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으로 돌아온 백아영은 비행기에서 내렸고, 일찍이 도착해서 기다리던 민병식을 만났다.고작 며칠 만에 민병식은 10년은 넘게 늙어 보였고, 초췌한 모습은 물론 등까지 굽었다.“아영아...”그는 미안한 기색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미안해. 이 늙은이가 제대로 가르치지 못해서 우진이가 나쁜 짓을 저질러 너까지 다치게 했구나.”“할아버지, 잘못은 우진 씨가 한 거지 할아버지께서 사과할 일은 아니죠.”민병식이 고개를 끄덕였다.“우진은 이미 판결받았는데...”이내 목이 메는 듯 울먹였다.“무기징역이야.”맨빌 아일랜드에 폭탄을 터뜨린 민우진도 결국 도망가지 못하고 현장에서 붙잡혔다.남원으로 이송된 후 곧바로 재판에 들어갔다.백아영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착잡한 기분에 입술만 꼭 깨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우진이가 널 보고 싶다고 해서 내가 여기까지 찾아온 거야. 물론 넌 만날 생각이 없을 테지만, 그래도 친한 친구로 지냈던 세월을 생각해서라도 마지막으로 한번 만나줄래? 평생 착하고 겸손하게 살아온 아이가 딱 한 번 실수했는데...”남은 생을 감옥에서 보내다니.백아영은 무거운 마음으로 교도소에 도착했다.면회실에 앉아 유리를 사이에 두고 죄수복을 입은 민우진이 교도관과 함께 들어서는 모습을 지켜봤다.머리를 짧게 자르고 수염이 거뭇거뭇 자란 모습은 예전과 분위기가 사뭇 달랐고, 부드럽고 다정한 느낌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오히려 타락한 사람처럼 기가 죽었는데, 마치 먹구름에 가려진 듯 참담했다.그는 백아영의 맞은편에 앉아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결국 아영 씨가 이겼네요.”이 말을 내뱉은 민우진은 달갑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곧바로 현실에 수긍했다.그의 인생은 이미 끝났고, 감옥에 갇힌 이상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다만 아영 씨도 완승을 한 게 아닌가 봐요. 성준 씨를 아직도 못 찾았다고 하던데, 이미 죽은 거예요?”백아영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이내 착잡한 얼굴로 민우진을 바라
백아영은 이성그룹의 업무를 처리하는 데 전념했다.가능한 빨리 운영을 안정화하고 대표직에서 물러나 직접 이성준을 찾아다닐 작정이었다.그녀는 매일매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일하면서 항상 제일 늦게 회사를 떠났다.어느 날 저녁, 비서는 퇴근하는 대신 할 말이 있는 듯 서성거리다가 한참을 머뭇거린 다음 물었다.“아영 씨, 아직 퇴근 안 하세요?”백아영이 야근하는 모습은 회사에서 흔한 볼 수 있는 지라 비서의 뜬금없는 질문이 괜스레 더 수상하게 들렸다.백아영은 의혹을 감추지 못했다.“무슨 일이죠?”“아, 아니에요. 아영 씨가 대표님을 빨리 만나고 싶어 할 줄 알았는데...”문서를 넘기던 백아영이 우뚝 멈추더니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그게 무슨 말이죠? 대표님을 빨리 만나고 싶어 할 줄 알았다니?”그녀는 이성준을 미친 듯이 찾아다녔지만, 만나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존재였다.“네?”순간 넋을 잃은 비서는 그제야 무언가를 깨달은 듯싶었다.“아영 씨, 설마 대표님이 돌아오신 거 아직 모르고 있나요?”그녀의 손에서 서류가 ‘툭’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백아영이 벌떡 일어섰고, 목소리마저 갈라졌다.“뭐라고요? 다시 한번 말해봐요. 대표님, 대표님이 돌아왔다고요? 정말요?!”“네, 다들 알고 있는데요? 대표님께서 오후에 무사히 돌아왔거든요.”순간 백아영의 심장이 쿵쾅거렸다.“지금 어디에 있어요?”“아마도 본가에 계실 것 같은데...”백아영은 바람을 쌩하니 일으키며 재빨리 사무실을 뛰쳐나갔다.비서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멍하니 서 있었다.직원들은 이미 3시간 전에 대표님이 돌아온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백아영은 일찌감치 전해 들었을 거로 생각했다.따라서 백아영이 왜 제일 먼저 대표님을 만나러 가지 않았는지 의아하던 찰나, 예상외로 그녀는 아예 모르고 있었다.대표님께서 돌아오기 전에 연락하지 않았단 말인가?...백아영은 직접 운전해서 가장 빠른 속도로 이씨 가문 본가를 향해 달렸다.가는 길 내내 심장이 두근거려 목구멍으로 튀어나
