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제는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백아영이 아니었다.그녀는 한 손으로 백승구를 안은 채 다른 한 손으로 은침을 꺼냈고 위에는 청독이 묻어 있었다.“승구의 친부가 누군지 말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시간 낭비할 필요가 없을 것 같네.”말을 마치자마자 헬기 한 대가 날아왔고 숲 전체의 나뭇잎이 프로펠러의 바람에 마구 흔들렸다.헬기의 문이 열리자 이성준이 나타났고 검은 수트를 입고 있는 모습은 마치 치타처럼 공격적이었다.그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밧줄을 움켜쥐며 풀쩍 뛰어내리더니 아래로 미끄러지듯 멋지게 바닥에 착지했다.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수많은 발소리가 들려왔고 제갈연준은 완벽하게 포위되었다!“이성준, 내가 분명히 사람 보내서 막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찾아왔지?”너무나도 계획적인 움직임이었다!이성준은 멀지 않은 곳에서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백아영을 바라봤다. 그녀가 가방 속에 숨겨둔 위치추적기를 꺼내자 희미한 붉은 빛이 번쩍였다.“제갈연준, 네가 아무리 머리를 써도 이성준 손바닥 안이야. 처음부터 네 계획을 알아채고 작전 세워서 일부러 이도하 씨가 날 데려가게 했어.”약탈혼은 가짜였지만 제갈연준을 잡기 위해 이도하가 백아영을 데려가게끔 서로 손을 잡았다!“아이의 아빠가 누구인지 알려줄 만큼 흥분하지 않은 게 아쉽긴 한데 괜찮아. 네 입을 열 방법은 아주 많거든.”4년 동안 제갈연준이 저질렀던 파렴치한 짓들을 생각하면 하나씩 모조리 되갚아 주고 싶었다.모든 경우의 수를 계산하며 오랫동안 계획했던 일이 망쳐지자, 제갈연준의 얼굴은 분노로 어두워졌고 즉시 달려가서 이성준을 죽이고 싶었지만, 이성의 끈을 붙잡으며 말했다.“이도하, 당장 백아영 잡아. 그러면 이성준도 함부로 행동하지 못할 거야!”제갈연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백아영을 붙잡더니 날카로운 칼날을 그녀의 목에 댔다.“이성준, 사람들 철수시키지 않으면 백아영은 오늘 나랑 같이 죽을 거야.”순간 자신감을 되찾은 제갈연준은 말을 이어가면서 이도하의 곁으로 자리를 옮겼다.백아영이 손에
이도하가 곧바로 태세 전환하는 건 제갈연준이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감을 못 잡던 그때 백아영이 독가루를 뿌렸고, 동시에 날카로운 은침이 그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이 바늘에 찔리는 순간 모든 전투력을 잃은 채 독 안의 든 쥐가 된다.이건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백아영과 이성준의 철저한 계획이다. 그녀가 은침으로 제갈연준을 기절시킨 후 이성준이 그를 잡는다면 도망치는 건 절대 꿈꿀 수 없는 일이다.그러나 은침이 제갈연준의 피부를 찌르려는 순간, 품 안에 있던 백승구가 잠에서 깨어나더니 악몽이라도 꾼 듯 몸부림을 쳤다.비록 힘은 세지 않았지만 은침의 정확도에 영향을 주어 원하던 곳보다 살짝 빗겨 난 다른 위치에 놓게 되었다!몸에 아무런 영향이 없었던 제갈연준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고, 눈 깜짝할 사이에 백아영한테서 멀어져 그를 에워싼 경호원들을 향해 돌진했다.백아영은 답답한 마음에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잡아!”이성준도 곧바로 제갈연준을 잡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비록 백아영은 실패했지만 아직 주위에는 수많은 경호원이 있었고 심지어 이성준이 직접 손을 쓰고 있으니 쉽게 도망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이성준이 막 쫓아가려는 찰나 어디선가 느껴지는 싸늘한 눈빛에 순간 동공이 흔들리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백아영!”백승구는 날카로운 칼로 주저 없이 백아영을 찔렀다.품에 안고 있어 미처 반응하지 못한 백아영은 칼날이 살갗을 찌르고 심장을 관통할 만큼 깊이 파고들어 와도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그저 믿기 힘들다는 듯 멍하니 품 안에 안긴 아이를 바라봤다.등에 흐르는 피는 붉은 매화처럼 퍼져갔고 이성준은 제갈연준을 잡을 겨를도 없이 백아영을 향해 달려갔다.그는 한 손으로 백아영을 안고 다른 한 손으로 백승구의 멱살을 잡더니 분노하며 바닥에 내던졌다. 안 그래도 아픈 몸이 바닥에서 두 바퀴 구르자 이제는 일어날 힘조차 없었다.그러나 그는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한 듯 여전히 독사처럼 사악한 눈으로 백아영을 노려보
