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까 저 아줌마 알아요.”정유진은 조금 놀랐다.“아까 저 아줌마는 스타야, 연우가 어떻게 알아?”연우는 으쓱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외국에 있을 때 할머니가 저 아줌마의 스캔들을 자주 봤어요. 저 아줌마의 남자 친구가 제 카드를 밟고도 사과하지 않은 나쁜 아저씨예요.”꼬맹이가 기억력이 이렇게도 좋다고?엄마가 안나의 스캔들을?아마도 강지찬 때문이겠지.부모님이 수년 동안 자신을 위해 얼마나 많이 걱정했을지 생각하니 정유진은 죄책감이 몰려왔다.“연우야, 그 아저씨는 아까 저 여자의 남자 친구가 아니야.”이 문제는 아무래도 아이와 설명해야 했다. 그래도 아이의 친아빠이기 때문이다.“아니라고요?”연우는 큰 눈을 깜박거렸다.“근데 많은 사람들이 맞다고 하는데요?”네 살짜리 꼬맹이에게 어른들의 복잡한 세계를 어떻게 설명해 줘야 할까?정유진은 딸의 귀여운 코를 꼬집었다.“저 사람들은 같이 일하는 동료일 뿐이야. 가끔 같은 활동에 참석하곤 해. 인터넷에서 하는 말들은 다른 사람들이 막 하는 말이야. 연우가 크면 알게 될 거야.”연우는 잠시 생각에 잠겨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갑자기 눈을 반짝했으며 말했다.“알겠어요!”“뭘 알겠는데?”“요즘 내가 계속 태양이랑 노는데 다른 애들이 자꾸 태양이가 내 남자 친구라고 하는 것처럼요. 우리는 그냥 같이 노는 것뿐인데.”정유진은 이런 어린아이들이 너무 웃겼다. 어린아이들이 하루 종일 남자 친구를 입에 달고 산다고?“대충 그런 거랑 비슷해. 우리 딸 참 대단해!”안나가 파파라치들 때문에 또 실시간 검색어에 뜨자 자연스레 강지찬도 같이 등장했다.그러나 이 검색어는 차트에 얼마 머물지 않고 사라졌다. 분명 누군가가 손을 쓴 모양이다.“안나 남자 친구 생겼어?”강지찬이 장형준에게 물었다.운전하던 장형준은 대표님이 돼 또 안나를 신경 쓰는지 의아해했다.“대표님, 잘 모르겠습니다. 나중에 매니저에게 물어보겠습니다.”강지찬은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만약 있다면, 열애 사실 공개하라고 해.
조예원의 눈에는 그녀와 정유진은 그래도 예전에는 친한 친구였기 때문에 지금 아무리 사이가 틀어졌다고 해도, 그녀와 구소원 사이에서 정유진은 그녀의 편에 서야만 했다.정유진의 태도에 대해 조예원은 무척이나 실망하였다.“너는 내가 강지현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면서. 너는 강지현이랑 거리를 두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내가 다른 사람보다도 못한 거니?”조예원은 실망에 가득 찬 얼굴로 호소했다.“만약 네가 처음부터 나를 도왔다면, 우린 지금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을 거야. 정유진, 사람 너무 이기적으로 구는 거 아니야.”정유진은 큰 충격을 받았다.“내가 이기적이라고?”“그럼, 이기적이지 않다는 거야?”조예원은 매우 흥분했다.“넌 매사 너만 생각하는데, 내 생각은 고려해 봤어? 강지현 생각은 고려해 봤고?”정유진은 이마를 눈썰미를 찌푸리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설명을 늘어놓았다.“만약 4년전 내가 강지현의 마음을 알았더라면 그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을 거야.”그녀도 지금에 와서야 강지현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조예원이 말한 것들은 전부 화풀이에 불과했다.“그래, 넌 몰랐지! 모든 사람이 다 알고 너만 모르는데, 그러고도 이기적이지 않다고?”정유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문득 그녀는 조예원과 정상적인 대화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러나 조예원의 말이 망치처럼 그녀의 가슴을 강타했다.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럼, 강지찬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그래서 강지현 때문에 계속 그녀와 다투고 끊임없이 갈등을 겪었다.근데 이제 와서 이런 얘기를 하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갈등은 하루아침에 발생하지 않는다.이날 키키는 정유진을 데리고 2층짜리 넓은 오피스텔을 둘러보았다.다 좋았는데, 다만 k 그룹과 가까웠다.키키는 웃으며 말했다.“만약 앞으로 K그룹과 자주 일하게 된다면 회사가 K그룹과 더 가까워지는 것이 편리할 것 같아요. 그리고 서울 바닥에서 이 정도 규모의 오피스텔을 임대할 수 있는 곳은 이곳밖에 없어요. 다른 곳은 외진 곳에 있거
