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정유진은 고객과 디자인 계획에 관해 이야기하는 데 바빴다. 오전에 한 명, 오후에 한 명의 고객과 미팅을 했는데, 두 고객은 다른 디자이너의 고객이었지만, 회사의 총 디자이너로서 그녀는 중요한 고객들의 계약을 돕고 있었다. 그녀 덕분에 두 고객 모두 디자인 계약을 체결했다.예원은 감탄을 금치 못하며 말했다. "도대체 한빈이 너한테 악운인지 강지찬이 너한테 행운인지, 어떻게 네가 참여하는 계약은 모두 성공적으로 체결될 수 있는 거야? 이렇게 계속하면 내년에는 사무실을 옮길 수 있겠어."정유진은 물을 마시며 웃으며 말했다. "날 죽일 셈이야? 그럼 난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얼마나 많은 시안을 그려야 한다는 거야?"이때 키키가 한 소포를 들고 왔다. "누나, 누나한테 온 거에요."정유진은 의아해하며 말했다. "내 거야? 요즘 온라인 쇼핑을 안 했는데."소포에는 확실히 그녀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고 예원이가 그녀를 대신해 소포를 열었다.안에는 여러 상자의 약이 들어 있었다."엽산?" 예원은 단번에 깨달았다. "맞아, 임신 첫 3개월 동안은 이것을 먹어야 한대. 이건 또 뭐야? 이건 다 널 위한 거네. 임산부와 태아에게 좋은 것들이야. 누가 보낸 거지?"정유진은 소포의 발송인 이름을 확인했다. "온미정? 나는 모르는 사람인데."예원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도 몰라."그때 정유진의 휴대전화에 문자가 도착했다.바로 온미정이 보낸 것이었다. 【저는 온미정이에요. 강지찬 그 녀석이 절 '이모'라고 부르죠, 태안병원 산부인과 의사예요. 당신에게 몇 가지 물건을 보냈어요. 아마 그 녀석은 이런 걸 생각하지 못했을 것 같아서요, 고맙다고 할 필요 없어요.】정유진은 메시지를 예원에게 보여주었고, 예원이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태안병원이잖아, 이 사람이 온미정이고 강지찬의 지인이라면, 맞아, 이건 온 씨네 사람이야."정유진은 서울의 상류층에 대해 잘 몰랐고, 심지어 한빈도 그 정도의 높이에는 올라가지 못했다."온 씨 가문이
강지찬은 정유진의 집으로 따라갔고 정유진이 문을 열려고 하자 문이 안쪽에서 열렸다."도련님, 아가씨, 돌아오셨군요."도우미가 서둘러 신발장에서 정유진의 슬리퍼와 강지찬을 위한 새 남성 슬리퍼를 꺼냈다. 정유진은 확실히 이 슬리퍼가 자신이 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방 씨 아주머니가 교육한 도우미답게 강지찬이 올 것까지 계산해 첫날부터 슬리퍼를 준비했던 것이다.이번에는 강지찬이 꺼리지 않고 슬리퍼를 신고 들어갔고 정유진도 신발을 갈아신고 들어갔다."아가씨, 도련님, 저녁 준비됐습니다. 지금 차려드릴게요."정유진은 아직 사람에게 시중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 예의 바르게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괜찮아요, 괜찮아요. 오늘 특별히 제비집을 끓였어요. 아가씨, 많이 드셔야 해요."도우미는 쾌활한 성격이었고, 정유진은 자신의 조용한 성격 때문에 활달하고 일 잘하는 사람을 선호했다. 강지찬이 무심코 물었다. "사람 쓰는 거 어때요? 마음에 안 들면 바꿔요."정유진은 서둘러 대답했다. "장 씨 아주머니 정말 좋아요, 요리도 맛있고, 바꾸지 않을게요."강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좋아하면 그만이죠."강지찬과 정유진이 저녁을 먹은 후, 장 씨 아주머니가 부엌을 정리하고 떠났고 정유진은 강지찬을 쳐다보며 말했다. "안 가요?"강지찬은 손님 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서 자면 안 돼요?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아니, 내 딸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내가 옆에 없으면 어떡해요?"정유진은 그를 바라보며 말문이 턱 막혔다."..."이번에는 강지찬도 물러서지 않아 정유진은 어쩔 수 없이 타협했다. "제 방에 함부로 들어오면 안 돼요."강지찬은 냉정하게 대답했다. "날 뭐로 보는 거에요?"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정유진이 문을 열자 형준이 캐리어 두 개를 끌고 서 있었다."아가씨, 이건 대표님 옷이에요.""..."그는 이미 여기서 살 계획을 세웠다. 정유진은 그가 가방을 끌고 들어오도록 비켜섰고, 형준은 강지찬의
