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 경찰서로 보내요.”말을 마친 그녀는 고개를 돌려 방을 나섰다.선우철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아영 씨, 저 사람이 한 말은...”“저랑 한태윤 씨는 그저 의사와 환자 사이일 뿐이에요!”백아영이 단호하게 말하고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척했다.하지만 그녀는 저도 모르게 마디가 하얘질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황구렁이와 얘기를 끝내고 그와 비즈니스를 할 프로젝트팀 직원만 남기고 백아영과 이성준은 먼저 제경으로 돌아갔다.헬기에 탄 후, 백아영은 창밖을 보며 멍을 때렸다.그녀의 옆에 앉은 이성준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기분이 안 좋아요?”“아, 아니요.”백아영이 저도 모르게 그의 말에 반박했다.너무 빨리 반박해 그녀조차도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불편했다.그녀는 아예 눈을 감고는 말했다.“피곤하니까 좀 잘게요.”이성준이 얇은 담요를 집어 들어 펴고는 그녀의 몸에 살포시 덮어줬다.점점 가까워지는 남자의 숨결을 느껴져 백아영은 흠칫 몸을 떨었다.그러고는 손을 뻗어 담요를 움켜잡았다.백아영이 자신과 거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해 이성준의 얼굴색은 조금 어두워졌다.“제가 알아서 할게요, 감사해요.”백아영이 담요를 건네받아 자신의 턱 밑까지 감싸고는 몸을 창문 쪽으로 돌려 눈을 감았다.돌아누운 백아영을 보며 이성준은 미간을 찌푸렸다.아무리 그가 전에 백아영과 그렇게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고 해도 이 정도로 소원할 정도는 아니었다.그런데 백아영이 왜 갑자기 거리를 둔단 말인가?같은 시각, 뒷줄에 앉은 정호는 초조한 눈빛으로 백아영을 바라봤다.백아영은 대부분 시간 이성준과 함께였기에 그는 백아영에게 한태윤의 신분에 대해 말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 이제 제경으로 돌아가면 백아영을 만날 기회조차 적어질 것이다.그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 백아영과 단둘이 있을 때 그녀에게 진실을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제경.백아영이 헬기에서 내리자마자 정호가 그녀를 찾았다.“백아영
정호는 감히 찍소리도 못하고 씁쓸한 마음을 애써 억누른 채 대충 얼버무렸다.“이수 촌에서 셋째 도련님을 해코지한 사람은 큰 도련님일 가능성이 크니까 조심하세요.”이는 백아영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정호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는 한태윤에게 다가가 휠체어를 밀고 떠났다.멀어져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정호는 눈살을 찌푸렸고, 초조함이 물밀듯이 밀려왔다.한씨 일가.이수 극장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한 덕에 한태윤은 버림받은 자식에서 갑자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한건우도 약속대로 그에게 부사장 자리를 내주었다.한태윤이 본채에 일 보러 갔을 때 백아영은 별장에 남아서 이곳저곳 둘러보았다.여태껏 주방과 한태윤의 방만 왔다 갔다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낸지라 이곳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갑자기 여유가 생기니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결국,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오랫동안 비워둔 서재에서 책장에 진열된 사진을 발견했다.총 4장으로서 한 장은 가족사진, 다른 한 장은 한태윤과 이나연이 찍은 사진, 그리고 혼자 찍은 사진이 있었다. 한태윤은 한결같이 무표정이며, 기를 펴지 못하는 느낌이 사진을 뚫고 전해질 정도였다.한씨 일가에서 갖은 괴롭힘을 당한 한태윤이 매사에 신중하고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사실은 백아영도 알고 있다.하지만 네 번째는 한태윤과 젊은 여성이 나란히 찍은 사진인데, 여성은 한태윤의 어깨에 기대어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한태윤의 입꼬리도 한껏 올라갔고, 반달처럼 휘어진 눈꼬리는 웃음기가 가득했다.이렇게 행복하고 기쁜 모습은 한씨 일가에서 절대로 볼 수 없었다.사진 속 여성은 그의 소꿉친구이자 약혼녀가 분명할 것이다.사진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백아영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가슴이 먹먹했다. 행여나 싶었던 일이 눈앞에서 입증되는 순간이었다.이세운의 말이 사실이었다....한원그룹, 대표 사무실.이성준을 노려보는 한태성의 모습은 흡사 입을 벌리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한 마리의 독사를 연상케 했
