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진은 이런 석식 자리가 너무 지루해 핑계를 대고 먼저 가겠다고 했다.하지만 룸 문을 나서자마자 누군가가 그녀의 허리를 껴안더니 바로 옆 룸으로 그녀를 밀어 넣었다.옆 룸은 비어 있었고 안에는 불도 켜지 않아 어두컴컴했다.룸 문이 쾅 닫히는 소리에 정유진은 소스라치게 놀랐다.“당신 누구야! 왜 이러는 건데!”그 사람은 미친 듯이 정유진에게 달려들더니 그녀를 벽에 밀치고 키스하기 시작했다.비록 4년이 지났지만 차가운 향수 냄새와 익숙한 숨결에 정유진은 바로 누군지 알아챘다.정유진은 너무 화가 나 힘껏 발버둥 치며 욕설을 퍼부었다. “강지찬, 당신 미쳤어?”순간 ‘찌직’하는 소리와 함께 정유진의 치마가 찢겼고 그녀의 가슴에 차가운 바람이 불어 들었다.그 사람은 계속 아무 말도 없이 그녀의 얼굴과 목, 그리고 가슴에 뜨겁게 키스했다. “놔 이 나쁜 자식! 내가 더럽다며! 그런데 지금 뭐 하는 건데?”순간 강지찬은 모든 행동을 멈췄다.온몸에 술 냄새가 많이 나는 걸 보아 분명 많이 마신 게 틀림없었다.그는 정유진의 턱을 꽉 잡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맞아, 더러워! 강지현의 여자가 된 후로 어떻게 변했는지 한번 맛보고 싶었을 뿐이야.”정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그래서 맛이 어떻게 변했는데요? 강 대표님.”그녀가 부인하지 않자 강지찬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그러고는 마치 손에 닿은 더러운 물건을 버리듯 정유진의 몸을 확 밀쳤다.“정유진, 당신 정말 못됐어!”강지찬은 말을 마치자마자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곧바로 장형준이 손에 외투를 들고 바로 들어왔다. “사... 사모님, 강 대표님이 많이 취하셨어요.”정유진은 장형준이 건네는 외투를 받아 들고는 입술을 닦으며 말했다.“고마워요. 그리고 더 이상 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마세요.”정유진이 어두컴컴한 룸에서 혼자 쉬고 있을 때, 갑자기 핸드폰 진동이 한번 울렸다.온미정에게서 온 문자에 정유진은 ‘알겠어요'라고 답장했다.그동안 온미정은 해외에서 한 활동에 참가하고 있었다
강지아는 몇 년 못 본 사이에 더 예뻐졌다.“새언니, 저와 같이 집에 가요? 네?”정유진은 속으로 그녀가 말한 집이 강씨 본가인지 묻고 싶었다. 사실 정유진은 진작부터 두 번 다시 그곳에 발을 들여놓지 않을 거라고 속으로 다짐했다.그때 옆에 있던 온미정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으이구, 꿈 깨! 너의 오빠 그 개자식보고 저리 가라고 해.”하지만 강지아는 온미정의 말을 아랑곳하지 않고 다급한 얼굴로 말했다.“새언니, 인터넷에 떠도는 기사들은 절대 믿지 마세요. 우리 오빠와 안나는 그저 사람들 앞에서 연기하는 거지 사실이 아니에요.”옆에 있는 온미정이 끼어들었다.“그래도 이미 때가 묻었잖아.”그러자 강지아는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고모님, 잠시만 조용히 해주시면 안 돼요?”그 말에 온미정은 온유한을 보며 말했다.“이것 좀 봐, 이 계집애가 너희들이 하도 오냐오냐하니까 이렇잖아. 고모에게 하는 말버릇 좀 봐.”옆에 있는 온유한은 그저 헤헤 웃기만 했다.정유진은 강지아의 손을 잡으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나와 지찬 씨는 이제 끝났어. 앞으로는 그냥 언니라고 불러.”그 말에 강지아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완전히 정신이 든 강지아는 지금 그녀에게 ‘새언니’만이 진짜 가족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강지아는 정유진이 다른 데 정신이 팔린 사이 몰래 강지찬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오빠, 새언니가 유한 오빠 고모님 집에 있어. 빨리와!]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강지찬의 답장이 왔다.[회의 중이야. 바빠.][...]하지만 정유진이 온미정의 집을 떠나기 바쁘게 강지찬이 바로 도착했다.강지아는 그런 강지찬을 노려보며 말했다.“회의 때문에 바쁘다며? 새언니 갔어.”강지찬은 퉁명스러운 얼굴로 강지아를 쳐다보며 말했다. “나는 우리 집 말썽꾸러기를 데리러 온 거야. 다른 사람하고는 상관없어.”그 말에 옆에 있던 온미정이 다리를 꼬며 말했다.“다른 사람이야?”강지아는 강지찬의 팔을 잡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상관
