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효진이 돌아왔다. 돌아온 이튿날 바로 정유진이랑 식사 약속을 잡았다.안 본 몇 년 사이에 최효진은 큰 변화가 없어 보였다. 여전히 정유진을 보고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미정한테서 얘기 다 들었어. 너도 이젠 자기 회사를 꾸려서 사장님 한다고 그리고 강지찬이랑 합작한다고?”정유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 이상 그 이야기를 마저 하고 싶지 않아 웃으며 말했다.“외숙모는 예전보다 더 활기차 보이시네요. 아직도 전처럼 아주 바쁘세요?”“우리 그이가 좀 많이 바쁘지. 과학연구도 해야 하고 학생들도 가르치고, 난 하던 프로젝트를 끝내고 이번에 한동안 푹 쉬려고 해.”그러면서 옆에 있던 경은우를 보며 말했다.“그리고 이 자식 일도 좀 도와주려고.”경은우는 표정이 굳어졌다.“엄마가 날 도울게 뭐가 있어? 제발, 날 좀 내버려둬.”말을 마치고는 핸드폰을 들고 자리를 피했다.최효진은 나가는 경은우를 상관 안 하고 그저 정유진만 빤히 쳐다보았다. 얼굴에는 온통 섭섭한 기색이 역력하였다.“너랑 지찬이 이젠 정말 끝난 거야? 나랑 우리 그이가 너를 아주 많이 좋아해. 그리고 우리 눈에는 보여. 지찬이 걔 맘에는 항상 네가 있었어. 네가 말도 없이 떠났을 때 정말 반년 내내 걔가 웃는 걸 본 적이 없어. 그때 지아가 깨어났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걔가 어떻게 되었을지 정말 아무도 몰라.”정유진은 최효진한테 차를 한잔 따라주었다.“외숙모, 물 마시세요.”강지찬 얘기를 하고 싶지 않은 게 뻔했다. 그리고 그 누구의 사정도 거부했다.정유진의 이 태도는 최효진더러 아주 맥이 빠지게 했다.“그래. 그 녀석이 요 2년 동안 확실히 몹쓸 짓을 많이 했어. 됐어, 나도 이제 너희들 일에 상관 안 할게. 어찌 됐든 나랑 우리 그이 맘속에는 네가 아직도 우리 가족이야. 만약 그 녀석이 다시 너를 괴롭히면 내가 대신 걔를 욕해줄게.”“고마워요, 외숙모.”최효진은 팔방미인이라 사람의 눈치도 잘 살폈다.최효진은 온미정한테서 강지찬이 최근에 한 ‘좋은 일’에 대해서 얘기 들었다
다행히 정유진 곁에는 키키가 있었다. 이젠 키키도 어엿한 디자이너로 성장하였다.회사를 키키한테 맡기고 난 후, 정유진은 소미라는 새로 온 어시스트를 데리고 K그룹으로 갔다.정유진이 매일 K그룹에 있어야 하는 건 아니었다. 강지찬이랑 협의한 끝에 반은 K그룹에 있고 반은 자기 회사에 있기로 했다.K그룹에 도착하자 또 회사 일 층 로비에서 가로막혔다.“정 여사님, 죄송합니다. 예약이 없이는 올라가실 수 없습니다.”정유진은 자기도 오기 싶지 않았다고 무척 말하고 싶었다.같이 온 소미는 말솜씨가 장난이 아닌 친구였다. 바로 이에 답했다.“저희 정 대표님은 K그룹에서 모신 다자인 총감독입니다. 우리는 프로젝트 개발 회의에 참석하려고 온 겁니다. 이래도 안 올려보낼 겁니까?”프런트 직원은 멈칫했다.“죄송합니다. 저희는 상관 연락을 받은 게 없습니다.”말이 채 끝나기에 바쁘게 임우연이 헐레벌떡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는 걸 보았다. 멀리서부터 웃으며 말했다.“정 대표님 오셨어요? 반갑습니다.”그리고 프런트 직원들한테 대고 말했다.“여긴 우리 정 대표님이시고 저희 강 대표님이 직접 고용한 디자이너예요. 앞으로 수시로 여기에 와서 회의를 하실 거예요.”프런트 직원들은 마음속으로 엄청나게 충격이었다.전 여자 친구가 아니었나? 임우연은 직접 정유진을 데리고 정유진의 사무실로 갔다.이번 프로젝트는 K그룹 이후의 중점 사업이었다. 프로젝트팀은 강지찬 사무실 바로 아래층에 있었다.정유진의 사무실은 무척 컸다. 연우에 있는 정유진의 사무실보다 훨씬 더 크고 널찍했다.임우연은 또 정유진을 프로젝트팀에 데려가 사람들에게 인사시켰다. 프로젝트팀은 두 개 팀이 합쳐진 거라 사람이 총 50~60명 되였다.“유진 씨, 이렇게 같이 일하게 될 줄 몰랐는데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서정호는 주동적으로 정유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정유진이 답했다.“저도 잘 부탁드려요.”서정호는 아주 열정 있게 대꾸했다.“저번 남교 프로젝트 때 유진 씨한테 진 것에 대해 기회가 된다
