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연준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아영은 곧 내 곁으로 돌아올 거야. 이제 백채영이 나설 차례니까 준비하라고 해.”...다음날 백아영은 기회를 봐서 이성준에게 다시 말을 꺼낼 계획이지만, 아침부터 일 보러 회사에 갔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게다가 저녁에도 늦게 들어오니까 기다리지 말고 이현무를 대신 돌봐달라고 했다.다시 말해서 그녀를 만날 의향이 없다고 못을 박아놓는 것과 마찬가지였다.백아영은 애간장이 탔다. 이성준이 단단히 오해한 듯 화가 나서 대화 자체를 거부할 줄이야!‘이대로는 안 돼.’어렵게 고백하기로 마음먹었는데, 아이 아빠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또한 받아들일 수는 있는지 얼른 알고 싶었다.만약 백승구를 받아들인다면 이성준과 함께 할 생각이고, 아니라면 하루빨리 그의 별장에서 나와 헛된 망상에서 깨어날 작정이다.백아영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그나마 제일 잘하는 죽을 만들어서 이현무와 백승구를 데리고 이성준의 회사로 찾아갔다.집을 나설 때 덩치가 산만 한 검은 옷차림의 경호원이 따라붙었다.“요즘 밖이 흉흉해서 도련님께서 사모님을 경호하라고 신신당부하셨습니다.”제갈연준이 도망친 이상 마치 어둠 속에 숨어 있는 독사처럼 수시로 튀어나와 그녀의 목숨을 노릴지 모른다.백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고생이 많네요.”이성그룹에 도착하자 이현무 덕분에 백아영은 순조롭게 내부로 진입해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대표 사무실이 있는 꼭대기 층을 향해 올라갔다.대표 사무실 밖에는 여비서가 업무를 보고 있었는데 나이도 어리고 얼굴도 예뻤다.그녀는 이현무를 발견하자 공손하고 친절한 태도로 인사를 건넸다.“도련님, 대표님 뵈러 오셨어요? 대표님께서 지금 미팅 중이시라...”이현무는 고개를 들어 백아영을 올려다보며 똘망똘망한 눈으로 의견을 물었다.“아영 아줌마, 회의실에 찾으러 갈 거예요? 아니면 아빠한테 여기로 오라고 할까요?”시간을 확인한 백아영은 곧 점심 먹을 때라서 미팅이 끝나갈 거로 예상했다.“미팅 끝날 때까지 여기서 기
비서한테서 이성준이 급한 일 때문에 회사를 떠났다는 소리를 듣자 백아영은 그가 또 도망쳤다는 사실을 눈치챘다.그녀는 어이가 없었다. 사람을 잡아먹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멀리할 이유가 있냐는 말이다.결국 도시락을 까서 아이들과 죽을 먹기 시작했다.물론 백아영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위정한테 넌지시 물어본 덕분에 저녁이 다 되어서 드디어 이성준이 어디로 갔는지 알게 되었다.“실장님, 성준한테는 제가 간다고 얘기하지 말아 주세요.”위정이 머뭇거렸다.“사장님은 아영 씨가 떠나는 걸 원치 않아서 그러는 거예요.”“저도 알아요.”백아영이 한숨을 내쉬었다.“직접 만나서 해야 할 중요한 얘기가 있는데 대화를 나눠보고 나서야 떠날지 말지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아요.”“그렇다면 떠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네요?”위정이 기쁜 마음에 신난 목소리로 말했다. 단지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사장님 대신 감격을 주체하지 못했다.“MG 클럽 입구에서 기다릴게요!”이성준이 외출하기 전에 신신당부했기에 백아영은 그를 찾으러 클럽에 간다 한들 이현무를 데려갈 수밖에 없었다.다만 아이가 클럽에 드나든다는 자체가 보기 안 좋았기에 근처에 있는 키즈 카페에 맡겼다.두 꼬맹이가 즐겁게 노는 모습을 본 백아영은 한시름을 놓았다.“실장님, 현무와 승구를 잘 좀 부탁드립니다.”위정은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아영 씨, 걱정하지 마시고 아이들은 저한테 맡기세요. 도련님은 088번 테이블에 있어요.”백아영이 이성준을 찾으러 갔기에 두 경호원도 남아서 아이들을 돌보았다.백아영은 MG 클럽으로 걸어 들어갔다.짙은 알코올 냄새가 코를 찔렀고, 시끄러운 음악 소리와 함께 시선이 닿는 곳마다 조명이 번쩍이고 남녀 할 것 없이 한데 섞여 리듬에 몸을 맡겼다.분위기는 한껏 달아올라 금세 절정에 치달았다.그러나 백아영한테는 너무 시끄러워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어쨌거나 이런 시끌벅적한 곳은 그녀의 스타일이 아니었다.백아영은 한 웨이터를 붙잡고 물었다.“저기, 혹시 0
