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사람은 온유한이었고 그는 혼자가 아니라 남자 한 명과 여자 한 명과 같이 왔다.남자는 매우 스타일리쉬한 차림이었다. 요즘 아이돌들이 자주 하는 긴 머리 리프 커트 머리 스타일에 몸에는 딱 달라붙는 블랙 셔츠와 블랙 팬츠, 그리고 앞이 뾰족한 구두를 신고 있었다.이 사람의 마른 체형을 본 정유진은 이 사람의 허리둘레가 어쩌면 자신과도 비슷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꽤 잘 생겼다는 생각도 들었다.그 옆에 있는 소녀는 남자보다 더 튼실해 보였고 얼굴은 토실토실 동그란 귀여운 상이었다. 그녀는 손에 가죽 상자를 하나 들고 있었다.정유진은 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온 선생님, 여긴 어쩐 일이에요?”온유한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한테 소개했다.“이분은 메이크업 아티스트 송 선생님이에요. 그리고 옆에는 송 선생님의 어시스트 분이시고. 오늘 유진 씨한테 이분들이 화장을 해주실 거예요.”정유진은 약간 어리둥절했다.“화장을요? 저한테?”온유한은 머리를 끄덕였다.“네.”이때 그 송 선생님이라는 분은 정유진의 얼굴을 요리조리 훑어보더니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어머나! 너무 예쁘다, 얼굴이...”그러고 나서 그는 집안을 쓸어보며 살짝 꺼림칙해서 하면서도 놀라워하는 눈빛을 보였다.“이런 얼굴로 요 코딱지만 한 방구석에서 사는 거예요? 강 대표님이 무슨 잠행을 나왔어요? 아니면 뭐 서민 생활이라도 체험한다든가?”정유진은 뭐라 답해야 할지 몰랐다....장형준은 밤새 잠을 설쳤지만 여전히 활기차 보였다.“대표님, 셋째 도련님의 룸에 확실히 몰래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지금은 누가 이미 가져가서 없고요. 제가 이미 에이프릴 홀에 의심 가는 사람을 조사하라 시켰는데 카메라를 언제 가져갔는지 시간을 특정할 수가 없다 보니 조사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강지찬은 손에 담배를 쥐고 차갑게 말했다.“그 사람 반드시 찾아야 해. 안나 쪽은 어떻게 됐어?”“안나 씨는 해외에 한 달간 촬영 일정이 잡혀 있어 이틀 전에 금방 갔어요. 거기에도
“강홍식은 정말 늙을수록 더 머리가 어떻게 되나 봐요. 자기가 그 여자와 결혼을 못 했다고 자기 아들더러 그 여자 딸과 결혼하게 하다니요! 이것보다 더 못난 아비가 어디 있어요?”그러자 옆에 있던 남자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주며 다독였다.“뭐가 그리 화가 난 거예요? 강씨 집안에 황당한 일이 어디 한두 개에요?”물론 겉으로는 이렇게 말을 하지만 그도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있었다. 여자는 눈살을 찌푸리고 무슨 말을 하려다가 다시 참는 듯했다. 그러고는 다시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지찬이 저기 오네요. 한번 잘 물어봐요. 몇 마디 하다가 또 싸우지 말고요.”남자는 침착한 얼굴로 ‘알겠다’라고 하더니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강지찬을 보고 억지웃음을 끄집어내려고 몇 번이고 시도했다. 하지만 본인도 어색했는지 결국에는 더 어두운 얼굴빛이 되었고 조금 전보다 더 진지해졌다. 강지찬은 꼿꼿이 서서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외삼촌, 외숙모, 오셨어요.”최효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응, 오랜만이야. 아주 바빴어?”강지찬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고 삼촌다운 친밀감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아니요, 별로.”말을 마친 강지찬은 외삼촌 경우성을 쳐다보았다.경우성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계속하지 않았고 대신 미간만 점점 더 심하게 찌푸렸다. 최효진은 참지 못하고 그를 잡아당기자 경우성의 안색은 점점 더 엄숙해졌다.‘하... 이 사람 정말!’최효진은 경우성이 말할 때까지 기다리려 했지만 계속 아무 말을 하지 않자 대신 입을 열었다. “나와 너의 외삼촌은 얼마 전에 외지에 시찰을 나갔다가 어젯밤에야 돌아왔어. 그런데 너의 외삼촌이 청첩장을 보고 화가 많이 났어. 녀석아, 이렇게 큰일은 진작에 우리에게 말했어야지. 어찌 되었든 우리는 너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야. 절대 네가 이 여자와 약혼하는 걸 보고만 있지 않을 거야. 너의 아버지를 찾아가서 얘기도 할 거고.”그러자 옆에 있던 경우성이 호통을 쳤다.“네 마