오전에 회의가 채 끝나지 않아 점심을 아래층 식당에서 먹고 오후에 다시 회의를 마저 해야 했다.정유진은 회의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진 소미를 데리고 점심을 먹으러 갔다. 두 사람은 밥을 따르고 구석진 곳에 자리 잡았다.식사 시작하기도 전에 임우연이 찾아왔다.“정 대표님, 강 대표님께서 오시랍니다.”정유진이 답했다.“저 거절해도 돼요?”임우연이 답했다.“강 대표님께서 정 대표님이 안 오시면 자기가 직접 오셔서 모셔 가신답니다.”정유진은 말문이 막혔다.“…”강지찬 이 나쁜 놈이 무조건 자기를 핍박할 그 어떤 기회도 놓치지 않을 거라는 걸 정유진은 알고 있었다.강지찬은 룸에서 음식을 한 상 시켰다. 정유진이 도착했을 때 음식은 이미 다 나왔고 정유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룸 문은 정유진이 들어간 후 바로 닫혔다. 정유진은 강지찬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 남자가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정유진은 강지찬이 오만가지 방법을 써가며 자기를 강지찬 곁에 두려는 것은 자기를 모욕하려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무슨 시추에이션이지?왜 밥까지 사주는 거지?“앉아, 서서 뭐 해?”강지찬은 재촉했다.“오후에 회의도 있는데 빨리 먹자고.”정유진은 급해하지 않고 물었다.“강지찬, 우리의 합작 내용에는 당신이랑 같이 밥도 먹어야 한다는 조항이 없지 않아요? 도대체 무슨 뜻이에요? 불필요한 오해만 생길 게 두렵지 않아요?”강지찬은 얼굴색이 어두워졌다.“무슨 오해?”“다른 사람들 눈에 우린 이미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당신은 우리 사이가 들통날까 두렵지 않아요?”강지찬은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당신이 무서운 게 아니고?”정유진은 대뜸 대답했다.“그래요. 난 무서워요. 난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아요.”이 말을 남기고 강지찬과 한 상의 음식들을 그 자리에 버려둔 채 문을 열고 룸에서 나갔다. 급하게 선을 긋는 모습에 강지찬은 화가 나서 하마터면 상을 엎을 뻔했다.최의현은 껄렁껄렁하며 걸어 들어와 눈을 찌푸렸다.
전태연은 확실히 소식을 듣고 달려온 것이다.엘리베이터를 내리자마자 비서실 사람한테 가로막혔다.“전 아가씨, 강 대표님 아직 회의 중이십니다.”전태연도 돌려 말하지 않고 바로 얘기했다.“정유진 어딨어요? 나 정유진 보러 왔어요.”비서실 직원은 미안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정 대표님도 외의 중이십니다.”“정 대표?”전태연은 얼굴색이 확 변했다.“정유진이 언제 정 대표가 됐어?”정유진이 K그룹에서 직무를 맡은 건 비밀도 아니었다. 이 일은 전태연이 사람을 써서 슬쩍 알아보면 쉽게 알아낼 수 있는 것이었다. 비서실 직원도 숨기지 않았다.전태연은 말을 듣고 그 자리에 굳었다.‘강지찬 무슨 뜻이지?’ 갑자기 가슴이 쿵쾅거렸다.지난번에 안나를 손보고 난 후부터, 안나는 마침내 조용해졌다. 이에 전태연은 득의만만해하고 있었다.근데 강지찬이 정유진이랑 또 엮일 줄 생각도 못 했다.이혼한다면서? 왜 같이 출근하는 거지?정유진이 K그룹에 온 첫날 하루 종일 회의만 하다가 회의 끝날 무렵 퇴근 시간이 다 되었다.사무실에 들어와 앉기도 전에 뒤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그 발걸음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점점 급해졌다. 분명한 건 좋은 사람 같진 않았다.“정유진!”전태연은 큰소리로 정유진의 이름을 외쳤다.정유진은 돌아서는 동시에 몸을 한쪽으로 피했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올려 정유진을 향해 내리치는 전태연의 손목을 딱 잡았다.“뭐 하는 짓이에요?”전태연은 화가 잔뜩 났다.“정유진, 당신 참 뻔뻔하네. 한 편으로 나한테 강 대표랑 아무 사이 아니라고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계속 강 대표랑 엮여 있고, 같은 여자로서 참 수치스럽네요!”정유진은 전태연의 손을 뿌리치며 차가운 소리로 말했다.“강지찬한테 가서 따지세요. 나랑은 상관이 없어요.”“내숭 떨지 마시죠. 당신이랑 상관이 없다고? 그럼, 강 대표가 당신을 귀찮게 한다는 소리예요?”정유진은 속으로 ‘진짜인데 당신이 안 믿을까 봐.’라고 생각했다.소미가 달려 들어왔다. 비록 소미는
강지찬은 정말 전태연을 강 씨 본가로 데려왔다.장형준도 미리 집사한테 전화했다. 집사는 푸짐하게 저녁을 준비하라고 주방 분들한테 당부하고 또 둘째 네 부인들을 불렀다.비록 갑작스러운 방문이지만 전태연은 체면을 아주 중요시하고 또 손도 큰 성격이라 백화점을 한바탕 돌아본 후 송지윤한테 준비한 선물마저 아주 고급스러웠다.류선은 선물을 받고 마음이 쓰라렸다. 마음속으로는 강지찬이 아직 이혼도 안 했는데 이렇게 새 여자를 데려온 것을 보고 이번에도 분명 자기 아들의 앞을 가로챌 거라고 생각했다.류선은 자기 아들이 자신의 능력으로 그렇게 큰 회사를 차렸는데 절대로 이렇게 강지찬한테 밀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마음속으로 이렇게 궁리를 하며 류선은 더욱 환하게 웃었다.“태연아, 지찬이 이렇게 너를 데리고 집안 어르신까지 만나는데 언제 그 여자랑 이혼을 한다는 소리는 없었냐?”