류선은 매우 열정적으로 척했다.온미정과 강지아는 소파 맞은편에서 정유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언니, 여기 와서 앉아요.”강지찬은 정유진의 손을 놓아주고 그녀에게 강수아와 온미정에게 가라고 했다.“언니, 회사에서 바로 온 거죠?”강수아는 불만을 표시하며 강지찬을 향해 입을 삐죽거렸다.“저희 오빠가 요즘 일에 미쳤어요. 연회에 참석하는 거 뻔히 알면서 언니한테 옷 갈아입으라고 하지도 않고.”강지찬은 온유한 옆의 소파에 앉았다. 마침, 정유진 쪽을 향해 있었다.“너무 바빠서 시간 없었어.”정유진도 웃으며 해명했다.“오후 동안 회의만 하다가 퇴근할 때쯤에야 파티가 있다고 말해줬어요.”강지찬은 그녀를 힐끔 보더니 말했다.“다들 가족인데 뭐. 그리고, 넌 뭘 입든 다 예뻐.”강수아는 사랑을 과시하는 이 둘을 아니꼬운 듯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자 류선의 표정은 더욱 추해졌다.특히 정유진이 온씨 가문과 민씨 가문의 사람들과도 화기애애하게 대화하며 명문가의 아가씨 못지않은 것을 보고 류선은 무척 아니꼬웠다.“그러고보니...”류선이 말소리를 높이자, 성공적으로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유진이 돌아오고 나서 꽤 오래됐는데 아직 본가에 들르지 않았네. 며칠 전에 본가 가족 연회에도 오지 않고. 유진아, 일은 하려면 끝도 없어. 시아버지 보러 자주 와야지.”이는 정유진과 강지찬의 혼인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대놓고 말하지만 않았을 뿐이었다.아까 그녀가 입을 열었을 때부터 강지찬의 표정이 굳어지더니 그녀가 말을 마친 후 강지찬이 바로 얘기를 꺼냈다.“본가가 좀 조용해지면, 유진이도 말할 것 없고, 저도 자주 돌아가죠.”이 밀은 류선이 말이 많다는 것을 콕 집어 말하는 것이었다.정유진은 저도 모르게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독설은 아직 죽지 않았다.강지찬이 이렇게 말하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먼저 고세연이 강홍식과 결혼한 일을 떠올리며 표정이 다들 머쓱해졌다.고세연과 강홍식이 본가에 있는 것을 떠
하루 종일 일한 정유진은 사실 기운이 조금 약해져 있었다.그런데 명문가 연회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버티면서 자리를 지켜야만 했다.온미정의 눈빛에 독기가 서려서는 그녀의 등 뒤에 쿠션을 받쳐주며 낮은 목소리로 얘기했다.“사장하기 어렵지? 네 꼴 보아하니 요즘 또 그놈 밑에서 개처럼 일하는 중이야?”정유진은 실소했다.“기획안 작성하느라 저만 바쁜 게 아니고 다들 바빠요.”온미정은 옆의 사모님들을 쓱 훑었다.“일이 바쁜 건 좋은 거지. 네 작은 숙모는 너무 심심해서 탈이야. 맨날 이간질만 하고, 속셈만 많아서는. 원래 미인이었는데 폭삭 늙어버렸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해?”이 말은 온미정만이 할 수 있었다. 정유진은 그 사람들을 평가하기조차 귀찮았다.“다른 한 명은 괜찮더라. 저번에 병원에서도 만났어. 류선보다 20살은 더 젊어 보였어. 강홍식이 걔를 사랑하지 않고서 배겨?”강지혁은 더 깊이 배우기 위해 해외로 유학을 떠났고 그 참에 K그룹의 해외 지사들을 주시하고 있었다.송지윤 이 여자는 꽤 똑똑했다. 강지찬은 젊고 뛰어난 능력이 있었다. 그녀와 강지혁은 자신의 주제를 알고 류선처럼 굳이 강지찬과 우열을 가리려고 하지 않았다.강지혁은 사고만 치지 않으면 장차 k 그룹에서 한몫 맡을 것이다.아들이 강씨 집안에서 자리를 굳건히 잡으면 송지윤은 별다른 여한이 없었다. 강홍식이 그들 모자에 대해 감정이 얼마나 깊은지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그녀는 심심하면 친구와 쇼핑하고 카드 게임을 하며 미용했다. 마음가짐도 좋으니, 사람도 같이 젊어 보였다. 확실히 류선보다 훨씬 기품 있는 부잣집 사모님의 모습 같았다.“전 이모 따라가려고요.”정유진은 그 틈을 타 온미정을 추켜세웠다.온미정은 또 연우의 얘기를 꺼냈다. 그 귀족 유치원의 원장은 그녀의 친구였는데, 면접을 볼 때 연우가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면접 선생님을 정복했다고 한다.“꼬맹이가 참 대견해. 유치원에서 말도 잘 듣고 똑똑해서, 내 친구가 너한테 애를 어떻게 키웠느냐고 묻더라니