“강 대표님, 예담에서 또 택배가 왔습니다.”강지찬은 시선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문서 세단기에 넣어.”임우연은 뜯지도 않은 우편물을 바로 문서 세단기에 넣었다.이때 강지찬의 핸드폰으로 낯선 번호가 걸려왔다.그는 받지도 않고 바로 끊었다. 하지만 전하가 곧바로 다시 걸려오자 강지찬도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받았다.“강 대표님, 택배를 조회해 봤는데 이미 도착했다고 하니까 빨리 사인하고 다시 저에게 보내주세요.”“무슨 택배? 못 받았어.”강지찬은 말을 하자마자 바로 전화를 끊었다.강지찬의 택배는 보통 비서가 대신 직접 받는다. 정유진은 방금 택배회사에 연락해 택배가 도착한 것도 이미 다 확인했다. “이 나쁜 자식, 도대체 무슨 뜻일까?”그 말에 옆에 있는 조예원이 한마디 했다.“너와 이혼하기 싫은 거지.”정유진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이렇게 질질 끌면 고소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고소하는 게 얼마나 번거로운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중요한 건 강지찬의 태도야. 고소한다고 해도 이혼해줄지 말지 어떻게 알아. 잊지마, 여기 서울이야. 강지찬이 있는 서울.”“그럼 나더러 어떡하라고...”정유진은 강지찬이 이혼을 해주지 않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자기를 극도로 싫어하지 않는가? 그런데 왜 이혼은 안 해주는 걸까?정유진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안나도 잘 만나고 있지 않은가? 이혼하면 강지찬은 완전히 자유의 몸이 되고 그러면 더 편하지 않은가?“안 되겠어. 얘기 좀 해봐야겠어.”정유진은 말을 하자마자 바로 옷을 갈아입으러 위층으로 올라갔다.그 말에 조예원은 깜짝 놀란 듯 눈이 휘둥그레진 채 물었다.“설마 K그룹에 강지찬을 찾으러 가려고?”“응, 내가 이번에 돌아온 목적이 강지찬과 이혼하는 거야. 안 그러면 내가 어떻게 가족들 데려와?”K그룹에서는 한창 프로젝트 건으로 회의 중이었다. 그리고 회의실 프로젝터는 때마침 정유진의 자료를 띄우고 있었다. 이 사무실에서 정유진을 알고 있는
K그룹에 온 이상 강지찬을 못 만나면 이대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한 정유진은 바로 강지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팅 중,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강지찬의 휴대폰이 ‘윙윙’거리며 진동했다.휴대폰을 한 번 힐끗 바라본 강지찬은 전화를 끊지도, 그렇다고 바로 받지도 않았다. 회의실 안의 사람들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잠자코 있었고 프레젠테이션을 하던 서정호도 말하던 내용을 멈췄다.그러자 강지찬이 손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계속하세요.”그제야 서정호도 그의 디자인 철학을 말하기 시작했다.정유진은 세 번이나 전화를 걸었고 강지찬의 핸드폰은 책상 위에서 계속 진동하고 있었지만 강지찬은 아예 듣지 못한 듯했다.정유진이 네 번째로 전화를 걸려고 할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유진 씨?”강원훈이었다.“작은 아... 강 선생님.”정유진은 바로 호칭을 바꿨다.강원훈도 그녀의 호칭에 굳이 신경을 쓰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왔으면 올라가지 않고 여기 서서 뭐해? 지찬이를 찾으러 온 거지? 같이 가.”프런트 데스크에 있는 직원들이 나서서 막으려 하자 강원훈이 손을 내밀어 제지했다.“너희들과 상관없는 일이야.”정유진은 강원훈을 따라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프런트 데스크의 직원들은 그들의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저 여자는 누구예요? 어떻게 셋째 어르신을 알아요?”“그러게요. 물론 임 비서가 올라가지 못하게 하라고 했지만 어차피 셋째 어르신과 같이 올라간 거니까 우리와 상관없죠.”한편 엘리베이터에 탄 강원훈은 몸을 엘리베이터 벽에 비스듬히 기대고 물었다.“지찬이가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아?”“네.”그러자 강원훈은 안타까운 얼굴로 ‘쯧쯧’ 하며 혀를 내차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말도 없이 떠나서 지찬이가 상처를 많이 받은 건 사실이야. 지찬이도 많이 슬펐을 거야.”정유진은 이것저것 설명하고 싶지 않아 한마디만 했다.“저와 지찬 씨는 어울리지 않아요.”강원훈은 어깨를 한번 으쓱하며 올리더니 더 이상 그들의
