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진은 그 말을 듣고 멍해졌다.사실 그녀가 이야기하려던 건 연우의 양육 문제가 아니라 두 사람 사이의 갈등과 오해였다.그동안 그녀는 곰곰이 생각해 보니 강지찬과의 오해가 너무 깊었기에 비록 그들이 서로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하더라도 매번 성공하지 못했고 심지어 새로운 오해가 또 생겼다.정유진은 예전에 많이 쌓인 오해가 바로 두 사람 갈등의 근원이니 반드시 모든 오해를 풀고 싶었다.하지만 지금 강지찬은 직접 양육권을 뺏겠다고 나서자 정유진은 화가 치밀어 올라서 터질 것만 같았다.“연우는 내 아이예요. 너무 이기적이면 안 돼요.”“내가 이기적이라고?”강지찬은 험상궂은 표정으로 말했다.“정유진, 가슴에 손을 대고 말해봐. 누가 더 이기적인지.”“그게 죄다 제 잘못이라고 생각해요?”연우는 무엇보다도 더 소중했기에 누가 정유진에게 딸을 빼앗으려 하면 그녀는 목숨 걸고 싸울 것이다.“강지찬 씨, 딸은 제가 목숨을 걸고 낳았어요. 나한테서 딸을 빼앗는 건 내 목숨을 빼앗는 것과 같아요!”강지찬도 화가 치밀어 올라서 소리쳤다.“그러면 나랑 재혼해! 내가 널 그렇게 좋아하는데. 몇 년 동안 네 생각밖에 안 하다가 이제 어렵게 널 다시 만났는데 넌 온종일 이혼을 입에 달고 다녀? 정유진, 나랑 그렇게 급하게 이혼하려는 이유가 바로 나에게 연우의 존재를 숨기려고 했던 거지? 원래 연우가 날 친아빠로 인정하게 할 생각도 없었던 거지?”그때 두 사람은 오해가 깊었기에 정유진은 강지찬과 어떻게든 인연을 끊겠다고 다짐했으니 당연히 연우가 그를 아빠로 인정하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정유진은 더 이상 그와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옳고 그름은 이미 너무 많아서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몰랐다.“강지찬 씨, 믿거나 말거나 전 원래 당신에게 연우의 신분을 알려주려고 했어요. 다만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강지찬 씨가 알아버린 거죠. 전 지찬 씨가 연우를 만나는 걸 반대하지 않아요. 심지어 지찬 씨는 매달 며칠씩 연우를 강씨 저택에 데리고 갈 수도 있죠.
정유진은 깜짝 놀라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싸우고 있던 게 아니었어? 왜 갑자기...’“뭐 하는 거예요?”“네 생각에는 뭐 하는 것 같아?”강지찬의 뜨거운 입깁이 정유진의 귓가에 닿자 그녀는 머리가 어지러워 났다.이런 일은 지난번에도 강지찬의 핍박으로 했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정유진은 그의 목소리를 듣기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졌다.“강지찬, 너 미쳤어!”밖에는 사람들이 많이 오가고 있었고 문도 잠겼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만약 지금 누군가가 들어온다면 그녀는 정말 죽고 싶었다.“그래. 난 미쳤어!”강지찬은 벨트를 풀고 정유진의 어깨 위로 입술을 움직이며 말했다.“넌 항상 자신을 존중해달라고 말했지. 그래서 난 내 성질을 고쳐가면서 널 존중하려고 했어. 하지만 넌 나한테 어떻게 대했어? 날 존중해준 적이 있어?”“음...”정유진은 이미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고 마음속으로 강지찬을 미워하고 있었다.“넌 정말 짐승 같은 놈이야.”정유진은 강지찬의 힘을 이길 수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참고 있었다.“난 너에게 절대 아이를 줄 수 없어. 그렇게 대단하다면 날 죽여봐.”강지찬은 정유진의 어깨를 꽉 깨물면서 말했다.“내가 널 죽이고 싶지 않은 것 같아?”시간은 얼마나 흘렀을지 모르지만 강지찬은 마침내 정유진을 놓아주었다.강지찬이 손을 떼자마자 정유진은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두 다리 사이로 강지찬의 체액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정유진은 굴욕스럽고 난감했다.정유진은 강지찬을 보고 싶지도 않았다.그래서 이를 갈며 말했다.“이혼하면 두 사람은 평등한 위치에 서서 지난 일은 뒤로 하고 다시 마주할 수 있을 줄 알았어. 내가 틀렸어. 넌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파렴치한 사람이었어.”일을 마친 강지찬은 자기 옷을 정리했고 다시 정인군자의 모습으로 돌아왔다.그는 애매한 눈빛으로 정유진을 쳐다보다가 화장실에 가서 깨끗한 수건을 가지고 나왔다.“직접 닦아 줄까. 아니면 스스로 닦을래?”정유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