시간이 아직 이르다고 생각한 정유진은 소파에 누워 예비맘 어플을 다운로드했다. 이는 회사에서 아이를 낳은 언니가 추천한 것으로, 임산부에게 유용한 정보와 태아의 발달 과정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앱이었고 예비 엄마에게 주의사항을 알려줘 첫 임신을 한 여성에게 추천할만한 어플이었다.정유진은 앱을 다운로드하고 정보를 입력하자마자 앱이 구동되었다.강지찬은 샤워를 마치고 나와 그녀가 소파에 느긋하게 누워 핸드폰을 보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의 몸은 마치 부드러운 빛으로 둘러싸여 있는 듯했다. 임신으로 화장을 하지 않은 정유진은 기본적인 피부 관리만 했지만, 피부는 하얗고 매혹적인 눈매는 타고난 매력이 있어 강지찬의 눈에는 언제 어디서나 항상 유혹적으로 보였다.강지찬의 발걸음은 무의식적으로 그녀에게 이끌렸다. "뭘 보고 있어요?" 그는 정유진 옆에 앉아 몸을 밀착했다. 정유진은 본능적으로 옆으로 움직이려 했지만, 그의 팔이 금세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뭐 하는 거예요?" 하지만 그녀는 크게 반항하지 않았다. 강지찬은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무언가에 데이기라도 한 듯 화들짝 놀란 듯 말했다. "이 콩알만 한 것이 내 딸 이이에요?" 그는 핸드폰을 보고 나서 정유진의 배를 쳐다봤다. 배는 아직 평평했고 허리도 가늘어 임신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정유진은 그와의 이런 친밀함이 익숙하지 않아 허리에 있는 손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유진이 뭔가 말하기도 전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움직이지 말아요, 우리는 감정을 쌓고 있어요. 유진 씨, 당신도 아이에게 온전한 가정을 주고 싶잖아요? 그렇다면 지금부터 우리 관계의 변화에 적응해야 해요. 다른 사람들은 결혼 후 사랑을 시작하지만, 우리는 임신 후 사랑을 시작하는 거죠.""..."이유가 타당해 반박할 수 없었다. 강지찬이 이곳에 머물게 동의한 것도 그와 감정을 쌓기 위해서였다. 그가 아이의 아버지라는 것을 마음속으로 인정하면서, 정유진은 이제 그의 접근을 그다지 거부하지 않았지만, 그저 조금 어색할
강지찬은 자리에 도착한 뒤에야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강원훈, 강지현, 최의현와 온유한이 있었고, 그 외에도 강지찬이 모르는 일부 사람들이 있었다. 강지찬이 도착하자 다들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아이고, 강 대표님 왔네요, 어서 앉으세요.""강 대표님 여기 앉으세요.""형님." 강지현도 일어섰다.강원훈은 일어서지 않았다. 그의 지위가 애매하긴 하지만, 결국은 강지찬의 삼촌이었으니 삼촌이 조카를 맞이할 이유는 없었다.최의현와 온유한도 당연히 일어날 필요가 없었다."왜 이제 왔어? 우리 벌써 두 바퀴 돌았는데." 강원훈이 편안하게 소파에 기대며 곁에 있던 종업원에게 눈짓하며 강지찬에게 술을 따르라고 지시했다.강지현이 자신의 자리를 비켜주며 말했다. "형님, 여기 앉으세요."강지찬이 그를 쳐다보고 그 자리에 앉았다.테이블에 석 잔의 술이 이미 따라져 있었고 강원훈이 독촉했다. "어서 마셔, 지각하면 석 잔 마셔야지."강지찬은 한 잔을 들어 마셨지만, 나머지 두 잔은 손대지 않았다. 그의 주량은 좋지 않았고, 누가 권해도 술을 마시지 않았다. 지금은 회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최의현도 강지찬을 놀렸다."또 속임수를 쓰네. 취하면 뭐 어때? 누가 문을 걸어 잠그는 것도 아니고,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도 없잖아."강지찬은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누가 없다고 그래?"최의현이 놀라며 말했다. "그 여자가 너희 집에 안 산다며?"강지찬이 대답했다. "그녀가 내 집에 살지 않는다고 내가 그녀의 집에 살 수 없다는 법은 없지."최의현은 깨달음을 얻고 강지찬을 칭찬했다. "역시 우리 강 대표님답네. 융통성 있고, 굽힐 줄도 아시는 분이니 결국 솔로 탈출에 성공하는구나."강지찬이 솔로를 탈출했다는 말에 다른 사람들이 축하하며 술잔을 들었다.강지찬은 기분이 좋아져서 알게 모르게 석 잔의 술을 마셨다. 하지만 그는 더는 마실 수 없었다. 높은 도수의 술은 세 잔이면 충분했다. 더 마시면 취할 것이다.다른 사람들은 부어
이 여인은 머리카락을 길게 드리운 채 서 있었고, 어두운 불빛 탓에 잠깐 동안 강지찬은 안나를 정유진으로 착각했다. 하지만 다시 보니 그렇지 않았다. 안나는 너무 밝게 웃고 있었고, 정유진은 그렇게 웃지 않는다. 정유진은 아름다운 얼굴을 가졌지만, 성격은 다소 쌀쌀맞고 도도한 느낌이 있다. 남자들은 당연히 예쁘고 유혹적인 여자를 좋아할 수밖에 없고, 자연스럽게 정유진처럼 고집 센 여자는 남자들의 눈에 잘 들지 않는다. 강지찬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착각했다고 생각했다. 정유진은 집에서 태교 중이었니 자신이 잘못 본 게 확실했다.그녀를 생각하니 마음이 따뜻해졌고, 그녀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나가."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강 대표님, 저를 못 알아보시나요?" "꺼져!" 