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원은 어떻게 됐어?”정유진이 물었다.조예원은 의자를 끌고 와서 앉았다.“강지현이 입원을 하고 그 후에 어머니까지 체포되고 지금은 한빈이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있어. 인터넷이 떠들썩해. 노을빛 프로젝트는 이미 절반쯤 진행됐는데 공사를 중단해야 할 수도 있어.”“성원 쪽에는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거야?”정유진이 물었다.“강홍택이 나서기는 했지만, 무슨 쓸모가 있겠어? 아무리 지금 강지현이 퇴원을 한다고 해도 지금 성원이 마주한 인터넷 이슈만으로 무너지게 생겼는데. 강지찬이 한 짓이지?”조예원이 물었다.정유진은 이에 대답했다.“난 모르는 일이야.”조예원은 표정이 변했다.“네가 모른다고? 네가 어떻게 몰라? 네가 직접 둘이 친구라고 하지 않았어? 그때 강지현이 그렇게 많이 도와줬는데 넌 지금 강지현이 아픈 몸을 이끌고 성원에서 버티고 있는 꼴을 보기만 하고 있겠다고?”정유진은 조예원을 바라보았다.“그럼 내가 뭘 할까? 강지찬한테 가서 제발 강지현 좀 봐달라고 빌기라도 할까?”조예원이 대답했다.“아니면?”정유진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내가 왜? 네가 뭔데? 강지현은 또 뭐고?”조예원은 얼어붙었다.“너...”정유진이 다시 말을 꺼냈다.“만약 류신이 정말로 과거의 납치 사건과 연관이 있다면 강지찬 어머니의 죽음과 수아가 몇 년 동안 미친 시간은 누가 보상해 주는데? 만약 마유구의 죽음이 한빈과 연관이 있다면…. 배후에 숨겨진 원한 관계에 대해서 너도 잘 알지? 애초에 K그룹도 여론 때문에 위기에 맞게 됐을 때, 그 배후에 있던 사람이 누군지. 난 경찰이 꼭 밝혀내리라고 믿어. 내가 강지찬에게 가서 빌라고? 미안해. 난 그 말은 도저히 못 하겠어. 그리고 난 지금 그에게 요구할 아무런 자격도 없어.”“난 이미 강지찬과 이혼했어.”정유진이 말했다.“뭐라고?”조예원은 조금 믿지 못하는 듯한 눈치였다.“언제 일어난 일인데?”“거의 한 달 됐어.”정유진이 정말로 강지찬과 이혼하게 됐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럼 당신은 뭘 원하는 건데요?”조예원은 강지현을 바라보며 물었다.“분명 정유진의 마음속에는 당신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녀를 위해 강지찬에게 등을 지고 심지어 자기가 힘들게 창립한 회사와 목숨까지 바쳐가면서, 대체 뭘 원하는 거예요?”강지현의 표정이 점점 더 차가워졌다.“나가요. 당신 얼굴 보고 싶지 않아요.”조예원의 가슴이 아파졌다.그녀의 진심은 이 남자에게 전해지지 않았고 그녀의 헌신도 이 남자에게는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어쩌겠는가?그녀는 그가 쓰러지는 모습을 그냥 지켜볼 수가 없었다.“아마 저는 당신이 언제쯤인가 눈을 뜨고 저를 바라봐주는 것, 그걸 바라겠죠.”조예원은 웃으면서 말했다.그녀는 사무실을 나가지 않았다. 이미 퇴근 시간이 되었지만, 강지현은 밥을 먹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저는 가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나를 뻔뻔하다고 욕을 하든 나를 내쫓든 나는 떠나지 않을 거예요.”그녀는 핸드폰을 꺼냈다.“지현 씨, 뭐 먹고 싶어요?”강지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지 않았다.“그럼, 제가 알아서 시킬게요.”그가 몸이 허약하고 아직 아프다는 생각에 조예원은 소화가 잘되고 영양이 가득한 담백한 죽과 밑반찬을 시켰다.핸드폰을 내려놓자마자 강지현의 비서가 다급히 들어왔다.“강 대표님, 또 두 업체가 협력을 종료하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양 대표님 측의 사람이 내일 정산하러 오겠다고 하는데 재무부서가 정산해야 하는지 여쭙고 있습니다.”강지현은 창백한 얼굴로 대답했다.“정산해. 회사 장부에 있는 만큼 다 정산해 줘.”“네?”비서가 얼어붙었다. 강 대표님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왜 어딘가 될 대로 되라는 느낌이지?조예원은 일어나서 말했다.“가서 재무부서 측에 양 대표님한테 잘 말씀드리라고 전해주세요. 보통 월말에 정산하지 않아요? 뭘 그리 급하대요? 성원이 절대 빚지지는 않을 거라고 전해주세요.”조예원의 말을 들은 비서는 약간 안도감을 느끼고 서둘러 일을 처리하러 갔다.“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그 사람들