강지현을 보자 정유진은 강지찬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그녀는 강지현을 바라보면서 그가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예전에 연우에게 잘 대해주었던 게 모두 가짜였단 말인가?’강지현은 직접 쓰레기통까지 걸어갔고 방금 버린 피임약을 집어 들었다.응급 피임약이었다.“형을 만났어요?”강지현의 말투는 여전히 차분했다. 그는 다시 피임약을 쓰레기통에 버렸다.정유진은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눈앞에 남자를 쳐다보았다.그러자 그녀는 강지현이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더 낯설게 느껴졌다.정유진도 바보가 아니었다. 원래 그녀와 강지찬은 요즘 별 큰 충돌이 없었다. 강지찬이 연우의 신분을 알고 화가 났다고 해도 굳이 강박적으로 정유진에게 그런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강지찬이 오늘 미친 짓을 한 건 분명히 강지현과 관련이 있었다.‘아니, 강지찬이 매번 미친 짓을 할 때마다 전부 강지현과 관련이 있었어.’‘그전에 강지현이 맞은 건 도대체 무슨 이유였을까? 강지현은 도대체 어떤 역할을 하는 걸까?’“유진 씨, 너무 실망스럽네요.”강지현이 말했다.정유진은 전혀 그와 말하기 싫었기에 바로 몸을 돌려서 차에 올랐다.하지만 강지현도 따라와서 조수석에 탔다.“유진 씨, 왜 그러세요. 설마 형이 또 유진 씨를 괴롭혔어요?”정유진은 그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코트를 열고 어깨에 잇자국과 목에 키스 마크를 드러내며 보여주었다.“네. 강지찬 그 짐승 같은 새끼가 또 저를 괴롭혔어요.”정유진은 눈시울이 붉어졌다.“이미 짐작했잖아요. 뭘 더 물어봐요.”강지현은 가슴이 아팠고 그녀의 옷을 다시 덮어주며 말했다.“전 신경 안 써요. 유진 씨, 저는 전혀 신경 안 써요.”정유진은 그의 손을 뿌리치며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내려요. 지금 혼자 있고 싶어요.”그 말을 들은 강지현은 마음이 무거웠다.“유진 씨, 왜 그러세요?”강지현은 손을 벌려 정유진의 얼굴을 만지려 했다.“그냥 미친개한테 물렸다고 생각하고 마음에 두지 마세요. 제가 반드시 연우를 다시 유진
집에 돌아온 정유진은 몸도 마음도 지쳤다. 다행스러운 건 부모님은 이미 잠들었다. 만약에 그들이 자신의 이런 꼴을 보게 되면 정말 걱정시킬 것이다.샤워할 때야 그녀는 자신의 목덜미가 얼마나 끔찍한지 알게 되었다. 키스 마크도 몇 개 있었고 어깨에는 이빨 자국이 세 개나 있었다.비록 출혈은 없었으니 껍질이 벗겨져서 끔찍했다.‘나쁜 자식, 입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았네.’샤워를 한 후 피곤해서 꼼짝도 하기 싫었는데 잠은 전혀 안 왔다.이튿날은 출근하는 날이었기에 정유진은 마음을 진정시켰다.이명자는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하지만 연우가 없었기에 두 어르신은 말도 별로 하지 않았고 집안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정유진이 내려오자, 이명자는 뭔가 말하려다가 또 감히 묻지 못했다.사실 정유진도 부모님을 생각하자 마음이 힘들었다.“연우는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정유진은 머리를 다듬으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했다.“강지찬의 말로는 아이가 이제 막 강씨 집안에 갔으니 아직 적응할 시간이 더 필요하대요.”이명자는 걱정이 가득한 표정이었다.“개학하면 돌아오겠지?”어젯밤 강지찬의 태도를 보니 어려울 것 같았다.하지만 정유진은 그 사실을 이명자에게 감히 알려주지 못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어머니를 안심시켰다.“아마 비슷할 것 같아요. 그때 가서 제가 데리러 갈게요.”“휴... 연우가 없으니 요리할 힘도 나지 않아.”그러자 정유진이 말했다.“아니면 아버지와 함께 여행 가시는 건 어때요? 바닷가를 찾아서 며칠 쉬세요.”이명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정명학은 오히려 흥미를 느끼는 표정이었다.그들은 오랫동안 함께 제대로 여행을 간 적이 없었다. 예전에는 일 때문에 바빴고 나중에는 또 정유진과 함께 멀리 타향으로 떠났다. 정유진은 생각만 해도 그들에게 미안했다.정유진이 알아보니 마침 유럽으로 가는 노인들의 여행 단체가 있었다. 여행 경로를 보니 괜찮았기에 정유진은 부모님과 외삼촌과 외숙모에게 티켓과 호텔을 예약해 주었다. 넷이 가면 서로 챙
다음날, 추호뿐만 아니라 추민해도 함께 왔다.그들이 온 이유를 설명했으나 정유진은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멍해졌다.“추 대표님, 농담하시는 거죠? 제가 추 도련님을 옆에 두고 가르쳐주라고요? 아니... 저는 인테리어 회사를 차렸고 아는 건 디자인 밖에 없어요. 추호 씨가 절 따라다니면 배울 것도 별것이 없을 거예요. 게다가 좀 불편해요.”추민해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정 대표님께서 비웃으셔도 괜찮아요. 이 나쁜 자식이 제 말을 잘 듣는다면 저도 염치없이 정 대표님께 이런 부탁을 하지 않았을 거예요. 운전기사도 좋고 경호원도 좋으니 추호를 여기서 착실하게 일만 하게 해 주세요. 제 자식이 해낼 수 있는지 지켜보겠어요.”추호가 온종일 집을 비우고 밖에서 빈둥거리는 것에 비하면 그가 정유진의 운전기사라도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그런데 강지찬 그쪽은...’추민해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는 강지찬 때문에 추호가 차라리 좀 고생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추호가 앞으로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걸 알게 되고 큰 사고도 치지 않을 것이다.