이성준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살짝 올라간 입꼬리는 비아냥거리는 느낌을 물씬 풍겼고, 역시나 그의 예상대로 한원그룹은 문제가 있었다.이제 진짜 재무제표만 손에 넣는다면 한씨 일가는 끝장날 것이다.“회사에 오기 전에 대충 알아봤는데 재무팀은 대부분 한태성이 꽂아 넣은 사람이라서 분명 말 못할 비밀이 숨어 있을 거예요. 진짜 재무제표를 받아내기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죠. 하지만...”백아영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재무팀에 심아린이라는 고참이 있는데 그동안 하도 오래 앉아서 일하다 보니까 허리 디스크와 목 디스크가 생겼죠. 병원도 여러 군데 다녔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고 해요. 그래서 말인데, 저한테 치료받으라고 유도하는 건 어때요?”나중에 침을 놓아준다는 핑계로 재무팀에 당당히 드나들 수 있을 테니까.이성준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했다.“위험하니까 안 돼요.”“일반 사무원이 싸움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무슨 위험한 상황이 있다고 그래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 혼자서도 충분해요.”그녀가 직접 나서면 한태윤은 빠져있어도 되니까 그를 걱정하는 마음에 가슴 졸일 필요가 없었다.“안 돼요!”이성준의 태도는 단호하고 협상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다.눈살을 찌푸리고 강압적으로 말하는 남자의 모습에 백아영은 깜짝 놀랐다. 심지어 눈앞에 있는 사람이 누군가와 비슷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하나같이 막무가내에 억지를 부리지 않는가?그러나 곧바로 엉뚱한 생각을 접고 진지하게 말했다.“제가 외부인이라서 태윤 씨 일에 간섭하면 안 되기 때문에 거절하는 건가요?”“아니요.”“그렇다면 허락해줘요.”백아영은 단호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현재로서는 이게 제일 좋은 방법이에요. 굳이 힘든 길을 갈 필요 있나요?”하지만 말과 달리 백아영은 확신이 없었다.이성준과 말다툼할 때마다 그녀가 아무리 설득해도 이성준은 절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심지어 한태윤과 그녀는 단지 의사와 환자에 불과했다.따라서 그의 의사 결정을 뒤엎을 자신이 별로 없었다.설령 결과
그녀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갑작스러운 변화에 백아영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머릿속으로는 저도 모르게 거부하기 시작했다. 이내 뒤로 몇 걸음 물러나 최대한 멀리 거리를 두었다.“장난이 심하시네요. 당연히 그럴 리가 없죠.”그녀는 말을 마치자 도망치듯 걸어 나갔다.빠른 걸음으로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이성준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의 느낌이 맞는다면 백아영은 자신을 피하고 있었다.멀쩡하다가 왜 갑자기 그를 짐승 취급하면서 도망치기 급급하단 말이지?다음 날 오후 3시, 백아영은 약속 시간에 맞춰 재무팀으로 찾아갔다.재무팀은 보안이 철저한 부서라서 한 층을 통으로 사용했고, 사내 직원이라고 할지언정 함부로 출입할 수 없었다.결국, 심아린이 직접 백아영을 마중 나와 사무실로 안내했다.백아영은 뒤따라 걸으면서 몰래 사무실을 흘끔거렸고, 빠르게 주변 환경을 파악했다.사무실 공간은 넉넉한 편이고, 파티션도 꽤 많았다. 그중에 독립된 사무실은 하나밖에 없었다.“저긴 팀장님 사무실이에요.”심아린이 설명을 보탰고, 목소리에는 부러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저희 팀 원톱인데, 능력도 뛰어나요.”이내 잠깐 머뭇거리더니 낮은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어갔다.“큰 도련님과 사이가 돈독해서 신임을 두둑이 얻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최대한 마주치지 말아요.”마주치지 말라니? 그녀는 다름 아닌 재무팀장을 만나기 위해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어찌 가능하겠는가?“팀장인데 아직도 직접 회계 업무를 봐요?”백아영이 일부러 궁금한 척 물었다.심아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책임감이 강해서 모든 보고서를 직접 정리하고 관리해요. 밤늦게까지 일할 때도 많은데 절대로 다른 사람이 손을 못 대게 하거든요.”다시 말해서 가짜 장부를 만드는 일은 재무팀장만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타깃이 정해지자 백아영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다음 단계는 재무팀장과 접촉할 기회를 만들어 그녀의 사무실에 발을 들이는 것이다.“심아린, 이분이 네가 모셔 온 의사야?”블랙 계
