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이어 백아영도 침대 시트의 핏자국을 발견했는데, 선홍빛으로 물든 부분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행여나 싶은 마음이 순간 우습게 느껴질 지경이었다.어젯밤 정말 앤니와 관계했다는 건가?“이건 실수였어.”찰나의 충격을 끝으로 이성준은 냉정함을 되찾았다.그러고 나서 옆에 있던 가운을 몸에 걸치고는 침대에서 내려와 백아영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숙취로 인해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잠겨 있는 듯 허스키했다.“아영아, 신경 쓰지 마. 어젯밤은 그냥 기억 속에서 지워버려. 앞으로 앤니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우리의 관계는 물론 결혼에 영향을 미치는 일은 없어.”이성준의 무덤덤한 태도를 보자 백아영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그에게 원나잇 스탠드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우고 싶으면 지우는 존재란 말인가?하지만 그녀는 그냥 넘어갈 만큼 마음이 넓지 않았다.이성준과 침대에 누워 있는 앤니를 번갈아 보며 어젯밤 두 사람의 모습을 상상하자 백아영은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괴롭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왜...? 성준아, 넌 술에 취해도 의식은 있잖아. 대체 왜... 왜 앤니랑...”눈가에 눈물이 점점 차올랐고, 백아영은 그렁그렁한 눈으로 이성준 바라보았다. 주먹을 너무 꽉 쥔 탓에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듯싶었다.술에 취해 그녀를 어루만지던 손길과 다정한 눈빛이 떠오르자 마치 심장에 비수를 꽂은 듯 극심한 고통이 밀려왔다.결국 가장 행복하던 기억마저 산산조각이 났고, 점점 더럽혀졌다.이성준은 얼굴을 찡그리며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마땅히 해명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이내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 백아영의 손을 잡았다.“어차피 지나간 일이니까 이만 잊어줘. 난 단지 남자라면 당연히 저지를 법한 실수를 저질렀을 뿐이야.”그는 어물쩍 넘어가려고 했다.하지만 변명조차 없는 그를 보자 백아영은 배신감이 물밀듯이 밀려왔다.비록 최악의 상황까지 가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의 행동과 태도에서 어젯밤은 결코 의도치 않은 실수가 아니라 마음 놓
앤니는 침대에서 뛰어내려 그를 부축했다.“오빠, 괜찮...”“꺼져!”이성준은 앤니를 확 밀쳤다. 힘이 어찌나 센지, 그녀는 뒤로 몇 발자국이나 물러선 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시뻘게진 두 눈은 분노가 이글이글 타올랐고, 마치 칼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누구 마음대로 내 침대에 올라오래?”그는 술에 취해도 의식은 절대 잃지 않았다.침대 시트에 묻은 핏자국은 그가 토해낸 것이기에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이성준은 앤니를 건드린 적이 없었다.바닥에 넘어진 앤니는 아프기도 하지만, 버럭 화를 내는 이성준을 보자 순식간에 눈물이 차올랐다.이내 억울한 표정으로 울먹거렸다.“전 단지 성준 오빠를 도와주고 싶었어요. 이게 아영 씨를 단념시키기 위한 가장 빠른 방법이지 않겠어요? 오빠도 결국 연기에 동참했잖아요.”물론 연기에 동참한 건 사실이다. 왜냐하면 ‘바람 피는 현장’을 들킨 이상 해명하면 할수록 점점 산으로 갈 게 뻔했기에 어쩔 수 없이 시인한 척했을 뿐이다.지금까지 이성준이 마음만 먹는다면 불륜 현장을 조작할 기회는 수도 없이 많았지만, 결코 이런 방식으로 백아영에게 상처를 주거나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고 싶지 않았다.이성준은 손등으로 입가에 묻은 피를 닦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극도로 차갑고 지독하게 날카로운 눈빛으로 앤니를 노려보았다.“제멋대로 행동했으니 대가는 치러야지.”...백아영은 비틀거리며 선우 일가로 돌아갔다.정원에 들어서자 예쁘게 꾸며진 대문, 그리고 곳곳에 걸려있는 형형색색의 가랜드와 풍선 때문에 경사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모레면 그녀는 이성준과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오늘은 이성준이 자신을 위해 맞춤 제작한 웨딩드레스를 피팅해보는 날이자 드디어 화해하는 날이기도 했다.하지만 지금은...백아영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결국 천천히 다가가 대문의 장식품을 하나하나씩 뜯었다.덕분에 그녀의 머릿속을 차지한 남자의 존재도 점점 잊히는 것 같았다.“아영아, 지금 뭐 하는 거