술을 입에 대는 찰나 가느다란 손가락이 불쑥 나타나 그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피부는 백옥처럼 하얗고, 심지어 손바닥마저 솜처럼 부드러웠다. 순간, 이성준은 술에 취해서 환각이라도 보이는 듯싶었다.그러나 곧이어 누군가 손에 든 술잔을 홱 빼앗아 갔다.머리 위에서 백아영의 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성준아, 그만 마셔. 위경련이 아직 다 나은 것도 아니잖아.”깜짝 놀란 이성준이 고개를 들자 백아영을 발견했다.이내 눈웃음을 짓더니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생떼를 부렸다.“어차피 네가 치료해줄 거면서.”만약 매일 아프면 그녀도 떠나지 않을 테니까 안 될 건 없다고 생각했다.백아영은 말문이 막혔다. 대체 술을 얼마나 마신 거지? 설마 또 취한 건 아니겠지?재빨리 그의 맥박을 짚어서 취한 게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다시 말을 이어갔다.“성준아, 일단 나가자. 할 말 있어.”두 눈에 가득하던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지더니 이성준은 백아영을 놓아주었다. 곧이어 표정도 싸늘하게 식어갔는데 괜히 소원해진 느낌이 들었다.“백아영, 흥이나 깨지 말고 앉아서 술이나 마시던지, 아니면 그냥 가.”백아영은 어이가 없었다.“이성준! 내 말 한 번이라도 들어주면 안 돼?”“듣고 싶지 않아.”그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무뚝뚝한 말투로 대답했다.그러고 나서 백아영을 쳐다보지도 않고 다시 술병을 들어 한 잔 가득 따르더니 마시려고 했다.사람 말을 들으려 하지 않은 고집스러운 그의 모습을 보자 백아영은 열 받아서 머리에 술이나 확 부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꾹 참았다.이내 화가 나서 이를 악물고 말했다.“좋아. 술 마시고 싶다는 거지? 같이 마셔줄게.”그녀는 술잔을 들고 이성준의 술잔에 ‘쨍’하고 부딪혔다.이성준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드는 순간 술을 단숨에 털어 넣는 백아영을 발견했다.술을 마시자마자 그녀는 사레가 들려 연신 기침했다.“이 바보 같은 여자가!”이성준은 화가 나서 호통을 쳤지만, 손놀림만큼은 재빠르게
싸늘하게 식어간 눈빛은 오금이 저릴 지경이며, 한 마디 한 마디가 살기로 가득했다.“만약 진짜 이도하 그 자식이 한 짓이라면 당장 없애버릴 거야.”분노가 하늘을 찌를 듯한 이성준의 모습에 약간의 기대로 차올랐던 백아영은 기분이 나락으로 떨어졌다.이는 그녀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격한 반응이었다.아니나 다를까 이런 일을 이해해주는 남자는 없었다.백아영은 시무룩한 얼굴로 물러났고, 이내 클럽을 떠나려고 했다.이때, 이성준이 그녀의 팔을 붙잡고 마치 잡아먹을 것처럼 살벌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그 자식 때문에 상처받았으니 복수는 해줄 테지만, 고작 이따위 핑계로 날 거절할 생각은 하지 마.”이성준은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만약 이도하가 신경 쓰인다면 앞으로 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지 않도록 할게.”백아영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순간 코끝이 찡했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더니 울컥한 마음에 눈물이 차올랐다.그는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조마조마하던 가슴도 서서히 안정을 되찾았고, 걱정 대신 설렘으로 가득 채워졌다. 그녀는 손을 뻗어 이성준의 손등을 붙잡았다.“성준아, 사실 나...”쨍그랑!이때, 이성준의 등 뒤로 갑자기 술병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무의식중으로 고개를 돌린 백아영은 체크 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가 시커먼 과일칼을 손에 들고 험상궂은 얼굴로 이성준의 등을 찌르려는 걸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조심해!”백아영은 잔뜩 긴장한 채 재빨리 이성준을 밀쳤고, 다행히 아슬아슬하게 칼을 피할 수 있었다.그와 동시에 좌석 주변으로 칼을 든 남자가 여러 명 나타났고, 너나 할 것 없이 백아영과 이성준을 향해 뛰어들었는데 흉악한 표정으로 치명타를 날렸다.백아영은 겁에 질려 얼굴이 창백해졌다. 상대방은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암살을 계획했다.하필이면 이때 경호원도 곁에 없다니!“내가 있는 한 아무도 널 다치게 할 수 없어.”이성준의 낮고 매력적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백아영을 등 뒤로 끌어당겨 당당하게 혼자서 그 무리를 마주했다.