그리고 추민해는 정말 정유진을 좋아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정유진은 자기 쓸모없는 자식과는 전혀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빨리 추호를 단념시키고 싶었다.이렇게 종합적으로 생각하니 추민해는 모험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정유진은 그 말을 듣고 정말 어이가 없었다.추민해가 계속하여 말했다.“정 대표님께 솔직히 말씀드리는 건데. 제호 그룹에서는 앞으로 리조트와 나이트클럽을 열 생각입니다. 저도 정 대표님과 오랫동안 협력하고 싶은 마음이죠.”정유진은 할 말이 없었다. 이런 큰 고객에게는 미움을 살 수가 없었다.그래서 이날부터 정유진의 곁에는 멋진 운전기사 겸 경호원이 하나 더 생겼다.유치원이 곧 개학할 예정이었기에 정유진은 강지찬에게 몇 번이고 전화했으나 그는 받지도 않았다.이날 오후 일이 거의 끝나가자, 정유진은 추호에게 휴가를 주었고 K 그룹에 다녀오려고 했다.“아직 퇴근 시간이 아닌데
강지찬은 아이를 돌려주지 않기로 마음먹었고 전혀 조급해 보이지 않았다.오히려 급한 건 정유진이었다.그녀는 이 남자가 얼마나 나쁜 놈이고 얼마나 사납고 얼마나 자신을 미워하는지 알고 있었다.원래 그와 대화를 잘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강지현이 그들 사이에서 이간질하고 있으니 강지찬은 평온한 마음으로 그녀와 전혀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임우연이 커피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을 때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그는 억지로 커피 두 잔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웃으며 말했다.“정 대표님, 대표님께서 가장 즐겨 마시는 모카를 준비했는데 드셔보시겠어요?”하지만 정유진은 성지찬만 노려보고 있었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성지찬은 임우연을 힐끗 쳐다보자 임우연은 재빨리 눈치채고 바로 자리를 떠났다.정유진은 오늘 매우 성숙하고 지성적으로 입었다. 안에는 반목의 짙은 녹색 스웨터, 겉에는 카멜색 코트, 아래에는 같은 색의 모직 바지를 입고 있었다.정유진은 훤칠한 키에 뛰어난 기질을 뽐냈다.성지찬은 지난번의 쾌감을 잊을 수 없었다. 정유진의 날씬한 몸매를 바라보자 마음속에는 또다시 욕망의 불씨가 타올랐다.정유진은 원래 성지찬의 아내였지만 요 몇 년 동안 성지찬은 독수공방했다.성지찬은 그건 전부 정유진 탓이라고 생각했다.그가 정유진을 뚫어져라 쳐다보자 그녀는 마치 맹수의 사냥감이 된 느낌이 들었다.정유진은 지난번의 일을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해졌다.그와 억지로 맞서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정유진은 참을 수밖에 없었고 차근차근 그를 타이르기 시작했다.“성지찬 씨, 두 어르신이 손녀를 보고 싶어서 잠도 못 이루고 있어요. 우리 엄마와 아빠가 지찬 씨에게 잘 대해 줬잖아요.”성지찬은 고개를 치켜올리며 정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장인어른과 장모님께서 아이를 보고 싶으시면 우리 집으로 오면 돼. 두 분께서 우리 집에서 사신다 해도 난 좋아.”“지찬 씨는 지금 분명히 억지를 부리는 거예요.”“어쩔 건데?”“...”정유진은 말문이 막혔다.‘이 사람은 지독할 뿐만
그때 누군가가 사무실의 문을 펑 하고 걷어찼다.정유진이 알아차리기 도전에 그 사람은 이미 강지찬과 싸우고 있었다.이어서 장형준도 싸움에 끼어들었다.잠시 후 두 사람은 떼어졌고 추호는 심하게 맞은 것 같았다.하지만 강지찬은 옷깃의 단추만 몇 개 열렸다.“감히 사무실에서 여자를 괴롭혀요?”장형준과 임우연에게 붙잡혀 있는 추호는 화가 난 늑대 새끼처럼 달려들어 강지찬을 물어뜯을 기세였다.사무실의 문은 이미 열려 있었지만 그 누구도 감히 엿볼 수 없었고 심지어 성이 왕씨인 다른 비서는 경비원이 올라오기 전에 다시 문을 닫아줬다.“제가 아내랑 스킨십을 하는데 그쪽과 무슨 상관이죠?”강지찬은 차가운 눈빛으로 추호를 쳐다보았다. 방금 좋았는데 추호 때문에 망쳐버렸으니 불쾌했다.“뻔뻔스러운 소리 그만해요. 이혼했는데 아내라니요.”추호는 전혀 두려운 게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 쳐도 장형준과 임우연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임우연은 마치 무슨 큰 비밀이라도 들은 듯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강지찬을 바라보았다.‘이혼했다고? 그런데도 대표님이 사무실에서 여자를... 너무 짜릿할 텐데.’옆에 있는 정유진을 보자 그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경비원은 매우 일찍 도착했지만 그들은 손을 쓸 필요도 없었다.정유진은 자기 가방을 들고 장형준에게 사람을 놓아주라고 말했다.그러자 장형준은 어쩔 수 없이 추호를 풀어주었다.“갑시다.”정유진은 손으로 입술을 닦았다. 방금 강지찬 때문에 입술의 립스틱이 망가졌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것도 신경 쓸 겨를이 없이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강지찬은 이런 상황에 당연히 뭐라 하지도 못하고 두 사람이 떠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임우연도 서둘러 경비원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회사에서는 아무도 대표님이 이혼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건 강지찬이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는 걸 의미했기에 이 사실을 알아버린 임우연은 오늘 되도록 강지찬과 멀리하는 게 좋을 것이다.그때 장형준이 입을 열었다.“대표님,
