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내 서둘러 말을 보탰다.“아영이가 좋아하는 다른 사람이 누구인지 아직 말해주지 않았단 말이에요. 상대가 성무열이라는 보장은 없잖아요.”“성무열을 제외하고 또 있을까요?”기다란 손가락이 문득 사진을 움켜쥐었는데, 가장자리에서 비롯된 접힌 자국이 마치 거미줄처럼 퍼져나가 유난히 끔찍해 보였다.선우경진은 입만 벙긋했을 뿐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백아영 주변에는 남자가 손에 꼽을 정도였기에 한태윤을 제외하고 제일 친하게 지내는 사람은 성무열뿐이다.하지만 백아영이 대체 언제부터 성무열을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전혀 실마리가 없었다.선우경진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 관자놀이를 문질렀다.“사랑은 원래 서로 경쟁하고, 도전 정신을 불러일으켜야 더 성취감이 있지 않겠어요? 성준 씨, 아니면 페어플레이해 봐요.”이성준의 말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아영은 내 아내예요!”선우경진은 작은 목소리로 반박했다.“전 와이프겠죠...”이성준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선우경진을 향한 싸늘한 시선은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살점을 모조리 도려낼 기세였다.선우경진은 흠칫 떨며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틀린 말도 아닌데 왜 애먼 사람한테 화풀이하냐는 말이다.이혼할 때는 언제이고, 이제 와서 후회해봤자 소용 없지 않은가?비록 속으로는 불만이 가득했지만, 생존 욕구 하나만큼은 투철한지라 잽싸게 위로했다.“당시 성준 씨가 성무열 회사를 공격했을 때 아영이가 어떻게 했는지 기억하죠? 아영은 정이 넘치고 의리를 지키는 아이예요. 설령 50조라는 빚을 짊어지더라도 성씨 일가를 지켜주려고 했잖아요. 만약 지금 성무열을 죽이거나 다치게 한다면 아영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 있는 존재가 되는 꼴밖에 안 나죠. 죽은 사람과 경쟁하면 결론은 정해져 있어요. 즉, 패배일 뿐이죠.”이성준은 분노의 불길이 이글이글 타올라 사진을 구겨버렸다.다음 날, 성무열은 바쁜 일정 속에서도 백아영을 찾아왔다.하지만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덩치가 산만 한 검은 옷의 경호원들에게 가로막혀 발도 들여놓
교외.술병이 바닥에 부딪히면서 산산조각이 났고, 악을 쓰며 고래고래 외치는 백채영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백아영 또 살아났네! 죽지도 않고 돌아왔어! 신약이 출시하면 50조 빚을 갚을뿐더러 명성까지 얻게 되잖아. 앞으로 의약 업계는 물론 상류층에서도 한 자리 차지할 게 뻔한데, 그년을 패가망신하게 한다며? 붙잡아서 제갈연준에게 바쳐 인정받는다더니 고작 이따위 계획을 세운 거야? 못난 놈! 이 쓸모없는 자식 같으니라고.”PC 앞에 앉아 있는 백승구의 표정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싸늘했다.고작 한 달 만에 백아영이 진짜 신약을 개발해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심지어 획기적인 데다가 의학 업계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 만한 약이라니!“반드시 성공하고 말 거예요.”백승구의 자그마한 손이 마우스를 꼭 움켜쥐었고, 표정이 점점 험악하고 사나워졌다.“높이 올라갈수록 떨어지면 더 심하게 다칠 뿐이죠.”...몇 개월 동안 바삐 달려온 백아영은 드디어 여유를 되찾았지만, 오래간만에 찾아온 평화롭고 한가한 시간을 마냥 즐길 수가 없었다.걱정이 태산인 지라 머릿속에는 오로지 한태윤 생각뿐이었다.결국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이성그룹으로 향했다.하늘을 찌를 듯한 건물을 바라보자 마음이 착잡했다. 예전에는 이성준을 찾기 위해서라면 한태윤을 보러 온 지금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다만 이성준이라는 이름이 떠오르는 순간 앞으로 향하던 발걸음이 우뚝 멈추면서 꿈쩍하지 않았다.아직 자기 마음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는데, 대체 무슨 자격으로 한태윤을 만나러 간단 말인가?어쩌면 서로에게 고민과 상처만 안겨줄지 모른다.제 자리에 멍하니 한참을 서 있던 그녀는 어느샌가 뒤꿈치에서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진 탓에 풀이 죽은 모습으로 한숨을 푹 내쉬더니 뒤돌아서 떠나갔다.그러고 나서 묵묵히 걸어가던 와중에 문득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곧이어 화려한 스포츠카 한 대가 서서히 멈춰 섰다. 이내 운전석에 앉은 성무열이 싱글벙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자기, 왜 청승맞