“아니, 그럴 리가 없어. 승구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자라는 모습을 전부 지켜봤어. 비록 몇 달에 한 번씩 보긴했지만 이목구비는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어서 절대 틀리지 않을 거야!”그의 말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백아영은 현실 부정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이성준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고 재빨리 구급상자로 상처를 지혈하며 침착하게 말했다.“경진 씨가 네 아버지와 백승구의 DNA로 유전자 검사를 했는데 혈연관계 없다고 나왔어.”결정적인 증거였다.“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제갈연준이 바꿔치기했을 가능성도 있을 거야.”그간의 마음고생과 마지막 희망까지 산산조각났다.그녀는 여태껏 자신이 깊이 생각하지 못하던 부분까지 기억하기 시작했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얼굴을 보기도 전에 제갈연준에게 안겨 갔고 이틀이 지나서야 다시 만날 수 있었다.아마도 그때 제갈연준이 아이를 바꾼 게 아닌가 싶은 의심이 들었다.“그럼... 내 아이는?”백아영은 벼랑 끝 절벽에서 낭떠러지로 떨어진 듯한 느낌이었다.“제갈연준, 내 아이는?!”제갈연준은 경호원들과 싸우고 있었는데 독가루에 중독된 덕분인지 몸놀림이 그리 민첩하지 않아 불리한 위치에 놓였다.그러나 그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여전히 사악함이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백아영, 백승구 어떻게 자랐는지 알려줄까? 처음 기어가는 법을 배웠을 때 수백 명의 아이들과 함께 젖병을 빼앗았어. 이긴 아이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모조리 죽여버렸는데 이 잔인한 승부의 세계에서 유일하게 끝까지 버틴 게 백승구야. 네 아이는 어떻게 됐는지 말 안 해도 알겠지?”절벽 아래 떨어진 채 큰 바위에 짓눌려 온몸이 부서진 듯한 느낌에 백아영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쿨럭’하며 피를 토했다.“젠장!”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이성준은 단호하게 말했다.“이도하, 가만히 서서 뭐하는 거야. 얼른 잡아서 죽여버려야지!”이도하가 달려가려던 순간 제갈연준이 갑자기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늦었어.”말이 끝나자마자
“백아영, 침착해. 제갈연준의 말에 흔들리지 마. 아이는 널 위협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인데 절대 죽게 만들지는 않았을 거야. 무조건 살아있어!”초점 잃은 두 눈동자가 잠깐 반짝였으나 또 다시 걷잡을 수 없는 막연함에 사로잡혔다.이성준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약속했다.“내가 꼭 찾아서 안전하게 너한테 데려다줄게. 믿어줘!”굳건하고 확신에 찬 그의 목소리는 백아영의 마음을 잠식하고 있는 어둠이라는 딱딱한 껍데기를 조금씩 깨뜨렸다.끝없는 심연 속에서 그녀는 자신을 구원해 줄 빛을 보았다.힘을 얻게 된 백아영은 두려움과 절망을 비로소 내려놓을 수 있었고 다시 살아난 듯 안정을 되찾았다.“나머지 일은 나한테 맡기고 일단 넌 치료부터 해.”이성준은 조심스럽게 백아영을 안아 바깥쪽 차량으로 향했고 고개를 숙이자 바닥에 누워있는 백승구를 보게 되었다.그의 안색은 무서울 정도로 창백했는데 입가에는 선홍색의 핏자국이 보였다.친아들로 여기고 오랫동안 사랑해 온 탓일까, 지금도 백아영은 그를 보면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을 느꼈다.이를 눈치챈 이성준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제갈연준이 키운 아이라면 백혈병도 가짜일 텐데 죽지는 않을 거야.”“위정, 백승구 데려가.”말을 마친 그는 다시 백아영의 귓가에 속삭이며 안심시켰다.“함부로 대하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순간 마음이 녹아버린 백아영은 감동을 금치 못했다.그녀는 자신이 모순적인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백승구의 사기와 기만, 심지어 악랄함까지 미워하면서도 그를 보면 마음이 약해졌고 이성과 감성의 그 사이에서 주저하고 있었다.이 모든 걸 눈치챈 이성준은 일찌감치 백승구를 챙겼고 그의 모습에 백아영은 쉰 목소리로 답했다.“고마워.”이성준은 무거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몸의 상처도 결코 가볍지만은 않았고 마음의 상처는 더더욱 말할 수가 없었기에 후회가 밀려왔다.“널 따라오게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그는 제갈연준을 잡기 위해 백아영을 이 일에 끌어들인 자신을 원망했고 아무리 치밀
그녀는 외부인이자 제3자에 불과한 자신이 이성준의 품에 안겨있는 게 낯 뜨거웠다.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으나 부상을 입은 탓에 중심을 못 잡았고, 휘청거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이성준은 미간을 찌푸렸다.“백아영...”잡으려 손을 뻗은 순간 백아영은 잽싸게 몸을 피했고 마침 선우경진이 그녀를 부축했다.손은 어색하게 허공에서 굳어 버렸고 표정마저 어두워졌다.그녀 역시 마음이 무거웠지만 애써 이성준의 시선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오늘 일은 정말 고마웠어.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꼭 보답할게. 내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찾아와. 