어린 연우가 뜻밖에도 기질이 남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서 등교하는 것을 본 선생님들은 의아해했다.지난 학기에도 연우는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가 함께 등교했고 심지어 연우는 성이 엄마 성과 같았다. 유치원에서 연우의 아버지에 관해 묻자 정유진은 그의 신분을 밝힐 수 없다고 했다.비록 학교의 선생님과 친구들은 모두 연우를 좋아했지만, 연우의 신분에 관해서는 토론하지 않았다. 하지만 선생님과 일부 학부모는 연우가 십중팔구 어느 대단한 사람의 사생아일 것이라고 추측했다.그래서 그들은 지금 강지찬을 보고 멍해졌다.“안녕하세요. 저는 정연우의 아버지예요. 정연우 엄마는 일 때문에 못 오시고 앞으로 제가 연우와 함께 등교, 하교할 것입니다.”강지찬은 한 팔로 연우를 안고 이미 유치원 입구에 도착했지만, 딸을 내려놓기가 아쉬웠다.선생님들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이분이 정연우의 아빠야? 너무 잘생겼네. 뒤에 있는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경호원인 거야?’몇몇 젊은 여선생님들은 모두 넋을 잃고 강지찬을 쳐다보았다. 그래도 나이가 좀 낳은 유부녀 여선생님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정연우의 아빠였군요. 안녕하세요. 연우의 아빠가 연우를 유치원에서 픽업하려면 먼저 서류를 작성한 후 픽업증을 발급받아야 해요.”“알겠어요.”꼬마 연우는 강지찬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절 내려주세요. 친구와 함께 가서 놀고 싶어요.”성지찬은 그제야 딸을 내려놓고 연우에게 다가오고 싶었지만 성지찬 때문에 감히 오지 못하고 있는 몇몇 아이들을 훑어보았다. 그 아이들도 비교적 귀엽게 생겼고 말썽꾸러기도 아닌 것 같아 보이자 그제야 연우의 손을 놓았다.“유치원에서 선생님 말씀 잘 들어야 해. 오후에 아빠가 널 데리러 올게.”꼬마 연우는 한참 고민하다가 성지찬의 얼굴에 다가가 뽀뽀를 쭉 했다. 예전에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가 연우를 유치원에 데려다줬을 때도 항상 헤어지기 전에 뽀뽀했다.성지찬은 살짝 놀라서 멍해졌다. 연우의 작고 부드러운 입술이 그의 볼에 닿는 순간 마음이
다행히 주방에서 매일 죽을 끓였기에 현채영의 앞에 죽 한 그릇이 놓여졌다.그러나 한 입 맛본 현채영은 미간을 찌푸렸다.“맛이 이상해요. 음식 재료를 안 좋은 거 쓰신 거 아니에요?”화가 난 최신애는 테이블을 탁 하고 쳤다.“먹기 싫으면 먹지 마! 여기가 네 집인 줄 알아? 교양이 하나도 없네!”최신애의 이런 모습에도 현채영은 전혀 화를 내지 않았고 그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어머님이 안 좋은 거 드실까 봐 걱정돼서 그러죠. 어떤 사람들은 안 좋은 물건을 좋은 것이라고 속여서 팔아요. 먹는 음식은 자기가 즐겨 먹는 음식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음식 재료 자체도 좋아야 하는 거 아니겠어요?”말을 마친 현채영은 죽을 내려놓으며 옆에 있는 하인을 향해 말했다.“집에 두유 있나요? 없으면 따뜻한 우유 한 잔 주세요.”성격이 좋은 온혁진도 자리가 가시방석이라 밥을 먹자마자 출근했다.최신애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임유희 앞인지라 뭐라고 말하지 못했다.두유와 찐만두 두 개를 먹은 현채영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온유한에게 말했다.“어젯밤 늦게 자서 난 조금만 더 잘게. 안 그러면 피부가 안 좋아져.”그 말에 온유한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마디 했다.“방 앞까지 데려다줄게.”“어머님, 유희 씨, 그럼 전 먼저 일어날게요.”현채영은 온유한의 팔짱을 끼며 한마디 인사하고는 온유한과 같이 자리를 떴다.그 모습에 화가 난 최신애는 옆에 있는 임유희를 다독이며 말했다.“너무해! 유한이가 일부러 나 화나게 하려고 그러는 것이니 넌 신경 쓰지 마.”임유희는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 그런데 어머님, 유한 오빠가 저를 점점 더 차갑게 대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최신애도 한숨을 내쉬었다.“3년 전 그날, 너희 둘이 진짜로 잤더라면 좋았을 텐데… 유한이가 어떤 애인지 내가 제일 잘 알아. 그때 강지아가 아무리 좋아도 널 건드린 이상 분명 책임지려 했을 거야.”사실 그 일은 임유희에게 언급하기조차 싫은 인생의 오점이었다.