시간이 흘러 입찰 당일이 다가왔고, K그룹은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며 입찰을 따내는 데 성공했다.이 두 프로젝트를 위해 프로젝트 부서는 반년 동안 바쁘게 움직였고 정유진 역시 뒤늦게 합류하고 두 달 동안 바쁘게 움직였다. 이제 성공적으로 프로젝트를 따내자, K그룹의 모든 사람들이 매우 흥분했다.저녁에는 K그룹 맞은편의 호텔에서 축하 연회가 열렸다.정유진은 사람들과 함께 떠나지 않았다. 이런 행사에는 반드시 강지찬과 함께 참석해야 했다.두 사람은 늦게 도착해 오래 머물지 않고 일찍 떠났다.강지찬이 곁에 있으면 모두가 즐길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직원들을 배려하여 프로젝트 책임자와 몇 잔 마시고는 정유진을 끌고 자리를 떠났다.임우연은 이미 다른 곳에 그들을 위한 장소를 예약했다. 도착해보니 장소 전체를 빌리고 양초며 와인이며 이미 준비되어 있을 만큼 과장되었다.정유진은 멍하니 입구에 서 있었다. 레스토랑은 조명이 비교적 어두워 아늑한 분위기를 조성했다.“멍해서 뭐 해, 빨리 와서 앉아.”강지찬은 의자를 빼며 정유진에게 앉으라고 손짓했다.정유진은 약간 어리둥절했다.“임우연에게 이렇게 준비하라고 시켰어요?”“아니, 걔가 자기 마음대로 준비한 거야. 나는 그냥 너랑 밥 한 끼 같이 먹고 싶었던 것뿐이야.”강지찬은 무심하게 말했다.정유진은 불편한 마음이 조금 사그라들었다. 자리에 앉은 후 레스토랑 매니저가 와서 주문을 도와주었다.강지찬은 바로 풀 코스를 시켰다.그가 오늘 기분이 좋다는 것이 티가 났다.요리가 차례대로 나오기 시작하지 강지찬은 사람을 시켜 와인을 두잔 따르게 했다.두 사람의 기억 속에서 이렇게 둘이 밥을 먹은 적은 없는 것 같았다.최소한 강지찬이 보기에는 둘이 마치 데이트하는 것 같았다. 그는 이런 느낌이 좋았다.정유진 역시 강지찬의 성격이 정말 변했다고 느껴졌다. 그녀가 변호사를 찾아 이혼 소송을 준비하려던 것을 알면서도 그녀에게 따지지 않았다.“오피스텔은 찾았어?”정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인테리어 시작됐어
강지현의 모습에 정유진은 깜짝 놀랐다.“왜요? 어디 아파요?”“아니요, 어제 회식 때문에 술을 마셔서 잠을 잘 자지 못하였어요.”정유진의 시선에 거지로 감싼 손에 머무른 것을 보고 주먹을 들어 보이며 설명했다.“어제 치우다가 유리에 긁혔어요. 별일 아니에요.”정유진이 말을 했다.“아프면 집에서 쉬어요. 몸이 좋아졌을 때 그림을 골라도 늦지 않아요.”강지현은 손에 든 티켓을 흔들며 말했다.“전시회는 절 기다리지 않아요. 오늘이 마지막 날이에요.”정유진은 오랫동안 국내에서 전시회를 보지 않았다. 이번에 돌아오고 나서 바쁜 일정을 소화하느라 스펙타클한 반년을 지내왔다.전시회를 기획한 화가는 국내에서 이름을 꽤 알렸다. 강지현의 눈에 들어온 유화는 3억이 넘었다는 작품이었는데 그 자리에서 바로 주문했다.두 사람은 한 바퀴 둘러보고 그림을 사고 바로 떠났다.여기는 상록수 별장과 멀지 않았기에 강지현은 정유진을 집으로 초대해 음식을 대접하려 했다.정유진이 조금 망설였다. 그녀는 오랜만의 휴일이라 집에 가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강지현이 말을 꺼냈다.“이미 저녁 식사 준비하라고 지시했어요. 조금 있다가 기사님한테 아저씨, 아주머니를 태우고 와서 같이 식사라도 해요.”이렇게 말하자 정유진은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강지현의 집에 도착하니 매우 조용했다.정유진은 마음속으로 의구심이 들었다. 음식을 대접한다고 해놓고서 주방에 아무런 소리가 없고 하인들도 여유로워 보였다.정유진도 묻기에 애매했다. 그 찰나에 강지현이 물을 갖다주었다.정유진이 깼을 때 차 안에 있는 자신을 발견했는데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그녀는 뒷좌석에서 일어나 운전 중인 강지현을 믿기지 않는 듯한 얼굴로 바라보았다.강지현이 물에 약을 탔다. 그녀는 그 물을 마시고 그와 대화를 나누다 점차 잠에 들었다.“깼어요?”강지현이 백미러를 통해 그녀를 흘끗 쳐다보았다.정유진은 방금 깬 탓에 몸이 아직 나른했다.“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모르겠어요.”강지현이
“오빠, 노인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었대?”그녀와 강홍식은 사이가 평범했다. 아마 강지찬과 강홍식의 사이만도 못했을 것이다.강지찬은 온 강씨 집안의 책임을 떠안고 있었지만, 강수아는 아니었다.“모르겠어.”강지찬은 짜증이 밀려왔다.강홍식은 미소를 지으며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다.“다가오는 어머니 기일에 대해 무슨 생각이 있는지 물어보려고 불렀어.”남매는 서로를 바라보며 서로의 눈에서 의아함을 내비쳤다.올해가 10이 끼는 것도 아닌데 무슨 계획이 있겠는가? 예전처럼 남매가 묘지에 가서 인사만 하고 오면 되는 거 아니었나?강홍식은 이때까지 한 번도 그곳에 가본 적이 없었다.강지찬은 아버지를 차갑게 바라보며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강수아는 입이 빨라 이미 말을 한가득 늘어놓았다.“노인네 이런 건 왜 물어요? 갑자기 양심이라도 찔려서 엄마한테 용서를 구하고 싶은 거예요?”강홍식의 표정이 변하며 어색하게 기침했다.“그냥 물어보는 거야.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집사한테 준비하라고 하려고.”강지찬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10년 동안 묻지도 않더니, 올해는 갑자기 생각나셨나 봐요? 드문 일이네요.”강홍식은 이런 것을 물을 생각을 못 했는데 고세연이 물어보라고 시켜서 묻는 것이었다.