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하는 다리를 다쳤으나 뼈가 부러진 건 아니라서 치료를 받고 나니 목발을 짚고 걸을 수는 있었다.결국 사흘째 되는 날에 침대에서 내려와 절뚝거리며 숲속으로 걸어갔다.그는 불법 약물을 빌미로 심씨 일가와 거래할 예정이었다.아줌마를 최대한 빨리 구해내야만 백아영에게 한시라도 일찍 귀띔해 줄 수 있지 않은가?그러나 숲속으로 들어선 그는 원래 잘 숨겨뒀던 불법 약물이 전부 감쪽같이 사라진 걸 발견하고 넋을 잃었다.이도하는 아연실색하더니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요 며칠 선우 일가에서 불법 약물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딱히 없었기에 아마도 다른 사람에게 들켰을 것이다.즉, 범인은 심씨 일가일 가능성이 컸다.그러나 심씨 일가에게 정확한 위치를 알려준 적도 없는데 대체 어떻게 알고 빼돌렸냐는 말이다. 게다가 선우 일가 별장까지 잠입해서 쥐도 새도 모르게 옮겨가다니?장소를 아는 유일한 사람은 심은아뿐이다.다만 그녀가 자기 몰래 심씨 일가 사람에게 알렸을 리가 없었다.설마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또 협박을 당했단 말인가?이런 생각에 이도하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이더니 급히 방으로 돌아갔다.이번에 그는 조심조심 문을 열었는데 아무런 인기척도 나지 않았다.빼꼼 열린 문틈 사이로 베란다에서 통화하는 심은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이도하는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고, 두 눈에 독기가 차올랐다. 빌어먹을 심씨 일가 같으니라고! 역시나 심은아를 협박하고 있던 것이다.하지만 귀에 들린 거라고는 불쾌한 듯 꾸짖는 심은아의 목소리뿐이었다.“이런 쓸모없는 것들! 백아영의 행방을 알아내는데 꼬박 하룻밤을 새워? 벌써 강원에 도착하고도 남았겠네. 당장 육씨 가문한테 연락해서 백아영이 들어가지 못하게 막으라고 해. 아니야, 차라리 들여보내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독 안의 든 쥐를 잡는 거지! 죽음을 자초하기 위해 혼자서 강원에 찾아간 이상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게 할 테니까.”이도하는 창백한 얼굴로 문 앞에 멍하니 서서 두 귀를 의심했다.차라리 꿈을 꾸고 있는 거로 믿고 싶은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백아영이 도착하는 즉시 붙잡으라고 전해.”육씨 가문 사람은 즉시 인원을 배치하여 그녀를 체포하기만 기다렸다.그러나 긴긴 기다림 끝에 무려 이틀이나 지났지만, 차량은 물론 사람마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시간상 기차를 타고 온다고 해도 도착하고 남았을 것이다.육홍렬은 화가 치밀어 올라 물컵을 내동댕이치며 욕설을 퍼부었다.“설마 심씨 일가에서 나한테 장난친 건가?!”방에 있던 사람들은 감히 찍소리도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육홍렬은 강원의 ‘왕’이다. 성격이 불같고 성질까지 더러워 화가 난다면 피를 보기 마련이기에 결코 한두 명이 연루되는 게 아니었다.이때, 누군가 방문을 벌컥 열었다.문이 벽에 ‘쿵’하고 부딪히면서 살얼음판 같던 방 안의 분위기가 한층 가라앉았다.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은 겁도 없이 10cm가 넘는 하이힐을 신고 최신 컬렉션 공주풍 원피스를 입은 채 구시렁거리며 걸어왔다.“아빠, 집에도 안 계시고 공항도 픽업 오지 않고 뭐 하는 거예요? 여기서 다른 여자랑 살림 차린 건 아니죠?”말을 마친 그녀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사방을 두리번댔다.화가 머리끝까지 났던 육홍렬은 딸을 보자 얼굴이 환해지면서 웃음꽃이 피었다.이내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그럴 리가, 아빠가 사랑하는 사람은 당연히 우리 공주 뿐이지! 다 아빠 탓이야. 정신이 없어서 네가 오늘 돌아온다는 것도 잊어버렸네. 파리에서 재미있게 놀았어?”“아니요.”육채원은 소파에 앉아 하이힐을 벗어 던졌다.“괜찮은 남자를 한 명도 못 만나서 짜증 나요. 헛걸음질했네요.”귀여운 외모와 달리 육채원은 남자라면 환장했다.그중에서도 잘생긴 남자를 제일 좋아하는데, 남자친구가 셀 수 없을 정도였다.여행을 가는 목적도 남자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였다.육홍렬은 딸바보인지라 딸을 위해서라면 간이고 쓸개고 빼줄 수 있기에 선 따위 지킬 줄 모른다. 딸아이만 좋다면 무엇이든 해줄 수 있는 사람이다.그동안 잘생긴 남자를 납치해서 그녀의 침실까지 보낸 적도
