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아영이 절망적인 마음으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던 그때, 갑자기 인파가 몰려들었고 한 학부모가 외쳤다.“성준 대표님 오셨네!”이성준은 깔끔한 수트 차림에 긴 다리를 뻗으며 다가왔고 이현무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쪼그려 앉더니 의자에서 그를 번쩍 안아 올렸다.담임 선생님은 서둘러 이현무의 상황을 다시 한번 설명했고 걱정스럽게 말했다.“대표님, 이 일은 유치원도 책임이 있으니 저희가 감당할게요. 지금 바로 경찰에 신고하겠습니다.”“신고할 필요 없어요.”단호하게 말하는 이성준의 모습에 담임 선생님은 이해가 안되는 듯 의아했다.‘이렇게 심각한 상황인데 신고를 안 한다고? 사적으로 해결하실 생각인가?’이런 일이 일어났음에도 신고하지 않은 이유를 백아영은 알고 있었고 죄책감과 미안한 마음에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미안해...”“네 탓 아니야.”이성준은 손을 뻗어 백아영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울지마. 우리 나가자.”말하던 그는 한 손으로 백아영의 어깨를 감싸며 품에 안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아무 말 없이 편을 들어주며 자신을 보호하는 이성준의 모습에 그녀는 정신이 멍해졌다.줄곧 혼자서 맞섰던 무기력한 슬픔과 고통에 문득 힘이 생겼고 그 모습에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어머, 이게 무슨 일이야! 대표님이랑 저 여자 무슨 사이예요?”“보면 몰라요? 집안싸움인 거지!”“어쩐지 신고 안 하더라.”“그래도 이건 너무 감싸는 거 아니에요? 도련님이 죽을 뻔했는데 저 여자를 탓하지 않는다니, 참 팔자좋은 여자네!”북적거리는 사람들 뒤로 눈에 띄지 않는 어느 은밀한 구석에 백채영과 리사가 숨어있었다.현무가 다쳤다는 소식에 부랴부랴 달려왔고 이성준이 반드시 화내며 백아영을 몰아붙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예상과 전혀 다른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다.“백아영한테 이렇게 친절하다니!”현무가 다쳤음에도 불구하고 백아영을 믿어주며 감싸는 모습에 백채영은 질투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와 함께 있었을 때는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백승구는 입을 꾹 닫고 침묵을 유지하는 대신 백아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더니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했다.“다들 죽어 마땅한 사람이에요.”순간 소름 끼치는 공포감이 몰려왔고, 깜짝 놀란 백아영은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눈앞의 아이는 분명 애지중지 키워도 모자랄 사랑스러운 친아들이지만, 지금 이 순간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이내 몸이 부들부들 떨렸고,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이 마치 거미줄처럼 퍼져나갔다.대체 왜? 백승구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이게 그의 본모습이란 말인가?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면서 여태껏 그를 제대로 알아보려고 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백아영.”이성준은 백아영의 어깨를 잡고 살포시 끌어안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로했다.“아마도 심리적으로 문제 있을 수 있어. 물론 불치병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이미 심리상담사랑 연락했어.”심리적인 문제라니?그러나 심리적인 문제가 아니라면 무엇이냐는 말이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아이는 몇 번이고 사람을 죽이려고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너무나도 끔찍한 상황에 소름이 끼치질 지경이다.더 중요한 건 심리가 비정상일수록 치료가 더 어렵다는 점인데, 백승구는 이미 구제 불능의 경지에 이른 것 같았다.한 치의 희망도 보이지 않은 백아영은 절망이란 늪에 빠져 헤어나올 수 없었다.“원인을 찾아서 꼭 치료해줄 테니까...”이성준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백아영, 날 믿어.”그녀를 집어삼킬 듯한 패닉과 절망은 마법처럼 한순간에 잠잠해졌고, 서서히 평정심을 되찾기 시작했다.백아영은 이성준의 품에 안긴 채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는데, 마치 안전한 피난처를 찾은 듯 편안함이 몰려왔다.이성준은 두 사람을 자신의 별장으로 데려갔고, 심리상담사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이성준이 사적으로 일을 부탁하는 사람인데 능력이 꽤 뛰어나다고 했다.심리상담사는 백승구를 방으로 데려가서 상담을 시작했고, 백아영은 방 밖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시간이 이렇게 늦게 지나가는 느낌은