그가 이도하에게 눈짓하자 이도하는 재빨리 백승구를 안고 차에 올라탔다.백아영도 서둘러 차에 탔고, 백승구 옆에 앉아 손을 부들부들 떨며 아이의 손목을 잡고 맥박을 짚었다.그러나 손이 너무 떨려서 여태껏 처음으로 맥박도 제대로 짚지 못했다.이를 본 이성준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싶었다.곧바로 눈이 부을 정도로 울고 있는 이현무를 안아 들고 차에 올라타 기사한테 제일 가까운 병원으로 출발하라고 했다.그리고 능수능란하게 구급상자를 꺼내 백승구의 상처를 치료해줬다.이현무는 옆에서 눈물을 펑펑 흘렸다.“승구 형은 저를 구하기 위해 다쳤어요. 다 제 탓이에요, 엉엉...”백아영도 속상해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고작 세 살인 백승구는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한데 이현무를 구하려고 기꺼이 나서지 않았는가?그동안은 최면에 걸려서 나쁜 짓을 했더라면 지금은 정의롭고 착하기만 했다.왜냐하면 이게 바로 그의 본모습이니까!백아영은 이현무의 손을 잡고 흐느끼며 말했다.“현무 탓 아니야. 형아는 괜찮을 거야.”‘괜찮고말고...’백아영은 속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위로했다.차는 제일 빠른 속도로 달려 병원에 도착했다. 백승구가 수술실에 들어가는 순간 백아영은 탈진해서 까무러칠 뻔했다.이성준이 잽싸게 그녀를 부축하며 나지막이 말했다.“승구를 다치게 한 사람을 모조리 붙잡아서 죄를 갚게 할 거야.”백아영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수술실 문만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지금은 범인이 누구인지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백승구가 크게 다친 건 아닌지 가슴을 졸였을 뿐이다.신경이 잔뜩 곤두서서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그녀의 모습을 보자 이성준은 눈살을 찌푸렸다.그는 일부러 목청을 높여서 이도하에게 물었다.“네가 여기 왜 있어?”이도하가 백승구의 아버지일 가능성이 있고, 백아영은 그날 밤의 진실을 파헤치려는 마음이 간절했기에 이도하를 언급하면 반응이 있을 줄 알았다.하지만 그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백아영은 여전히 수술실 문에 시선을 고정했다.이도하는 백승구를 구해줬
이성준의 안색이 돌변했다.“금방 갈게!”고개를 돌려 백아영에게 말하려는 순간 패닉에 빠져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녀의 모습에 괜히 이현무 때문에 또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결국 그는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급한 일 때문에 가봐야 하니까 내가 올 때까지 기다려.”백아영은 아무 말도 없이 수술실 문만 뚫어지라 쳐다봤다.이성준은 굳은 표정으로 몇몇 경호원한테 백아영을 잘 돌봐달라고 부탁했고, 동시에 이도하에게 경고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집적대지 마.”“날 두고 가게?”이도하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형이랑 같이 갈래.”이성준은 딱 잘라 말했다.“할 말 있으면 이따가 해. 아니면 집어치우든가.”말을 마치고 나서 성큼성큼 걸어갔다.이성준은 제일 빠른 속도로 이씨 가문 개인 병원에 도착했다.가는 도중에 교통사고가 어떻게 났는지도 알게 되었는데, 대형 화물차 한 대가 브레이크 고장 때문에 그대로 차량을 들이받았다고 했다.화물차 기사는 즉사했고 경호원들도 전부 중상을 입게 되었다.이현무가 탄 차량은 전복되어 저 멀리 굴러떨어졌고, 오일 탱크에서 기름이 흘러나와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지만 이현무는 차에 갇혀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위험천만한 순간에 마침 사고 현장을 지나치던 백채영이 뛰어와서 전력을 다해 이현무를 구해줬다.그러자 차량도 마침 폭발했다.백채영은 이현무를 지켜주기 위해 온몸으로 폭발의 여파를 막았다.결국 그녀도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했다.이성준의 목소리가 한껏 가라앉았다.“백채영이 이현무를 구해줬다고?”그는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이기적인 여자가 그동안 얼마나 잔인하고 매정하게 이현무를 대했는지 뻔히 알고 있었다.경호원이 대답했다.“어쩌면 백채영 씨가 반성해서 개과천선했을지도 모르죠. 어쨌거나 현무 도련님은 친아들이지 않겠습니까?”“그래?”이성준은 미심쩍은 눈빛으로 말했다.“교통사고 현장에는 왜 나타난 거지?”경호원이 말했다.“이미 조사했는데 마침 쇼핑몰에 쇼핑하러 가는 길에 우연히 지나쳤대요.”