유리문 너머로 훤칠한 키에 흐릿한 남자의 모습을 보며 백아영은 마음이 심란했다.곧이어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육채원인 척 잠입 성공한 이상 이 타이밍에서 절대로 신분을 노출할 수는 없었다.오늘 밤만큼은 어떻게든 얼렁뚱땅 넘어가야 했다.그녀는 결의에 찬 눈빛으로 몸에 지니고 있던 은침을 꺼냈다. 고자를 만들어 버릴 각오로 이따가 기회를 봐서 공격할 작정이다.남자에게 들킬지도 모르는 리스크가 따랐지만, 당장은 뾰족한 수가 없었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시도해야만 했다.백아영은 은침을 들고 용기를 끌어내 마치 전쟁터에 나서듯 욕실 문을 벌컥 열었다.그러나 밖으로 나가기 전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아까만 해도 굳게 먹었던 마음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졌다.그는 다름 아닌 얼굴만 잘생긴 게 아니라 일품 중의 최상품이자 볼 때마다 감탄을 저절로 자아내는 이성준이다.대체 여기에 왜 있는 거지? 심지어 육홍렬이 딸을 위해 보낸 남자이지 않은가?!정말 기가 막히는 상황이었다.백아영은 혹시 이성준의 잃어버린 쌍둥이는 아닌지 싶은 의심마저 들었다.그러나 싸늘한 눈빛과 온몸을 뒤덮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분위기, 차마 가까이 다가가기 힘든 아우라는 이성준 본인을 제외하고 이 세상에 다른 사람은 없을 것이다.백아영은 마음이 심란했다. 이성준이 무슨 영문 때문에 이런 짓을 하는지 당최 이해가 가지 않았다.이성준은 싸움도 잘하고 반응도 빨라서 발기부전이 되게 하려고 몰래 은침을 놓는 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더욱이 정체가 폭로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하지만 이성준과 하룻밤을 보낸다?현재의 신분과 상황에서 백아영은 차라리 정체가 폭로되는 쪽을 택하기로 했다.이성준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육채원을 바라보며 표정이 점점 바뀌더니 짜증으로 가득했다.이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 때문에 절 부르신 거죠?”백아영은 깜짝 놀랐다. 자기가 여기 왜 왔는지 모른단 말인가?머리를 빠르게 굴린 그녀는 찰나의 순간 혹시나 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전 그런 망나니가 아니에요. 아버님께서 착각하신 듯싶은데, 이만 가보겠습니다.”말을 마친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떠나갔다.방문이 닫히자 백아영은 그제야 온몸에 힘이 탁 풀리면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행히 그녀의 추측이 맞았고, 이성준도 속아서 떠밀려 온 것이다. 게다가 워낙 깔끔을 떨어서 낯선 사람과 함부로 몸을 섞는 그런 남자가 아니었다.가까스로 위험천만한 순간을 면한 백아영은 마냥 마음 놓고 있을 수가 없었다.육채원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결코 평범하지는 않아서 육홍렬이 이성준의 실패 소식을 전해 듣게 된다면 내일 또 다른 남자를 보낼지 모른다.따라서 매번 속임수로 얼렁뚱땅 넘어가기는 힘들었다.그녀는 서둘러 육홍렬과 심씨 일가가 불법 약물을 거래한 증거를 찾아야만 했다.이에 백아영은 가운을 걸치고 육홍렬을 찾으러 방을 나섰다.그러나 복도를 지나 아래층을 내려가기도 전에 거실에서 신경전을 벌이는 육홍렬과 이성준을 발견했다.육홍렬은 소파에 앉아 싸늘한 눈빛으로 이성준을 노려보며 적나라한 살의를 드러냈다.“우리 딸아이와 함께한다는 자체로 영광인 줄 알아야지, 감히 우리 딸을 거부해?”이성준은 허리를 펴고 꼿꼿이 서 있었다. 비록 지금은 한낱 경호원에 불과했지만, 여전히 당당해 보였다.“전 회장님의 목숨을 구해서 인정받은 대가로 육씨 가문의 경호원이 된 겁니다. 게다가 경호를 제외한 시중 드는 일은 일절 하지 않겠다고 이미 약속드렸을 텐데요?”이현무가 육씨 가문에 갇힌 것까지 알고 있지만, 정확히 어디에 감금당했는지는 모른다.육씨 가문은 워낙 규모도 크고 사업 범위도 넓다. 게다가 경비도 삼엄해서 몰래 잠입해 사람을 찾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그래서 이성준은 일부러 계략을 꾸며 육홍렬을 구해주고 그의 인정을 받아 경호원 신분으로 몰래 들어왔다.그러나 육씨 가문에 온 지 하루밖에 안 됐는데, 이현무의 행방을 알아내기도 전부터 여자 시중을 들게 될 줄은 몰랐다.육홍렬은 절대로 은혜를
