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잠에서 깬 백아영은 오미란의 컨디션을 체크한 뒤 이성준이 벌써 회사로 가서 집에 없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아직 이른 시간이라 이현무마저 꿀잠 자고 있는데 벌써 나갔다니...어젯밤의 일이 떠오르자 백아영은 마음이 무거웠다. 아직도 화가 난 건가?기분은 차마 말로 형용하기 힘들었고, 혼란스러우면서 뒤죽박죽 했다.이성그룹이 다시 이성준의 손에 들어가게 되면서 그녀는 더는 사무실로 찾아갈 필요가 없기에 한결 여유로워졌다.다만 성무열과 협력하는 새로운 프로젝트가 아직 진행 중이며, 그녀가 직접 추진한 사업인 만큼 본인이 마무리를 지어야만 안심할 수 있었다.그녀는 평소처럼 이성그룹에 출근했다.회사에 도착하자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고, 직원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떠나질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의 진짜 대표가 돌아왔기 때문이다.“아영 씨, 축하해요. 대표님이 드디어 돌아오셨네요. 이제 마음고생 끝, 행복이 시작되겠죠?”“그동안 아영 씨의 인내와 노고가 헛되지 않았어요. 대표님이 돌아온 이상 앞으로 화목하고 즐거운 나날만 이어질 거예요.”“세 식구가 드디어 재회했으니 아영 씨는 제일 행복한 여자가 되겠네요.”웃으면서 축복해주는 직원들을 바라보며 백아영은 기쁘기는커녕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했다.누가 봐도 지금 제일 의기양양하고 행복한 여자는 그녀인데...결국 사람들을 피해 서류를 챙기고 창가에 앉아 뒤적거렸지만,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마음만 심란했다.“웬일이래? 이성준이 돌아왔는데도 우거지상이 따로 없네?”성무열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허리를 굽히더니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댔다.“싸웠어?”갑자기 나타난 커다란 얼굴 때문에 백아영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이내 발끈하며 눈을 부라리더니 부루퉁하게 말했다.“아니!”“아니라면서 안색이 왜 그래?”성무열은 믿기는커녕 오히려 빈정거렸다.“나한테는 기회일지도 모르니까 무슨 일인지 말해 봐.”백아영은 어이가 없었다.그녀는 대꾸하기도 싫은 듯 자리를 떴다. 그러나 성무열은 끝까지 물고
이성준은 엘리베이터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그녀를 기다리지 않고 버튼을 눌렀다.백아영은 서둘러 달려갔지만 그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고, 천천히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밖에서 이성준의 싸늘하고 어두운 얼굴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설명 안 듣고 가는 거면 그냥 놔둬. 성격 참 이상하네.”성무열은 줄곧 이성준의 이런 행동이 못마땅했다.“별거 아닌 일로 혼자 질투하고 화내고 누가 보면 여자인 줄 알겠어.”“너도 그만 좀 해.”백아영은 어이없는 듯 그를 노려봤다.“성준이가 싫어하니까 앞으로 가까이 오지 마.”말을 마친 백아영은 다른 엘리베이터에 올라 버튼을 누르고 재빨리 자리를 떴다.성무열의 표정은 흉측하기 그지없었다.“백아영, 이 양심 없는 인간아. 넌 친구보다 남자가 더 중요하지!”백아영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대표 사무실로 뒤쫓아갔지만 올라가자마자 이성준이 회의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다.따라 들어가려다가 위정에게 막혔고 위정은 난처한 듯 입을 열었다.“아영 씨, 회의 중이시니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백아영은 다급했다.“하지만...”“사장님께서 회의 끝나고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이제 막 돌아왔으니 많은 일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크게 나무랄 수 없었지만 화가 나서 회의실로 들어가 그녀를 피한 건 분명하다.백아영은 착잡한 눈빛으로 닫힌 회의실 문을 바라봤다.“얼마나 걸리죠?”위정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규모가 큰 회의라서 대여섯 시간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다른 일 있으시면 먼저 돌아가시는 것도...”“여기서 기다릴게요.”말을 마친 백아영은 곧장 소파로 가서 앉았고 이를 본 위정은 말을 잇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회의실로 들어갔다.회의실에는 식사를 마치기도 전에 부랴부랴 이곳으로 달려온 고위직 임원들이 가득했다. 사고가 터진 줄 알았으나 그저 일반적인 업무 보고에 불과했고,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의아함이 가득했지만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하고 묵묵히 보고를 이어갔다.반면 이성준은 고개를