경씨 집안 역시 서울에서 유명한 엘리트 가문이었다.강지찬의 외할아버지는 과거 서울 시립박물관 관장이자 서울대 명예교수를 역임했고 유명 역사학자이기도 했다. 삼촌인 경우성과 숙모 최효진 역시 고고학자 겸 서울대 교수인 데다 경우성은 서울대 역사대학 부학장을 맡고 있었다.나름 명문가라고 불릴 만한 강씨 가문이 아주 오래전 집안 어른들끼리 절친한 사이를 유지했던 가문이 바로 최씨 가문이었다. 이때 류선이 고세연의 손목을 잡아끌며 소개를 시작했다.“세연아, 여기 와봐. 내가 소개해 줄게. 이쪽은 지찬이 삼촌이랑, 숙모. 얼른 인사드려. 이제 한 가족이 될 사이잖아.”지금 이 순간, 고세연은 살짝 흥분되면서도 조금씩 밀려드는 긴장감을 감출 수 없었다.경우성과 최효진의 안색을 보아하니 두 사람은 고세연이 마음에 들기는커녕 상당히 혐오스러운 모양이었다.그 대단한 교양으로도 터져 나오는 경멸을 감추지 못할 정도였으니까...하지만 강지찬의 가족은 곧 그녀의 가족이다. 절대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외삼촌, 외숙모, 안녕하세요. 고세연이라고 합니다.”이에 경우성은 아예 고개를 돌렸다.상대가 어린 여자아이라 차마 악담을 던질 수는 없어 아예 무시하기로 한 것이다.반면 최효진은 도도한 표정으로 고세연의 표정을 자세히 훑어보다 무덤덤하게 말했다.“어머니랑 많이 닮았네요. 그래도 호칭은 그렇게 편하게 부르지 말아요. 아직 약혼식 시작 안 했으니까.”차가운 목소리에 고세연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오늘의 약혼식은 온전히 고세연의 강요로 진행되는 것, 순순히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건 진작 예상하고 있었다.‘괜찮아. 오늘만 지나면 난 강씨 가문의 예비 안주인이 되는 거니까.’한편, 류선은 어딘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렇다. 애초에 고세연을 경우성, 최효진 부부에게 소개해 준 것도 일부러 한 행동이었다.경씨 가문이 강홍식과 강씨 가문을 증오할수록 짜릿했으니까.“최 교수님은 참 기억력도 좋아.”이때 류선이 불쑥 끼어들었다.
당시 일은 증거가 없는 데다 류선이 자기 절로 넘어지는 바람에 아들을 조산하여 몸도 허약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녀 자신도 출산 능력을 상실하였기에 경씨 가문은 줄곧 류선의 책임을 묻지 않았다.오랜 세월이 지나 지금 류선이 강지찬의 생일을 이용하여 강홍식과 경윤미 부부의 불화를 풍자하는 것을 듣고 최효진은 바로 화를 냈다.“류선아, 그 당시 지찬과 너의 아들이 왜 조산했는지 너는 그 누구보다 잘 알 것이야. 지금 경윤미가 없으니 나는 그때의 추악한 일을 폭로하는 것을 개의치 않아.”“네가 외삼촌인 우리를 꼬드겨 외 조카를 잊게 하다니, 그럼 나는 친 숙모가 또 무슨 짓을 했는지 모두에게 보여주지.”“나는 우리가 지찬에게 한치의 미안함도 없다고 하늘에 맹세할 수 있다. 너는 맹세할 수 있어?”“나는 내 아들로 맹세할 수 있는데, 너는 네 아들로 맹세할 수 있어?”최효진이 미친 듯이 계속 질문하자 류선은 마음에 찔렸다.그녀에게는 강지현이라는 아들 하나밖에 없었기에 당연히 맹세할 수 없었다. 온갖 나쁜 짓을 다 저지른 사람으로서 그녀는 마음속으로부터 맹세하는 이런 일을 거부하였고, 죄의 대가를 받을까 봐 두려워하였다. 최효진도 바로 그녀의 이 점을 알고 한걸음 한 걸음 몰아붙였다.그녀가 계속 말했다.“네가 이간질하지 않았더라면 내 여동생은 조산하지 않았을 것이며 몸도 상하지 않았을 것이야. 그들 부부는 비록 금실이 좋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서로를 원망하는 부부는 되지 않을 것이야.”“줄곧 궁금한 게 있었어. 강지현의 조산 원인은 진짜로 넘어진 거야? 아니면 장손자리 때문에 일부러 넘어진 거야?”“말솜씨가 좋은 거로 알고 있는데, 해명하지 않을 거야?”오늘 온 사람들은 모두 강가의 친척들이었고 부근의 사람들은 이미 이곳의 기척에 끌렸다. 비록 겉으로는 이쪽을 보지 않았지만 한쪽 귀를 이쪽에 대고 뒷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류선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강지현의 조산 문제를 언급하는 것이었다.외부인이 줄곧 이렇게 의심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강홍택