최신애는 건강상의 이유를 대면서 임유희더러 온씨 저택에 머물라고 했다.하지만 뜻은 분명했다. 온유한과 자주 부딪히면서 정을 쌓으라는 것이었다.일찍 최신애의 이런 수법을 경험한 온유한은 두 번 다시 그녀에게 휘둘리지 않았다.“어머님이 편찮으시니 저도 남아서 모실게요.”현채영이 웃으며 말하자 온유한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사람 많으면 시끌벅적한 게 좋지 뭐. 우리 어머니도 시끌벅적한 거 좋아하니까 승낙할 거야.”최신애는 또 한 번 테이블을 내리칠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고 싸늘하게 말했다.“아니야. 유희만 있어도 돼.”현채영이 웃으며 말했다.“어머니, 어려워하지 마세요. 임유희 씨는 일도 나가야 하잖아요. 저는 시간이 많으니 어머니와 같이 쇼핑도 하고 꽃도 기를게요. 모르시겠지만 제가 차도와 꽃꽂이, 그리고 장기까지 다 배웠어요. 참, 피아노와 바이올린도 칠 줄 알아요. 답답하시면 피아노 한 곡 쳐 드릴게요.”최신애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이렇게 뻔뻔한 여자는 처음이라 최신애는 순간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온유한은 최신애가 뭐라고 하기 전에 옆에 있는 하인에게 지시를 내렸다.“뒤에 있는 두 객실을 치워 주세요. 당분간 임유희 씨와 현채영 씨가 묵을 거예요.”하인은 최신애의 눈피를 살폈고 최신애는 이내 화를 냈다.“온유한, 대체 뭘 어쩌려는 거야?”온유한이 최신애를 바라보며 말했다.“아니면 채영이는 나와 같은 방 쓰게 할까요?”“너 정말!”최신애가 임유희를 집에 남겨두겠다고 하는 한 온유한도 현채영을 집에 남겨둘 것임을 주위 사람들은 이내 알아챘다.최신애는 화가 났지만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임유희의 부모님은 화가 나서 밥도 먹지 않고 가버렸지만 임유희는 온유한의 집에 남겨 뒀다.결국 최씨 가문 사람들만 온씨 저택에 남아 밥을 먹게 되었다. 하지만 최신애는 여전히 최금성이 온유한을 설득하기를 바랐다.“대체 무슨 생각을 하기에 형더러 와서 나를 타이르라고 하는 거야?”최금성은 피식 웃었다.“그러니까, 나도 몰라.”
분위기가 싸늘해졌고 임유희 부모님의 안색도 매우 어두웠다.임유희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3년 동안 좋아했던 온유한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정말 가슴이 찢어질 듯했다.온유한은 주위 사람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현채영을 끌어안고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온씨 집안 하인들도 현채영을 쫓아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임근우가 테이블을 치며 말했다.“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요? 이 집 사람들은 내 딸이 안중에도 없나요?”최신애가 일 처리를 제대로 못 하긴 했지만 임근우가 면전에서 책상을 두드리는 것을 온혁진은 참을 수 없었다.애초에 임씨 가문이 대놓고 온씨 가문의 뒤를 쫓아다니지 않았더라면 온씨 가문은 임씨 가문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 모든 일은 최신애가 저지른 것이었기에 온혁진은 최신애에게 이 난장판을 넘기고 본인은 찻잔을 들고 빠져나왔다.최씨 가문 식구들도 마찬가지로 좌불안석이다. 보다 못한 최금성의 엄마 황은숙이 최신애를 도와 상황 수습에 나섰다.타이르고 위로하느라 거실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이때 임유희가 일어서더니 온유한에게 다가갔다.그나마 안색은 조금 전에 비해 한결 누그러졌다.“유한 오빠, 나가서 얘기 좀 해요.”온유한이 다리를 꼰 채 말했다.“우리가 할 얘기가 있나? 그리고 그쪽과 같이 나가면 우리 채영이가 질투할 거야.”옆에 있던 현채영이 한마디 했다.“가봐, 질투 안 할 테니.”온유한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정말 질투 안 할 거야?”현채영이 콧소리를 내며 말했다.“내가 질투할지 말지는 가보면 알 거 아니야?”두 사람은 앞에 서 있는 임유희를 아랑곳하지 않고 대놓고 대화를 주고받았다.주먹을 꽉 쥔 임유희는 기가 막혀 숨이 안 쉬어질 정도였다.“그래. 하고 싶은 말이 뭔데?”온유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다.임유희는 심호흡을 여러 번 하고 나서야 온유한을 향해 말했다.“일부러 그러는 거죠? 날 난처하게 하고 어머니와 맞서는 이유, 다 강지아 씨 때문이죠?”온유한은 피식 웃었다.