후배를 배려하는 표정을 하고는 걱정스레 물었다.“아무리 강지찬이 몰래 결혼을 한 거라지만 진실은 반드시 드러나기 마련이잖아. 만일 어느 날 소문이라도 난다면 네가 남의 결혼에 끼어든 내연녀가 되는 거잖아? 넌 생긴 것도 예뻐, 집안도 정유진에 비해 훨씬 좋잖아. 내연녀로 오해받으면 얼마나 억울해, 안 그러니?”이 말은 그야말로 전태연의 정곡을 찔렀다. 전태연은 바로 류선의 자기의 지음으로 삼았다.남자들이 옆에서 얘기를 나누는 것을 보고 전태연은 낮은 목소리로 급히 물었다.“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그 일로 속을 태우고 있어요. 둘째 숙모님께 무슨 좋은 방법이 없나요?”류선은 강지찬과 정유진이 평생 같이하기를 그 누구보다 원했다. 류선은 강지찬이 집안이 부유한 여자와 결혼해서 강지현을 제압하는 걸 볼 수는 없었다.입으로는 능청스럽게 말했다.“지찬이가 너를 본가에 데려온 걸 보아하니 지찬이 맘속에도 네가 있다는 걸 말해. 넌 그저 방법을 써서 정유진을 내쫓으면 돼. 여자는 말이야, 적당히 응석을 부릴 줄 알아야 해.”마음속으로는 달리 생각했다.“그래 난리를 피워. 강지찬이 제일
강홍택은 원래 송지윤의 집에 가서 쉬려고 했다. 하지만 결국은 류선한테 억지로 끌려갔다.심지어 가기 전 송지윤을 한번 째려보았다.“나, 이 사람하고 긴히 할 얘기가 있어. 내일에 너한테 보낼게.”송지윤은 웃으며 답했다.“괜찮아요. 사부님 맘 편한 대로 하시면 되죠.”실은 마음속으로는 혼자인 게 홀가분했다. 내심 강홍택이 자기 집에 안 왔으면 했다.“당신 뭐 하려고?”강홍택은 류선의 행동이 아주 마음에 안 들었다. 류선의 마음이 편협하고 대범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류선은 강홍택의 이런 짜증을 내는 모습을 보면 화가 치밀어 오른다. 송지윤이 강 씨 저택에 들어온 다음부터 이 남자는 완전히 그 모자한테 정신이 팔렸다. 강지현에 대해 신경을 안 쓰는 것 둘째 치고 사람이 투지마저 잃었다.완전히 찌질이랑 다름이 없었다.“내가 용건이 뭐 더 있겠어요? 당신 마음속에 저 두 사람 빼고 나랑 지현이가 있기나 해요?”류선이 또 이 얘기를 꺼내자 강홍택은 짜증이 났다.“됐어, 됐어. 빨리 용건이나 말해.”류선은 그제야 불쾌해하며 말했다.“지찬이가 전태연을 집에 데리고 왔는데 우리도 빨리 지현이를 재촉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강홍택은 낯 색이 한 층 어두워졌다.“당신 또 무슨 꿍꿍이야? 지현이 지금 성원 일 때문에 지찬이에게 방비 당하고 있어. 이 시기에 또 불난 데 부채질하려고? 당신 정말 한가해서 탈이 났어?”“지찬이 우리 지현이를 방비한 게 어디 하루 이틀이에요? 그래도 우리 지현이 자기 능력으로 저렇게 큰 회사를 차렸지, 뭐예요?”말할수록 류선은 화가 났다.“당신은 왜 자기 사람의 기세를 꺾어요! 강지찬이 두려울 게 뭐가 있다고? 우리 지현이가 걔보다 못한 게 뭐가 있어요? 구소원 집안이 전태연네보다 재력이 좀 못하긴 해도 구소원 삼촌이 아주 능력 있잖아요. 만약 우리가 구씨 가문을 더 일찍 알았더라면, 그 내부 정보들 강지찬한테 넘어갔을 리가 없잖아요.”강홍택은 고개를 끄덕이었다. 류선이 드디어 한번은 정신을 차렸다고 생각했다.“구씨
정유진은 점차 두 곳의 출근 템포에 적응했다.그녀와 서정호가 담당한 프로젝트는 서로 달랐다. 서정호는 정부 청사업무를 담당했고, 정유진은 "신규지역 개발"업무를 담당했다.신규지역 개발 업무 역시 정부가 시작한 새로운 프로젝트로, 전 서울에서 가장 큰 단지를 구축하고 새로운 상권을 개발한다는 내용이었다.만약 K그룹에서 이 프로젝트를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정유진의 연우 인테리어 또한 아마 단번에 높게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회의를 끝마친 소미는 더할 나위 없이 흥분한 상태로 두 눈을 반짝였다.“대표님, 이대로만 간다면 저희 연우 인테리어가 대박 나지 않을까요?”정유진도 마음속으로는 약간 흥분된 상태였다.“열심히 해서 이 프로젝트를 따낼 수 있도록 해야죠.”그러자 소미가 가까이 다가가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제가 듣기로는 이 프로젝트가 원래는 K그룹에서 손에 넣었다고 하던데 왜 갑자기 온 나라에서 이 두 프로젝트를 알게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지금 많은 국내 부동산 거물들이 이것 때문에 서울로 몰려오고 있거든요. 제가 그때 커피 타러 갔을 때 들어보니 강 대표님 쪽에서 지금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다는 것 같더라고요.”쇼핑몰은 전쟁터와도 같다. 강지찬이 다른 사람을 깊이 모함하면, 본인도 자연스레 다른 사람에 의해 모해 당할 것이다.정유진이 소미의 어깨를 톡톡 치며 말했다.“이 일은 우리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맡은 본업만 잘하면 될 거에요.”사무실에 돌아가 자리에 앉자마자 책상 위의 유선 전화가 울렸다.수화기 너머로는 강지찬의 중저음 목소리가 들려왔다.“저녁에 나랑 같이 가야 할 접대 자리가 있어.”그 말에 정유진이 멈칫했다.“강 대표님, 접대 같은 자리에 굳이 이 디자인 총 디렉터가 갈 필요는 없지 않나요?”강지찬이 비아냥거리며 답했다.“뭐가 겁나서 그러는데? 혹시 내가 널 팔아먹기라도 할까 봐 그러는 거야? 걱정하지 마, 난 한빈이 아니니깐.”말을 마친 강지찬은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에게는 항상 그녀의 마음