유씨 일가 연회장.유씨 일가 가주인 유문상이 버선발로 레드 카펫까지 마중 나와 이성준울 맞이했고, 입이 귀에 걸리도록 환한 미소를 지었다.“성준 씨께서 이런 누추한 곳에 방문해주시다니, 정말 영광입니다.”이성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들어섰고, 손님들도 연화장 거실에 잇달아 모여들더니 환심을 사기 위해 아부하기 급급했다.“유씨 일가는 운도 좋네요. 무려 이성준 씨가 찾아왔으니 얼마나 체면이 서겠어요? 이번 연회를 개최한 게 헛되지는 않았네요. 이가네와 라이벌이라고 하더니 압승을 거둔 셈이죠.”“그러니까요, 안 그래도 밀릴 뻔했잖아요. 다만 요즘 화제성 1위인 선우 일가 아가씨가 이가네를 찾았다고 하던데, 주목을 한 몸에 받지 않겠어요?”“아무리 화제가 넘친다고 해도 이성준 씨만큼은 아니죠.”“하긴...”유문상은 득의양양한 얼굴로 이성준에게 굽신거리며 비위를 맞춰주기 바빴다.순간, 이성준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이내 싸늘한 시선으로 입을 떠벌리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백아영이 이가네 연회에 참석했다고?”“네? 맞아요.”그 말을 듣자 이성준은 뒤돌아서 자리를 떠났다.어두운 밤하늘 아래 우아하고 훤칠한 뒷모습은 일말의 미련도 없었다.유문상은 제자리에서 넋을 잃고 말았다.“성준 씨?”사람들도 어리둥절한 건 매한가지였다.점점 멀어져가는 이성준의 차를 지켜보던 와중에 누군가 문득 정신을 차리면서 말했다.“설마 아영 씨를 찾으러 간 건 아니겠죠?”“헉! 방금 선우 일가 아가씨가 성준 씨보다 못하다는 말은 취소할게요!”이건 경쟁 대상이 아니라 일방적인 기권에 가까웠다.백아영은 연회장에서 이런 극진한 대접을 처음 받아본다. 사람들이 하나같이 웃는 얼굴로 질세라 몰려와 연신 술을 권하지 않겠는가?사실 술에 관심이 없는 편이라 한태윤이 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렸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코빼기마저 안 보이자 기분이 울적한 나머지 권하는 술을 받아먹기 시작했다.그러다 한 두 잔씩 늘어나더니 어느새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마시게 되었다.다시 정신을
이내 두 팔을 들어 그를 꽉 끌어안았다.이성준은 흠칫 놀라더니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갔고,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애정이 가득했다.그녀에게 자신이 이토록 특별한 존재일 줄은 몰랐다. 설령 술에 취해도 알아볼 정도라니, 그렇다면 정체를 밝히는 순간...이때, 품에 안긴 백아영이 고개를 번쩍 들었고 술에 취해 희미해진 눈동자는 아련하기 그지없었다. 이내 흐리멍덩한 시선으로 빤히 쳐다보면서 물었다.“당신은 누구죠?”이성준은 할 말을 잃었다.흐릿한 시야에 들어온 거라고는 눈에 거슬리는 가면뿐인지라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기 어려웠다.또한, 이 가면 때문에 지금 안고 있는 사람이 한태윤인지, 아니면 이성준인지 분간하기 힘들었다.머릿속이 뒤죽박죽된 탓에 그녀는 기분이 착잡했다. 결국 누구인지 확인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더듬거리며 손을 위로 뻗어 가면을 만지는 순간 단번에 벗겨냈다.드디어 남자의 얼굴을 마주 보게 되다니!분명 익숙해야 맞지만, 어딘가 낯선 느낌이 드는 이목구비를 마주하자 백아영은 넋을 잃고 말았고, 정확히는 실망에 가까웠다.마치 가면 아래에 다른 얼굴이 있어야만 하는 느낌이었다.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한 모습은 이성준의 눈에 마치 낙인처럼 찍혔다.싸늘한 눈빛은 온기를 찾아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성무열이 아니라서 실망한 건가?”화가 난 듯한 차가운 시선에 백아영은 흠칫 놀랐다. 몽롱하던 정신도 벼락 맞은 듯 점점 또렷해지면서 그제야 친숙한 느낌이 서서히 들었다.그녀는 해맑은 아이처럼 웃는 얼굴로 품에 파고들더니 억울한 목소리로 구시렁댔다.“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요.”이성준은 두 눈을 부라리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을 안고 있으면서 머릿속으로 다른 남자를 생각하는 여자가 대체 무슨 자격으로 불만을 토로하냐는 말이다.결국 화가 난 나머지 그녀를 밀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백아영은 중심을 잡기 어려운 듯 찰거머리처럼 딱 달라붙었다.“나 보러 와주면 안 돼요?”이성준은 굳은 얼굴로 손을 뻗어 그녀가 넘어지지 않게 허
백아영은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이때, 성무열이 밖에서 부리나케 뛰어 들어오더니 백아영을 보자마자 큰소리로 물었다.“아영아! 어젯밤에 취하고 누가 널 데려다줬어? 그 사람이 나쁜 짓 한 건 아니지?”말이 끝나기 무섭게 백아영을 꼼꼼히 살피러 다가갔는데, 발걸음을 떼기도 전에 단추가 삐뚤삐뚤 채워진 옷과 뽀얀 목덜미에 생긴 선명한 키스 자국을 발견했다.성무열의 다리가 못 박힌 듯 꼼짝하지 않았고,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곧이어 불같이 화를 내며 고래고래 외쳤다.“누구야?!”안 그래도 숙취 때문에 머리가 아팠는데 백아영은 이제 두통이 생길 지경이었다. 게다가 성무열의 고함에 관자놀이마저 지끈거리는 듯싶었다.성무열에게 조용히 하라고 말하려는 순간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안방 문이 천천히 열리더니 헐렁한 잠옷 차림의 이성준이 슬리퍼를 질질 끌고 안에서 걸어 나왔다.