그녀가 도착했을 때 마침 유치원 하원 시간이라 교문 앞에 모여있는 아이들과 부모님 때문에 사방이 시끌벅적했다.게다가 픽업 온 차들이 꽉 들어서 백아영은 어쩔 수 없이 맞은편에 주차했다.차에서 내리자 길 건너편에 한데 모여 있는 학부모를 발견했고, 정중앙에 군계일학으로 1m 90cm의 키를 자랑하며 우뚝 서 있는 이성준이 보였다.비록 주변에 인산인해를 이뤘지만, 그는 역시나 제일 눈에 띄었다.잘생긴 얼굴은 여전히 기억 속 그대로였고, 준수하면서 어딘가 쌀쌀맞은 모습은 귀티가 나는 반면 소외감이 느껴졌다. 빼곡히 둘러싸인 사람 때문인지 몰라도 그의 차가운 눈매는 불쾌한 듯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백아영은 코가 시큰거리더니 이내 눈물이 핑 돌았다.‘성준이야!’그는 역시나 살아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살아서 무사히 돌아왔다.“이성준!”백아영은 큰 소리로 외치더니 눈물을 글썽이며 그에게 달려갔다.결국 너무 흥분한 나머지 방금 빨간색으로 바뀐 신호등을 눈치채지 못했다. 결국, 발걸음을 떼는 순간 자동차 한 대가 그녀의 앞을 스쳐 지나갔는데 자칫 치일뻔했다.“신호도 안 봐? 죽고 싶어?!”운전자는 화가 나서 욕설을 마구 퍼부었다.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백아영은 서둘러 사과하고 다시 길가로 물러섰다.끝없이 오가는 차량 너머로 백아영은 발만 동동 구르며 이성준을 바라보았고, 순간 어둡고 깊은 눈동자와 맞닥뜨렸다.이성준도 그녀를 발견하고 더는 시선을 옮기지 않았다.그동안의 걱정과 두려움, 뼛속까지 스며든 그리움이 봇물 터지듯 밀려왔다. 백아영은 눈물이 멈추지 않았지만,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점점 올라갔다.고작 30초밖에 안 되는 신호가 마치 2시간처럼 느껴졌다.두 사람은 쌩쌩 달리는 차량을 사이에 두고 그렇게 서로만 쳐다보았다.그리고 길고 긴 기다림의 끝에 드디어 신호가 녹색으로 바뀌었다.백아영은 재빨리 반대편으로 달려갔다.횡단보도를 건너 인파를 뚫고 곧장 이성준의 품에 뛰어들더니 꼭 껴안고 그의 숨결을 마음껏 탐닉했다.“정말 돌아왔네?”
손님?물론 지금 상황에서 손님이라는 신분이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듣게 되자 괜스레 남처럼 느껴져서 기분이 불쾌했다.이내 주먹을 살포시 움켜쥐고, 불안하면서도 수줍은 표정으로 이성준을 바라보았다.‘누구라고 소개하려나?’이성준은 고개를 들어 백아영을 바라보더니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여유롭게 대답했다.“내 여자친구야.”백아영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맨빌 아일랜드에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순간이 떠오르자 꿀 먹은 듯 달콤했다.“성준 오빠, 여자친구가 있었어요?”앤니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오빠한테서 여자친구에 대한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요? 여태껏 솔로인 줄 알았어요.”순간 백아영도 넋을 잃고 말았다. 지난 두 달 동안 이성준이 그녀를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단 말인가?이성준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더는 이 주제를 이어갈 생각이 없는 듯 말했다.“밥 먹자.”세 사람은 식사하기 위해 각자의 자리로 갔고, 백아영은 이성준 옆에, 앤니는 반대편에 앉았다.“앤니, 그동안 성준을 잘 보살펴 줘서 고마워요.”백아영은 그녀가 진심으로 고마웠다.“아니에요, 저도 성준 오빠처럼 이렇게 잘생긴 사람은 처음 봐서 매일매일 눈이 너무 즐거웠어요. 따지고 보면 제가 이득이지 않겠어요? 게다가 절 데리고 H국에 와서 일자리까지 마련해주고 대도시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준 덕분에 더는 바닷가 작은 어촌 마을에 머물 필요가 없어졌거든요. 오히려 성준 오빠한테 감사한 마음이 더 크죠.”앤니의 눈에는 웃음기가 가득했고, 이성준을 향한 호감을 숨기지 않은 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이성준에게 이런 눈빛은 아주 익숙한 편이지만, 항상 그의 혐오심을 불러일으켰다.그러나 지금은 표정 변화가 전혀 없지 않은가? 마치 적응이 된 듯, 정확히는 눈감아 주는 것 같았다.“성준 오빠, 제가 만든 해물탕은 몸에도 좋거든요, 많이 드세요.”앤니가 야무지게 국물 한 그릇을 떠서 이성준의 앞에 놓자 이성준은 자연스럽게 집어 들었
몇 걸음 걷다가 뒤에서 주방으로 향하는 발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돌려보니 이성준이 앤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앤니는 눈썹이 휘어지게 웃으며 환한 미소를 지었는데 눈이 부시도록 빛났다.백아영의 기분은 이루 형언하기 힘들 정도로 씁쓸했다.그녀와 대화할 마음은 없고, 앤니는 잡담을 나눠도 된다는 말인가?그동안 기다린 시간과 애타게 찾아 헤매던 과거, 그리고 지워지지 않은 걱정과 근심, 두려움, 속수무책, 나날이 커지는 그리움은 마치 혼자만의 착각처럼 느껴졌다. 가슴이 꽉 막혀 너무 괴로웠지만, 울분을 털어낼 방법이 없었다.백아영은 오랜만에 샤워를 일찍 하고 침대에 누웠다.그러나 천장만 멀뚱멀뚱 바라볼 뿐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머릿속은 뒤죽박죽이고, 마음이 심란했다.이제 이성준이 구사일생으로 무사히 돌아와서 둘은 마침내 당당하게 함께할 수 있었다.그리고 이성준도 그녀를 여자친구라고 소개했다.오랜만의 재회에 기뻐해도 모자랄 판에 왜 상상했던 모습과 전혀 다르단 말이지? 이성준과 함께 있을 때면 왠지 모르게 소외감이 느껴졌다.평소와 다른 건 항상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설마 이성준에게 말 못 할 사정이라도 있는 건가? 그래서 대화하기 꺼릴지도 모른다.백아영은 벌떡 일어나 침대에 앉더니 눈살을 찌푸린 채 이러한 가능성에 대해 추측했다.