강지찬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술기운 탓에 그의 목소리에 별다른 힘이 없었다. 안나는 자리를 뜨지 않고, 오히려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웃었다. "강 대표님, 전 안나예요. 높으신 분들은 잊음이 헤프시잖아요, 저를 기억 못 하시겠어요?"강지찬은 술기운으로 머리가 어지러웠고 잠시 조용히 눈을 붙이고 싶었다. 그는 술에 취해 반응이 느려진 탓에 미처 잘못된 점을 발견하기도 전에 안나가 그의 벨트를 풀고 정장 바지 지퍼를 내렸다. 강지찬이 눈을 떴을 때, 안나의 눈이 그를 매혹적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강 대표님, 여기 아무도 없어요." 안나가 다가오며 거의 그의 몸에 엎드리다시피 했다. 뒤에서 보면 매우 유혹적인 자세였다. 안나는 말을 마치자마자 고개를 숙였지만, 그녀의 눈은 여전히 유혹하는 뱀마냥 강지찬을 노려보고 있었다. 안나의 손이 강지찬에게 닿기도 전에 강지찬은 그녀를 밀치고 차갑게 일어났고 침착하게 바지를 정돈한 후 입을 열었다."누가 널 보냈어?" 거절당한 안나는 낯빛이 밝지 못했고 허겁지겁 일어나며 말했다."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강지찬은 그녀와 얽히지 않았기에 딱 잘라 얘기했다."다시는 널 보고 싶지 않아." 그는
오후 세 시, 강지찬이 약속대로 정각에 정유진을 픽업하러 왔다. 정유진은 회사에서 이미 쇼핑 리스트를 작성해 두었다. 방사선 차단 옷 외에도 임산부용 속옷과 바지도 필요했다. 특히 임신 후기에는 몸매 변화가 크기 때문에 임산부에게 적합한 속옷과 바지를 구입하는것이 필수였다.그녀는 바꿔가며 입을 수 있도록 샴페인 색상의 끈나시 두 개를 골랐고 강지찬은 옆에서 보며 불만스러워했다. 정유진과 처음으로 쇼핑몰에 와서 사는 옷이 방사선 차단 옷이라니. "이거 두 개만 고를 거야?" 강지찬이 물었다. 방사선 차단 옷은 디자인이 단조로워 별로 고를 것도 없었다. 정유진은 그의 말에 신경 쓰지 않고 두 개의 탱크탑을 추가로 골랐다. 그녀가 점원에게 기능과 주의사항에 대해 자세히 묻는 모습을 보며 강지찬은 외면당하는 느낌을 받았다. 지찬은 여자와 함께 쇼핑해본 경험이 없어, 그냥 한쪽에 앉아 쉬기로 했고, 정유진은 쇼핑을 빨리 끝내고 필요한 물건들을 한가득 담아왔다. 강지찬이 계산을 마치고 정유진과 함께 돌아서려는데, 류선과 고세연이 함께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정말 강지찬이네, 방금 건너편에서 쇼핑하다가 너를 봤어. 여긴..." 이 가게는 육아용품점이었다. 강지찬이 정유진을 이런 가게에 데려오다니... 류선의 시선이 정유진의 배에 머물렀다. 임신한 건가? 이렇게 빨리? 그녀는 자신의 비실거리는 아들이 생식능력에 문제가 있을지 모른다고 속으로 걱정했다. 고세연도 상황을 깨닫고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지찬 오빠, 당신이랑 이 여자가..." 류선은 눈에 숨겨진 질투를 감추며 정유진을 가리키며 화를 냈다. "이 여자가 임신했다고? 지찬아 너 정말 어리석구나. 이런 여자를 우리 집에 들일 수는 없어. 게다가, 세연이를 두고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류선의 목소리가 하도 컸던 탓에 가게 안의 직원들과 주변 다른 가게의 고객들이 모두 들을 수 있었고 그중에는 강지찬을 알아본 사람들도 있었다. "저기 강지찬 아닌가요? 옆에 있는 여자
강지찬은 당시 자신이 정유진에게 넘어갈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에이프릴 호텔에서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그녀를 호텔로 데려가는 모습이 공개되면서 상류층에는 순식간에 소문이 퍼졌고, 모두가 알게 되었다.모두들 강지찬이 정유진과 단지 한 번의 일탈을 벌인 것으로 생각했다. 어쨌든 정유진이 약혼자가 있는 사람이라는 소문이 돌았으니 말이다. 누가 그들이 실제로 아이까지 가질 줄 알았겠는가?류선의 말을 듣고, 강지찬은 걸음을 멈추었다."나 강지찬이 누구와 결혼하든지, 언제부터 숙모가 나서서 간섭한 거죠?" 강지찬은 성격도 만만치 않았고 독설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으며 상대가 어른인지 아닌지도 개의치 않는 사람이었다.그는 냉정하게 고세연을 바라보며 말했다."숙모가 그렇게 좋아한다면, 직접 집으로 데려가 며느리로 삼으면 더 좋지 않겠어요?""너..." 류선의 얼굴색이 단번에 변했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아무것도 아닌 여자와 결혼하는 걸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세연이는 네 아버지가 마음에 들어 하는 예비 며느리고, 널 오랫동안 좋아해 왔잖니. 난 이런 좋은 커플을 망치고 싶지 않아."강지찬은 정유진의 어깨를 감싸며 단호하게 말했다."그렇다면 숙모도 제대로 봐두세요, 이 여자가 바로 내 여자친구예요. 앞으로는 잘못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고세연은 단지 내 아버지가 거둬들인 고인이 된 친구의 딸일 뿐이지. 