그럼, 이만...”그녀는 백채영의 눈치를 살피고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들어갈게.”그녀는 선우경진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별장으로 들어갔고 선우경진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이성준을 바라보고는 한숨을 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곧 선우 일가의 별장 앞에는 이성준과 백채영 둘만 남았다.이성준은 백아영이 떠나는 방향을 바라보며 표정이 어두워졌고 분위기는 엄동설한이 된 듯 찬 바람만 쌩쌩 불었다.백채영은 그런 이성준이 두려웠다.어렵게 얻은 기회를 놓치기 싫었던 그녀는 억울한 듯 불쌍한 척하며 입을 열었다.“성준 씨, 방해하려고 한 건 아니었어. 화내지 마... 난 그냥...”차오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던 백채영은 대성통곡했다.“성준 씨가 날 버리고 떠날까 봐 두려워서...”이성준은 당장이라도 발차기를 날리고 싶을 만큼 그녀의 모습이 꼴 보기 싫었고, 이제는 인내심과 감정을 잃은 지 오래였다.제갈연준이 아직 잡히지 않았으니 백채영도 언젠가 쓸모가 있을 거란 생각만으로 차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싸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봤다.“전에 말했듯이 테스트를 전부 통과해야만 현무 엄마가 될 수 있다고 했지? 얼른 수업받으러 가.”부정하지 않았다는 건 아직 기회가 남았다는 뜻이기에 순간 기분이 좋아졌다.“알겠어. 지금 바로 갈게. 성준 씨 실망하지 않게 최대한 빨리 모든 테스트를 통과할게. 그런데.
말을 마친 리사는 곧바로 전화를 끊었고 백채영은 꺼진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며 홧김에 욕설을 퍼부었다.“능력도 없는 주제에 성격까지 더럽네. 쓰레기 같은 년!”그녀는 리사가 말한 아들에 대해 조금도 개의치 않았고 전혀 관심이 없었다.4년 전 제갈연준과 아이를 바꾼 후 백채영은 아들의 존재를 신경조차 쓰지 않았고 생사는 더욱 궁금하지도 않았다.노경우의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이 알려질 바엔 차라리 아이가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그녀는 백승구와 이성준이 만날 때마다 늘 조마조마했다. 제갈연준이 아이를 원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라면 일찌감치 저세상으로 보냈을 것이다.통화를 마친 백채영은 화가 잔뜩 난 채로 수업하러 갔고 같은 시각 위정은 전화 한 통을 받았다.“백채영 씨가 제갈 일가와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통화 시간이 너무 짧아서 위치 추적을 못 했습니다.”“계속 지켜봐.”...이도하는 이성준과 함께 떠나지 않았고 심은아를 만나기 위해 함께 선우 일가로 들어갔다.그 시각 백아영이 다쳤다는 소식에 부랴부랴 걸음을 옮기던 심은아는 마침 계단에서 이도하와 마주쳤다.이도하는 그녀를 위아래로 자세히 훑어봤고 무사한 걸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곧이어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가더니 그녀를 품에 안은 채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다.“다행이야!”제갈연준에게 붙잡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얼마나 무섭고 당황했는지, 그녀를 잃을까 봐 얼마나 두려웠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그녀를 지키기 위해 제갈연준의 조건을 마다하지 않았고, 이성준을 배신한 것도 모자라 스스로 호랑이굴에 들어가게끔 백아영까지 속였다.무의식적으로 이도하를 끌어안았던 심은아는 어깨 너머로 보이는 백아영의 모습에 도둑이 제 발 저린 듯 겁에 질려 허둥지둥 그를 밀어냈다.마치 잘못을 저지른 어린아이처럼 안절부절 못한 채 죄책감이 가득한 모습이었다.“죄송해요. 숨길 생각은 아니었어요. 도하랑 서로 사랑하는 걸 아는데 차마 입을 열기가... 전 빼앗을 생각도 없고 제 은인
“은아 구해줘서 고마워.”심은아를 끌어안고 있는 이도하의 얼굴에는 죄책감이 가득했다.“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 사과할게. 정말 미안해.”백아영은 정신을 차리고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선택의 여지가 없었잖아요. 그래도 덕분에 아빠를 찾게 되었어요. 고마워요.”이도하가 그녀의 부모가 아직 살아있고 끔찍한 곳에 갇혀 있다는 단서를 흘리지 않았더라면 심씨 일가를 찾아낼 수도, 아버지를 찾을 수도 없었다.협박을 당하면서도 그녀를 도우려고 일부러 말실수한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러면 서로한테 빚진 게 없는 거죠?”불편한 마음으로 지내지 않길 바라는 백아영의 배려에 이도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기회가 된다면 백아영의 아들을 찾아주기로 마음먹었다.“아 참, 백승구 친부는 노경우예요. 비밀리에 제갈연준의 밑에서 일하고 있으니까 조심해요.”“노경우요?”예상치 못한 이름에 백아영은 깜짝 놀랐다.“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하더니...”