얼굴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더욱이 목소리는 잠에서 덜 깬 나른함이 묻어 있었다.“무슨 일이죠?”말을 마친 그는 불편한 듯 옷깃을 살짝 잡아당겼는데, 헐렁하던 잠옷이 풀어 헤쳐지면서 하얀 피부가 훤히 드러났고 빨갛게 부어오른 손톱자국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그만큼 격정적인 시간을 보냈다는 뜻이지 않은가?백아영의 동공이 커지더니 마치 도화선에 불이 붙은 폭죽이 머릿속에서 터지는 듯싶었고,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대체 어젯밤에 이성을 잃고 무슨 짓을 한 거지?이성준의 모습을 본 성무열은 더는 눈에 뵈는 게 없었고, 화가 난 나머지 이성을 잃었다.“너 이 자식 죽여버릴 거야.”머리끝까지 치민 분노와 ‘여자친구를 빼앗긴 원한’을 안고 이성준을 향해 이를 악물고 주먹을 뻗었다.이성준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칼날처럼 서늘한 눈빛으로 성무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런 저항도, 방어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주먹을 정면으로 받아들였다.이번에 한 번 얻어맞으면 서로 빚진 게 없이 깔끔하게 관계를 정리할 수 있었다.성무열의 주먹이 이성준의 얼굴에 닿기 직전 주먹 바람 때문
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성준의 섬뜩한 눈빛을 마주친 선우경진은 잽싸게 입을 닫았다.정원.백아영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성무열의 두 눈에서 레이저가 뿜어져 나오는 듯싶었다.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 씩씩거리며 호통쳤다.“백아영, 이 착해 빠진 숙맥아. 아무리 한태윤을 좋아한다고 해도 아직 마음을 정한 것도 아니고, 사귀는 사이는 더더욱 아니잖아. 어젯밤에 당한 일은 결국에 여자가 손해라는 거 몰라? 차마 원망하지 못하겠다면 적어도 내가 대신 혼내줄 때 막지는 말았어야지. 여자로서 자존심이자 자긍심마저 잊은 거야?”잔소리 폭격에 백아영은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이내 돌의자에 털썩 앉더니 머리카락을 부여잡고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어젯밤은 내가 먼저 했어.”“뭐라고?!”성무열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백아영이 한숨을 내쉬었다.“그러니까 앞으로 나랑 태윤 씨한테 신경 쓰지 마. 자칫 사이가 틀어진다고 해도 내 탓일 가능성이 크니까.”성무열은 할 말을 잃었다.그가 떠나자 백아영은 피곤한 얼굴로 돌 책상에 엎드렸고, 마음이 바질바질 타들어 갔다.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른 탓에 무슨 얼굴로 한태윤을 마주해야 할지 몰랐다.이때, 남자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해장국 먹으면 속이 좀 괜찮아질 거예요.”순간 백아영은 벌떡 일어나 허리를 꼿꼿이 폈다. 한태윤이 어느샌가 곁에 다가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해장국 한 그릇을 눈앞에서 내려놓았다.시커먼 가면 아래 무참히 유린당해 핏기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창백한 입가에 보기 좋은 다정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백아영은 더더욱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결국 수치심에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었다.“어젯밤... 미안했어요.”이성준은 주먹을 불끈 쥐었고,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어떻게 성무열을 보자마자 사과할 수 있지? 설마 미안할 만한 결정을 이미 내린 건가?“그래서요?”싸늘한 말투는 마치 지옥에서나 들을 법했다.백아영은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한태윤은 자기관리가 철저하고 함부
5일은 마치 백아영에게 내려진 시한부 선고 같았다.만약 스스로 마음을 정리할 수 있다면 벌써 하고도 남았을 것이기에 5일 내내 발버둥 친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하지만 한태윤은 5일 뒤면 남원을 떠난다. 그때 가서 떳떳하게 함께 있지 못하는 이상 돌아가는 그의 모습을 마냥 지켜보는 신세이지 않겠는가?5일 동안 그녀는 무엇을 할 수 있고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이지?결국 고민에 빠진 백아영은 도무지 해결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마스크를 쓰고 몰래 심리상담실을 찾아갔다.심리상담사는 젊은 여성인데 그녀를 보자마자 무슨 일인지 눈치챈 듯 싱긋 웃었다. 그리고 백아영의 얼굴에서 시선을 거두고는 태연하게 차 한 잔 따르고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아영 씨, 걱정하지 마세요. 모든 상담은 비밀리에 진행될 예정이라 아영 씨가 했던 말은 절대 유출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귀에 흘러 들어갈 일도 없어요. 