이성준은 입을 꾹 닫았다.“몸조리 잘해.”비록 원하는 대답이 아니라서 백채영은 서운했지만, 그래도 꾹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성준 씨, 그럼 난 병실로 돌아가서 쉴 테니까 나중에 다시 현무 보러 올게.”그녀는 숨이 가쁜 듯 목소리에 힘이 없었고, 이미 한계치가 온 것 같았다.곧이어 손으로 문틀을 짚고 떠나려는 순간 갑자기 바닥에 털썩 쓰러지더니 등에 난 상처가 터져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그녀는 너무 아픈 나머지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이성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비록 걱정이 전혀 안 되었고, 쓰러졌다 한들 관심이 없었지만...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입구로 성큼성큼 걸어갔다.“다친 몸으로 괜히 싸돌아다니지 마. 병실까지 데려다줄게.”그는 허리를 숙여 백채영을 부축해 일으켰다.남자의 커다란 손바닥이 고스란히 느껴지자 백채영은 설레는 마음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성준과 스킨십할 수 있는 얼마나 드문 기회인가!그러나 얼굴만큼은 죄책감으로 가득했다.“성준 씨,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괜히 민폐만 끼쳤네.”예전과 180도 달라진 백채영의 모습에 그는 긴가민가했다.이성준은 미심쩍은 눈빛으로 그녀를 병실까지 데려다줬다....굳게 닫힌 수술실 문이 드디어 열렸다.의사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백승구와 함께 걸어 나왔다.백아영이 서둘러 다가갔다.“선생님, 우리 승구 괜찮아요?”“수술은 성공적으로 마쳤고, 외상도 치료하고 해독도 했지만...”의사의 얼굴이 사뭇 진지했다.“이런 독은 저도 처음 봅니다. 아마도 급성 백혈병을 유발한 것 같은데...”백아영은 흠칫 놀라면서 비틀거리더니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잠시나마 품었던 희망은 한순간에 소멸했다.백승구가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맥박이 이상하다 싶었는데 당시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그러나 지금은...절망에 빠진 그녀는 백승구 때문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나이도 어린데 어찌 이런 고통을 견뎌낼 수 있겠는가?의사는 한숨을 내쉬더니 안타까운 얼굴로 위로를 건넸다.“급성 백
“도련님, 혹시 골수 이식 수술 검사받아보시면 안 될까요?”이도하는 백아영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의혹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왜 나한테 얘기하는 거지?”백승구가 수술실에 있을 때부터 남아서 기다리라고 하더니 마치 다른 계획이라도 있는 듯싶었다.하지만 그에게 백아영은 생판 모르는 남남에 불과했는데 생뚱맞게 자신을 찾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백아영은 씁쓸한 마음에 주먹을 꼭 움켜쥐었다.“검사를 마치고 나면 이유를 알려줄게요.”그날 밤은 백아영에게 수치를 안겨 줬기에 그녀가 스스로 털어놓은 사람은 오직 이성준뿐이었다.만약 이도하가 장본인이 아니라면 굳이 언급할 생각이 없었다.이도하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눈썹을 까딱이며 흥미진진하게 말했다.“검사해 보는 거야, 뭐.”이도하의 혈액을 채취한 후 의사는 전용 실험실에 가서 혈액 검사를 했다.기기를 작동하는 순간 창문 틈새로 하얀 안개가 새어 들어오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의사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방문이 열리면서 노경우가 걸어 들어왔는데 미리 준비한 자신의 혈액으로 이도하 거랑 바꿔치기했다.이도하는 멀지 않은 곳에 서서 팔짱을 끼고 무심한 얼굴로 비아냥거렸다.“제갈연준이 너 같은 놈을 부려먹을 정도로 전락한 거야?”정곡을 찔린 노경우는 발끈하며 되받아쳤다.“도도하기로 소문난 도련님께서는 어쩌다 제갈 일가의 앞잡이가 된 거죠? 부르자마자 달려와서 능청스럽게 아이를 구하는 연극까지 가담하다니?”이도하는 안색이 돌변하면서 노경우의 멱살을 움켜쥐었다.“죽고 싶어?”“날 죽일 수는 있고? 백승구의 생부는 저예요. 골수 이식을 받기 위해서는 내가 필요할 텐데, 그래야만 도련님도 이 연극을 이어가지 않겠어요?”노경우는 믿는 구석이 있는 듯 건방지게 이도하의 손을 뿌리쳤다.“도련님, 만약 임무에 실패한다면 꿈속의 여인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골수가 일치한 지는 적어도 3일이 지나야 결과를 알 수 있었다.백아영은 백승구의 병상 앞을 지키며 안절부절못한 채 시간이 다가오기만