온 저녁 동안 정유진은 술 한 잔만 마셨다.중간에 화장실 한번 갔다 오면서 하마터면 실수로 웬 여인과 정면으로 부딪칠 뻔했다.“죄송합니다. 어디 다친 데 없죠?”상대방의 정교한 얼굴에는 당황스러움이 가득했고, 목소리는 온화하고 부드러웠다.정유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저는 괜찮아요.”하지만 그 여인은 그래도 내키지 않는 듯 보였다.“제가 신발을 밟은 것 같은데 너무 죄송해요. 제가 한 켤레 새로 사드리는 건 어때요?”정유진은 오늘 흰색 하이힐을 신었는데, 조금 전에 하도 살짝 밟은지라 아무런 느낌도 받지 못했다.이윽고 정유진이 웃으며 말했다.“진짜 괜찮아요. 화장실에 가서 한번 닦으면 되니 너무 신경 안 쓰셔도 돼요.”정유진의 태도에 그 여인은 손을 내밀어 보였다.“안녕하세요, 저는 구소원이라고 해요.”“정유진입니다.”정유진도 구소원에게 악수하며 둘은 다시 화장실로 향했다.그녀는 휴지를 가지고 구두코에 묻은 자국을 닦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저 진짜 괜찮아요. 그러니 너무 마음에 두지 말아요.”구소원은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조금 전에 너무 예쁘신 것 같아서 얼굴을 감상하다가 부딪히고 말았네요. 근데 가까이서 보니 더 예쁘네요.”“고마워요. 구소원 씨도 예뻐요.”상대는 딱 봐도 아주 교양 있는 부잣집 딸 같았고, 전태연과는 사뭇 달랐다.한참 뒤, 화장실에서 나오니 임우연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정 대표님, 조금 전 그 아가씨가 누군지는 아세요?”그 말에 정유진이 멈칫하며 물었다.“임 비서 말을 들어보니, 임 비서는 아나 봐요?”임우연이 웃으며 답했다.“구 씨 가문도 서울에서 이름있는 가문이라 할 수 있죠. 저 또한 잘 알고 있고요. 구소원 씨 삼촌 직위가 낮은 게 아니거든요.”그의 말에 정유진은 오늘 소미가 말했던 그 말이 떠올랐다.아마 구소원의 삼촌은 강지찬 쪽의 사람이 아니라서 오늘 저녁 접대 리스트에 없었던 듯하다.정유진의 무언가 깨달은듯한 모습에 임우연이 또 한마디 더
현채영은 입꼬리만 올리며 말했다.“내가 왜 그쪽 체면을 세워줘야 하죠? 누구신데요?”그 사람은 눈을 가늘게 뜨며 현채영을 바라봤다. 가뜩이나 못생긴 눈이 이상하게 변해 더 못 생겨 보였다.“현채영, 네 주제 파악 좀 해.”그 남자는 옆에 있던 온유한을 쳐다보더니 일부러 도발적으로 말했다.“온유한 부원장이 얼마를 줬는데? 내가 두 배 줄 테니 하룻밤만 나와 같이 있는 거 어때?”현채영이 앞에 놓인 술을 그의 얼굴에 뿌리자 그 남자는 온몸이 젖었다.안 그래도 멀리서나마 현채영과 온유한을 구경하던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자 더욱 그들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천한 년, 감히 나에게 술을 뿌려?”창피를 당한 그 남자는 화가 나 자리에서 일어나 현채영을 향해 주먹을 날리려 했다.그러나 주먹이 현채영에게 닿기도 전에 옆에 있던 온유한이 그를 잡았다.그 남자는 술 범벅이 된 얼굴을 손으로 쓱 닦은 후 말했다.“온유한 부원장님, 이 여자 편을 드나 봐요?”말없이 그를 응시하는 온유한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솔직히 말해서 예전에 강지찬과 친할 때 아무도 함부로 그에게 덤비지 못했다.그들은 서울에서 연예인 같은 존재였다. 사람들은 그들 무리에 끼어들고 싶어 안달이 났기 때문에 아무도 감히 그들을 도발하지 못했다.이제 그 무리를 벗어난 온유한인지라 사람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가 확실히 이전과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그를 괴롭히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몇 초가 지난 후에야 온유한이 입을 열었다.“내 여자에게 집적거리는데 내가 안 나서면 누가 나서?”말을 마친 온유한은 그 남자를 옆으로 홱 뿌리쳤다.큰 소동에 달려온 강지찬과 정유진 그리고 강지아 모두 이 말을 들었다.온유한은 현채영을 자신의 반대편으로 끌어당긴 뒤 그 남자를 향해 말했다.“꺼져!”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창피를 당한 것을 강지찬과 그 가족이 봤으니 그 남자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일부러 온유한을 도발했다. 이 또한 강지찬에게 충성을 표하는 의미이기도 했다.“온유