고민이 있으면 저한테 다 털어놓으셔도 돼요.”심리상담사는 기껏해야 20대 초반으로 보였다.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이력이 워낙 화려해서 일찍이 두각을 나타내 동종 업계의 걸출한 인물로 자리 잡았다.다시 말해서 타고난 재능으로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존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그녀를 처음 보는 순간부터 백아영은 왠지 모르게 친근하고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잠깐의 대화를 끝으로 심리상담사의 안내에 따라 백아영도 점점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한태윤 씨를 사랑하는 아영 씨의 마음은 확신에 가까워요.”심리상담사가 결론을 내렸다.“물론 이성적으로도 이성준 씨와 재결합할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죠. 과거에 서로 얼마나 사랑했든 이미 지나간 일에 불과하죠. 아영 씨는 현명한 분이시니까 이성준 씨를 잊는 건 결국 시간문제일 거예요. 하지만 잊기는커녕 한태윤 씨와 접촉할 때마다 저도 모르게 이성준 씨가 생각난다고 했잖아요. 혹시 아영 씨 문제가 아니라 한태윤 씨 때문이라는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백아영은 어안이 벙벙했다. 여태껏 스스로 마음을 정하지 못해서 고민이었
결국은 둘 다 상처받는 꼴이 된다.뚱보 아줌마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고용인 신분이라고 해도 돌아가서 도련님을 설득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심리상담실 창문 앞, 심리상담사와 간호사가 창가에 서서 멀어져가는 백아영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간호사가 의혹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해결된 거 아니었어요?”“해결했지만, 또 완전히 해결된 건 아니야.”심리상담사는 봄바람처럼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또 다른 가능성이 있는데 얘기해주지 않았거든.”간호사가 물었다.“무슨 가능성인데요?”심리상담사가 싱긋 웃었다.“한태윤과 이성준이 동일 인물인 거지.”경악을 금치 못한 간호사가 입을 틀어막았다.“그게 가능해요?”심리상담사의 미소가 한결 부드러워졌다.“그러니까, 황당하지? 하지만 그분이라면 진짜 가능할지도 몰라.”간호사가 물었다.“그분이 이성준 씨라고요?”비록 백아영이 얼굴도 가리고 선글라스로 완전 무장했지만, 상담 과정에서 심보라는 그녀는 물론 두 남자의 신분을 쉽게 유추해냈다.어쨌거나 이성준이라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겠는가?...화창한 아침, 백아영은 문득 전화 한 통을 받았다.상대방은 다름 아닌 허씨 일가 사람이었고, 대뜸 악에 받친 욕설부터 들려왔다.“백아영, 이 배은망덕한 년아! 그때 우리한테서 5조를 빌려 가서 성씨 일가를 구해주고, 나중에 50조를 갚겠다고 한 것도 스스로 약속한 일이잖아! 본인이 저지른 일을 본인이 수습하는 게 당연한데 대체 무슨 낯짝으로 되레 우리 가문에 해를 끼치는 거지?”허씨 일가에게 해를 끼치다니?당최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가는 백아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허씨 일가가 심은아와 공모하여 상환 시기를 앞당기는 바람에 그녀도 빚을 갚으려고 신약 연구에 올인했을 뿐, 허씨 일가를 해치는 일은 하지도 않았다.“신약을 개발해냈다고 이제 눈에 보이는 게 없어? 감히 우리 허씨 일가를 짓밟고 일어서서 꼭대기에 앉아 부귀영화를 누리겠다는 건가? 꿈 깨! 허
분명 맛있는 음식인데도 백아영은 입맛이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몇 입 먹고 난 뒤 배가 아플 정도였다. 그녀는 이성준의 품에 안겨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 이성준은 긴장된 표정으로 그녀를 껴안고 자리에서 크게 화를 냈다. “윌리엄스, 혹시 음식에 독을 넣은거예요?!”윌리엄스는 놀라서 얼굴이 창백해져서 급히 변명했다.“아니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 백아영은 힘겹게 이성준의 손목을 잡고 힘없이 입을 열었다. “윌리엄스가 독을 넣지 않았어. 내가...”“너 왜 그래?” 이성준은 땀을 뻘뻘 흘리며 백아영을 안은 팔뚝을 가볍게 떨었다. 백아영은 몹시 아팠지만 눈길은 부드러웠고 약간 희색을 띠었다. “윌리엄스에게 실례지만, 국왕께 하룻밤 묵을 방을 빌려달라고 부탁해 줘. 그리고 산부인과 의사를 불러줘.”이성준이 눈치를 채지 못하자 백아영은 창백한 얼굴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방금 맥을 짚었는데, 나 임신했어.” 이성준의 동공은 움츠러들었다가 한참 만에 겨우 회복되었다. 찰나의 놀라움 뒤에는 오히려 걱정이 밀려왔다.“임심했는데 통증이 이렇게 심해?”그는 조바심이 나서 윌리엄스에게 의사를 불러오도록 재촉했다. 백아영은 아파서 힘이 없었던 나머지 그의 품에 푹 기대어 있었다. 전에 백아영은 이런 비슷한 환경에서 한 아이가 강제로 유산되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임신한 사실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하고 산에 가서 실랑이를 벌였고, 이로 인해 병세가 심했다. 