강지찬이 배 속의 아이를 마음에 들지 않아 하기에 이런 방식으로나마 관계를 완화하려던 것이었다.강지찬은 이 노인네가 무슨 궁리를 하고 있는지 한눈에 알아챘다.이 사람은 팔자가 좋아서 평생 자기가 직접 신경 써서 일을 처리할 줄 몰랐다. 비위를 맞추는 것도 제대로 못 한다니.참 부러울 지경이었다.강지찬은 콧방귀를 끼며 차갑게 말했다.“저희 엄마 일에 대해 당신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감히 저희 엄마를 앞세우지 마세요. 그럴 자격이나 있어요?”이 말은 너무나도 직설적이었고 강홍식은 머리에서 연기가 날 정도로 크게 분노하며 말했다.“네 이놈의 자식, 아버지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너희들 눈에는 아직 내가 친아버지로 보이기는 해?”강수아는 입을 삐죽거리며
지도를 보니 앞에 휴게소가 있어 정유진이 말을 꺼냈다.“앞에서 잠깐 세워줘요. 화장실 가고 싶어요.”강지현은 의외로 순순히 정유진의 요구를 들어주었다.“좋아요.”한밤중인 데다 명절도 아니었기에 휴게소에는 차가 적었다.정유진은 화장실에 갔는데 핸드폰이 없었다. 강지현에게 빼앗겼거나, 강지현 집에 떨어뜨렸거나 둘 중 하나였다.원래 다른 사람에게 휴대전화를 빌려 전화하려던 참이었지만 여자 화장실에는 아무도 없었다.그녀는 한참 동안 기다리다 나올 수밖에 없었는데, 강지현은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언제부터 담배 피웠어요?”강지현은 기나긴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꽤 됐어요. 근데 자주 피지는 않아요.”정유진이 말했다.“꺼요. 원래 몸도 안 좋은데.”강지현은 그녀를 그윽이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좋아요.”강지현은 바로 쓰레기통 쪽으로 가서 담배를 껐다.“배고프죠. 멀지 않은 곳에 도시가 있으니 오늘 밤은 거기서 지내요.”정유진은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차에 올라탔다.차가 서울과 이미 몇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는가?강지현은 5성급 호텔의 스위트룸을 잡았다.스위트룸은 침실이 두 개였지만 정유진은 여전히 불편함을 느꼈다.강지현은 정유진이 좋아하는 것들로 호텔 측에 야식을 주문했다.그는 정유진에게 국을 떠주며 말했다.“유진 씨, 우리 한번 해봐요.”정유진이 얼어붙었다.“뭘 해봐요?”강지현은 침착하게 자신의 국을 뜨며 말했다.“저와 함께 있는 순간을 느껴봐요. 강지찬이 연기를 얼마나 오랫동안 할 수 있는지 봐요.”“지현 씨...”정유진은 그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대체 무슨 뜻이에요? 대체 뭘 하려는 거예요?”“제가 하고 싶었던 건 항상 분명했어요. 전 당신을 좋아해요. 당신과 함께 있고 싶어요.”이번에는 강지현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졌다.그는 자기가 틀렸다고 생각했다. 늘 좋은 사람인 척만 해서는 정유진의 마음을 살 수 없었다.“유진 씨, 당신이 지금 또 강지찬에게 마음이
“집에 돌아올 줄은 알아?”벽에 걸린 시계의 시간을 본 최신애는 더욱 화를 냈다.“지금 몇 시인지 좀 봐! 하루 종일 무엇을 하기에 점점 늦게 들어오는 거야?”하지만 오늘 심하게 취한 온유한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그저 눈앞의 사람이 귀찮다고 생각했고 빨간 립스틱을 바른 저 입은 벌렁거릴 때마다 섬뜩하게 느껴졌다.“누구야, 비켜! 막지 마.”운전기사는 제대로 서지조차 못하는 온유한을 붙잡으며 말했다.“사모님, 도련님이 많이 취했으니 할 말이 있으면 내일 하세요.”최신애는 가슴이 아프면서도 화가 났다.“얘 오늘 어디 간 거야?”“최의현 도련님의 약혼식에 참석했다가 끝나고 에이프릴로 갔습니다.”“거기서 여태껏 술을 마셨다고?”“네...”최신애는 머리가 지끈거렸다.“얼른 방으로 데려가 눕혀... 아줌마, 내일 유한이에게 해장국을 끓여줘...”온유한을 방에 눕힌 뒤 최신애는 지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돌아갔다.일찍 잠이 든 온혁진을 본 최신애는 화가 치밀어 손바닥으로 때려 그를 깨웠다.“아들이 이 꼴인데 잠이 와요?”온혁진은 싫증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누가 이렇게 만들었는데?”“무슨 뜻이에요?”그 말에 화가 난 최신애는 모든 불만을 온혁진에게 쏟아냈다.“다 유한이를 위해서 그런 거잖아요. 당신, 아버지로서 유한이를 위해 한 게 뭔데요?”온혁진은 더 이상 잘 수 없어 침대에서 일어났다.“아들 일, 관여하고 싶지 않아. 어차피 언젠가는 온씨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텐데 평생 의사로 살 수는 없잖아. 왜 그렇게 유한이를 핍박하는 거야? 죄만 안 짓고 사고만 안 치면 상관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당신도 신경 쓰지 마. 예전의 우리 아들이 아니라고.”하지만 최신애는 다른 일을 생각했다.“강씨 가문에서 투자를 회수한 후 임씨 가문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버티지 못했을 거예요. 유희가 3년째 유한이를 기다리고 있다고요. 우리 아들도 이제 서른 다섯이에요. 유희 집안에 정식으로 결혼에 대해 얘기해야 하지