백아영은 가슴이 쿵 내려앉으며 초조함에 이를 악물었다.다만 이는 한순간에 불과할 뿐, 애써 냉정함을 유지한 채 육채원 본인이라면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머리를 재빨리 굴렸다.그러고 나서 육홍렬의 팔을 홱 뿌리치면서 씩씩거렸다.“세상에 널렸다고요? 그럼 당장 찾아서 보내줘요! 찾지도 못하고 큰소리만 치면 그동안 내 지루함은 어떻게 달래줄 건데요? 지금 저 남자가 마음에 들어서 갖고 싶은데, 기어코 죽이겠다면 다시는 아빠랑 아는 척하지 않을 거예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육홍렬의 안색이 돌변하더니 서둘러 육채원의 손을 붙잡고 한풀 꺾인 목소리로 달래주기 바빴다.“우리 공주, 착하지? 네 말대로 할 테니까 그만 화 풀어. 죽이지 않으면 되잖아? 그치?”“여기! 저놈을 가둬라!”육채원의 안색이 그제야 밝아지면서 환하게 웃었다.“역시 우리 아빠가 최고예요!”이성준은 고분고분 항복했다.두 경호원에게 붙잡혀 끌려가는 순간 육채원을 살피는 그윽한 눈빛은 의혹으로 가득했다.방금 그는 육채원의 당황하는 표정을 똑똑히 보았다.어쨌거나 남자를 장난감 취급하면서 무법천지가 따로 없는 응석받이 공주님이 아무리 찰나의 순간이라고 해도 당황한 티를 내비칠 리가 없었다.이성준이 끌려가는 걸 바라보며 가슴이 조마조마하던 백아영도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다만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일부러 토라진 척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아빠가 준비한 선물이 오늘 저녁 날 만족시켜 주지 못했으니 보상해 주세요.”육홍렬은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했다.“그래, 그래. 보상해 줄게, 뭐 필요한데?”“생각해보면 모르겠어요? 꼭 제가 말해야 알아요?”백아영이 새침하게 받아쳤다. 하지만 태도가 아무리 건방지더라도 육홍렬은 전혀 불쾌해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밑도 끝도 없이 예뻐하고 떠받들어줬다.“아빠가 최근에 괜찮은 액세서리를 꽤 많이 선물 받았는데 네가 마음에 들어 하는 것도 있을 거야. 아빠랑 서재에 가서 같이 고르자.”육홍렬은 육채원을 데리고 서재로 향했고, 워낙 은밀한
그녀는 기회를 봐서 혼자 다시 서재를 다녀가야만 했다....올빼미족 육채원의 캐릭터를 유지하기 위해 백아영은 다음날 곧바로 움직이는 대신 잠에서 깨어나도 침대에 누워 자는 척했다.결국 오후 4시가 되어서야 침대에서 일어났다.그녀가 느긋하게 방에서 나와 배를 채우려는 순간 복도 창문 너머로 익숙한 여인의 모습을 발견했다.‘백채영?’ 백채영은 건물 밖에서 육홍렬과 대화를 주고받았다.백아영의 동공이 살짝 커지면서 의혹을 감추지 못했다. 이성준이 경호원인 척 육씨 가문에 나타난 건 둘째 치고 백채영까지 찾아오다니?백채영이 왜 여기 있단 말이지?둘이서 대체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 건지 알 수 없었다.생각에 빠진 백채영은 문득 육홍렬과 시선이 마주쳤다. 싸늘하던 육홍렬의 표정은 순식간에 부드럽고 인자하게 변했고, 얼굴에 햇살처럼 화창한 미소가 떠올랐다.이내 큰 소리로 말했다.“우리 공주, 일어났어? 아빠랑 같이 밥 먹자.”곧이어 그는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아직 할 말이 남은 백채영은 황급히 그를 쫓아갔다.“육홍렬 씨, 제가 말씀드린 일은...”“안 돼.”육홍렬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하고 백채영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거실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백채영이 따라가려고 했지만, 문밖에서 경호원에게 제지당했다.그녀는 짜증이 섞인 얼굴로 착잡함을 감추지 못했다.먼 길을 떠나 이현무를 찾아온 이유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틈을 타서 이현무를 데려가 이성준과 결혼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였다.그러나 육씨 가문의 경비가 워낙 삼엄한 탓에 비록 방문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현무를 데려갈 방법이 없었다.그래서 육홍렬에게 이현무와 함께 밖에서 산책 좀 하게 해달라고 부탁할 작정이었다. 일단 육씨 가문을 벗어난다면 기회를 틈타 이현무를 데리고 도망칠 수 있지만, 육홍렬은 이런 사소한 요구도 들은 체하지 않았다.백채영은 어쩔 수 없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떠났고, 다른 방법으로 접근할 생각이었다.백아영은 방 안에서 점점 멀어지는 백채영의 뒷모습을 바