이 아이를 키우고 싶지만, 고생할까봐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백아영은 가볍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정상적이야.”‘정상이라니?’ 이성준은 다른 여자가 임신을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몰랐지만, 백아영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진작 알았더라면 둘째를 갖지 않았을 것이다. 8개월 후. 산부인과 수술실 문이 열리자 이성준이 급히 달려들였다. 점잖던 남자는 안달복달한 얼굴로 물었다.“제 마누라는 어때요? 무사한가요?”“모녀는 무사합니다.”
집사는 경악했다.“폐하, 그들은 굴러들어 온 복도 차버리니 분명 본때를 보여줘야 하는데, 어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윌리엄스의 안색을 본 집사는 목이 메었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윌리엄스는 조금 전까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던 모습은 사라지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성준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경외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고, 간신히 이빨 사이로 글자를 밀어냈다.이, 이 대표?” 이성준은 경멸하듯 그를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윌리엄 집안의 자식이 확실히 다 컸네.” 윌리엄스의 얼굴이 더 새하얗게 질렸다. 엄청난 두려움이 엄습했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 이성준을 처음 만났다. 그때 이성준은 아직 소년이었지만, 기세가 등등하고, 과감하며, 감히 국왕인 윌리엄스의 아버지와 거래를 논했다. 그 당시 그의 아버지조차도 이성준을 대단하게 여겼다. 심지어 윌리엄스에게 앞으로 절대 이성준의 미움을 사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온 나라의 세력이 처참하게 약해질 것이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부터 이성준은 악마라고 마음에 새겨 두었다. 게다가 윌리엄스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었다. 이성준은 그의 나라에 협조하지 않는 대신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반년 동안 누워계셨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너무 커서 윌리엄스는 일찌감치 이번 생은 절대 H 국에 가지 않기로 했고, 절대로 이성준을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기존의 거래 협력을 모두 점진적으로, 완곡하게 해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항상 악마를 멀리하려고 했지만 이렇게 엮일 줄은 몰랐다. 백아영은 뜻밖에도 이성준의 아내였다! 어떤 생명의 은인 규칙, 첫눈에 반한 사랑 따위는 모두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는 어떤 계획도 할 수 없었다. 단지 자신의 왜 행동을 하기 전에 백아영의 신원을 조사하지 않았는지 후회되었다! 악마를 끌어들여 버렸다... “복을 차버린다나 뭐라나, 말을 그렇게밖에 못해?” 윌리엄스가 집사를 발로 매우 세게 찼
차에 타고 있던 남자들도 일어서더니 기세등등하게 백아영과 이성준을 포위했다. 험상궂은 얼굴의 한 남자가 환영 반 협박 반인 어투로 말했다. “두 분, 차에서 내리십시오.”차 밖에서는 윌리엄스가 활짝 웃으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백아영이 차에서 내리기를 목 빠지게 기다렸다. 곁에 있던 집사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폐하, 궁전의 수비를 모두 강화 완료했습니다. 궁전 주위에 800명의 호위 병사를 추가로 파견했어요. 이분들은 이미 독 안에 든 쥐가 되셔서 도망갈 수 없습니다.” “이혼 변호팀 사람들은 이미 도착하셨고 두 분이 차에서 내리시면 바로 처리할 수 있어요.”“폐하, 곧 미인을 품에 안게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윌리엄스의 입꼬리는 한껏 올라갔다. 산 위에서 백아영의 워낙 강인한 모습에 사람도모자라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지금은 백아영의 대단한 솜씨도, 그녀의 남편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단념할 수밖에 없다. 모두 생명의 은인으로 보고 첫눈에 반하게 만든 백아영 탓이었다. 그는 이 나라의 왕이다. 그가 마음에 드는 한 반드시 그의 것이다. 또한 결혼 후 백아영을 자신의 매력에 매료시켜 점차 이성준을 잊게 할 자신이 충만했다. 윌리엄이 생각을 하던 중, 차 문이 열리고 관광버스에서 백아영이 내렸다. 윌리엄스는 넥타이를 매만지며 그녀를 반겼다.“아가씨, 또 뵙네요.”윌리엄스가 아양을 떠는 모습을 보고 백아영은 입을 다물었다. 백아영의 뒤로 큰 덩치의 이성준이 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머리 위로 이성준은 차갑게 말했다.“내 아내를 뺏으려는 게 너야?” 이성준은 포위망 속에 서 있었다. 다른 사람의 구역에서 그는 독 안에 든 쥐였지만 그는 움츠러들지도 않고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이성준의 기는 모두를 앞질러 버려 마치 모든 것을 장악하는 왕인 것 같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서늘한 몇 글자가 사람을 더욱 섬뜩하게 했다. 집사는 높은 인물들을 많이 보았었기에 즉시 이성준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만 이곳은 그들의 궁전이