나랑은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그는 정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리 와요, 이분은 제 숙모예요. 며칠 후에 집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려고 했는데, 지금 만나게 되었으니 먼저 인사해요."정유진은 지금 이런 상황에서는 그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고, 예의 바르게 말했다. "숙모, 안녕하세요."이에 류선과 고세연의 표정이 크게 변했다. 그들도 강지찬이 이번에는 진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됐어요, 우리 집에 가서 밥 먹어요. 지금은 배고픈 상태로 있어선 안 되잖아요." 강지찬은 정유진을
강 씨네 저택에서, 고세연은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었다. 강홍식은 분노로 인해 거의 쓰러질 뻔했고, 집사에게 명령했다. "저 불효자식에게 전화해! 당장 돌아와서 이 상황에 관해 설명하라고 해." 집사는 눈물을 흘리는 고세연을 보고 망설였다. "강 대표님은 회장님이 부르는 이유를 알 것입니다. 아마도... 기다리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강지찬의 성격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전화를 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고 절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게다가 집사는 이 전화를 하고 싶지 않았다. 이게 무슨 일인가? 자기 아들이 중요한가, 아니면 외부인이 중요한가? 집사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에 강홍식이 탁자를 치며 말했다. "지금 전화해서 즉시 돌아오도록 해.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이 집에 다시는 발도 못 붙인다고 전해!" 집사는 어쩔 수 없이 전화를 걸었고 류선은 기회를 이용해 말했다. "아주버님, 지찬이도 나이가 들었습니다. 그냥 세연이와 결혼하게 하세요. 아주버님은 지찬이 친부이자 우리 강 씨 가문의 가장이니 당신의 말이 곧 법이죠." 이 말을 들은 강홍식은 양심이 찔렸다.가문의 가장은 무슨? 그저 강 씨 집안의 장남이라는 호칭을 얻었을 뿐이다. 강 씨 가문의 사업은 이미 강지찬에게 넘어갔고, 그는 이제 둘째처럼 연말의 배당금을 기다리며 살고 있는 신세였다.하지만 류선에게 이런 칭찬을 받으니 마음이 한결 편안했다. 강홍식은 평생 제대로 된 일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그는 운이 좋았다고 한다. 어릴 적에는 아버지에게 의지했고, 이제 늙어서는 아들에게 의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젊었을 때는 아버지를 화나게 했고, 이제 늙어서는 아들을 화나게 했고, 그의 인생에 대한 평가는 '한평생 멍청이'일 뿐이었다.류선의 말에 자극받은 강홍식은 '대가문의 가장'으로서의 허영심이 되살아났다. "저 불순한 놈이 돌아오면, 저 자식이랑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할 거야!" 강지현도 자리에 있었고, 동의하지 않았다. "저 정
강지아를 차에서 안고 내릴 때 서원준은 두 손을 떨고 있었다.온몸이 마비된 듯했고 호흡이 가빠졌으며 심장이 너무 아파 강지아의 얼굴을 차마 볼 수 없었다.“바보, 멍청이!”강지찬이 급하게 외쳤다.“지아는 어때?”“혼수상태입니다. 당장 병원으로 옮겨야 해요.”“헬기가 곧 도착할 거야.”강지아가 수술실에 들어간 후, 온몸이 강지아의 피로 물든 서원준은 온유한을 보자마자 달려들어 몸싸움을 벌였다.최의현과 한규진이 한참을 말려서야 떼어놓을 수 있었다.“넌 병신이야.”서원준이 온유한에게 삿대질하며 가차 없이 욕설을 퍼부었다.수술실 밖에 사람들이 가득 모였다.온미정은 자책한 듯 안색이 매우 안 좋아 보였다.정유진도 이 병원에 입원 중이다. 강지찬의 말대로 정유진이 마음이 급해 뛰어가는 바람에 태아가 움직여서 지금 침대에 누워있었다.“다 내 탓이야!”항상 당당하던 온미정이 주눅 든 얼굴로 자신의 뺨을 때렸다.“최신애의 말을 믿다니, 내가 바보 멍청이야!”그러자 정유진이 어이없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고모님과 무슨 상관인데요? 고모님이 아니어도 지아를 속여서 오게 했을 거예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요. 본인 친아들이잖아요. 일생일대의 중요한 일인데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죠?”그러자 온미정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최신애는 미쳤어. 넌 더 이상 생각하지 마. 지아는 괜찮으니까 네 몸이나 돌봐.”정유진의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야말로 일이 더욱 커진다.이번 일로 화가 난 강지찬은 분명 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의 수십 년 우정을 끝낼 것이다.수술이 끝난 뒤 강지아는 중환자실에 입원했다.의사 말로는 고비는 넘겼지만 머리를 다쳐 환자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언제 깨어날지도 확실하지 않다고 했다.“정말 못 깨어날... 수도 있나요?”최신애의 물음에 온혁진이 화가 나서 탁자를 쳤다.“왜, 깨지 말기를 바라기라도 하는 거야?”남편, 아들과 시누이에게 번갈아 가며 혼쭐이 난 최신애는 이미 기가