현채영을 데리고 온 온유한은 연우와 우빈에게 준비한 선물을 정유진에게 직접 건넸다.“그냥 오면 되지 이렇게 비싼 선물까지 왜 사 갖고 와요.”정유진은 단아한 자태로 평범한 친구 맞이하듯 그를 대했다.“작은 성의로 봐주세요.”온유한이 대답했다.한편 온유한이 왔다는 말에 신이 나서 찾아온 최의현은 현채영을 본 순간 얼굴이 파랗게 질렸고 이를 악물며 겨우 한마디 했다.“왜 여기까지 데려온 거야? 내가 말했잖아, 지아가 돌아왔다고.”그러더니 팔을 번쩍 들며 자랑하듯 말했다.“봤지? 커프스. 지아가 준 거야.”고개를 옆으로 돌린 온유한은 강지찬과 경은우 모두 지아가 준 커프스를 착용한 것을 발견했다.서원준도 같은 커프스를 하고 있는 모습에 온유한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예쁘네.”온유한의 표정을 본 최의현은 순간 재미가 없어졌다.“지찬이에게 인사하러 안 갈래?”온유한이 말했다.“됐어, 난 꼬맹이 보러 온 거야. 그때 그러지 않았더라면... 나를 삼촌이라고 불러야 하겠지?”온유한의 얼굴을 본 최의현은 그의 말이 진심인지 농담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그냥 강우빈을 보러 온 거라고?많은 시선들이 온유한과 현채영에게 쏠렸다.그런 눈빛에 익숙해진 현채영은 웃으며 말했다.“매번 나와 같이 오니까 사람들이 어려워하잖아. 그래서 혼자 가라고 한 건데 내 말 안 듣고 말이야.”“미안해.”온유한이 말했다.“난 괜찮아. 이까짓 게 뭐라고?”현채영은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우리 집안에 일이 생겨서 그렇지 뭐. 그래서 내가 돈밖에 모른다고 생각하지. 내 옷 안에 카드를 넣으며 같이 술을 마시자고 하는 사람도 있어.”온유한도 전에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고 현채영의 난처한 상황을 지켜본 적도 있었다.두 사람은 창가 자리를 찾아 앉았다.자리에 앉자마자 잘 차려입은 남자가 술잔과 술병을 들고 다가왔다.번지르르한 얼굴의 그 남자를 온유한도 잘 알고 있었다. 졸부의 아들이며 집안에서는 강지찬에게 빌붙기 위해 온갖 방법을
강우빈이 태어나던 해 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은 인연을 완전히 끊었고 강지찬과 온유한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강지찬도 기분이 나빴다.아들이 태어난 후 백일잔치도 하지 않은 채 집안 식구들끼리만 축하를 했다.어느덧 우빈이는 세 살이 되었고 강지아가 때마침 귀국했기에 못 해준 축하를 이제는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이번 강우빈의 생일잔치는 성대하게 치르기로 했다.생일파티는 강씨 가문의 식장에서 열렸고 강지찬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손님들이 많이 왔다.정유진과 강지아는 하객 대응을 맡았다. 사람들은 오래간만에 나타난 강지아를 보고 깜짝 놀랐다.하지만 강지아는 사람들의 이상한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친구들이 한 명씩 올 때마다 반갑게 맞이했다.온씨 가문과 최씨 가문에는 초청장을 보내지 않았지만 화령은 강지아와 절친이었기에 생일잔치에 왔다.편집장으로 승진한 화령은 옛날의 풋풋함이 사라졌지만 아름다운 미녀의 기질을 한껏 풍기고 있었다.“여기 온 것을 나중에 시어머니가 알면 어떻게 해?”강지아가 한마디 물었다.황은숙은 아직도 자기 아들 최금혁을 아프리카로 보낸 강지아와 화령이 미워 죽을 지경이었다.강지아의 말에 화령이 긴 웨이브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며 말했다.“시어머니는 무슨, 그리고 진짜 시어머니라고 해도 내 일에 간섭할 수 없어.”“아이고, 우리 화령 편집장님 점점 폼이 나네. 어쩐지 최금성이 3년이나 아끼더라니, 다 이유가 있었어.”강지아의 장난기 가득한 말투였지만 화령의 얼굴에 있던 웃음이 옅어졌다.“전엔 얘기 안 했나? 작년에 유산했어.”“어?”“아기가 싫대.”화령이 최금성을 너무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강지아인지라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아팠다.좋아하는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는데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을 것이다.최금성이 아이를 키우지 못할 형편도 아닌데 말이다.“왜 싫대?”“난 그냥... 뭐랄,. 파트너니까. 애인 대역이라고 할 수도 없지.”화령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며 말을