윌리엄스는 어안이 벙벙했다.백아영의 솜씨는 정말 놀라웠다. 그녀의 기묘한 침을 꽂는 기술이 더욱 놀라웠다. 보기만 해도 눈이 즐거워지는 백아영의 몸에는 빛이 보였다.그녀의 아름다움은 남달라서 비길 것도 없이 아름다웠다.백아영은 여전히 은침을 손에 들고 윌리엄스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만 좀 건드리세요. 알아들으셨죠?”“저는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윌리엄스의 의욕 넘치는 말은 눈앞으로 가까워져 오는 침에 놀라 목이 메었다. 순식간에 덮쳐 온 위험과 두려움이 그를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게 했다.백아영은 다시 경고했다.“잘 가세요. 바래다 드리지는 않을게요.”젊고 고집스러운 윌리엄스는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위협은 그를 이성적으로 뒤로 물러나 타협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백아영은 바늘을 다시 집어넣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네 부하는 경련을 일으키다가 10여 분 만에 의식을 회복했다. 그들은 서로를 부축하며 몸을 일으키자 멀리 떨어진 곳에 백아영이 보였다. 비록 뒷모습뿐이었지만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폐하, 죄송합니다. 저희가 너무 부족했어요.”윌리엄스는 백아영을 탐욕스럽게 바라보았다.“너희 탓이 아니야. 저 소녀가 너무 강할 뿐이야. 가자. 이제 내려가야지.”부하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 여왕님을... 그냥 이렇게 포기하시려고요?”윌리엄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그럼 내가 지금 뭘 할 수 있겠어?”말이 통하지도 않고 싸워서 이기지도 못하니 부하는 조용히 입을 꾹 닫았다.하지만 윌리엄스는 미소를 띠었다.“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이야.”이성준은 열매 한 봉지 가득 따왔다. 그는 열매를 깨끗이 씻은 뒤 쟁반에 담아 백아영 앞에 대령했다. 하지만 안색이 좋지 않았다.“방금 돌아오는 길에 들었는데 누가 너를 귀찮게 했다면서?”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도리도리 저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문제를 일으켰어.”이성준은 자초지종을 듣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백아영은 잠시 멈칫하더니 웃었다. “아파서 머리까지 다쳤나. 걱정 마세요, 위험했지만 목숨은 건졌어요. 돌아가시면 의사부터 보세요. 잘 케어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에요.”백아영은 진지하게 당부했지만 상대방은 한마디도 귀담아듣지 않았다.백아영이 그만 몸을 일으키려 하자 청년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저 지금 진지해요.”“이것은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규칙이기도 합니다. 생명을 구해준 은인은 반드시 몸으로 갚아야 합니다.”윌리엄스 왕족?백아영은 입헌군주제인 국가에 왔다. 이곳은 현대사회와 어우러졌지만 여전히 왕권을 시행하고 있다. 지금의 왕은 20대 초반의 청년으로 나이는 어리지만 듬직하고 성숙하며 상당한 재주를 가졌다고 전해졌다. 왕은 1년 넘게 국가 정무를 질서 있게 처리했다.다시 이 풋풋하고 고집 센 청년을 본 백아영은 목이 메었다. 왕은 소문과는 좀 다른듯했다.백아영은 청년한테 잡힌 손을 빼냈다.“그냥 눈에 보여서 구해준 거니 고마워하실 필요 없으세요. 그리고 저는 결혼까지 한 여자에요.”“결혼하셨군요...”청년은 매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젊고 예쁜 백아영이 일찍 결혼했으니 흔치는 않은 일이다. 그러나 청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저는 재혼에 대해 편견이 없어요. 남편분과 이혼해도 그대를 왕후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저는 이혼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청년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는 그제야 난처한지 땅바닥에서 일어나 앉아서는 백아영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무슨 복잡한 일을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백아영은 혼자 심각하게 고민하는 청년이 이해가 되지 않아 벌떡 일어나 자리를 뜨려고 했다.곧이어 청년도 벌떡 일어났다. 너무 갑자기 몸을 일으킨 탓인지 몸을 휘청거리자 곁에 있던 남성이 얼른 그를 부축해 주었다.청년은 휘청거리는 몸을 아랑곳하지 않고 백아영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막아섰다. 그의 맑은 눈은 어느새 포악해졌다.“아가씨, 억양을 들어보면 외국인인 것 같네요. 아직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룰에 대해 잘 모