분명 맛있는 음식인데도 백아영은 입맛이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몇 입 먹고 난 뒤 배가 아플 정도였다. 그녀는 이성준의 품에 안겨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 이성준은 긴장된 표정으로 그녀를 껴안고 자리에서 크게 화를 냈다. “윌리엄스, 혹시 음식에 독을 넣은거예요?!”윌리엄스는 놀라서 얼굴이 창백해져서 급히 변명했다.“아니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 백아영은 힘겹게 이성준의 손목을 잡고 힘없이 입을 열었다. “윌리엄스가 독을 넣지 않았어. 내가...”“너 왜 그래?” 이성준은 땀을 뻘뻘 흘리며 백아영을 안은 팔뚝을 가볍게 떨었다. 백아영은 몹시 아팠지만 눈길은 부드러웠고 약간 희색을 띠었다. “윌리엄스에게 실례지만, 국왕께 하룻밤 묵을 방을 빌려달라고 부탁해 줘. 그리고 산부인과 의사를 불러줘.”이성준이 눈치를 채지 못하자 백아영은 창백한 얼굴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방금 맥을 짚었는데, 나 임신했어.” 이성준의 동공은 움츠러들었다가 한참 만에 겨우 회복되었다. 찰나의 놀라움 뒤에는 오히려 걱정이 밀려왔다.“임심했는데 통증이 이렇게 심해?”그는 조바심이 나서 윌리엄스에게 의사를 불러오도록 재촉했다. 백아영은 아파서 힘이 없었던 나머지 그의 품에 푹 기대어 있었다. 전에 백아영은 이런 비슷한 환경에서 한 아이가 강제로 유산되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임신한 사실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하고 산에 가서 실랑이를 벌였고, 이로 인해 병세가 심했다. 이 아이를 키우고 싶지만, 고생할까봐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백아영은 가볍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정상적이야.”‘정상이라니?’ 이성준은 다른 여자가 임신을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몰랐지만, 백아영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진작 알았더라면 둘째를 갖지 않았을 것이다. 8개월 후. 산부인과 수술실 문이 열리자 이성준이 급히 달려들였다. 점잖던 남자는 안달복달한 얼굴로 물었다.“제 마누라는 어때요? 무사한가요?”“모녀는 무사합니다.”
집사는 경악했다.“폐하, 그들은 굴러들어 온 복도 차버리니 분명 본때를 보여줘야 하는데, 어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윌리엄스의 안색을 본 집사는 목이 메었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윌리엄스는 조금 전까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던 모습은 사라지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성준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경외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고, 간신히 이빨 사이로 글자를 밀어냈다.이, 이 대표?” 이성준은 경멸하듯 그를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윌리엄 집안의 자식이 확실히 다 컸네.” 윌리엄스의 얼굴이 더 새하얗게 질렸다. 엄청난 두려움이 엄습했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 이성준을 처음 만났다. 그때 이성준은 아직 소년이었지만, 기세가 등등하고, 과감하며, 감히 국왕인 윌리엄스의 아버지와 거래를 논했다. 그 당시 그의 아버지조차도 이성준을 대단하게 여겼다. 심지어 윌리엄스에게 앞으로 절대 이성준의 미움을 사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온 나라의 세력이 처참하게 약해질 것이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부터 이성준은 악마라고 마음에 새겨 두었다. 게다가 윌리엄스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었다. 이성준은 그의 나라에 협조하지 않는 대신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반년 동안 누워계셨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너무 커서 윌리엄스는 일찌감치 이번 생은 절대 H 국에 가지 않기로 했고, 절대로 이성준을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기존의 거래 협력을 모두 점진적으로, 완곡하게 해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항상 악마를 멀리하려고 했지만 이렇게 엮일 줄은 몰랐다. 백아영은 뜻밖에도 이성준의 아내였다! 어떤 생명의 은인 규칙, 첫눈에 반한 사랑 따위는 모두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는 어떤 계획도 할 수 없었다. 단지 자신의 왜 행동을 하기 전에 백아영의 신원을 조사하지 않았는지 후회되었다! 악마를 끌어들여 버렸다... “복을 차버린다나 뭐라나, 말을 그렇게밖에 못해?” 윌리엄스가 집사를 발로 매우 세게 찼
차에 타고 있던 남자들도 일어서더니 기세등등하게 백아영과 이성준을 포위했다. 험상궂은 얼굴의 한 남자가 환영 반 협박 반인 어투로 말했다. “두 분, 차에서 내리십시오.”차 밖에서는 윌리엄스가 활짝 웃으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백아영이 차에서 내리기를 목 빠지게 기다렸다. 곁에 있던 집사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폐하, 궁전의 수비를 모두 강화 완료했습니다. 궁전 주위에 800명의 호위 병사를 추가로 파견했어요. 이분들은 이미 독 안에 든 쥐가 되셔서 도망갈 수 없습니다.” “이혼 변호팀 사람들은 이미 도착하셨고 두 분이 차에서 내리시면 바로 처리할 수 있어요.”“폐하, 곧 미인을 품에 안게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윌리엄스의 입꼬리는 한껏 올라갔다. 