그동안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이 노경우의 아이였다는 생각에 역겨움을 느꼈으나 이 정보는 너무 유용했다.비록 본성이 악하지만 그래도 세 살배기 아이에 불과했고, 그동안 함께했던 정을 쉽사리 버리지 못했던 그녀는 백승구가 백혈병으로 죽는 걸 지켜볼 바엔 차라리 노경우를 잡아 그를 살리기로 마음먹었다.“알려줘서 고마워요.”“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해. 그럼 난 은아랑 이만 가볼게.”막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갑자기 심은아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더니 힘없이 이도하의 몸에 쓰러졌다.“배가... 배가 너무 아파...”말을 이어가는 동안 그녀의 치마에 핏자국이 번졌다.“은아야, 왜 그래?!”깜짝 놀란 이도하는 재빨리 심은아를 끌어안았고 이 상황을 지켜보던 백아영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은아 씨, 혹시 임신하셨어요?”심은아는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얼마 전에 알았어요...”그녀는 떨리는 손을 뻗어 백아영의 치맛자락을 붙잡았다.“아영 씨, 제발 우리 아이 살려줘요...”“걱정 말아요.
“백아영, 얼른 누워!”심은아의 치료를 마친 선우경진은 백아영의 방으로 들어와 강제로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아이 찾는 건 내가 할 테니까 넌 무조건 쉬고 있어. 말 안 들으면 제갈연준이 어디 있는지 알아내도 너한테 얘기 안 할 거야.”백아영은 어쩔 수 없이 가만히 누워있어야만 했다.밤에는 지속적으로 악몽을 꾸었고 꿈속은 불쌍한 아이의 모습으로 가득했다.아이는 포대기에 싸여 있어 얼굴조차 볼 수 없었다. 누군가가 아이를 강제로 끌고 가자, 필사적으로 쫓아갔지만 턱없이 부족했고 점점 시야에서 멀어져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만질 수도 잡을 수도 없는 상황과 더불어 아이를 잃을 것 같은 두려움이 그녀를 집어삼켜 마치 지옥으로 떨어지는 느낌에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아가야!”그녀는 식은땀을 뚝뚝 흘리며 침대에 앉아있었고 상처가 벌어진 듯 등이 따끔했으나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창밖에 캄캄한 하늘을 바라보자 마음속의 초조함과 불안이 파도처럼 밀려오더니 점점 높아지는 파도에 좀처럼 진정할 수 없었다.‘아이는 잘 있을까?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며칠 동안 치료하고 있었지만, 백아영의 상태는 크게 호전되지 않았고 나날이 심해지는 정신적인 고통에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선명했다.그녀의 모습에 선우경진도 마음이 아팠으나 도울 방법이 없었다.그날 저녁, 죽 두 숟가락 외에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백아영은 멍하니 침대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온통 아이밖에 없었고 불안한 마음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그때 갑자기 방문이 열리더니 문 앞에는 이성준과 이현무가 있었다.인기척에 고개를 돌린 백아영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그들의 등장에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이성준은 초췌한 그녀의 모습에 눈빛이 흔들렸지만, 여전히 잘생긴 얼굴을 유지하며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현무가 계속 다리 아프다고 하는데 네가 좀 봐줘. 다른 의사 선생님들은 원인을 못 찾겠대.”이성준의 품에 안겨있던 이현무는 많이 아픈지 괴로워하며 백
분명 맛있는 음식인데도 백아영은 입맛이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몇 입 먹고 난 뒤 배가 아플 정도였다. 그녀는 이성준의 품에 안겨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 이성준은 긴장된 표정으로 그녀를 껴안고 자리에서 크게 화를 냈다. “윌리엄스, 혹시 음식에 독을 넣은거예요?!”윌리엄스는 놀라서 얼굴이 창백해져서 급히 변명했다.“아니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 백아영은 힘겹게 이성준의 손목을 잡고 힘없이 입을 열었다. “윌리엄스가 독을 넣지 않았어. 내가...”“너 왜 그래?” 이성준은 땀을 뻘뻘 흘리며 백아영을 안은 팔뚝을 가볍게 떨었다. 백아영은 몹시 아팠지만 눈길은 부드러웠고 약간 희색을 띠었다. “윌리엄스에게 실례지만, 국왕께 하룻밤 묵을 방을 빌려달라고 부탁해 줘. 그리고 산부인과 의사를 불러줘.”이성준이 눈치를 채지 못하자 백아영은 창백한 얼굴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방금 맥을 짚었는데, 나 임신했어.” 이성준의 동공은 움츠러들었다가 한참 만에 겨우 회복되었다. 찰나의 놀라움 뒤에는 오히려 걱정이 밀려왔다.“임심했는데 통증이 이렇게 심해?”그는 조바심이 나서 윌리엄스에게 의사를 불러오도록 재촉했다. 백아영은 아파서 힘이 없었던 나머지 그의 품에 푹 기대어 있었다. 