그녀는 이성준을 감금시켰더니 고문까지 당하리라 생각지도 못했다.게다가 꼬박 하루가 지났는데 왜 아직도 도망가지 않았냐는 말이다.설마 탈출이 불가능한 상황인 건가?원래는 그를 구하기 위해 시간을 벌어주려고 했으나 이제 와서 오히려 해를 끼친 꼴이 되었다.마음이 심란한 백아영은 죄책감에 미안함을 감추지 못했다.그러나 겉으로는 차마 내색할 수 없기에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맷집이 좋을수록 나중에 맛볼 때 더 환상적이지 않겠어요? 전 남는 게 시간이라 천천히 기다릴 수 있어요.”비록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날 밤 백아영은 육홍렬 몰래 이성준이 수감되어 있는 건물을 찾아갔다.작은 건물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경호원 2명을 제외하고 내부에도 2명이 보였는데, 창문과 대문은 쇠창살에 가로막혀 굳게 닫혀 있었다.이성준이 갇힌 방도 이 중의 하나였다.커튼이 쳐진 방은 불도 켜지 않아 칠흑같이 어두웠고, 주변에 꿉꿉한 냉기로 가득했는데 소름이 돋을 정도로 불쾌했다.“채원 씨, 안에 지저분하니까 들어가지 마세요.”입구를 지키던 경호원이 흠칫 놀라면서 말했다. 육채원이 찾아올 줄 알았더라면 미리 청소했을 텐데 말이다.백아영은 심장이 마치 커다란 돌에 짓눌린 듯 굳은 얼굴로 손을 뻗어 불을 켰다.조명이 비추자 방안의 광경이 고스란히 눈앞에 펼쳐졌다. 텅 빈 방에는 찬물과 얼음이 가득 담긴 투명한 나무통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통 안에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이성준이다.수위가 워낙 높아서 아무리 키가 크다고 해도 까치발을 들어야만 간신히 숨을 쉴 수 있었다.물에 빠진 생쥐가 따로 없는 그는 안색이 창백하고 초췌했는데, 보아하니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물고문당한 듯싶었다.숨이 멎는 것 같은 백아영은 심장이 아파서 견딜 수 없었다.이내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얼른 물에서 꺼내지 않고 뭐해?”눈을 감고 물속에 있던 이성준은 소리를 듣자 천천히 눈을 뜨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육채원을 훑어보았다.그녀의 어조에 담긴 초조함과 걱정은 정말 그럴싸했다.“채
그녀는 한 경호원의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키를 꺼내 이성준의 손을 잡고 자물쇠를 풀어주었다.‘찰칵’하고 자물쇠가 열리는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그쪽이랑 잠자리하고 싶거나 죽일 생각 없으니까 우리 아빠가 발견하기 전에 얼른 도망쳐.”백아영이 다급하게 말했다.이성준은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이내 꽉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날 풀어주면 당신이 위험할 텐데요?”“네 알 바 아니야!”꿈쩍도 안 하는 남자를 보자 백아영은 발끈했다. 지금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 모른단 말인가? 아니면 찬물에 너무 오래 있어서 정신이 잘못된 걸까?그녀는 아예 이성준을 끌고 부랴부랴 밖으로 나갔다.하지만 방을 나서는 순간 멀지 않은 곳에서 육홍렬을 마주쳤다.그는 건물 로비에 서서 굳은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는데, 의혹이 가득한 눈빛은 싸늘하지 그지없었다.“육채원, 왜 저 남자를 살려주려는 거지?”육홍렬은 더는 그녀를 우리 공주라고 부르지 않았고, 다정했던 말투도 찾아보기 힘들었다.왜냐하면 지금의 육채원은 평소 성격과 전혀 다르게 행동했기 때문이다. 그가 애지중지하는 딸은 이유 불문하고 아버지 몰래 이바람을 살려주는 그런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눈앞에 있는 육채원이 정녕 그의 딸이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넌 대체 누구야?”육홍렬은 살의가 일렁이는 눈빛으로 캐물었다.뻣뻣하게 굳은 몸으로 제 자리에 서 있는 백아영은 등골이 서늘했다.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서 육홍렬이 찾아와 정면으로 맞닥뜨릴 줄이야!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 있다니!진짜 육채원이라면 절대 불가능한 일을 저질렀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이성준은 팔목을 잡은 여자의 자그마한 손에 힘이 불끈 들어간 걸 느꼈다.온몸이 잔뜩 긴장한 채 제 발 저린 듯 조마조마한 표정까지 너무나도 낯이 익었다.그녀가 아니라면 또 누가 있겠는가?이내 그는 희미한 눈웃음을 지었다.그러고 나서 쌀쌀맞게 육채원의 손을 뿌리치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비아냥거렸다.“하! 연기 그만하시죠?”