“종일 울더니 아직 나올 기미가 안 보이네요.”선우경진의 목소리가 잔뜩 가라앉았고, 걱정이 가득했다.옆에 서 있던 이성준의 잘생긴 얼굴도 창백하고 초췌했으며, 입가에 수염이 덥수룩했다.사실 어제는 그에게도 힘든 하루였다.그는 진지한 눈빛으로 백아영의 방을 바라보았고, 갈라진 목소리는 귀에 거슬릴 지경이었다.“아영을 위해서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요?”“더 매몰차게 대해줘요.”선우경진은 한동안 침묵을 유지하더니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작별 인사라고 생각하고...”오늘은 백아영과 이성준의 결혼식이 있는 날이다.또한, 이성준에게 남은 마지막 날이기도 했다.이성준의 두 눈에 고통으로 가득했고,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결국 한참이 지나서야 나지막이 대답했다.“그래요.”“똑똑똑.”조심스레 노크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선우경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영아, 성준 씨가 왔는데 너한테 할 말이 있대.”불이 꺼진 방 안에 앉아 있는 백아영은 소파에서 베개를 끌어안고 몸을 잔뜩 웅크렸다.두 눈은 호두처럼 퉁퉁 부었는데, 겨우 멈춘 눈물이 이성준이라는 이름을 듣자 또다시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이내 심장이 뜯기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그녀는 벼랑 끝에 내몰린 심정으로 귀를 틀어막았다.“가라고 해요!”“알았어, 오빠가 돌려보내고 올게.”선우경진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발소리가 다시 들려오더니 다급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아영아, 나야. 문 열어!”남자의 목소리를 듣자 백아영은 더욱 괴로운 나머지 귀를 꽉 틀어막았다.두 사람 사이에 무슨 할 말이 필요하다고 굳이 찾아온단 말이지?이성준은 문을 한참 두드리고 나서야 멈추었다. 하지만 순순히 돌아갈 줄 알았던 백아영의 예상과 달리 곧이어 ‘쾅’하는 굉음과 함께 문을 박차고 방으로 들어섰다.입구에 서 있는 남자는 짜증이 제대로 난 듯 무시무시한 기운을 풍겼다.깜짝 놀란 백아영은 화가 나서 울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호통쳤다.“꼴 보기 싫으니까 나가!”
고작 술에 취해 실수한 거라니?어떻게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을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말하지?백아영은 어이가 없었다.“그래, 내가 고집이 세서 생떼 부린다고 생각해. 결혼식은 취소하고 더는 찾아오지 마.”“백아영!”이성준도 화가 난 듯 목소리가 짐짓 엄해졌다.“네가 민우진과 한 침대에서 뒹굴며 꼭 껴안고 하룻밤을 잤을 때 내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도 뭐라 하지 않았잖아. 굳이...”짝!뺨을 때리는 소리가 갑자기 울려 퍼졌다.허공에 멈춘 백아영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고, 두 눈에 눈물이 핑 돌았지만 끝내 흘러내리지 않았다.수치심과 분노가 뒤섞이면서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성준을 바라보았다. 상식을 뛰어넘는 말에 충격을 금치 못했다.그날 밤 민우진에게 겁탈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고통스러운 경험을 이런 식으로 생각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겉으로는 쿨한 척해도 사실은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니?“이성준.”백아영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가냘픈 목소리는 힘이 없었고, 온통 절망으로 가득했다.“우린 정말... 아니야.”고개가 돌아간 이성준의 눈에 분노가 이글이글 타올랐다.워낙 신분이 높은 사람인지라 태어나서 뺨을 맞아본 적이 없었다.다정하던 표정은 점점 굳어지더니 인내심도 완전히 바닥났다.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선 이성준은 그녀를 위에서 내려다보며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백아영, 후회하지 마.”마치 처음 만났을 때처럼 무심하고 소외감이 들었으며, 낯설었다.순간 전신을 감싼 냉기 때문에 백아영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돋았다. 눈앞의 남자는 분명 미친 듯이 사랑하고 그리워하던 사람이지만, 지금은 생소하게만 느껴졌다.그나마 가슴속에 남아 있던 마지막 애틋함마저 한순간에 사라졌다.이성준을 바라보는 백아영은 이제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다시는 만나지 말자.”이성준은 이 한마디를 끝으로 미련 없이 뒤돌아서 떠났다.커다란 뒷모습이 점점 멀어져갔고, 매정할 정도로 단호했다.백아영은 소파에 앉아 활짝 열린 방문을
