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진은 단순히 감정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업무에서도 확실한 성격이었다.수영장 하나를 파는 것 같은 작은 일은 예원이 해결할 수 있었지만, 강지현의 일은 결국 그녀의 것이었고, 그녀가 가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했다.결국, 예원이 운전을 하고 두 사람은 함께 상록수 별장으로 향했다.“너는 걱정이 너무 많아, 나조차도 믿지 못하는 거야?”정유진은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상록수 공사가 시작된 후 한 번도 가보지 않았어, 가서 확인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해.”현장에 도착했을 때, 강지현도 거기 있었다.마당은 온통 잡동사니로 가득 차 있었다.예원은 연신 주의를 줬다. “조심해, 거기 서 있어. 안전모 가져다줄게.”그리고 강지현에게 인사했다. “강 사장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안전모 하나 가져다드릴게요.”강지현은 웃으며 말했다. “저도 방금 도착했어요, 감사합니다.”예원은 안전모를 찾으러 갔고 강지현은 정유진을 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유진 씨, 굳이 오지 않아도 됐어요. 저랑 예원 씨가 상의하면 될 일이고, 키키도 있잖아요.”정유진아 대답했다. “지현 씨의 의뢰는 제가 담당하고 있어요, 이런 상황에서는 디자이너로서 현장에 나와야 하죠.”강지현의 마당도 스튜디오 예담과의 계약 내용에 포함되었고, 정유진은 이전의 디자인을 들고나와 두 사람은 마당에서 토론하기 시작했다.“앞마당에 둔다면 첫째로는 전체 마당의 모양을 해치고, 둘째로는 사생활 보호가 안 돼요.”정유진은 시안을 가리키며 말했다. “뒷마당은 이쪽이 모두 나무라 여름에는 그늘이 지고, 가을과 겨울에는 낙엽이 떨어져 청소가 힘들고, 미관상으로도 별로예요. 제 제안은 옥상에 한 구역을 만드는 거예요, 바로 여기요.”강지현은 그 위치를 보고 말했다. “면적이 좀 작지 않나요?”정유진이 대답했다. “조금 작지만, 이 위치에서 뻗어 나갈 수 있어요. 전에 이 단지에서 누군가 이렇게 한 것을 보고, 특별히 관리사무소에 물어봤어요. 옥상 개조는 규정 내에서만 가능
정유진은 무슨 일을 하든 항상 진지했다.심지어 위로하는 말도 진지하고 엄숙하게 했다.하여 듣는 사람은 그녀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고 자기도 모르게 전부 진심이라고 느꼈다.강지현은 평소 아부와 가식적인 말만 수도 없이 들었는지라 이제야 정말 위로를 받은 느낌이 들었다.그는 머리를 끄덕이며 눈동자에서는 밝은 빛이 반짝였다.“유진 씨 말이 맞아요.”세 사람은 조예원이 가져온 안전모를 쓰고 우선 뒷마당부터 살폈다.역시 정유진의 말대로 뒷마당은 햇빛을 등진 곳이라 풀장을 만들기 적합하지 않았다.하여 다시 맨 위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하지만 방안은 더 더러웠고 온통 벽돌과 시멘트뿐이었다.강지현은 맨 뒤에서 걸으며 정유진의 발아래를 자세히 살폈다. 그러다 가끔 조심하라고 일러주었다.“계단 조심해요.”결국 강지현도 풀장을 옥상에 만드는 일에 동의했다. 마침 옥상에는 햇빛도 충족하니 운동하기에도 아주 적합했다.일을 마친 후, 강지현은 함께 식사하자고 했다. 세 사람과 키키는 상록수 별장 밖에 있는 음식점으로 향했다.상록수 별장 주변은 풍경이 아주 아름다워 유명한 한정식 가게도 많았다.한창 식사 도중 정유진의 휴대폰 울려 그녀는 밖으로 나가 전화 받았다.조예원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키키한테 말했다.“유진이한테 전화한 사람이 누군지 내기할래? 진 사람은 내일 아침밥을 사 오는 거야. 난 강 대표님.”키키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저도 강 대표님이라고 생각해요, 이러면 게임이 안 되잖아요.”강지현이 말했다.“그럼, 저도 껴주세요. 전 유진 씨의 부모님.”그 말에 키키의 얼굴에는 교활한 미소가 떠올랐다.“그럼, 지현 씨가 지겠는데요? 오늘 강 대표님이 출장 가시는 날이라 지금쯤 아마 공항에 계실 거예요, 강 대표님이 전화하신 게 틀림없어요.”강지현은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지면 내일 아침밥을 사면 되죠.”조예원은 눈이 반짝 빛났다.“정말요?”강지현이 말했다.“당연하죠.”조예원은 젓가락을 꾹 누르며 말했다.“그럼 먹고