재무팀장은 백아영을 보자마자 적의를 고스란히 드러냈고, 서류를 빼앗아 가다시피 하고는 쫓아내기 바빴다.“이제 그만 가도 돼요.”그냥 가버리면 헛걸음친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서류 꼼꼼히 확인해보시고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세요. 한 번에 대답하고 나서 갈게요.”말을 마친 백아영은 아무렇지 않게 탕비실로 가서 커피 한 잔을 내렸다.거리낌 없이 행동하는 백아영의 모습에 재무팀장은 화가 나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고작 외부인 주제에 대체 무슨 자격으로 서류 내용에 답변한다는 거죠?”백아영은 여유롭게 커피를 내리며 말했다.“오늘부터 부대표님의 비서로 정식 입사했거든요.”비록 실체가 없는 명목상의 직책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재무팀장은 말문이 턱 막혔다.결국 가슴 속으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억누른 채 서류를 넘겼는데, 종이의 펄럭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려 퍼졌다.아마 서류를 확인하고 나면 그녀를 쫓아내려고 할 것이다.비록 백아영은 겉으로 여유가 넘쳤지만, 사실은 잽싸게 커피를 내리고는 책상을 빙 돌아서 재무팀장의 곁으로 걸어갔다.점점 가까워지는 순간 재무팀장은 눈에 띄게 당황하면서 바짝 긴장했다.이내 왼쪽에 잠겨 있는 캐비닛을 의도적으로 가로막았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 다가오지 마세요.”백아영은 무심한 시선으로 캐비닛을 훑어보더니 태연하게 커피를 건넸다.“왜 그렇게 긴장하죠? 설마 말 못 할 비밀이라도 있나요?”재무팀장은 무의식적으로 사무실 의자를 끌어당겨 캐비닛을 뒤로 숨겼다.목적을 달성한 백아영은 커피를 내려놓고 가벼운 마음으로 자리를 떴다.그녀의 예상이 맞는다면 제일 중요한 진짜 보고서는 캐비닛 안에 있을 가능성이 컸다.달빛이 먹구름에 가려진 야심한 밤, 한원그룹 사무실을 밝히던 마지막 불이 꺼지면서 건물 전체가 어둠에 잠겼다.아무도 없는 사무실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이때, 부대표 사무실의 문이 살며시 열리더니 백아영이 안에서 살금살금 걸어 나왔고 이성준이 휠체어 바퀴를 밀면서 그녀의 뒤를 따랐
이 타이밍에서 재무팀장에게 들킨다면 도둑을 잡으려다가 오히려 도둑으로 몰리는 꼴이 된다.한태윤도 어렵게 얻은 부대표 자리를 한순간에 잃고, 어쩌면 더 끔찍한 처지에 놓일지도 모른다.따라서 재무팀장의 눈을 무조건 피해야만 했다.하지만 사람은 숨는다고 해도 한태윤의 휠체어까지 숨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사무실 문이 천천히 열렸다.백아영은 바짝 긴장한 채 점점 커지는 문틈을 바라보며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어둠 속에서 사냥감을 노리는 야수가 입을 쩍 벌리고 그녀를 집어삼킬 듯한 절망감이 물밀듯이 밀려왔다.머릿속으로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그리며 대체 어떻게 빠져나갈지 머리를 굴렸다.쿵!물건이 바닥에 떨어지는 둔탁한 마찰음이 별안간 울려 퍼지더니 문이 열리는 소리를 능가했다.소리가 나는 방향을 따라 재빨리 고개를 돌린 순간 창가에 서서 무언가를 던지고 손을 내려놓는 한태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백아영은 넋을 잃고 말았다. 멀쩡하게 서 있는 남자를 보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왜...?”“읍!”이성준은 성큼성큼 걸어가 그녀의 입을 틀어막더니 문 뒤로 끌고 가서 숨었다.그와 동시에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재무팀장은 안으로 들어서는 대신 입구에 서서 잔뜩 경계하는 눈빛으로 어두컴컴한 사무실을 바라보았다.“누구야?!”백아영은 온몸이 바짝 긴장되면서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곧이어 귓가에 남자의 낮고 감미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괜찮아요.”그녀는 안심하기는커녕 머리부터 발끝까지 얼어붙었다. 두 사람은 문 뒤의 비좁은 공간에서 거의 밀착하다시피 딱 붙어 있었다.피부의 열기와 심장 박동이 고스란히 느껴질 지경이었고, 한약과 상쾌한 향이 어우러진 냄새가 코끝에 맴돌았다.위험천만한 어둠 속에서 모든 감각 기관이 예민해진 탓에 그녀는 심장의 떨림을 주체하지 못하고 페이스를 잃고 말았다.재무팀장은 물어보고 나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빠르게 사무실 안을 훑어보았다. 별다른 인기척이 없자 한걸음 들어서 시선이 닿지
그녀의 착각인가?반면, 이성준은 백아영을 끌고 재무팀을 빠져나와 단숨에 1층까지 내려간 다음 한원그룹을 떠났다.한원그룹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도착하고 나서야 두 사람은 멈춰 섰다.백아영은 숨을 고르며 물었다.“경호원을 미리 대기시킨 거예요?”욕설을 퍼붓던 경호원은 누가 봐도 한태윤이 부른 사람이었다.이성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여유롭게 말했다.“유비무환이라고 하죠.”재무팀장이 사무실 문을 열었을 때 걱정하지 말라고 태연하게 말했던 이유도 단지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짜 대책이 있었기 때문이다.“감탄밖에 나오지 않네요.”백아영은 연신 혀를 내둘렀다.이성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더니 그윽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저한테 반한 건 아니죠?”반하다니?