빨간 드레스를 입은 정유진을 본 고세연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순간 그녀는 강지찬에게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그것도 감쪽같이 그에게 속았다!강지찬, 어떻게 감히?류선이 먼저 낌새를 알아채고 정유진을 보며 말했다.“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어? 경비! 여기 빨리 내쫓아요! 오늘은 지찬이 좋은 날인데 누가 감히 여기서 소란을 피워요.”경비가 움직이려고 할 때 입구 쪽에서 또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누가 감히?”고개를 돌려보니 그곳에는 최의현이 있었고 그는 혼자 온 게 아니었다. 입구에 서 있는 그는 밖에 있는 사람에게 안으로 들어가라는 손짓을 했고 그러자 밖에 있던 두 사람이 들어왔다.정유진은 바로 두 사람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엄마, 아빠, 여기 어떻게 왔어요?”최의현은 정색한 얼굴로 말했다.“당연히 초대받고 왔지. 우리 강 대표가 말했어. 이런 곳에 부모님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조금 전까지 아무것도 믿지 않았던 것부터 지금까지의 확신에 이르기까지 정유진은 오늘의 이 모든 것을 강지찬이 계획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강지찬은 최의현에게 부탁해 그녀의 부모님을 모시고 오게 했다. 원래는 강지찬과 고세연의 약혼식이었지만 그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약혼녀를 바꾸려고 했다.최의현은 아침 일찍 정씨 집으로 가서 정명학과 이명자를 겨우 설득해 데려왔고 두 사람은 꽤 침착한 얼굴이었다.정유진은 늘 두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뿐이었다.부모님은 늘 상냥한 분이었다. 정유진이 아무리 많은 비난을 받아도 늘 딸 편이었다. 특히 사람들의 시선이 이들에게 꽂혔을 때 평생토록 강단에 섰던, 늘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데 익숙했던 정명학의 표정조차 굳어 있었다.이명자는 두 손을 꼭 쥐고 안절부절못했다. 정유진은 그런 부모님의 모습을 보며 말했다.“엄마 아빠, 죄송해요.”이명자는 괜찮다며 그녀를 다독여줬다.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고세연의 얼굴이 진작에 창백해졌다.강지찬이 정유진의 부모님까지 모셔왔다고?강지찬, 미친 거 아닐까?그때 사람
강지찬은 정유진을 끌고 곧바로 단상에 올랐고 고세연의 질문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나에게 왜 이러냐고요?”고세연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얼굴로 외쳤다.류선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있었다. 강지찬의 뜻대로 될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안돼! 절대 강지찬이 원하는 대로 내버려 둘 수 없어!류선은 자기 아들이 건강이 안 좋기는 하지만 모두 다 강씨 집안 손주로 왜 강지찬만 강씨 집안의 사업을 물려받고 자기 아들은 재무팀에서만 일해야 하는지 늘 이해할 수 없었다. 왜?!“강...”류선이 강지찬을 막 부르려고 할 때 누군가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엄마, 그만 해요.”강지현은 류선이 눈치채지 못한 사이 어느새 그녀 옆에 와 있었다. “아... 아들, 아까 친구와 저쪽에서 얘기 중이지 않았어? 언제 여기까지 온 거야?”강지연은 아무런 표정 없이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아까 최 교수가 엄마더러 맹세하라고 할 때.”류선은 흠칫 놀란 얼굴로 말했다.“아들, 그 여자 헛소리 듣지 마. 엄마는 그때 정말 발을 헛디뎌서 떨어졌어. 진짜 고의가 아니었어.”그 말에 강지현은 귀찮은 듯한 어조로 말했다.“그만해. 이유 따위 알고 싶지 않아.”그는 류선을 보며 말을 이었다.“그리고 오늘은 그만 떠들어 좀. 엄마, 강지찬이 엄마가 뒤에서 수작 부리는 거 언제까지 보고만 있을 것 같아?”순간 류선은 흠칫 놀란 얼굴로 말했다.“아들, 그게 무슨 뜻이야? 혹시, 강지찬이 무슨 짓을 한 건 아니지?”강지현은 그녀의 말에 바로 대답하는 대신 단상 위로 시선을 돌리더니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돌아가서 얘기해. 오늘은 형 약혼식이야.”류선은 이 아들을 죽도로 사랑하고 있었다.다른 사람들이 강지현이 서른 살을 넘기지 못한다고 했지만 그녀에게는 유일한 아들이었고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기둥이었다.한편, 오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던 강홍식은 그제서야 단상 위의 며느리가 바뀐 것을 발견하고는 화가 나서 기절할 뻔했다.그런데 이쪽