그들은 정유진이 통화를 마치고 돌아온 후 물어보니 결과는 당연히 강지현의 패배였다.조예원은 너무 기뻤다.“내일 에그 머핀이랑 핫 케익 먹을 수 있겠네, 아 맞다, 콜라도요.”강지현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알겠어요.”그리고 다시 정유진한테 물었다.“유진 씨는 뭘 드시고 싶어요?”정유진이 대답하기도 전에 조예원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얘는 내버려둬요. 강 대표님이 요리 솜씨가 아주 뛰어난 가사도우미를 찾아주셨어요.”정유진이 말했다.“감사합니다, 하지만 전 괜찮아요, 전 집에서 먹으면 돼요.”하여 강지현은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이튿날 아침에 강지현은 정말 일부러 아주 먼 곳에 있는 맥도날드에 들러 예담의 모든 직원의 아침을 사 왔다.조예원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에그 머핀이 이렇게 많아요? 지현 씨, 설마 맥도날드의 에그 머핀을 전부 사 오신 건 아니겠죠?”“좋아한다고 하셔서 조금 많이 샀을 뿐이에요.”강지현은 시간을 확인하고 말했다.“유진 씨는 아직 안 오셨어요?”“네.”조예원은 한 손에 에그 머핀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치킨 스낵랩을 들고 있었다. 치킨 스낵랩도 그녀의 최애 메뉴였다. “유진이는 지금 임신 중이잖아요, 그러니까 출근 시간을 너무 엄격하게 지키지 않아도 괜찮아요, 왜요? 무슨 일이라도 있으세요?”강지현이 말했다.“물어보고 싶은 일이 있어서요. 별일 아니에요. 나중에 다시 물어보면 돼요. 저도 출근해야 하니까 이만 갈게요. 그럼, 식사 맛있게 하세요.”조예원은 급히 그를 문밖까지 바래다주었다.정유진이 회사에 도착하니 회사 동료들은 전부 음식을 소화하려고 밖에서 산책하고 있었다.조예원은 그녀의 뒤를 따라 사무실로 들어갔다.“유진아, 지현 씨가 정말 아침을 사 오셨어.”정유진은 일부러 조예원의 설레는 표정을 못 본척하며 말했다.“그래서 뭐?”조예원은 두 손으로 볼을 잡고 웃으며 말했다.“헤헤, 내 봄날이 곧 올 것 같아.”정유진은 일부러 그 말을 다르게 해석했다.“응, 이제 곧 가을이고 겨울만
정유진은 한빈과 7년 동안 연애했지만, 여보라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전에 한빈도 이런 요구를 제기했었지만, 그녀는 그 말을 무시했다.하지만 가식이나 거만 때문은 아니었다.대학 생활 때, 한때 같은 숙사에서 살던 친구가 남자 친구와 통화하며 여보라고 부르는 말을 듣고 정유진도 달콤하다고 느꼈었다.하지만 그녀와 한빈이 연해할 때는 상황이 너무 달랐다.그들이 연애를 시작했을 때, 한빈은 금방 창업했다. 하여 두 사람이 만나면 대화 주제는 줄곧 한빈의 회사와 관련된 일이었다.지금 돌이켜 보면, 정유진은 그 당시 한빈이 아주 부지런하고 꿈이 있는 남자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연애가 달콤하거나 사랑받는다는 감정은 정말 별로 느끼지 못했다.심지어 한빈이 그녀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녀가 예뻐서 다른 사람들과 만나면 체면이 선다고 생각한 게 아니냐는 의심까지 들었다.이때, 강지찬의 재촉이 들려왔다.“안 부르고 뭐 해? 설마 부끄러운 거야?”부끄러울 이유가 없었다.“여보.”“...”강지찬은 아직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정유진의 차가운 목소리가 휴대폰에서 흘러나와 그의 심장에 꽂혔다.강지찬의 왼손은 감전된 것처럼 찌릿했고 몸은 즉시 반응했다.그는 침을 꿀꺽 삼키며 오른손은 이불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착하지, 한 번 더.”정유진은 휴대폰에서 들려오는 의심스러운 소리를 듣고 말했다.“지금 뭐 해요?”강지찬은 내심 있게 다시 한번 말했다.“한 번 더 불러, 빨리.”그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정유진은 이제 세상물정을 모르는 꼬마가 아니었다. 최근 누구의 덕에 새로운 지식이 많이 늘었다.하여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바쁘다고 하지 않았어요? 이만 끊을게요, 저도 이제 일해야 해요. 저녁에 다시 전화할게요.”말을 마치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정유진이 강지찬이 얼마나 노발대발할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를 갈며 침대에서 뒹구는 그의 표정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한편 강