한빈은 정유진의 질문에 말문이 턱 막혔다. 사람이라면 낯짝이 없을 정도였다.그가 무슨 얼굴로 그녀에게 구걸하겠는가?하지만, 이 사람은 염치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한빈이었다.“나는 강지현을 도와서 일을 하고 있어! 날 그냥 내버려둔다고?”힌빈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강지현이 회사를 설립하고 강지찬이랑 맞서는 거, 그거 다 널 위해서 그러는 거야! 이것만 해도 유진아, 너 날 구해줘야 맞는 거 아니니?”또 그녀를 위한 것이라고 한다.“날 높이 추켜세울 필요 없어요. 난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에요. 강지현과 강지찬의 원한 관계는 예전부터 쌓아온 거고 저는 이 문제를 덮어쓸 수도 없고 덮어쓰고 싶지도 않아요.”정유진은 그와 헛소리할 필요도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마유구는 당신네 사람이고 그러면 전에 인터넷에서 K그룹을 겨냥하면서 물타기 하던 네티즌들이 다 당신이 산 사람들이에요?”이 일들은 이미 경찰이 밝혀낸 사실들이라 한빈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맞아. 내가 산 거야.”정유진이 말했다.“나는 강지현이 이 일을 아는지 모르는지만 알고 싶어요. 아니면 이 사건의 배후에 있는 사람이 강지현이에요?”한빈이 갑자기 웃으면서 말했다.“네가 한번 맞춰봐.”한빈은 악의가 가득한 얼굴로 정유진을 바라보았고 그 대답은 자명했다.정유진은 마음에 답이 섰다.“나는 당신들 일은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 경찰에서 모든 진실을 밝혀내리라고 믿어요.”한빈은 멈칫하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넌 강 대표님마저도... 정말 내버려둔다고?”정유진은 일어서며 말했다.“알아서 잘 마무리하세요.”그녀가 떠나려고 하자 한빈은 조바심이 났다.“가지 마. 유진아, 너 정말 구경만 할 거니? 난 그렇다고 쳐도 강 대표님마저도 내버려둔다고? 그 사람은 널 위해서 강지찬이랑 싸운 건데, 그 사람이 쓰러져가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할 거야?”정유진은 담담히 웃었다.“만약 내 생각이 궁금하다면 말해줄게요. 전 강지현이 사업에는 맞지 않다고 생각해요.
“한빈을 만나러 구치소로 갔었어요.”2층의 작은 거실에서 정유진은 강지현에게 물을 따라주었다.강지현은 놀라지 않은 듯 조용히 정유진을 바라보았다.조예원과 한빈 모두 그녀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강지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회사는 어때요?”“괜찮아요.”강지현이 대답했다.분위기는 갑자기 어두워졌다. 두 사람은 이렇게 오랜 시간 알고 지내면서 요 몇 년 동안 정유진은 확실히 강지현을 매우 믿고 의지했다.몇 번 서로 얼굴을 붉힐 뻔한 적도 있지만 강지현이 정상적으로 대할 때는 정유진이 정말 그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살다 보니 옆에 있는 사람들도 점점 적어져 마음도 꽤 허전했다.“병이 아직 안 나은 것 같은데 몸조심하세요.”정유진이 말했다.강지현은 그녀와 싸우러 온 것이 아니었으니 당연히 그녀의 한계에 도전하지 않았다.그는 정말 단지 그녀를 만나러 왔다. 며칠 안 보니 보고 싶었다.집안이 망하고 회사가 없어지더라도 신경 쓰지 않았다.정유진은 카드 한 장을 강지현 앞에 내놓았다. 안에는 강지찬이 준 100억이 들어있었다.조금은 그렇지만... 그녀는 손에 남는 돈이 얼마 없었기에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이었다.“미안해요. 전 별 도움이 되지 않아요.”강지현은 그 카드를 보기만 하고 가져가지 않았다.“필요 없어요.”강지현은 웃으며 말했다.“회사는 별일 없으니 걱정하지 마세요.”정유진은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필요하면 말해요.”“네.”강지현이 몸을 일으켰다.“시간이 늦었으니 먼저 갈게요.”아직 한겨울은 아니어서 추위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아직도 코트를 입고 다녔지만, 그는 이미 두꺼운 패딩을 입고 있었다.“지현이 정말 많이 야위었어.”이명자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근심했다.그 후 며칠 동안 현지 뉴스는 거의 모두 성원에 관한 것이었고, 성원과의 협력을 중단하는 기업이 속속 등장했으며 심지어 노을빛 프로젝트마저 영향을 받게 되었다.공급을 해줄 업체가 없자 공사장은 공사를 멈출 위험까지 맞게