이원의 오프라인 경매는 6개월마다 한 번씩 열린다.개최 위치가 매번 다르고 경매품도 정해진 건 아니지만 항상 좋은 물건들이 올라온 탓에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늘 분위기가 후끈했다.이번 경매는 바다 위의 크루즈에서 개최되었고 인원 제한이 걸려있어 표를 구하는 건 하늘의 별 따기였다. 막판에 가기로 결정한 백아영은 수많은 인맥을 동원하여 거액의 돈을 지불하면서 겨우 입장권 티켓 하나를 손에 넣었다.선우경진은 유일한 티켓을 바라봤다.“아영아, 오프라인 경매는 별의별 인간들이 다 있어서 너무 위험하니까 내가 갈게. 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백아영은 고개를 저었다.“경매품이 뭔지도 모르고 어떤 연구를 할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제가 가는 게 훨씬 나아요. 오빠,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선우경진의 의술은 백아영만큼 뛰어나지 않았기에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미간을 찌푸린 채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긴 그는 결심한 듯 걱정스레 백아영을 바라보며 당부했다.“은침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고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 내가 바로 달려갈게. 그리고 이번 크루즈 담당자 문성훈은 토박이 지역 건달이래. 규칙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무자비한 인간이니까 기분 나쁜 일 있어도 최대한 꾹 참고 될수록 엮이지 마.”백아영은 어이가 없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제가 말썽꾸러기처럼 보여요? 오프라인 경매일뿐이잖아요. 알겠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요. 3일 후에 무사히 돌아올게요.”백아영은 티켓을 손에 들고 부두를 향해 걸어갔다.그시각 부두는 이미 줄을 서서 인산인해를 이루며 떠들썩했다.백아영도 자연스레 합류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차례가 되었다. 그러나 티켓을 건넸지만 입구를 지키고 있던 두 남자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그들은 의미심장하게 백아영을 바라보더니 경박한 시선으로 위아래 마구 훑어보았다.“청순하네. 역시 보스가 한눈에 반한 데는 이유가 있었어.”“아가씨는 참 운이 좋네요. 이쪽으로 가서 저희 보스랑 술 한잔해요.”말을 마친 그들은 다
말하던 그들은 갑자기 백아영을 내쫓기 시작했다.티켓을 받았으면서 시종일관 모르쇠를 주장하는 그들의 뻔뻔스럽고 염치없는 행동에 혀를 내둘렀다.노심초사해서 겨우 얻은 티켓인데 이대로 입구에 가로막혀 헛걸음할 수는 없었다.50조의 빚더미를 생각하면 골치가 아팠지만 애써 정신을 붙잡고 논리정연하게 반박했다.“CCTV 돌려봐요. 그럼 줬는지 안 줬는지 알겠죠.”“우리가 티켓을 받고 모른척할 리가 없잖아. 당신 소란 피우러 온 거지?”“보스 구역에서 말썽을 피우다니 죽고 싶어 환장했어? 당장 꺼져. 안 그러면 바다에 던져버릴 거야.”억지 부리는 두 사람의 모습에 백아영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바로 그때 그녀의 뒤에서 나지막한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이분 티켓 저한테 있어요.”처음 들어보는 낯선 목소리였지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감정이 밀려왔다.고개를 돌려보니 휠체어에 앉아있는 남자가 보였다.얼굴 전체를 가리는 ‘악마’ 가면에 검은 수트를 입은 그는 휠체어에 앉아 범접할 수 없는 강한 아우라와 카리스마를 풍겼다.그의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에는 티켓 두 장이 있었다.“이제 들어가도 되죠?”노란 머리 문지기는 오지랖을 부리는 사람을 제일 싫어했다. 그러나 가면 아래 남자의 싸늘한 시선을 보자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지며 왠지 모를 두려움이 밀려왔다.이 바닥에서 긴 시간 지내다 보면 어느 정도 분별력이 생긴다. 건드릴 수 없는 상대인 걸 알아차린 순간 한발 물러서는 게 상책이다.“됩니다.”노란 머리는 기분 나쁜 듯 백아영을 째려보며 문을 열었고 남자도 휠체어를 움직여 안으로 들어갔다.뒤따라 들어간 백아영은 입구에서 멀리 떨어진 후에야 감사 인사를 전했다.“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티켓값은 계좌로 이체해 드릴까요?”‘악마’ 가면을 쓴 남자는 깊은 눈빛으로 백아영을 바라보더니 곧바로 싸늘하게 변했다.그는 진지하게 말했다.“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티켓이 아니죠. 백아영 씨, 전 등가 교환을 원합니다.”남자는 백아영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남자는 미련 가득한 눈빛으로 백아영을 바라보더니 곧바로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차가운 모습으로 변했다.“괜찮습니다. 장애가 있는 건 맞지만 충분히 혼자 움직일 수 있습니다. 약재 감식이 필요할 때 찾아올 테니 다른 시간에는 서로 마주치지 않았으면 합니다.”말을 마친 남자는 휠체어를 움직이며 방으로 들어갔다.방문이 닫히자 백아영은 세상과 단절된 듯한 기분이 들었고 마치 주인에게 버림받은 듯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느낌에 마음이 불편했다. 그녀는 우두커니 밖에 서 있었다.서로 모르는 사이에 싸늘하게 대하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같은 시각 방으로 들어온 남자는 문이 닫히자마자 가면을 벗었고 ‘쿨럭’하며 피를 토했다.