이때, 방문이 ‘찰칵’ 울리면서 밖에서 스르륵 열렸다.이성준의 커다란 몸집이 문 앞에 떡하니 나타났다.“여, 여긴 왜 왔어?”백아영은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이성준이 손을 뻗어 문을 잠그더니 성큼성큼 걸어가 침대에 앉았다. 그러고 나서 그녀의 뒤통수를 움켜잡고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이는 마치 한여름 밤의 폭풍우처럼 그녀를 집어삼킬 듯싶었다.백아영은 넋을 잃고 말았다. 아까만 해도 씁쓸하던 기분이 키스에 사르르 녹아 말끔히 사라졌다.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며 수줍어서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두 팔로 그의 목을 살포시 끌어안더니 최대한 맞춰주려고 노력했다.2달간의 걱정과 그리움은 전부 이 키스에 녹
다음날 잠에서 깬 백아영은 오미란의 컨디션을 체크한 뒤 이성준이 벌써 회사로 가서 집에 없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아직 이른 시간이라 이현무마저 꿀잠 자고 있는데 벌써 나갔다니...어젯밤의 일이 떠오르자 백아영은 마음이 무거웠다. 아직도 화가 난 건가?기분은 차마 말로 형용하기 힘들었고, 혼란스러우면서 뒤죽박죽 했다.이성그룹이 다시 이성준의 손에 들어가게 되면서 그녀는 더는 사무실로 찾아갈 필요가 없기에 한결 여유로워졌다.다만 성무열과 협력하는 새로운 프로젝트가 아직 진행 중이며, 그녀가 직접 추진한 사업인 만큼 본인이 마무리를 지어야만 안심할 수 있었다.그녀는 평소처럼 이성그룹에 출근했다.회사에 도착하자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고, 직원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떠나질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의 진짜 대표가 돌아왔기 때문이다.“아영 씨, 축하해요. 대표님이 드디어 돌아오셨네요. 이제 마음고생 끝, 행복이 시작되겠죠?”“그동안 아영 씨의 인내와 노고가 헛되지 않았어요. 대표님이 돌아온 이상 앞으로 화목하고 즐거운 나날만 이어질 거예요.”“세 식구가 드디어 재회했으니 아영 씨는 제일 행복한 여자가 되겠네요.”웃으면서 축복해주는 직원들을 바라보며 백아영은 기쁘기는커녕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했다.누가 봐도 지금 제일 의기양양하고 행복한 여자는 그녀인데...결국 사람들을 피해 서류를 챙기고 창가에 앉아 뒤적거렸지만,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마음만 심란했다.“웬일이래? 이성준이 돌아왔는데도 우거지상이 따로 없네?”성무열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허리를 굽히더니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댔다.“싸웠어?”갑자기 나타난 커다란 얼굴 때문에 백아영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이내 발끈하며 눈을 부라리더니 부루퉁하게 말했다.“아니!”“아니라면서 안색이 왜 그래?”성무열은 믿기는커녕 오히려 빈정거렸다.“나한테는 기회일지도 모르니까 무슨 일인지 말해 봐.”백아영은 어이가 없었다.그녀는 대꾸하기도 싫은 듯 자리를 떴다. 그러나 성무열은 끝까지 물고
이성준은 엘리베이터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그녀를 기다리지 않고 버튼을 눌렀다.백아영은 서둘러 달려갔지만 그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고, 천천히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밖에서 이성준의 싸늘하고 어두운 얼굴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설명 안 듣고 가는 거면 그냥 놔둬. 성격 참 이상하네.”성무열은 줄곧 이성준의 이런 행동이 못마땅했다.“별거 아닌 일로 혼자 질투하고 화내고 누가 보면 여자인 줄 알겠어.”“너도 그만 좀 해.”백아영은 어이없는 듯 그를 노려봤다.“성준이가 싫어하니까 앞으로 가까이 오지 마.”말을 마친 백아영은 다른 엘리베이터에 올라 버튼을 누르고 재빨리 자리를 떴다.성무열의 표정은 흉측하기 그지없었다.“백아영, 이 양심 없는 인간아. 넌 친구보다 남자가 더 중요하지!”백아영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대표 사무실로 뒤쫓아갔지만 올라가자마자 이성준이 회의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다.따라 들어가려다가 위정에게 막혔고 위정은 난처한 듯 입을 열었다.“아영 씨, 회의 중이시니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백아영은 다급했다.“하지만...”“사장님께서 회의 끝나고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이제 막 돌아왔으니 많은 일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크게 나무랄 수 없었지만 화가 나서 회의실로 들어가 그녀를 피한 건 분명하다.백아영은 착잡한 눈빛으로 닫힌 회의실 문을 바라봤다.“얼마나 걸리죠?”