나인은 고개를 저었다.“사실 그게 제일 골치 아픈 일이에요. 워낙 특별한 케이스라서 최면을 건 사람만이 최면에서 깨어나게 할 수 있거든요.”최면을 건 사람은 제갈연준일 가능성이 컸다.이성준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제갈연준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줄게.”아직 제갈연준한테서 알아내야 할 것도 많고, 이용할 가치도 있는지라 그동안 지하실에 가둬뒀다.지하실에 있는 제갈연준은 비좁은 방에 갇혀 쇠사슬에 묶인 채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다.온몸은 상처투성이에 어떤 부위는 이미 딱지가 앉았고, 아직 덜 아문 곳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퀭한 얼굴은 초췌할 정도였고 살이 빠져서 피골이 상접했지만, 검푸른 눈동자만큼은 여전히 어둡고 침침한 기운을 뿜어냈다.마치 체내의 모든 수분이 날아가 마른 가죽만 남은 뱀처럼 어떻게든 공격하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듯싶었다.심지어 같이 죽을 수만 있다면 그 누구도 상관없는데, 뼛속까지 악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그를 보자마자 백아영은 살인을 저지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이내 달려가 그의 목을 조르고 이를 악물며 물었다.“우리 아들한테 최면을 건 사람이 너지?”“그래.”제갈연준은 대수롭지 않게 인정했고, 섬뜩한 눈빛으로 백아영을 빤히 쳐다보며 호탕하게 웃었다.“잔뜩 화가 난 모습을 보아하니 네 아들의 손에 드디어 피가 묻었나 본데? 왜? 사람을 죽였대? 하하하, 아영아, 내 곁에 있어야만 둘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고 했을 텐데, 날 떠나서 자유를 되찾았다고 생각해? 네 앞에 놓인 건 천국이 아니라 오로지 지옥뿐이야!”백아영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손가락을 점점 더 꽉 조였다. 제갈연준의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숨이 막히는 느낌에 흰자위까지 뒤집혔다.그녀는 진심으로 제갈연준을 죽이려고 했다.다시는 남을 해치지 못하게 악마 같은 사람을 이 세상에서 없애버릴 작정이었다.“백아영, 진정해.”이성준이 다가와 백아영의 손을 잡았다.“백승구를 최면에서 깨어나게 하려면 제갈연준이 필요해.”백아영은 애써 이성을 되찾고
백아영은 넋을 잃고 말았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실속까지 챙기다니?이내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그럴 생각은 없는데?”이성준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지금부터 생각해도 늦지 않았어.”“...”정신이 멀쩡한 상황에서도 이처럼 직설적으로 말할 줄이야! 당당하게 밀어붙이는 그의 모습에 백아영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성준아, 장난도 참, 세상에 널린 게 여자야. 난 고작 애 달린 미혼모에 불과한데, 나보다 좋은 여자가 어찌 한 둘뿐이겠어?”이성준이 피식 웃었다.“만약 다른 여자가 마음에 들었다면 굳이 널 4년 동안이나 찾아다녔을까? 백아영, 너 자신을 비하하지 마. 이미 내 눈에 들어온 이상 너한테 두 가지 선택권밖에 없어.”그는 한 발짝 앞으로 다가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강하고 위압적인 아우라를 뿜어냈다.“받아들이든지, 아니면 나중에 받아들이든지.”...결국, 제갈연준의 요구에 따라 임의로 산 하나를 선택해서 풀어주기로 했다.주위는 크고 작은 산이 굽이굽이 이어졌고, 무성한 나무로 둘러싸였다.차에서 내린 제갈연준은 고개를 들어 화창한 하늘을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오늘 날씨 참 좋네.”“쓸데없는 소리 작작 하고 얼른 시작해.”이성준이 싸늘한 목소리로 명령하자 위정이 백승구를 데리고 차에서 내렸다.백승구는 현재 미지의 변수 같은 존재라서 나이는 어리지만 위험천만했다. 결국 혹시 모를 돌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위정에게 그를 맡겼다.백아영은 초조한 얼굴로 옆에 서 있었다.제갈연준은 고개를 숙여 백승구를 내려다보았고, 창백한 얼굴에 사악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백승구라... 엄마가 좋은 이름을 지어주셨네? 너에 대한 엄마의 기대가 꼭 이루어졌으면 좋겠군.”백승구는 얌전한 모습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곧이어 눈빛이 탁하고 공허하게 변하더니 최면 상태에 빠져들었다.백아영은 분한 마음에 이를 악물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고작 그의 말 한마디에 최면에 걸리다니, 그동
다만 백아영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이성준의 앞에 막아설 줄은 몰랐다. 그녀가 생각보다 이성준을 많이 좋아하는 듯싶은데 이제 와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백아영은 그의 소유물로서 언젠간 자신한테로 돌아오기 마련이니까.위정 일행은 제갈연준을 따라 숲으로 들어갔고, 이내 점점 멀어졌다.이성준은 백아영을 안고 차에 올라탔고, 재빨리 구급상자를 꺼내 상처를 치료해줬다. 이미 검게 물든 상처를 바라보며 이성준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비록 고통에 못 이겨 식은땀이 흘러내렸지만, 백아영은 겉으로 아픈 티를 전혀 내지 않았다.그녀는 자신의 상처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이 정도 고통은 그동안 너무나도 많이 겪어 봤기에 무감각해질 정도였다.곧이어 의식을 잃은 건지 아니면 잠이 든 건지 알 수 없는 상태로 나인의 품에 안긴 백승구를 바라보며 물었다.“우리 승구 괜찮아요?”