정신이 피폐해지고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고통에 사로잡힌 남자는 휠체어에서 떨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가면에 감춰진 그의 창백한 얼굴은 유난히 잘생겼는데 이성준이다! 백아영과 헤어진 후 그는 피를 토하며 의식을 잃었고 깨어나서는 서 있지 못할 정도로 몸이 쇠약해져 휠체어에 의지해야만 했다.오래 버티지 못할듯하다.이성준은 손수건으로 천천히 입가의 피를 닦은 후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전화가 연결되자마자 불안에 떨며 걱정하는 위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사장님, 지금 괜찮으십니까? 몸은 어때요? 버틸만합니까?”위정은 이성준과 함께 크루즈에 올라 시시각각 그를 돌볼 계획이었다.그러나 탑승 전 예상치 못한 상황이 일어났고, 백아영이 괴롭힘을 당하는 걸 지켜볼 수 없었던 이성준은 망설임 없이 위정의 표를 건네줬다.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다.이성준은 목이 잠긴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문성훈한테 경고해. 다시 한번 백아영 건드린 순간 죽여버릴 거라고!”이 지경에 이르러도 온통 백아영 걱정뿐인 그의 모습에 위정은 기분이 착잡했다.“알겠습니다. 사장님, 몸은...”“괜찮아.”전화를 끊은 이성준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위정이 전화를 끊자마자 앤니가 급히 달려오며 소리쳤다.“어떻게 성준
크루즈에서 하룻밤을 잔 백아영은 경매에 참석하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났다.그녀는 문을 열고 무의식적으로 옆방을 바라봤다.휠체어를 탄 남자...곁에서 돌봐줄 사람이 없어 걱정스러운 마음에 그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무뚝뚝하게 거절하는 모습이 떠오르면서 자리에 얼어붙었다.거동이 불편하더라도 굳이 다른 사람의 일에 참견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의 싸늘한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뒤숭숭한 마음을 억누른 후, 백아영은 마침내 걸음을 옮겼다.경매는 총 3일간 진행되는데 첫날과 둘째 날의 경매품은 비교적 평범하고 간혹 좋은 물건이 나타난다.백아영은 하루 종일 자리를 지켰지만 마음에 드는 물건이 없어 결국 빈손으로 돌아갔다.뻐근한 어깨를 두드리며 방으로 걸어가다가 익숙한 노란 머리에게 가로막혔는데 크루즈 탑승 전 그녀를 난처하게 만들었던 문지기 두 명이었다.백아영은 미간을 찌푸린 채 잔뜩 경계하며 은침을 만졌다.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가만두지 않는다.“백아영 씨, 해치려는 의도는 없으니 긴장 안 하셔도 됩니다.”어깨에 호랑이 문신을 한 중년 남성이 미소를 지으며 걸어오자 노란 머리 문지기 두 명은 그에게 길을 비켜주며 깍듯하게 뒤로 물러섰다.“부하들이 절 위해서 이쁜 여자를 찾고 있었는데 아영 씨가 대단하신 분인 줄도 모르고 무례하게 행동한 것 같네요.”중년 남성이 세게 걷어차자 노란 머리 문지기들은 찍소리도 못한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사과하러 왔습니다.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보아하니 이 중년 남성이 문성훈인 듯하다.백아영은 이해가 안 되는듯 의심스러운 눈길로 그들을 바라봤다. 선우 일가 후계자 신분이 대단한 건 맞지만 지역 건달에게 먹힐 만큼 위압적인 존재가 아니라서 갑작스러운 그들의 태세 전환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러나 백아영은 아무 내색도 하지 않은 채 태연하게 말했다.“이 사람들이 다시 찾아오지 않는다면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갈게요.”“너그럽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분명 맛있는 음식인데도 백아영은 입맛이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몇 입 먹고 난 뒤 배가 아플 정도였다. 그녀는 이성준의 품에 안겨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 이성준은 긴장된 표정으로 그녀를 껴안고 자리에서 크게 화를 냈다. “윌리엄스, 혹시 음식에 독을 넣은거예요?!”윌리엄스는 놀라서 얼굴이 창백해져서 급히 변명했다.“아니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 백아영은 힘겹게 이성준의 손목을 잡고 힘없이 입을 열었다. “윌리엄스가 독을 넣지 않았어. 내가...”“너 왜 그래?” 이성준은 땀을 뻘뻘 흘리며 백아영을 안은 팔뚝을 가볍게 떨었다. 백아영은 몹시 아팠지만 눈길은 부드러웠고 약간 희색을 띠었다. “윌리엄스에게 실례지만, 국왕께 하룻밤 묵을 방을 빌려달라고 부탁해 줘. 그리고 산부인과 의사를 불러줘.”이성준이 눈치를 채지 못하자 백아영은 창백한 얼굴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방금 맥을 짚었는데, 나 임신했어.” 이성준의 동공은 움츠러들었다가 한참 만에 겨우 회복되었다. 찰나의 놀라움 뒤에는 오히려 걱정이 밀려왔다.“임심했는데 통증이 이렇게 심해?”그는 조바심이 나서 윌리엄스에게 의사를 불러오도록 재촉했다. 백아영은 아파서 힘이 없었던 나머지 그의 품에 푹 기대어 있었다. 