최의현의 약혼녀도 서울에서 유명한 재벌 집 딸로 이 결혼은 가문에서 맺어 준 것이었다.여자는 단아한 외모의 전형적인 재벌 집 숙녀로 최의현의 전 여자친구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최의현 같은 남자가 평소에 아무리 날라리라고 해도 배우자는 절대 본인과 비슷한 사람을 선택하지 않는다.온유한이 조금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최의현은 그가 안 오는 줄 알았다.“한참을 기다렸잖아. 네 자리는 지찬이 옆인데 괜찮지?”최의현은 두 사람을 화해시키기 위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응.”강지찬과 한규진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발견한 온유한은 본인 자리가 두 사람의 중간임을 알았다.정말 최의현다운 섬세한 배치였다.그 테이블로 다가간 온유한은 예전처럼 한 명씩 인사했다.“지찬아, 규진아, 은우야...”강지찬만 빼고 그의 인사를 다 받아줬고 온유한도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한규진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물었다.“요즘 뭐 해?”“별일 없이 바쁘기만 하지 뭐.”온유한은 말을 아꼈다.몇 년간 수술대에 서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병원은 다니고 있었다. 온혁진의 나이가 많아 온유한이 병원과 공장 양쪽 모두 돌봐야 했다.강지찬이 투자를 회수한 후 공장 건설이 하마터면 무산될 뻔했다.그러다가 최신애의 예상처럼 임씨 가문에서 투자를 한 덕분에 간신히 버텼다.다만 투자라는 것은 원래 접대도 많은 법, 온씨 부자는 매일 같이 각 투자자들을 접대했다.한규진이 온유한의 옆에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아가 곧 온대.”깜짝 놀란 온유한이 손을 심하게 떨었다. 그 바람에 술잔에 든 술이 쏟아질 뻔했다.몇 초 후, 그는 간신히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그래?”“서원준과의 관계를 명확히 발표한다는데 약혼하러 오는 것인지 모르겠어.”온유한은 계속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지아도 이제 나이를 먹었으니 시집갈 때가 되었지. 서원준 씨, 사람 괜찮은 것 같아.”일부러 목소리를 낮추지 않고 말했기에 옆에서 그 말을 들은 강지찬은 온유한을 흘겨봤다.약혼식이 끝난 후 온유한
“온 선생님, 제발요. 주임님이 의사를 데려오기 전에 오지 말라고 하셨어요.”구원 의사를 찾으러 온 젊은 간호사는 울음을 터뜨릴 지경이었다.온유한은 아무 말 없이 일어나 밖으로 나간 뒤, 전성호의 책상을 한 번 두드렸다.“따라와.”전성호는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진료를 시작했다. 그는 예전에 응급실에 근무한 적이 있었다.오늘 대형 교통사고 때문에 응급실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모두들 바삐 돌아쳤다.온유한을 발견한 응급실 주임은 마치 구세주를 발견한 듯 눈을 반짝였다.“온 선생님, 잘 왔어요. 흉부를 수술해야 할 환자가 생겼는데 온 선생에게 맡길게요.”늙은 주임 의사가 피 묻은 장갑을 벗자 조수가 급히 새 장갑으로 갈아끼워줬다. 그러고는 다시 수술실로 들어갔다.온유한은 전성호를 데리고 수술실로 향했다. 안에는 보조 의사가 기다리고 있었다.“온 선생님, 수술대에 설 수 있겠어요?”전성호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온유한이 3년 동안 메스를 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네가 같이해.”“네?”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두 사람은 손을 씻고 소독을 하기 시작했다.무균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준비를 마칠 때까지 전성호는 온유한이 수술대에 선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환자는 이미 마취한 상태로 모든 것이 준비되었으며 모두가 온유한만 바라보고 있었다.온유한은 전성호를 보고 턱을 한 번 치켜들며 말했다.“이 수술은 네가 해.”“뭐라고요?!”전성호는 어안이 벙벙했다.“선생님, 저는 선생님과 주임님의 조수로만 해봤습니다.”