정유진은 자신이 강지찬에게 별 감정이 없다고 생각했다.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그저 아이 때문에 함께 있기로 했고 이런 관계도 이제 막 시작했기 때문이다.하지만 한쪽 무릎을 꿇고 프러포즈를 하는 강지찬을 본 그녀는 순간 가슴이 찡해지더니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방금 강지찬은 그녀의 이름을 불렀고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도 다 똑똑히 들었다.그들은 강지찬이 부른 이름과 청첩장의 이름이 달라 그저 서로 멀뚱멀뚱 쳐다볼 뿐이었다.모두들 단상을 주시하며 어떤 사람은 분분히 토론하고 또 어떤 사람은 손가락질하고 있었다.이들은 모두 강지찬의 친지들로 정유진에게는 낯선 사람들이었다.그녀는 이런 상황에 전혀 난감해하지 않았다. 난감해할 사람은 사실 강지찬뿐이었다.오늘이 지나면 그는 분명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다.오늘의 행동은 강씨 집안의 체면을 구겼고 나중에는 분명 강씨 가문의 압력을 받게 될 것이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손에는 그 하찮게 생각하는 반지를 들고 있었다. 강지찬은 이 반지가 너무 작아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강지찬은 정유진과 결혼하기 위해 주변 사람들의 질타를 귓등으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의 굳은 눈빛을 보며 정유진은 이 남자를 정말 좋아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이 순간 강지찬만큼 자기를 소중히 여기는 남자는 이 세상에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그녀는 ‘좋아요.’라는 세 글자 대신 손을 내밀었다.강지찬은 한 번 눈을 찡긋하더니 그녀의 손에 반지를 끼워 준 뒤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서며 최의현이 들고 있던 마이크를 넘겨받았다.“오늘 유진 씨와의 약혼식에 참석해 주신 모든 분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네, 여러분들이 들은 게 맞아요. 제 옆에 서 있는 사람이 바로 오늘 저의 약혼녀 정유진입니다.”말을 마친 강지찬은 마이크를 최의현에게 건넸다.최의현은 자기를 진짜 약혼식 사회자 취급하는 강지찬에게 순간 화가 울컥 치밀어 올랐지만 꾹 참고 약혼식 분위기를 띄웠다.“저희 강
방금 정명학과 이명자가 들어왔을 때 경우성과 최효진은 그들을 바로 알아봤다. 하지만 조금 전 너무 많은 일들이 벌어지다 보니 그들은 미처 인사를 나누지 못했다.동료가 사돈을 맺는 것도 인연이다.게다가 정유진은 임신까지 했기에 경우성과 최효진은 바로 그녀를 받아들였다.그때 최효진이 미안한 듯한 얼굴로 말했다.“일이 갑자기 이렇게 돼서 미안해요. 지찬이 이 자식이 미리 우리에게 말도 안 하다 보니 인사치레 할만한 선물조차 갖고 오지 못했네요. 준비는 외숙모가 진작에 다 했으니 나중에 꼭 드릴게요.”정유진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고마워요. 외삼촌, 외숙모.”그러자 옆에 있던 정명학이 말했다.“저희도 아침에 알았어요. 지찬이도 쉽지 않았을 거예요. 탓하지 맙시다.”최효진은 정씨 집안에서 강지찬에게 불만을 말할까 봐 일부러 그들이 말하기 전 불만이 많은 척했다.“왜 탓하지 않아요? 이렇게 큰일은 먼저 어른들께 보고해야 하는 게 도리죠. 예쁜 유진이는 한눈에 봐도 철이 들고 교양 있는 아이인 것 같아요. 이렇게 좋은 조카며느리를 절대 섭섭하게 해서는 안 되죠. 정 교수님,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가 꼭 더 큰 다이아몬드 반지로 꼭 보상해 드릴게요. 그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결혼식은 제가 직접 성대하게 준비할게요.”체면치레 말을 못 하는 경우성은 그저 아내가 뭐라고 하면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 거들었다.“그럼요, 그럼요. 꼭 그렇게 해야죠.”최효진은 내친김에 정유진과 이명자를 이끌고 자리를 잡고 앉아 배 속의 아이가 몇 달이나 되었는지, 병원에 가서 검사는 했는지 등을 물었고 정유진은 그녀의 답변에 일일이 답변했다.처음에 류선과 최효진의 대화를 듣고 정유진은 강지찬과 외삼촌의 사이가 별로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속사정이 있었던 것 같다.이명자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지찬이 아버님도 오늘 여기 계시나요?”그 말에 최효진은 머쓱한 얼굴로 대답했다.“사돈댁, 솔직히 말씀드리면 강씨 집안의 현재 주인은