전에 백아영은 이런 비슷한 환경에서 한 아이가 강제로 유산되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임신한 사실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하고 산에 가서 실랑이를 벌였고, 이로 인해 병세가 심했다. 이 아이를 키우고 싶지만, 고생할까봐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백아영은 가볍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정상적이야.”‘정상이라니?’ 이성준은 다른 여자가 임신을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몰랐지만, 백아영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진작 알았더라면 둘째를 갖지 않았을 것이다. 8개월 후. 산부인과 수술실 문이 열리자 이성준이 급히 달려들였다. 점잖던 남자는 안달복달한 얼굴로 물었다.“제 마누라는 어때요? 무사한가요?”“모녀는 무사합니다.”
집사는 경악했다.“폐하, 그들은 굴러들어 온 복도 차버리니 분명 본때를 보여줘야 하는데, 어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윌리엄스의 안색을 본 집사는 목이 메었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윌리엄스는 조금 전까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던 모습은 사라지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성준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경외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고, 간신히 이빨 사이로 글자를 밀어냈다.이, 이 대표?” 이성준은 경멸하듯 그를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윌리엄 집안의 자식이 확실히 다 컸네.” 윌리엄스의 얼굴이 더 새하얗게 질렸다. 엄청난 두려움이 엄습했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 이성준을 처음 만났다. 그때 이성준은 아직 소년이었지만, 기세가 등등하고, 과감하며, 감히 국왕인 윌리엄스의 아버지와 거래를 논했다. 그 당시 그의 아버지조차도 이성준을 대단하게 여겼다. 심지어 윌리엄스에게 앞으로 절대 이성준의 미움을 사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온 나라의 세력이 처참하게 약해질 것이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부터 이성준은 악마라고 마음에 새겨 두었다. 게다가 윌리엄스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었다. 이성준은 그의 나라에 협조하지 않는 대신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반년 동안 누워계셨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너무 커서 윌리엄스는 일찌감치 이번 생은 절대 H 국에 가지 않기로 했고, 절대로 이성준을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기존의 거래 협력을 모두 점진적으로, 완곡하게 해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항상 악마를 멀리하려고 했지만 이렇게 엮일 줄은 몰랐다. 백아영은 뜻밖에도 이성준의 아내였다! 어떤 생명의 은인 규칙, 첫눈에 반한 사랑 따위는 모두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는 어떤 계획도 할 수 없었다. 단지 자신의 왜 행동을 하기 전에 백아영의 신원을 조사하지 않았는지 후회되었다! 악마를 끌어들여 버렸다... “복을 차버린다나 뭐라나, 말을 그렇게밖에 못해?” 윌리엄스가 집사를 발로 매우 세게 찼
차에 타고 있던 남자들도 일어서더니 기세등등하게 백아영과 이성준을 포위했다. 험상궂은 얼굴의 한 남자가 환영 반 협박 반인 어투로 말했다. “두 분, 차에서 내리십시오.”차 밖에서는 윌리엄스가 활짝 웃으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백아영이 차에서 내리기를 목 빠지게 기다렸다. 곁에 있던 집사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폐하, 궁전의 수비를 모두 강화 완료했습니다. 궁전 주위에 800명의 호위 병사를 추가로 파견했어요. 이분들은 이미 독 안에 든 쥐가 되셔서 도망갈 수 없습니다.” “이혼 변호팀 사람들은 이미 도착하셨고 두 분이 차에서 내리시면 바로 처리할 수 있어요.”“폐하, 곧 미인을 품에 안게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윌리엄스의 입꼬리는 한껏 올라갔다. 산 위에서 백아영의 워낙 강인한 모습에 사람도모자라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지금은 백아영의 대단한 솜씨도, 그녀의 남편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단념할 수밖에 없다. 모두 생명의 은인으로 보고 첫눈에 반하게 만든 백아영 탓이었다. 그는 이 나라의 왕이다. 그가 마음에 드는 한 반드시 그의 것이다. 또한 결혼 후 백아영을 자신의 매력에 매료시켜 점차 이성준을 잊게 할 자신이 충만했다. 윌리엄이 생각을 하던 중, 차 문이 열리고 관광버스에서 백아영이 내렸다. 윌리엄스는 넥타이를 매만지며 그녀를 반겼다.“아가씨, 또 뵙네요.”