“최면에 걸려 기절했을 뿐, 의식을 회복하면 괜찮을 거예요. 최면술에서 이미 깨어났고, 앞으로 저랑 심리상담을 몇 번만 하면 여느 아이처럼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죠.”나인이 대답했다.가슴이 조마조마하던 백아영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하지만 제갈연준이 도망갔다고 생각하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성준아, 제갈연준이 독을 다루는데 능하니 위정 씨한테 조심하라고 해.”제갈연준이 숲속으로 도망친 순간부터 그를 다시 붙잡는 건 하늘의 별 따기라는 사실을 직감했다.이성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일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너 자신이나 걱정해!”“이 정도 상처는 아무것도...”“그만! 푹 쉬어.”백아영은 말문이 턱 막혔다. 분노로 가득한 이성준의 두 눈을 바라보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지만, 한편으로 마음이 따뜻해지기도 했다.그녀가 중독되어 힘들어할 때 드디어 걱정하는 사람이 나타나다니!팽팽하게 당겨진 신경이 저도 모르게 느슨해지면서 백아영은 이성준의 품에 안겨 편안하게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소식을 전해 들은 선우경진이 별장으로 부랴부랴 달려와 백아영을 해독
심장이 덜컥 내려앉으며 제 발 저린 탓에 쿵쾅거리기 시작했다.순간 호흡마저 흐트러지고 당황한 나머지 백아영은 뒤로 한발 물러섰다.“아, 아니?”“아니라면서 왜 당황하는데?”이성준은 그녀의 턱을 움켜잡고 살짝 들어 올리더니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백아영, 대체 뭘 걱정하는 거야? 만약 백승구 때문이라면 심리상담을 받고 나서 다른 아이들과 별반 다를 바 없다고 하잖아. 나랑 현무와 잘만 지낸다면 나도 당연히 아들처럼 예뻐하겠지. 혹시라도 다른 이유가 있다면 편하게 얘기해, 내가 대신 처리해줄 테니까. 우린 이미 4년이라는 시간을 낭비했는데 어떻게 단 한 번이라도 시도해보지 않고 지레 포기할 수 있어?”이성준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몸조리하는 동안 잘 생각해 봐.”백아영이 쌓아 올린 마음의 벽이 적극적인 공세에 못 이겨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이내 머릿속도 뒤죽박죽되었다.밤이 되자 이현무는 베개를 끌어안고 백아영의 방으로 찾아가 기대에 가득 찬 얼굴로 말했다.“아영 아줌마, 오늘 저녁에 같이 자도 돼요? 전 잠버릇이 얌전해서 맹세하건대 꼼짝도 안 하거든요. 물론 걱정된다면 저 끌어안고 자도 돼요.”사랑스러운 녀석의 모습에 백아영은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 그를 향해 손짓했다.“자, 이리 와.”이현무는 자연스럽게 백아영의 품에 파고들어 고개를 들고 상처가 난 부위를 호 하고 불어줬다.“이렇게 후후 불면 안 아프다고 했어요.”“그러네, 진짜 안 아파.”백아영은 웃으면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현무가 유난히 좋았고, 녀석을 안고 있노라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안도감이 몰려왔다.심지어 이현무와 떨어져 있겠다고 생각할 때면 이루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웠다.“아줌마...”이현무는 백아영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이 세상에서 아빠만큼 아줌마가 제일 좋은데, 혹시...”볼이 발갛게 달아오른 아이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최대한 용기를 끌어내
최면에서 깨어난 백승구는 180도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말수도 많아졌고, 백아영과의 스킨십은 물론 다른 사람과 교제하는 것도 딱히 거부하지 않았다.더는 뚱하고 무표정한 목각 인형이 아니었고, 가끔 천진난만한 미소를 보이기도 했다.바닥에 앉아 블록을 가지고 즐겁게 노는 두 아이의 모습을 보자 백아영은 진정한 행복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조용히 백아영의 곁에 나타난 이성준이 그윽한 시선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곧이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나랑 함께 한다면 아이들이 매일 저렇게 놀 수 있을 텐데.”화들짝 놀란 백아영이 고개를 돌리자 햇빛을 머금은 이성준의 눈동자와 맞닥뜨렸는데, 반짝이는 두 눈은 생기가 넘치면서도 매력적으로 다가왔다.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그녀는 더는 자기 마음을 통제할 수 없었다.밤이 되자 백아영은 백승구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물었다.“승구야, 현무가 좋아?”백승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맑고 낭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네.”백아영이 다시 물었다.“성준 삼촌은 어때?”백승구는 이성준을 떠올렸다. 비록 그의 아우라 때문에 조금 겁이 났지만, 요 며칠 동안 지내본 결과 좋은 사람 같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백아영의 심장이 점점 더 빨리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더니 살짝 붉어진 얼굴로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렇다면 앞으로 두 사람이랑 같이 살고 싶어?”“네.”백승구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백아영의 마지노선이 드디어 힘없이 무너졌다.그녀는 이성준과 행복을 논할 가능성이 있는지 시도해보고 싶었다.이내 마음을 먹고 백승구를 재운 다음 이성준의 방으로 찾아가 살며시 문을 두드렸다.“성준아, 할 얘기가 있어.”곧바로 문이 열리더니 이성준의 커다란 몸이 떡하니 나타났다. 허리에는 타올만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었고, 훤히 드러난 탄탄한 가슴에는 물기가 촉촉했다.입이 떡 벌어지는 광경에 그녀는 코피가 터질 뻔했다.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백아영은 서둘러 눈을 가렸다.“옷은 왜 벗고