정유진은 이번만큼은 조예원을 거절하지 않고 조예원더러 공사 현장에 사람을 보내 물건을 가져다주도록 했다.그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하지만 그마저도 k 그룹에 비하면 벼룩의 간인 수준이었다.“너 정말...”조예원은 말을 절반만 하고 멈춰버렸다.정유진은 이미 강지찬과 이혼했는데 만약 조예원이 아직도 정유진더러 강지찬에게 빌라고 하면...하지만 조예원도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그녀는 강지현과 자신의 사업이 모두 무너지는 것을 지켜볼 수 없었기 때문에 마음을 굳게 먹을 수밖에 없었다.“너무 무리한 부탁인 건 알지만 내가 애원할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조예원은 정유진을 바라보았다.“강지찬은 아직 너한테 마음이 남아있어. 네가 하는 말이라면 반드시 들을 거야. 유진아, 제발 부탁이야. 우리 좀 도와줘.”정유진은 자기가 이미 공급을 해주겠다고 승낙했는데도 불구하고 염치없이 더 많은 것을 바랄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역시, 사람은 마음이 약해서는 안 돼.“너는 내가 어떻게 도와야 할 것 같아?”조예원은 즉시 대답했다.“가서 강지찬에게 빌어. 우릴 놔주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시간이라도 달라고. 유진아, 예담 인테리어는 너와 내가 쌓아 올린 커리어야. 아깝지도 않아?”정유진의 눈빛이 차가웠다.“5년 전, 한빈도 이렇게 나에게 빌었어. 가서 강지찬에게 제발 그를 한 번만 봐주라고 빌라고 했어.”조예원은 멈칫했다.정유진은 조예원을 내쫓았다.“건축 재료는 내가 제공해 줄 수 있어. 다른 건 더는 말할 여지가 없으니 얼른 가.”조예원의 얼굴에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 가득했다.“네가 정말 그를 내버려둘 줄은 몰랐어.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독하니?”이 기간에 정유진은 디자인 공모전 심사위원으로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모교인 서울대학교 디자인연구원에서 명예교수직을 맡아달라고 초청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냈다.모교로 돌아가 채용되던 날은 날씨가 너무 좋았다. 그녀는 기자들의 인터뷰에 응하고 학교 경영진과 점심을 먹었다
다행히도 강수아는 불편한 것뿐이고 병이 도지지는 않았다. 정유진은 정말 깜짝 놀랐다.음식이 나오자, 정유진은 서둘러 그녀에게 국을 떠주었다.“그런 생각하지 마. 그 일들은 오빠가 있으니까, 오빠한테 맡겨.”강수아는 불쌍한 표정으로 말했다.“언니 요즘 회사 안 갔어요? 또 저희 오빠랑 사이가 멀어진 것 같은데요? 저번에 생긴 일 때문에 그런 거예요?”‘저번 일’은 정유진이 강지현에게 서남쪽으로 끌려간 일을 말한다.강수아는 그 생각에 한숨을 내쉬었다.“원래 저희 오빠가 작은삼촌 집안은 나가 살라고 했는데 지금 류선이 체포되고 송지윤이 꽤 얌전히 있어서 더 이상 별다른 말 없어요. 둘째 오빠는 계속 본가로 돌아오지 않았어요. 원래 크던 본가가 지금은 더 쓸쓸해요.”정유진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강수아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언니, 다시 돌아와요!”정유진이 입을 열었다.“수아야, 나 이미 네 오빠랑 이혼했어.”“뭐라고요?”강수아가 얼어붙었다.“왜 난 몰라요? 언제 일어난 일인데요?”“꽤 됐어.”강수아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둘 다 왜 이래요? 반드시 이혼해야 해요? 언니 진짜 저희 오빠 사랑하지 않으세요?”정유진은 대답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내가 너희 오빠랑 이혼했어도 넌 예전처럼 계속 언니라고 부르면 돼.”“아니요. 달라요. 새언니는 가족이에요.”강수아는 원래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이러자 더욱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이후에도 친구 하면 돼지.”정유진이 말했다.강수아가 삐죽거렸다.“그런데 저희 오빠는 다시 외톨이가 되었어요.”정유진은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K그룹에서.강지찬은 최근 매일 야근을 하고 있다.“대표님, 예담 스튜디오 쪽에서 사모님 측의 공사 현장에서 재료를 끌어갔다고 합니다. 이건...”이 말을 들은 강지찬은 이마를 찌푸리며 불만에 가득 찬 채로 피식 웃었다.“맘은 약해서는.”장형준이 대답했다.“그럼 저희는...”강지찬은 계속 문서를 읽었다.“신경 쓰지 말고 며칠 버둥대게 놔둬.