전에 백아영은 이런 비슷한 환경에서 한 아이가 강제로 유산되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임신한 사실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하고 산에 가서 실랑이를 벌였고, 이로 인해 병세가 심했다. 이 아이를 키우고 싶지만, 고생할까봐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백아영은 가볍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정상적이야.”‘정상이라니?’ 이성준은 다른 여자가 임신을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몰랐지만, 백아영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진작 알았더라면 둘째를 갖지 않았을 것이다. 8개월 후. 산부인과 수술실 문이 열리자 이성준이 급히 달려들였다. 점잖던 남자는 안달복달한 얼굴로 물었다.“제 마누라는 어때요? 무사한가요?”“모녀는 무사합니다.”
집사는 경악했다.“폐하, 그들은 굴러들어 온 복도 차버리니 분명 본때를 보여줘야 하는데, 어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윌리엄스의 안색을 본 집사는 목이 메었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윌리엄스는 조금 전까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던 모습은 사라지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성준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경외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고, 간신히 이빨 사이로 글자를 밀어냈다.이, 이 대표?” 이성준은 경멸하듯 그를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윌리엄 집안의 자식이 확실히 다 컸네.” 윌리엄스의 얼굴이 더 새하얗게 질렸다. 엄청난 두려움이 엄습했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 이성준을 처음 만났다. 그때 이성준은 아직 소년이었지만, 기세가 등등하고, 과감하며, 감히 국왕인 윌리엄스의 아버지와 거래를 논했다. 그 당시 그의 아버지조차도 이성준을 대단하게 여겼다. 심지어 윌리엄스에게 앞으로 절대 이성준의 미움을 사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온 나라의 세력이 처참하게 약해질 것이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부터 이성준은 악마라고 마음에 새겨 두었다. 게다가 윌리엄스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었다. 이성준은 그의 나라에 협조하지 않는 대신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반년 동안 누워계셨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너무 커서 윌리엄스는 일찌감치 이번 생은 절대 H 국에 가지 않기로 했고, 절대로 이성준을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기존의 거래 협력을 모두 점진적으로, 완곡하게 해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항상 악마를 멀리하려고 했지만 이렇게 엮일 줄은 몰랐다. 백아영은 뜻밖에도 이성준의 아내였다! 어떤 생명의 은인 규칙, 첫눈에 반한 사랑 따위는 모두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는 어떤 계획도 할 수 없었다. 단지 자신의 왜 행동을 하기 전에 백아영의 신원을 조사하지 않았는지 후회되었다! 악마를 끌어들여 버렸다... “복을 차버린다나 뭐라나, 말을 그렇게밖에 못해?” 윌리엄스가 집사를 발로 매우 세게 찼
차에 타고 있던 남자들도 일어서더니 기세등등하게 백아영과 이성준을 포위했다. 험상궂은 얼굴의 한 남자가 환영 반 협박 반인 어투로 말했다. “두 분, 차에서 내리십시오.”차 밖에서는 윌리엄스가 활짝 웃으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백아영이 차에서 내리기를 목 빠지게 기다렸다. 곁에 있던 집사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폐하, 궁전의 수비를 모두 강화 완료했습니다. 궁전 주위에 800명의 호위 병사를 추가로 파견했어요. 이분들은 이미 독 안에 든 쥐가 되셔서 도망갈 수 없습니다.” “이혼 변호팀 사람들은 이미 도착하셨고 두 분이 차에서 내리시면 바로 처리할 수 있어요.”“폐하, 곧 미인을 품에 안게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윌리엄스의 입꼬리는 한껏 올라갔다. 산 위에서 백아영의 워낙 강인한 모습에 사람도모자라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지금은 백아영의 대단한 솜씨도, 그녀의 남편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단념할 수밖에 없다. 모두 생명의 은인으로 보고 첫눈에 반하게 만든 백아영 탓이었다. 그는 이 나라의 왕이다. 그가 마음에 드는 한 반드시 그의 것이다. 또한 결혼 후 백아영을 자신의 매력에 매료시켜 점차 이성준을 잊게 할 자신이 충만했다. 윌리엄이 생각을 하던 중, 차 문이 열리고 관광버스에서 백아영이 내렸다. 윌리엄스는 넥타이를 매만지며 그녀를 반겼다.“아가씨, 또 뵙네요.”