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찬은 속으로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정유진과 강지현에 연관 되는 일이라면 그는 마치 무서운 짐승처럼 변했고 모든 걸 갈기갈기 찢고 싶었다.강지찬의 핏발이 가득한 눈을 본 정유진은 마음이 오싹해졌고 그제야 방금 말을 잘못했다는 걸 알아차렸다.“잘못 말했어요. 연우는 올해 곧 다섯 살이에요.”그러자 강지찬은 표정이 굳어졌다.“뭐라고?”그때 장형준이 다가와서 말렸다.“대표님, 진정하세요. 일단 손을 놓아주세요. 그러다간 사모님이 다치시겠어요.”그러자 강지찬은 마치 깜짝 놀란 듯 바로 손을 놓았고 자신 때문에 벌겋게 된 정유진의 목을 보자 눈살을 찌푸렸다.하지만 그의 말투는 여전히 차가웠다.“정유진, 오늘 나한테 똑바로 말해. 저 아이는 어떻게 된 일이야?”정유진은 목이 따가운 느낌이 들었다. 크게 화를 내는 강지찬은 힘 조절이 전혀 안 되었다. 그녀는 방금 숨이 막혀 죽는 줄 알았다.“이름은 정연우예요. 생일은 1월 14일이죠.”그 말을 들은 강지찬은 놀라서 몸이 떨렸다.1월 14일, 그는 평생 그해의 1월 14일을 잊을 수 없었다.그 이튿날이 바로 보름날이었기에 그는 원래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전날에 정유진은 고세연 때문에 유산되었고 정유진은 그날부터 태안병원에서 아예 사라졌다가 작년에야 돌아왔다.강지찬은 정유진의 어깨를 움켜쥐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그게 무슨 말이야? 연우... 연우가 그 아이였어?”그러자 정유진이 고개를 끄덕이었다.강지찬은 눈에서는 여전히 화가 치밀어 올랐고 원하니 더욱 깊어진 듯했다.“정유진, 이 모진 여자야. 내가 너한테 그렇게 미안한 짓을 했어? 왜 나한테 이렇게 복수하는 거야?”“저는...”정유진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내저었다.“복수가 아니에요. 그때는 단지 당신에게서 떨어지고 싶었어요.”“복수가 아니라면 어떻게 내 아이를 데리고 강지현과 함께 멀리 떠날 수 있어? 복수가 아니라면 넌 어떻게 나랑 딸을 떨어지게 하고 심지어 다른 남자
연우는 울지도 보채지도 않고 순순히 강지찬에게 안긴 채 차에 올랐다.연우는 지금 이 남자가 화를 내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지만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차에 오르자 강지찬과 연우는 서로를 바라보기 시작했다.어색함을 느낀 장형준은 마른기침하며 아이가 놀랄 수 있으니 강지찬에게 정색하지 말라고 눈짓을 주었다.연우는 답답한 얼굴로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다가 먼저 입을 열었다.“정말 제 아빠세요?”강지찬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긴장했던 어깨에 힘이 풀렸다.“네 이름은 정연우야?”“네. 전 정연우라고 해요.”그러자 강지찬은 코웃음을 쳤다.“내 아빠인지 아닌지 아직 말해주지 않았잖아요?”연우는 그 문제에 집착했다.강지찬이 대답했다.“그래.”조사할 필요도 없이 강지찬은 연우가 바로 자기 딸이라고 매우 확신했다.연우는 강지찬을 한참 지켜보다가 이 사실을 아주 담담하게 받아들였다.“알겠어요.”그 모습을 본 강지찬은 기분이 살짝 언짢았다.“왜? 마음에 안 들어?”그러자 연우가 입을 삐죽이며 대답했다.“제가 생각했던 아빠랑 좀 달라서요.”“무엇이 다른데?”“아빠가 날 찾으면 깜짝 놀라서 기뻐할 줄 알았어요. 저는 그만큼 사랑스러운 아이죠. 하지만 그러시지 않았어요.”강지천은 할 말이 없었다.“...”그는 자기 딸이 맞다고 재차 확신했다.“난 지금 아직 놀라움에서 빠져나오지 못해서 기뻐하지 않아 보이는 거야.”강지천은 그렇게 말하면서 어색하게 연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하지만 연우는 대인배처럼 너그러웠다.“괜찮아요. 이해할 수 있어요. 저도 지금 좀 놀란 상태예요.”그러고는 한숨을 쉬며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그런 모습을 본 강지찬은 다시 한번 할 말을 잃었다.“...”운전하고 있던 장형준도 깜짝 놀랐다.‘대표님이 고작 다섯 살짜리 꼬마 때문에 말문이 막힌 거야?’그때 휴대 전화가 울렸고 보니 최의현이었다.“도대체 무슨 일이야? 정말 정유진 씨한테 간 거야? 아이는 만났어?”그러자 강지찬이 말했다.“만났어.”“정말
귀염둥이 손녀가 강지찬에게 끌려갔다는 소식을 들은 이명자는 놀라서 쓰러질 뻔했다.그러자 정명학이 그녀를 위로했다.“지찬이는 아이의 아버지이니 분명히 연우에게 잘 대해줄 거야. 걱정하지 마.”비록 말을 그렇게 했지만 사실 그도 몹시 걱정하고 있었다.정명학과 이명자는 연우를 어릴 적부터 키웠다. 이렇게 몇 년 동안 하루도 그들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그들이 친척 집에 갔다 온 후부터 연우를 보지 못하자 마음이 매우 복잡했다.“유진아, 지찬이가 아이를 언제 데려오겠다는 말은 안 했어?”이명자가 물었다.“그런 말은 안 했어요.”정유진은 부모님께 강지찬이 화를 내며 돌아갔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게다가 강지찬 같은 사람이 아이를 가지고 갔다는 건 결코 쉽게 생각해서는 될 일이 아니었다.“아빠,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며칠 후에 제가 가서 연우를 데려올게요.”