정유진은 조예원은 표정을 보며 말했다.“왜? 지현 씨와의 ‘우연한 만남’은 이제 포기한 거야?”조예원은 의자를 끌고 와 정유진의 옆에 앉아 부러움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사람과 사람은 왜 이렇게 레벨 차이가 클까? 분계선이 아주 명확해.”정유진은 컴퓨터를 켜고 조예원을 힐끔 바라보았다.“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조예원은 책상에 엎드려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난 내 아이가 출생부터 남달랐으면 좋겠어, 그래서 훌륭한 아빠를 찾아주고 싶어. 어때? 문제 있어?”“아니.”“그럼 온유한 씨는 여자 친구가 있어?”정유진은 다시 한번 조예원을 힐끔 바라보며 머리를 저었다.“몰라, 알고 싶으면 나중에 물어볼게. 그럼, 지현 씨는 포기한 거야?”“아니, 기회를 하나라도 더 만들려고 그러는 거잖아.”조예원은 비록 현실적이었으나 나쁜 생각은 없었다.“하지만 유한 씨한테 여자 친구가 있다면 됐어.”“나도 몰라, 기회가 되면 물어볼게.”정유진은 이제 조예원을 내쫓았다.“너 현장 안나가?”“간다, 가.”그녀는 벌떡 일어나 달려 나가며 중얼거렸다.“돈 버는 일이 제일 중요하긴 하지, 남자는 그다음이고.”장 씨 아주머니는 온유한이 가져온 식재료들을 오후에 바로 삶았다. 정유진이 퇴근해서 돌아가자, 국 한 그릇을 들고나왔다.“유진 씨, 식기 전에 빨리 드세요. 냄비에 한 그릇 더 있어요, 그건 야식으로 드세요. 이 국은 식재룟값만 해도 수백만 원이에요, 절대 낭비하면 안 돼요.”정유진은 갑자기 조예원이 말한 출생부터 남달라야 한다는 말의 뜻을 깨달았다.그녀는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전부 마셔 버렸다.강지찬은 내일 오후 1시 비행기로 돌아온다고 했다. 정유진은 전화에서 가식적으로 물었다.“마중 갈까요?”강지찬은 냉소를 지었다.“흥, 오지 말라고 할 걸 뻔히 알면서 묻는 거야? 이제 점점 더 교활해지네.”정유진이 말했다.“이게 다 어떤 분이 시비를 거는 걸 미리 막기 위해서 그러는 거 아니에요.”강지찬은 말문이 막혀 화제를 바꾸는
이튿날 오전, 강지찬은 일을 마치고 급히 백화점에 들렸다가 겨우 시간을 맞춰 비행기에 올랐다.최의현은 강지찬이 자리에 앉은 후,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한테 할 말이 있어, 듣고 화내지 마.”강지찬은 아무 표정도 없는 얼굴로 말했다.“정유진이 다른 남자와 도망치지 않는 한, 나머지 일은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나와 상관없어.”최의현은 혀를 차며 말했다.“쯧쯧, 하지만 정말 너와 상관있는 일이야. 네 아버지가 너와 고세연을 약혼시키시려는 것 같아. 날짜도 정하고 청첩장도 이미 돌렸어.”강지찬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며칠 조용하다 했더니 겨우 이딴 방법을 생각해 낸 거야? 내가 너무 과대평가했군.”최의현이 말했다.“청첩장은 이틀 전부터 돌리기 시작했어. 우리 집, 온 씨 가문과 너와 사이가 가까운 가문들에는 오늘 보냈고. 아마 우리한테 대책을 세울 시간을 주지 않으려는 것 같아.”이때, 승무원이 다가오자, 강지찬은 안대와 담요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강지찬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최의현이 오히려 급해 났다.“아니, 넌 정말 하나도 걱정 안 되는 거야?”“걱정할 게 뭐가 있어? 그럴 능력이 된다면 날 약혼식에 납치해 가라고 해.”최의현은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약혼식에 가지 않을 생각인 거야?”“약혼은 하고 싶은 사람이 하라 그래. 어차피 청첩장을 보낸 사람은 내가 아니고 약혼하려는 사람도 내가 아니니까 나와 뭔 상관인데?”최의현이 말했다.“우리 엄마가 그러시던데 초청한 하객이 적지 않다고 하셨어. 네가 나타나지 않으면 강 씨가문은 체면을 잃을 거야. 네 아버지는 바로 이런 방법으로 널 강요하려 하시는 거야.”승무원이 안대와 담요를 가져오자, 강지찬은 담담한 표정으로 받았다.“감사합니다.”“아닙니다, 고객님, 혹시 더 필요 하신 게 있나요?”승무원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가까이에서 보니 강지찬은 오뚝한 코에 깊은 눈빛을 가진 미남이었다.이런 남자는 돈이 없어도 여자들이