하지만 백아영은 현무가 힘들어할까 봐 차마 너무 많은 프로젝트를 참가하지 못하게 하고 관광지 한 곳만 더 돌고 남원에 돌아갈 생각이었다.이성준은 진지하게 말했다. “출산 장려 정책은 참 옳아.”백아영은 어리둥절했다.“자식이 많아야 집도 떠들썩하고, 현무도 동생이 생기지.”어린 노동자가 하나 더 필요하다는 그의 뜻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이성준은 방긋 웃으며 백아영을 벽에 바짝 붙였다. “여보, 우리 현무에게 동생 만들어주자.”이날 현무와 백아영은 영상통화를 했다. “엄마, 안색이 안 좋아. 어디 아파?”화면 속에서 백아영의 안색은 살짝 하얗게 보였다.하지만 별다르게 불편한 곳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낮에 산에 오르느라 피곤해서 그런가 봐. 괜찮아, 좀 쉬면 괜찮아 질 거야.” “그럼, 내일 일단 산을 내리지 말고 호텔에서 쉬는 거예요?”내일 하산할 예정이었지만 백아영은 단호하게 답했다.“맞아.”그제야 현무는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통화를 끊고 백아영의 이마에 길쭉한 손이 닿았다. 이성준은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정말 괜찮은 거 맞아?”실제로 봤을 때 백아영은 이상이 없어 보였지만 이성준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아. 내가 의사인데 모르겠어?”“하룻밤을 묵어도 좋으니까, 난 네가 좋아하는 열매를 좀 따올게.”이 산의 열매는 특산물이었기에 백아영이 매우 좋아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한 후, 이성준은 혼자 산꼭대기에 가서 열매를 땄고, 백아영은 아름다운 산기슭에 앉아 차를 마시며 아침 풍경을 감상했다. 그녀는 조용히 열매를 기다리고 있었다.기다리는 동안 찻집 안에서 갑자기 시끄러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도와주세요! 여기 도와주세요!”“의사 없어요? 응급처치할 줄 아는 사람 혹시 있어요? 좀 살려주세요! 저의 도련님을 살려주세요...”식당에서 대략 이십 대 초반의 한 청년이 땅에 누워있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
한 달 뒤.인천공항에서 현무는 양복을 차려입고 반듯하게 서서 웃음을 가득 머금고 백아영을 배웅했다.“엄마, 걱정하지 말고 잘 놀다 와요. 여기 일은 저한테 맡겨요.” 현무는 이성준의 아들답게 한 달 만에 기본적인 경영 업무를 배웠고, 심지어 위정을 도울 수 있었다.또한 그는 이성준의 외아들인 만큼 이성그룹의 후계자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는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나이에도 모든 주주와 직원들을 위협하기에 충분했기에 일을 더 쉽게 추진할 수 있었다.게다가 이성준의 한 달간 밑받침을 잘 깔아놓은 덕에 안심하고 현무와 위정에게 이성그룹을 맡길 수 있게 되었다.위정의 불평도 적어졌다. 그는 앞으로 일할 날에 희망이 생긴 것 같았다.“내 아들 최고.”백아영은 현무를 꼭 끌어안고 그의 볼에 쪽 뽀뽀했다.“엄마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영상통화 해. 날마다 기분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누가 감히 너를 괴롭히면, 엄마와 아빠가 바로 날아와서 때려 놓을 거야.”백아영의 품에서 현무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순간 엘리트에서 어린 아기가 되어 자신도 모르게 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하지만 이성준의 말과 백아영의 행복을 생각하며 현무는 마음을 가다듬고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였다.“엄마 걱정하지 마, 외삼촌과 위정 아저씨가 계셔서 아무도 날 못 괴롭혀. 내가 좀 더 크면 내가 엄마를 보호해야 해.”백아영은 감동되어서 감정이 벅차 놀랐다. 현무는 너무 든든한 아들이었다.선우경진은 팔짱을 낀 채 한쪽에 서 있었다. “이씨 가문의 일은 해결됐지만 아직 선우 일가가 남아있다는 것을 잊지 마.”“그리고, 여유가 있으면 새로운 아이템도 많이 생각해 둬.”한 달 동안 그들은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급한 불은 거의 다 껐다. 하지만 의학은 끝이 없고 신약 연구는 더 중요했기에 선우경진은 수시로 백아영을 감시했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다른 곳에서 시야를 넓히고 영감을 얻으면 신약을 개발하는데 더 쉬웠다.이성준은 한쪽에