“아직도 며칠이나 더 있어야 해?”이명자는 좀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 그녀는 지금 당장이라도 가서 귀염둥이 손녀를 데려오고 싶었다.밤은 깊어졌고 정유진은 아무리 해도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강지찬이 연우에게 잘 대해주지 못할까 봐 걱정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어린 연우가 낯선 환경에서 무서워할까 봐 걱정했다.그녀는 휴대 전화를 꺼내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에는 강지찬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러자 전화 너머로 곧 강지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슨 일이야?”“연우는 자나요?”강지환은 침대에 앉아 장난감을 끌어안고 자려 하지 않는 꼬맹이를 유심히 바라보며 말했다.“아직 안 자.”지금 벌써 10시였다. 예전 같으면 연우는 이미 자고 있었을 것이다.“연우에게 전화를 받으라고 하세요. 제가 말할게요.”“싫어.”그러자 정유진은 말문이 막혔다.“...”강지찬은 정유진과 더 이상 말도 하고 싶지 않아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강지찬은 분명히 아직도 화를 내고 있었다.핑크색 잠옷을 입은 연우는 품에 안겨 있던 곰 인형을 툭툭 치면서 말했다.“엄마 전화예요?”강지찬은 연우의 예리함에
정유진은 밤새 잠을 못 잤고 정명학과 이명자도 분명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을 것이다.정유진이 난처해질 줄 알면서도 이명자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아니면 강 서방에게 전화해서 우리 연우가 어젯밤에 잘 잤는지 울었는지 물어보는 건 어때?”이명자는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어젯밤에 정유진은 강지찬에게 전화했지만, 그는 사정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하지만 정유진은 딸이 너무 걱정되었기에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강지찬에게 전화했다.강지찬과 연우는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상이 부러지도록 많은 음식을 본 연우는 멍해졌다.연우의 뒤에는 방경숙과 다른 아주머니가 서서 그녀의 반찬을 세팅해 주고 있었고 다른 한 아주머니는 연우에게 우유를 끓여주고 있었다. 온 집안의 도우미들이 모두 연우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강지찬은 전화가 온 것을 보고 일어나 한쪽으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야?”정유진의 목소리는 매우 초조했다.“연우가 어젯밤에 잘 잤어요? 연우는 처음으로 집을 떠나 낯선 곳으로 갔어요. 무서워서 울지는 않았어요?”강지찬은 맛있게 아침을 먹고 있는 연우를 들여다보고는 차갑게 말했다.“내 딸을 데리고 외국으로 떠날 때는 딸을 잃은 아빠가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어?”그러자 정유진은 할 말을 잃었다.“...”강지찬은 또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어때? 강서방이 뭐라고 해?”정유진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아직도 저에게 화가 나 있는 것 같아요. 연우의 상황을 알려주려고 하지 않아요.”“그럼 이제 어떡하지?”이명자는 더욱 조급해졌고 그녀는 정명학을 밀치면서 말했다.“당신이 전화해 봐요.”강지찬은 장인어른과 장모님께 항상 공손하게 대했으니 정명학이 전화하면 좀 다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정명학은 생각해 보더니 전화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강서방은 지금 화가 치밀어 올랐으니 좀 더 기다리는 게 낫겠어. 연우는 강서방의 친딸이지. 분명히 아이한테는 푸대접하지 않을 것이야. 다들 걱정하
오후가 되자 강홍식도 돌아왔다. 그는 강지아의 품속에 있는 연우를 보자 안색이 좋지 않아 보였다.“그때 유산했다 하지 않았어? 이제 와서 아이가 나타났으니 네 아이인 게 확실해?”강홍식은 당시 정유진에게 원래 별로 호감이 없었으니 그녀가 낳은 아이도 당연히 좋아하지 않았다.게다가 손녀였으니 당연히 그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지금 강지찬에게 심한 말을 하니 기분이 좋아졌다.강지찬은 자기 아버지가 여자에게 상처를 받고 마음이 불편한 것을 알았고 부자 둘은 다시 서로에게 험한 말을 주고받기 시작했다.“전 아버지가 아니죠. 이 아이는 제 자식인 게 확실해요.”강홍식은 연우를 보고 정유진은 닮았다는 생각에 눈살을 찌푸렸다.“연우야, 저분은 네 할아버지셔.”강지아는 강홍식을 가리키며 꼬마 연우에게 소개해 주었다.연우는 강홍식을 한 번 쳐다보고는 할아버지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고개를 숙이고 다시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다.“봐봐. 