분명 맛있는 음식인데도 백아영은 입맛이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몇 입 먹고 난 뒤 배가 아플 정도였다. 그녀는 이성준의 품에 안겨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 이성준은 긴장된 표정으로 그녀를 껴안고 자리에서 크게 화를 냈다. “윌리엄스, 혹시 음식에 독을 넣은거예요?!”윌리엄스는 놀라서 얼굴이 창백해져서 급히 변명했다.“아니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 백아영은 힘겹게 이성준의 손목을 잡고 힘없이 입을 열었다. “윌리엄스가 독을 넣지 않았어. 내가...”“너 왜 그래?” 이성준은 땀을 뻘뻘 흘리며 백아영을 안은 팔뚝을 가볍게 떨었다. 백아영은 몹시 아팠지만 눈길은 부드러웠고 약간 희색을 띠었다. “윌리엄스에게 실례지만, 국왕께 하룻밤 묵을 방을 빌려달라고 부탁해 줘. 그리고 산부인과 의사를 불러줘.”이성준이 눈치를 채지 못하자 백아영은 창백한 얼굴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방금 맥을 짚었는데, 나 임신했어.” 이성준의 동공은 움츠러들었다가 한참 만에 겨우 회복되었다. 찰나의 놀라움 뒤에는 오히려 걱정이 밀려왔다.“임심했는데 통증이 이렇게 심해?”그는 조바심이 나서 윌리엄스에게 의사를 불러오도록 재촉했다. 백아영은 아파서 힘이 없었던 나머지 그의 품에 푹 기대어 있었다. 전에 백아영은 이런 비슷한 환경에서 한 아이가 강제로 유산되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임신한 사실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하고 산에 가서 실랑이를 벌였고, 이로 인해 병세가 심했다. 이 아이를 키우고 싶지만, 고생할까봐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백아영은 가볍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정상적이야.”‘정상이라니?’ 이성준은 다른 여자가 임신을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몰랐지만, 백아영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진작 알았더라면 둘째를 갖지 않았을 것이다. 8개월 후. 산부인과 수술실 문이 열리자 이성준이 급히 달려들였다. 점잖던 남자는 안달복달한 얼굴로 물었다.“제 마누라는 어때요? 무사한가요?”“모녀는 무사합니다.”
집사는 경악했다.“폐하, 그들은 굴러들어 온 복도 차버리니 분명 본때를 보여줘야 하는데, 어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윌리엄스의 안색을 본 집사는 목이 메었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윌리엄스는 조금 전까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던 모습은 사라지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성준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경외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고, 간신히 이빨 사이로 글자를 밀어냈다.이, 이 대표?” 이성준은 경멸하듯 그를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윌리엄 집안의 자식이 확실히 다 컸네.” 윌리엄스의 얼굴이 더 새하얗게 질렸다. 엄청난 두려움이 엄습했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 이성준을 처음 만났다. 그때 이성준은 아직 소년이었지만, 기세가 등등하고, 과감하며, 감히 국왕인 윌리엄스의 아버지와 거래를 논했다. 그 당시 그의 아버지조차도 이성준을 대단하게 여겼다. 심지어 윌리엄스에게 앞으로 절대 이성준의 미움을 사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온 나라의 세력이 처참하게 약해질 것이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부터 이성준은 악마라고 마음에 새겨 두었다. 게다가 윌리엄스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었다. 이성준은 그의 나라에 협조하지 않는 대신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반년 동안 누워계셨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너무 커서 윌리엄스는 일찌감치 이번 생은 절대 H 국에 가지 않기로 했고, 절대로 이성준을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기존의 거래 협력을 모두 점진적으로, 완곡하게 해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항상 악마를 멀리하려고 했지만 이렇게 엮일 줄은 몰랐다. 백아영은 뜻밖에도 이성준의 아내였다! 어떤 생명의 은인 규칙, 첫눈에 반한 사랑 따위는 모두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는 어떤 계획도 할 수 없었다. 단지 자신의 왜 행동을 하기 전에 백아영의 신원을 조사하지 않았는지 후회되었다! 악마를 끌어들여 버렸다... “복을 차버린다나 뭐라나, 말을 그렇게밖에 못해?” 윌리엄스가 집사를 발로 매우 세게 찼