해장국을 들고 계단을 올라가던 임유희는 외출하려던 온유한과 마주쳤다.“유한 오빠, 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디 가는 거예요?”온유한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힐끗 본 후 바로 무시해 버렸다.명성 빌딩.늦게 집에 들어온 진수혁은 거실 소파에 검은 그림자가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재빨리 불을 켰다.“왜 또 왔어?”자기 집이 아니었기에 진수혁도 함부로 비밀번호를 변경할 수 없었다.하지만 온유한이 마음대로 드나드는 것은 퍽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게다가 온유한은 술까지 마셨다.온유한의 발 옆에는 이미 여러 개의 맥주 캔이 놓여 있었고 손에도 캔이 하나 쥐어져 있었다.“지아의 발목 문신도 그쪽이 지운 거야?”“응.”진수혁이 그를 쳐다보며 대답했다.“문신 지울 때 많이 아파?”“어떨 것 같은데?”“지아가 울었어?”“울진 않았어.”온유한이 맥주를 계속 마시자 진수혁도 마시고 싶은 마음에 냉장고를 열었지만 한 캔도 남아 있지 않았다.진수혁이 화가 나서 말했다.“내 싸구려 맥주가 그쪽 같은 부자들이 마신다니 참으로 영광이네.”온유한이 계속 말했다.“가게가 어디야?”“뭐?”진수혁은 어리둥절했다.두 사람이 연락처를 교환한 뒤 진수혁은 가게 위치를 온유한에게 보냈다.주소를 확인했음에도 온유한은 집에 가지 않은 채 소파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잠들기 전 진수혁에게 한마디 했다.“내가 여기 있다고 지아에게 말하지 마.”진수혁은 어이가 없었다.재벌가들의 사랑싸움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며칠 후 강지아는 서원준과 함께 진수혁을 찾으러 갔다.빨갛게 부어오른 피부가 다 낫자 흉터가 다시 드러났다.서원준은 옆에서 문신을 하는 아가씨가 아파소 소리를 지르는 것을 듣고는 강지아를 잡고 말했다.“그냥 안 하는 게 어때? 흉터가 크지 않아서 별로 티도 안 나. 진짜로.”진수혁이 서원준을 쳐다보며 말했다.“이분은...”“지아의 남자친구 서원준이에요.”“안녕하세요.”진수혁은 별다른 말 없이 강지아를 향해 물었다.“할 거
현채영의 말에 최신애는 화가 나서 가버렸고 임유희도 곧장 그녀의 뒤를 따랐다.집안에 들어서기 전, 뒤에 있던 임유희가 불쑥 물었다.“현채영 씨, 유한 오빠 입술에 난 상처... 진짜 현채영 씨가 그런 거예요?”현채영은 걸음을 멈춘 뒤 뒤돌아서 임유희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아니면 임유희 씨가 그랬겠어요?”임유희의 눈빛은 아주 차분했다.“유한 오빠와 만나는 척하지만 현채영 씨에게서는 한 번도 키스 마크를 본 적이 없어요. 현채영 씨의 향수 냄새는 아주 강하지만 유한 오빠에게서는 한 번도 진한 향수 냄새가 나지 않았고요. 늘 은은한 향수 냄새 그대로죠.”현채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임유희가 계속 말을 이었다.“오늘 저녁 강씨 가문 생일잔치에 간 거죠? 유한 오빠도 누구를 만나려고 간 것 같은데 아닌가요? 강지아 씨가 돌아왔나요?”현채영은 눈빛을 반짝이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역시 임유희 씨, 대학 선생님답게 꼼꼼하네요.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요. 강지아 씨가 온 것은 맞지만 그게 유한 씨와 무슨 상관이죠? 유한 씨는 아이를 보러 간 거예요. 유한 씨가 옛 친구를 얼마나 소중히 생각하는지 유희 씨도 잘 알잖아요.”그러자 임유희가 말했다.“그래요? 유한 오빠 입술 상처도 강지아 씨가 낸 거죠?”현채영은 일부러 놀란 척하며 눈을 크게 떴다.“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두 사람 오래전에 헤어졌어요.”임유희가 계속 물었다.“현채영 씨 역할이 뭔가요? 목적이 대체 뭐예요? 돈 때문이에요?”현채영은 박수를 쳤다.“임유희 씨, 상상력 하나만은 정말 탄복할만하네요.”“내가 돈 때문에 여기에 있는 거라면 어머님이 주신 20억 원을 왜 안 받았겠어요? 솔직히 말하면 내 목적은 온유한이라는 사람 곁에서 온씨 가문 사모님 자리를 차지하는 거예요. 그런데 임유희 씨는 왜 온씨 가문에 빌붙어 사는 거죠?”임유희가 말했다.“온유한 씨가 좋아서요.”현채영은 동정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따지고 보면 임유희 씨도 너무 불쌍해요.