예의도 없이 어른을 만나도 전혀 인사도 하지 않잖아.”강홍식은 연우가 더욱 싫었다. 만약 손자라면 두어 번쯤 더 쳐다봤을 것이다.그러자 강지찬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아버지는 어른티가 전혀 나지 않잖아요.”강지아는 연우를 안고 가버렸다.“연우야, 돌아가서 우리끼리 놀자. 할아버지랑 놀면 재미없어.”“네.”연우는 고개를 세게 끄덕이었다.강홍식은 그 상황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강지아가 연우를 데리고 떠나자 강지찬은 경고하듯 강홍식을 바라보면서 말했다.“전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고 있어요. 정유진의 아이가 죽지 않았던 건 정말 행운이 따랐던 거예요. 아이가 살았다고 해서 고세연이 잘못이 없다는 건 전혀 아니에요. 심지어 그녀의 죄가 많아지면 많아졌지 적어지지는 않았죠. 고세연 때문에 저와 제 아내, 그리고 제 아이가 4~5년 동안 헤어져서 살아야 했어요. 그녀를 단념하게 하세요. 강씨 집안에 한 걸음도 들여놓을 생각도 하지 마세요.”그 말을 들은 강홍식은 화가 나서 얼굴을 붉혔다
강지찬은 차가운 시선으로 강지현을 노려보면서 코웃음을 쳤다.“마누라도, 아이도, 성원도 전부 내 것인데. 네가 뭐라고 줄지 안 줄지 결정하는 거야?”하지만 강지현은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여전히 침착한 표정이었다.“형은 당연히 빼앗을 수 있지. 하지만 유진 씨가 연우를 형에게 줄 수 있다고 확신해?”“주든 말든 연우는 나 강지찬의 딸이야!”계단 저쪽에서 작은 그림자가 조용히 난간을 짚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강지현은 웃으며 도발하는 어조로 말했다.“어떻게 형 딸이라고 확신해?”“빌어먹을 자식. 그게 무슨 말이야?”강지찬은 두 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쥐고 강지현에게 날렸다.강지현은 워낙 계속 아팠던 몸이라 주먹을 맞고 날아갈 뻔했다.“강지현, 죽고 싶어?”강지찬은 말하며 바로 다시 주먹질을 해댔다. 거의 강지현을 땅에 밟고 때릴 기세였다.“아저씨!”강지찬은 깜짝 놀랐고 바닥에 누워 있는 강지현을 보았다. 그러자 강지현은 계획대로 되고 있다는 미소를 지었다.강지현은 웃으며 강지찬에게 말했다.“이런 상황에 연우가 형을 택할 것 같아? 아니면 날 택할 것 같아?”“이 새끼가 감히 개수작을 부려?”강지현의 속임수에 당한 강지찬은 화가 치밀어 올라 터질 것만 같았다.그때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려오자, 강지현은 굳어진 얼굴로 강지찬을 바라보며 소리쳤다.“강지찬, 우리 생사 결단을 하자. 난 너와 목숨 걸고 싸울 수 있어. 넌 감히 그럴 수 있겠어?”‘이 새끼가 미쳤어.’연우는 이미 달려 내려왔고 강지찬은 장형준에게 눈짓했다.그러자 장형준은 재빨리 다가가서 연우를 안았다.“아저씨, 아저씨를 때리지 마세요. 빨리 놓아줘요!”연우가 장형준의 품에서 발버둥 쳤다.장형준은 아이를 달랠 줄은 몰랐기에 고통스러웠다. 그는 다섯 살짜리 꼬맹이에게 눈앞에 펼쳐진 복잡한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전혀 몰랐다.강지현은 정말 사악한 수법을 썼다.강지현은 오랜 시간 동안 연우와 함께 해왔고 그녀가 자라는 것을 지켜봤기에 어린 시절 연우의 아빠
연우는 코가 빨개질 정도까지 울었고 불쌍한 모습이었다.강지찬은 장형준의 품에서 연우를 끌어안고 위층으로 올라갔다.“아저씨, 아저씨...”“죽지는 않을 거야.”“...”연우는 자기 친아빠를 보고 무서워서 울음을 멈췄다.강지아는 다급히 뛰쳐나와서 강지찬이 굳은 얼굴로 아이를 안고 있는 것을 보자 즉시 자기가 사고를 쳤다는 것을 깨달았다.“허허. 전화 받는 사이에 요 녀석이 뛰어 내려가더니...”강지찬은 연우를 안고 그의 서재로 갔다.이 서재는 평소에 누가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다. 강지아도 서재 문이 닫히자 감히 두드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녀는 오빠가 무엇을 하려는지 몰랐다.강지찬은 연우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아빠와 딸은 다시 서로 쳐다보기만 했다.연우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직접 종이를 뽑아서 눈물을 닦았다.강지찬은 연우의 그런 모습을 보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는 정말 아이를 돌볼 줄 몰랐다. 특히 지금 같은 상황은 다른 회사와 몇천억 원이 되는 사업을 협상하는 것보다 더 까다로웠다.결국에 어린 연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왜 아저씨를 때린 거죠?”“그건 어른끼리의 일이야.”강지찬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갔다.“뭔가 오해가 있었어. 너도 이제 크면 이해할 수 있을 거야.”연우는 당연히 무슨 오해인지 알 수 없었기에 여전히 고집을 부렸다.“어렸을 때 아저씨가 저랑 놀아주고 맛있는 음식도 만들어주고 엄마가 없을 때는 아저씨,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저와 함께 놀아줬어요. 아빠가 아저씨를 때리니 전 아빠를 미워할 거예요.”그러자 강지찬은 다시 할 말을 잃었다.“...”만약 강지찬과 고세연이 아니었다면 그는 아내와 딸과 4~5년 동안이나 떨어져서 살아야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강지찬은 연우를 탓할 리가 없었다.‘어린 연우가 무엇을 알겠어?’“난 네 아빠야. 네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난 영원히 네 아빠야. 네가 날 좋아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내가 널 좋아하면 돼.”그러자 연우는 큰 눈을 깜빡였다.