착각하지 말라고 쏘아붙이려던 찰나, 백아영은 문득 아직도 그와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단단하고 커다란 손바닥에서 온기가 느껴졌는데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몽글몽글하던 분위기가 별안간 무겁게 가라앉았다.백아영은 허둥지둥 손을 빼내며 어색하게 그의 시선을 피했다.“택시 부를게요.”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한태윤의 차는 집에 세워두었고, 선우철도 한씨 일가로 돌아갔기에 둘은 택시 타고 이동해야만 했다.텅 빈 손바닥과 피하기 급급한 그녀의 모습을 보자 이성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곧이어 곁으로 다가가 불쑥 말했다.“배고파요.”“집에 가서 죽 끓여줄게요.”“죽 이제 질렸어요. 우리 고기 먹으러 가요.”이성준은 손을 들어 길 건너편에 있는 고깃집을 가리켰고, 마침 맛있는 냄새가 진동했다.벌써 새벽이 되었으니 백아영도 배가 고팠고, 코를 찌르는 먹음직스러운 냄새에 배가 꼬르륵거렸다.고깃집.이성준은 정말 배가 고픈 듯 알아서 주문했다. 하지만 음식이 나오자 전부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메뉴라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심지어 부잣집 식탁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돼지 내장도 있었다.그녀는 의아한 나머지 무의식적으로 물었다.“내가 제일 좋아하는 메
한태성의 사무실.그는 앞에 서 있는 재무팀장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물었다.“요즘 백아영 씨가 당신 사무실에 자주 들락거린다면서?”“도련님, 오해하지 마세요. 부대표님이 백아영을 통해 서류를 전해줬을 뿐입니다. 요즘 따라 절 곤란하게 하는 횟수가 점점 증가하는데... 물론 저도 비협조적으로 대했어요.”그래서 최근에 진행 중인 프로젝트는 추진이 어려웠고 문제가 끊이지 않았다.한태성은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음흉한 눈빛으로 말했다.“백아영이 제 발로 찾아왔으니 선물을 줘야겠군. 당신이 해야 할 일이 있어.”어제저녁에 보고서를 찾는 데 실패했으니 백아영은 계속해서 재무팀을 드나들며 수소문할 수밖에 없었다.백아영은 여느 때처럼 서류를 전달하기 위해 사무실을 찾았고, 재무팀장은 질색하며 그녀를 쫓아내기 급급한 대신 데이터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 생각지도 못한 행동을 보였다.마치 할 말은 없지만 일부러 말 걸기 위한 아주 간단한 질문이었다.백아영은 잔뜩 경계했다.“팀장님, 괜히 빙빙 돌리지 말고 할 말 있으면 그냥 하시죠?”어차피 관계가 틀어진 이상 두 사람 사이에는 가식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재무팀장은 미리 준비한 손님용 물컵을 들어 눈웃음을 지은 채 백아영에게 건넸다.“동료끼리 친하게 지내면 좋잖아요. 그동안 매일 우리 사무실까지 찾아오느라 고생이 많은데 물 좀 드세요.”백아영은 곧바로 뒤로 물러섰다.재무팀장이 독을 건네면 몰라도 물을 주는 건 절대로 불가능했다.잔뜩 경계하며 거리를 두는 백아영을 보자 재무팀장의 얼굴이 살짝 굳었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활짝 웃었다. 그러나 어딘가 믿는 구석이 있는 듯 꿍꿍이로 가득한 미소였다.“경계해도 소용없어요. 당신 끝장내버릴 테니까 도망칠 생각하지 마요.”말을 마친 그녀는 물컵을 옆으로 기울였고, 컴퓨터 본체 위로 물이 쪼르륵 흘러내렸다.이내 파바박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순간 ‘펑’하고 본체에서 폭발음이 들려오더니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한편, 사무실 밖에서 직원이 깜짝 놀라 외쳤다.“
분명 맛있는 음식인데도 백아영은 입맛이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몇 입 먹고 난 뒤 배가 아플 정도였다. 그녀는 이성준의 품에 안겨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 이성준은 긴장된 표정으로 그녀를 껴안고 자리에서 크게 화를 냈다. “윌리엄스, 혹시 음식에 독을 넣은거예요?!”윌리엄스는 놀라서 얼굴이 창백해져서 급히 변명했다.“아니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 백아영은 힘겹게 이성준의 손목을 잡고 힘없이 입을 열었다. “윌리엄스가 독을 넣지 않았어. 내가...”“너 왜 그래?” 이성준은 땀을 뻘뻘 흘리며 백아영을 안은 팔뚝을 가볍게 떨었다. 백아영은 몹시 아팠지만 눈길은 부드러웠고 약간 희색을 띠었다. “윌리엄스에게 실례지만, 국왕께 하룻밤 묵을 방을 빌려달라고 부탁해 줘. 그리고 산부인과 의사를 불러줘.”이성준이 눈치를 채지 못하자 백아영은 창백한 얼굴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방금 맥을 짚었는데, 나 임신했어.” 이성준의 동공은 움츠러들었다가 한참 만에 겨우 회복되었다. 찰나의 놀라움 뒤에는 오히려 걱정이 밀려왔다.“임심했는데 통증이 이렇게 심해?”그는 조바심이 나서 윌리엄스에게 의사를 불러오도록 재촉했다. 백아영은 아파서 힘이 없었던 나머지 그의 품에 푹 기대어 있었다. 