현무는 계획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지만, 다섯 살짜리 꼬마에게는 좀 시기상조였다. 하지만 이성준은 그런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그러나 이성준의 엄숙한 표정을 보니 바로 계획을 하나 만들어 내야 할 것 같았다.현무는 골똘히 생각했다.“공부를 열심히 해서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고 매일 엄마와 아빠와 함께 있고 싶어요.”“엄마를 기쁘게 해주는 것과 함께 있는 것을 동시에 이룰 수 없어.”“왜요?”현무가 공부해서 잘하고 매일 학교 갔다 오면 자연스레 백아영을 볼 수 있고 그녀도 즐거워하는 게 일상이었다.“너 그동안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잊었어?”현무가 네 살 되기 전까지 백아영은 그의 곁에 있어줄수 없었다. 백아영이 돌아온 후, 비록 온 가족이 드디어 모였지만,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았고 때마다 백아영은 떠나야 했고, 항상 바쁜 일상에 기쁠 때도 있었지만 힘들 때가 더 많았다. 현무는 그런 백아영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엄마는 나와 함께 있어서 기분이 나쁜 거예요?”어린 현무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돌기도 전에 이성준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너 때문이 아니야. 엄마가 놓인 상황 때문이지. 남원에서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일들과 언제든지 생기는 변화 때문이야.”“만약 누군가가 이 짐을 대신 나눠주고, 그런 일들을 완전히 해결해 주고, 엄마가 마음껏 여행을 다닐 수 있게 해준다면 매일 즐거워할 거야.”현무는 어리지만 총명해서 즉시 이성준의 뜻을 알아차렸다.“아빠, 제가 엄마의 일을 나누어서 해도 돼요?”이성준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너는 할 수 있어.”“그런데 힘들 거야. 엄청 힘들 수 있어. 대신에 엄마를 오랫동안 못 볼 텐데, 그래도 할래?”현무는 힘든 것은 두렵지 않지만, 오랫동안 백아영을 볼 수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현무는 머뭇거렸다. 그는 섭섭해서 고뇌했다.“나 그냥 엄마랑 여행 가면 안 돼?”이성준은 자애로운 아버지의 미소를 지었다. “네가 경영대를 일찍 졸업하면 돼.”현무는 지능이 높아서, 월반하는
이성준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 은퇴할 생각이야.”‘역시!’백아영이 머릿속으로만 하던 황당한 추측을 이성준 입으로 직접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믿기지 않았다. 왜 이성준이 갑자기 도망 오려 했던 건지, 그리고 왜 그 큰 짐을 위정과 선우경진한테 내던졋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성준은 그들을 훈련하고 있었다.수단이 좀 잔인했을 뿐이다.“왜 갑자기 은퇴하고 싶은 거야?”백아영은 아직 앞날이 밝은 이성준이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성준은 백아영을 응시하며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쓱쓱 만졌다.“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이성준은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아 수많은 고통을 겪었다.이성준의 괴로운 심정은 눈에 훤히 비쳤다. 그는 사실 오래전부터 은퇴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영아, 앞으로 남은 생 동안 나는 네가 조용하고 평온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은퇴하고 쇼핑센터를 떠나면 원한도 모두 훨훨 털어 버릴 수 있다. 두 사람은 세계 여행하며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된다.백아영의 머릿속은 멍해졌다.백아영은 이성준이 은퇴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자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성준이 계획한 미래에 항상 그녀가 있었다. 그의 미래는 온통 백아영 한사람이었다.백아영은 감동되어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가 환상하던 미래는 정말 기대할 만한 것같았다.“하지만 지금은 내가 선우경진과 위정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 같아.”겨우 보름밖에 안 되었는데, 그들은 고통을 호소하며 참지 못하는데 정말 큰 일이라면 더 감당하기 어려워할 게 뻔했다.이성준은 눈썹을 찡그리며 잠시 사색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현무 이제 다섯 살이니까 남자 다 됐지.”백아영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현무에게 맡길 생각은 아니지?”이성준은 담담하게 되물었다.“안 될 게 뭐가 있어?”‘안 될 게 뭐가 있겠냐고? 현무 이제 겨우 다섯 살인데!’이성준은 여전히 꿈쩍하지 않았다. “내가 다섯 살 때, 이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