이성준의 안색이 돌변하더니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어갔다.조마조마하던 백아영의 가슴도 철렁 내려앉았다. 역시나 이럴 줄 알았다. 구역질이 나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그녀는 시무룩한 얼굴로 눈을 내리깔았다.“없던 일로 해...”“대체 언제부터 이도하가 마음에 든 거지?”이성준은 이를 악물고 억지로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순간 어리둥절한 백아영은 무슨 상황인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부인했다.“마음에 든 적이 없는데?”“하! 그렇다면 내가 알아서 포기하도록 핑곗거리를 대는 건가?”이성준의 눈빛이 점점 사나워지더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백아영, 날 거절하려고 고작 이따위 구실을 지어낸 거야?”백아영은 할 말을 잃었다.오만 가지 가능성을 상상해본 적이 있지만, 이성준이 믿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백아영은 어이가 없었다.“성준아, 진짜 아니...”“됐어! 지금은 얼굴조차 보고 싶지 않으니까.”이성준은 씩씩거리며 방문을 쿵 하고 닫았다. 귀청이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별장마저 뒤흔들리는 듯싶었다.백아영은 어안이 벙벙한 채 문 앞에 서서 넋을 잃고 말았다.결과는 그녀의 예상과 달리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이성준이 믿지 않은 이상 그의 태도는 물론 받아들이는 여부조차 모르는데 무슨 수로 이도하를 만나 그날 밤의 일에 대해 알아보겠는가?순간 그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방 안에서 이성준은 홧김에 티 테이블을 걷어찼다. 초조한 마음으로 백아영의 답변만 기다려왔는데 결국은 완곡하게 거절당하지 않았는가?게다가 구실까지 찾으려고 이도하를 끌어들이다니! 이도하를 방패막이로 삼겠다는 건가?“위정.”이성준이 전화를 걸어 싸늘한 말투로 명령했다.“이도하를 아프리카 탄광에 보내버려.”백아영은 이성준의 방문 앞에 한참 서 있었지만, 도무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자 어쩔 수 없이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그녀의 눈길이 닿지 않은 곳에 빼꼼 열렸던 백승구의 방문도 슬그머니 닫혔다.앙증맞은 얼굴에 핑크빛이 감도는 입술
분명 맛있는 음식인데도 백아영은 입맛이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몇 입 먹고 난 뒤 배가 아플 정도였다. 그녀는 이성준의 품에 안겨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 이성준은 긴장된 표정으로 그녀를 껴안고 자리에서 크게 화를 냈다. “윌리엄스, 혹시 음식에 독을 넣은거예요?!”윌리엄스는 놀라서 얼굴이 창백해져서 급히 변명했다.“아니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 백아영은 힘겹게 이성준의 손목을 잡고 힘없이 입을 열었다. “윌리엄스가 독을 넣지 않았어. 내가...”“너 왜 그래?” 이성준은 땀을 뻘뻘 흘리며 백아영을 안은 팔뚝을 가볍게 떨었다. 백아영은 몹시 아팠지만 눈길은 부드러웠고 약간 희색을 띠었다. “윌리엄스에게 실례지만, 국왕께 하룻밤 묵을 방을 빌려달라고 부탁해 줘. 그리고 산부인과 의사를 불러줘.”이성준이 눈치를 채지 못하자 백아영은 창백한 얼굴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방금 맥을 짚었는데, 나 임신했어.” 이성준의 동공은 움츠러들었다가 한참 만에 겨우 회복되었다. 찰나의 놀라움 뒤에는 오히려 걱정이 밀려왔다.“임심했는데 통증이 이렇게 심해?”그는 조바심이 나서 윌리엄스에게 의사를 불러오도록 재촉했다. 백아영은 아파서 힘이 없었던 나머지 그의 품에 푹 기대어 있었다. 전에 백아영은 이런 비슷한 환경에서 한 아이가 강제로 유산되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임신한 사실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하고 산에 가서 실랑이를 벌였고, 이로 인해 병세가 심했다. 이 아이를 키우고 싶지만, 고생할까봐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백아영은 가볍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정상적이야.”‘정상이라니?’ 이성준은 다른 여자가 임신을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몰랐지만, 백아영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진작 알았더라면 둘째를 갖지 않았을 것이다. 8개월 후. 산부인과 수술실 문이 열리자 이성준이 급히 달려들였다. 점잖던 남자는 안달복달한 얼굴로 물었다.“제 마누라는 어때요? 무사한가요?”“모녀는 무사합니다.”