윌리엄스가 아양을 떠는 모습을 보고 백아영은 입을 다물었다. 백아영의 뒤로 큰 덩치의 이성준이 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머리 위로 이성준은 차갑게 말했다.“내 아내를 뺏으려는 게 너야?” 이성준은 포위망 속에 서 있었다. 다른 사람의 구역에서 그는 독 안에 든 쥐였지만 그는 움츠러들지도 않고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이성준의 기는 모두를 앞질러 버려 마치 모든 것을 장악하는 왕인 것 같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서늘한 몇 글자가 사람을 더욱 섬뜩하게 했다. 집사는 높은 인물들을 많이 보았었기에 즉시 이성준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만 이곳은 그들의 궁전이
윌리엄스는 어안이 벙벙했다.백아영의 솜씨는 정말 놀라웠다. 그녀의 기묘한 침을 꽂는 기술이 더욱 놀라웠다. 보기만 해도 눈이 즐거워지는 백아영의 몸에는 빛이 보였다.그녀의 아름다움은 남달라서 비길 것도 없이 아름다웠다.백아영은 여전히 은침을 손에 들고 윌리엄스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만 좀 건드리세요. 알아들으셨죠?”“저는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윌리엄스의 의욕 넘치는 말은 눈앞으로 가까워져 오는 침에 놀라 목이 메었다. 순식간에 덮쳐 온 위험과 두려움이 그를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게 했다.백아영은 다시 경고했다.“잘 가세요. 바래다 드리지는 않을게요.”젊고 고집스러운 윌리엄스는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위협은 그를 이성적으로 뒤로 물러나 타협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백아영은 바늘을 다시 집어넣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네 부하는 경련을 일으키다가 10여 분 만에 의식을 회복했다. 그들은 서로를 부축하며 몸을 일으키자 멀리 떨어진 곳에 백아영이 보였다. 비록 뒷모습뿐이었지만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폐하, 죄송합니다. 저희가 너무 부족했어요.”윌리엄스는 백아영을 탐욕스럽게 바라보았다.“너희 탓이 아니야. 저 소녀가 너무 강할 뿐이야. 가자. 이제 내려가야지.”부하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 여왕님을... 그냥 이렇게 포기하시려고요?”윌리엄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그럼 내가 지금 뭘 할 수 있겠어?”말이 통하지도 않고 싸워서 이기지도 못하니 부하는 조용히 입을 꾹 닫았다.하지만 윌리엄스는 미소를 띠었다.“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이야.”이성준은 열매 한 봉지 가득 따왔다. 그는 열매를 깨끗이 씻은 뒤 쟁반에 담아 백아영 앞에 대령했다. 하지만 안색이 좋지 않았다.“방금 돌아오는 길에 들었는데 누가 너를 귀찮게 했다면서?”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도리도리 저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문제를 일으켰어.”이성준은 자초지종을 듣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백아영은 잠시 멈칫하더니 웃었다. “아파서 머리까지 다쳤나. 걱정 마세요, 위험했지만 목숨은 건졌어요. 돌아가시면 의사부터 보세요. 잘 케어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에요.”백아영은 진지하게 당부했지만 상대방은 한마디도 귀담아듣지 않았다.백아영이 그만 몸을 일으키려 하자 청년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저 지금 진지해요.”“이것은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규칙이기도 합니다. 생명을 구해준 은인은 반드시 몸으로 갚아야 합니다.”윌리엄스 왕족?백아영은 입헌군주제인 국가에 왔다. 이곳은 현대사회와 어우러졌지만 여전히 왕권을 시행하고 있다. 지금의 왕은 20대 초반의 청년으로 나이는 어리지만 듬직하고 성숙하며 상당한 재주를 가졌다고 전해졌다. 왕은 1년 넘게 국가 정무를 질서 있게 처리했다.다시 이 풋풋하고 고집 센 청년을 본 백아영은 목이 메었다. 왕은 소문과는 좀 다른듯했다.백아영은 청년한테 잡힌 손을 빼냈다.“그냥 눈에 보여서 구해준 거니 고마워하실 필요 없으세요. 그리고 저는 결혼까지 한 여자에요.”“결혼하셨군요...”청년은 매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젊고 예쁜 백아영이 일찍 결혼했으니 흔치는 않은 일이다. 그러나 청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저는 재혼에 대해 편견이 없어요. 남편분과 이혼해도 그대를 왕후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저는 이혼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청년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는 그제야 난처한지 땅바닥에서 일어나 앉아서는 백아영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무슨 복잡한 일을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백아영은 혼자 심각하게 고민하는 청년이 이해가 되지 않아 벌떡 일어나 자리를 뜨려고 했다.곧이어 청년도 벌떡 일어났다. 너무 갑자기 몸을 일으킨 탓인지 몸을 휘청거리자 곁에 있던 남성이 얼른 그를 부축해 주었다.청년은 휘청거리는 몸을 아랑곳하지 않고 백아영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막아섰다. 그의 맑은 눈은 어느새 포악해졌다.“아가씨, 억양을 들어보면 외국인인 것 같네요. 아직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룰에 대해 잘 모