전에 백아영은 이런 비슷한 환경에서 한 아이가 강제로 유산되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임신한 사실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하고 산에 가서 실랑이를 벌였고, 이로 인해 병세가 심했다. 이 아이를 키우고 싶지만, 고생할까봐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백아영은 가볍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정상적이야.”‘정상이라니?’ 이성준은 다른 여자가 임신을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몰랐지만, 백아영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진작 알았더라면 둘째를 갖지 않았을 것이다. 8개월 후. 산부인과 수술실 문이 열리자 이성준이 급히 달려들였다. 점잖던 남자는 안달복달한 얼굴로 물었다.“제 마누라는 어때요? 무사한가요?”“모녀는 무사합니다.”
집사는 경악했다.“폐하, 그들은 굴러들어 온 복도 차버리니 분명 본때를 보여줘야 하는데, 어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윌리엄스의 안색을 본 집사는 목이 메었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윌리엄스는 조금 전까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던 모습은 사라지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성준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경외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고, 간신히 이빨 사이로 글자를 밀어냈다.이, 이 대표?” 이성준은 경멸하듯 그를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윌리엄 집안의 자식이 확실히 다 컸네.” 윌리엄스의 얼굴이 더 새하얗게 질렸다. 엄청난 두려움이 엄습했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 이성준을 처음 만났다. 그때 이성준은 아직 소년이었지만, 기세가 등등하고, 과감하며, 감히 국왕인 윌리엄스의 아버지와 거래를 논했다. 그 당시 그의 아버지조차도 이성준을 대단하게 여겼다. 심지어 윌리엄스에게 앞으로 절대 이성준의 미움을 사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온 나라의 세력이 처참하게 약해질 것이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부터 이성준은 악마라고 마음에 새겨 두었다. 게다가 윌리엄스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었다. 이성준은 그의 나라에 협조하지 않는 대신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반년 동안 누워계셨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너무 커서 윌리엄스는 일찌감치 이번 생은 절대 H 국에 가지 않기로 했고, 절대로 이성준을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기존의 거래 협력을 모두 점진적으로, 완곡하게 해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항상 악마를 멀리하려고 했지만 이렇게 엮일 줄은 몰랐다. 백아영은 뜻밖에도 이성준의 아내였다! 어떤 생명의 은인 규칙, 첫눈에 반한 사랑 따위는 모두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는 어떤 계획도 할 수 없었다. 단지 자신의 왜 행동을 하기 전에 백아영의 신원을 조사하지 않았는지 후회되었다! 악마를 끌어들여 버렸다... “복을 차버린다나 뭐라나, 말을 그렇게밖에 못해?” 윌리엄스가 집사를 발로 매우 세게 찼
차에 타고 있던 남자들도 일어서더니 기세등등하게 백아영과 이성준을 포위했다. 험상궂은 얼굴의 한 남자가 환영 반 협박 반인 어투로 말했다. “두 분, 차에서 내리십시오.”차 밖에서는 윌리엄스가 활짝 웃으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백아영이 차에서 내리기를 목 빠지게 기다렸다. 곁에 있던 집사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폐하, 궁전의 수비를 모두 강화 완료했습니다. 궁전 주위에 800명의 호위 병사를 추가로 파견했어요. 이분들은 이미 독 안에 든 쥐가 되셔서 도망갈 수 없습니다.” “이혼 변호팀 사람들은 이미 도착하셨고 두 분이 차에서 내리시면 바로 처리할 수 있어요.”“폐하, 곧 미인을 품에 안게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윌리엄스의 입꼬리는 한껏 올라갔다. 산 위에서 백아영의 워낙 강인한 모습에 사람도모자라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지금은 백아영의 대단한 솜씨도, 그녀의 남편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단념할 수밖에 없다. 모두 생명의 은인으로 보고 첫눈에 반하게 만든 백아영 탓이었다. 그는 이 나라의 왕이다. 그가 마음에 드는 한 반드시 그의 것이다. 또한 결혼 후 백아영을 자신의 매력에 매료시켜 점차 이성준을 잊게 할 자신이 충만했다. 윌리엄이 생각을 하던 중, 차 문이 열리고 관광버스에서 백아영이 내렸다. 윌리엄스는 넥타이를 매만지며 그녀를 반겼다.“아가씨, 또 뵙네요.”윌리엄스가 아양을 떠는 모습을 보고 백아영은 입을 다물었다. 백아영의 뒤로 큰 덩치의 이성준이 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머리 위로 이성준은 차갑게 말했다.“내 아내를 뺏으려는 게 너야?” 이성준은 포위망 속에 서 있었다. 다른 사람의 구역에서 그는 독 안에 든 쥐였지만 그는 움츠러들지도 않고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이성준의 기는 모두를 앞질러 버려 마치 모든 것을 장악하는 왕인 것 같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서늘한 몇 글자가 사람을 더욱 섬뜩하게 했다. 집사는 높은 인물들을 많이 보았었기에 즉시 이성준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만 이곳은 그들의 궁전이