정유진이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상자를 열어 보니 안에는 아주 섹시한 빨간색 속옷이었다.그녀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꾹 참으며 말했다.“강 대표님, 신경 많이 쓰셨네요.”정유진은 뚜껑을 닫고 당장 속옷을 누군가의 얼굴에 던지고 싶은 충동을 눌렀다.강지찬은 일부러 물었다.“마음에 들어?”정유진은 웃으며 말했다.“네.”강지찬이 말했다.“그럼, 오늘 밤에 입을까?”“... 꺼져!”정유진은 끝내 참지 못하고 속옷을 상자째로 강지찬의 품에 던졌다.강지찬은 급히 손을 내밀어 상자를 품에 안았다. 이 속옷은 그가 정성 들여 고를 것이었다. 색상이나 스타일 등은 모두 정유진한테 잘 어울렸다.물론 아이를 낳은 후에야 입을 수 있지만 말이다.정유진은 강지찬을 무시하고 계속 설계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눈앞에 또 다른 쇼핑백이 나타났다.그 쇼핑백에는 모 명품 시계의 브랜드 로고가 있었다.정유진은 머리를 들고 정지찬의 눈빛을 보니 장난이 아닌 듯했다.“진짜 선물은 이거야.”정유진은 그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었다.“고마워요.”“지금 해 봐. 시곗줄은 이미 조절했어.”그 말에 정유진은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제 손목 사이즈는 어떻게 안 거예요?”강지찬이 대답했다.“많이 잡았잖아.”정유진은 이 브랜드가 아주 유명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세한 가격은 몰랐다.시곗줄에는 다이아가 박혀 있었고 보기만 해도 가격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그녀 작업실의 일 년 동안의 수입으로도 이 시계를 사지 못할 것 같았다.손목에 차 보니 길이는 딱 맞았다.정유진은 피부가 하얗고 손목이 가늘어 은색 손목시계를 착용하니 손마저 고귀한 느낌이 들었다.“마음에 들어?”강지찬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는 전처럼 장난기가 가득한 미소가 아니었다.명품 시계를 싫어하는 아마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정유진은 머리를 끄덕였다.“네.”그리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지찬 씨는 뭘 좋아하세요? 나중에 저도 선물해 드릴게요. 하지만 이 시계만큼 비
강 씨 본가강홍식은 웃는 얼굴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예쁘구나, 우리 세연이는 참 예뻐.”고세연이 입은 빨간색 드레스는 그녀의 굴곡이 뚜렷한 몸매를 완벽하게 받쳐 주었고 보는 사람의 마음을 매혹했다.이 드레스는 복고풍이었으나 아주 단정하고 기품이 넘쳤다.강홍식은 그녀를 보니 자신의 첫사랑이 떠올랐다.예전에 그는 첫사랑이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장면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다. 그 남자가 여자의 손에 결혼반지를 끼울 때 그녀의 눈은 줄곧 강홍식을 바라보고 있었다.그 후 고세연의 부모님은 서울을 떠났고, 십여 년이 지난 후 다시 들은 첫사랑의 소식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다.고세연은 다가와 강홍식의 팔을 잡았다.“아저씨, 그럼, 약혼식 날에 이 옷을 입을 까요?”강홍식은 그제야 추억에서 빠져나왔다.“예, 예쁘구나.”고세연은 한창 제일 예쁠 나이고 엄마보다 미모가 더 뛰어날 뿐만 아니라 애교까지 넘치니 그녀가 뭐라 하던 강홍식은 좋다는 말뿐이었다.약혼식에 필요한 드레스와 액세서리 등은 모두 강홍식이 준비한 것이었다. 쏟아부은 돈은 두 번째 부인이 봐도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다.고세연은 드레스 피팅을 마치고 액세서리가 담긴 상자를 하나 골라 두 번째 부인의 집으로 갔다.류선은 상자를 열어보고 기쁨에 겨워 입을 다물지 못했다.“너도 참, 뭘 이런 걸 주고 그래. 너와 지찬이가 결혼하면 우리는 한 가족이잖니, 지현이는 몸이 안 좋으니까, 네가 강 씨 가문의 여주인이 되고 나면 꼭 잊지 말고 이 아줌마를 잘 챙겨 줘.”고세연이 말했다.“아줌마는 피부가 하얗고 얼굴도 예쁘셔서 이 레드 사파이어 목걸이가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아요.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네요. 제가 지찬 오빠와 약혼할 수 있는 이유는 아줌마가 좋은 말을 많이 해주신 덕이 많아요.”류선은 목걸이를 바로 목에 걸고 하인에게 거울을 가져오라고 했다.그녀가 목에 거니 역시 화려하고 아름다웠다.“넌 내 친 딸과 다름없으니까 난 당연히 네가 지찬이한테 시집가는 걸 바라지.