온유한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그러니까 지금이 기회야. 환자의 상태를 봤는데 그렇게 심각한 것은 아닌 것 같아. 안 할 거야?”“저...”전성호는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외과 의사라면 언젠가는 큰 수술을 집도할 수 있어야 했다.온유한이 3년 동안 퇴폐적인 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가장 우수한 학생인 전성호는 진작 수술대에 섰을 것이다.“내가 옆에서 도와줄게.”온유한의 말에 전성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지만 이내 머리를
3년 후.밖에 문 여는 소리가 들리자 최신애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새벽 한 시가 되기 전, 오늘은 그나마 이른 편이다.문이 열리더니 비틀거리며 들어오는 그림자가 보였다.하인이 얼른 가서 그의 손에 있는 차 키 등을 받은 뒤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도련님, 사모님이 아직 안 주무시고 기다리고 계십니다.”오늘 저녁, 온유한은 평소보다 덜 취했기에 아직 멀쩡한 상태였다.“어머, 온 여사가 나를 기다린다고?”비틀비틀 걸어간 온유한은 실크 가운을 입고 거실에 앉아 그를 노려보는 최신애를 발견했다.“온 여사님, 오늘 또 나를 혼낼 건가요?”‘온 여사'라는 말에 최신애는 화가 났다. 온유한이 강지아와 헤어지고 난 뒤로는 그녀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았다.“또 술 마신 거야? 온유한, 넌 서울에서 가장 젊고 유능한 흉부외과 의사였어. 기억나?”“의사?”온유한이 허탈하게 웃었다.“메스를 든 지가 언제인데요? 3년 전 일이에요.”몇 발짝 앞으로 다가간 최신애는 온유한에게 삿대질하며 말했다.“기억하고 있네? 그렇게 오랫동안 힘들게 공부해 놓고 여자 때문에 너 자신을 다 망치다니. 우리에게 미안하지도 않아?”“이게 다 온 여사 덕분이잖아요?”온유한이 최신애를 싸늘하게 쳐다보며 말했다.“지아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면서요? 이제 다시 수술 못 하는데 그래도 지아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요?”최신애는 가슴이 아팠다.“너 정말! 나에게 복수하려고 일부러 너 스스로를 망친 거야? 미쳤어?”“아니요! 미치지 않았어요!”온유한은 희미하게 떨리는 그의 왼쪽 손을 최신애에게 들어 보이며 말했다.“아주 멀쩡해요. 그 어느 때보다 멀쩡하다고요. 아들이 이런 모습이어도 잘난 척할 건가요?”‘찰싹’하는 소리와 함께 최신애가 온유한의 뺨을 후려갈겼다.“개자식, 나 약 올리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지?”온유한은 아무 말 없이 비틀거리며 방으로 돌아갔다.3년이 지났다.그 사이 강지아는 여러 번 돌아왔지만 온유한을 만나주지 않았다.처음에는 미친
강지아는 상처가 다 낫기도 전에 급하게 떠났다.작업실의 문은 닫지 않았지만 국내 업무는 모두 직원들에게 맡겼다. 그녀는 온라인으로 중요한 결정만 했다.“혼자 떠났고 서원준은 가지 않았어. 지찬이와 형수 외에는 어디로 갔는지 아는 사람이 없어. 넌 못 들었지?”최의현에 말에 온유한이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못 들었어.”전화를 끊은 온유한은 한참 동안 멍해 있었다.며칠 전 강지아에게 계속 전화를 하고 메시지를 보냈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그러다가 갑자기 어느 날 전화 연결이 안 되었고 메시지도 발송이 안 되었다.강지아가 그를 차단했던 것이다.한참 생각하던 온유한은 미친 듯이 밖으로 뛰쳐나갔다.그를 본 의사와 간호사는 깜짝 놀랐다.“온 선생님, 다리 괜찮아요? 저렇게 뛰면...”“무슨 일이지? 온 선생님 표정이 너무 무서워.”정유진이 저녁 먹을 준비를 할 때 하인이 들어와 온유한이 밖에서 기다린다고 했다.이내 모직 코트 안에 흰 가운을 입은 온유한이 정유진 앞에 나타났다.“형수님, 지아를 만나게 해주세요.”정유진이 한숨을 내쉬었다.“이미 간 걸 알면서 왜 여기까지 온 거예요...”온유한은 아픈 다리 때문에 땀범벅이 되었다.“진짜로 떠났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요.”정유진은 온유한의 다리를 힐끗 본 후 말했다.“하지만 확실히 갔어요. 일단 저녁 먹고 병원에 다시 가세요.”온유한은 그 말을 듣지 못한 듯 계속 물었다.“왜 떠나는데요?”정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어디 간 거예요?”정유진이 계속 대답을 하지 않자 온유한이 혼자서 중얼거렸다.“나를 못 믿겠다고 했던 말이 사실이었네요. 서울로 돌아가면 바로 혼인신고를 하자고 했는데 안 믿었어요. 이렇게 그냥 가버리면 진짜로 나랑 헤어지자는 것일까요?”정유진은 넋이 나간 온유한을 보고는 정명학에게 눈짓을 했다.정명학은 앞으로 걸어 나와 온유한을 잡아당겨 식탁에 앉혔다.“지아가 바람 쐬러 나갔다고 생각하고 일단 밥부터 먹어. 밥을 먹고 나서 병원에 가서 다리부터 다시 검사