사무실에서 30분 동안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던 정유진은 커피 한잔을 내리며 정신을 차렸다.방금 한 모금 마시자,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추호는 또 찾아와서 등골이 없는 것처럼 문틀에 기대어 꽃 한 다발을 손에 들고 있었다.“왜 또 왔어요?”정유진은 놀라지도 않았다.“제호 그룹에 회의하러 가게 데리러 왔죠.”그녀가 꽃다발을 받지 않을 것을 알고 있는 추호는 아예 꽃병에 있던 꽃을 다 버려버리고 자기가 가져온 꽃다발을 아무렇지 않게 꽂아 넣으며 말했다.“내가 직접 운전기사가 되어주는데, 어때요? 감동스럽지 않아요?”“누나라고 부르든, 정 대표님이라고 부르든, 아니면 꺼지든. 알아서 해요.”“누나.”추호는 바로 꼬리를 내렸다.정유진은 그보다 2살 컸는데 그는 누나라고 부르는 것도 하나의 재미로만 느껴졌다.요즘 연상 연하 커플이 유행한다던데, 잘됐지 않았는가?이놈은 껌딱지처럼 달라붙어서는 떼려야 떼어낼 수 없었다.다행히도 추호는 강지찬처럼 못된 놈은 아니라 가끔 입만 거칠 뿐 너무 무모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오늘은 제호 그룹으로 회의하러 가는 날이었다. 프로젝트 기획서가 완성되었으니 제호 그룹에서도 최종 검토를 해야 했다.정유진은 추호의 스포츠카에 타지 않았지만, 그녀가 자기의 차에 타자 추호도 뒤따라서 차에 탔다.“그쪽이 여기로 오면, 차는 어떻게 해요?”“강 총감님이 타게 했어요.”강 총감님이 바로 키키였고 본명은 강예중이었으며, 현재는 연우 인테리어의 디자인 총감독으로 있었다.제호 그룹과의 협업은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최종 디자인도 순리롭게 통과되었다.저녁에 추민해가 또 밥을 산다고 했지만, 정유진이 거절했다.그녀가 멀리 떠날 때까지 추호는 서서 지켜보았다.추민해는 고개를 돌려도 아무도 보이지 않자 뒤돌아 아들의 멍청한 모습을 보고는 화가 불쑥 밀려왔다.“이놈아, 내가 저분은 강지찬의 여자라고 몇 번을 말하냐.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마, K그룹은 건드리면 안 돼.”“칫...”추호는 추민해의 어깨를
“인테리어 잘됐네요. 무척 마음에 들어요.”강지현의 안색은 여전히 창백하고 목소리마저 어딘가 힘이 없어 보였다.“다만, 제가 살 수는 없을 것 같아요.”강예중과 소미는 눈빛을 주고받더니 나가려고 준비했고, 정유진은 아예 그들에게 퇴근하라고 했다.“유진 씨, 앉으세요.”강지현은 미안한 듯이 웃으며 말했다.“여기는 물이 없는데, 목마르세요?”정유진은 바로 인테리어가 끝난 집을 보며 물었다.“집을 팔 생각이에요?”강지현이 대답했다.“팔아야죠. 남겨둬서 쓸모도 없을 텐데.”정유진이 말을 꺼냈다.“회사는 어떻게 됐어요?”강지현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괜찮아요. 전 별일 없어요.”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정유진은 그에게 저녁밥을 사고 싶었지만, 강지현은 그녀를 그윽이 바라만 보더니 거절했다.여기는 지엘 별장과 매우 가까웠지만 그녀는 강지현을 집으로 초대하지 않았다.“다음에요. 아직 회사로 가서 처리할 일이 남았어요.”강지현이 말했다.“유진 씨 먼저 가세요. 전 여기 좀 더 있을게요.”이 집의 창문으로 지엘 별장을 볼 수 있었는데 이 집이 팔리면 더는 볼 기회가 없을 것이다.그는 정유진이 건물 밖으로 나가서 차를 타고 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강지현은 솔직히 정유진에게 매우 고마웠다. 조예원은 그녀가 이기적이고 마음이 독하다고 말하지만 사실 제일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다.다른 사람들이 그녀에게 상처를 주더라도 다시 그녀에게 친절하게 대해주기만 하면 예전의 일에 대해 따지지 않았다.만약 정유진이 그를 아예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면 그는 정말 살아갈 용기가 없었다.정유진의 차가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야 강지현은 집을 나섰다.날씨는 점점 더 추워지고 드디어 류선의 재판 날이 다가왔다.강지현과 강홍택은 가족으로서 재판장에 나가야만 했고 강지찬과 강수아, 강홍식도 자리에 함께했다.체포되고 나서 지금까지 류선은 처음으로 강지현을 보게 되었는데 그녀는 법정에서 고래고래 울부짖기 시작했다.강지현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힐끗 쳐다보고
분위기가 싸늘해졌고 임유희 부모님의 안색도 매우 어두웠다.임유희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3년 동안 좋아했던 온유한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정말 가슴이 찢어질 듯했다.온유한은 주위 사람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현채영을 끌어안고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온씨 집안 하인들도 현채영을 쫓아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임근우가 테이블을 치며 말했다.“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요? 이 집 사람들은 내 딸이 안중에도 없나요?”최신애가 일 처리를 제대로 못 하긴 했지만 임근우가 면전에서 책상을 두드리는 것을 온혁진은 참을 수 없었다.애초에 임씨 가문이 대놓고 온씨 가문의 뒤를 쫓아다니지 않았더라면 온씨 가문은 임씨 가문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 모든 일은 최신애가 저지른 것이었기에 온혁진은 최신애에게 이 난장판을 넘기고 본인은 찻잔을 들고 빠져나왔다.최씨 가문 식구들도 마찬가지로 좌불안석이다. 보다 못한 최금성의 엄마 황은숙이 최신애를 도와 상황 수습에 나섰다.타이르고 위로하느라 거실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이때 임유희가 일어서더니 온유한에게 다가갔다.그나마 안색은 조금 전에 비해 한결 누그러졌다.“유한 오빠, 나가서 얘기 좀 해요.”온유한이 다리를 꼰 채 말했다.“우리가 할 얘기가 있나? 그리고 그쪽과 같이 나가면 우리 채영이가 질투할 거야.”옆에 있던 현채영이 한마디 했다.“가봐, 질투 안 할 테니.”온유한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정말 질투 안 할 거야?”현채영이 콧소리를 내며 말했다.“내가 질투할지 말지는 가보면 알 거 아니야?”두 사람은 앞에 서 있는 임유희를 아랑곳하지 않고 대놓고 대화를 주고받았다.주먹을 꽉 쥔 임유희는 기가 막혀 숨이 안 쉬어질 정도였다.“그래. 하고 싶은 말이 뭔데?”온유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다.임유희는 심호흡을 여러 번 하고 나서야 온유한을 향해 말했다.“일부러 그러는 거죠? 날 난처하게 하고 어머니와 맞서는 이유, 다 강지아 씨 때문이죠?”온유한은 피식 웃었다.