강지아가 서원준과 사귀는 것에 대해 강지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정유진의 얼굴에는 걱정이 서려 있었다.온미정은 옆에 있는 온유한을 바라본 뒤 한숨을 내쉬었다.“유한이 이 녀석,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어.”정유진의 얼굴에는 근심이 다분했다.“그냥 다들 더 이상 시끄러운 일 없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이때 서원준이 강지아의 손을 잡았다.뜨거운 그의 손바닥과 달리 강지아의 손은 약간 차가웠다.생일파티에 워낙 일이 많았고 또 강지아도 더 있을 마음이 없었기에 정유진에게 인사한 후 자리를 떴다. 그런데 차에 타자마자 한 사람이 뒤따라 차를 탔다.익숙하고 은은한 향수 냄새가 그녀의 코를 찔렀다.온유한은 동하민이 앞 좌석에 타고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강지아에게 다가갔다.“일부러 그런 거야?”강지아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서원준은 몇 년째 나만 기다렸어.”온유한이 가만히 있자 앞 좌석에 있던 동하민이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온 선생님, 여자친구도 몇 명씩이나 있는 분이 우리 대표님에게 왜 이러세요?”강지아도 한마디 했다.“이만 내려줘. 오빠 여자친구나 내 남자친구가 보면 안 되지 않을까?”온유한은 어금니를 꽉 깨문 채 강지아를 매섭게 쳐다봤지만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고 차에서 내린 뒤 문을 쾅 닫았다.강지아가 한숨을 푹 내쉬자 동하민이 말했다.“대표님, 온 선생님, 대체 무슨 생각일까요?”“몰라.”굳이 알고 싶지도 않다.강지아가 떠나자마자 온유한과 현채영도 자리를 떴다.온씨 저택으로 돌아온 후 그의 입술에 난 상처를 본 최신애와 임유희는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현채영은 온유한의 팔짱을 끼더니 방긋방긋 웃으며 말했다.“오늘 술을 좀 마셔서 넘어지는 바람에 유한 오빠가 좀 다친 것 같아요. 어머님, 유희 씨, 신경 쓰지 마세요.”“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천한 년!”최신애가 손을 들어 때리려 하자 온유한이 막아 나섰다.“그만 하세요!”큰소리로 외친 온유한은 기분이 언짢은
목욕 타올을 두르고 있는 강지아는 왠지 낭패한 모습이었다.서원준 얼른 깨끗한 목욕 타올을 가져와 그녀를 감쌌다. 화가 난 그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일부러 나를 놀래키려고 이러는 거야?”“오버하지 마.”강지아가 웃으며 말하자 서원준이 어이없다는 듯 한마디 했다.“웃긴 뭘 웃어! 웃기 싫으면 웃지 마. 아닌 척하지 마.”온몸이 축축한 것을 보니 문신을 지운 곳에도 물이 닿은 것 같았다.“너 정말, 나 그만 걱정시키면 안 돼?”서원준은 동하민에게 전화를 걸어 약을 사 오라고 했다.강지아는 자신의 발목을 힐끗 본 뒤 한마디 했다.“이왕 젖은 김에 그냥 샤워나 해야겠어.”서원준은 문밖에 서서 그녀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발목에 물이 많이 닿으면 안 되니까 빨리 씻어.”욕실 문이 닫히는 순간 강지아의 얼굴에 있던 웃음이 다시 옅어졌다.샤워를 하고 나왔을 때는 동하민만 있었다.“대표님, 온 선생님이 왔다면서요?”강지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안색도 별로 안 좋았다.“내가 전화를 받으러 나가지 말았어야 했는데...”“너와 상관없어.”이런 곳을 워낙 잘 알고 있는 온유한이였기에 강지아를 찾는 것은 매우 쉬웠을 것이다.“서원준은?”“급할 일이 있어 잠깐 나갔다 온다고 했어요. 절대 먼저 가지 말고 기다려 달라고 했습니다.”강지아가 화장대 앞에 앉자 동하민이 그녀의 머리를 말려줬다.“뭘 하길래 말도 안 하고 간 거야?”온유한이 사라진 지 20분이 되었고 다시 나타났을 때는 입술에 상처가 생겼다.그의 입술을 본 현채영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사실 현채영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 모두 그의 입술에 난 상처를 발견했다.“온 부원장이 현채영 씨를 많이 사랑하나 봐요.”“어떤 여자들은 겉으로는 청순해 보이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 못한 것 같아요.”“온 부원장이 이런 것을 좋아하네요. 어쩐지 현채영을 자기 여자라고 하더니. 임유희나 강씨 가문 아가씨는 본인 입맛과 안 맞았나 봐요.”그러자 옆에 있던 현채영이 한마
머리 꼭대기에서 들리는 온유한의 목소리는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예전에 온유한은 항상 속삭이는 말투로 부드럽게 말을 했지만 지금 온유한의 목소리는 차갑고 딱딱하기 그지없었다.강지아도 숨기지 않고 말했다.“싫은 거 아니야. 하지만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아.”용기를 내어 고개를 든 강지아는 익숙한 이 남자를 바라보았다.3년 사이 온유한은 살이 조금 빠진 것 외에 변한 게 없었다.달라진 것을 굳이 짚으라고 하면 기질일 것이다.온유한만의 따뜻함은 온데간데없었고 오롯이 차가운 느낌만 들었다.“나와 엮이기 싫어서 문신을 지운 거야?”뻔히 알면서 물어본 것이나 다름없었다.온유한은 갑자기 손을 뻗더니 강지아의 턱을 잡고 말했다.“문신 지울 때 안 아팠어?”