온유한이 일부러 맞서는 것을 최신애는 알 수 있었다.어젯밤에 온유한에게 보여주려 했던 사진을 그의 앞에 던지며 말했다.“그럼 네 눈으로 봐! 이 여자와 결혼할 거야?”온유한은 힐끗 보고 말했다.“안 될 것도 없죠.”“개자식아! 너 요즘 이런 여자와 어울리느라 매일 늦게 들어온 거야? 집안 상황을 몰라서 그래?”“그래서 뭐요?”온유한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현씨 가문이 지금은 파산했지만 예전에 잘나갈 때는 가장 바랐던 며느릿감 아니었어요?”“예전은 예전이고! 예전에는 현씨 가문 딸이었지만 지금은 돈만 주면 뭐든 다 하는 여자야. 그때와 지금이 같아?”온유한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예전에는 어떤 사람이었든 지금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어요.”“무슨 뜻이야?”최신애는 순간 멍해졌다.“설마 진짜로 데리고 올 것은 아니지?”“안 될 이유라도 있나요?”“당연히 안 되지!”최신애는 화가 나서 테이블을 쳤다.“죽는 한이 있어도 이런 여자를 우리 온씨 가문에 들일 수는 없어. 잘 들어, 오늘 퇴근하자마자 바로 집에 들어와. 오늘 유희와 결혼 날짜 잡을 거야. 이것은 임씨 가문에 대한 우리의 약속이기도 해. 잊지 마. 임씨 가문이 아니었더라면 지금의 온씨 가문도 없었을 테니.”“그래요?”온유한은 여전히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온씨 가문과 강씨 가문의 인연을 끊게 된 게 누구 때문인데요? 그런데 지금 나더러 임유희와 결혼하라고요? 내 인생이에요.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세요. 내가 그렇게 쉽게 말을 들을 사람처럼 보여요? 순진하네, 온 여사. 더 이상 강요하지 마세요!”온유한은 밥도 먹지 않은 채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한편 최신애는 화가 나서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성격상,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저녁 식사에 그녀는 온씨 가문 사람들뿐만 아니라 최씨 가문 사람들까지 초대했다.최신애는 온유한을 설득하기 위해 최금성도 불렀다.이제 모든 사람이 다 도착했지만 온유한만 오지 않았다.최신애는 끊임없이 그에게 전화를 걸
“집에 돌아올 줄은 알아?”벽에 걸린 시계의 시간을 본 최신애는 더욱 화를 냈다.“지금 몇 시인지 좀 봐! 하루 종일 무엇을 하기에 점점 늦게 들어오는 거야?”하지만 오늘 심하게 취한 온유한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그저 눈앞의 사람이 귀찮다고 생각했고 빨간 립스틱을 바른 저 입은 벌렁거릴 때마다 섬뜩하게 느껴졌다.“누구야, 비켜! 막지 마.”운전기사는 제대로 서지조차 못하는 온유한을 붙잡으며 말했다.“사모님, 도련님이 많이 취했으니 할 말이 있으면 내일 하세요.”최신애는 가슴이 아프면서도 화가 났다.“얘 오늘 어디 간 거야?”“최의현 도련님의 약혼식에 참석했다가 끝나고 에이프릴로 갔습니다.”“거기서 여태껏 술을 마셨다고?”“네...”최신애는 머리가 지끈거렸다.“얼른 방으로 데려가 눕혀... 아줌마, 내일 유한이에게 해장국을 끓여줘...”온유한을 방에 눕힌 뒤 최신애는 지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돌아갔다.일찍 잠이 든 온혁진을 본 최신애는 화가 치밀어 손바닥으로 때려 그를 깨웠다.“아들이 이 꼴인데 잠이 와요?”온혁진은 싫증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누가 이렇게 만들었는데?”“무슨 뜻이에요?”그 말에 화가 난 최신애는 모든 불만을 온혁진에게 쏟아냈다.“다 유한이를 위해서 그런 거잖아요. 당신, 아버지로서 유한이를 위해 한 게 뭔데요?”온혁진은 더 이상 잘 수 없어 침대에서 일어났다.“아들 일, 관여하고 싶지 않아. 어차피 언젠가는 온씨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텐데 평생 의사로 살 수는 없잖아. 왜 그렇게 유한이를 핍박하는 거야? 죄만 안 짓고 사고만 안 치면 상관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당신도 신경 쓰지 마. 예전의 우리 아들이 아니라고.”하지만 최신애는 다른 일을 생각했다.“강씨 가문에서 투자를 회수한 후 임씨 가문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버티지 못했을 거예요. 유희가 3년째 유한이를 기다리고 있다고요. 우리 아들도 이제 서른 다섯이에요. 유희 집안에 정식으로 결혼에 대해 얘기해야 하지