차에 타고 있던 남자들도 일어서더니 기세등등하게 백아영과 이성준을 포위했다. 험상궂은 얼굴의 한 남자가 환영 반 협박 반인 어투로 말했다. “두 분, 차에서 내리십시오.”차 밖에서는 윌리엄스가 활짝 웃으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백아영이 차에서 내리기를 목 빠지게 기다렸다. 곁에 있던 집사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폐하, 궁전의 수비를 모두 강화 완료했습니다. 궁전 주위에 800명의 호위 병사를 추가로 파견했어요. 이분들은 이미 독 안에 든 쥐가 되셔서 도망갈 수 없습니다.” “이혼 변호팀 사람들은 이미 도착하셨고 두 분이 차에서 내리시면 바로 처리할 수 있어요.”“폐하, 곧 미인을 품에 안게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윌리엄스의 입꼬리는 한껏 올라갔다. 산 위에서 백아영의 워낙 강인한 모습에 사람도모자라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지금은 백아영의 대단한 솜씨도, 그녀의 남편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단념할 수밖에 없다. 모두 생명의 은인으로 보고 첫눈에 반하게 만든 백아영 탓이었다. 그는 이 나라의 왕이다. 그가 마음에 드는 한 반드시 그의 것이다. 또한 결혼 후 백아영을 자신의 매력에 매료시켜 점차 이성준을 잊게 할 자신이 충만했다. 윌리엄이 생각을 하던 중, 차 문이 열리고 관광버스에서 백아영이 내렸다. 윌리엄스는 넥타이를 매만지며 그녀를 반겼다.“아가씨, 또 뵙네요.”윌리엄스가 아양을 떠는 모습을 보고 백아영은 입을 다물었다. 백아영의 뒤로 큰 덩치의 이성준이 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머리 위로 이성준은 차갑게 말했다.“내 아내를 뺏으려는 게 너야?” 이성준은 포위망 속에 서 있었다. 다른 사람의 구역에서 그는 독 안에 든 쥐였지만 그는 움츠러들지도 않고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이성준의 기는 모두를 앞질러 버려 마치 모든 것을 장악하는 왕인 것 같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서늘한 몇 글자가 사람을 더욱 섬뜩하게 했다. 집사는 높은 인물들을 많이 보았었기에 즉시 이성준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만 이곳은 그들의 궁전이
윌리엄스는 어안이 벙벙했다.백아영의 솜씨는 정말 놀라웠다. 그녀의 기묘한 침을 꽂는 기술이 더욱 놀라웠다. 보기만 해도 눈이 즐거워지는 백아영의 몸에는 빛이 보였다.그녀의 아름다움은 남달라서 비길 것도 없이 아름다웠다.백아영은 여전히 은침을 손에 들고 윌리엄스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만 좀 건드리세요. 알아들으셨죠?”“저는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윌리엄스의 의욕 넘치는 말은 눈앞으로 가까워져 오는 침에 놀라 목이 메었다. 순식간에 덮쳐 온 위험과 두려움이 그를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게 했다.백아영은 다시 경고했다.“잘 가세요. 바래다 드리지는 않을게요.”젊고 고집스러운 윌리엄스는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위협은 그를 이성적으로 뒤로 물러나 타협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백아영은 바늘을 다시 집어넣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네 부하는 경련을 일으키다가 10여 분 만에 의식을 회복했다. 그들은 서로를 부축하며 몸을 일으키자 멀리 떨어진 곳에 백아영이 보였다. 비록 뒷모습뿐이었지만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폐하, 죄송합니다. 저희가 너무 부족했어요.”윌리엄스는 백아영을 탐욕스럽게 바라보았다.“너희 탓이 아니야. 저 소녀가 너무 강할 뿐이야. 가자. 이제 내려가야지.”부하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 여왕님을... 그냥 이렇게 포기하시려고요?”윌리엄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그럼 내가 지금 뭘 할 수 있겠어?”말이 통하지도 않고 싸워서 이기지도 못하니 부하는 조용히 입을 꾹 닫았다.하지만 윌리엄스는 미소를 띠었다.“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이야.”이성준은 열매 한 봉지 가득 따왔다. 그는 열매를 깨끗이 씻은 뒤 쟁반에 담아 백아영 앞에 대령했다. 하지만 안색이 좋지 않았다.“방금 돌아오는 길에 들었는데 누가 너를 귀찮게 했다면서?”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도리도리 저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문제를 일으켰어.”이성준은 자초지종을 듣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백아영은 잠시 멈칫하더니 웃었다. “아파서 머리까지 다쳤나. 걱정 마세요, 위험했지만 목숨은 건졌어요. 돌아가시면 의사부터 보세요. 잘 케어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에요.”백아영은 진지하게 당부했지만 상대방은 한마디도 귀담아듣지 않았다.백아영이 그만 몸을 일으키려 하자 청년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저 지금 진지해요.”“이것은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규칙이기도 합니다. 생명을 구해준 은인은 반드시 몸으로 갚아야 합니다.”윌리엄스 왕족?백아영은 입헌군주제인 국가에 왔다. 이곳은 현대사회와 어우러졌지만 여전히 왕권을 시행하고 있다. 지금의 왕은 20대 초반의 청년으로 나이는 어리지만 듬직하고 성숙하며 상당한 재주를 가졌다고 전해졌다. 왕은 1년 넘게 국가 정무를 질서 있게 처리했다.다시 이 풋풋하고 고집 센 청년을 본 백아영은 목이 메었다. 왕은 소문과는 좀 다른듯했다.백아영은 청년한테 잡힌 손을 빼냈다.“그냥 눈에 보여서 구해준 거니 고마워하실 필요 없으세요. 그리고 저는 결혼까지 한 여자에요.”“결혼하셨군요...”