“셋째 어르신과 함께 올라왔어요.”정유진은 가방에서 이혼협의서 두 개를 꺼내어 강지찬에게 전달했다.“지찬 씨 찾으러 온 건 다른 이유는 없고요. 여기에 사인만 부탁드릴게요. 이러면 저희 두 사람 다 편하잖아요.”강지찬은 이혼협의서에 눈길도 주지 않고 정유진을 차갑게 노려보며 말했다. “다 편해? 그래야 다른 남자를 편하게 만날 수 있으니까?”‘이 인간은 분명 미친 게 틀림없어.’속으로 이렇게 생각한 정유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내가 누구를 만나든지 안 만나든지 그렇게 중요하지 안 잖아요. 강 대표님을 위해 그러는 거죠. 빨리 사인하세요, 강 대표님. 저기 손님도 기다리고 있는데.”정유진은 전태연이 서 있는 방향을 한번 힐끗 보고는 강지찬에게 빨리 사인하라고 손짓했다.한편 옆에 있던 전태연은 이 상황이 점점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강지찬은 사무실에 들어온 이후, 자기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고 오롯이 이 여자만 뚫어지게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 대표님, 저 태연이에요. 저희...”“나가.”순간 어리둥절해진 전태연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강지찬이 계속 정유진만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강 대표님, 누... 누구요?”“나가.”강지찬이 또 한 번 소리치자 임우연이 난감한 얼굴로 얼른 다가와 전태연에게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라는 뜻의 손짓을 했다.“죄송합니다. 전태연 씨, 저희 강 대표님이 지금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오늘 저녁 식사는 취소해야 할 것 같습니다.”전태연은 이 상황이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듯 앞에 있는 정유진을 가리키며 그녀에게 물었다.“강 대표님과 아무 관계가 없다면서요?”‘내가 언제 강지찬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했지?’속으로 이렇게 생각한 정유진은 억울한 듯한 얼굴로 전태연을 보며 말했다. “저는 이 사람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한 게 아니라 두 분 저녁 식사를 방해하지 않을 거라고 했죠. 물론 이 일은 제가 결정할 일이 아니지만요.”정유진도 눈앞에 있는 강지찬의 속셈을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정유진이 엘리베이터를 나오자마자 전태연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당신이 바로 소문만 무성한 강 대표의 전 약혼녀 정유진인가요?”정보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빨리 알아내는 전태연인지라 강지찬의 사무실에서 나오자마자 정유진에 대한 정보를 바로 알아냈다.“강지현과 도망간 거 아니에요? 그런데 왜 또다시 돌아온 거예요?”정유진은 안 그래도 기분이 너무 안 좋았기에 여기서 강지찬의 여자와 입씨름을 하고 싶지 않았다. 정유진은 전태연이 말을 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바로 몸을 돌려 옆으로 지나가려는 순간, 전태연의 경호원 두 명이 그녀를 막아섰다.정유진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이보세요, 아가씨. 우리 서로 아는 사이도 아닌데 굳이 제가 이런 것까지 아가씨에게 대답해야 할 의무가 있을까요?”재벌 집에서 아가씨 행세를 해오며 부모님이 오냐오냐하게 키운 탓에 항상 도도했던 전태연은 거침없는 정유진의 태도에 순간 기분이 확 안 좋아졌다. “정유진 씨, 경고하는데 내가 묻는 말에 솔직하게 대답하는 게 좋을 거예요. 괜히 내 신경을 건드리지 말고요.”정유진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말했다.“그래요, 뭘 물어보고 싶은데요?”“강 대표님과 헤어진 게 맞나요?”정유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바로 대답했다.“헤어진 셈이죠.”정유진도 쉽고 빨랐던 혼인신고와 달리 관계를 정리하는 게 이토록 어려운 줄 몰랐다. 사실 그녀와 강지찬은 혼인신고 그 종이 한 장만 빼면 헤어진 셈이나 다름없었다.다만 아직 확실하지 못할 뿐이었다.“헤어진 셈이라니요?”전태연이 그녀의 대답을 마음에 들지 않아 하자 정유진은 진지한 얼굴로 다시 말했다.“강지찬 씨가 그렇게 좋으면 단속 좀 잘하세요. 빨리 나와 정리할 수 있게 얘기 잘하고요. 그게 우리 모두에게 좋은 게 아닐까요?”강지찬과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하지도 않은 전태연의 입장에서는 이 말이 귀에 너무 거슬리게 들렸다.“무슨 뜻이에요, 비웃는 거예요?”정유진은 이런 그녀의 반응이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대체 어느 부분에서 비웃는다고