산 위에서 백아영의 워낙 강인한 모습에 사람도모자라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지금은 백아영의 대단한 솜씨도, 그녀의 남편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단념할 수밖에 없다. 모두 생명의 은인으로 보고 첫눈에 반하게 만든 백아영 탓이었다. 그는 이 나라의 왕이다. 그가 마음에 드는 한 반드시 그의 것이다. 또한 결혼 후 백아영을 자신의 매력에 매료시켜 점차 이성준을 잊게 할 자신이 충만했다. 윌리엄이 생각을 하던 중, 차 문이 열리고 관광버스에서 백아영이 내렸다. 윌리엄스는 넥타이를 매만지며 그녀를 반겼다.“아가씨, 또 뵙네요.”윌리엄스가 아양을 떠는 모습을 보고 백아영은 입을 다물었다. 백아영의 뒤로 큰 덩치의 이성준이 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머리 위로 이성준은 차갑게 말했다.“내 아내를 뺏으려는 게 너야?” 이성준은 포위망 속에 서 있었다. 다른 사람의 구역에서 그는 독 안에 든 쥐였지만 그는 움츠러들지도 않고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이성준의 기는 모두를 앞질러 버려 마치 모든 것을 장악하는 왕인 것 같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서늘한 몇 글자가 사람을 더욱 섬뜩하게 했다. 집사는 높은 인물들을 많이 보았었기에 즉시 이성준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만 이곳은 그들의 궁전이
윌리엄스는 어안이 벙벙했다.백아영의 솜씨는 정말 놀라웠다. 그녀의 기묘한 침을 꽂는 기술이 더욱 놀라웠다. 보기만 해도 눈이 즐거워지는 백아영의 몸에는 빛이 보였다.그녀의 아름다움은 남달라서 비길 것도 없이 아름다웠다.백아영은 여전히 은침을 손에 들고 윌리엄스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만 좀 건드리세요. 알아들으셨죠?”“저는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윌리엄스의 의욕 넘치는 말은 눈앞으로 가까워져 오는 침에 놀라 목이 메었다. 순식간에 덮쳐 온 위험과 두려움이 그를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게 했다.백아영은 다시 경고했다.“잘 가세요. 바래다 드리지는 않을게요.”젊고 고집스러운 윌리엄스는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위협은 그를 이성적으로 뒤로 물러나 타협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백아영은 바늘을 다시 집어넣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네 부하는 경련을 일으키다가 10여 분 만에 의식을 회복했다. 그들은 서로를 부축하며 몸을 일으키자 멀리 떨어진 곳에 백아영이 보였다. 비록 뒷모습뿐이었지만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폐하, 죄송합니다. 저희가 너무 부족했어요.”윌리엄스는 백아영을 탐욕스럽게 바라보았다.“너희 탓이 아니야. 저 소녀가 너무 강할 뿐이야. 가자. 이제 내려가야지.”부하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 여왕님을... 그냥 이렇게 포기하시려고요?”윌리엄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그럼 내가 지금 뭘 할 수 있겠어?”말이 통하지도 않고 싸워서 이기지도 못하니 부하는 조용히 입을 꾹 닫았다.하지만 윌리엄스는 미소를 띠었다.“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이야.”이성준은 열매 한 봉지 가득 따왔다. 그는 열매를 깨끗이 씻은 뒤 쟁반에 담아 백아영 앞에 대령했다. 하지만 안색이 좋지 않았다.“방금 돌아오는 길에 들었는데 누가 너를 귀찮게 했다면서?”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도리도리 저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문제를 일으켰어.”이성준은 자초지종을 듣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백아영은 잠시 멈칫하더니 웃었다. “아파서 머리까지 다쳤나. 걱정 마세요, 위험했지만 목숨은 건졌어요. 돌아가시면 의사부터 보세요. 잘 케어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에요.”백아영은 진지하게 당부했지만 상대방은 한마디도 귀담아듣지 않았다.백아영이 그만 몸을 일으키려 하자 청년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저 지금 진지해요.”“이것은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규칙이기도 합니다. 생명을 구해준 은인은 반드시 몸으로 갚아야 합니다.”윌리엄스 왕족?백아영은 입헌군주제인 국가에 왔다. 이곳은 현대사회와 어우러졌지만 여전히 왕권을 시행하고 있다. 지금의 왕은 20대 초반의 청년으로 나이는 어리지만 듬직하고 성숙하며 상당한 재주를 가졌다고 전해졌다. 왕은 1년 넘게 국가 정무를 질서 있게 처리했다.다시 이 풋풋하고 고집 센 청년을 본 백아영은 목이 메었다. 왕은 소문과는 좀 다른듯했다.백아영은 청년한테 잡힌 손을 빼냈다.“그냥 눈에 보여서 구해준 거니 고마워하실 필요 없으세요. 그리고 저는 결혼까지 한 여자에요.”“결혼하셨군요...”청년은 매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젊고 예쁜 백아영이 일찍 결혼했으니 흔치는 않은 일이다. 그러나 청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저는 재혼에 대해 편견이 없어요. 