이성준은 그녀를 안은 채 대표 사무실로 들어갔고 행여나 다치지는 않을까 금이야 옥이야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침대에 눕혔다.그녀를 내려놓고 일어서려던 순간 가느다란 두 팔이 이성준의 목을 감쌌다.백아영은 서서히 눈을 뜨더니 부드럽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가지 마.”갑작스러운 행동에 흠칫 놀란 이성준은 곧바로 온화한 표정을 감추고 또다시 싸늘한 모습으로 변했다.“아직 할 일 있어...”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아영은 고양이처럼 그의 몸에 얼굴을 문지르며 애교를 부렸다.“내가 잘못했어. 화내지 마. 응?”이성준은 눈빛이 흔들리더니 애써 유지하던 싸늘함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애교를 부리는 백아영은 그 역시도 처음인지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말 안 하면 용서한 거로 생각한다?”백아영은 억울하면서도 기대에 찬 눈으로 고개를 들어 간절하게 바라봤고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던 이성준은 항복하고 고개를 끄덕였다.“성준아, 역시 네가 최고야.”백아영은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흐뭇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커플 싸움에서 누가 됐든 한발 물러서서 사과하면 금방 풀린다는 게 사실인 듯싶었다. 이성준이 이렇게 쉽게 화 풀리는 스타일이라니!이성준은 물끄러미 백아영을 바라보며 마음 한구석이 간질거렸다. 그녀의 미소를 본 순간 이성의 끈을 놓은 지 오래였고 다른 일은 전부 잊은 채 그저 죽을 때까지 그녀의 품에 안겨있고 싶었다.백아영은 부드러운 몸을 이성준의 품에 기댄 채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우리 오늘 여기서 자는 거야?”“싫으면 가도...”“안 갈 거야.”백아영은 발그레 달아오른 얼굴을 그의 품에 파묻었다.“여기도 좋아.”이성준은 그윽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물었다.“여긴 침대가 하나밖에 없잖아. 내가 너한테 무슨 짓할까 봐 두려운 거 아니었어?”어젯밤 일이 생각난 백아영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할 거야?”‘당연하지’라는 말이 입가에 맴돌았지만 그녀의 눈빛에 목이 막혔고, 그동안 애써 유지하던 강경한 자세
백아영은 악몽을 꾸었다.지옥 같은 맨빌 아일랜드에 또 한차례의 폭발이 일어났고 이성준은 부상을 입고 바다에 빠졌다. 필사적으로 헤엄쳐 마침내 그를 붙잡아 해안가로 끌어냈지만 온몸이 상처에 뒤덮였고 피는 멈추지 않았다.이성준은 창백한 얼굴로 가쁜 숨을 내쉬며 그녀를 바라봤다.“백아영, 이제 포기해. 난 더 이상 살 수 있는 희망이 없어...”그의 말과 함께 심장에 뚫린 구멍을 본 순간 너무 놀라 벌떡 깨어났다!“이성준!”다급하게 그를 찾았지만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고 침대마저 텅 비어 있었는데 마치 이곳에 누운 사람이 없었던 것처럼 이불마저 차가웠다.정신 차리지 못하고 공황과 공포에 휩싸인 백아영은 신발도 신지 않은 채 침대에서 뛰어내렸다.“이성준! 성준아...”다급하게 문을 열자 서류 더미를 앞에 두고 의자에 앉아 업무하고 있는 이성준이 보였다.그제야 조마조마하던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지만 여전히 두려움에 떨며 그에게 다가갔다.“다행이야...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백아영!”이성준은 거칠게 호통치며 싸늘한 눈빛으로 고개를 돌렸다.“옷차림이 그게 뭐야! 당장 들어가.”그의 꾸중을 듣고 얼어붙은 백아영은 그제야 사무실에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아챘다.이성그룹의 직원들이 업무 보고를 하고 있었고 다들 난처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시선을 돌렸다.백아영은 잠옷을 입고 있었는데 비록 뭐가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단정하지 못한 모습에 얼굴을 붉히며 서둘러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난처한 표정으로 침대에 앉은 백아영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고 한편으로는 서러움을 느껴 이성준의 베개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짜증 나! 감싸줘야 할 상황에 왜 화내는 거야! 여자친구 챙길 줄도 모르면서 뭔 연애야!”백아영은 홧김에 베개를 몇 번 더 밟았다.한동안 혼자 울분을 터뜨리다가 보고하던 직원들이 모두 떠나고 나서야 밖으로 나왔고 그곳은 이성준도 떠난 채 오직 비서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비서는 미소를 지으며 백아영을 바라봤다.