사진은 가까이 걸어오는 강지찬과 장형준의 발 앞에 떨어졌다.순간 정유진은 깜짝 놀라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전태연은 강지찬을 보고 바로 그의 가까이에 다가가 말했다.“강 대표님, 정유진 씨와 장난 좀 쳤어요. 그런데 지금 어디 가는 길이예요?”강지찬은 정유진을 힐끗 보더니 다시 전태연을 보며 말했다.“오늘 저녁 같이 먹기로 한 거 아니에요?”약속이 깨진 줄 알았던 전태연은 강지찬의 말에 활짝 웃었다.“네, 네. 맞아요.”하지만 정유진은 두 사람이 밥을 먹으러 가는지 아니면 호텔을 가는지 전혀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그녀의 관심은 온통 그 사진에 쏠려 있었다.강지찬이 고개만 숙이면 바로 사진을 보게 될 것이다.‘안돼! 강지찬에게 절대 사진을 보여 줘서는 안 돼!’경호원이 잠깐 한눈을 판 사이 정유진은 바로 자기를 잡고 있던 경호원의 팔을 뿌리쳤다. 그러고는 창피함을 무릅쓰고 달려들어 사진을 발밑에 밟았다.강지찬은 미친 듯이 앞으로 달려오는 정유진의 모습에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정유진은 화장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사진과 지갑만 주워 가방에 쑤셔 넣었다.화가 머리끝까지 난 정유진은 강지찬을 보며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강지찬 씨, 이 여자와 너무 잘 어울리네요. 백년해로하시길 바랍니다!”말을 마친 정유진은 강지찬을 덩그러니 남겨둔 채 자리를 박차고 바로 가버렸다. 옆에 있던 전태연은 강지찬이 자기를 거만하다고 오해할까 봐 바로 설명했다.“정유진 씨가 예전에 대표님을 배신했다는 말은 들었어요. 그래서 지갑에 혹시나 다른 남자와 관련된 증거가 있지 않을까 해서 뒤진 거예요.”강지찬은 차가운 눈빛으로 입구까지 걸어간 정유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가 있었나요?”“아무것도 없었어요. 카드도 몇 장 없던데요.”전태연은 말을 하자마자 가까이 다가와 강지찬의 팔짱을 끼려 했다.강지찬도 별 거부를 하지 않자 그녀도 서슴없이 팔짱을 꼈다. 한편 차에 오른 정유진은 운전석에 앉
정유진은 특별히 이곳저곳에 연락해 이혼소송의 성공률을 알아봤다. 하지만 다들 약속이나 한 듯 승소할 자신이 절대 없다고 대답했다.강지찬이 이혼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법원이라고 해서 그들을 강제로 이혼시킬 수 없었다.제일 원만한 결과가 합의이혼인데 이렇게 되면 시간이 길어지기에 정유진에게는 그만큼 할애할 여유도 시간도 없었다.“그래도 강지찬부터 손을 써야 해.”조예원의 말에 정유진은 관자놀이를 주물렀다.“강지현이 출국하는 것을 도와준 거로 내가 강지현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오해하고 있어.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도 없고. 그 사람이 나를 많이 원망해.”“사실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잖아. 지현 오빠가 곧 온다고 하지 않았어? 그때가 되면 강지찬도 너희 두 사람이 같이 있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될 거야.”“제발 그랬으면 좋겠어.”강지현이 돌아오는 날, 원래는 조예원이 마중 나가려 했지만 성원에서 갑자기 미팅하자고 연락이 오는 바람에 결국 정유진이 차로 몰고 마중을 나갔다.공항에는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응원 플래카드와 꽃을 든 팬들이 출구에서 대기하고 있었다.잠시 후,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쓴 톱스타가 걸어 나왔고 그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처음에 정유진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몰랐지만 주변 팬들의 목소리로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안나, 안나!”“안나 씨, 사랑해요.”팬들은 마이크를 안나 얼굴 가까이에 대고 물었다.“안나 씨, 이번에 서울에 오게 된 것은 개인 스케줄 때문입니까, 아니면 업무 스케줄 소화하러 온 건가요?”“안나 씨, 강 대표님을 보러 온 건가요?”“안나 씨의 생일이 거의 다가오고 있는데 혹시 강 대표님과 함께 보내실 건가요?”정유진이 멀리서 그들을 보고 있을 때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를 툭툭 쳤다.고개를 돌려보니 강지현이 이미 옆에 와있었다.“마중 나온 사람이 내가 옆에 온 줄도 몰라요?”정유진은 웃으며 대답했다.“톱스타를 구경하느라고요.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강지현은 들고 있던 짐을 그녀에게 넘기지 않고