강지찬의 전화가 통하지 않자 정유진은 막 떠나려고 했다. 그때 철문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강지현이었다.그는 롱 패딩을 입고 곧장 장유진의 차를 향해 걸어왔다.차에 오르자 장유진은 그의 왼쪽 얼굴이 온통 멍투성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보기만 해도 끔찍했다.“얼굴은... 누가 때렸어요?”강지현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 거의 다 나았어요.”정유진은 그의 안색을 보고 바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차렸다.“강지찬이 때린 거예요? 둘이 또 싸웠어요?”강지현은 자신이 맞은 이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전 아이를 유진 씨에게 돌려주라고 했을 뿐이죠. 형은 허락하지 않았어요.”그리고 그는 말을 이어갔다.“연우는 강씨 저택에서 그래도 잘 지내고 있어요. 온 가족의 사랑을 받고 있어요. 그리고 지아가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형은 지금 아직도 화가 나고 있으니 화가 풀리면 유진 씨와 연우를 만나게 해줄 겁니다.”정유진도 오늘에는 강지찬과 연우를 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딸이 일단 잘 지내고 있다니 어느 정도 안심이 되었다.연휴의 마지막 날, 정유진은 강지아가 그녀를 파티에 초대한다는 전화를 받았다.정유진이 도착하자 많은 사람이 그녀를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그녀는 마음속으로 알고 있었다. 아직 강지찬과 관계가 복잡한데 최근에 갑자기 딸까지 생겼으니 이 사람들은 사석에서 무슨 소문을 퍼뜨리는지 몰랐다.강지아는 그녀를 끌고 가서 오늘 파티를 주최한 사람에게 인사를 한 후 한쪽에 숨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강지아의 입에서 연우는 집에서 잘 지내고 있다는 말이 나오자 정유진도 안심했다.“연우는 잘 보내고 있어요. 하지만 오빠는 잘 보내지 못하죠.”강지아는 입을 삐죽이면서 정유진을 바라보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형수님, 제 큰 오빠와 둘째 오빠 중에 누구를 더 믿어요?”“그게 무슨 말이야?”“그냥 그런 뜻이죠. 누구를 더 믿죠?”“...”정유진은 술잔에 담긴 와인을 지켜보다가 말했다.“나도 모
다행히 주방에서 매일 죽을 끓였기에 현채영의 앞에 죽 한 그릇이 놓여졌다.그러나 한 입 맛본 현채영은 미간을 찌푸렸다.“맛이 이상해요. 음식 재료를 안 좋은 거 쓰신 거 아니에요?”화가 난 최신애는 테이블을 탁 하고 쳤다.“먹기 싫으면 먹지 마! 여기가 네 집인 줄 알아? 교양이 하나도 없네!”최신애의 이런 모습에도 현채영은 전혀 화를 내지 않았고 그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어머님이 안 좋은 거 드실까 봐 걱정돼서 그러죠. 어떤 사람들은 안 좋은 물건을 좋은 것이라고 속여서 팔아요. 먹는 음식은 자기가 즐겨 먹는 음식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음식 재료 자체도 좋아야 하는 거 아니겠어요?”말을 마친 현채영은 죽을 내려놓으며 옆에 있는 하인을 향해 말했다.“집에 두유 있나요? 없으면 따뜻한 우유 한 잔 주세요.”성격이 좋은 온혁진도 자리가 가시방석이라 밥을 먹자마자 출근했다.최신애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임유희 앞인지라 뭐라고 말하지 못했다.두유와 찐만두 두 개를 먹은 현채영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온유한에게 말했다.“어젯밤 늦게 자서 난 조금만 더 잘게. 안 그러면 피부가 안 좋아져.”그 말에 온유한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마디 했다.“방 앞까지 데려다줄게.”“어머님, 유희 씨, 그럼 전 먼저 일어날게요.”현채영은 온유한의 팔짱을 끼며 한마디 인사하고는 온유한과 같이 자리를 떴다.그 모습에 화가 난 최신애는 옆에 있는 임유희를 다독이며 말했다.“너무해! 유한이가 일부러 나 화나게 하려고 그러는 것이니 넌 신경 쓰지 마.”임유희는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 그런데 어머님, 유한 오빠가 저를 점점 더 차갑게 대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최신애도 한숨을 내쉬었다.“3년 전 그날, 너희 둘이 진짜로 잤더라면 좋았을 텐데… 유한이가 어떤 애인지 내가 제일 잘 알아. 그때 강지아가 아무리 좋아도 널 건드린 이상 분명 책임지려 했을 거야.”사실 그 일은 임유희에게 언급하기조차 싫은 인생의 오점이었다.