백아영은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오미란의 병세를 확인하기 위해 이씨 가문으로 향했다.이성준이 돌아온 후 다시 희망을 갖게 된 오미란은 적극적으로 치료에 협조했고 병세도 나날이 호전되었다.오미란이 감사함을 표하던 그때 백아영은 선우경진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그는 다급하고 엄숙한 목소리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백아영, 지금 당장 집으로 와!”선우경진이 다급하고 엄숙한 모습을 보이는 건 극히 드문 일이기에 백아영은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선우 일가로 달려갔다.집으로 들어서자 소파에 앉아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는 선우경진과 온유성이 보였고 그녀를 발견하고선 표정이 더욱 심각해졌다.백아영은 다급하게 물었다.“아빠, 오빠,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그녀를 바라보던 온유성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비로소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가족들이 너의 선택에 간섭하는 건 아니다만, 결혼 같은 큰일은 적어도 가족과 논의해 보고 결정해야 하지 않겠니?”백아영은 어리둥절했다.“결혼이요?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몰랐어?”온유성은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너랑 성준이가 길일을 택해서 결혼식 올린다면서?”어안이 벙벙한 백아영의 모습에 온유성은 재빨리 청첩장을 꺼냈다.그 위에는 날짜가 적혀있었는데 보름 뒤다!“이걸 이성준이 보냈다고요?”터무니없다고 느껴졌지만 위정이 직접 보내온 거라 가짜일 수는 없다.정리해 보면 이성준은 보름 후에 백아영과 식을 올릴 계획이고 그녀와 아무런 상의도 없이 독단적으로 날짜를 정했다...“설마 네 의사는 묻지도 않고 성준 씨 혼자 결정한 일이야?”선우경진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결혼이 혼자 하는 것도 아니고, 이런 큰일을 상의도 없이 막무가내로 결정하는 건 너무 이기적이네. 아영아, 그 사람 행동에 익숙해지면 안 돼. 이렇게 애매하게 결혼할 바에는 차라리 청첩장 돌려보내자.”“경진아! 말이 너무 심하다.”온유성은 무거운 목소리로 호통치고선 다시 부드러운 눈빛
백아영은 그제야 두 사람의 결혼 소식이 이미 이씨 가문에 의해 발표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결혼식을 올릴 호텔도 이미 준비했다고 한다...백아영은 자신을 둘러싼 선우 일가의 사람들을 보며 기쁘긴커녕 가슴 한쪽이 꽉 막힌 듯 답답했다.결혼 날짜, 예물, 발표, 장소 분명 그녀의 결혼인데 마치 외부인처럼 그 어떤 것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결혼할 사람이 자신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그 시각 남원 교외.“이성준이 백아영이랑 결혼한다고?”이 소식을 들은 백채영은 화가 나서 테이블을 걷어찼다.이성준과 결혼하는 게 그녀의 오랜 소망이었지만 결코 실현하지 못했다. 간절히 바라고 원하던 걸 백아영이 빼앗아 갔다!질투와 증오의 감정이 구더기처럼 마음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왔고 백채영은 흉측한 표정으로 이를 갈았다.“백승구, 너 제갈 일가에서 키운 천재라며? 그렇게 대단한 인간이 왜 아직도 백아영을 죽이지 못한 거야!”이성준이 없을 때 이성그룹의 주주들을 암암리에 통제하고, 보호자 신분으로 후견인 자리에 앉아 이성그룹을 장악하는 게 백승구의 아이디어였으나 백아영이 이를 망쳤다.그 후 주주들을 이용해 이성그룹을 무너뜨리려 했을 때도 성무열에게 막혔다.설상가상 이제는 이성준이 돌아왔으니 이성그룹을 무너뜨리긴커녕 근처에 얼씬도 못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돈도 얻지 못하고 복수도 못한 상황에 백채영은 컵을 내던지며 울분을 토했다.“개고생해서 널 구해내도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네. 원하는 건 하나도 손에 못 넣고, 여전히 잡혀가서 죽지 않을까 조마조마하며 살 줄 알았더라면 그때 돈 받고 떠났을 텐데.”백승구는 정신 나간 백채영을 싸늘하게 바라보며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방법 있으니까 조용히 기다려요.”백승구는 사악한 눈빛으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무슨 방법?”백승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컴퓨터 키보드만 두드렸다.허세 부리며 잘난 척 과시하는 그의 모습에 열받은 백채영은 컵을 몇 개 더 깨뜨리고 나서야 자리를 떴다.이성준과 백아영