강지아를 차에서 안고 내릴 때 서원준은 두 손을 떨고 있었다.온몸이 마비된 듯했고 호흡이 가빠졌으며 심장이 너무 아파 강지아의 얼굴을 차마 볼 수 없었다.“바보, 멍청이!”강지찬이 급하게 외쳤다.“지아는 어때?”“혼수상태입니다. 당장 병원으로 옮겨야 해요.”“헬기가 곧 도착할 거야.”강지아가 수술실에 들어간 후, 온몸이 강지아의 피로 물든 서원준은 온유한을 보자마자 달려들어 몸싸움을 벌였다.최의현과 한규진이 한참을 말려서야 떼어놓을 수 있었다.“넌 병신이야.”서원준이 온유한에게 삿대질하며 가차 없이 욕설을 퍼부었다.수술실 밖에 사람들이 가득 모였다.온미정은 자책한 듯 안색이 매우 안 좋아 보였다.정유진도 이 병원에 입원 중이다. 강지찬의 말대로 정유진이 마음이 급해 뛰어가는 바람에 태아가 움직여서 지금 침대에 누워있었다.“다 내 탓이야!”항상 당당하던 온미정이 주눅 든 얼굴로 자신의 뺨을 때렸다.“최신애의 말을 믿다니, 내가 바보 멍청이야!”그러자 정유진이 어이없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고모님과 무슨 상관인데요? 고모님이 아니어도 지아를 속여서 오게 했을 거예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요. 본인 친아들이잖아요. 일생일대의 중요한 일인데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죠?”그러자 온미정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최신애는 미쳤어. 넌 더 이상 생각하지 마. 지아는 괜찮으니까 네 몸이나 돌봐.”정유진의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야말로 일이 더욱 커진다.이번 일로 화가 난 강지찬은 분명 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의 수십 년 우정을 끝낼 것이다.수술이 끝난 뒤 강지아는 중환자실에 입원했다.의사 말로는 고비는 넘겼지만 머리를 다쳐 환자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언제 깨어날지도 확실하지 않다고 했다.“정말 못 깨어날... 수도 있나요?”최신애의 물음에 온혁진이 화가 나서 탁자를 쳤다.“왜, 깨지 말기를 바라기라도 하는 거야?”남편, 아들과 시누이에게 번갈아 가며 혼쭐이 난 최신애는 이미 기가
위험 구간이 점점 가까워져 오자 서원준은 가슴이 두근거렸다.“강지아, 멈춰! 나 삼대독자란 말이야. 너 때문에 우리 집 대가 끊기면 집안 조상들이 너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강지아, 이 바보야! 그깟 남자를 위해 목숨을 걸겠다는 거야? 네 목숨이 그렇게 하찮아?”강지아는 미친 듯이 핸들을 두드렸다.“맞아, 내 목숨 하찮아. 그때 차라리 내가 죽는 거였어! 왜 나를 살려둔 것인데? 우리 엄마가 살아 계셨다면 교양이 없다고 욕먹는 일도 가정교육을 못 받았다고 하는 사람도 없었겠지?”강지아의 목소리가 낮아서 서원준은 뒷말을 듣지 못했지만 강지아가 핸들을 놓을 때마다 서원준은 당장이라도 심장마비가 올 것 같았다.“운전대 잘 잡고 운전해! 천천히 가라고! 들었어?”이때 드론 한 대가 빠르게 지나가더니 안에서 강지찬의 목소리가 들렸다.“지아야? 오빠야. 잘 들어, 길옆에 차 세워놓고 일단 무슨 일이든 오빠와 얘기해.”드론을 힐끗 본 강지아는 입술을 깨물었다.“강지아, 오빠 말 못 들었어? 얼른 길옆에 차 세워. 이러다가 죽는다고! 네가 죽어도 그 사람들은 죄책감 같은 거 느끼지 않을 거야! 만약 나라면 그 사람들보다 더 잘 살 거야! 지아야, 오빠만 믿어. 아무도 널 괴롭히지 못할 거야. 네 새언니를 생각해 봐. 네가 차를 몰고 나왔다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서 배가 아프대.”그 말에 강지아의 표정이 변했다.하지만 이때 도로 상황이 바뀌었다.앞쪽은 커브 길이었고 앞쪽 차를 발견한 강지아는 속도를 줄이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어쩔 수 없이 핸들을 마구 꺾었다.차는 고속도로의 난간을 부수고 해변으로 돌진했다.해변은 아직 미개발지역이라 곳곳이 돌로 뒤덮여 있었다.이미 통제력을 잃은 강지아의 차는 아무리 브레이크를 밟아도 소용이 없었다.‘펑’하는 소리와 함께 차가 거대한 돌멩이를 들이받은 뒤 멈추었다.차의 보닛이 부딪혀 열렸고 차 앞쪽에서 짙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달려와 차 문을 잡아당긴 서원준은 피투성이가 된 채 핸들에 엎드려 꼼짝도 하지 않
호텔에서 뛰어나온 온미정은 길가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는 동하민을 발견했다.“온 선생님 어떡해요. 대표님이 직접 운전하고 가셨는데 이런 상태에서 사고가 날까 봐 걱정이에요.”“X발!”온미정은 참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었다.다행히 백무영이 제때 차를 몰고 와 두 사람은 서둘러 차에 올랐다.강지아가 너무 빨리 운전해 가는 바람에 온미정 일행은 강지아를 뒤쫓아 가지 못했다.호텔은 리조트에 있고 지금 이 시각 도로에 차가 적어 강지아는 신호등을 여러 번 무시하고 바로 고속도로를 탔다.차 뚜껑을 열어 운전하는 강지아는 머릿속에는 온통 호텔 침대에 누워있던 온유한의 모습과 최신애의 웃는 얼굴 뿐이었다.조수석에 있는 휴대전화가 계속 울렸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얼마나 지났을까 파란 스포츠카 한 대가 뒤에서 쫓아왔다.강지아보다 빨리 달리는 그 차는 이내 그녀의 차 옆에서 나란히 달렸다.“바보야, 아침부터 왜 갑자기 폭주를 하고 그래?”고개를 돌려보니 서원준이었다.서원준이 여기에 왜 온 것이지?서원준은 조심스럽게 차를 몰면서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차 운전 솜씨가 생각보다 괜찮네. 여기 경치가 좋은 것 같은데 우리 내려가서 구경할래?”