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준의 시선은 싸늘했고 마치 수천 개의 날카로운 가시가 날아와 그녀의 몸을 찌르는 것 같았다.백아영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을 떨었고 그제야 자신이 방금 어떤 행동을 했는지 깨달았다.겁에 질려 무의식으로 도망치고 싶었지만 지금 도망치는 순간 오만방자한 제갈미연의 캐릭터가 무너진다는 생각에 마지못해 자리에 서서 입을 열었다.“그쪽은 현무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눈이 멀었네. 당신도 그저 백채영과 같은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네!”말을 하면 할수록 분노가 치밀어오른 백아영은 두려운 것도 잊은 채 이성준을 노려봤다.당당한 그녀의 모습에 이성준은 자신이 죄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순간 그런 생각이 우습게 느껴졌다.이성준은 눈앞에 있는 여자한테 철저하게 속았다. 본성은 착한 사람이고 이현무를 사랑하는 마음만은 진심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모든 게 연기에 불과했다!“제갈미연, 당신이 지금 어떤 신분인지 잊은 것 같네.”자리에서 일어선 이성준은 살벌한 분위기를 풍기며 백아영을 향해 걸어갔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움켜쥐며 경고했다.“수감자인 주제에 남의 가정사에 참견하지 마. 다음에 또 이러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말을 마친 그는 혐오감에 손을 내던졌다.백아영은 저도 모르게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고 턱에서 느껴지는 따끔함보다 마음속에서 느껴지는 허탈함이 더 고통스러웠다.그녀가 아무리 이현무를 아끼고, 아무리 많은 증거를 내밀어도 이성준한테는 그저 잔머리 굴리면서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는 남이었다.그들이야말로 절대 갈라질 수 없는 진정한 가족이었다.“이 사람 끌어내요. 다시는 현관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세요.”이성준은 하얀 손수건으로 방금 백아영에 닿았던 손을 닦으며 싸늘하게 명령했다.도우미 몇 명이 백아영을 끌었고 저항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던 그녀는 그저 시야에서 멀어져가는 이성준을 바라보며 마치 둘 사이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다....그렇게 2, 3일 동안은 이현무에게 침을 놓을 때를 제외하고 거
‘말 잘 들으면 스파이 누나 만날 수 있겠지?’창밖에서 대화를 엿듣고 있던 백아영은 의아했고 왠지 모르게 가슴이 미어졌다.그제야 며칠 동안의 ‘화목함’은 그저 백채영이 이성준에게 보여주기 위해 준비했던 게임에 불과했다는 걸 알아챘다.자식을 아끼기는커녕 여전히 이현무를 괴롭히고 있었다.기대에 가득 찬 얼굴로 방안에 갇혀있는 순진한 아이를 바라보던 백아영은 가슴이 아파졌고 더 이상 가만히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만약 그녀가 여기에 없었다면 이현무는 계속하여 백채영에게 괴롭힘을 당했을 것이다.떠나기 전 반드시 백채영의 정체를 폭로하리라고 마음을 다잡았다!같은 시각 제갈 일가의 기지, CCTV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리사는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곧바로 백채영에게 이 소식을 알리려고 핸드폰을 들었다.그런데 전화를 걸자마자 누군가가 핸드폰을 빼앗았다.제갈연준은 핸드폰에 찍힌 번호를 보며 눈빛이 음산하게 변하더니 입가에는 싸늘한 웃음을 띠었다.“리사야, 간이 크네. 감히 나 몰래 수작까지 부리고?”백채영에게 정보를 전달해 주는 건 제갈연준 몰래 했던 일이었기에 순식간에 얼굴이 하얗게 질린 리사는 서둘러 변명했다.“도련님,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일을 하겠어요. 