이성준과 백아영의 결혼은 장안의 화제가 되었고 분위기는 가라앉을 줄 몰랐다.그러나 하루가 지나도록 백아영은 이성준과 연락이 닿지 않았다.처음에는 전화를 받지 않더니 나중에는 아예 전화기를 꺼버렸다.회사에 있었으니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정말 무슨 일 생긴 줄 알고 걱정했을 것이다.백아영은 심란한 마음에 회사를 찾아갔지만 회의 중이라 만나지 못했고, 어쩔 수 없이 또 복도에 앉아 그를 기다렸다.지나가는 사람들이 웃으며 다가와 축하 인사를 건넸지만 뭔가 잘못된 듯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가슴이 꽉 막히는 듯한 답답함에 백아영은 집에서 기다린다는 말만 전하고 이씨 가문 본가로 돌아갔다.하원하고 집으로 돌아온 이현무는 기뻐하며 백아영의 품에 안겼고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엄마, 정말 아빠랑 결혼해요? 이날만 기다렸어요! 이제 우린 한 가족이에요!”백아영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물론 이현무와 마찬가지로 그녀가 바라온 일이지만 이런 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못했다.이현무의 기대에 찬 눈을 바라보며 마음이 심란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일이 뭐라고 그렇게 따지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이성준이 날짜를 정한 것도 다 함께하기 위함일 텐데...백아영은 복잡한 생각을 정리한 후 이현무를 데리고 목욕하러 갔다.밥 먹고 한참을 놀다가 이현무가 잠이든 후에야 밖으로 나와 이성준을 기다렸다.어떻든 간에 오늘은 무조건 설명을 듣고 싶었다.백아영은 오랫동안 기다렸고 새벽 1시가 되어서야 이성준이 돌아왔다.문이 열리자 틈 사이로 들어온 차가운 공기는 백아영을 불편하게 했다.이성준은 그녀를 향해 걸음을 옮겼고 가까이 다가오자 느껴지는 술 냄새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술 마셨어?”이성준은 백아영에게 다가와 앉더니 자연스레 그녀를 품에 앉은 채 볼에 입맞춤했다.“안 자고 기다린 거야?”“이성준, 너 아직 위경련 있으니까 이렇게 술 마시면 안 돼.”백아영은 걱정하며 말했지만 이성준은 전혀 개의치 않은 듯 답했다.“괜찮아
“배터리 없었어.”이성준은 당연하듯 답했다.왜 다른 사람 핸드폰으로 전화하지 않았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너무 막무가내인 사람으로 보일 것 같아 억울하고 속상한 마음을 이 악물고 참았다.“보름 뒤에 결혼하는 거 네가 정했어?”이성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백아영은 이해가 안 되는 듯 물었다.“왜 나랑 논의하지도 않고 혼자 결정해?”이성준은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미간을 찌푸렸다.“나랑 결혼하는 게 싫어?”“좋고 싫고를 떠나서 내가 신부면 언제 어디서 어떻게 결혼할지는 정할 수 있는 거 아니야?”이성준은 논리적으로 반박했다.“뭐가 됐든 어차피 나랑 결혼할 거잖아. 빨리 결혼해서 합법적이고 당당하게 우리 집에서 지내는 게 너한테도 좋을 텐데?”그 말을 들은 백아영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내가 지금 아무 명분 없이 여기서 지내는 게 창피하다고 생각하는 거야?”“그런 뜻 아니야.”이성준은 짜증 내며 머리를 짚었다.“싫으면 결혼 취소하면 되잖아! 내일 당장 예식장 환불할게.”백아영의 기분은 고려하지 않은 채 모든 걸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는 이성준의 횡포에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이성준, 너 진짜 왜 이래?” 백아영은 화가 나서 그를 밀치고 밖으로 뛰어나갔다.이성준은 무의식적으로 쫓으려 했지만 한 걸음 내딛자마자 자제하고 물러서더니 침울하게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사장님, 꼭 이렇게 하셔야만 합니까?”문 앞에 있던 위정은 안쓰러움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다른 방법이 있을 수도...”이성준은 싸늘한 표정으로 문을 쾅 하고 닫았다....그 시각 선우 일가.선우경진은 화를 내며 잔을 내동댕이치더니 욕설을 퍼부었다.“이성준 개자식!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결혼이 무슨 애들 소꿉장난인 줄 알아? 좋은 남자인 줄 알았는데 내가 눈이 멀었네. 독단적이고 성격 안 좋은 저런 인간은 결혼할 자격도 없으니까 평생 혼자 살라고 해! 아영아, 이제 그만하고 헤어져!”늘 두 사람의 사랑을 응원하던 선우경진이
분명 맛있는 음식인데도 백아영은 입맛이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몇 입 먹고 난 뒤 배가 아플 정도였다. 그녀는 이성준의 품에 안겨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 이성준은 긴장된 표정으로 그녀를 껴안고 자리에서 크게 화를 냈다. “윌리엄스, 혹시 음식에 독을 넣은거예요?!”윌리엄스는 놀라서 얼굴이 창백해져서 급히 변명했다.“아니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 백아영은 힘겹게 이성준의 손목을 잡고 힘없이 입을 열었다. “윌리엄스가 독을 넣지 않았어. 내가...”“너 왜 그래?” 이성준은 땀을 뻘뻘 흘리며 백아영을 안은 팔뚝을 가볍게 떨었다. 백아영은 몹시 아팠지만 눈길은 부드러웠고 약간 희색을 띠었다. “윌리엄스에게 실례지만, 국왕께 하룻밤 묵을 방을 빌려달라고 부탁해 줘. 그리고 산부인과 의사를 불러줘.”이성준이 눈치를 채지 못하자 백아영은 창백한 얼굴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방금 맥을 짚었는데, 나 임신했어.” 이성준의 동공은 움츠러들었다가 한참 만에 겨우 회복되었다. 찰나의 놀라움 뒤에는 오히려 걱정이 밀려왔다.“임심했는데 통증이 이렇게 심해?”