위정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규모가 큰 회의라서 대여섯 시간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다른 일 있으시면 먼저 돌아가시는 것도...”“여기서 기다릴게요.”말을 마친 백아영은 곧장 소파로 가서 앉았고 이를 본 위정은 말을 잇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회의실로 들어갔다.회의실에는 식사를 마치기도 전에 부랴부랴 이곳으로 달려온 고위직 임원들이 가득했다. 사고가 터진 줄 알았으나 그저 일반적인 업무 보고에 불과했고,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의아함이 가득했지만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하고 묵묵히 보고를 이어갔다.반면 이성준은 고개를
이성준은 그녀를 안은 채 대표 사무실로 들어갔고 행여나 다치지는 않을까 금이야 옥이야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침대에 눕혔다.그녀를 내려놓고 일어서려던 순간 가느다란 두 팔이 이성준의 목을 감쌌다.백아영은 서서히 눈을 뜨더니 부드럽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가지 마.”갑작스러운 행동에 흠칫 놀란 이성준은 곧바로 온화한 표정을 감추고 또다시 싸늘한 모습으로 변했다.“아직 할 일 있어...”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아영은 고양이처럼 그의 몸에 얼굴을 문지르며 애교를 부렸다.“내가 잘못했어. 화내지 마. 응?”이성준은 눈빛이 흔들리더니 애써 유지하던 싸늘함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애교를 부리는 백아영은 그 역시도 처음인지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말 안 하면 용서한 거로 생각한다?”백아영은 억울하면서도 기대에 찬 눈으로 고개를 들어 간절하게 바라봤고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던 이성준은 항복하고 고개를 끄덕였다.“성준아, 역시 네가 최고야.”백아영은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흐뭇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커플 싸움에서 누가 됐든 한발 물러서서 사과하면 금방 풀린다는 게 사실인 듯싶었다. 이성준이 이렇게 쉽게 화 풀리는 스타일이라니!이성준은 물끄러미 백아영을 바라보며 마음 한구석이 간질거렸다. 그녀의 미소를 본 순간 이성의 끈을 놓은 지 오래였고 다른 일은 전부 잊은 채 그저 죽을 때까지 그녀의 품에 안겨있고 싶었다.백아영은 부드러운 몸을 이성준의 품에 기댄 채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우리 오늘 여기서 자는 거야?”“싫으면 가도...”“안 갈 거야.”백아영은 발그레 달아오른 얼굴을 그의 품에 파묻었다.“여기도 좋아.”이성준은 그윽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물었다.“여긴 침대가 하나밖에 없잖아. 내가 너한테 무슨 짓할까 봐 두려운 거 아니었어?”어젯밤 일이 생각난 백아영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할 거야?”‘당연하지’라는 말이 입가에 맴돌았지만 그녀의 눈빛에 목이 막혔고, 그동안 애써 유지하던 강경한 자세
분명 맛있는 음식인데도 백아영은 입맛이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몇 입 먹고 난 뒤 배가 아플 정도였다. 그녀는 이성준의 품에 안겨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 이성준은 긴장된 표정으로 그녀를 껴안고 자리에서 크게 화를 냈다. “윌리엄스, 혹시 음식에 독을 넣은거예요?!”윌리엄스는 놀라서 얼굴이 창백해져서 급히 변명했다.“아니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 백아영은 힘겹게 이성준의 손목을 잡고 힘없이 입을 열었다. “윌리엄스가 독을 넣지 않았어. 내가...”“너 왜 그래?” 이성준은 땀을 뻘뻘 흘리며 백아영을 안은 팔뚝을 가볍게 떨었다. 백아영은 몹시 아팠지만 눈길은 부드러웠고 약간 희색을 띠었다. “윌리엄스에게 실례지만, 국왕께 하룻밤 묵을 방을 빌려달라고 부탁해 줘. 그리고 산부인과 의사를 불러줘.”이성준이 눈치를 채지 못하자 백아영은 창백한 얼굴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방금 맥을 짚었는데, 나 임신했어.” 이성준의 동공은 움츠러들었다가 한참 만에 겨우 회복되었다. 찰나의 놀라움 뒤에는 오히려 걱정이 밀려왔다.“임심했는데 통증이 이렇게 심해?”그는 조바심이 나서 윌리엄스에게 의사를 불러오도록 재촉했다. 백아영은 아파서 힘이 없었던 나머지 그의 품에 푹 기대어 있었다. 전에 백아영은 이런 비슷한 환경에서 한 아이가 강제로 유산되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임신한 사실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하고 산에 가서 실랑이를 벌였고, 이로 인해 병세가 심했다. 이 아이를 키우고 싶지만, 고생할까봐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백아영은 가볍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정상적이야.”‘정상이라니?’ 이성준은 다른 여자가 임신을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몰랐지만, 백아영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진작 알았더라면 둘째를 갖지 않았을 것이다. 8개월 후. 산부인과 수술실 문이 열리자 이성준이 급히 달려들였다. 점잖던 남자는 안달복달한 얼굴로 물었다.“제 마누라는 어때요? 무사한가요?”“모녀는 무사합니다.”