최의현의 약혼녀도 서울에서 유명한 재벌 집 딸로 이 결혼은 가문에서 맺어 준 것이었다.여자는 단아한 외모의 전형적인 재벌 집 숙녀로 최의현의 전 여자친구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최의현 같은 남자가 평소에 아무리 날라리라고 해도 배우자는 절대 본인과 비슷한 사람을 선택하지 않는다.온유한이 조금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최의현은 그가 안 오는 줄 알았다.“한참을 기다렸잖아. 네 자리는 지찬이 옆인데 괜찮지?”최의현은 두 사람을 화해시키기 위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응.”강지찬과 한규진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발견한 온유한은 본인 자리가 두 사람의 중간임을 알았다.정말 최의현다운 섬세한 배치였다.그 테이블로 다가간 온유한은 예전처럼 한 명씩 인사했다.“지찬아, 규진아, 은우야...”강지찬만 빼고 그의 인사를 다 받아줬고 온유한도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한규진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물었다.“요즘 뭐 해?”“별일 없이 바쁘기만 하지 뭐.”온유한은 말을 아꼈다.몇 년간 수술대에 서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병원은 다니고 있었다. 온혁진의 나이가 많아 온유한이 병원과 공장 양쪽 모두 돌봐야 했다.강지찬이 투자를 회수한 후 공장 건설이 하마터면 무산될 뻔했다.그러다가 최신애의 예상처럼 임씨 가문에서 투자를 한 덕분에 간신히 버텼다.다만 투자라는 것은 원래 접대도 많은 법, 온씨 부자는 매일 같이 각 투자자들을 접대했다.한규진이 온유한의 옆에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아가 곧 온대.”깜짝 놀란 온유한이 손을 심하게 떨었다. 그 바람에 술잔에 든 술이 쏟아질 뻔했다.몇 초 후, 그는 간신히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그래?”“서원준과의 관계를 명확히 발표한다는데 약혼하러 오는 것인지 모르겠어.”온유한은 계속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지아도 이제 나이를 먹었으니 시집갈 때가 되었지. 서원준 씨, 사람 괜찮은 것 같아.”일부러 목소리를 낮추지 않고 말했기에 옆에서 그 말을 들은 강지찬은 온유한을 흘겨봤다.약혼식이 끝난 후 온유한
“온 선생님, 제발요. 주임님이 의사를 데려오기 전에 오지 말라고 하셨어요.”구원 의사를 찾으러 온 젊은 간호사는 울음을 터뜨릴 지경이었다.온유한은 아무 말 없이 일어나 밖으로 나간 뒤, 전성호의 책상을 한 번 두드렸다.“따라와.”전성호는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진료를 시작했다. 그는 예전에 응급실에 근무한 적이 있었다.오늘 대형 교통사고 때문에 응급실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모두들 바삐 돌아쳤다.온유한을 발견한 응급실 주임은 마치 구세주를 발견한 듯 눈을 반짝였다.“온 선생님, 잘 왔어요. 흉부를 수술해야 할 환자가 생겼는데 온 선생에게 맡길게요.”늙은 주임 의사가 피 묻은 장갑을 벗자 조수가 급히 새 장갑으로 갈아끼워줬다. 그러고는 다시 수술실로 들어갔다.온유한은 전성호를 데리고 수술실로 향했다. 안에는 보조 의사가 기다리고 있었다.“온 선생님, 수술대에 설 수 있겠어요?”전성호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온유한이 3년 동안 메스를 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네가 같이해.”“네?”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두 사람은 손을 씻고 소독을 하기 시작했다.무균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준비를 마칠 때까지 전성호는 온유한이 수술대에 선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환자는 이미 마취한 상태로 모든 것이 준비되었으며 모두가 온유한만 바라보고 있었다.온유한은 전성호를 보고 턱을 한 번 치켜들며 말했다.“이 수술은 네가 해.”“뭐라고요?!”전성호는 어안이 벙벙했다.“선생님, 저는 선생님과 주임님의 조수로만 해봤습니다.”온유한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그러니까 지금이 기회야. 환자의 상태를 봤는데 그렇게 심각한 것은 아닌 것 같아. 안 할 거야?”“저...”전성호는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외과 의사라면 언젠가는 큰 수술을 집도할 수 있어야 했다.온유한이 3년 동안 퇴폐적인 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가장 우수한 학생인 전성호는 진작 수술대에 섰을 것이다.“내가 옆에서 도와줄게.”온유한의 말에 전성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지만 이내 머리를