“온 선생님이 또 오신 것 같아요.”동하민이 강지아가 듣지 못하게 작은 소리로 정유진에게 말했다.“오지 말라고 전해, 지아는 만나지 않을 거야.”“네.”문에 기대어 서 있는 온유한은 며칠 만에 살이 쏙 빠진 모습이었다.“온 선생님, 대표님이 온 선생님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아요. 그러니 그냥...”동하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온유한은 그녀를 밀치고 안으로 뛰어 들어가더니 마당의 나무 아래에서 앉아 쉬고 있는 강지아를 덥석 껴안았다.순식간에 몸이 굳어진 강지아는 코끝에서 나는 익숙한 냄새를 맡고는 미친 듯이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지아야, 나도 이쪽에 집을 하나 샀어. 너만 괜찮으면 내가 여기에 와서 너와 같이 살게. 어때?”“이거 놔!”온유한은 강지아가 몸부림칠수록 더 꽉 껴안았다.깜짝 놀란 동하민은 얼른 다가와 온유한을 잡아당겼다.“온 선생님, 대표님 상처가 아직 다 안 나았어요. 자극하지 마세요!”온유한은 동하민의 말 따위 아랑곳하지 않았다.“네가 일부러 기억 잃은 척한다는 거 알아. 지아야, 나 진짜로 임유희와 아무 일도 없었어.”강지아는 몸부림을 멈추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래서 뭐? 이제 와서 우리가 함께할 수 있을 것 같아? 오빠 어머니에게 그렇게 많은 수모를 당했는데 내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계속 오빠와 함께 있을 수 있을까?”“우리 어머니는 어머니이고 나는 나야!”온유한이 다급히 소리쳤다.“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나에게 벌을 주지 말아줘.”“그건 오빠 엄마야!”강지아의 말에 온유한은 아무 말도 못 한 채 강지아를 품에서 놓아주었다.“그래서 우리 엄마 때문에 지금 나 쳐다보기도 싫은 거야?”강지아가 시선을 아래로 떨구며 말했다.“온유한, 이러면 우리 서로만 괴로워. 그만하자.”“하...”온유한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네 마음속에 나와 함께 있는 게 괴로운 거였구나.”강지아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여긴 왜 왔죠?”이때 멀리서 온유한을 발견한 서원준은 그와 싸우기 위해
온유한을 바라보는 강지아의 눈빛은 아주 낯설었다. 마치 눈앞의 남자를 정말 모르는 듯했다.다른 사람들도 강지아가 정말로 기억을 잃은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몰라 서로만 쳐다보았다.“지아야, 이러지 마.”온유한은 가슴이 너무 아팠다.강지아가 온유한에게서 손을 빼더니 정유진을 향해 말했다.서원준은 온유한의 멱살을 움켜쥐더니 밖으로 끌고 나갔다.“봤어요? 지아는 그쪽을 기억하지 못해요.”온유한은 의사를 찾으러 갔다.“기억 상실이라고요?”베테랑 의사가 안경을 위로 밀며 말했다.“기억 상실일 리가 없을 텐데...”MRI 사진을 들고 온유한과 한참을 얘기한 베테랑 의사가 한마디 했다.“이상하네요. 진짜로 기억을 잃었다고요?”온유한은 바로 알아챘다.기억 상실이 아니라 그를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강지아가 깨어나자 강지찬은 서울로 올라갔고 정유진과 그녀의 엄마 아빠가 이곳에 남아 강지아의 병간호를 했다.온미정과 백무영은 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여행을 갈 예정이었지만 강지아의 사고로 일정을 취소했다.온미정도 신혼여행 갈 기분이 아니었기에 남편과 아이를 데리고 서울로 와서 이삿짐을 정리했다.진정한 의미에서의 이사이다. 모든 물건을 차에 실어 온혁진의 집에 있던 그녀의 물건을 모두 정리했다.“새언니가 잘못했다고 해서 굳이 집을 나갈 필요는 없잖아?”온혁진의 표정은 보기 안 좋았다. 서울로 올라온 후, 강지찬은 투자를 빠른 속도로 회수하기 시작했다.정유진과 친한 온미정이었는데 이젠 온미정이 이사를 갔으니 강씨 가문과 사이좋게 지낼 사람마저 없어졌다.온미정은 최신애만 생각하면 화가 났다.“나에게 새언니 따위는 없어요. 나는 나를 바보 취급하는 사람을 제일 증오해요. 그런데 최신애는 나를 바보 취급했을 뿐만 아니라 내 감정을 이용했어요. 이런 정신 나간 미치광이를 더 이상 내 새언니로 인정할 수 없어요.”물건을 차에 다 실은 뒤 온미정이 한숨을 내쉬었다.“오빠, 유한이 좀 더 지켜봐 주세요. 나보다 백배는 더 힘들 거예요. 그
꿈은 정말 깨고 싶지 않았다. 예전에 강지아와 같이 웃으며 놀았던 장면이었기 때문이다.깨어난 온유한은 호텔에 누워있는 자신이 현실로 돌아왔음을 느끼고는 침대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유한 오빠, 깼어요?”침대 옆에 엎드려 밤새도록 그를 지켰던 임유희도 깼다.온유한은 그녀의 목소리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배고프죠? 아침 식사를 가져오라고 할게요.”“꺼져.”임유희는 아무 말 없이 뜨거운 물 한 잔 따라 놓고 밖으로 나갔다.잠시 후 호텔 직원이 아침 식사와 해장국을 가져다주었다.온유한도 먹지 않은 채 또 한참을 누워있다가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가서 샤워를 했다.거울을 보니 눈두덩이가 움푹 패였고 수염이 길게 나 있어 아주 초라해 보였다.온유한은 수염을 깎고 머리를 정리한 후 옷을 갈아입고 다시 병원으로 갔다.강지아는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긴 상태였다.늦은 시간, 병원에는 정유진과 온미정 그리고 화령이 강지아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화령은 일 때문에 최금성과 같이 온미정의 결혼식에 오지 못했다. 