해안가 옆에 있는 고속도로라 풍경이 정말 좋았다. 파란 하늘과 바다는 티끌 하나 없이 깨끗했다.하지만 강지아는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기분이 아니었기에 계속 빠른 속도로 차를 운전했다.“따라오지 마, 꺼져!”강지아가 서원준을 향해 소리쳤지만 서원준은 전혀 개의치 않고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아이고, 왜 이렇게 화가 많이 났을까? 누가 우리 강 선생님을 이렇게 화나게 한 거야? 내가 가서 한 대 패줄까?”서원준이 끈질기게 강지아의 차를 따라붙었다.“말해봐. 말해보라고. 이 오빠가 대신 화풀이를 해줄게.”강지아가 가속페달을 밟자 차가 저 앞으로 쌩하니 달려나갔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장난기 넘치던 서원준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더니 이내 속도를 높여 따라갔다.다행히 도로가 한적해 괜찮았지만 강지아가 이대로 계속
강지아가 뛰쳐나가는 것을 본 온미정은 넋이 나갔다. 강지아를 부른 사람은 온미정인데 이런 일이 생겼으니 앞으로 강지찬과 정유진의 얼굴을 어떻게 본단 말인가?얼른 백무영더러 쫓아가라고 했다.“최신애, 이렇게 비열한 줄 몰랐네!”온미정은 당장이라도 최신애를 씹어먹어 버리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더 이상 그녀의 체면 따위 세워줄 수 없었다.“지아에게 사과하겠다고 속이고 아침까지 직접 만들어 식사에 초대하고 싶다고 하더니, 나와 지아가 바보로 보여요?”온미정은 삿대질하며 말했다.“이 모든 걸 본인이 직접 설계한 거죠?”최신애는 당연히 인정하지 않았다.“미정 씨,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 나와 무슨 상관인데요?”다른 사람들 모두 온미정을 보고 있었다.물론 이런 일이 좀 창피하긴 하지만 임씨 집안으로선 이참에 임유희가 온유한에게 시집갈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었기에 임씨 집안 사람들은 당연히 침묵을 지켰다.충격에 빠진 건 온혁진과 온유한 뿐이었다.결혼한 지 오랜 아내에게 이런 모습이 있다는 것에 온혁진은 정말 놀랐다.온유한도 이런 자신의 어머니가 낯설어 증오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온미정은 당장이라도 최신애의 뺨을 때리고 싶었다.“본인과 상관없다고요?”온미정은 화가 나서 웃음이 났다.“그래요. 앞으로 나 온미정에게는 당신 같은 미치광이 새언니가 없으니 그렇게 알아요. 지아의 말이 맞아요. 최신애, 구역질 나!”온미정은 다른 사람을 생각할 겨를이 없이 강지찬에게 전화를 걸며 밖으로 달려갔다.손가락질받고 욕을 먹은 최신애는 화가 많이 났지만 속으로는 기뻤다.이제 강지아와 그녀의 아들이 헤어진 마당에 욕 몇 마디 듣는 것쯤이야 무슨 대수겠는가?하지만 겉으로는 일부러 태연한 척하며 말했다.“고모가 강씨 가문과 친하니 탓할 수 없죠.”임근우는 한숨을 내쉬며 온혁진에게 말했다.“온 원장님, 우리 둘이 앉아서 얘기 좀 해요.”온혁진은 옆에 있는 아들을 힐끗 바라봤다.온유한은 굳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방을
“유한 씨, 밖에서 누가 문을 두드리는 것 같아요.”욕실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고 다름아닌 임유희의 목소리임을 강지아는 바로 알 수 있었다.침대 위에 있던 온유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잠에서 깼다.자신에게 늘 엄격한 온유한인지라 아침이면 늘 일정한 시간에 일어났다. 평소 이 시간이면 진작 깨어 있어야 했지만 어젯밤 술을 너무 마셔 아직 자고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 부르자 바로 깨어났다.“지아야?”온유한은 습관적으로 안경을 찾았고 침대 협탁을 더듬거렸지만 안경이 없었다.강지아는 앞으로 나와 허리를 굽혀 카펫에 떨어진 안경을 집어 들어 건넸다.온유한은 안경을 쓰고 나서야 뭔가 잘못되었음을 발견했다.방안을 살펴보니 이 방은 그의 방이 아니다. 한쪽 화장대 위에 여자 용품이 가득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카펫에 빈 술병이 없었고 공기 중에서도 고약한 술 냄새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은은한 향수 냄새가 났다.강지아가 그를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지아야!”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온유한은 이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알아챘다.어쨌든 재벌가 자식들에게 이런 일은 결코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이때 욕실 문이 열렸고 목욕 가운을 입고 나온 임유희는 문 앞에 멍하니 서 있는 강지아와 동하민을 발견했다.온유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안색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식사에 초대한 게 아니라 나더러 간통현장을 잡으러 오라고 한 거였네.”강지아가 말하자 동하민이 옆에서 한마디 했다.“대표님, 어쩌면...”어쩌면 뭐?오해일지도 모른다고?동하민도 이런 위로가 가소롭다고 생각했는지 민망한 듯 방을 나섰다.“지아야, 내 말 좀 들어봐.”온유한이 힘겹게 한마디 하며 이불로 몸을 두르고 침대에서 내려와 강지아를 잡으려고 하자 강지아가 그를 피했다.“만지지 마!”“지아야!”“나 만지지 마, 건드리지 마...”강지아는 미칠 지경이었다.“아무 사이 아니라며? 돌아가서 혼인신고부터 하자며? 온유한, 나더러 그 말을 믿으라고?”“그런 게 아니야.