윌리엄스가 아양을 떠는 모습을 보고 백아영은 입을 다물었다. 백아영의 뒤로 큰 덩치의 이성준이 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머리 위로 이성준은 차갑게 말했다.“내 아내를 뺏으려는 게 너야?” 이성준은 포위망 속에 서 있었다. 다른 사람의 구역에서 그는 독 안에 든 쥐였지만 그는 움츠러들지도 않고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이성준의 기는 모두를 앞질러 버려 마치 모든 것을 장악하는 왕인 것 같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서늘한 몇 글자가 사람을 더욱 섬뜩하게 했다. 집사는 높은 인물들을 많이 보았었기에 즉시 이성준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만 이곳은 그들의 궁전이
윌리엄스는 어안이 벙벙했다.백아영의 솜씨는 정말 놀라웠다. 그녀의 기묘한 침을 꽂는 기술이 더욱 놀라웠다. 보기만 해도 눈이 즐거워지는 백아영의 몸에는 빛이 보였다.그녀의 아름다움은 남달라서 비길 것도 없이 아름다웠다.백아영은 여전히 은침을 손에 들고 윌리엄스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만 좀 건드리세요. 알아들으셨죠?”“저는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윌리엄스의 의욕 넘치는 말은 눈앞으로 가까워져 오는 침에 놀라 목이 메었다. 순식간에 덮쳐 온 위험과 두려움이 그를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게 했다.백아영은 다시 경고했다.“잘 가세요. 바래다 드리지는 않을게요.”젊고 고집스러운 윌리엄스는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위협은 그를 이성적으로 뒤로 물러나 타협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백아영은 바늘을 다시 집어넣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네 부하는 경련을 일으키다가 10여 분 만에 의식을 회복했다. 그들은 서로를 부축하며 몸을 일으키자 멀리 떨어진 곳에 백아영이 보였다. 비록 뒷모습뿐이었지만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폐하, 죄송합니다. 저희가 너무 부족했어요.”윌리엄스는 백아영을 탐욕스럽게 바라보았다.“너희 탓이 아니야. 저 소녀가 너무 강할 뿐이야. 가자. 이제 내려가야지.”부하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 여왕님을... 그냥 이렇게 포기하시려고요?”윌리엄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그럼 내가 지금 뭘 할 수 있겠어?”말이 통하지도 않고 싸워서 이기지도 못하니 부하는 조용히 입을 꾹 닫았다.하지만 윌리엄스는 미소를 띠었다.“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이야.”이성준은 열매 한 봉지 가득 따왔다. 그는 열매를 깨끗이 씻은 뒤 쟁반에 담아 백아영 앞에 대령했다. 하지만 안색이 좋지 않았다.“방금 돌아오는 길에 들었는데 누가 너를 귀찮게 했다면서?”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도리도리 저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문제를 일으켰어.”이성준은 자초지종을 듣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백아영은 잠시 멈칫하더니 웃었다. “아파서 머리까지 다쳤나. 걱정 마세요, 위험했지만 목숨은 건졌어요. 돌아가시면 의사부터 보세요. 잘 케어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에요.”백아영은 진지하게 당부했지만 상대방은 한마디도 귀담아듣지 않았다.백아영이 그만 몸을 일으키려 하자 청년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저 지금 진지해요.”“이것은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규칙이기도 합니다. 생명을 구해준 은인은 반드시 몸으로 갚아야 합니다.”윌리엄스 왕족?백아영은 입헌군주제인 국가에 왔다. 이곳은 현대사회와 어우러졌지만 여전히 왕권을 시행하고 있다. 지금의 왕은 20대 초반의 청년으로 나이는 어리지만 듬직하고 성숙하며 상당한 재주를 가졌다고 전해졌다. 왕은 1년 넘게 국가 정무를 질서 있게 처리했다.다시 이 풋풋하고 고집 센 청년을 본 백아영은 목이 메었다. 왕은 소문과는 좀 다른듯했다.백아영은 청년한테 잡힌 손을 빼냈다.“그냥 눈에 보여서 구해준 거니 고마워하실 필요 없으세요. 그리고 저는 결혼까지 한 여자에요.”“결혼하셨군요...”청년은 매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젊고 예쁜 백아영이 일찍 결혼했으니 흔치는 않은 일이다. 그러나 청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저는 재혼에 대해 편견이 없어요. 남편분과 이혼해도 그대를 왕후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저는 이혼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청년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는 그제야 난처한지 땅바닥에서 일어나 앉아서는 백아영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무슨 복잡한 일을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백아영은 혼자 심각하게 고민하는 청년이 이해가 되지 않아 벌떡 일어나 자리를 뜨려고 했다.곧이어 청년도 벌떡 일어났다. 너무 갑자기 몸을 일으킨 탓인지 몸을 휘청거리자 곁에 있던 남성이 얼른 그를 부축해 주었다.청년은 휘청거리는 몸을 아랑곳하지 않고 백아영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막아섰다. 그의 맑은 눈은 어느새 포악해졌다.“아가씨, 억양을 들어보면 외국인인 것 같네요. 아직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룰에 대해 잘 모