강지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사람이 대체 뭘 하려는 것인지 몰랐기 때문이다.온유한이 계속 말했다.“나와 헤어지는 것보다 더 아팠어?”강지아의 눈빛이 변했다.온유한은 갑자기 고개를 숙이더니 다짜고짜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깜짝 놀란 강지아는 힘껏 발버둥 쳤지만 그의 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너무 거친 키스에 강지아는 온몸이 부서질 듯했다.감정이 북받친 키스에 강지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었다. 순간 두 사람의 입안에 피비린내가 진동했다.그제야 강지아를 놓아준 온유한은 깨물린 입술에 어느새 피가 나고 있었다.“미쳤어?”강지아는 얼른 목욕 타월로 몸을 감싼 뒤 멀찌감치 떨어졌다.온유한은 입술에 묻은 피를 닦았지만 상처가 깊어서 그런지 다시 피가 솟구쳤다. 지금의 온유한은 정말로 점잖은 망나니 같았다.“미쳤냐고?”온유한은 심드렁한 얼굴로 강지아를 보며 말했다.“전에 안 해본 것도 아닌데 뭐.”가슴이 심하게 출렁인 강지아는 고개를 저으며 뒤로 물러섰다.“싫어. 이러지 마... 싫다고...”쾅 하는 소리와 함께 강지아는 욕실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이런 강지아의 모습에 온유한은 더욱 자극이 된 듯 그녀를 쫓아가려 했다. 이때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
“괜찮아?”강지아의 손을 잡은 화령은 그녀의 손이 차가운 것을 발견했다.“안 괜찮을 게 뭐가 있겠어.”뒤돌아서는 순간 때마침 쟁반 가득 술을 들고 오는 웨이터와 부딪혔다.와르르, 술잔이 그녀의 치마에 쏟아졌다.갑작스런 소리에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저도 모르게 고래를 돌린 온유한은 웨이터가 미안한 표정으로 강지아에게 사과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아가씨, 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진짜 죄송해요.”강지아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얼른 치워요. 사람들이 미끄러워 넘어지면 안 되니까.”“네, 네. 바로 치우겠습니다.”화령은 황급히 수건을 가지고 와서 강지아의 치마를 닦아줬다.“옷 갈아입으러 같이 가자.”“괜찮아. 나 혼자 가면 돼. 넌 여기 유리 파편들 깨끗이 치우는 것 좀 봐줘.”강지아의 움직임에 시선을 빼앗긴 온유한은 그녀의 발목에 문신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문신이 있던 자리는 피부만 빨갛게 되어 있었다.강지아는 방으로 돌아갔다.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 여분의 치마를 준비해 놓았기에 갈아입을 수 있었다.술이 엎질러져 몸까지 끈적끈적해 샤워를 해야 했다.옷을 다 벗고 나서야 타투한 곳에 물이 닿으면 안 된다고 했던 진수혁의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샤워 타월로 몸을 감싸고 나와 방수밴드를 찾았다.방 안에 누군가 있는 것 같아 동하민인 줄 알고 한마디 했다.“치마는 세탁이 안 될 것 같으니 매장에 처리할 방법이 있는지 물어보고 방법이 없으면 그냥 버려.”방 안의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서랍에서 방수밴드를 꺼내 들고 돌아선 순간 강지아는 소파에 앉은 사람이 동하민이 아니라 온유한인 것을 발견했다.강지아는 흠칫 놀랐다.온유한은 강지아의 발목만 뚫어지게 바라봤다.정신을 차린 강지아는 서랍을 닫으며 말했다.“왜... 여기 있어?”“타투 지웠어?”강지아는 자신의 종아리를 한 번 본 뒤 말했다.“응, 지웠어.”온유한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그녀의 발목만 뚫어지게 바라봤다.샤워
현채영은 입꼬리만 올리며 말했다.“내가 왜 그쪽 체면을 세워줘야 하죠? 누구신데요?”그 사람은 눈을 가늘게 뜨며 현채영을 바라봤다. 가뜩이나 못생긴 눈이 이상하게 변해 더 못 생겨 보였다.“현채영, 네 주제 파악 좀 해.”그 남자는 옆에 있던 온유한을 쳐다보더니 일부러 도발적으로 말했다.“온유한 부원장이 얼마를 줬는데? 내가 두 배 줄 테니 하룻밤만 나와 같이 있는 거 어때?”현채영이 앞에 놓인 술을 그의 얼굴에 뿌리자 그 남자는 온몸이 젖었다.안 그래도 멀리서나마 현채영과 온유한을 구경하던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자 더욱 그들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천한 년, 감히 나에게 술을 뿌려?”창피를 당한 그 남자는 화가 나 자리에서 일어나 현채영을 향해 주먹을 날리려 했다.그러나 주먹이 현채영에게 닿기도 전에 옆에 있던 온유한이 그를 잡았다.그 남자는 술 범벅이 된 얼굴을 손으로 쓱 닦은 후 말했다.“온유한 부원장님, 이 여자 편을 드나 봐요?”말없이 그를 응시하는 온유한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솔직히 말해서 예전에 강지찬과 친할 때 아무도 함부로 그에게 덤비지 못했다.그들은 서울에서 연예인 같은 존재였다. 사람들은 그들 무리에 끼어들고 싶어 안달이 났기 때문에 아무도 감히 그들을 도발하지 못했다.이제 그 무리를 벗어난 온유한인지라 사람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가 확실히 이전과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그를 괴롭히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몇 초가 지난 후에야 온유한이 입을 열었다.“내 여자에게 집적거리는데 내가 안 나서면 누가 나서?”말을 마친 온유한은 그 남자를 옆으로 홱 뿌리쳤다.큰 소동에 달려온 강지찬과 정유진 그리고 강지아 모두 이 말을 들었다.온유한은 현채영을 자신의 반대편으로 끌어당긴 뒤 그 남자를 향해 말했다.“꺼져!”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창피를 당한 것을 강지찬과 그 가족이 봤으니 그 남자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일부러 온유한을 도발했다. 이 또한 강지찬에게 충성을 표하는 의미이기도 했다.“온유