전 그저 백아영에게 속임수를 쓸 기회를 주고 싶지 않았을 뿐이에요. 이성준과의 관계가 좋아진다면 우리한테도 불리하잖아요.”“누가 그래? 불리하다고?”제갈연준은 연결된 전화를 끊고 싸늘한 눈빛으로 리사를 노려봤다.“리사야, 네가 모든 일을 망칠 뻔했어.”그의 말에 충격을 받은 리사는 믿기지 않는 듯 다시 물었다.“도련님, 설마 다른 계획이라도 있으신 거예요?”제갈연준은 핸드폰을 쓰레기통에 버리며 답했다.“네가 직접 벌 받아.”리사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을 떨었다.제갈 일가의 처벌은 매우 잔인하다고 소문이 났다. 제갈연준의 곁에서 오랜 세월을 함께했음에도 불구하고 말만 들어도 두려움을 느낄 정도였지만 다행히 아직 처벌받은 적은 없었다.하지만 지금은...겁이 났지만 감히 용서를
이성준은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뿌리치려고 했다.그러나 손가락에서 전해지는 촉감 때문에 전류가 찌릿 흐르면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자그마한 손은 마치 백아영이 붙잡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심장 박동이 점점 빨라진 이성준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지만, 눈에 들어온 거라고는 요염하기 그지없는 얼굴뿐이었다.하지만 걱정으로 찌푸린 눈썹은 어딘가 익숙했고, 날까지 어두워서 그런지 문득 넋을 잃고 말았다.백아영은 이성준이 멈춰서자 꾸물댈 틈도 없이 조급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안 들리겠지만, 현무가 왜 음식을 한 입만 먹고 배불리 먹지 못하냐 잘 생각해 봐. 대체 누가 가르쳤을까? 그 의도는 뭐지? 게다가 한창 천진난만하고 장난기가 많은 세 살배기가 우울하고 소심해 보이는 이유를 정녕 모르겠어? 당신이 그렇게 쌀쌀맞게 대하는 것도 아닌데, 아이가 왜 아빠라고 하면 두려움에 떨까? 이성준, 당신도 알 만큼 아는 사람인데 마음만 먹는다면 반드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챌 거로 믿어.”말을 마친 백아영은 그의 손을 놓아주었다.“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여기까지야. 내가 속셈이 있다는 둥 이간질한다는 둥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지만, 현무만큼은 잘 보살펴주길 바랄게.”물론 이성준은 이성적으로 백아영의 말을 믿으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쁜 심보를 가진 여자라는 사실을 입증한 적도 있고 입만 열면 거짓말이지만, 그녀의 말을 잠자코 듣다 보니 그동안 품어 왔던 의구심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다음날은 세 번째로 침을 맞는 날이다.백아영은 일찍이 이현무의 방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이때, 연날리기하러 나갔던 일가족은 시간이 다 되어서야 밖에서 돌아왔다.백채영이 이현무의 손을 잡고 앞장섰고, 이성준이 그 뒤를 따랐다.세 식구의 모습은 너무나도 행복하고 잘 어울렸다. 만약 백채영의 진면목을 몰랐더라면 백아영은 진심으로 축복했을 것이다.반대편에서 오미란과 선우경진이 걸어왔는데, 오미란은 걱정이 된 나머지 세 번째 치료에서는 직접 지켜보기로
안 그래도 갑작스러운 상황인데, 게다가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백아영이 사람을 구하기 위해 뛰어들 줄은 아무도 몰랐다.“샹들리에부터 치워요!”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이성준은 성큼성큼 걸어가 샹들리에를 번쩍 들어 올렸다.그의 시선은 샹들리에 아래에 깔린 가녀린 몸집에서 떠나질 않았다.