하지만 백아영은 현무가 힘들어할까 봐 차마 너무 많은 프로젝트를 참가하지 못하게 하고 관광지 한 곳만 더 돌고 남원에 돌아갈 생각이었다.이성준은 진지하게 말했다. “출산 장려 정책은 참 옳아.”백아영은 어리둥절했다.“자식이 많아야 집도 떠들썩하고, 현무도 동생이 생기지.”어린 노동자가 하나 더 필요하다는 그의 뜻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이성준은 방긋 웃으며 백아영을 벽에 바짝 붙였다. “여보, 우리 현무에게 동생 만들어주자.”이날 현무와 백아영은 영상통화를 했다. “엄마, 안색이 안 좋아. 어디 아파?”화면 속에서 백아영의 안색은 살짝 하얗게 보였다.하지만 별다르게 불편한 곳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낮에 산에 오르느라 피곤해서 그런가 봐. 괜찮아, 좀 쉬면 괜찮아 질 거야.” “그럼, 내일 일단 산을 내리지 말고 호텔에서 쉬는 거예요?”내일 하산할 예정이었지만 백아영은 단호하게 답했다.“맞아.”그제야 현무는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통화를 끊고 백아영의 이마에 길쭉한 손이 닿았다. 이성준은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정말 괜찮은 거 맞아?”실제로 봤을 때 백아영은 이상이 없어 보였지만 이성준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아. 내가 의사인데 모르겠어?”“하룻밤을 묵어도 좋으니까, 난 네가 좋아하는 열매를 좀 따올게.”이 산의 열매는 특산물이었기에 백아영이 매우 좋아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한 후, 이성준은 혼자 산꼭대기에 가서 열매를 땄고, 백아영은 아름다운 산기슭에 앉아 차를 마시며 아침 풍경을 감상했다. 그녀는 조용히 열매를 기다리고 있었다.기다리는 동안 찻집 안에서 갑자기 시끄러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도와주세요! 여기 도와주세요!”“의사 없어요? 응급처치할 줄 아는 사람 혹시 있어요? 좀 살려주세요! 저의 도련님을 살려주세요...”식당에서 대략 이십 대 초반의 한 청년이 땅에 누워있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
한 달 뒤.인천공항에서 현무는 양복을 차려입고 반듯하게 서서 웃음을 가득 머금고 백아영을 배웅했다.“엄마, 걱정하지 말고 잘 놀다 와요. 여기 일은 저한테 맡겨요.” 현무는 이성준의 아들답게 한 달 만에 기본적인 경영 업무를 배웠고, 심지어 위정을 도울 수 있었다.또한 그는 이성준의 외아들인 만큼 이성그룹의 후계자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는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나이에도 모든 주주와 직원들을 위협하기에 충분했기에 일을 더 쉽게 추진할 수 있었다.게다가 이성준의 한 달간 밑받침을 잘 깔아놓은 덕에 안심하고 현무와 위정에게 이성그룹을 맡길 수 있게 되었다.위정의 불평도 적어졌다. 그는 앞으로 일할 날에 희망이 생긴 것 같았다.“내 아들 최고.”백아영은 현무를 꼭 끌어안고 그의 볼에 쪽 뽀뽀했다.“엄마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영상통화 해. 날마다 기분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누가 감히 너를 괴롭히면, 엄마와 아빠가 바로 날아와서 때려 놓을 거야.”백아영의 품에서 현무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순간 엘리트에서 어린 아기가 되어 자신도 모르게 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하지만 이성준의 말과 백아영의 행복을 생각하며 현무는 마음을 가다듬고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였다.“엄마 걱정하지 마, 외삼촌과 위정 아저씨가 계셔서 아무도 날 못 괴롭혀. 내가 좀 더 크면 내가 엄마를 보호해야 해.”백아영은 감동되어서 감정이 벅차 놀랐다. 현무는 너무 든든한 아들이었다.선우경진은 팔짱을 낀 채 한쪽에 서 있었다. “이씨 가문의 일은 해결됐지만 아직 선우 일가가 남아있다는 것을 잊지 마.”“그리고, 여유가 있으면 새로운 아이템도 많이 생각해 둬.”한 달 동안 그들은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급한 불은 거의 다 껐다. 하지만 의학은 끝이 없고 신약 연구는 더 중요했기에 선우경진은 수시로 백아영을 감시했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다른 곳에서 시야를 넓히고 영감을 얻으면 신약을 개발하는데 더 쉬웠다.이성준은 한쪽에