위험 구간이 점점 가까워져 오자 서원준은 가슴이 두근거렸다.“강지아, 멈춰! 나 삼대독자란 말이야. 너 때문에 우리 집 대가 끊기면 집안 조상들이 너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강지아, 이 바보야! 그깟 남자를 위해 목숨을 걸겠다는 거야? 네 목숨이 그렇게 하찮아?”강지아는 미친 듯이 핸들을 두드렸다.“맞아, 내 목숨 하찮아. 그때 차라리 내가 죽는 거였어! 왜 나를 살려둔 것인데? 우리 엄마가 살아 계셨다면 교양이 없다고 욕먹는 일도 가정교육을 못 받았다고 하는 사람도 없었겠지?”강지아의 목소리가 낮아서 서원준은 뒷말을 듣지 못했지만 강지아가 핸들을 놓을 때마다 서원준은 당장이라도 심장마비가 올 것 같았다.“운전대 잘 잡고 운전해! 천천히 가라고! 들었어?”이때 드론 한 대가 빠르게 지나가더니 안에서 강지찬의 목소리가 들렸다.“지아야? 오빠야. 잘 들어, 길옆에 차 세워놓고 일단 무슨 일이든 오빠와 얘기해.”드론을 힐끗 본 강지아는 입술을 깨물었다.“강지아, 오빠 말 못 들었어? 얼른 길옆에 차 세워. 이러다가 죽는다고! 네가 죽어도 그 사람들은 죄책감 같은 거 느끼지 않을 거야! 만약 나라면 그 사람들보다 더 잘 살 거야! 지아야, 오빠만 믿어. 아무도 널 괴롭히지 못할 거야. 네 새언니를 생각해 봐. 네가 차를 몰고 나왔다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서 배가 아프대.”그 말에 강지아의 표정이 변했다.하지만 이때 도로 상황이 바뀌었다.앞쪽은 커브 길이었고 앞쪽 차를 발견한 강지아는 속도를 줄이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어쩔 수 없이 핸들을 마구 꺾었다.차는 고속도로의 난간을 부수고 해변으로 돌진했다.해변은 아직 미개발지역이라 곳곳이 돌로 뒤덮여 있었다.이미 통제력을 잃은 강지아의 차는 아무리 브레이크를 밟아도 소용이 없었다.‘펑’하는 소리와 함께 차가 거대한 돌멩이를 들이받은 뒤 멈추었다.차의 보닛이 부딪혀 열렸고 차 앞쪽에서 짙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달려와 차 문을 잡아당긴 서원준은 피투성이가 된 채 핸들에 엎드려 꼼짝도 하지 않
호텔에서 뛰어나온 온미정은 길가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는 동하민을 발견했다.“온 선생님 어떡해요. 대표님이 직접 운전하고 가셨는데 이런 상태에서 사고가 날까 봐 걱정이에요.”“X발!”온미정은 참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었다.다행히 백무영이 제때 차를 몰고 와 두 사람은 서둘러 차에 올랐다.강지아가 너무 빨리 운전해 가는 바람에 온미정 일행은 강지아를 뒤쫓아 가지 못했다.호텔은 리조트에 있고 지금 이 시각 도로에 차가 적어 강지아는 신호등을 여러 번 무시하고 바로 고속도로를 탔다.차 뚜껑을 열어 운전하는 강지아는 머릿속에는 온통 호텔 침대에 누워있던 온유한의 모습과 최신애의 웃는 얼굴 뿐이었다.조수석에 있는 휴대전화가 계속 울렸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얼마나 지났을까 파란 스포츠카 한 대가 뒤에서 쫓아왔다.강지아보다 빨리 달리는 그 차는 이내 그녀의 차 옆에서 나란히 달렸다.“바보야, 아침부터 왜 갑자기 폭주를 하고 그래?”고개를 돌려보니 서원준이었다.서원준이 여기에 왜 온 것이지?서원준은 조심스럽게 차를 몰면서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차 운전 솜씨가 생각보다 괜찮네. 여기 경치가 좋은 것 같은데 우리 내려가서 구경할래?”해안가 옆에 있는 고속도로라 풍경이 정말 좋았다. 파란 하늘과 바다는 티끌 하나 없이 깨끗했다.하지만 강지아는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기분이 아니었기에 계속 빠른 속도로 차를 운전했다.“따라오지 마, 꺼져!”강지아가 서원준을 향해 소리쳤지만 서원준은 전혀 개의치 않고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아이고, 왜 이렇게 화가 많이 났을까? 누가 우리 강 선생님을 이렇게 화나게 한 거야? 내가 가서 한 대 패줄까?”서원준이 끈질기게 강지아의 차를 따라붙었다.“말해봐. 말해보라고. 이 오빠가 대신 화풀이를 해줄게.”강지아가 가속페달을 밟자 차가 저 앞으로 쌩하니 달려나갔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장난기 넘치던 서원준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더니 이내 속도를 높여 따라갔다.다행히 도로가 한적해 괜찮았지만 강지아가 이대로 계속