그는 조바심이 나서 윌리엄스에게 의사를 불러오도록 재촉했다. 백아영은 아파서 힘이 없었던 나머지 그의 품에 푹 기대어 있었다. 전에 백아영은 이런 비슷한 환경에서 한 아이가 강제로 유산되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임신한 사실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하고 산에 가서 실랑이를 벌였고, 이로 인해 병세가 심했다. 이 아이를 키우고 싶지만, 고생할까봐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백아영은 가볍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정상적이야.”‘정상이라니?’ 이성준은 다른 여자가 임신을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몰랐지만, 백아영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진작 알았더라면 둘째를 갖지 않았을 것이다. 8개월 후. 산부인과 수술실 문이 열리자 이성준이 급히 달려들였다. 점잖던 남자는 안달복달한 얼굴로 물었다.“제 마누라는 어때요? 무사한가요?”“모녀는 무사합니다.”
집사는 경악했다.“폐하, 그들은 굴러들어 온 복도 차버리니 분명 본때를 보여줘야 하는데, 어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윌리엄스의 안색을 본 집사는 목이 메었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윌리엄스는 조금 전까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던 모습은 사라지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성준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경외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고, 간신히 이빨 사이로 글자를 밀어냈다.이, 이 대표?” 이성준은 경멸하듯 그를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윌리엄 집안의 자식이 확실히 다 컸네.” 윌리엄스의 얼굴이 더 새하얗게 질렸다. 엄청난 두려움이 엄습했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 이성준을 처음 만났다. 그때 이성준은 아직 소년이었지만, 기세가 등등하고, 과감하며, 감히 국왕인 윌리엄스의 아버지와 거래를 논했다. 그 당시 그의 아버지조차도 이성준을 대단하게 여겼다. 심지어 윌리엄스에게 앞으로 절대 이성준의 미움을 사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온 나라의 세력이 처참하게 약해질 것이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부터 이성준은 악마라고 마음에 새겨 두었다. 게다가 윌리엄스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었다. 이성준은 그의 나라에 협조하지 않는 대신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반년 동안 누워계셨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너무 커서 윌리엄스는 일찌감치 이번 생은 절대 H 국에 가지 않기로 했고, 절대로 이성준을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기존의 거래 협력을 모두 점진적으로, 완곡하게 해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항상 악마를 멀리하려고 했지만 이렇게 엮일 줄은 몰랐다. 백아영은 뜻밖에도 이성준의 아내였다! 어떤 생명의 은인 규칙, 첫눈에 반한 사랑 따위는 모두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는 어떤 계획도 할 수 없었다. 단지 자신의 왜 행동을 하기 전에 백아영의 신원을 조사하지 않았는지 후회되었다! 악마를 끌어들여 버렸다... “복을 차버린다나 뭐라나, 말을 그렇게밖에 못해?” 윌리엄스가 집사를 발로 매우 세게 찼
차에 타고 있던 남자들도 일어서더니 기세등등하게 백아영과 이성준을 포위했다. 험상궂은 얼굴의 한 남자가 환영 반 협박 반인 어투로 말했다. “두 분, 차에서 내리십시오.”차 밖에서는 윌리엄스가 활짝 웃으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백아영이 차에서 내리기를 목 빠지게 기다렸다. 곁에 있던 집사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폐하, 궁전의 수비를 모두 강화 완료했습니다. 궁전 주위에 800명의 호위 병사를 추가로 파견했어요. 이분들은 이미 독 안에 든 쥐가 되셔서 도망갈 수 없습니다.” “이혼 변호팀 사람들은 이미 도착하셨고 두 분이 차에서 내리시면 바로 처리할 수 있어요.”“폐하, 곧 미인을 품에 안게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윌리엄스의 입꼬리는 한껏 올라갔다. 산 위에서 백아영의 워낙 강인한 모습에 사람도모자라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지금은 백아영의 대단한 솜씨도, 그녀의 남편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단념할 수밖에 없다. 모두 생명의 은인으로 보고 첫눈에 반하게 만든 백아영 탓이었다. 그는 이 나라의 왕이다. 그가 마음에 드는 한 반드시 그의 것이다. 또한 결혼 후 백아영을 자신의 매력에 매료시켜 점차 이성준을 잊게 할 자신이 충만했다. 