청년은 매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젊고 예쁜 백아영이 일찍 결혼했으니 흔치는 않은 일이다. 그러나 청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저는 재혼에 대해 편견이 없어요. 남편분과 이혼해도 그대를 왕후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저는 이혼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청년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는 그제야 난처한지 땅바닥에서 일어나 앉아서는 백아영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무슨 복잡한 일을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백아영은 혼자 심각하게 고민하는 청년이 이해가 되지 않아 벌떡 일어나 자리를 뜨려고 했다.곧이어 청년도 벌떡 일어났다. 너무 갑자기 몸을 일으킨 탓인지 몸을 휘청거리자 곁에 있던 남성이 얼른 그를 부축해 주었다.청년은 휘청거리는 몸을 아랑곳하지 않고 백아영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막아섰다. 그의 맑은 눈은 어느새 포악해졌다.“아가씨, 억양을 들어보면 외국인인 것 같네요. 아직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룰에 대해 잘 모
하지만 백아영은 현무가 힘들어할까 봐 차마 너무 많은 프로젝트를 참가하지 못하게 하고 관광지 한 곳만 더 돌고 남원에 돌아갈 생각이었다.이성준은 진지하게 말했다. “출산 장려 정책은 참 옳아.”백아영은 어리둥절했다.“자식이 많아야 집도 떠들썩하고, 현무도 동생이 생기지.”어린 노동자가 하나 더 필요하다는 그의 뜻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이성준은 방긋 웃으며 백아영을 벽에 바짝 붙였다. “여보, 우리 현무에게 동생 만들어주자.”이날 현무와 백아영은 영상통화를 했다. “엄마, 안색이 안 좋아. 어디 아파?”화면 속에서 백아영의 안색은 살짝 하얗게 보였다.하지만 별다르게 불편한 곳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낮에 산에 오르느라 피곤해서 그런가 봐. 괜찮아, 좀 쉬면 괜찮아 질 거야.” “그럼, 내일 일단 산을 내리지 말고 호텔에서 쉬는 거예요?”내일 하산할 예정이었지만 백아영은 단호하게 답했다.“맞아.”그제야 현무는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통화를 끊고 백아영의 이마에 길쭉한 손이 닿았다. 이성준은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정말 괜찮은 거 맞아?”실제로 봤을 때 백아영은 이상이 없어 보였지만 이성준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아. 내가 의사인데 모르겠어?”“하룻밤을 묵어도 좋으니까, 난 네가 좋아하는 열매를 좀 따올게.”이 산의 열매는 특산물이었기에 백아영이 매우 좋아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한 후, 이성준은 혼자 산꼭대기에 가서 열매를 땄고, 백아영은 아름다운 산기슭에 앉아 차를 마시며 아침 풍경을 감상했다. 그녀는 조용히 열매를 기다리고 있었다.기다리는 동안 찻집 안에서 갑자기 시끄러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도와주세요! 여기 도와주세요!”“의사 없어요? 응급처치할 줄 아는 사람 혹시 있어요? 좀 살려주세요! 저의 도련님을 살려주세요...”식당에서 대략 이십 대 초반의 한 청년이 땅에 누워있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
한 달 뒤.인천공항에서 현무는 양복을 차려입고 반듯하게 서서 웃음을 가득 머금고 백아영을 배웅했다.“엄마, 걱정하지 말고 잘 놀다 와요. 여기 일은 저한테 맡겨요.” 현무는 이성준의 아들답게 한 달 만에 기본적인 경영 업무를 배웠고, 심지어 위정을 도울 수 있었다.또한 그는 이성준의 외아들인 만큼 이성그룹의 후계자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는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나이에도 모든 주주와 직원들을 위협하기에 충분했기에 일을 더 쉽게 추진할 수 있었다.게다가 이성준의 한 달간 밑받침을 잘 깔아놓은 덕에 안심하고 현무와 위정에게 이성그룹을 맡길 수 있게 되었다.위정의 불평도 적어졌다. 그는 앞으로 일할 날에 희망이 생긴 것 같았다.“내 아들 최고.”백아영은 현무를 꼭 끌어안고 그의 볼에 쪽 뽀뽀했다.“엄마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영상통화 해. 날마다 기분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누가 감히 너를 괴롭히면, 엄마와 아빠가 바로 날아와서 때려 놓을 거야.”백아영의 품에서 현무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순간 엘리트에서 어린 아기가 되어 자신도 모르게 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하지만 이성준의 말과 백아영의 행복을 생각하며 현무는 마음을 가다듬고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였다.“엄마 걱정하지 마, 외삼촌과 위정 아저씨가 계셔서 아무도 날 못 괴롭혀. 내가 좀 더 크면 내가 엄마를 보호해야 해.”백아영은 감동되어서 감정이 벅차 놀랐다. 현무는 너무 든든한 아들이었다.선우경진은 팔짱을 낀 채 한쪽에 서 있었다. “이씨 가문의 일은 해결됐지만 아직 선우 일가가 남아있다는 것을 잊지 마.”“그리고, 여유가 있으면 새로운 아이템도 많이 생각해 둬.”한 달 동안 그들은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급한 불은 거의 다 껐다. 하지만 의학은 끝이 없고 신약 연구는 더 중요했기에 선우경진은 수시로 백아영을 감시했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다른 곳에서 시야를 넓히고 영감을 얻으면 신약을 개발하는데 더 쉬웠다.이성준은 한쪽에