윌리엄스는 어안이 벙벙했다.백아영의 솜씨는 정말 놀라웠다. 그녀의 기묘한 침을 꽂는 기술이 더욱 놀라웠다. 보기만 해도 눈이 즐거워지는 백아영의 몸에는 빛이 보였다.그녀의 아름다움은 남달라서 비길 것도 없이 아름다웠다.백아영은 여전히 은침을 손에 들고 윌리엄스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만 좀 건드리세요. 알아들으셨죠?”“저는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윌리엄스의 의욕 넘치는 말은 눈앞으로 가까워져 오는 침에 놀라 목이 메었다. 순식간에 덮쳐 온 위험과 두려움이 그를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게 했다.백아영은 다시 경고했다.“잘 가세요. 바래다 드리지는 않을게요.”젊고 고집스러운 윌리엄스는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위협은 그를 이성적으로 뒤로 물러나 타협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백아영은 바늘을 다시 집어넣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네 부하는 경련을 일으키다가 10여 분 만에 의식을 회복했다. 그들은 서로를 부축하며 몸을 일으키자 멀리 떨어진 곳에 백아영이 보였다. 비록 뒷모습뿐이었지만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폐하, 죄송합니다. 저희가 너무 부족했어요.”윌리엄스는 백아영을 탐욕스럽게 바라보았다.“너희 탓이 아니야. 저 소녀가 너무 강할 뿐이야. 가자. 이제 내려가야지.”부하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 여왕님을... 그냥 이렇게 포기하시려고요?”윌리엄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그럼 내가 지금 뭘 할 수 있겠어?”말이 통하지도 않고 싸워서 이기지도 못하니 부하는 조용히 입을 꾹 닫았다.하지만 윌리엄스는 미소를 띠었다.“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이야.”이성준은 열매 한 봉지 가득 따왔다. 그는 열매를 깨끗이 씻은 뒤 쟁반에 담아 백아영 앞에 대령했다. 하지만 안색이 좋지 않았다.“방금 돌아오는 길에 들었는데 누가 너를 귀찮게 했다면서?”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도리도리 저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문제를 일으켰어.”이성준은 자초지종을 듣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백아영은 잠시 멈칫하더니 웃었다. “아파서 머리까지 다쳤나. 걱정 마세요, 위험했지만 목숨은 건졌어요. 돌아가시면 의사부터 보세요. 잘 케어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에요.”백아영은 진지하게 당부했지만 상대방은 한마디도 귀담아듣지 않았다.백아영이 그만 몸을 일으키려 하자 청년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저 지금 진지해요.”“이것은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규칙이기도 합니다. 생명을 구해준 은인은 반드시 몸으로 갚아야 합니다.”윌리엄스 왕족?백아영은 입헌군주제인 국가에 왔다. 이곳은 현대사회와 어우러졌지만 여전히 왕권을 시행하고 있다. 지금의 왕은 20대 초반의 청년으로 나이는 어리지만 듬직하고 성숙하며 상당한 재주를 가졌다고 전해졌다. 왕은 1년 넘게 국가 정무를 질서 있게 처리했다.다시 이 풋풋하고 고집 센 청년을 본 백아영은 목이 메었다. 왕은 소문과는 좀 다른듯했다.백아영은 청년한테 잡힌 손을 빼냈다.“그냥 눈에 보여서 구해준 거니 고마워하실 필요 없으세요. 그리고 저는 결혼까지 한 여자에요.”“결혼하셨군요...”청년은 매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젊고 예쁜 백아영이 일찍 결혼했으니 흔치는 않은 일이다. 그러나 청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저는 재혼에 대해 편견이 없어요. 남편분과 이혼해도 그대를 왕후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저는 이혼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청년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는 그제야 난처한지 땅바닥에서 일어나 앉아서는 백아영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무슨 복잡한 일을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백아영은 혼자 심각하게 고민하는 청년이 이해가 되지 않아 벌떡 일어나 자리를 뜨려고 했다.곧이어 청년도 벌떡 일어났다. 너무 갑자기 몸을 일으킨 탓인지 몸을 휘청거리자 곁에 있던 남성이 얼른 그를 부축해 주었다.청년은 휘청거리는 몸을 아랑곳하지 않고 백아영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막아섰다. 그의 맑은 눈은 어느새 포악해졌다.“아가씨, 억양을 들어보면 외국인인 것 같네요. 아직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룰에 대해 잘 모