온유한이 일부러 맞서는 것을 최신애는 알 수 있었다.어젯밤에 온유한에게 보여주려 했던 사진을 그의 앞에 던지며 말했다.“그럼 네 눈으로 봐! 이 여자와 결혼할 거야?”온유한은 힐끗 보고 말했다.“안 될 것도 없죠.”“개자식아! 너 요즘 이런 여자와 어울리느라 매일 늦게 들어온 거야? 집안 상황을 몰라서 그래?”“그래서 뭐요?”온유한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현씨 가문이 지금은 파산했지만 예전에 잘나갈 때는 가장 바랐던 며느릿감 아니었어요?”“예전은 예전이고! 예전에는 현씨 가문 딸이었지만 지금은 돈만 주면 뭐든 다 하는 여자야. 그때와 지금이 같아?”온유한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예전에는 어떤 사람이었든 지금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어요.”“무슨 뜻이야?”최신애는 순간 멍해졌다.“설마 진짜로 데리고 올 것은 아니지?”“안 될 이유라도 있나요?”“당연히 안 되지!”최신애는 화가 나서 테이블을 쳤다.“죽는 한이 있어도 이런 여자를 우리 온씨 가문에 들일 수는 없어. 잘 들어, 오늘 퇴근하자마자 바로 집에 들어와. 오늘 유희와 결혼 날짜 잡을 거야. 이것은 임씨 가문에 대한 우리의 약속이기도 해. 잊지 마. 임씨 가문이 아니었더라면 지금의 온씨 가문도 없었을 테니.”“그래요?”온유한은 여전히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온씨 가문과 강씨 가문의 인연을 끊게 된 게 누구 때문인데요? 그런데 지금 나더러 임유희와 결혼하라고요? 내 인생이에요.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세요. 내가 그렇게 쉽게 말을 들을 사람처럼 보여요? 순진하네, 온 여사. 더 이상 강요하지 마세요!”온유한은 밥도 먹지 않은 채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한편 최신애는 화가 나서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성격상,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저녁 식사에 그녀는 온씨 가문 사람들뿐만 아니라 최씨 가문 사람들까지 초대했다.최신애는 온유한을 설득하기 위해 최금성도 불렀다.이제 모든 사람이 다 도착했지만 온유한만 오지 않았다.최신애는 끊임없이 그에게 전화를 걸
“집에 돌아올 줄은 알아?”벽에 걸린 시계의 시간을 본 최신애는 더욱 화를 냈다.“지금 몇 시인지 좀 봐! 하루 종일 무엇을 하기에 점점 늦게 들어오는 거야?”하지만 오늘 심하게 취한 온유한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그저 눈앞의 사람이 귀찮다고 생각했고 빨간 립스틱을 바른 저 입은 벌렁거릴 때마다 섬뜩하게 느껴졌다.“누구야, 비켜! 막지 마.”운전기사는 제대로 서지조차 못하는 온유한을 붙잡으며 말했다.“사모님, 도련님이 많이 취했으니 할 말이 있으면 내일 하세요.”최신애는 가슴이 아프면서도 화가 났다.“얘 오늘 어디 간 거야?”“최의현 도련님의 약혼식에 참석했다가 끝나고 에이프릴로 갔습니다.”“거기서 여태껏 술을 마셨다고?”“네...”최신애는 머리가 지끈거렸다.“얼른 방으로 데려가 눕혀... 아줌마, 내일 유한이에게 해장국을 끓여줘...”온유한을 방에 눕힌 뒤 최신애는 지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돌아갔다.일찍 잠이 든 온혁진을 본 최신애는 화가 치밀어 손바닥으로 때려 그를 깨웠다.“아들이 이 꼴인데 잠이 와요?”온혁진은 싫증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누가 이렇게 만들었는데?”“무슨 뜻이에요?”그 말에 화가 난 최신애는 모든 불만을 온혁진에게 쏟아냈다.“다 유한이를 위해서 그런 거잖아요. 당신, 아버지로서 유한이를 위해 한 게 뭔데요?”온혁진은 더 이상 잘 수 없어 침대에서 일어났다.“아들 일, 관여하고 싶지 않아. 어차피 언젠가는 온씨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텐데 평생 의사로 살 수는 없잖아. 왜 그렇게 유한이를 핍박하는 거야? 죄만 안 짓고 사고만 안 치면 상관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당신도 신경 쓰지 마. 예전의 우리 아들이 아니라고.”하지만 최신애는 다른 일을 생각했다.“강씨 가문에서 투자를 회수한 후 임씨 가문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버티지 못했을 거예요. 유희가 3년째 유한이를 기다리고 있다고요. 우리 아들도 이제 서른 다섯이에요. 유희 집안에 정식으로 결혼에 대해 얘기해야 하지