그런데 강지아에게 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왔다.세 여자는 온유한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유한도 주위 사람을 못 본 듯 곧장 강지아의 침대 옆으로 가더니 강지아의 손을 잡았다.보다 못한 온미정이 나가서 죽 한 그릇을 사 왔다.“와서 일단 밥부터 먹어.”온미정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온유한은 강지아만 뚫어지게 바라봤다.그 모습에 온미정이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이런 꼴로 곁에 있으면 지아가 마음을 돌리겠어? 지아는커녕 나도 널 용서 못 해.”온미정은 화가 났지만 혹시라도 강지찬이 올까 봐 목소리를 낮췄다.대신 온유한의 팔을 잡고 말했다.“일단 밥부터 먹어. 굶어 죽고 싶은 거야?!”온유한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굶어 죽으면 용서해 줄까요?”온미정은 이 자식의 뺨을 때리고 싶었다.바로 이때 병실에 들어온 강지찬과 서원준이 강지아의 손을 잡고 있는 온유한을 발견했다. 서원준은
이틀이 지나도 강지아는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사흘째 되던 날 강지찬이 전국 뇌과 전문의들을 불러 다시 진료했고 토론 끝에 전문가들이 내린 결론은 병원 측 주장과 비슷했다.지금으로서는 아무것도 확정할 수 없지만 강지아가 깨어날 수 있고 또 의식이 또렷하다면 괜찮을 거라는 것이었다.하지만 깨어나지 못하거나 깨어났을 때 다른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예를 들어 기억 상실 혹은 이전의 질병이 재발할 수도 있었다.온유한은 이틀 동안 밥도 먹지 않은 채 병실 밖을 지켰지만 온씨 집안의 친척들 외에는 아무도 그를 상대하지 않았다.최의현과 한규진조차 그를 보고는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서원준도 더 이상 온유한을 상대하지 않고 무시해버렸다.결국 최금성이 온유한을 끌고 가다시피 하면서 데려갔다.호텔에 돌아오자마자 온유한은 방에 틀어박혀 술만 마셨다. 말도 하지 않고 밥도 먹지 않았으며 덥수룩한 수염도 깎지 않았고 목욕조차 하지 않았다.호텔 지배인을 불러 강제로 문을 열고 들어간 최신애는 술 냄새에 기절할 뻔했다.죽은 개처럼 침대에 엎드려 있는 온유한은 신발 한 짝만 발에 걸쳐 있었고 다른 한 짝은 보이지 않다.식탁 위에는 어제 음식들이 변질된 상태로 남아 있었다. 보아하니 한 입도 먹지 않은 것 같았다.“온유한, 강지아 따라 죽을 작정이야?”‘강지아'라는 세 글자에 죽은 개처럼 누워있던 온유한이 움직였다.“지아야? 지아야, 어디 있어?”강지아를 부른 뒤 손에 든 술병을 들어 또 마시려 했다.다만 술이 침대에 전부 흘러 한 방울도 남지 않았다.이런 모습을 본 최신애는 화가 나면서도 마음이 아파 그의 곁에 다가가 술병을 빼앗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온유한, 더 이상 수술 안 할 거야? 이렇게 마시면 손이 떨려 수술을 어떻게 하려고 그래!”온유한은 안경을 끼지 않은 채 실눈을 뜨고 최신애를 한참 동안 쳐다봤다.안경은 어디에 떨어졌는지 주위에 보이지 않았다.“누구세요? 꺼져요! 꺼져!”최신애가 손짓하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호텔 남자직원
강지아를 차에서 안고 내릴 때 서원준은 두 손을 떨고 있었다.온몸이 마비된 듯했고 호흡이 가빠졌으며 심장이 너무 아파 강지아의 얼굴을 차마 볼 수 없었다.“바보, 멍청이!”강지찬이 급하게 외쳤다.“지아는 어때?”“혼수상태입니다. 당장 병원으로 옮겨야 해요.”“헬기가 곧 도착할 거야.”강지아가 수술실에 들어간 후, 온몸이 강지아의 피로 물든 서원준은 온유한을 보자마자 달려들어 몸싸움을 벌였다.최의현과 한규진이 한참을 말려서야 떼어놓을 수 있었다.“넌 병신이야.”서원준이 온유한에게 삿대질하며 가차 없이 욕설을 퍼부었다.수술실 밖에 사람들이 가득 모였다.온미정은 자책한 듯 안색이 매우 안 좋아 보였다.정유진도 이 병원에 입원 중이다. 강지찬의 말대로 정유진이 마음이 급해 뛰어가는 바람에 태아가 움직여서 지금 침대에 누워있었다.“다 내 탓이야!”항상 당당하던 온미정이 주눅 든 얼굴로 자신의 뺨을 때렸다.“최신애의 말을 믿다니, 내가 바보 멍청이야!”그러자 정유진이 어이없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고모님과 무슨 상관인데요? 고모님이 아니어도 지아를 속여서 오게 했을 거예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요. 본인 친아들이잖아요. 일생일대의 중요한 일인데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죠?”그러자 온미정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최신애는 미쳤어. 넌 더 이상 생각하지 마. 지아는 괜찮으니까 네 몸이나 돌봐.”정유진의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야말로 일이 더욱 커진다.이번 일로 화가 난 강지찬은 분명 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의 수십 년 우정을 끝낼 것이다.수술이 끝난 뒤 강지아는 중환자실에 입원했다.의사 말로는 고비는 넘겼지만 머리를 다쳐 환자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언제 깨어날지도 확실하지 않다고 했다.“정말 못 깨어날... 수도 있나요?”최신애의 물음에 온혁진이 화가 나서 탁자를 쳤다.“왜, 깨지 말기를 바라기라도 하는 거야?”남편, 아들과 시누이에게 번갈아 가며 혼쭐이 난 최신애는 이미 기가