집사는 경악했다.“폐하, 그들은 굴러들어 온 복도 차버리니 분명 본때를 보여줘야 하는데, 어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윌리엄스의 안색을 본 집사는 목이 메었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윌리엄스는 조금 전까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던 모습은 사라지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성준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경외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고, 간신히 이빨 사이로 글자를 밀어냈다.이, 이 대표?” 이성준은 경멸하듯 그를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윌리엄 집안의 자식이 확실히 다 컸네.” 윌리엄스의 얼굴이 더 새하얗게 질렸다. 엄청난 두려움이 엄습했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 이성준을 처음 만났다. 그때 이성준은 아직 소년이었지만, 기세가 등등하고, 과감하며, 감히 국왕인 윌리엄스의 아버지와 거래를 논했다. 그 당시 그의 아버지조차도 이성준을 대단하게 여겼다. 심지어 윌리엄스에게 앞으로 절대 이성준의 미움을 사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온 나라의 세력이 처참하게 약해질 것이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부터 이성준은 악마라고 마음에 새겨 두었다. 게다가 윌리엄스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었다. 이성준은 그의 나라에 협조하지 않는 대신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반년 동안 누워계셨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너무 커서 윌리엄스는 일찌감치 이번 생은 절대 H 국에 가지 않기로 했고, 절대로 이성준을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기존의 거래 협력을 모두 점진적으로, 완곡하게 해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항상 악마를 멀리하려고 했지만 이렇게 엮일 줄은 몰랐다. 백아영은 뜻밖에도 이성준의 아내였다! 어떤 생명의 은인 규칙, 첫눈에 반한 사랑 따위는 모두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는 어떤 계획도 할 수 없었다. 단지 자신의 왜 행동을 하기 전에 백아영의 신원을 조사하지 않았는지 후회되었다! 악마를 끌어들여 버렸다... “복을 차버린다나 뭐라나, 말을 그렇게밖에 못해?” 윌리엄스가 집사를 발로 매우 세게 찼
차에 타고 있던 남자들도 일어서더니 기세등등하게 백아영과 이성준을 포위했다. 험상궂은 얼굴의 한 남자가 환영 반 협박 반인 어투로 말했다. “두 분, 차에서 내리십시오.”차 밖에서는 윌리엄스가 활짝 웃으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백아영이 차에서 내리기를 목 빠지게 기다렸다. 곁에 있던 집사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폐하, 궁전의 수비를 모두 강화 완료했습니다. 궁전 주위에 800명의 호위 병사를 추가로 파견했어요. 이분들은 이미 독 안에 든 쥐가 되셔서 도망갈 수 없습니다.” “이혼 변호팀 사람들은 이미 도착하셨고 두 분이 차에서 내리시면 바로 처리할 수 있어요.”“폐하, 곧 미인을 품에 안게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윌리엄스의 입꼬리는 한껏 올라갔다. 산 위에서 백아영의 워낙 강인한 모습에 사람도모자라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지금은 백아영의 대단한 솜씨도, 그녀의 남편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단념할 수밖에 없다. 모두 생명의 은인으로 보고 첫눈에 반하게 만든 백아영 탓이었다. 그는 이 나라의 왕이다. 그가 마음에 드는 한 반드시 그의 것이다. 또한 결혼 후 백아영을 자신의 매력에 매료시켜 점차 이성준을 잊게 할 자신이 충만했다. 윌리엄이 생각을 하던 중, 차 문이 열리고 관광버스에서 백아영이 내렸다. 윌리엄스는 넥타이를 매만지며 그녀를 반겼다.“아가씨, 또 뵙네요.”윌리엄스가 아양을 떠는 모습을 보고 백아영은 입을 다물었다. 백아영의 뒤로 큰 덩치의 이성준이 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머리 위로 이성준은 차갑게 말했다.“내 아내를 뺏으려는 게 너야?” 이성준은 포위망 속에 서 있었다. 다른 사람의 구역에서 그는 독 안에 든 쥐였지만 그는 움츠러들지도 않고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이성준의 기는 모두를 앞질러 버려 마치 모든 것을 장악하는 왕인 것 같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서늘한 몇 글자가 사람을 더욱 섬뜩하게 했다. 집사는 높은 인물들을 많이 보았었기에 즉시 이성준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만 이곳은 그들의 궁전이