서원준이 위층으로 올라갔을 때 강지아는 2층 창문에 서 있었다.그 모습을 본 서원준은 일부러 한마디 했다.“그만 봐, 서울로 올라갔으니.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봐. 효자 노릇 하러 갔어.”창가에 가만히 서 있던 강지아는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서원준, 밖에 나가 바람 좀 쐬고 싶어.”서원준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한편, 온유한이 서울로 돌아왔을 때 최신애는 이미 태안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고혈압 때문에 쓰러지면서 건물에서 떨어져 발목을 삐끗했고 골반 뼈가 부러졌지만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임유희가 그녀의 병실에 함께 있었다. 온유한은 병실에 들어오기도 전에 두 사람이 웃고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온유한이 코트를 손에 든 채 무표정한 얼굴로 병실 문 앞에 서 있었다.“유한 오빠, 왔어요?”임유희가 웃는 얼굴로 그를 맞이했고 최신애도 마음이 뿌듯했다.시간을 계산해보니 그녀가 다쳤다는 말을 듣자마자 온유한이 달려왔음을 알 수 있었다.이 말인즉슨 친정엄마에게 일이 생기면 강지아도 제쳐두고 달려온다는 것이다.“거기 서서 뭐 해, 다리가 아직 안 나았잖아. 무리하지 말고 와서 앉아. 밥은 먹었니?”최신애의 말에도 온유한은 꼼짝달싹하지 않았다.웃고 떠드는 최신애를 보니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았다.“장 주임에게 상태가 어떤지 물어볼게요.”말을 마친 온유한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병실을 나가자 최신애의 얼굴에 걸려 있던 미소가 점점 굳어졌다.“유희야, 봤니? 내가 미워서 저래.”최신애는 임유희의 손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내가 너희들을 맺어주려고 온씨 가문 사람들의 미움을 샀어. 나중에 우리 온씨 가문에 들어오면 이 시어머니께 효도해야 한다.”그 말에 임유희의 볼이 빨개졌다.“어머니. 유한 오빠가 어떻게 어머니를 미워할 수 있겠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오빠도 돌아왔으니 제가 더 노력할게요.”“역시 똑똑한 유희, 너무 마음에 들어.”최신애는 흡족해했다.최신애에게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온유한은 사무실로 돌아왔다.
“온 선생님이 또 오신 것 같아요.”동하민이 강지아가 듣지 못하게 작은 소리로 정유진에게 말했다.“오지 말라고 전해, 지아는 만나지 않을 거야.”“네.”문에 기대어 서 있는 온유한은 며칠 만에 살이 쏙 빠진 모습이었다.“온 선생님, 대표님이 온 선생님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아요. 그러니 그냥...”동하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온유한은 그녀를 밀치고 안으로 뛰어 들어가더니 마당의 나무 아래에서 앉아 쉬고 있는 강지아를 덥석 껴안았다.순식간에 몸이 굳어진 강지아는 코끝에서 나는 익숙한 냄새를 맡고는 미친 듯이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지아야, 나도 이쪽에 집을 하나 샀어. 너만 괜찮으면 내가 여기에 와서 너와 같이 살게. 어때?”“이거 놔!”온유한은 강지아가 몸부림칠수록 더 꽉 껴안았다.깜짝 놀란 동하민은 얼른 다가와 온유한을 잡아당겼다.“온 선생님, 대표님 상처가 아직 다 안 나았어요. 자극하지 마세요!”온유한은 동하민의 말 따위 아랑곳하지 않았다.“네가 일부러 기억 잃은 척한다는 거 알아. 지아야, 나 진짜로 임유희와 아무 일도 없었어.”강지아는 몸부림을 멈추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래서 뭐? 이제 와서 우리가 함께할 수 있을 것 같아? 오빠 어머니에게 그렇게 많은 수모를 당했는데 내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계속 오빠와 함께 있을 수 있을까?”“우리 어머니는 어머니이고 나는 나야!”온유한이 다급히 소리쳤다.“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나에게 벌을 주지 말아줘.”“그건 오빠 엄마야!”강지아의 말에 온유한은 아무 말도 못 한 채 강지아를 품에서 놓아주었다.“그래서 우리 엄마 때문에 지금 나 쳐다보기도 싫은 거야?”강지아가 시선을 아래로 떨구며 말했다.“온유한, 이러면 우리 서로만 괴로워. 그만하자.”“하...”온유한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네 마음속에 나와 함께 있는 게 괴로운 거였구나.”강지아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여긴 왜 왔죠?”이때 멀리서 온유한을 발견한 서원준은 그와 싸우기 위해