현무는 계획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지만, 다섯 살짜리 꼬마에게는 좀 시기상조였다. 하지만 이성준은 그런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그러나 이성준의 엄숙한 표정을 보니 바로 계획을 하나 만들어 내야 할 것 같았다.현무는 골똘히 생각했다.“공부를 열심히 해서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고 매일 엄마와 아빠와 함께 있고 싶어요.”“엄마를 기쁘게 해주는 것과 함께 있는 것을 동시에 이룰 수 없어.”“왜요?”현무가 공부해서 잘하고 매일 학교 갔다 오면 자연스레 백아영을 볼 수 있고 그녀도 즐거워하는 게 일상이었다.“너 그동안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잊었어?”현무가 네 살 되기 전까지 백아영은 그의 곁에 있어줄수 없었다. 백아영이 돌아온 후, 비록 온 가족이 드디어 모였지만,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았고 때마다 백아영은 떠나야 했고, 항상 바쁜 일상에 기쁠 때도 있었지만 힘들 때가 더 많았다. 현무는 그런 백아영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엄마는 나와 함께 있어서 기분이 나쁜 거예요?”어린 현무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돌기도 전에 이성준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너 때문이 아니야. 엄마가 놓인 상황 때문이지. 남원에서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일들과 언제든지 생기는 변화 때문이야.”“만약 누군가가 이 짐을 대신 나눠주고, 그런 일들을 완전히 해결해 주고, 엄마가 마음껏 여행을 다닐 수 있게 해준다면 매일 즐거워할 거야.”현무는 어리지만 총명해서 즉시 이성준의 뜻을 알아차렸다.“아빠, 제가 엄마의 일을 나누어서 해도 돼요?”이성준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너는 할 수 있어.”“그런데 힘들 거야. 엄청 힘들 수 있어. 대신에 엄마를 오랫동안 못 볼 텐데, 그래도 할래?”현무는 힘든 것은 두렵지 않지만, 오랫동안 백아영을 볼 수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현무는 머뭇거렸다. 그는 섭섭해서 고뇌했다.“나 그냥 엄마랑 여행 가면 안 돼?”이성준은 자애로운 아버지의 미소를 지었다. “네가 경영대를 일찍 졸업하면 돼.”현무는 지능이 높아서, 월반하는
이성준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 은퇴할 생각이야.”‘역시!’백아영이 머릿속으로만 하던 황당한 추측을 이성준 입으로 직접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믿기지 않았다. 왜 이성준이 갑자기 도망 오려 했던 건지, 그리고 왜 그 큰 짐을 위정과 선우경진한테 내던졋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성준은 그들을 훈련하고 있었다.수단이 좀 잔인했을 뿐이다.“왜 갑자기 은퇴하고 싶은 거야?”백아영은 아직 앞날이 밝은 이성준이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성준은 백아영을 응시하며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쓱쓱 만졌다.“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이성준은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아 수많은 고통을 겪었다.이성준의 괴로운 심정은 눈에 훤히 비쳤다. 그는 사실 오래전부터 은퇴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영아, 앞으로 남은 생 동안 나는 네가 조용하고 평온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은퇴하고 쇼핑센터를 떠나면 원한도 모두 훨훨 털어 버릴 수 있다. 두 사람은 세계 여행하며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된다.백아영의 머릿속은 멍해졌다.백아영은 이성준이 은퇴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자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성준이 계획한 미래에 항상 그녀가 있었다. 그의 미래는 온통 백아영 한사람이었다.백아영은 감동되어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가 환상하던 미래는 정말 기대할 만한 것같았다.“하지만 지금은 내가 선우경진과 위정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 같아.”겨우 보름밖에 안 되었는데, 그들은 고통을 호소하며 참지 못하는데 정말 큰 일이라면 더 감당하기 어려워할 게 뻔했다.이성준은 눈썹을 찡그리며 잠시 사색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현무 이제 다섯 살이니까 남자 다 됐지.”백아영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현무에게 맡길 생각은 아니지?”이성준은 담담하게 되물었다.“안 될 게 뭐가 있어?”‘안 될 게 뭐가 있겠냐고? 현무 이제 겨우 다섯 살인데!’이성준은 여전히 꿈쩍하지 않았다. “내가 다섯 살 때, 이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