남편분과 이혼해도 그대를 왕후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저는 이혼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청년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는 그제야 난처한지 땅바닥에서 일어나 앉아서는 백아영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무슨 복잡한 일을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백아영은 혼자 심각하게 고민하는 청년이 이해가 되지 않아 벌떡 일어나 자리를 뜨려고 했다.곧이어 청년도 벌떡 일어났다. 너무 갑자기 몸을 일으킨 탓인지 몸을 휘청거리자 곁에 있던 남성이 얼른 그를 부축해 주었다.청년은 휘청거리는 몸을 아랑곳하지 않고 백아영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막아섰다. 그의 맑은 눈은 어느새 포악해졌다.“아가씨, 억양을 들어보면 외국인인 것 같네요. 아직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룰에 대해 잘 모
하지만 백아영은 현무가 힘들어할까 봐 차마 너무 많은 프로젝트를 참가하지 못하게 하고 관광지 한 곳만 더 돌고 남원에 돌아갈 생각이었다.이성준은 진지하게 말했다. “출산 장려 정책은 참 옳아.”백아영은 어리둥절했다.“자식이 많아야 집도 떠들썩하고, 현무도 동생이 생기지.”어린 노동자가 하나 더 필요하다는 그의 뜻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이성준은 방긋 웃으며 백아영을 벽에 바짝 붙였다. “여보, 우리 현무에게 동생 만들어주자.”이날 현무와 백아영은 영상통화를 했다. “엄마, 안색이 안 좋아. 어디 아파?”화면 속에서 백아영의 안색은 살짝 하얗게 보였다.하지만 별다르게 불편한 곳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낮에 산에 오르느라 피곤해서 그런가 봐. 괜찮아, 좀 쉬면 괜찮아 질 거야.” “그럼, 내일 일단 산을 내리지 말고 호텔에서 쉬는 거예요?”내일 하산할 예정이었지만 백아영은 단호하게 답했다.“맞아.”그제야 현무는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통화를 끊고 백아영의 이마에 길쭉한 손이 닿았다. 이성준은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정말 괜찮은 거 맞아?”실제로 봤을 때 백아영은 이상이 없어 보였지만 이성준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아. 내가 의사인데 모르겠어?”“하룻밤을 묵어도 좋으니까, 난 네가 좋아하는 열매를 좀 따올게.”이 산의 열매는 특산물이었기에 백아영이 매우 좋아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한 후, 이성준은 혼자 산꼭대기에 가서 열매를 땄고, 백아영은 아름다운 산기슭에 앉아 차를 마시며 아침 풍경을 감상했다. 그녀는 조용히 열매를 기다리고 있었다.기다리는 동안 찻집 안에서 갑자기 시끄러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도와주세요! 여기 도와주세요!”“의사 없어요? 응급처치할 줄 아는 사람 혹시 있어요? 좀 살려주세요! 저의 도련님을 살려주세요...”식당에서 대략 이십 대 초반의 한 청년이 땅에 누워있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
한 달 뒤.인천공항에서 현무는 양복을 차려입고 반듯하게 서서 웃음을 가득 머금고 백아영을 배웅했다.“엄마, 걱정하지 말고 잘 놀다 와요. 여기 일은 저한테 맡겨요.” 현무는 이성준의 아들답게 한 달 만에 기본적인 경영 업무를 배웠고, 심지어 위정을 도울 수 있었다.또한 그는 이성준의 외아들인 만큼 이성그룹의 후계자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는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나이에도 모든 주주와 직원들을 위협하기에 충분했기에 일을 더 쉽게 추진할 수 있었다.게다가 이성준의 한 달간 밑받침을 잘 깔아놓은 덕에 안심하고 현무와 위정에게 이성그룹을 맡길 수 있게 되었다.위정의 불평도 적어졌다. 그는 앞으로 일할 날에 희망이 생긴 것 같았다.“내 아들 최고.”백아영은 현무를 꼭 끌어안고 그의 볼에 쪽 뽀뽀했다.“엄마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영상통화 해. 날마다 기분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누가 감히 너를 괴롭히면, 엄마와 아빠가 바로 날아와서 때려 놓을 거야.”백아영의 품에서 현무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순간 엘리트에서 어린 아기가 되어 자신도 모르게 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하지만 이성준의 말과 백아영의 행복을 생각하며 현무는 마음을 가다듬고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였다.“엄마 걱정하지 마, 외삼촌과 위정 아저씨가 계셔서 아무도 날 못 괴롭혀. 내가 좀 더 크면 내가 엄마를 보호해야 해.”백아영은 감동되어서 감정이 벅차 놀랐다. 현무는 너무 든든한 아들이었다.선우경진은 팔짱을 낀 채 한쪽에 서 있었다. “이씨 가문의 일은 해결됐지만 아직 선우 일가가 남아있다는 것을 잊지 마.”“그리고, 여유가 있으면 새로운 아이템도 많이 생각해 둬.”한 달 동안 그들은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급한 불은 거의 다 껐다. 하지만 의학은 끝이 없고 신약 연구는 더 중요했기에 선우경진은 수시로 백아영을 감시했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다른 곳에서 시야를 넓히고 영감을 얻으면 신약을 개발하는데 더 쉬웠다.이성준은 한쪽에