최의현의 약혼녀도 서울에서 유명한 재벌 집 딸로 이 결혼은 가문에서 맺어 준 것이었다.여자는 단아한 외모의 전형적인 재벌 집 숙녀로 최의현의 전 여자친구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최의현 같은 남자가 평소에 아무리 날라리라고 해도 배우자는 절대 본인과 비슷한 사람을 선택하지 않는다.온유한이 조금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최의현은 그가 안 오는 줄 알았다.“한참을 기다렸잖아. 네 자리는 지찬이 옆인데 괜찮지?”최의현은 두 사람을 화해시키기 위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응.”강지찬과 한규진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발견한 온유한은 본인 자리가 두 사람의 중간임을 알았다.정말 최의현다운 섬세한 배치였다.그 테이블로 다가간 온유한은 예전처럼 한 명씩 인사했다.“지찬아, 규진아, 은우야...”강지찬만 빼고 그의 인사를 다 받아줬고 온유한도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한규진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물었다.“요즘 뭐 해?”“별일 없이 바쁘기만 하지 뭐.”온유한은 말을 아꼈다.몇 년간 수술대에 서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병원은 다니고 있었다. 온혁진의 나이가 많아 온유한이 병원과 공장 양쪽 모두 돌봐야 했다.강지찬이 투자를 회수한 후 공장 건설이 하마터면 무산될 뻔했다.그러다가 최신애의 예상처럼 임씨 가문에서 투자를 한 덕분에 간신히 버텼다.다만 투자라는 것은 원래 접대도 많은 법, 온씨 부자는 매일 같이 각 투자자들을 접대했다.한규진이 온유한의 옆에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아가 곧 온대.”깜짝 놀란 온유한이 손을 심하게 떨었다. 그 바람에 술잔에 든 술이 쏟아질 뻔했다.몇 초 후, 그는 간신히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그래?”“서원준과의 관계를 명확히 발표한다는데 약혼하러 오는 것인지 모르겠어.”온유한은 계속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지아도 이제 나이를 먹었으니 시집갈 때가 되었지. 서원준 씨, 사람 괜찮은 것 같아.”일부러 목소리를 낮추지 않고 말했기에 옆에서 그 말을 들은 강지찬은 온유한을 흘겨봤다.약혼식이 끝난 후 온유한
“온 선생님, 제발요. 주임님이 의사를 데려오기 전에 오지 말라고 하셨어요.”구원 의사를 찾으러 온 젊은 간호사는 울음을 터뜨릴 지경이었다.온유한은 아무 말 없이 일어나 밖으로 나간 뒤, 전성호의 책상을 한 번 두드렸다.“따라와.”전성호는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진료를 시작했다. 그는 예전에 응급실에 근무한 적이 있었다.오늘 대형 교통사고 때문에 응급실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모두들 바삐 돌아쳤다.온유한을 발견한 응급실 주임은 마치 구세주를 발견한 듯 눈을 반짝였다.“온 선생님, 잘 왔어요. 흉부를 수술해야 할 환자가 생겼는데 온 선생에게 맡길게요.”늙은 주임 의사가 피 묻은 장갑을 벗자 조수가 급히 새 장갑으로 갈아끼워줬다. 그러고는 다시 수술실로 들어갔다.온유한은 전성호를 데리고 수술실로 향했다. 안에는 보조 의사가 기다리고 있었다.“온 선생님, 수술대에 설 수 있겠어요?”전성호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온유한이 3년 동안 메스를 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네가 같이해.”“네?”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두 사람은 손을 씻고 소독을 하기 시작했다.무균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준비를 마칠 때까지 전성호는 온유한이 수술대에 선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환자는 이미 마취한 상태로 모든 것이 준비되었으며 모두가 온유한만 바라보고 있었다.온유한은 전성호를 보고 턱을 한 번 치켜들며 말했다.“이 수술은 네가 해.”“뭐라고요?!”전성호는 어안이 벙벙했다.“선생님, 저는 선생님과 주임님의 조수로만 해봤습니다.”온유한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그러니까 지금이 기회야. 환자의 상태를 봤는데 그렇게 심각한 것은 아닌 것 같아. 안 할 거야?”“저...”전성호는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외과 의사라면 언젠가는 큰 수술을 집도할 수 있어야 했다.온유한이 3년 동안 퇴폐적인 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가장 우수한 학생인 전성호는 진작 수술대에 섰을 것이다.“내가 옆에서 도와줄게.”온유한의 말에 전성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지만 이내 머리를
