했기에 아직 멀쩡한 상태였다.“어머, 온 여사가 나를 기다린다고?”비틀비틀 걸어간 온유한은 실크 가운을 입고 거실에 앉아 그를 노려보는 최신애를 발견했다.“온 여사님, 오늘 또 나를 혼낼 건가요?”‘온 여사'라는 말에 최신애는 화가 났다. 온유한이 강지아와 헤어지고 난 뒤로는 그녀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았다.“또 술 마신 거야? 온유한, 넌 서울에서 가장 젊고 유능한 흉부외과 의사였어. 기억나?”“의사?”온유한이 허탈하게 웃었다.“메스를 든 지가 언제인데요? 3년 전 일이에요.”몇 발짝 앞으로 다가간 최신애는 온유한에게 삿대질하며 말했다.“기억하고 있네? 그렇게 오랫동안 힘들게 공부해 놓고 여자 때문에 너 자신을 다 망치다니. 우리에게 미안하지도 않아?”“이게 다 온 여사 덕분이잖아요?”온유한이 최신애를 싸늘하게 쳐다보며 말했다.“지아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면서요? 이제 다시 수술 못 하는데 그래도 지아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요?”최신애는 가슴이 아팠다.“너 정말! 나에게 복수하려고 일부러 너 스스로를 망친 거야? 미쳤어?”“아니요! 미치지 않았어요!”온유한은 희미하게 떨리는 그의 왼쪽 손을 최신애에게 들어 보이며 말했다.“아주 멀쩡해요. 그 어느 때보다 멀쩡하다고요. 아들이 이런 모습이어도 잘난 척할 건가요?”‘찰싹’하는 소리와 함께 최신애가 온유한의 뺨을 후려갈겼다.“개자식, 나 약 올리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지?”온유한은 아무 말 없이 비틀거리며 방으로 돌아갔다.3년이 지났다.그 사이 강지아는 여러 번 돌아왔지만 온유한을 만나주지 않았다.처음에는 미친
강지아는 상처가 다 낫기도 전에 급하게 떠났다.작업실의 문은 닫지 않았지만 국내 업무는 모두 직원들에게 맡겼다. 그녀는 온라인으로 중요한 결정만 했다.“혼자 떠났고 서원준은 가지 않았어. 지찬이와 형수 외에는 어디로 갔는지 아는 사람이 없어. 넌 못 들었지?”최의현에 말에 온유한이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못 들었어.”전화를 끊은 온유한은 한참 동안 멍해 있었다.며칠 전 강지아에게 계속 전화를 하고 메시지를 보냈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그러다가 갑자기 어느 날 전화 연결이 안 되었고 메시지도 발송이 안 되었다.강지아가 그를 차단했던 것이다.한참 생각하던 온유한은 미친 듯이 밖으로 뛰쳐나갔다.그를 본 의사와 간호사는 깜짝 놀랐다.“온 선생님, 다리 괜찮아요? 저렇게 뛰면...”“무슨 일이지? 온 선생님 표정이 너무 무서워.”정유진이 저녁 먹을 준비를 할 때 하인이 들어와 온유한이 밖에서 기다린다고 했다.이내 모직 코트 안에 흰 가운을 입은 온유한이 정유진 앞에 나타났다.“형수님, 지아를 만나게 해주세요.”정유진이 한숨을 내쉬었다.“이미 간 걸 알면서 왜 여기까지 온 거예요...”온유한은 아픈 다리 때문에 땀범벅이 되었다.“진짜로 떠났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요.”정유진은 온유한의 다리를 힐끗 본 후 말했다.“하지만 확실히 갔어요. 일단 저녁 먹고 병원에 다시 가세요.”온유한은 그 말을 듣지 못한 듯 계속 물었다.“왜 떠나는데요?”정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어디 간 거예요?”정유진이 계속 대답을 하지 않자 온유한이 혼자서 중얼거렸다.“나를 못 믿겠다고 했던 말이 사실이었네요. 서울로 돌아가면 바로 혼인신고를 하자고 했는데 안 믿었어요. 이렇게 그냥 가버리면 진짜로 나랑 헤어지자는 것일까요?”정유진은 넋이 나간 온유한을 보고는 정명학에게 눈짓을 했다.정명학은 앞으로 걸어 나와 온유한을 잡아당겨 식탁에 앉혔다.“지아가 바람 쐬러 나갔다고 생각하고 일단 밥부터 먹어. 밥을 먹고 나서 병원에 가서 다리부터 다시 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