하지만 백아영은 현무가 힘들어할까 봐 차마 너무 많은 프로젝트를 참가하지 못하게 하고 관광지 한 곳만 더 돌고 남원에 돌아갈 생각이었다.이성준은 진지하게 말했다. “출산 장려 정책은 참 옳아.”백아영은 어리둥절했다.“자식이 많아야 집도 떠들썩하고, 현무도 동생이 생기지.”어린 노동자가 하나 더 필요하다는 그의 뜻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이성준은 방긋 웃으며 백아영을 벽에 바짝 붙였다. “여보, 우리 현무에게 동생 만들어주자.”이날 현무와 백아영은 영상통화를 했다. “엄마, 안색이 안 좋아. 어디 아파?”화면 속에서 백아영의 안색은 살짝 하얗게 보였다.하지만 별다르게 불편한 곳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낮에 산에 오르느라 피곤해서 그런가 봐. 괜찮아, 좀 쉬면 괜찮아 질 거야.” “그럼, 내일 일단 산을 내리지 말고 호텔에서 쉬는 거예요?”내일 하산할 예정이었지만 백아영은 단호하게 답했다.“맞아.”그제야 현무는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통화를 끊고 백아영의 이마에 길쭉한 손이 닿았다. 이성준은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정말 괜찮은 거 맞아?”실제로 봤을 때 백아영은 이상이 없어 보였지만 이성준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아. 내가 의사인데 모르겠어?”“하룻밤을 묵어도 좋으니까, 난 네가 좋아하는 열매를 좀 따올게.”이 산의 열매는 특산물이었기에 백아영이 매우 좋아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한 후, 이성준은 혼자 산꼭대기에 가서 열매를 땄고, 백아영은 아름다운 산기슭에 앉아 차를 마시며 아침 풍경을 감상했다. 그녀는 조용히 열매를 기다리고 있었다.기다리는 동안 찻집 안에서 갑자기 시끄러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도와주세요! 여기 도와주세요!”“의사 없어요? 응급처치할 줄 아는 사람 혹시 있어요? 좀 살려주세요! 저의 도련님을 살려주세요...”식당에서 대략 이십 대 초반의 한 청년이 땅에 누워있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
한 달 뒤.인천공항에서 현무는 양복을 차려입고 반듯하게 서서 웃음을 가득 머금고 백아영을 배웅했다.“엄마, 걱정하지 말고 잘 놀다 와요. 여기 일은 저한테 맡겨요.” 현무는 이성준의 아들답게 한 달 만에 기본적인 경영 업무를 배웠고, 심지어 위정을 도울 수 있었다.또한 그는 이성준의 외아들인 만큼 이성그룹의 후계자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는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나이에도 모든 주주와 직원들을 위협하기에 충분했기에 일을 더 쉽게 추진할 수 있었다.게다가 이성준의 한 달간 밑받침을 잘 깔아놓은 덕에 안심하고 현무와 위정에게 이성그룹을 맡길 수 있게 되었다.위정의 불평도 적어졌다. 그는 앞으로 일할 날에 희망이 생긴 것 같았다.“내 아들 최고.”백아영은 현무를 꼭 끌어안고 그의 볼에 쪽 뽀뽀했다.“엄마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영상통화 해. 날마다 기분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누가 감히 너를 괴롭히면, 엄마와 아빠가 바로 날아와서 때려 놓을 거야.”백아영의 품에서 현무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순간 엘리트에서 어린 아기가 되어 자신도 모르게 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하지만 이성준의 말과 백아영의 행복을 생각하며 현무는 마음을 가다듬고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였다.“엄마 걱정하지 마, 외삼촌과 위정 아저씨가 계셔서 아무도 날 못 괴롭혀. 내가 좀 더 크면 내가 엄마를 보호해야 해.”백아영은 감동되어서 감정이 벅차 놀랐다. 현무는 너무 든든한 아들이었다.선우경진은 팔짱을 낀 채 한쪽에 서 있었다. “이씨 가문의 일은 해결됐지만 아직 선우 일가가 남아있다는 것을 잊지 마.”“그리고, 여유가 있으면 새로운 아이템도 많이 생각해 둬.”한 달 동안 그들은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급한 불은 거의 다 껐다. 하지만 의학은 끝이 없고 신약 연구는 더 중요했기에 선우경진은 수시로 백아영을 감시했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다른 곳에서 시야를 넓히고 영감을 얻으면 신약을 개발하는데 더 쉬웠다.이성준은 한쪽에