강지아가 뛰쳐나가는 것을 본 온미정은 넋이 나갔다. 강지아를 부른 사람은 온미정인데 이런 일이 생겼으니 앞으로 강지찬과 정유진의 얼굴을 어떻게 본단 말인가?얼른 백무영더러 쫓아가라고 했다.“최신애, 이렇게 비열한 줄 몰랐네!”온미정은 당장이라도 최신애를 씹어먹어 버리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더 이상 그녀의 체면 따위 세워줄 수 없었다.“지아에게 사과하겠다고 속이고 아침까지 직접 만들어 식사에 초대하고 싶다고 하더니, 나와 지아가 바보로 보여요?”온미정은 삿대질하며 말했다.“이 모든 걸 본인이 직접 설계한 거죠?”최신애는 당연히 인정하지 않았다.“미정 씨,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 나와 무슨 상관인데요?”다른 사람들 모두 온미정을 보고 있었다.물론 이런 일이 좀 창피하긴 하지만 임씨 집안으로선 이참에 임유희가 온유한에게 시집갈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었기에 임씨 집안 사람들은 당연히 침묵을 지켰다.충격에 빠진 건 온혁진과 온유한 뿐이었다.결혼한 지 오랜 아내에게 이런 모습이 있다는 것에 온혁진은 정말 놀랐다.온유한도 이런 자신의 어머니가 낯설어 증오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온미정은 당장이라도 최신애의 뺨을 때리고 싶었다.“본인과 상관없다고요?”온미정은 화가 나서 웃음이 났다.“그래요. 앞으로 나 온미정에게는 당신 같은 미치광이 새언니가 없으니 그렇게 알아요. 지아의 말이 맞아요. 최신애, 구역질 나!”온미정은 다른 사람을 생각할 겨를이 없이 강지찬에게 전화를 걸며 밖으로 달려갔다.손가락질받고 욕을 먹은 최신애는 화가 많이 났지만 속으로는 기뻤다.이제 강지아와 그녀의 아들이 헤어진 마당에 욕 몇 마디 듣는 것쯤이야 무슨 대수겠는가?하지만 겉으로는 일부러 태연한 척하며 말했다.“고모가 강씨 가문과 친하니 탓할 수 없죠.”임근우는 한숨을 내쉬며 온혁진에게 말했다.“온 원장님, 우리 둘이 앉아서 얘기 좀 해요.”온혁진은 옆에 있는 아들을 힐끗 바라봤다.온유한은 굳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방을
“유한 씨, 밖에서 누가 문을 두드리는 것 같아요.”욕실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고 다름아닌 임유희의 목소리임을 강지아는 바로 알 수 있었다.침대 위에 있던 온유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잠에서 깼다.자신에게 늘 엄격한 온유한인지라 아침이면 늘 일정한 시간에 일어났다. 평소 이 시간이면 진작 깨어 있어야 했지만 어젯밤 술을 너무 마셔 아직 자고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 부르자 바로 깨어났다.“지아야?”온유한은 습관적으로 안경을 찾았고 침대 협탁을 더듬거렸지만 안경이 없었다.강지아는 앞으로 나와 허리를 굽혀 카펫에 떨어진 안경을 집어 들어 건넸다.온유한은 안경을 쓰고 나서야 뭔가 잘못되었음을 발견했다.방안을 살펴보니 이 방은 그의 방이 아니다. 한쪽 화장대 위에 여자 용품이 가득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카펫에 빈 술병이 없었고 공기 중에서도 고약한 술 냄새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은은한 향수 냄새가 났다.강지아가 그를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지아야!”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온유한은 이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알아챘다.어쨌든 재벌가 자식들에게 이런 일은 결코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이때 욕실 문이 열렸고 목욕 가운을 입고 나온 임유희는 문 앞에 멍하니 서 있는 강지아와 동하민을 발견했다.온유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안색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식사에 초대한 게 아니라 나더러 간통현장을 잡으러 오라고 한 거였네.”강지아가 말하자 동하민이 옆에서 한마디 했다.“대표님, 어쩌면...”어쩌면 뭐?오해일지도 모른다고?동하민도 이런 위로가 가소롭다고 생각했는지 민망한 듯 방을 나섰다.“지아야, 내 말 좀 들어봐.”온유한이 힘겹게 한마디 하며 이불로 몸을 두르고 침대에서 내려와 강지아를 잡으려고 하자 강지아가 그를 피했다.“만지지 마!”“지아야!”“나 만지지 마, 건드리지 마...”강지아는 미칠 지경이었다.“아무 사이 아니라며? 돌아가서 혼인신고부터 하자며? 온유한, 나더러 그 말을 믿으라고?”“그런 게 아니야.