윌리엄이 생각을 하던 중, 차 문이 열리고 관광버스에서 백아영이 내렸다. 윌리엄스는 넥타이를 매만지며 그녀를 반겼다.“아가씨, 또 뵙네요.”윌리엄스가 아양을 떠는 모습을 보고 백아영은 입을 다물었다. 백아영의 뒤로 큰 덩치의 이성준이 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머리 위로 이성준은 차갑게 말했다.“내 아내를 뺏으려는 게 너야?” 이성준은 포위망 속에 서 있었다. 다른 사람의 구역에서 그는 독 안에 든 쥐였지만 그는 움츠러들지도 않고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이성준의 기는 모두를 앞질러 버려 마치 모든 것을 장악하는 왕인 것 같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서늘한 몇 글자가 사람을 더욱 섬뜩하게 했다. 집사는 높은 인물들을 많이 보았었기에 즉시 이성준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만 이곳은 그들의 궁전이
윌리엄스는 어안이 벙벙했다.백아영의 솜씨는 정말 놀라웠다. 그녀의 기묘한 침을 꽂는 기술이 더욱 놀라웠다. 보기만 해도 눈이 즐거워지는 백아영의 몸에는 빛이 보였다.그녀의 아름다움은 남달라서 비길 것도 없이 아름다웠다.백아영은 여전히 은침을 손에 들고 윌리엄스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만 좀 건드리세요. 알아들으셨죠?”“저는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윌리엄스의 의욕 넘치는 말은 눈앞으로 가까워져 오는 침에 놀라 목이 메었다. 순식간에 덮쳐 온 위험과 두려움이 그를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게 했다.백아영은 다시 경고했다.“잘 가세요. 바래다 드리지는 않을게요.”젊고 고집스러운 윌리엄스는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위협은 그를 이성적으로 뒤로 물러나 타협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백아영은 바늘을 다시 집어넣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네 부하는 경련을 일으키다가 10여 분 만에 의식을 회복했다. 그들은 서로를 부축하며 몸을 일으키자 멀리 떨어진 곳에 백아영이 보였다. 비록 뒷모습뿐이었지만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폐하, 죄송합니다. 저희가 너무 부족했어요.”윌리엄스는 백아영을 탐욕스럽게 바라보았다.“너희 탓이 아니야. 저 소녀가 너무 강할 뿐이야. 가자. 이제 내려가야지.”부하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 여왕님을... 그냥 이렇게 포기하시려고요?”윌리엄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그럼 내가 지금 뭘 할 수 있겠어?”말이 통하지도 않고 싸워서 이기지도 못하니 부하는 조용히 입을 꾹 닫았다.하지만 윌리엄스는 미소를 띠었다.“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이야.”이성준은 열매 한 봉지 가득 따왔다. 그는 열매를 깨끗이 씻은 뒤 쟁반에 담아 백아영 앞에 대령했다. 하지만 안색이 좋지 않았다.“방금 돌아오는 길에 들었는데 누가 너를 귀찮게 했다면서?”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도리도리 저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문제를 일으켰어.”이성준은 자초지종을 듣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백아영은 잠시 멈칫하더니 웃었다. “아파서 머리까지 다쳤나. 걱정 마세요, 위험했지만 목숨은 건졌어요. 돌아가시면 의사부터 보세요. 잘 케어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에요.”백아영은 진지하게 당부했지만 상대방은 한마디도 귀담아듣지 않았다.백아영이 그만 몸을 일으키려 하자 청년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저 지금 진지해요.”“이것은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규칙이기도 합니다. 생명을 구해준 은인은 반드시 몸으로 갚아야 합니다.”윌리엄스 왕족?백아영은 입헌군주제인 국가에 왔다. 이곳은 현대사회와 어우러졌지만 여전히 왕권을 시행하고 있다. 지금의 왕은 20대 초반의 청년으로 나이는 어리지만 듬직하고 성숙하며 상당한 재주를 가졌다고 전해졌다. 왕은 1년 넘게 국가 정무를 질서 있게 처리했다.다시 이 풋풋하고 고집 센 청년을 본 백아영은 목이 메었다. 왕은 소문과는 좀 다른듯했다.백아영은 청년한테 잡힌 손을 빼냈다.“그냥 눈에 보여서 구해준 거니 고마워하실 필요 없으세요. 그리고 저는 결혼까지 한 여자에요.”“결혼하셨군요...”청년은 매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젊고 예쁜 백아영이 일찍 결혼했으니 흔치는 않은 일이다. 그러나 청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저는 재혼에 대해 편견이 없어요. 남편분과 이혼해도 그대를 왕후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저는 이혼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청년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는 그제야 난처한지 땅바닥에서 일어나 앉아서는 백아영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무슨 복잡한 일을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백아영은 혼자 심각하게 고민하는 청년이 이해가 되지 않아 벌떡 일어나 자리를 뜨려고 했다.곧이어 청년도 벌떡 일어났다. 너무 갑자기 몸을 일으킨 탓인지 몸을 휘청거리자 곁에 있던 남성이 얼른 그를 부축해 주었다.청년은 휘청거리는 몸을 아랑곳하지 않고 백아영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막아섰다. 그의 맑은 눈은 어느새 포악해졌다.“아가씨, 억양을 들어보면 외국인인 것 같네요. 아직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룰에 대해 잘 모