3년 후.밖에 문 여는 소리가 들리자 최신애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새벽 한 시가 되기 전, 오늘은 그나마 이른 편이다.문이 열리더니 비틀거리며 들어오는 그림자가 보였다.하인이 얼른 가서 그의 손에 있는 차 키 등을 받은 뒤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도련님, 사모님이 아직 안 주무시고 기다리고 계십니다.”오늘 저녁, 온유한은 평소보다 덜 취했기에 아직 멀쩡한 상태였다.“어머, 온 여사가 나를 기다린다고?”비틀비틀 걸어간 온유한은 실크 가운을 입고 거실에 앉아 그를 노려보는 최신애를 발견했다.“온 여사님, 오늘 또 나를 혼낼 건가요?”‘온 여사'라는 말에 최신애는 화가 났다. 온유한이 강지아와 헤어지고 난 뒤로는 그녀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았다.“또 술 마신 거야? 온유한, 넌 서울에서 가장 젊고 유능한 흉부외과 의사였어. 기억나?”“의사?”온유한이 허탈하게 웃었다.“메스를 든 지가 언제인데요? 3년 전 일이에요.”몇 발짝 앞으로 다가간 최신애는 온유한에게 삿대질하며 말했다.“기억하고 있네? 그렇게 오랫동안 힘들게 공부해 놓고 여자 때문에 너 자신을 다 망치다니. 우리에게 미안하지도 않아?”“이게 다 온 여사 덕분이잖아요?”온유한이 최신애를 싸늘하게 쳐다보며 말했다.“지아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면서요? 이제 다시 수술 못 하는데 그래도 지아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요?”최신애는 가슴이 아팠다.“너 정말! 나에게 복수하려고 일부러 너 스스로를 망친 거야? 미쳤어?”“아니요! 미치지 않았어요!”온유한은 희미하게 떨리는 그의 왼쪽 손을 최신애에게 들어 보이며 말했다.“아주 멀쩡해요. 그 어느 때보다 멀쩡하다고요. 아들이 이런 모습이어도 잘난 척할 건가요?”‘찰싹’하는 소리와 함께 최신애가 온유한의 뺨을 후려갈겼다.“개자식, 나 약 올리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지?”온유한은 아무 말 없이 비틀거리며 방으로 돌아갔다.3년이 지났다.그 사이 강지아는 여러 번 돌아왔지만 온유한을 만나주지 않았다.처음에는 미친
강지아는 상처가 다 낫기도 전에 급하게 떠났다.작업실의 문은 닫지 않았지만 국내 업무는 모두 직원들에게 맡겼다. 그녀는 온라인으로 중요한 결정만 했다.“혼자 떠났고 서원준은 가지 않았어. 지찬이와 형수 외에는 어디로 갔는지 아는 사람이 없어. 넌 못 들었지?”최의현에 말에 온유한이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못 들었어.”전화를 끊은 온유한은 한참 동안 멍해 있었다.며칠 전 강지아에게 계속 전화를 하고 메시지를 보냈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그러다가 갑자기 어느 날 전화 연결이 안 되었고 메시지도 발송이 안 되었다.강지아가 그를 차단했던 것이다.한참 생각하던 온유한은 미친 듯이 밖으로 뛰쳐나갔다.그를 본 의사와 간호사는 깜짝 놀랐다.“온 선생님, 다리 괜찮아요? 저렇게 뛰면...”“무슨 일이지? 온 선생님 표정이 너무 무서워.”정유진이 저녁 먹을 준비를 할 때 하인이 들어와 온유한이 밖에서 기다린다고 했다.이내 모직 코트 안에 흰 가운을 입은 온유한이 정유진 앞에 나타났다.“형수님, 지아를 만나게 해주세요.”정유진이 한숨을 내쉬었다.“이미 간 걸 알면서 왜 여기까지 온 거예요...”온유한은 아픈 다리 때문에 땀범벅이 되었다.“진짜로 떠났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요.”정유진은 온유한의 다리를 힐끗 본 후 말했다.“하지만 확실히 갔어요. 일단 저녁 먹고 병원에 다시 가세요.”온유한은 그 말을 듣지 못한 듯 계속 물었다.“왜 떠나는데요?”정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어디 간 거예요?”정유진이 계속 대답을 하지 않자 온유한이 혼자서 중얼거렸다.“나를 못 믿겠다고 했던 말이 사실이었네요. 서울로 돌아가면 바로 혼인신고를 하자고 했는데 안 믿었어요. 이렇게 그냥 가버리면 진짜로 나랑 헤어지자는 것일까요?”정유진은 넋이 나간 온유한을 보고는 정명학에게 눈짓을 했다.정명학은 앞으로 걸어 나와 온유한을 잡아당겨 식탁에 앉혔다.“지아가 바람 쐬러 나갔다고 생각하고 일단 밥부터 먹어. 밥을 먹고 나서 병원에 가서 다리부터 다시 검사