최신애는 건강상의 이유를 대면서 임유희더러 온씨 저택에 머물라고 했다.하지만 뜻은 분명했다. 온유한과 자주 부딪히면서 정을 쌓으라는 것이었다.일찍 최신애의 이런 수법을 경험한 온유한은 두 번 다시 그녀에게 휘둘리지 않았다.“어머님이 편찮으시니 저도 남아서 모실게요.”현채영이 웃으며 말하자 온유한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사람 많으면 시끌벅적한 게 좋지 뭐. 우리 어머니도 시끌벅적한 거 좋아하니까 승낙할 거야.”최신애는 또 한 번 테이블을 내리칠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고 싸늘하게 말했다.“아니야. 유희만 있어도 돼.”현채영이 웃으며 말했다.“어머니, 어려워하지 마세요. 임유희 씨는 일도 나가야 하잖아요. 저는 시간이 많으니 어머니와 같이 쇼핑도 하고 꽃도 기를게요. 모르시겠지만 제가 차도와 꽃꽂이, 그리고 장기까지 다 배웠어요. 참, 피아노와 바이올린도 칠 줄 알아요. 답답하시면 피아노 한 곡 쳐 드릴게요.”최신애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이렇게 뻔뻔한 여자는 처음이라 최신애는 순간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온유한은 최신애가 뭐라고 하기 전에 옆에 있는 하인에게 지시를 내렸다.“뒤에 있는 두 객실을 치워 주세요. 당분간 임유희 씨와 현채영 씨가 묵을 거예요.”하인은 최신애의 눈피를 살폈고 최신애는 이내 화를 냈다.“온유한, 대체 뭘 어쩌려는 거야?”온유한이 최신애를 바라보며 말했다.“아니면 채영이는 나와 같은 방 쓰게 할까요?”“너 정말!”최신애가 임유희를 집에 남겨두겠다고 하는 한 온유한도 현채영을 집에 남겨둘 것임을 주위 사람들은 이내 알아챘다.최신애는 화가 났지만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임유희의 부모님은 화가 나서 밥도 먹지 않고 가버렸지만 임유희는 온유한의 집에 남겨 뒀다.결국 최씨 가문 사람들만 온씨 저택에 남아 밥을 먹게 되었다. 하지만 최신애는 여전히 최금성이 온유한을 설득하기를 바랐다.“대체 무슨 생각을 하기에 형더러 와서 나를 타이르라고 하는 거야?”최금성은 피식 웃었다.“그러니까, 나도 몰라.”
분위기가 싸늘해졌고 임유희 부모님의 안색도 매우 어두웠다.임유희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3년 동안 좋아했던 온유한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정말 가슴이 찢어질 듯했다.온유한은 주위 사람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현채영을 끌어안고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온씨 집안 하인들도 현채영을 쫓아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임근우가 테이블을 치며 말했다.“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요? 이 집 사람들은 내 딸이 안중에도 없나요?”최신애가 일 처리를 제대로 못 하긴 했지만 임근우가 면전에서 책상을 두드리는 것을 온혁진은 참을 수 없었다.애초에 임씨 가문이 대놓고 온씨 가문의 뒤를 쫓아다니지 않았더라면 온씨 가문은 임씨 가문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 모든 일은 최신애가 저지른 것이었기에 온혁진은 최신애에게 이 난장판을 넘기고 본인은 찻잔을 들고 빠져나왔다.최씨 가문 식구들도 마찬가지로 좌불안석이다. 보다 못한 최금성의 엄마 황은숙이 최신애를 도와 상황 수습에 나섰다.타이르고 위로하느라 거실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이때 임유희가 일어서더니 온유한에게 다가갔다.그나마 안색은 조금 전에 비해 한결 누그러졌다.“유한 오빠, 나가서 얘기 좀 해요.”온유한이 다리를 꼰 채 말했다.“우리가 할 얘기가 있나? 그리고 그쪽과 같이 나가면 우리 채영이가 질투할 거야.”옆에 있던 현채영이 한마디 했다.“가봐, 질투 안 할 테니.”온유한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정말 질투 안 할 거야?”현채영이 콧소리를 내며 말했다.“내가 질투할지 말지는 가보면 알 거 아니야?”두 사람은 앞에 서 있는 임유희를 아랑곳하지 않고 대놓고 대화를 주고받았다.주먹을 꽉 쥔 임유희는 기가 막혀 숨이 안 쉬어질 정도였다.“그래. 하고 싶은 말이 뭔데?”온유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다.임유희는 심호흡을 여러 번 하고 나서야 온유한을 향해 말했다.“일부러 그러는 거죠? 날 난처하게 하고 어머니와 맞서는 이유, 다 강지아 씨 때문이죠?”온유한은 피식 웃었다.