윌리엄스는 어안이 벙벙했다.백아영의 솜씨는 정말 놀라웠다. 그녀의 기묘한 침을 꽂는 기술이 더욱 놀라웠다. 보기만 해도 눈이 즐거워지는 백아영의 몸에는 빛이 보였다.그녀의 아름다움은 남달라서 비길 것도 없이 아름다웠다.백아영은 여전히 은침을 손에 들고 윌리엄스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만 좀 건드리세요. 알아들으셨죠?”“저는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윌리엄스의 의욕 넘치는 말은 눈앞으로 가까워져 오는 침에 놀라 목이 메었다. 순식간에 덮쳐 온 위험과 두려움이 그를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게 했다.백아영은 다시 경고했다.“잘 가세요. 바래다 드리지는 않을게요.”젊고 고집스러운 윌리엄스는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위협은 그를 이성적으로 뒤로 물러나 타협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백아영은 바늘을 다시 집어넣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네 부하는 경련을 일으키다가 10여 분 만에 의식을 회복했다. 그들은 서로를 부축하며 몸을 일으키자 멀리 떨어진 곳에 백아영이 보였다. 비록 뒷모습뿐이었지만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폐하, 죄송합니다. 저희가 너무 부족했어요.”윌리엄스는 백아영을 탐욕스럽게 바라보았다.“너희 탓이 아니야. 저 소녀가 너무 강할 뿐이야. 가자. 이제 내려가야지.”부하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 여왕님을... 그냥 이렇게 포기하시려고요?”윌리엄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그럼 내가 지금 뭘 할 수 있겠어?”말이 통하지도 않고 싸워서 이기지도 못하니 부하는 조용히 입을 꾹 닫았다.하지만 윌리엄스는 미소를 띠었다.“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이야.”이성준은 열매 한 봉지 가득 따왔다. 그는 열매를 깨끗이 씻은 뒤 쟁반에 담아 백아영 앞에 대령했다. 하지만 안색이 좋지 않았다.“방금 돌아오는 길에 들었는데 누가 너를 귀찮게 했다면서?”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도리도리 저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문제를 일으켰어.”이성준은 자초지종을 듣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백아영은 잠시 멈칫하더니 웃었다. “아파서 머리까지 다쳤나. 걱정 마세요, 위험했지만 목숨은 건졌어요. 돌아가시면 의사부터 보세요. 잘 케어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에요.”백아영은 진지하게 당부했지만 상대방은 한마디도 귀담아듣지 않았다.백아영이 그만 몸을 일으키려 하자 청년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저 지금 진지해요.”“이것은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규칙이기도 합니다. 생명을 구해준 은인은 반드시 몸으로 갚아야 합니다.”윌리엄스 왕족?백아영은 입헌군주제인 국가에 왔다. 이곳은 현대사회와 어우러졌지만 여전히 왕권을 시행하고 있다. 지금의 왕은 20대 초반의 청년으로 나이는 어리지만 듬직하고 성숙하며 상당한 재주를 가졌다고 전해졌다. 왕은 1년 넘게 국가 정무를 질서 있게 처리했다.다시 이 풋풋하고 고집 센 청년을 본 백아영은 목이 메었다. 왕은 소문과는 좀 다른듯했다.백아영은 청년한테 잡힌 손을 빼냈다.“그냥 눈에 보여서 구해준 거니 고마워하실 필요 없으세요. 그리고 저는 결혼까지 한 여자에요.”“결혼하셨군요...”청년은 매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젊고 예쁜 백아영이 일찍 결혼했으니 흔치는 않은 일이다. 그러나 청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저는 재혼에 대해 편견이 없어요. 남편분과 이혼해도 그대를 왕후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저는 이혼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청년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는 그제야 난처한지 땅바닥에서 일어나 앉아서는 백아영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무슨 복잡한 일을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백아영은 혼자 심각하게 고민하는 청년이 이해가 되지 않아 벌떡 일어나 자리를 뜨려고 했다.곧이어 청년도 벌떡 일어났다. 너무 갑자기 몸을 일으킨 탓인지 몸을 휘청거리자 곁에 있던 남성이 얼른 그를 부축해 주었다.청년은 휘청거리는 몸을 아랑곳하지 않고 백아영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막아섰다. 그의 맑은 눈은 어느새 포악해졌다.“아가씨, 억양을 들어보면 외국인인 것 같네요. 아직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룰에 대해 잘 모