“당연히 아프지. 문신을 할 때보다 훨씬 아파. 지난주에도 예쁜 여대생이 왔는데 울면서 문신을 지웠어. 하도 울어서 눈이 다 부었어.”“아파서 우는 건 아닐 거야.”“그렇지. 헤어진 사랑 때문에 우는 거겠지. 나도 남자이긴 하지만 어떤 남자들은 진짜로 못 돼 먹었다니까.”강지아는 잡지를 하나 집어 들어 펼쳐보았다.“네 사장님께 얘기해줘. 지금 작업 끝나면 내 다리 문신도 지워달라고.”“그래.”대답을 하고 난 뚱보는 그제야 반응했다.“뭐라고?”강지아가 말했다.“예쁜 그림 있어? 어디 좀 봐봐.”“응? 아!”뚱보는 멍한 얼굴로 노트 하나를 가져왔다.“이건 사장님이 직접 그린 그림이야. 마음에 드는 게 있는지 봐봐.”여기까지 말한 뚱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한마디 물었다.“아니, 지아 누나. 무슨 일 있어? 남자친구와 헤어졌어?”“응.”입이 무거운 진수혁이 보아하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 같았다.물론 말을 했든 안 했든 강지아는 상관하지 않았다.검은 장미꽃 한 송이를 본 강지아는 그 그림을 가리키며 말했다.“이걸로 하자. 섹시해 보이네.”그러자 뚱보가 말했다.“이 그림은 몇 년 전 거야. 요즘 젊은 여자들은 흑장미 문신을 하지 않아.”“난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이걸로 할게.”뚱보는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30분이 지나자 진수혁의 하던 작업도 끝났다.강지아의 차례가 돌아오자 진수혁이 한마디 했다.“올 줄 알았어.”강지아도 한마디 했다.“걱정 마. 울지 않을 테니.”그녀는 정말로 울지 않았다. 지우는 게 정말 아팠지만 참고 견뎠다.“지우자마자 바로 다시 문신할 수 있어? 그림은 이미 선택했는데.”“안 돼. 약국에 가서 소염제 같은 걸 사서 매일 바르고 상처가 완전히 회복해야 다시 문신을 할 수 있어.”강지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좀 이따 퇴근한 다음에 단골 술집에서 봐. 내가 한턱낼게.”진수혁이 말했다.“문신 지우자마자 술 마시면 안 돼.”강지아가 웃으며 대답했다.“그래. 안 마실게.”그녀를 힐
강지아는 오늘 돌아온다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 그저 연회장을 한 번 둘러본 뒤 바로 빠져나왔다. 강지찬과 정유진을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강지아가 집에 들어가자 집사들은 깜짝 놀라더니 얼른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다음 날 아침, 강지아는 선물 꾸러미를 들고 새언니가 있는 마당으로 갔다.“고모!”“고모.”두 아이가 달려와 강지아에게 안겼다.“우리 연우가 더 예뻐졌네. 우빈이도 점점 귀여워지고 있어.“귀여운 게 아니라 멋진 거지!”강우빈이 가슴을 치며 말했다.“그래그래, 멋지네. 역시 우리 우빈이야!”녀석은 거만한 수탉처럼 가슴을 앞으로 내밀며 어깨를 쭉 폈다.“새언니, 이 녀석 누구를 닮은 거예요? 새언니도 아닌 것 같고 우리 오빠도 닮은 것 같지 않네요.”정유진은 호호 웃었다.“어렸을 때 오빠 사진 봐봐. 가슴을 저렇게 펴는데 꼬리가 있었더라면 하늘 높이 치켜올렸을 거야. 두 남매 모두 네 오빠 닮은 것 같아. 어쨌든 나는 아니야.”그러자 연우가 말했다.“내 미모는 그래도 엄마를 더 많이 닮았지.”집안 분위기는 아주 화기애애했다.하인들이 아이들에게 아침을 먹이기 위해 데리고 간 후에야 강지찬이 입을 열었다.“어젯밤에 돌아온 거야? 연회에 갔었어?”강지아는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귀신은 속여도 우리 오빠는 못 속인다니까. 가서 한 번 둘러보고 나왔어.”“볼 게 뭐가 있다고?”강지찬이 어두운 안색을 보이자 정유진은 혹시라도 강지아가 서운해할까 봐 얼른 강지찬을 툭 친 뒤 화제를 돌렸다.“방씨 아주머니가 아침에 네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좋아하는 크리스털 찐만두를 했어. 오랜만에 먹는 거지?”강지아는 정유진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새언니, 내 눈치 보지 않아도 돼요. 난 괜찮아요.”아침밥을 먹은 뒤 강지아는 잠깐 눈을 붙이고 나서 집을 나섰다.진수혁의 기존 문신 가게는 오래된 동네에 있었기에 지금은 대부분 철거했다. 그러면서 진수혁도 이사를 가게 되었다.가게 때문에 형편이 빠듯해 강지아의 빈 집에서