온유한이 일부러 맞서는 것을 최신애는 알 수 있었다.어젯밤에 온유한에게 보여주려 했던 사진을 그의 앞에 던지며 말했다.“그럼 네 눈으로 봐! 이 여자와 결혼할 거야?”온유한은 힐끗 보고 말했다.“안 될 것도 없죠.”“개자식아! 너 요즘 이런 여자와 어울리느라 매일 늦게 들어온 거야? 집안 상황을 몰라서 그래?”“그래서 뭐요?”온유한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현씨 가문이 지금은 파산했지만 예전에 잘나갈 때는 가장 바랐던 며느릿감 아니었어요?”“예전은 예전이고! 예전에는 현씨 가문 딸이었지만 지금은 돈만 주면 뭐든 다 하는 여자야. 그때와 지금이 같아?”온유한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예전에는 어떤 사람이었든 지금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어요.”“무슨 뜻이야?”최신애는 순간 멍해졌다.“설마 진짜로 데리고 올 것은 아니지?”“안 될 이유라도 있나요?”“당연히 안 되지!”최신애는 화가 나서 테이블을 쳤다.“죽는 한이 있어도 이런 여자를 우리 온씨 가문에 들일 수는 없어. 잘 들어, 오늘 퇴근하자마자 바로 집에 들어와. 오늘 유희와 결혼 날짜 잡을 거야. 이것은 임씨 가문에 대한 우리의 약속이기도 해. 잊지 마. 임씨 가문이 아니었더라면 지금의 온씨 가문도 없었을 테니.”“그래요?”온유한은 여전히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온씨 가문과 강씨 가문의 인연을 끊게 된 게 누구 때문인데요? 그런데 지금 나더러 임유희와 결혼하라고요? 내 인생이에요.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세요. 내가 그렇게 쉽게 말을 들을 사람처럼 보여요? 순진하네, 온 여사. 더 이상 강요하지 마세요!”온유한은 밥도 먹지 않은 채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한편 최신애는 화가 나서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성격상,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저녁 식사에 그녀는 온씨 가문 사람들뿐만 아니라 최씨 가문 사람들까지 초대했다.최신애는 온유한을 설득하기 위해 최금성도 불렀다.이제 모든 사람이 다 도착했지만 온유한만 오지 않았다.최신애는 끊임없이 그에게 전화를 걸
“집에 돌아올 줄은 알아?”벽에 걸린 시계의 시간을 본 최신애는 더욱 화를 냈다.“지금 몇 시인지 좀 봐! 하루 종일 무엇을 하기에 점점 늦게 들어오는 거야?”하지만 오늘 심하게 취한 온유한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그저 눈앞의 사람이 귀찮다고 생각했고 빨간 립스틱을 바른 저 입은 벌렁거릴 때마다 섬뜩하게 느껴졌다.“누구야, 비켜! 막지 마.”운전기사는 제대로 서지조차 못하는 온유한을 붙잡으며 말했다.“사모님, 도련님이 많이 취했으니 할 말이 있으면 내일 하세요.”최신애는 가슴이 아프면서도 화가 났다.“얘 오늘 어디 간 거야?”“최의현 도련님의 약혼식에 참석했다가 끝나고 에이프릴로 갔습니다.”“거기서 여태껏 술을 마셨다고?”“네...”최신애는 머리가 지끈거렸다.“얼른 방으로 데려가 눕혀... 아줌마, 내일 유한이에게 해장국을 끓여줘...”온유한을 방에 눕힌 뒤 최신애는 지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돌아갔다.일찍 잠이 든 온혁진을 본 최신애는 화가 치밀어 손바닥으로 때려 그를 깨웠다.“아들이 이 꼴인데 잠이 와요?”온혁진은 싫증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누가 이렇게 만들었는데?”“무슨 뜻이에요?”그 말에 화가 난 최신애는 모든 불만을 온혁진에게 쏟아냈다.“다 유한이를 위해서 그런 거잖아요. 당신, 아버지로서 유한이를 위해 한 게 뭔데요?”온혁진은 더 이상 잘 수 없어 침대에서 일어났다.“아들 일, 관여하고 싶지 않아. 어차피 언젠가는 온씨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텐데 평생 의사로 살 수는 없잖아. 왜 그렇게 유한이를 핍박하는 거야? 죄만 안 짓고 사고만 안 치면 상관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당신도 신경 쓰지 마. 예전의 우리 아들이 아니라고.”하지만 최신애는 다른 일을 생각했다.“강씨 가문에서 투자를 회수한 후 임씨 가문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버티지 못했을 거예요. 유희가 3년째 유한이를 기다리고 있다고요. 우리 아들도 이제 서른 다섯이에요. 유희 집안에 정식으로 결혼에 대해 얘기해야 하지