하지만 백아영은 현무가 힘들어할까 봐 차마 너무 많은 프로젝트를 참가하지 못하게 하고 관광지 한 곳만 더 돌고 남원에 돌아갈 생각이었다.이성준은 진지하게 말했다. “출산 장려 정책은 참 옳아.”백아영은 어리둥절했다.“자식이 많아야 집도 떠들썩하고, 현무도 동생이 생기지.”어린 노동자가 하나 더 필요하다는 그의 뜻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이성준은 방긋 웃으며 백아영을 벽에 바짝 붙였다. “여보, 우리 현무에게 동생 만들어주자.”이날 현무와 백아영은 영상통화를 했다. “엄마, 안색이 안 좋아. 어디 아파?”화면 속에서 백아영의 안색은 살짝 하얗게 보였다.하지만 별다르게 불편한 곳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낮에 산에 오르느라 피곤해서 그런가 봐. 괜찮아, 좀 쉬면 괜찮아 질 거야.” “그럼, 내일 일단 산을 내리지 말고 호텔에서 쉬는 거예요?”내일 하산할 예정이었지만 백아영은 단호하게 답했다.“맞아.”그제야 현무는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통화를 끊고 백아영의 이마에 길쭉한 손이 닿았다. 이성준은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정말 괜찮은 거 맞아?”실제로 봤을 때 백아영은 이상이 없어 보였지만 이성준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아. 내가 의사인데 모르겠어?”“하룻밤을 묵어도 좋으니까, 난 네가 좋아하는 열매를 좀 따올게.”이 산의 열매는 특산물이었기에 백아영이 매우 좋아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한 후, 이성준은 혼자 산꼭대기에 가서 열매를 땄고, 백아영은 아름다운 산기슭에 앉아 차를 마시며 아침 풍경을 감상했다. 그녀는 조용히 열매를 기다리고 있었다.기다리는 동안 찻집 안에서 갑자기 시끄러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도와주세요! 여기 도와주세요!”“의사 없어요? 응급처치할 줄 아는 사람 혹시 있어요? 좀 살려주세요! 저의 도련님을 살려주세요...”식당에서 대략 이십 대 초반의 한 청년이 땅에 누워있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
한 달 뒤.인천공항에서 현무는 양복을 차려입고 반듯하게 서서 웃음을 가득 머금고 백아영을 배웅했다.“엄마, 걱정하지 말고 잘 놀다 와요. 여기 일은 저한테 맡겨요.” 현무는 이성준의 아들답게 한 달 만에 기본적인 경영 업무를 배웠고, 심지어 위정을 도울 수 있었다.또한 그는 이성준의 외아들인 만큼 이성그룹의 후계자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는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나이에도 모든 주주와 직원들을 위협하기에 충분했기에 일을 더 쉽게 추진할 수 있었다.게다가 이성준의 한 달간 밑받침을 잘 깔아놓은 덕에 안심하고 현무와 위정에게 이성그룹을 맡길 수 있게 되었다.위정의 불평도 적어졌다. 그는 앞으로 일할 날에 희망이 생긴 것 같았다.“내 아들 최고.”백아영은 현무를 꼭 끌어안고 그의 볼에 쪽 뽀뽀했다.“엄마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영상통화 해. 날마다 기분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누가 감히 너를 괴롭히면, 엄마와 아빠가 바로 날아와서 때려 놓을 거야.”백아영의 품에서 현무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순간 엘리트에서 어린 아기가 되어 자신도 모르게 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하지만 이성준의 말과 백아영의 행복을 생각하며 현무는 마음을 가다듬고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였다.“엄마 걱정하지 마, 외삼촌과 위정 아저씨가 계셔서 아무도 날 못 괴롭혀. 내가 좀 더 크면 내가 엄마를 보호해야 해.”백아영은 감동되어서 감정이 벅차 놀랐다. 현무는 너무 든든한 아들이었다.선우경진은 팔짱을 낀 채 한쪽에 서 있었다. “이씨 가문의 일은 해결됐지만 아직 선우 일가가 남아있다는 것을 잊지 마.”“그리고, 여유가 있으면 새로운 아이템도 많이 생각해 둬.”한 달 동안 그들은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급한 불은 거의 다 껐다. 하지만 의학은 끝이 없고 신약 연구는 더 중요했기에 선우경진은 수시로 백아영을 감시했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다른 곳에서 시야를 넓히고 영감을 얻으면 신약을 개발하는데 더 쉬웠다.이성준은 한쪽에