하지만 백아영은 현무가 힘들어할까 봐 차마 너무 많은 프로젝트를 참가하지 못하게 하고 관광지 한 곳만 더 돌고 남원에 돌아갈 생각이었다.이성준은 진지하게 말했다. “출산 장려 정책은 참 옳아.”백아영은 어리둥절했다.“자식이 많아야 집도 떠들썩하고, 현무도 동생이 생기지.”어린 노동자가 하나 더 필요하다는 그의 뜻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이성준은 방긋 웃으며 백아영을 벽에 바짝 붙였다. “여보, 우리 현무에게 동생 만들어주자.”이날 현무와 백아영은 영상통화를 했다. “엄마, 안색이 안 좋아. 어디 아파?”화면 속에서 백아영의 안색은 살짝 하얗게 보였다.하지만 별다르게 불편한 곳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낮에 산에 오르느라 피곤해서 그런가 봐. 괜찮아, 좀 쉬면 괜찮아 질 거야.” “그럼, 내일 일단 산을 내리지 말고 호텔에서 쉬는 거예요?”내일 하산할 예정이었지만 백아영은 단호하게 답했다.“맞아.”그제야 현무는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통화를 끊고 백아영의 이마에 길쭉한 손이 닿았다. 이성준은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정말 괜찮은 거 맞아?”실제로 봤을 때 백아영은 이상이 없어 보였지만 이성준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아. 내가 의사인데 모르겠어?”“하룻밤을 묵어도 좋으니까, 난 네가 좋아하는 열매를 좀 따올게.”이 산의 열매는 특산물이었기에 백아영이 매우 좋아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한 후, 이성준은 혼자 산꼭대기에 가서 열매를 땄고, 백아영은 아름다운 산기슭에 앉아 차를 마시며 아침 풍경을 감상했다. 그녀는 조용히 열매를 기다리고 있었다.기다리는 동안 찻집 안에서 갑자기 시끄러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도와주세요! 여기 도와주세요!”“의사 없어요? 응급처치할 줄 아는 사람 혹시 있어요? 좀 살려주세요! 저의 도련님을 살려주세요...”식당에서 대략 이십 대 초반의 한 청년이 땅에 누워있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
한 달 뒤.인천공항에서 현무는 양복을 차려입고 반듯하게 서서 웃음을 가득 머금고 백아영을 배웅했다.“엄마, 걱정하지 말고 잘 놀다 와요. 여기 일은 저한테 맡겨요.” 현무는 이성준의 아들답게 한 달 만에 기본적인 경영 업무를 배웠고, 심지어 위정을 도울 수 있었다.또한 그는 이성준의 외아들인 만큼 이성그룹의 후계자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는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나이에도 모든 주주와 직원들을 위협하기에 충분했기에 일을 더 쉽게 추진할 수 있었다.게다가 이성준의 한 달간 밑받침을 잘 깔아놓은 덕에 안심하고 현무와 위정에게 이성그룹을 맡길 수 있게 되었다.위정의 불평도 적어졌다. 그는 앞으로 일할 날에 희망이 생긴 것 같았다.“내 아들 최고.”백아영은 현무를 꼭 끌어안고 그의 볼에 쪽 뽀뽀했다.“엄마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영상통화 해. 날마다 기분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누가 감히 너를 괴롭히면, 엄마와 아빠가 바로 날아와서 때려 놓을 거야.”백아영의 품에서 현무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순간 엘리트에서 어린 아기가 되어 자신도 모르게 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하지만 이성준의 말과 백아영의 행복을 생각하며 현무는 마음을 가다듬고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였다.“엄마 걱정하지 마, 외삼촌과 위정 아저씨가 계셔서 아무도 날 못 괴롭혀. 내가 좀 더 크면 내가 엄마를 보호해야 해.”백아영은 감동되어서 감정이 벅차 놀랐다. 현무는 너무 든든한 아들이었다.선우경진은 팔짱을 낀 채 한쪽에 서 있었다. “이씨 가문의 일은 해결됐지만 아직 선우 일가가 남아있다는 것을 잊지 마.”“그리고, 여유가 있으면 새로운 아이템도 많이 생각해 둬.”한 달 동안 그들은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급한 불은 거의 다 껐다. 하지만 의학은 끝이 없고 신약 연구는 더 중요했기에 선우경진은 수시로 백아영을 감시했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다른 곳에서 시야를 넓히고 영감을 얻으면 신약을 개발하는데 더 쉬웠다.이성준은 한쪽에