현무는 계획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지만, 다섯 살짜리 꼬마에게는 좀 시기상조였다. 하지만 이성준은 그런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그러나 이성준의 엄숙한 표정을 보니 바로 계획을 하나 만들어 내야 할 것 같았다.현무는 골똘히 생각했다.“공부를 열심히 해서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고 매일 엄마와 아빠와 함께 있고 싶어요.”“엄마를 기쁘게 해주는 것과 함께 있는 것을 동시에 이룰 수 없어.”“왜요?”현무가 공부해서 잘하고 매일 학교 갔다 오면 자연스레 백아영을 볼 수 있고 그녀도 즐거워하는 게 일상이었다.“너 그동안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잊었어?”현무가 네 살 되기 전까지 백아영은 그의 곁에 있어줄수 없었다. 백아영이 돌아온 후, 비록 온 가족이 드디어 모였지만,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았고 때마다 백아영은 떠나야 했고, 항상 바쁜 일상에 기쁠 때도 있었지만 힘들 때가 더 많았다. 현무는 그런 백아영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엄마는 나와 함께 있어서 기분이 나쁜 거예요?”어린 현무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돌기도 전에 이성준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너 때문이 아니야. 엄마가 놓인 상황 때문이지. 남원에서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일들과 언제든지 생기는 변화 때문이야.”“만약 누군가가 이 짐을 대신 나눠주고, 그런 일들을 완전히 해결해 주고, 엄마가 마음껏 여행을 다닐 수 있게 해준다면 매일 즐거워할 거야.”현무는 어리지만 총명해서 즉시 이성준의 뜻을 알아차렸다.“아빠, 제가 엄마의 일을 나누어서 해도 돼요?”이성준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너는 할 수 있어.”“그런데 힘들 거야. 엄청 힘들 수 있어. 대신에 엄마를 오랫동안 못 볼 텐데, 그래도 할래?”현무는 힘든 것은 두렵지 않지만, 오랫동안 백아영을 볼 수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현무는 머뭇거렸다. 그는 섭섭해서 고뇌했다.“나 그냥 엄마랑 여행 가면 안 돼?”이성준은 자애로운 아버지의 미소를 지었다. “네가 경영대를 일찍 졸업하면 돼.”현무는 지능이 높아서, 월반하는
이성준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 은퇴할 생각이야.”‘역시!’백아영이 머릿속으로만 하던 황당한 추측을 이성준 입으로 직접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믿기지 않았다. 왜 이성준이 갑자기 도망 오려 했던 건지, 그리고 왜 그 큰 짐을 위정과 선우경진한테 내던졋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성준은 그들을 훈련하고 있었다.수단이 좀 잔인했을 뿐이다.“왜 갑자기 은퇴하고 싶은 거야?”백아영은 아직 앞날이 밝은 이성준이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성준은 백아영을 응시하며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쓱쓱 만졌다.“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이성준은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아 수많은 고통을 겪었다.이성준의 괴로운 심정은 눈에 훤히 비쳤다. 그는 사실 오래전부터 은퇴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영아, 앞으로 남은 생 동안 나는 네가 조용하고 평온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은퇴하고 쇼핑센터를 떠나면 원한도 모두 훨훨 털어 버릴 수 있다. 두 사람은 세계 여행하며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된다.백아영의 머릿속은 멍해졌다.백아영은 이성준이 은퇴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자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성준이 계획한 미래에 항상 그녀가 있었다. 그의 미래는 온통 백아영 한사람이었다.백아영은 감동되어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가 환상하던 미래는 정말 기대할 만한 것같았다.“하지만 지금은 내가 선우경진과 위정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 같아.”겨우 보름밖에 안 되었는데, 그들은 고통을 호소하며 참지 못하는데 정말 큰 일이라면 더 감당하기 어려워할 게 뻔했다.이성준은 눈썹을 찡그리며 잠시 사색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현무 이제 다섯 살이니까 남자 다 됐지.”백아영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현무에게 맡길 생각은 아니지?”이성준은 담담하게 되물었다.“안 될 게 뭐가 있어?”‘안 될 게 뭐가 있겠냐고? 현무 이제 겨우 다섯 살인데!’이성준은 여전히 꿈쩍하지 않았다. “내가 다섯 살 때, 이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