하지만 백아영은 현무가 힘들어할까 봐 차마 너무 많은 프로젝트를 참가하지 못하게 하고 관광지 한 곳만 더 돌고 남원에 돌아갈 생각이었다.이성준은 진지하게 말했다. “출산 장려 정책은 참 옳아.”백아영은 어리둥절했다.“자식이 많아야 집도 떠들썩하고, 현무도 동생이 생기지.”어린 노동자가 하나 더 필요하다는 그의 뜻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이성준은 방긋 웃으며 백아영을 벽에 바짝 붙였다. “여보, 우리 현무에게 동생 만들어주자.”이날 현무와 백아영은 영상통화를 했다. “엄마, 안색이 안 좋아. 어디 아파?”화면 속에서 백아영의 안색은 살짝 하얗게 보였다.하지만 별다르게 불편한 곳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낮에 산에 오르느라 피곤해서 그런가 봐. 괜찮아, 좀 쉬면 괜찮아 질 거야.” “그럼, 내일 일단 산을 내리지 말고 호텔에서 쉬는 거예요?”내일 하산할 예정이었지만 백아영은 단호하게 답했다.“맞아.”그제야 현무는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통화를 끊고 백아영의 이마에 길쭉한 손이 닿았다. 이성준은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정말 괜찮은 거 맞아?”실제로 봤을 때 백아영은 이상이 없어 보였지만 이성준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아. 내가 의사인데 모르겠어?”“하룻밤을 묵어도 좋으니까, 난 네가 좋아하는 열매를 좀 따올게.”이 산의 열매는 특산물이었기에 백아영이 매우 좋아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한 후, 이성준은 혼자 산꼭대기에 가서 열매를 땄고, 백아영은 아름다운 산기슭에 앉아 차를 마시며 아침 풍경을 감상했다. 그녀는 조용히 열매를 기다리고 있었다.기다리는 동안 찻집 안에서 갑자기 시끄러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도와주세요! 여기 도와주세요!”“의사 없어요? 응급처치할 줄 아는 사람 혹시 있어요? 좀 살려주세요! 저의 도련님을 살려주세요...”식당에서 대략 이십 대 초반의 한 청년이 땅에 누워있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
한 달 뒤.인천공항에서 현무는 양복을 차려입고 반듯하게 서서 웃음을 가득 머금고 백아영을 배웅했다.“엄마, 걱정하지 말고 잘 놀다 와요. 여기 일은 저한테 맡겨요.” 현무는 이성준의 아들답게 한 달 만에 기본적인 경영 업무를 배웠고, 심지어 위정을 도울 수 있었다.또한 그는 이성준의 외아들인 만큼 이성그룹의 후계자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는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나이에도 모든 주주와 직원들을 위협하기에 충분했기에 일을 더 쉽게 추진할 수 있었다.게다가 이성준의 한 달간 밑받침을 잘 깔아놓은 덕에 안심하고 현무와 위정에게 이성그룹을 맡길 수 있게 되었다.위정의 불평도 적어졌다. 그는 앞으로 일할 날에 희망이 생긴 것 같았다.“내 아들 최고.”백아영은 현무를 꼭 끌어안고 그의 볼에 쪽 뽀뽀했다.“엄마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영상통화 해. 날마다 기분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누가 감히 너를 괴롭히면, 엄마와 아빠가 바로 날아와서 때려 놓을 거야.”백아영의 품에서 현무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순간 엘리트에서 어린 아기가 되어 자신도 모르게 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하지만 이성준의 말과 백아영의 행복을 생각하며 현무는 마음을 가다듬고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였다.“엄마 걱정하지 마, 외삼촌과 위정 아저씨가 계셔서 아무도 날 못 괴롭혀. 내가 좀 더 크면 내가 엄마를 보호해야 해.”백아영은 감동되어서 감정이 벅차 놀랐다. 현무는 너무 든든한 아들이었다.선우경진은 팔짱을 낀 채 한쪽에 서 있었다. “이씨 가문의 일은 해결됐지만 아직 선우 일가가 남아있다는 것을 잊지 마.”“그리고, 여유가 있으면 새로운 아이템도 많이 생각해 둬.”한 달 동안 그들은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급한 불은 거의 다 껐다. 하지만 의학은 끝이 없고 신약 연구는 더 중요했기에 선우경진은 수시로 백아영을 감시했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다른 곳에서 시야를 넓히고 영감을 얻으면 신약을 개발하는데 더 쉬웠다.이성준은 한쪽에