최의현의 약혼녀도 서울에서 유명한 재벌 집 딸로 이 결혼은 가문에서 맺어 준 것이었다.여자는 단아한 외모의 전형적인 재벌 집 숙녀로 최의현의 전 여자친구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최의현 같은 남자가 평소에 아무리 날라리라고 해도 배우자는 절대 본인과 비슷한 사람을 선택하지 않는다.온유한이 조금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최의현은 그가 안 오는 줄 알았다.“한참을 기다렸잖아. 네 자리는 지찬이 옆인데 괜찮지?”최의현은 두 사람을 화해시키기 위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응.”강지찬과 한규진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발견한 온유한은 본인 자리가 두 사람의 중간임을 알았다.정말 최의현다운 섬세한 배치였다.그 테이블로 다가간 온유한은 예전처럼 한 명씩 인사했다.“지찬아, 규진아, 은우야...”강지찬만 빼고 그의 인사를 다 받아줬고 온유한도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한규진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물었다.“요즘 뭐 해?”“별일 없이 바쁘기만 하지 뭐.”온유한은 말을 아꼈다.몇 년간 수술대에 서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병원은 다니고 있었다. 온혁진의 나이가 많아 온유한이 병원과 공장 양쪽 모두 돌봐야 했다.강지찬이 투자를 회수한 후 공장 건설이 하마터면 무산될 뻔했다.그러다가 최신애의 예상처럼 임씨 가문에서 투자를 한 덕분에 간신히 버텼다.다만 투자라는 것은 원래 접대도 많은 법, 온씨 부자는 매일 같이 각 투자자들을 접대했다.한규진이 온유한의 옆에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아가 곧 온대.”깜짝 놀란 온유한이 손을 심하게 떨었다. 그 바람에 술잔에 든 술이 쏟아질 뻔했다.몇 초 후, 그는 간신히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그래?”“서원준과의 관계를 명확히 발표한다는데 약혼하러 오는 것인지 모르겠어.”온유한은 계속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지아도 이제 나이를 먹었으니 시집갈 때가 되었지. 서원준 씨, 사람 괜찮은 것 같아.”일부러 목소리를 낮추지 않고 말했기에 옆에서 그 말을 들은 강지찬은 온유한을 흘겨봤다.약혼식이 끝난 후 온유한
“온 선생님, 제발요. 주임님이 의사를 데려오기 전에 오지 말라고 하셨어요.”구원 의사를 찾으러 온 젊은 간호사는 울음을 터뜨릴 지경이었다.온유한은 아무 말 없이 일어나 밖으로 나간 뒤, 전성호의 책상을 한 번 두드렸다.“따라와.”전성호는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진료를 시작했다. 그는 예전에 응급실에 근무한 적이 있었다.오늘 대형 교통사고 때문에 응급실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모두들 바삐 돌아쳤다.온유한을 발견한 응급실 주임은 마치 구세주를 발견한 듯 눈을 반짝였다.“온 선생님, 잘 왔어요. 흉부를 수술해야 할 환자가 생겼는데 온 선생에게 맡길게요.”늙은 주임 의사가 피 묻은 장갑을 벗자 조수가 급히 새 장갑으로 갈아끼워줬다. 그러고는 다시 수술실로 들어갔다.온유한은 전성호를 데리고 수술실로 향했다. 안에는 보조 의사가 기다리고 있었다.“온 선생님, 수술대에 설 수 있겠어요?”전성호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온유한이 3년 동안 메스를 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네가 같이해.”“네?”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두 사람은 손을 씻고 소독을 하기 시작했다.무균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준비를 마칠 때까지 전성호는 온유한이 수술대에 선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환자는 이미 마취한 상태로 모든 것이 준비되었으며 모두가 온유한만 바라보고 있었다.온유한은 전성호를 보고 턱을 한 번 치켜들며 말했다.“이 수술은 네가 해.”“뭐라고요?!”전성호는 어안이 벙벙했다.“선생님, 저는 선생님과 주임님의 조수로만 해봤습니다.”온유한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그러니까 지금이 기회야. 환자의 상태를 봤는데 그렇게 심각한 것은 아닌 것 같아. 안 할 거야?”“저...”전성호는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외과 의사라면 언젠가는 큰 수술을 집도할 수 있어야 했다.온유한이 3년 동안 퇴폐적인 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가장 우수한 학생인 전성호는 진작 수술대에 섰을 것이다.“내가 옆에서 도와줄게.”온유한의 말에 전성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지만 이내 머리를