온유한을 바라보는 강지아의 눈빛은 아주 낯설었다. 마치 눈앞의 남자를 정말 모르는 듯했다.다른 사람들도 강지아가 정말로 기억을 잃은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몰라 서로만 쳐다보았다.“지아야, 이러지 마.”온유한은 가슴이 너무 아팠다.강지아가 온유한에게서 손을 빼더니 정유진을 향해 말했다.서원준은 온유한의 멱살을 움켜쥐더니 밖으로 끌고 나갔다.“봤어요? 지아는 그쪽을 기억하지 못해요.”온유한은 의사를 찾으러 갔다.“기억 상실이라고요?”베테랑 의사가 안경을 위로 밀며 말했다.“기억 상실일 리가 없을 텐데...”MRI 사진을 들고 온유한과 한참을 얘기한 베테랑 의사가 한마디 했다.“이상하네요. 진짜로 기억을 잃었다고요?”온유한은 바로 알아챘다.기억 상실이 아니라 그를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강지아가 깨어나자 강지찬은 서울로 올라갔고 정유진과 그녀의 엄마 아빠가 이곳에 남아 강지아의 병간호를 했다.온미정과 백무영은 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여행을 갈 예정이었지만 강지아의 사고로 일정을 취소했다.온미정도 신혼여행 갈 기분이 아니었기에 남편과 아이를 데리고 서울로 와서 이삿짐을 정리했다.진정한 의미에서의 이사이다. 모든 물건을 차에 실어 온혁진의 집에 있던 그녀의 물건을 모두 정리했다.“새언니가 잘못했다고 해서 굳이 집을 나갈 필요는 없잖아?”온혁진의 표정은 보기 안 좋았다. 서울로 올라온 후, 강지찬은 투자를 빠른 속도로 회수하기 시작했다.정유진과 친한 온미정이었는데 이젠 온미정이 이사를 갔으니 강씨 가문과 사이좋게 지낼 사람마저 없어졌다.온미정은 최신애만 생각하면 화가 났다.“나에게 새언니 따위는 없어요. 나는 나를 바보 취급하는 사람을 제일 증오해요. 그런데 최신애는 나를 바보 취급했을 뿐만 아니라 내 감정을 이용했어요. 이런 정신 나간 미치광이를 더 이상 내 새언니로 인정할 수 없어요.”물건을 차에 다 실은 뒤 온미정이 한숨을 내쉬었다.“오빠, 유한이 좀 더 지켜봐 주세요. 나보다 백배는 더 힘들 거예요. 그
꿈은 정말 깨고 싶지 않았다. 예전에 강지아와 같이 웃으며 놀았던 장면이었기 때문이다.깨어난 온유한은 호텔에 누워있는 자신이 현실로 돌아왔음을 느끼고는 침대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유한 오빠, 깼어요?”침대 옆에 엎드려 밤새도록 그를 지켰던 임유희도 깼다.온유한은 그녀의 목소리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배고프죠? 아침 식사를 가져오라고 할게요.”“꺼져.”임유희는 아무 말 없이 뜨거운 물 한 잔 따라 놓고 밖으로 나갔다.잠시 후 호텔 직원이 아침 식사와 해장국을 가져다주었다.온유한도 먹지 않은 채 또 한참을 누워있다가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가서 샤워를 했다.거울을 보니 눈두덩이가 움푹 패였고 수염이 길게 나 있어 아주 초라해 보였다.온유한은 수염을 깎고 머리를 정리한 후 옷을 갈아입고 다시 병원으로 갔다.강지아는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긴 상태였다.늦은 시간, 병원에는 정유진과 온미정 그리고 화령이 강지아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화령은 일 때문에 최금성과 같이 온미정의 결혼식에 오지 못했다. 그런데 강지아에게 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왔다.세 여자는 온유한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유한도 주위 사람을 못 본 듯 곧장 강지아의 침대 옆으로 가더니 강지아의 손을 잡았다.보다 못한 온미정이 나가서 죽 한 그릇을 사 왔다.“와서 일단 밥부터 먹어.”온미정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온유한은 강지아만 뚫어지게 바라봤다.그 모습에 온미정이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이런 꼴로 곁에 있으면 지아가 마음을 돌리겠어? 지아는커녕 나도 널 용서 못 해.”온미정은 화가 났지만 혹시라도 강지찬이 올까 봐 목소리를 낮췄다.대신 온유한의 팔을 잡고 말했다.“일단 밥부터 먹어. 굶어 죽고 싶은 거야?!”온유한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굶어 죽으면 용서해 줄까요?”온미정은 이 자식의 뺨을 때리고 싶었다.바로 이때 병실에 들어온 강지찬과 서원준이 강지아의 손을 잡고 있는 온유한을 발견했다. 서원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