벌써 1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 온유한은 얼마나 마셨는지 모른다.이때 누군가 들어오는 것을 느끼고 애써 눈을 떴지만 술에 취한 탓에 눈앞의 사람이 누구인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꺼져!”“나야, 네 엄마!”최신애는 그를 바닥에서 일으키려 했지만 온유한은 그녀를 뿌리쳤다.“어머니?”“우리 어머니! 하하...”하마터면 그에게 밀쳐 넘어질 뻔한 최신애는 휘청거리다가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다.최신애는 깜짝 놀랐다.“유한아, 왜 그래? 엄마 놀래키지 마.”“꺼져요!”온유한은 원수를 보듯 그녀를 바라봤다.“지아가 나와 헤어지재요. 이제 만족해요? 아니, 당신은 우리 어머니가 아니야!”비틀거리며 최신애를 밀어내려던 온유한은 어눌한 발음으로 소리쳤다.“우리 어머니가 얼마나 착하고 상냥한데! 당신은 악마야. 우리 어머니가 아니야, 꺼져, 꺼져...”무자비하게 쫓겨난 최신애는 조금 전 들은 말을 믿을 수 없었다.취중 진담이라고 했던가, 아들의 마음속에 그녀는 이미 악마로 변해있었다.모두 강지아의 탓이다!강지아만 없었다면 모자 관계가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최신애는 이를 갈았다.온유한은 최신애를 방에서 쫓아낸 뒤 계속하여 술을 마셨다. 옷이 물에 젖어 바깥에까지 술 냄새가 풍겼다.만취한 아들을 바라본 최신애는 순간 한 생각이 떠올랐다.온미정과 백무영의 결혼식 다음 날, 지난밤 온혁진, 온미정과 크게 싸운 최신애는 온미정을 찾아가 잘못했다며 용서를 빌었고 강지아에게 직접 사과하고 싶다고 말했다.그 말에 온미정은 의심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지아한테 사과하겠다고요?”최신애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네, 어젯밤에 그이와 싸운 뒤 방에 가서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내가 확실히 잘못한 것 같아요. 온씨 가문과 강씨 가문이 얼마나 오랜 친분을 쌓아온 집안인데요. 할아버지 때부터 친하게 지낸 사이니 절대 이렇게 쉽게 끝내면 안 되죠. 어제 확실히 내 생각이 짧았어요. 지아와 지찬이 마음을 많이 상하게 한 것 같아 사과하고 싶어요.
강지아가 옷을 갈아입자 동하민이 그녀의 머리를 말려줬다.평소 털털한 성격의 동하민은 머리를 말리면서 한숨을 내쉬었다.“대표님은 가스라이팅 당한 거예요.”조금 전, 강지아와 온유한의 말다툼을 동하민은 똑똑히 들었다.별 반응이 없던 강지아는 한참 만에 말했다.“내가 모를 줄 알아?”“그러면 왜...”“무슨 소용이 있어? 오빠 엄마인데.”이 세상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강씨 가문의 외동딸이 사람들 앞에서 욕을 먹었으니 동하민이었다면 바로 같이 싸웠을 것이다.어른이라는 사람이 하루가 멀다 하고 매일 트집을 잡으니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한편 옆방에 있는 강지찬은 이미 온씨 가문의 투자를 취소하기로 결심했고 앞으로 온씨 가문과 그 어떠한 비즈니스 거래도 하지 않기로 했다.온혁진이 아무리 애원하고 부탁해도 생각을 바꿀 기색이 없었다.“아저씨, 기회는 충분히 드렸어요. 지아가 계속 괴롭힘을 당하니 지아의 유일한 가족으로서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온혁진은 다급한 얼굴로 온유한에게 눈짓하며 한마디 하라고 했다.온유한은 못 들은 척하며 굳은 얼굴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최의현은 뭐라고 하지 않았지만 옆에 있는 한규진은 당연히 강지찬의 편이었다.“온 원장님, 방금 사모님의 행동은 정말이지...”한규진이 난감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어린 지아를 이렇게 대하다니, 강 대표가 화를 낼 수밖에요. 입장 바꿔 생각해 보세요. 누구인들 화가 나지 않겠습니까? 다 집에서 귀하게 자란 자식이에요. 귀하지 않은 자식이 어디 있겠어요?”온혁진도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조금 전, 최금성 등 최신애의 친정 식구들이 없었더라면 그 자리에서 최신애와 싸웠을 것이다.결국 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은 분위기가 안 좋은 상태로 얘기를 마쳤다.강지아는 오빠와 새언니를 따라 집으로 갔고 온씨 일가는 모두 호텔에 남았다.좋은 날 이런 일이 생기자 온미정은 최신애를 볼 때마다 화가 났고 첫날밤도 기대가 되지 않았다.최신애는 임유희의