현무는 계획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지만, 다섯 살짜리 꼬마에게는 좀 시기상조였다. 하지만 이성준은 그런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그러나 이성준의 엄숙한 표정을 보니 바로 계획을 하나 만들어 내야 할 것 같았다.현무는 골똘히 생각했다.“공부를 열심히 해서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고 매일 엄마와 아빠와 함께 있고 싶어요.”“엄마를 기쁘게 해주는 것과 함께 있는 것을 동시에 이룰 수 없어.”“왜요?”현무가 공부해서 잘하고 매일 학교 갔다 오면 자연스레 백아영을 볼 수 있고 그녀도 즐거워하는 게 일상이었다.“너 그동안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잊었어?”현무가 네 살 되기 전까지 백아영은 그의 곁에 있어줄수 없었다. 백아영이 돌아온 후, 비록 온 가족이 드디어 모였지만,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았고 때마다 백아영은 떠나야 했고, 항상 바쁜 일상에 기쁠 때도 있었지만 힘들 때가 더 많았다. 현무는 그런 백아영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엄마는 나와 함께 있어서 기분이 나쁜 거예요?”어린 현무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돌기도 전에 이성준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너 때문이 아니야. 엄마가 놓인 상황 때문이지. 남원에서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일들과 언제든지 생기는 변화 때문이야.”“만약 누군가가 이 짐을 대신 나눠주고, 그런 일들을 완전히 해결해 주고, 엄마가 마음껏 여행을 다닐 수 있게 해준다면 매일 즐거워할 거야.”현무는 어리지만 총명해서 즉시 이성준의 뜻을 알아차렸다.“아빠, 제가 엄마의 일을 나누어서 해도 돼요?”이성준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너는 할 수 있어.”“그런데 힘들 거야. 엄청 힘들 수 있어. 대신에 엄마를 오랫동안 못 볼 텐데, 그래도 할래?”현무는 힘든 것은 두렵지 않지만, 오랫동안 백아영을 볼 수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현무는 머뭇거렸다. 그는 섭섭해서 고뇌했다.“나 그냥 엄마랑 여행 가면 안 돼?”이성준은 자애로운 아버지의 미소를 지었다. “네가 경영대를 일찍 졸업하면 돼.”현무는 지능이 높아서, 월반하는
이성준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 은퇴할 생각이야.”‘역시!’백아영이 머릿속으로만 하던 황당한 추측을 이성준 입으로 직접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믿기지 않았다. 왜 이성준이 갑자기 도망 오려 했던 건지, 그리고 왜 그 큰 짐을 위정과 선우경진한테 내던졋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성준은 그들을 훈련하고 있었다.수단이 좀 잔인했을 뿐이다.“왜 갑자기 은퇴하고 싶은 거야?”백아영은 아직 앞날이 밝은 이성준이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성준은 백아영을 응시하며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쓱쓱 만졌다.“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이성준은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아 수많은 고통을 겪었다.이성준의 괴로운 심정은 눈에 훤히 비쳤다. 그는 사실 오래전부터 은퇴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영아, 앞으로 남은 생 동안 나는 네가 조용하고 평온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은퇴하고 쇼핑센터를 떠나면 원한도 모두 훨훨 털어 버릴 수 있다. 두 사람은 세계 여행하며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된다.백아영의 머릿속은 멍해졌다.백아영은 이성준이 은퇴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자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성준이 계획한 미래에 항상 그녀가 있었다. 그의 미래는 온통 백아영 한사람이었다.백아영은 감동되어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가 환상하던 미래는 정말 기대할 만한 것같았다.“하지만 지금은 내가 선우경진과 위정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 같아.”겨우 보름밖에 안 되었는데, 그들은 고통을 호소하며 참지 못하는데 정말 큰 일이라면 더 감당하기 어려워할 게 뻔했다.이성준은 눈썹을 찡그리며 잠시 사색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현무 이제 다섯 살이니까 남자 다 됐지.”백아영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현무에게 맡길 생각은 아니지?”이성준은 담담하게 되물었다.“안 될 게 뭐가 있어?”‘안 될 게 뭐가 있겠냐고? 현무 이제 겨우 다섯 살인데!’이성준은 여전히 꿈쩍하지 않았다. “내가 다섯 살 때, 이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