3년 후.밖에 문 여는 소리가 들리자 최신애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새벽 한 시가 되기 전, 오늘은 그나마 이른 편이다.문이 열리더니 비틀거리며 들어오는 그림자가 보였다.하인이 얼른 가서 그의 손에 있는 차 키 등을 받은 뒤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도련님, 사모님이 아직 안 주무시고 기다리고 계십니다.”오늘 저녁, 온유한은 평소보다 덜 취했기에 아직 멀쩡한 상태였다.“어머, 온 여사가 나를 기다린다고?”비틀비틀 걸어간 온유한은 실크 가운을 입고 거실에 앉아 그를 노려보는 최신애를 발견했다.“온 여사님, 오늘 또 나를 혼낼 건가요?”‘온 여사'라는 말에 최신애는 화가 났다. 온유한이 강지아와 헤어지고 난 뒤로는 그녀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았다.“또 술 마신 거야? 온유한, 넌 서울에서 가장 젊고 유능한 흉부외과 의사였어. 기억나?”“의사?”온유한이 허탈하게 웃었다.“메스를 든 지가 언제인데요? 3년 전 일이에요.”몇 발짝 앞으로 다가간 최신애는 온유한에게 삿대질하며 말했다.“기억하고 있네? 그렇게 오랫동안 힘들게 공부해 놓고 여자 때문에 너 자신을 다 망치다니. 우리에게 미안하지도 않아?”“이게 다 온 여사 덕분이잖아요?”온유한이 최신애를 싸늘하게 쳐다보며 말했다.“지아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면서요? 이제 다시 수술 못 하는데 그래도 지아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요?”최신애는 가슴이 아팠다.“너 정말! 나에게 복수하려고 일부러 너 스스로를 망친 거야? 미쳤어?”“아니요! 미치지 않았어요!”온유한은 희미하게 떨리는 그의 왼쪽 손을 최신애에게 들어 보이며 말했다.“아주 멀쩡해요. 그 어느 때보다 멀쩡하다고요. 아들이 이런 모습이어도 잘난 척할 건가요?”‘찰싹’하는 소리와 함께 최신애가 온유한의 뺨을 후려갈겼다.“개자식, 나 약 올리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지?”온유한은 아무 말 없이 비틀거리며 방으로 돌아갔다.3년이 지났다.그 사이 강지아는 여러 번 돌아왔지만 온유한을 만나주지 않았다.처음에는 미친
강지아는 상처가 다 낫기도 전에 급하게 떠났다.작업실의 문은 닫지 않았지만 국내 업무는 모두 직원들에게 맡겼다. 그녀는 온라인으로 중요한 결정만 했다.“혼자 떠났고 서원준은 가지 않았어. 지찬이와 형수 외에는 어디로 갔는지 아는 사람이 없어. 넌 못 들었지?”최의현에 말에 온유한이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못 들었어.”전화를 끊은 온유한은 한참 동안 멍해 있었다.며칠 전 강지아에게 계속 전화를 하고 메시지를 보냈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그러다가 갑자기 어느 날 전화 연결이 안 되었고 메시지도 발송이 안 되었다.강지아가 그를 차단했던 것이다.한참 생각하던 온유한은 미친 듯이 밖으로 뛰쳐나갔다.그를 본 의사와 간호사는 깜짝 놀랐다.“온 선생님, 다리 괜찮아요? 저렇게 뛰면...”“무슨 일이지? 온 선생님 표정이 너무 무서워.”정유진이 저녁 먹을 준비를 할 때 하인이 들어와 온유한이 밖에서 기다린다고 했다.이내 모직 코트 안에 흰 가운을 입은 온유한이 정유진 앞에 나타났다.“형수님, 지아를 만나게 해주세요.”정유진이 한숨을 내쉬었다.“이미 간 걸 알면서 왜 여기까지 온 거예요...”온유한은 아픈 다리 때문에 땀범벅이 되었다.“진짜로 떠났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요.”정유진은 온유한의 다리를 힐끗 본 후 말했다.“하지만 확실히 갔어요. 일단 저녁 먹고 병원에 다시 가세요.”온유한은 그 말을 듣지 못한 듯 계속 물었다.“왜 떠나는데요?”정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어디 간 거예요?”정유진이 계속 대답을 하지 않자 온유한이 혼자서 중얼거렸다.“나를 못 믿겠다고 했던 말이 사실이었네요. 서울로 돌아가면 바로 혼인신고를 하자고 했는데 안 믿었어요. 이렇게 그냥 가버리면 진짜로 나랑 헤어지자는 것일까요?”정유진은 넋이 나간 온유한을 보고는 정명학에게 눈짓을 했다.정명학은 앞으로 걸어 나와 온유한을 잡아당겨 식탁에 앉혔다.“지아가 바람 쐬러 나갔다고 생각하고 일단 밥부터 먹어. 밥을 먹고 나서 병원에 가서 다리부터 다시 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