현무는 계획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지만, 다섯 살짜리 꼬마에게는 좀 시기상조였다. 하지만 이성준은 그런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그러나 이성준의 엄숙한 표정을 보니 바로 계획을 하나 만들어 내야 할 것 같았다.현무는 골똘히 생각했다.“공부를 열심히 해서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고 매일 엄마와 아빠와 함께 있고 싶어요.”“엄마를 기쁘게 해주는 것과 함께 있는 것을 동시에 이룰 수 없어.”“왜요?”현무가 공부해서 잘하고 매일 학교 갔다 오면 자연스레 백아영을 볼 수 있고 그녀도 즐거워하는 게 일상이었다.“너 그동안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잊었어?”현무가 네 살 되기 전까지 백아영은 그의 곁에 있어줄수 없었다. 백아영이 돌아온 후, 비록 온 가족이 드디어 모였지만,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았고 때마다 백아영은 떠나야 했고, 항상 바쁜 일상에 기쁠 때도 있었지만 힘들 때가 더 많았다. 현무는 그런 백아영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엄마는 나와 함께 있어서 기분이 나쁜 거예요?”어린 현무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돌기도 전에 이성준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너 때문이 아니야. 엄마가 놓인 상황 때문이지. 남원에서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일들과 언제든지 생기는 변화 때문이야.”“만약 누군가가 이 짐을 대신 나눠주고, 그런 일들을 완전히 해결해 주고, 엄마가 마음껏 여행을 다닐 수 있게 해준다면 매일 즐거워할 거야.”현무는 어리지만 총명해서 즉시 이성준의 뜻을 알아차렸다.“아빠, 제가 엄마의 일을 나누어서 해도 돼요?”이성준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너는 할 수 있어.”“그런데 힘들 거야. 엄청 힘들 수 있어. 대신에 엄마를 오랫동안 못 볼 텐데, 그래도 할래?”현무는 힘든 것은 두렵지 않지만, 오랫동안 백아영을 볼 수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현무는 머뭇거렸다. 그는 섭섭해서 고뇌했다.“나 그냥 엄마랑 여행 가면 안 돼?”이성준은 자애로운 아버지의 미소를 지었다. “네가 경영대를 일찍 졸업하면 돼.”현무는 지능이 높아서, 월반하는
이성준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 은퇴할 생각이야.”‘역시!’백아영이 머릿속으로만 하던 황당한 추측을 이성준 입으로 직접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믿기지 않았다. 왜 이성준이 갑자기 도망 오려 했던 건지, 그리고 왜 그 큰 짐을 위정과 선우경진한테 내던졋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성준은 그들을 훈련하고 있었다.수단이 좀 잔인했을 뿐이다.“왜 갑자기 은퇴하고 싶은 거야?”백아영은 아직 앞날이 밝은 이성준이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성준은 백아영을 응시하며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쓱쓱 만졌다.“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이성준은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아 수많은 고통을 겪었다.이성준의 괴로운 심정은 눈에 훤히 비쳤다. 그는 사실 오래전부터 은퇴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영아, 앞으로 남은 생 동안 나는 네가 조용하고 평온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은퇴하고 쇼핑센터를 떠나면 원한도 모두 훨훨 털어 버릴 수 있다. 두 사람은 세계 여행하며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된다.백아영의 머릿속은 멍해졌다.백아영은 이성준이 은퇴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자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성준이 계획한 미래에 항상 그녀가 있었다. 그의 미래는 온통 백아영 한사람이었다.백아영은 감동되어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가 환상하던 미래는 정말 기대할 만한 것같았다.“하지만 지금은 내가 선우경진과 위정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 같아.”겨우 보름밖에 안 되었는데, 그들은 고통을 호소하며 참지 못하는데 정말 큰 일이라면 더 감당하기 어려워할 게 뻔했다.이성준은 눈썹을 찡그리며 잠시 사색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현무 이제 다섯 살이니까 남자 다 됐지.”백아영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현무에게 맡길 생각은 아니지?”이성준은 담담하게 되물었다.“안 될 게 뭐가 있어?”‘안 될 게 뭐가 있겠냐고? 현무 이제 겨우 다섯 살인데!’이성준은 여전히 꿈쩍하지 않았다. “내가 다섯 살 때, 이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