강지아의 말에 온유한은 어리둥절했다.“지아야, 뭐라고?”강지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농담 아니야. 유한 오빠, 우리 헤...”“안 돼!”온유한이 강지아의 말을 끊었다.“네가 서운한 것은 알아. 하지만 안 돼. 우리 돌아가서 혼인신고 하자. 나 결정했어. 우리 분가해서 살자. 응?”강지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믿지 않았다.최신애도, 온유한도, 그녀 자신도 믿지 않았다.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동하민은 얼른 밖으로 나와 자리를 피해줬다.가운으로 몸을 감싼 채 벽에 기대어 있는 강지아는 상태가 아주 안 좋아 보였다.머리는 축축하고 화장을 지워 안색도 창백했다.입술을 떨고 있는 것을 보니 뭔가 무서운 것 같았다.“지아야, 일단 옷부터 입고 우리 얘기 좀 할까? 응?”온유한이 손을 뻗어 그녀를 다시 품에 안으려고 하자 강지아가 온몸을 떨더니 큰소리로 외쳤다.“나 건드리지 마!”그녀도 이런 자신에게 놀란 듯 자리에 얼어붙었다.온유한의 손도 허공에서 굳어버렸다.의사인 온유한은 직업 특성상 강지아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지아야?”작은 소리로 강지아를 부르자 강지아는 그제야 마음을 가다듬더니 온유한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유한 오빠, 나 방금... 뭐라고 했어?”“괜찮아.”강지아의 어깨에 손을 얹은 온유한은 이번에 그녀가 격한 반응을 하지 않자 천천히 다가가 그녀를 품에 안아다.“우리 지아는 세상에서 제일 착한 아이야.”온유한의 목소리는 어린 지아를 달래듯 유난히 부드러웠다.그러나 강지아는 그의 손을 밀치더니 다시 그에게서 떨어졌다.“난 괜찮으니까 오빠는...”강지아는 밖으로 걸어 나가며 말했다.“임유희 씨나 찾으러 가.”그 말을 들은 온유한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지아야, 그런 말 하지 마. 나와 임유희, 아무 사이 아닌 거 알잖아.”온유한은 설명할 게 너무 많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그 사진들 다... 다...”온유한이 더 이상 뭐라고 할 수 있겠
목욕을 하니 강지아는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자신을 욕조에 가둔 채 누구와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강지찬이 온씨 집안과 끝장을 보기 위해 달려갔을 때 강지아는 이미 자리에 없었고 그곳에는 몇몇 하객들과 표정을 알 수 없는 최신애만 남아 있었다.“온씨 가문이 우리 강씨 일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것 같네요. 앞으로 완전히 인연을 끊죠.”강지찬은 최신애를 싸늘하게 바라봤다.“그다음은 아주머니 차례겠네요.”최신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너, 너 무슨 뜻이야?”강지찬이 코웃음을 친 뒤 정유진을 이끌고 자리를 뜨려 하자 온혁진이 얼른 뒤쫓아갔다.“지찬아, 지찬아. 우리 말로 하자... 이 아저씨의 체면을 봐서라도 앉아서 이야기하자... 화 풀어. 이 사람이 점점 머리가 어떻게 되는 것 같아. 내가 집에 가서 잘 얘기할게...”온미정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최신애 씨!”새언니라고 부르지도 않았다.“온씨 가문이 대체 뭘 잘못했는데 왜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거예요? 오늘은 내 결혼식이에요. 온씨 가문과 내 체면은 안중에도 없어요?”화가 나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최신애는 반박하고 싶었지만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온미정이 계속 화를 내려 하자 백무영이 그녀를 말렸다.“됐어. 그만해.”백무영은 온미정을 품에 안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들 보고 있어. 진정해.”그러고는 이내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다들 술 마시러 가시죠.”최의현과 한규진도 서둘러 상황 수습에 나섰다.한편 사람들이 흩어지는 것을 본 최신애는 화가 나서 몸을 떨었다.“이게 내 탓이야?”그녀는 옆에 있던 임유희를 덥석 잡으며 물었다.“유희야, 네가 말해봐. 도대체 누가 잘못했냐?”임유희가 입을 열기도 전에 옆에서 줄곧 어두운 안색을 하고 있던 온유한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그만 하세요!”최신애는 깜짝 놀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이제 만족해요?”온유한은 눈시울을 붉히며 다시 한번 소리쳤다.“이제 만족하냐고요?”“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