벌써 1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 온유한은 얼마나 마셨는지 모른다.이때 누군가 들어오는 것을 느끼고 애써 눈을 떴지만 술에 취한 탓에 눈앞의 사람이 누구인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꺼져!”“나야, 네 엄마!”최신애는 그를 바닥에서 일으키려 했지만 온유한은 그녀를 뿌리쳤다.“어머니?”“우리 어머니! 하하...”하마터면 그에게 밀쳐 넘어질 뻔한 최신애는 휘청거리다가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다.최신애는 깜짝 놀랐다.“유한아, 왜 그래? 엄마 놀래키지 마.”“꺼져요!”온유한은 원수를 보듯 그녀를 바라봤다.“지아가 나와 헤어지재요. 이제 만족해요? 아니, 당신은 우리 어머니가 아니야!”비틀거리며 최신애를 밀어내려던 온유한은 어눌한 발음으로 소리쳤다.“우리 어머니가 얼마나 착하고 상냥한데! 당신은 악마야. 우리 어머니가 아니야, 꺼져, 꺼져...”무자비하게 쫓겨난 최신애는 조금 전 들은 말을 믿을 수 없었다.취중 진담이라고 했던가, 아들의 마음속에 그녀는 이미 악마로 변해있었다.모두 강지아의 탓이다!강지아만 없었다면 모자 관계가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최신애는 이를 갈았다.온유한은 최신애를 방에서 쫓아낸 뒤 계속하여 술을 마셨다. 옷이 물에 젖어 바깥에까지 술 냄새가 풍겼다.만취한 아들을 바라본 최신애는 순간 한 생각이 떠올랐다.온미정과 백무영의 결혼식 다음 날, 지난밤 온혁진, 온미정과 크게 싸운 최신애는 온미정을 찾아가 잘못했다며 용서를 빌었고 강지아에게 직접 사과하고 싶다고 말했다.그 말에 온미정은 의심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지아한테 사과하겠다고요?”최신애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네, 어젯밤에 그이와 싸운 뒤 방에 가서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내가 확실히 잘못한 것 같아요. 온씨 가문과 강씨 가문이 얼마나 오랜 친분을 쌓아온 집안인데요. 할아버지 때부터 친하게 지낸 사이니 절대 이렇게 쉽게 끝내면 안 되죠. 어제 확실히 내 생각이 짧았어요. 지아와 지찬이 마음을 많이 상하게 한 것 같아 사과하고 싶어요.
강지아가 옷을 갈아입자 동하민이 그녀의 머리를 말려줬다.평소 털털한 성격의 동하민은 머리를 말리면서 한숨을 내쉬었다.“대표님은 가스라이팅 당한 거예요.”조금 전, 강지아와 온유한의 말다툼을 동하민은 똑똑히 들었다.별 반응이 없던 강지아는 한참 만에 말했다.“내가 모를 줄 알아?”“그러면 왜...”“무슨 소용이 있어? 오빠 엄마인데.”이 세상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강씨 가문의 외동딸이 사람들 앞에서 욕을 먹었으니 동하민이었다면 바로 같이 싸웠을 것이다.어른이라는 사람이 하루가 멀다 하고 매일 트집을 잡으니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한편 옆방에 있는 강지찬은 이미 온씨 가문의 투자를 취소하기로 결심했고 앞으로 온씨 가문과 그 어떠한 비즈니스 거래도 하지 않기로 했다.온혁진이 아무리 애원하고 부탁해도 생각을 바꿀 기색이 없었다.“아저씨, 기회는 충분히 드렸어요. 지아가 계속 괴롭힘을 당하니 지아의 유일한 가족으로서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온혁진은 다급한 얼굴로 온유한에게 눈짓하며 한마디 하라고 했다.온유한은 못 들은 척하며 굳은 얼굴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최의현은 뭐라고 하지 않았지만 옆에 있는 한규진은 당연히 강지찬의 편이었다.“온 원장님, 방금 사모님의 행동은 정말이지...”한규진이 난감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어린 지아를 이렇게 대하다니, 강 대표가 화를 낼 수밖에요. 입장 바꿔 생각해 보세요. 누구인들 화가 나지 않겠습니까? 다 집에서 귀하게 자란 자식이에요. 귀하지 않은 자식이 어디 있겠어요?”온혁진도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조금 전, 최금성 등 최신애의 친정 식구들이 없었더라면 그 자리에서 최신애와 싸웠을 것이다.결국 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은 분위기가 안 좋은 상태로 얘기를 마쳤다.강지아는 오빠와 새언니를 따라 집으로 갔고 온씨 일가는 모두 호텔에 남았다.좋은 날 이런 일이 생기자 온미정은 최신애를 볼 때마다 화가 났고 첫날밤도 기대가 되지 않았다.최신애는 임유희의