집사는 경악했다.“폐하, 그들은 굴러들어 온 복도 차버리니 분명 본때를 보여줘야 하는데, 어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윌리엄스의 안색을 본 집사는 목이 메었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윌리엄스는 조금 전까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던 모습은 사라지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성준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경외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고, 간신히 이빨 사이로 글자를 밀어냈다.이, 이 대표?” 이성준은 경멸하듯 그를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윌리엄 집안의 자식이 확실히 다 컸네.” 윌리엄스의 얼굴이 더 새하얗게 질렸다. 엄청난 두려움이 엄습했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 이성준을 처음 만났다. 그때 이성준은 아직 소년이었지만, 기세가 등등하고, 과감하며, 감히 국왕인 윌리엄스의 아버지와 거래를 논했다. 그 당시 그의 아버지조차도 이성준을 대단하게 여겼다. 심지어 윌리엄스에게 앞으로 절대 이성준의 미움을 사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온 나라의 세력이 처참하게 약해질 것이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부터 이성준은 악마라고 마음에 새겨 두었다. 게다가 윌리엄스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었다. 이성준은 그의 나라에 협조하지 않는 대신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반년 동안 누워계셨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너무 커서 윌리엄스는 일찌감치 이번 생은 절대 H 국에 가지 않기로 했고, 절대로 이성준을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기존의 거래 협력을 모두 점진적으로, 완곡하게 해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항상 악마를 멀리하려고 했지만 이렇게 엮일 줄은 몰랐다. 백아영은 뜻밖에도 이성준의 아내였다! 어떤 생명의 은인 규칙, 첫눈에 반한 사랑 따위는 모두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는 어떤 계획도 할 수 없었다. 단지 자신의 왜 행동을 하기 전에 백아영의 신원을 조사하지 않았는지 후회되었다! 악마를 끌어들여 버렸다... “복을 차버린다나 뭐라나, 말을 그렇게밖에 못해?” 윌리엄스가 집사를 발로 매우 세게 찼
차에 타고 있던 남자들도 일어서더니 기세등등하게 백아영과 이성준을 포위했다. 험상궂은 얼굴의 한 남자가 환영 반 협박 반인 어투로 말했다. “두 분, 차에서 내리십시오.”차 밖에서는 윌리엄스가 활짝 웃으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백아영이 차에서 내리기를 목 빠지게 기다렸다. 곁에 있던 집사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폐하, 궁전의 수비를 모두 강화 완료했습니다. 궁전 주위에 800명의 호위 병사를 추가로 파견했어요. 이분들은 이미 독 안에 든 쥐가 되셔서 도망갈 수 없습니다.” “이혼 변호팀 사람들은 이미 도착하셨고 두 분이 차에서 내리시면 바로 처리할 수 있어요.”“폐하, 곧 미인을 품에 안게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윌리엄스의 입꼬리는 한껏 올라갔다. 산 위에서 백아영의 워낙 강인한 모습에 사람도모자라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지금은 백아영의 대단한 솜씨도, 그녀의 남편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단념할 수밖에 없다. 모두 생명의 은인으로 보고 첫눈에 반하게 만든 백아영 탓이었다. 그는 이 나라의 왕이다. 그가 마음에 드는 한 반드시 그의 것이다. 또한 결혼 후 백아영을 자신의 매력에 매료시켜 점차 이성준을 잊게 할 자신이 충만했다. 윌리엄이 생각을 하던 중, 차 문이 열리고 관광버스에서 백아영이 내렸다. 윌리엄스는 넥타이를 매만지며 그녀를 반겼다.“아가씨, 또 뵙네요.”윌리엄스가 아양을 떠는 모습을 보고 백아영은 입을 다물었다. 백아영의 뒤로 큰 덩치의 이성준이 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머리 위로 이성준은 차갑게 말했다.“내 아내를 뺏으려는 게 너야?” 이성준은 포위망 속에 서 있었다. 다른 사람의 구역에서 그는 독 안에 든 쥐였지만 그는 움츠러들지도 않고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이성준의 기는 모두를 앞질러 버려 마치 모든 것을 장악하는 왕인 것 같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서늘한 몇 글자가 사람을 더욱 섬뜩하게 했다. 집사는 높은 인물들을 많이 보았었기에 즉시 이성준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만 이곳은 그들의 궁전이