최신애가 깨어났을 때 온유한과 현채영은 옆에 없었고 임유희만 그녀 옆을 지키고 있었다.“유한이는?”“유한 오빠는...”임유희의 안색이 안 좋았다.“접대가 있다며 현채영 씨를 데리고 갔어요.”화가 난 최신애는 또다시 기절할 뻔했다.“친엄마가 기절했으면 병원에서 효도하고 반성할 생각은 안 하고 또 그 천한 년을 데리고 술 마시러 갔다고?”최신애는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았고 머리도 어지러웠다.옆에 있던 임유희가 그녀를 위로하며 말했다.“어머님, 진정하세요. 유한 오빠 아마 중요한 술자리가 있어서 그런 것일 거예요. 어머님의 혈압이 낮아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갔어요.”“내가 죽어야만 나를 엄마라고 생각할 것 같구나!”임유희도 그녀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몰랐다.본인도 매우 슬펐기 때문이다.그녀도 아무런 명분 없이 온씨 저택에 머무른 것을 매우 후회하고 있었다.그녀와 현채영이 한집에 사는 것을 아는 외부 사람들이 뒤에서 어떻게 비웃을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중요한 것은 온유한이 현채영을 데리고 다니면서 사람들 눈에 자주 띄었지만 정작 본인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현채영 같은 여자와 비교당한 생각만 하면 임유희는 속이 울렁거렸다.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현채영에게 졌다는 것이다.강지아에게 진 것은 인정할만했다. 막강한 강씨 가문이고 온유한과는 어릴 때부터 친했기에 그럴만하다고 생각했다.하지만 현채영은?집안이 망해 명예도 없는데 온유한은 그녀를 보물처럼 아끼고 어디나 데리고 다닌다.임유희는 손톱이 손바닥에 박힐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연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고 서울의 명망 있는 대갓집 규수들은 거의 다 왔다.강지찬은 정유진을 데리고 왔고 한규진도 연예계에서 잘나가는 아역 배우였던 여자친구와 함께 왔다.최의현은 약혼녀를 데리고 왔고 최금성은 당연히 화령을 데리고 왔다.온유한이 현채영과 함께 나타나자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쏠렸다.이 자리에 현채영의 옛 애인도 있었기 때문이다.반면 온유한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현
대화를 나눈 후에야 온유한은 강지아에게 문신해준 사람이 진수혁이라는 것을 알았다.그녀가 타투이스트와 친구가 된 것을 온유한은 모르고 있었다.“지아가 그쪽 이름을 문신으로 새긴 거 보면 많이 사랑한 것 같은데 왜 헤어진 거야?”온유한은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지아에게 내가 어울리지 않으니까.”맥주를 다 마신 뒤 온유한은 다시 집으로 돌아갔고 진수혁은 쓰레기를 치운 뒤 샤워를 했다.진수혁은 이 집에 살고 있긴 했지만 강지아의 안방이 아니라 게스트 룸에 묵었다.샤워를 마친 뒤 강지아에게 문자를 보냈다.[네 전 남자친구와 한바탕 싸웠어.]강지아에게서 바로 답장이 왔다.[누가 이겼어?][당연히 내가 이겼지, 네 전 남자 친구 몸도 별로 안 좋았어. 반쯤 취했거든.][앞으로는 손 쓰지 마. 감당 못 하니까.][마음이 아픈 거야?][내가 마음 아플 게 뭐가 있겠어. 진작 헤어진 사람인데.][언제 돌아와? 단골 술집 가서 술이나 한잔하자.][곧 갈 거야, 돌아가면 연락할게.]이날 밤 온유한과 현채영 두 사람 모두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다음 날 오후가 되어서야 온씨 저택에 얼굴을 비쳤다.현채영이 종이백을 들고 있는 걸 보니 쇼핑을 하고 온 모양이었다.임유희를 본 현채영은 반갑게 인사했다.“임유희 씨, 퇴근했나 봐요? 오늘 쇼핑하다가 임유희 씨와 잘 어울리는 치마가 있어서 샀어요.”현채영은 치마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마음에 드는지 한 번 봐요.”이런 체면치레에 임유희는 순간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아니요. 괜찮아요.”약간 울먹거리는 임유희의 목소리에도 현채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우리 사이에 왜 예의를 차리고 그래요. 이 치마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산 거예요. 유희 씨가 나보다 날씬해서 안 입으면 나도 못 입는단 말이에요. 나와 유한 씨가 특별히 임유희 씨를 위해 산 건데.”그러자 옆에 있던 최신애가 종이봉투를 바닥에 내던지며 말했다.“누가 이따위 치마가 필요하대? 너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지? 온유한이