강지아의 말에 온유한은 어리둥절했다.“지아야, 뭐라고?”강지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농담 아니야. 유한 오빠, 우리 헤...”“안 돼!”온유한이 강지아의 말을 끊었다.“네가 서운한 것은 알아. 하지만 안 돼. 우리 돌아가서 혼인신고 하자. 나 결정했어. 우리 분가해서 살자. 응?”강지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믿지 않았다.최신애도, 온유한도, 그녀 자신도 믿지 않았다.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동하민은 얼른 밖으로 나와 자리를 피해줬다.가운으로 몸을 감싼 채 벽에 기대어 있는 강지아는 상태가 아주 안 좋아 보였다.머리는 축축하고 화장을 지워 안색도 창백했다.입술을 떨고 있는 것을 보니 뭔가 무서운 것 같았다.“지아야, 일단 옷부터 입고 우리 얘기 좀 할까? 응?”온유한이 손을 뻗어 그녀를 다시 품에 안으려고 하자 강지아가 온몸을 떨더니 큰소리로 외쳤다.“나 건드리지 마!”그녀도 이런 자신에게 놀란 듯 자리에 얼어붙었다.온유한의 손도 허공에서 굳어버렸다.의사인 온유한은 직업 특성상 강지아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지아야?”작은 소리로 강지아를 부르자 강지아는 그제야 마음을 가다듬더니 온유한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유한 오빠, 나 방금... 뭐라고 했어?”“괜찮아.”강지아의 어깨에 손을 얹은 온유한은 이번에 그녀가 격한 반응을 하지 않자 천천히 다가가 그녀를 품에 안아다.“우리 지아는 세상에서 제일 착한 아이야.”온유한의 목소리는 어린 지아를 달래듯 유난히 부드러웠다.그러나 강지아는 그의 손을 밀치더니 다시 그에게서 떨어졌다.“난 괜찮으니까 오빠는...”강지아는 밖으로 걸어 나가며 말했다.“임유희 씨나 찾으러 가.”그 말을 들은 온유한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지아야, 그런 말 하지 마. 나와 임유희, 아무 사이 아닌 거 알잖아.”온유한은 설명할 게 너무 많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그 사진들 다... 다...”온유한이 더 이상 뭐라고 할 수 있겠
목욕을 하니 강지아는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자신을 욕조에 가둔 채 누구와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강지찬이 온씨 집안과 끝장을 보기 위해 달려갔을 때 강지아는 이미 자리에 없었고 그곳에는 몇몇 하객들과 표정을 알 수 없는 최신애만 남아 있었다.“온씨 가문이 우리 강씨 일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것 같네요. 앞으로 완전히 인연을 끊죠.”강지찬은 최신애를 싸늘하게 바라봤다.“그다음은 아주머니 차례겠네요.”최신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너, 너 무슨 뜻이야?”강지찬이 코웃음을 친 뒤 정유진을 이끌고 자리를 뜨려 하자 온혁진이 얼른 뒤쫓아갔다.“지찬아, 지찬아. 우리 말로 하자... 이 아저씨의 체면을 봐서라도 앉아서 이야기하자... 화 풀어. 이 사람이 점점 머리가 어떻게 되는 것 같아. 내가 집에 가서 잘 얘기할게...”온미정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최신애 씨!”새언니라고 부르지도 않았다.“온씨 가문이 대체 뭘 잘못했는데 왜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거예요? 오늘은 내 결혼식이에요. 온씨 가문과 내 체면은 안중에도 없어요?”화가 나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최신애는 반박하고 싶었지만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온미정이 계속 화를 내려 하자 백무영이 그녀를 말렸다.“됐어. 그만해.”백무영은 온미정을 품에 안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들 보고 있어. 진정해.”그러고는 이내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다들 술 마시러 가시죠.”최의현과 한규진도 서둘러 상황 수습에 나섰다.한편 사람들이 흩어지는 것을 본 최신애는 화가 나서 몸을 떨었다.“이게 내 탓이야?”그녀는 옆에 있던 임유희를 덥석 잡으며 물었다.“유희야, 네가 말해봐. 도대체 누가 잘못했냐?”임유희가 입을 열기도 전에 옆에서 줄곧 어두운 안색을 하고 있던 온유한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그만 하세요!”최신애는 깜짝 놀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이제 만족해요?”온유한은 눈시울을 붉히며 다시 한번 소리쳤다.“이제 만족하냐고요?”“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