윌리엄스는 어안이 벙벙했다.백아영의 솜씨는 정말 놀라웠다. 그녀의 기묘한 침을 꽂는 기술이 더욱 놀라웠다. 보기만 해도 눈이 즐거워지는 백아영의 몸에는 빛이 보였다.그녀의 아름다움은 남달라서 비길 것도 없이 아름다웠다.백아영은 여전히 은침을 손에 들고 윌리엄스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만 좀 건드리세요. 알아들으셨죠?”“저는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윌리엄스의 의욕 넘치는 말은 눈앞으로 가까워져 오는 침에 놀라 목이 메었다. 순식간에 덮쳐 온 위험과 두려움이 그를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게 했다.백아영은 다시 경고했다.“잘 가세요. 바래다 드리지는 않을게요.”젊고 고집스러운 윌리엄스는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위협은 그를 이성적으로 뒤로 물러나 타협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백아영은 바늘을 다시 집어넣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네 부하는 경련을 일으키다가 10여 분 만에 의식을 회복했다. 그들은 서로를 부축하며 몸을 일으키자 멀리 떨어진 곳에 백아영이 보였다. 비록 뒷모습뿐이었지만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폐하, 죄송합니다. 저희가 너무 부족했어요.”윌리엄스는 백아영을 탐욕스럽게 바라보았다.“너희 탓이 아니야. 저 소녀가 너무 강할 뿐이야. 가자. 이제 내려가야지.”부하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 여왕님을... 그냥 이렇게 포기하시려고요?”윌리엄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그럼 내가 지금 뭘 할 수 있겠어?”말이 통하지도 않고 싸워서 이기지도 못하니 부하는 조용히 입을 꾹 닫았다.하지만 윌리엄스는 미소를 띠었다.“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이야.”이성준은 열매 한 봉지 가득 따왔다. 그는 열매를 깨끗이 씻은 뒤 쟁반에 담아 백아영 앞에 대령했다. 하지만 안색이 좋지 않았다.“방금 돌아오는 길에 들었는데 누가 너를 귀찮게 했다면서?”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도리도리 저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문제를 일으켰어.”이성준은 자초지종을 듣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백아영은 잠시 멈칫하더니 웃었다. “아파서 머리까지 다쳤나. 걱정 마세요, 위험했지만 목숨은 건졌어요. 돌아가시면 의사부터 보세요. 잘 케어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에요.”백아영은 진지하게 당부했지만 상대방은 한마디도 귀담아듣지 않았다.백아영이 그만 몸을 일으키려 하자 청년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저 지금 진지해요.”“이것은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규칙이기도 합니다. 생명을 구해준 은인은 반드시 몸으로 갚아야 합니다.”윌리엄스 왕족?백아영은 입헌군주제인 국가에 왔다. 이곳은 현대사회와 어우러졌지만 여전히 왕권을 시행하고 있다. 지금의 왕은 20대 초반의 청년으로 나이는 어리지만 듬직하고 성숙하며 상당한 재주를 가졌다고 전해졌다. 왕은 1년 넘게 국가 정무를 질서 있게 처리했다.다시 이 풋풋하고 고집 센 청년을 본 백아영은 목이 메었다. 왕은 소문과는 좀 다른듯했다.백아영은 청년한테 잡힌 손을 빼냈다.“그냥 눈에 보여서 구해준 거니 고마워하실 필요 없으세요. 그리고 저는 결혼까지 한 여자에요.”“결혼하셨군요...”청년은 매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젊고 예쁜 백아영이 일찍 결혼했으니 흔치는 않은 일이다. 그러나 청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저는 재혼에 대해 편견이 없어요. 남편분과 이혼해도 그대를 왕후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저는 이혼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청년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는 그제야 난처한지 땅바닥에서 일어나 앉아서는 백아영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무슨 복잡한 일을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백아영은 혼자 심각하게 고민하는 청년이 이해가 되지 않아 벌떡 일어나 자리를 뜨려고 했다.곧이어 청년도 벌떡 일어났다. 너무 갑자기 몸을 일으킨 탓인지 몸을 휘청거리자 곁에 있던 남성이 얼른 그를 부축해 주었다.청년은 휘청거리는 몸을 아랑곳하지 않고 백아영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막아섰다. 그의 맑은 눈은 어느새 포악해졌다.“아가씨, 억양을 들어보면 외국인인 것 같네요. 아직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룰에 대해 잘 모