위험 구간이 점점 가까워져 오자 서원준은 가슴이 두근거렸다.“강지아, 멈춰! 나 삼대독자란 말이야. 너 때문에 우리 집 대가 끊기면 집안 조상들이 너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강지아, 이 바보야! 그깟 남자를 위해 목숨을 걸겠다는 거야? 네 목숨이 그렇게 하찮아?”강지아는 미친 듯이 핸들을 두드렸다.“맞아, 내 목숨 하찮아. 그때 차라리 내가 죽는 거였어! 왜 나를 살려둔 것인데? 우리 엄마가 살아 계셨다면 교양이 없다고 욕먹는 일도 가정교육을 못 받았다고 하는 사람도 없었겠지?”강지아의 목소리가 낮아서 서원준은 뒷말을 듣지 못했지만 강지아가 핸들을 놓을 때마다 서원준은 당장이라도 심장마비가 올 것 같았다.“운전대 잘 잡고 운전해! 천천히 가라고! 들었어?”이때 드론 한 대가 빠르게 지나가더니 안에서 강지찬의 목소리가 들렸다.“지아야? 오빠야. 잘 들어, 길옆에 차 세워놓고 일단 무슨 일이든 오빠와 얘기해.”드론을 힐끗 본 강지아는 입술을 깨물었다.“강지아, 오빠 말 못 들었어? 얼른 길옆에 차 세워. 이러다가 죽는다고! 네가 죽어도 그 사람들은 죄책감 같은 거 느끼지 않을 거야! 만약 나라면 그 사람들보다 더 잘 살 거야! 지아야, 오빠만 믿어. 아무도 널 괴롭히지 못할 거야. 네 새언니를 생각해 봐. 네가 차를 몰고 나왔다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서 배가 아프대.”그 말에 강지아의 표정이 변했다.하지만 이때 도로 상황이 바뀌었다.앞쪽은 커브 길이었고 앞쪽 차를 발견한 강지아는 속도를 줄이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어쩔 수 없이 핸들을 마구 꺾었다.차는 고속도로의 난간을 부수고 해변으로 돌진했다.해변은 아직 미개발지역이라 곳곳이 돌로 뒤덮여 있었다.이미 통제력을 잃은 강지아의 차는 아무리 브레이크를 밟아도 소용이 없었다.‘펑’하는 소리와 함께 차가 거대한 돌멩이를 들이받은 뒤 멈추었다.차의 보닛이 부딪혀 열렸고 차 앞쪽에서 짙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달려와 차 문을 잡아당긴 서원준은 피투성이가 된 채 핸들에 엎드려 꼼짝도 하지 않
호텔에서 뛰어나온 온미정은 길가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는 동하민을 발견했다.“온 선생님 어떡해요. 대표님이 직접 운전하고 가셨는데 이런 상태에서 사고가 날까 봐 걱정이에요.”“X발!”온미정은 참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었다.다행히 백무영이 제때 차를 몰고 와 두 사람은 서둘러 차에 올랐다.강지아가 너무 빨리 운전해 가는 바람에 온미정 일행은 강지아를 뒤쫓아 가지 못했다.호텔은 리조트에 있고 지금 이 시각 도로에 차가 적어 강지아는 신호등을 여러 번 무시하고 바로 고속도로를 탔다.차 뚜껑을 열어 운전하는 강지아는 머릿속에는 온통 호텔 침대에 누워있던 온유한의 모습과 최신애의 웃는 얼굴 뿐이었다.조수석에 있는 휴대전화가 계속 울렸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얼마나 지났을까 파란 스포츠카 한 대가 뒤에서 쫓아왔다.강지아보다 빨리 달리는 그 차는 이내 그녀의 차 옆에서 나란히 달렸다.“바보야, 아침부터 왜 갑자기 폭주를 하고 그래?”고개를 돌려보니 서원준이었다.서원준이 여기에 왜 온 것이지?서원준은 조심스럽게 차를 몰면서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차 운전 솜씨가 생각보다 괜찮네. 여기 경치가 좋은 것 같은데 우리 내려가서 구경할래?”해안가 옆에 있는 고속도로라 풍경이 정말 좋았다. 파란 하늘과 바다는 티끌 하나 없이 깨끗했다.하지만 강지아는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기분이 아니었기에 계속 빠른 속도로 차를 운전했다.“따라오지 마, 꺼져!”강지아가 서원준을 향해 소리쳤지만 서원준은 전혀 개의치 않고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아이고, 왜 이렇게 화가 많이 났을까? 누가 우리 강 선생님을 이렇게 화나게 한 거야? 내가 가서 한 대 패줄까?”서원준이 끈질기게 강지아의 차를 따라붙었다.“말해봐. 말해보라고. 이 오빠가 대신 화풀이를 해줄게.”강지아가 가속페달을 밟자 차가 저 앞으로 쌩하니 달려나갔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장난기 넘치던 서원준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더니 이내 속도를 높여 따라갔다.다행히 도로가 한적해 괜찮았지만 강지아가 이대로 계속