현무는 계획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지만, 다섯 살짜리 꼬마에게는 좀 시기상조였다. 하지만 이성준은 그런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그러나 이성준의 엄숙한 표정을 보니 바로 계획을 하나 만들어 내야 할 것 같았다.현무는 골똘히 생각했다.“공부를 열심히 해서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고 매일 엄마와 아빠와 함께 있고 싶어요.”“엄마를 기쁘게 해주는 것과 함께 있는 것을 동시에 이룰 수 없어.”“왜요?”현무가 공부해서 잘하고 매일 학교 갔다 오면 자연스레 백아영을 볼 수 있고 그녀도 즐거워하는 게 일상이었다.“너 그동안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잊었어?”현무가 네 살 되기 전까지 백아영은 그의 곁에 있어줄수 없었다. 백아영이 돌아온 후, 비록 온 가족이 드디어 모였지만,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았고 때마다 백아영은 떠나야 했고, 항상 바쁜 일상에 기쁠 때도 있었지만 힘들 때가 더 많았다. 현무는 그런 백아영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엄마는 나와 함께 있어서 기분이 나쁜 거예요?”어린 현무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돌기도 전에 이성준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너 때문이 아니야. 엄마가 놓인 상황 때문이지. 남원에서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일들과 언제든지 생기는 변화 때문이야.”“만약 누군가가 이 짐을 대신 나눠주고, 그런 일들을 완전히 해결해 주고, 엄마가 마음껏 여행을 다닐 수 있게 해준다면 매일 즐거워할 거야.”현무는 어리지만 총명해서 즉시 이성준의 뜻을 알아차렸다.“아빠, 제가 엄마의 일을 나누어서 해도 돼요?”이성준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너는 할 수 있어.”“그런데 힘들 거야. 엄청 힘들 수 있어. 대신에 엄마를 오랫동안 못 볼 텐데, 그래도 할래?”현무는 힘든 것은 두렵지 않지만, 오랫동안 백아영을 볼 수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현무는 머뭇거렸다. 그는 섭섭해서 고뇌했다.“나 그냥 엄마랑 여행 가면 안 돼?”이성준은 자애로운 아버지의 미소를 지었다. “네가 경영대를 일찍 졸업하면 돼.”현무는 지능이 높아서, 월반하는
이성준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 은퇴할 생각이야.”‘역시!’백아영이 머릿속으로만 하던 황당한 추측을 이성준 입으로 직접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믿기지 않았다. 왜 이성준이 갑자기 도망 오려 했던 건지, 그리고 왜 그 큰 짐을 위정과 선우경진한테 내던졋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성준은 그들을 훈련하고 있었다.수단이 좀 잔인했을 뿐이다.“왜 갑자기 은퇴하고 싶은 거야?”백아영은 아직 앞날이 밝은 이성준이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성준은 백아영을 응시하며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쓱쓱 만졌다.“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이성준은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아 수많은 고통을 겪었다.이성준의 괴로운 심정은 눈에 훤히 비쳤다. 그는 사실 오래전부터 은퇴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영아, 앞으로 남은 생 동안 나는 네가 조용하고 평온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은퇴하고 쇼핑센터를 떠나면 원한도 모두 훨훨 털어 버릴 수 있다. 두 사람은 세계 여행하며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된다.백아영의 머릿속은 멍해졌다.백아영은 이성준이 은퇴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자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성준이 계획한 미래에 항상 그녀가 있었다. 그의 미래는 온통 백아영 한사람이었다.백아영은 감동되어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가 환상하던 미래는 정말 기대할 만한 것같았다.“하지만 지금은 내가 선우경진과 위정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 같아.”겨우 보름밖에 안 되었는데, 그들은 고통을 호소하며 참지 못하는데 정말 큰 일이라면 더 감당하기 어려워할 게 뻔했다.이성준은 눈썹을 찡그리며 잠시 사색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현무 이제 다섯 살이니까 남자 다 됐지.”백아영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현무에게 맡길 생각은 아니지?”이성준은 담담하게 되물었다.“안 될 게 뭐가 있어?”‘안 될 게 뭐가 있겠냐고? 현무 이제 겨우 다섯 살인데!’이성준은 여전히 꿈쩍하지 않았다. “내가 다섯 살 때, 이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