현채영을 데리고 온 온유한은 연우와 우빈에게 준비한 선물을 정유진에게 직접 건넸다.“그냥 오면 되지 이렇게 비싼 선물까지 왜 사 갖고 와요.”정유진은 단아한 자태로 평범한 친구 맞이하듯 그를 대했다.“작은 성의로 봐주세요.”온유한이 대답했다.한편 온유한이 왔다는 말에 신이 나서 찾아온 최의현은 현채영을 본 순간 얼굴이 파랗게 질렸고 이를 악물며 겨우 한마디 했다.“왜 여기까지 데려온 거야? 내가 말했잖아, 지아가 돌아왔다고.”그러더니 팔을 번쩍 들며 자랑하듯 말했다.“봤지? 커프스. 지아가 준 거야.”고개를 옆으로 돌린 온유한은 강지찬과 경은우 모두 지아가 준 커프스를 착용한 것을 발견했다.서원준도 같은 커프스를 하고 있는 모습에 온유한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예쁘네.”온유한의 표정을 본 최의현은 순간 재미가 없어졌다.“지찬이에게 인사하러 안 갈래?”온유한이 말했다.“됐어, 난 꼬맹이 보러 온 거야. 그때 그러지 않았더라면... 나를 삼촌이라고 불러야 하겠지?”온유한의 얼굴을 본 최의현은 그의 말이 진심인지 농담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그냥 강우빈을 보러 온 거라고?많은 시선들이 온유한과 현채영에게 쏠렸다.그런 눈빛에 익숙해진 현채영은 웃으며 말했다.“매번 나와 같이 오니까 사람들이 어려워하잖아. 그래서 혼자 가라고 한 건데 내 말 안 듣고 말이야.”“미안해.”온유한이 말했다.“난 괜찮아. 이까짓 게 뭐라고?”현채영은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우리 집안에 일이 생겨서 그렇지 뭐. 그래서 내가 돈밖에 모른다고 생각하지. 내 옷 안에 카드를 넣으며 같이 술을 마시자고 하는 사람도 있어.”온유한도 전에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고 현채영의 난처한 상황을 지켜본 적도 있었다.두 사람은 창가 자리를 찾아 앉았다.자리에 앉자마자 잘 차려입은 남자가 술잔과 술병을 들고 다가왔다.번지르르한 얼굴의 그 남자를 온유한도 잘 알고 있었다. 졸부의 아들이며 집안에서는 강지찬에게 빌붙기 위해 온갖 방법을
강우빈이 태어나던 해 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은 인연을 완전히 끊었고 강지찬과 온유한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강지찬도 기분이 나빴다.아들이 태어난 후 백일잔치도 하지 않은 채 집안 식구들끼리만 축하를 했다.어느덧 우빈이는 세 살이 되었고 강지아가 때마침 귀국했기에 못 해준 축하를 이제는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이번 강우빈의 생일잔치는 성대하게 치르기로 했다.생일파티는 강씨 가문의 식장에서 열렸고 강지찬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손님들이 많이 왔다.정유진과 강지아는 하객 대응을 맡았다. 사람들은 오래간만에 나타난 강지아를 보고 깜짝 놀랐다.하지만 강지아는 사람들의 이상한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친구들이 한 명씩 올 때마다 반갑게 맞이했다.온씨 가문과 최씨 가문에는 초청장을 보내지 않았지만 화령은 강지아와 절친이었기에 생일잔치에 왔다.편집장으로 승진한 화령은 옛날의 풋풋함이 사라졌지만 아름다운 미녀의 기질을 한껏 풍기고 있었다.“여기 온 것을 나중에 시어머니가 알면 어떻게 해?”강지아가 한마디 물었다.황은숙은 아직도 자기 아들 최금혁을 아프리카로 보낸 강지아와 화령이 미워 죽을 지경이었다.강지아의 말에 화령이 긴 웨이브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며 말했다.“시어머니는 무슨, 그리고 진짜 시어머니라고 해도 내 일에 간섭할 수 없어.”“아이고, 우리 화령 편집장님 점점 폼이 나네. 어쩐지 최금성이 3년이나 아끼더라니, 다 이유가 있었어.”강지아의 장난기 가득한 말투였지만 화령의 얼굴에 있던 웃음이 옅어졌다.“전엔 얘기 안 했나? 작년에 유산했어.”“어?”“아기가 싫대.”화령이 최금성을 너무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강지아인지라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아팠다.좋아하는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는데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을 것이다.최금성이 아이를 키우지 못할 형편도 아닌데 말이다.“왜 싫대?”“난 그냥... 뭐랄,. 파트너니까. 애인 대역이라고 할 수도 없지.”화령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며 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