3년 후.밖에 문 여는 소리가 들리자 최신애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새벽 한 시가 되기 전, 오늘은 그나마 이른 편이다.문이 열리더니 비틀거리며 들어오는 그림자가 보였다.하인이 얼른 가서 그의 손에 있는 차 키 등을 받은 뒤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도련님, 사모님이 아직 안 주무시고 기다리고 계십니다.”오늘 저녁, 온유한은 평소보다 덜 취했기에 아직 멀쩡한 상태였다.“어머, 온 여사가 나를 기다린다고?”비틀비틀 걸어간 온유한은 실크 가운을 입고 거실에 앉아 그를 노려보는 최신애를 발견했다.“온 여사님, 오늘 또 나를 혼낼 건가요?”‘온 여사'라는 말에 최신애는 화가 났다. 온유한이 강지아와 헤어지고 난 뒤로는 그녀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았다.“또 술 마신 거야? 온유한, 넌 서울에서 가장 젊고 유능한 흉부외과 의사였어. 기억나?”“의사?”온유한이 허탈하게 웃었다.“메스를 든 지가 언제인데요? 3년 전 일이에요.”몇 발짝 앞으로 다가간 최신애는 온유한에게 삿대질하며 말했다.“기억하고 있네? 그렇게 오랫동안 힘들게 공부해 놓고 여자 때문에 너 자신을 다 망치다니. 우리에게 미안하지도 않아?”“이게 다 온 여사 덕분이잖아요?”온유한이 최신애를 싸늘하게 쳐다보며 말했다.“지아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면서요? 이제 다시 수술 못 하는데 그래도 지아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요?”최신애는 가슴이 아팠다.“너 정말! 나에게 복수하려고 일부러 너 스스로를 망친 거야? 미쳤어?”“아니요! 미치지 않았어요!”온유한은 희미하게 떨리는 그의 왼쪽 손을 최신애에게 들어 보이며 말했다.“아주 멀쩡해요. 그 어느 때보다 멀쩡하다고요. 아들이 이런 모습이어도 잘난 척할 건가요?”‘찰싹’하는 소리와 함께 최신애가 온유한의 뺨을 후려갈겼다.“개자식, 나 약 올리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지?”온유한은 아무 말 없이 비틀거리며 방으로 돌아갔다.3년이 지났다.그 사이 강지아는 여러 번 돌아왔지만 온유한을 만나주지 않았다.처음에는 미친
강지아는 상처가 다 낫기도 전에 급하게 떠났다.작업실의 문은 닫지 않았지만 국내 업무는 모두 직원들에게 맡겼다. 그녀는 온라인으로 중요한 결정만 했다.“혼자 떠났고 서원준은 가지 않았어. 지찬이와 형수 외에는 어디로 갔는지 아는 사람이 없어. 넌 못 들었지?”최의현에 말에 온유한이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못 들었어.”전화를 끊은 온유한은 한참 동안 멍해 있었다.며칠 전 강지아에게 계속 전화를 하고 메시지를 보냈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그러다가 갑자기 어느 날 전화 연결이 안 되었고 메시지도 발송이 안 되었다.강지아가 그를 차단했던 것이다.한참 생각하던 온유한은 미친 듯이 밖으로 뛰쳐나갔다.그를 본 의사와 간호사는 깜짝 놀랐다.“온 선생님, 다리 괜찮아요? 저렇게 뛰면...”“무슨 일이지? 온 선생님 표정이 너무 무서워.”정유진이 저녁 먹을 준비를 할 때 하인이 들어와 온유한이 밖에서 기다린다고 했다.이내 모직 코트 안에 흰 가운을 입은 온유한이 정유진 앞에 나타났다.“형수님, 지아를 만나게 해주세요.”정유진이 한숨을 내쉬었다.“이미 간 걸 알면서 왜 여기까지 온 거예요...”온유한은 아픈 다리 때문에 땀범벅이 되었다.“진짜로 떠났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요.”정유진은 온유한의 다리를 힐끗 본 후 말했다.“하지만 확실히 갔어요. 일단 저녁 먹고 병원에 다시 가세요.”온유한은 그 말을 듣지 못한 듯 계속 물었다.“왜 떠나는데요?”정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어디 간 거예요?”정유진이 계속 대답을 하지 않자 온유한이 혼자서 중얼거렸다.“나를 못 믿겠다고 했던 말이 사실이었네요. 서울로 돌아가면 바로 혼인신고를 하자고 했는데 안 믿었어요. 이렇게 그냥 가버리면 진짜로 나랑 헤어지자는 것일까요?”정유진은 넋이 나간 온유한을 보고는 정명학에게 눈짓을 했다.정명학은 앞으로 걸어 나와 온유한을 잡아당겨 식탁에 앉혔다.“지아가 바람 쐬러 나갔다고 생각하고 일단 밥부터 먹어. 밥을 먹고 나서 병원에 가서 다리부터 다시 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