현무는 계획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지만, 다섯 살짜리 꼬마에게는 좀 시기상조였다. 하지만 이성준은 그런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그러나 이성준의 엄숙한 표정을 보니 바로 계획을 하나 만들어 내야 할 것 같았다.현무는 골똘히 생각했다.“공부를 열심히 해서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고 매일 엄마와 아빠와 함께 있고 싶어요.”“엄마를 기쁘게 해주는 것과 함께 있는 것을 동시에 이룰 수 없어.”“왜요?”현무가 공부해서 잘하고 매일 학교 갔다 오면 자연스레 백아영을 볼 수 있고 그녀도 즐거워하는 게 일상이었다.“너 그동안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잊었어?”현무가 네 살 되기 전까지 백아영은 그의 곁에 있어줄수 없었다. 백아영이 돌아온 후, 비록 온 가족이 드디어 모였지만,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았고 때마다 백아영은 떠나야 했고, 항상 바쁜 일상에 기쁠 때도 있었지만 힘들 때가 더 많았다. 현무는 그런 백아영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엄마는 나와 함께 있어서 기분이 나쁜 거예요?”어린 현무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돌기도 전에 이성준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너 때문이 아니야. 엄마가 놓인 상황 때문이지. 남원에서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일들과 언제든지 생기는 변화 때문이야.”“만약 누군가가 이 짐을 대신 나눠주고, 그런 일들을 완전히 해결해 주고, 엄마가 마음껏 여행을 다닐 수 있게 해준다면 매일 즐거워할 거야.”현무는 어리지만 총명해서 즉시 이성준의 뜻을 알아차렸다.“아빠, 제가 엄마의 일을 나누어서 해도 돼요?”이성준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너는 할 수 있어.”“그런데 힘들 거야. 엄청 힘들 수 있어. 대신에 엄마를 오랫동안 못 볼 텐데, 그래도 할래?”현무는 힘든 것은 두렵지 않지만, 오랫동안 백아영을 볼 수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현무는 머뭇거렸다. 그는 섭섭해서 고뇌했다.“나 그냥 엄마랑 여행 가면 안 돼?”이성준은 자애로운 아버지의 미소를 지었다. “네가 경영대를 일찍 졸업하면 돼.”현무는 지능이 높아서, 월반하는
이성준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 은퇴할 생각이야.”‘역시!’백아영이 머릿속으로만 하던 황당한 추측을 이성준 입으로 직접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믿기지 않았다. 왜 이성준이 갑자기 도망 오려 했던 건지, 그리고 왜 그 큰 짐을 위정과 선우경진한테 내던졋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성준은 그들을 훈련하고 있었다.수단이 좀 잔인했을 뿐이다.“왜 갑자기 은퇴하고 싶은 거야?”백아영은 아직 앞날이 밝은 이성준이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성준은 백아영을 응시하며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쓱쓱 만졌다.“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이성준은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아 수많은 고통을 겪었다.이성준의 괴로운 심정은 눈에 훤히 비쳤다. 그는 사실 오래전부터 은퇴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영아, 앞으로 남은 생 동안 나는 네가 조용하고 평온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은퇴하고 쇼핑센터를 떠나면 원한도 모두 훨훨 털어 버릴 수 있다. 두 사람은 세계 여행하며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된다.백아영의 머릿속은 멍해졌다.백아영은 이성준이 은퇴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자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성준이 계획한 미래에 항상 그녀가 있었다. 그의 미래는 온통 백아영 한사람이었다.백아영은 감동되어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가 환상하던 미래는 정말 기대할 만한 것같았다.“하지만 지금은 내가 선우경진과 위정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 같아.”겨우 보름밖에 안 되었는데, 그들은 고통을 호소하며 참지 못하는데 정말 큰 일이라면 더 감당하기 어려워할 게 뻔했다.이성준은 눈썹을 찡그리며 잠시 사색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현무 이제 다섯 살이니까 남자 다 됐지.”백아영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현무에게 맡길 생각은 아니지?”이성준은 담담하게 되물었다.“안 될 게 뭐가 있어?”‘안 될 게 뭐가 있겠냐고? 현무 이제 겨우 다섯 살인데!’이성준은 여전히 꿈쩍하지 않았다. “내가 다섯 살 때, 이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