서원준이 위층으로 올라갔을 때 강지아는 2층 창문에 서 있었다.그 모습을 본 서원준은 일부러 한마디 했다.“그만 봐, 서울로 올라갔으니.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봐. 효자 노릇 하러 갔어.”창가에 가만히 서 있던 강지아는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서원준, 밖에 나가 바람 좀 쐬고 싶어.”서원준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한편, 온유한이 서울로 돌아왔을 때 최신애는 이미 태안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고혈압 때문에 쓰러지면서 건물에서 떨어져 발목을 삐끗했고 골반 뼈가 부러졌지만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임유희가 그녀의 병실에 함께 있었다. 온유한은 병실에 들어오기도 전에 두 사람이 웃고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온유한이 코트를 손에 든 채 무표정한 얼굴로 병실 문 앞에 서 있었다.“유한 오빠, 왔어요?”임유희가 웃는 얼굴로 그를 맞이했고 최신애도 마음이 뿌듯했다.시간을 계산해보니 그녀가 다쳤다는 말을 듣자마자 온유한이 달려왔음을 알 수 있었다.이 말인즉슨 친정엄마에게 일이 생기면 강지아도 제쳐두고 달려온다는 것이다.“거기 서서 뭐 해, 다리가 아직 안 나았잖아. 무리하지 말고 와서 앉아. 밥은 먹었니?”최신애의 말에도 온유한은 꼼짝달싹하지 않았다.웃고 떠드는 최신애를 보니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았다.“장 주임에게 상태가 어떤지 물어볼게요.”말을 마친 온유한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병실을 나가자 최신애의 얼굴에 걸려 있던 미소가 점점 굳어졌다.“유희야, 봤니? 내가 미워서 저래.”최신애는 임유희의 손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내가 너희들을 맺어주려고 온씨 가문 사람들의 미움을 샀어. 나중에 우리 온씨 가문에 들어오면 이 시어머니께 효도해야 한다.”그 말에 임유희의 볼이 빨개졌다.“어머니. 유한 오빠가 어떻게 어머니를 미워할 수 있겠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오빠도 돌아왔으니 제가 더 노력할게요.”“역시 똑똑한 유희, 너무 마음에 들어.”최신애는 흡족해했다.최신애에게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온유한은 사무실로 돌아왔다.
“온 선생님이 또 오신 것 같아요.”동하민이 강지아가 듣지 못하게 작은 소리로 정유진에게 말했다.“오지 말라고 전해, 지아는 만나지 않을 거야.”“네.”문에 기대어 서 있는 온유한은 며칠 만에 살이 쏙 빠진 모습이었다.“온 선생님, 대표님이 온 선생님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아요. 그러니 그냥...”동하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온유한은 그녀를 밀치고 안으로 뛰어 들어가더니 마당의 나무 아래에서 앉아 쉬고 있는 강지아를 덥석 껴안았다.순식간에 몸이 굳어진 강지아는 코끝에서 나는 익숙한 냄새를 맡고는 미친 듯이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지아야, 나도 이쪽에 집을 하나 샀어. 너만 괜찮으면 내가 여기에 와서 너와 같이 살게. 어때?”“이거 놔!”온유한은 강지아가 몸부림칠수록 더 꽉 껴안았다.깜짝 놀란 동하민은 얼른 다가와 온유한을 잡아당겼다.“온 선생님, 대표님 상처가 아직 다 안 나았어요. 자극하지 마세요!”온유한은 동하민의 말 따위 아랑곳하지 않았다.“네가 일부러 기억 잃은 척한다는 거 알아. 지아야, 나 진짜로 임유희와 아무 일도 없었어.”강지아는 몸부림을 멈추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래서 뭐? 이제 와서 우리가 함께할 수 있을 것 같아? 오빠 어머니에게 그렇게 많은 수모를 당했는데 내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계속 오빠와 함께 있을 수 있을까?”“우리 어머니는 어머니이고 나는 나야!”온유한이 다급히 소리쳤다.“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나에게 벌을 주지 말아줘.”“그건 오빠 엄마야!”강지아의 말에 온유한은 아무 말도 못 한 채 강지아를 품에서 놓아주었다.“그래서 우리 엄마 때문에 지금 나 쳐다보기도 싫은 거야?”강지아가 시선을 아래로 떨구며 말했다.“온유한, 이러면 우리 서로만 괴로워. 그만하자.”“하...”온유한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네 마음속에 나와 함께 있는 게 괴로운 거였구나.”강지아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여긴 왜 왔죠?”이때 멀리서 온유한을 발견한 서원준은 그와 싸우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