강지아가 뛰쳐나가는 것을 본 온미정은 넋이 나갔다. 강지아를 부른 사람은 온미정인데 이런 일이 생겼으니 앞으로 강지찬과 정유진의 얼굴을 어떻게 본단 말인가?얼른 백무영더러 쫓아가라고 했다.“최신애, 이렇게 비열한 줄 몰랐네!”온미정은 당장이라도 최신애를 씹어먹어 버리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더 이상 그녀의 체면 따위 세워줄 수 없었다.“지아에게 사과하겠다고 속이고 아침까지 직접 만들어 식사에 초대하고 싶다고 하더니, 나와 지아가 바보로 보여요?”온미정은 삿대질하며 말했다.“이 모든 걸 본인이 직접 설계한 거죠?”최신애는 당연히 인정하지 않았다.“미정 씨,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 나와 무슨 상관인데요?”다른 사람들 모두 온미정을 보고 있었다.물론 이런 일이 좀 창피하긴 하지만 임씨 집안으로선 이참에 임유희가 온유한에게 시집갈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었기에 임씨 집안 사람들은 당연히 침묵을 지켰다.충격에 빠진 건 온혁진과 온유한 뿐이었다.결혼한 지 오랜 아내에게 이런 모습이 있다는 것에 온혁진은 정말 놀랐다.온유한도 이런 자신의 어머니가 낯설어 증오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온미정은 당장이라도 최신애의 뺨을 때리고 싶었다.“본인과 상관없다고요?”온미정은 화가 나서 웃음이 났다.“그래요. 앞으로 나 온미정에게는 당신 같은 미치광이 새언니가 없으니 그렇게 알아요. 지아의 말이 맞아요. 최신애, 구역질 나!”온미정은 다른 사람을 생각할 겨를이 없이 강지찬에게 전화를 걸며 밖으로 달려갔다.손가락질받고 욕을 먹은 최신애는 화가 많이 났지만 속으로는 기뻤다.이제 강지아와 그녀의 아들이 헤어진 마당에 욕 몇 마디 듣는 것쯤이야 무슨 대수겠는가?하지만 겉으로는 일부러 태연한 척하며 말했다.“고모가 강씨 가문과 친하니 탓할 수 없죠.”임근우는 한숨을 내쉬며 온혁진에게 말했다.“온 원장님, 우리 둘이 앉아서 얘기 좀 해요.”온혁진은 옆에 있는 아들을 힐끗 바라봤다.온유한은 굳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방을
“유한 씨, 밖에서 누가 문을 두드리는 것 같아요.”욕실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고 다름아닌 임유희의 목소리임을 강지아는 바로 알 수 있었다.침대 위에 있던 온유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잠에서 깼다.자신에게 늘 엄격한 온유한인지라 아침이면 늘 일정한 시간에 일어났다. 평소 이 시간이면 진작 깨어 있어야 했지만 어젯밤 술을 너무 마셔 아직 자고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 부르자 바로 깨어났다.“지아야?”온유한은 습관적으로 안경을 찾았고 침대 협탁을 더듬거렸지만 안경이 없었다.강지아는 앞으로 나와 허리를 굽혀 카펫에 떨어진 안경을 집어 들어 건넸다.온유한은 안경을 쓰고 나서야 뭔가 잘못되었음을 발견했다.방안을 살펴보니 이 방은 그의 방이 아니다. 한쪽 화장대 위에 여자 용품이 가득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카펫에 빈 술병이 없었고 공기 중에서도 고약한 술 냄새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은은한 향수 냄새가 났다.강지아가 그를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지아야!”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온유한은 이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알아챘다.어쨌든 재벌가 자식들에게 이런 일은 결코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이때 욕실 문이 열렸고 목욕 가운을 입고 나온 임유희는 문 앞에 멍하니 서 있는 강지아와 동하민을 발견했다.온유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안색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식사에 초대한 게 아니라 나더러 간통현장을 잡으러 오라고 한 거였네.”강지아가 말하자 동하민이 옆에서 한마디 했다.“대표님, 어쩌면...”어쩌면 뭐?오해일지도 모른다고?동하민도 이런 위로가 가소롭다고 생각했는지 민망한 듯 방을 나섰다.“지아야, 내 말 좀 들어봐.”온유한이 힘겹게 한마디 하며 이불로 몸을 두르고 침대에서 내려와 강지아를 잡으려고 하자 강지아가 그를 피했다.“만지지 마!”“지아야!”“나 만지지 마, 건드리지 마...”강지아는 미칠 지경이었다.“아무 사이 아니라며? 돌아가서 혼인신고부터 하자며? 온유한, 나더러 그 말을 믿으라고?”“그런 게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