하지만 백아영은 현무가 힘들어할까 봐 차마 너무 많은 프로젝트를 참가하지 못하게 하고 관광지 한 곳만 더 돌고 남원에 돌아갈 생각이었다.이성준은 진지하게 말했다. “출산 장려 정책은 참 옳아.”백아영은 어리둥절했다.“자식이 많아야 집도 떠들썩하고, 현무도 동생이 생기지.”어린 노동자가 하나 더 필요하다는 그의 뜻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이성준은 방긋 웃으며 백아영을 벽에 바짝 붙였다. “여보, 우리 현무에게 동생 만들어주자.”이날 현무와 백아영은 영상통화를 했다. “엄마, 안색이 안 좋아. 어디 아파?”화면 속에서 백아영의 안색은 살짝 하얗게 보였다.하지만 별다르게 불편한 곳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낮에 산에 오르느라 피곤해서 그런가 봐. 괜찮아, 좀 쉬면 괜찮아 질 거야.” “그럼, 내일 일단 산을 내리지 말고 호텔에서 쉬는 거예요?”내일 하산할 예정이었지만 백아영은 단호하게 답했다.“맞아.”그제야 현무는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통화를 끊고 백아영의 이마에 길쭉한 손이 닿았다. 이성준은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정말 괜찮은 거 맞아?”실제로 봤을 때 백아영은 이상이 없어 보였지만 이성준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아. 내가 의사인데 모르겠어?”“하룻밤을 묵어도 좋으니까, 난 네가 좋아하는 열매를 좀 따올게.”이 산의 열매는 특산물이었기에 백아영이 매우 좋아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한 후, 이성준은 혼자 산꼭대기에 가서 열매를 땄고, 백아영은 아름다운 산기슭에 앉아 차를 마시며 아침 풍경을 감상했다. 그녀는 조용히 열매를 기다리고 있었다.기다리는 동안 찻집 안에서 갑자기 시끄러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도와주세요! 여기 도와주세요!”“의사 없어요? 응급처치할 줄 아는 사람 혹시 있어요? 좀 살려주세요! 저의 도련님을 살려주세요...”식당에서 대략 이십 대 초반의 한 청년이 땅에 누워있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
한 달 뒤.인천공항에서 현무는 양복을 차려입고 반듯하게 서서 웃음을 가득 머금고 백아영을 배웅했다.“엄마, 걱정하지 말고 잘 놀다 와요. 여기 일은 저한테 맡겨요.” 현무는 이성준의 아들답게 한 달 만에 기본적인 경영 업무를 배웠고, 심지어 위정을 도울 수 있었다.또한 그는 이성준의 외아들인 만큼 이성그룹의 후계자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는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나이에도 모든 주주와 직원들을 위협하기에 충분했기에 일을 더 쉽게 추진할 수 있었다.게다가 이성준의 한 달간 밑받침을 잘 깔아놓은 덕에 안심하고 현무와 위정에게 이성그룹을 맡길 수 있게 되었다.위정의 불평도 적어졌다. 그는 앞으로 일할 날에 희망이 생긴 것 같았다.“내 아들 최고.”백아영은 현무를 꼭 끌어안고 그의 볼에 쪽 뽀뽀했다.“엄마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영상통화 해. 날마다 기분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누가 감히 너를 괴롭히면, 엄마와 아빠가 바로 날아와서 때려 놓을 거야.”백아영의 품에서 현무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순간 엘리트에서 어린 아기가 되어 자신도 모르게 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하지만 이성준의 말과 백아영의 행복을 생각하며 현무는 마음을 가다듬고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였다.“엄마 걱정하지 마, 외삼촌과 위정 아저씨가 계셔서 아무도 날 못 괴롭혀. 내가 좀 더 크면 내가 엄마를 보호해야 해.”백아영은 감동되어서 감정이 벅차 놀랐다. 현무는 너무 든든한 아들이었다.선우경진은 팔짱을 낀 채 한쪽에 서 있었다. “이씨 가문의 일은 해결됐지만 아직 선우 일가가 남아있다는 것을 잊지 마.”“그리고, 여유가 있으면 새로운 아이템도 많이 생각해 둬.”한 달 동안 그들은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급한 불은 거의 다 껐다. 하지만 의학은 끝이 없고 신약 연구는 더 중요했기에 선우경진은 수시로 백아영을 감시했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다른 곳에서 시야를 넓히고 영감을 얻으면 신약을 개발하는데 더 쉬웠다.이성준은 한쪽에