임유희가 돌아오자 최신애는 얼른 하인더러 저녁 식사를 차리라고 지시했다.마침 현채영이 없으니 임유희와 온유한에게 좋은 시간을 마련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런데 음식이 다 나오기도 전에 온유한이 술을 마시러 나가자 임유희도 밥을 먹지 않고 바로 방으로 들어갔다.최의현과 단둘이 술을 마시기로 약속한 온유한인지라 강지찬을 부르지 않았다.“현채영을 집으로 데려갔다면서?”“응.”최의현은 순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그럼 집안이 시끌벅적하겠구나, 임유희에 현채영까지.”술을 한 모금 마신 온유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룸을 예약하지 않고 밖에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며칠 후면 지찬이네 아들 생일인데 갈 거야?”온유한은 양복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최의현에게 건넸다.안에는 순금에 보석을 박은 금 자물쇠가 들어있었다. 뭘 선물해야 좋을지 몰라 비싼 것으로 선택했다.선물을 받은 최의현이 물었다.“안 갈 거야? 지아가 올지도 모르는데.”술을 마시던 온유한은 한참 뒤에야 말했다.“안 가.”최의현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너 설마 진짜로 현채영과 그런 사이야? 일부러 네 엄마 화나게 하기 위해 만나는 줄 알았는데... 아니,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인데?”온유한은 술을 한 모금 더 마신 후 말했다.“지아와 진작 헤어졌고 강씨 가문과도 인연을 끊었는데 내가 가서 뭐해?”“너 이 자식...”최의현은 당장이라도 욕설을 내뱉을 기세였다.“너 그냥 화가 나서 이러는 거지?”온유한이 피식 웃었다.“서원준과 약혼하면 내가 큰 선물 보낼게.”“너 정말 미쳤구나.”최이현이 한마디 했다.두 사람은 적당히 마신 후, 에이프릴 홀에서 나왔다. 시계를 보니 아직 열한 시가 되지 않았다.최의현은 약혼녀의 전화를 받고 먼저 가버렸고 온유한은 차 열쇠를 운전 기사에게 건넸다.관자놀이를 주무르며 눈을 감은 온유한은 집만 생각하면 짜증이 났다.“오늘은 집에 가고 싶지 않아요.”운전 기사는 백미러로 그를 힐끗 쳐다본 뒤 말했다.
현채영은 두 손가락으로 카드를 집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어머님, 카드 안에 얼마 있는데요?”“20억.”현채영이 입을 삐죽거리자 최신애가 냉소를 지었다.“왜 적어? 네 집에 20억은커녕 2천만 원이라도 있긴 해?”현채영은 어깨를 한 번 들썩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어머님, 제가 바보 같아 보이나요? 유한 씨에게 시집오면 온씨 가문 사업이 모두 내 것이 될 텐데 고작 20억으로 유한 씨를 포기하라고요?”그러자 최신애가 현채영에게 삿대질하며 말했다.“유한이에게 시집가고 싶어? 꿈 깨! 눈치가 있으면 돈 들고 꺼져.”현채영은 카드를 최신애 앞으로 밀며 말했다.“제가 나갈지 말지는 어머님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 유한 씨가 결정하는 거예요.”“너!”이때 마침 현채영의 휴대전화가 울렸다.전화를 받은 현채영은 전화기 너머의 사람을 향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오 대표님이시네요? 오랜만이에요. 오 대표님... 생각이요? 당연히 했죠. 너무 보고 싶어요... 저녁이요? 알겠어요. 그럼 저녁에 뵐게요.”최신애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다.“너! 너 다른 남자와 노닥거리는 걸 유한이 알아?”현채영이 웃으며 말했다.“어머님, 유한 씨는 당연히 모르죠. 하지만 오 대표님은 그저 친구일 뿐이에요. 오랜만이라 만나서 술 한잔 마시는 거니까 유한 씨도 뭐라고 하지 않을 거예요.”이런 여자를 온유한이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집으려 데려왔다니! 최신애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정말 가문이 망하는 꼴을 보고 싶어 환장했나...“너 이거, 이거...”화가 난 최신애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도 잇지 못했다.“유한이에게 네 민낯을 똑똑히 알리고 말 거야. 널 내쫓게 할 거야.”그 말에도 현채영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대꾸했다.“말하세요. 유한 오빠가 어머님을 믿을까요. 아니면 저를 믿을까요?”최신애는 말문이 막혔다.오후에 꿀잠을 잔 현채영은 온유한이 퇴근하기 전에 메이크업을 하고 집을 나섰다.온유한이 돌아오자마자 최신애는 바로 가서 고자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