현무는 계획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지만, 다섯 살짜리 꼬마에게는 좀 시기상조였다. 하지만 이성준은 그런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그러나 이성준의 엄숙한 표정을 보니 바로 계획을 하나 만들어 내야 할 것 같았다.현무는 골똘히 생각했다.“공부를 열심히 해서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고 매일 엄마와 아빠와 함께 있고 싶어요.”“엄마를 기쁘게 해주는 것과 함께 있는 것을 동시에 이룰 수 없어.”“왜요?”현무가 공부해서 잘하고 매일 학교 갔다 오면 자연스레 백아영을 볼 수 있고 그녀도 즐거워하는 게 일상이었다.“너 그동안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잊었어?”현무가 네 살 되기 전까지 백아영은 그의 곁에 있어줄수 없었다. 백아영이 돌아온 후, 비록 온 가족이 드디어 모였지만,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았고 때마다 백아영은 떠나야 했고, 항상 바쁜 일상에 기쁠 때도 있었지만 힘들 때가 더 많았다. 현무는 그런 백아영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엄마는 나와 함께 있어서 기분이 나쁜 거예요?”어린 현무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돌기도 전에 이성준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너 때문이 아니야. 엄마가 놓인 상황 때문이지. 남원에서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일들과 언제든지 생기는 변화 때문이야.”“만약 누군가가 이 짐을 대신 나눠주고, 그런 일들을 완전히 해결해 주고, 엄마가 마음껏 여행을 다닐 수 있게 해준다면 매일 즐거워할 거야.”현무는 어리지만 총명해서 즉시 이성준의 뜻을 알아차렸다.“아빠, 제가 엄마의 일을 나누어서 해도 돼요?”이성준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너는 할 수 있어.”“그런데 힘들 거야. 엄청 힘들 수 있어. 대신에 엄마를 오랫동안 못 볼 텐데, 그래도 할래?”현무는 힘든 것은 두렵지 않지만, 오랫동안 백아영을 볼 수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현무는 머뭇거렸다. 그는 섭섭해서 고뇌했다.“나 그냥 엄마랑 여행 가면 안 돼?”이성준은 자애로운 아버지의 미소를 지었다. “네가 경영대를 일찍 졸업하면 돼.”현무는 지능이 높아서, 월반하는
이성준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 은퇴할 생각이야.”‘역시!’백아영이 머릿속으로만 하던 황당한 추측을 이성준 입으로 직접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믿기지 않았다. 왜 이성준이 갑자기 도망 오려 했던 건지, 그리고 왜 그 큰 짐을 위정과 선우경진한테 내던졋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성준은 그들을 훈련하고 있었다.수단이 좀 잔인했을 뿐이다.“왜 갑자기 은퇴하고 싶은 거야?”백아영은 아직 앞날이 밝은 이성준이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성준은 백아영을 응시하며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쓱쓱 만졌다.“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이성준은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아 수많은 고통을 겪었다.이성준의 괴로운 심정은 눈에 훤히 비쳤다. 그는 사실 오래전부터 은퇴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영아, 앞으로 남은 생 동안 나는 네가 조용하고 평온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은퇴하고 쇼핑센터를 떠나면 원한도 모두 훨훨 털어 버릴 수 있다. 두 사람은 세계 여행하며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된다.백아영의 머릿속은 멍해졌다.백아영은 이성준이 은퇴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자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성준이 계획한 미래에 항상 그녀가 있었다. 그의 미래는 온통 백아영 한사람이었다.백아영은 감동되어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가 환상하던 미래는 정말 기대할 만한 것같았다.“하지만 지금은 내가 선우경진과 위정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 같아.”겨우 보름밖에 안 되었는데, 그들은 고통을 호소하며 참지 못하는데 정말 큰 일이라면 더 감당하기 어려워할 게 뻔했다.이성준은 눈썹을 찡그리며 잠시 사색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현무 이제 다섯 살이니까 남자 다 됐지.”백아영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현무에게 맡길 생각은 아니지?”이성준은 담담하게 되물었다.“안 될 게 뭐가 있어?”‘안 될 게 뭐가 있겠냐고? 현무 이제 겨우 다섯 살인데!’이성준은 여전히 꿈쩍하지 않았다. “내가 다섯 살 때, 이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