현무는 계획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지만, 다섯 살짜리 꼬마에게는 좀 시기상조였다. 하지만 이성준은 그런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그러나 이성준의 엄숙한 표정을 보니 바로 계획을 하나 만들어 내야 할 것 같았다.현무는 골똘히 생각했다.“공부를 열심히 해서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고 매일 엄마와 아빠와 함께 있고 싶어요.”“엄마를 기쁘게 해주는 것과 함께 있는 것을 동시에 이룰 수 없어.”“왜요?”현무가 공부해서 잘하고 매일 학교 갔다 오면 자연스레 백아영을 볼 수 있고 그녀도 즐거워하는 게 일상이었다.“너 그동안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잊었어?”현무가 네 살 되기 전까지 백아영은 그의 곁에 있어줄수 없었다. 백아영이 돌아온 후, 비록 온 가족이 드디어 모였지만,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았고 때마다 백아영은 떠나야 했고, 항상 바쁜 일상에 기쁠 때도 있었지만 힘들 때가 더 많았다. 현무는 그런 백아영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엄마는 나와 함께 있어서 기분이 나쁜 거예요?”어린 현무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돌기도 전에 이성준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너 때문이 아니야. 엄마가 놓인 상황 때문이지. 남원에서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일들과 언제든지 생기는 변화 때문이야.”“만약 누군가가 이 짐을 대신 나눠주고, 그런 일들을 완전히 해결해 주고, 엄마가 마음껏 여행을 다닐 수 있게 해준다면 매일 즐거워할 거야.”현무는 어리지만 총명해서 즉시 이성준의 뜻을 알아차렸다.“아빠, 제가 엄마의 일을 나누어서 해도 돼요?”이성준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너는 할 수 있어.”“그런데 힘들 거야. 엄청 힘들 수 있어. 대신에 엄마를 오랫동안 못 볼 텐데, 그래도 할래?”현무는 힘든 것은 두렵지 않지만, 오랫동안 백아영을 볼 수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현무는 머뭇거렸다. 그는 섭섭해서 고뇌했다.“나 그냥 엄마랑 여행 가면 안 돼?”이성준은 자애로운 아버지의 미소를 지었다. “네가 경영대를 일찍 졸업하면 돼.”현무는 지능이 높아서, 월반하는
이성준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 은퇴할 생각이야.”‘역시!’백아영이 머릿속으로만 하던 황당한 추측을 이성준 입으로 직접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믿기지 않았다. 왜 이성준이 갑자기 도망 오려 했던 건지, 그리고 왜 그 큰 짐을 위정과 선우경진한테 내던졋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성준은 그들을 훈련하고 있었다.수단이 좀 잔인했을 뿐이다.“왜 갑자기 은퇴하고 싶은 거야?”백아영은 아직 앞날이 밝은 이성준이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성준은 백아영을 응시하며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쓱쓱 만졌다.“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이성준은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아 수많은 고통을 겪었다.이성준의 괴로운 심정은 눈에 훤히 비쳤다. 그는 사실 오래전부터 은퇴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영아, 앞으로 남은 생 동안 나는 네가 조용하고 평온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은퇴하고 쇼핑센터를 떠나면 원한도 모두 훨훨 털어 버릴 수 있다. 두 사람은 세계 여행하며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된다.백아영의 머릿속은 멍해졌다.백아영은 이성준이 은퇴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자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성준이 계획한 미래에 항상 그녀가 있었다. 그의 미래는 온통 백아영 한사람이었다.백아영은 감동되어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가 환상하던 미래는 정말 기대할 만한 것같았다.“하지만 지금은 내가 선우경진과 위정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 같아.”겨우 보름밖에 안 되었는데, 그들은 고통을 호소하며 참지 못하는데 정말 큰 일이라면 더 감당하기 어려워할 게 뻔했다.이성준은 눈썹을 찡그리며 잠시 사색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현무 이제 다섯 살이니까 남자 다 됐지.”백아영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현무에게 맡길 생각은 아니지?”이성준은 담담하게 되물었다.“안 될 게 뭐가 있어?”‘안 될 게 뭐가 있겠냐고? 현무 이제 겨우 다섯 살인데!’이성준은 여전히 꿈쩍하지 않았다. “내가 다섯 살 때, 이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