샹들리에 크리스털에서 반사하는 빛 때문에 유난히 빨간 선혈을 바라보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더니 두려움과 공포심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이는 마치 백아영을 찾지 못했을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심지어 걱정스러운 마음은 이현무를 향한 것인지 아니면 그녀 때문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다른 이들도 뒤따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내 선우경진이 재빠르게 달려와 이성준을 도와 샹들리에를 옮겼다.그제야 샹들리에 아래에 가려진 상황을 확인한 사람은 저도 모르게 숨을 헉하고 들이마셨다.백아영의 등 전체가 파편에 찔려 피투성이가 된 채 선혈이 낭자했다.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모습이었지만, 그녀는 웅크린 자세를 유지하며 이현무가 다치지 않도록 팔로 완전히 감싸 안았다.이성준의 동공이 급격하게 흔들리더니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간 생각이 점점 확신으로 변해가고 있었다.“현무야, 내 새끼!”샹들리에를 치우자 오미란이 달려와서 백아영의 품에 안긴 이현무를 잽싸게 끌어냈고, 이현무가 무사한 걸 확인하고 나서야 한시름을 놓았다.하지만 그녀가 뿌리친 탓에 백아영은 균형을 잃고 옆으로 쓰러지게 되었는데, 이대로 땅바닥에 부딪히는 순간 타박상까지 입게 될 것이다.하지만 기운이 하나도 없는 그녀는 통증 때문에 감각조차 무뎌졌다. 그나마 이현무가 멀쩡해서 천만다행이었다.이성준은 거의 무의식중으로 다리를 움직여 백아영이 바닥에 쓰러지기 전에 상처 입은 부위를 정확하게 피해 조심스럽게 받쳐주었다.그녀를 끌어안은 이성준은 손가락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려왔고, 심장은 마치 찢길 듯 아프면서 패닉에 빠졌다.이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경진 씨, 사람 살려요!”이성준은 백아영을 안고 자기
모성본능?굳이 따지자면 이유라고 할 수 있겠지만 백채영은 어떻게 했는가? 이현무의 생모로서 위험이 닥치자 자식을 버리고 나 몰라라 도망가는 꼴이라니?이에 이성준의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상처를 치료하고 나서 이성준은 백아영을 부축하여 침대에 옆으로 눕혔다.백아영은 불편한 나머지 안절부절못했다.“다른 방으로 바꿔줘. 여기서 지내면 안 되는 거 아니야?”그녀는 이성준의 안방임을 알아차렸다.이성준은 조심스럽게 이불을 끌어당겨 그녀에게 덮어주었다.“그 상처로 어딜 갈 수나 있겠어? 그냥 여기 있어.”“하지만 백채영이...”언제든지 들어올 텐데 말이다.백아영은 몸까지 다쳤는데 괜히 백채영을 마주쳤다가 기분마저 잡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백채영과 이성준이 함께 썼던 침대에 누워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이성준은 애매모호하게 대답했다.“여기 올 일은 없을 테니까 편히 쉬어.”결국 자기 할 말만 내뱉고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갔다.방문을 나서는 순간 눈물이 그렁그렁한 백채영과 맞닥뜨렸다.백채영은 눈이 빨개질 정도로 울었고, 미안한 얼굴로 진심 어린 사과를 건넸다.“성준 씨, 미안해. 아까 너무 놀라서 나도 모르게 피했나 봐. 미처 현무를 신경 쓸 겨를도 없었어. 이게 다 겁이 많은 내 탓이야. 잘못했어, 설령 다치더라도 현무를 지켜줘야 했었는데... 이번 한 번만 용서해주면 안 돼? 내가 잘못했다는 걸 알았으니까 앞으로 다시는 안 그럴게.”이성준은 싸늘한 눈빛으로 백채영을 바라보았다. 사실 눈앞의 여자한테 오래전부터 혐오감이 들었지만, 오늘에 와서 다시 한번 충격을 받았다.비록 그녀가 탐욕스럽고 악랄하며 품행이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짐승도 제 새끼를 아끼는 만큼 한 아이의 어머니로서 이현무를 사랑하는 마음은 진심이라고 믿었다.그러나 지금은...“만약 현무를 진심으로 걱정한다면 나한테 용서를 구하러 찾아오는 게 아니라 현무가 겁을 먹었는지부터 확인해 봐야지 않을까?”백채영은 흠칫 놀랐다. 그제야 무슨 실수
그러고 나서 대체 무슨 자격으로 이현무를 돌본단 말이지?이런 친어머니라면 없어도 그만이었다.“저도 생각이 있습니다.”이성준은 단호하게 말했다.물론 이성준을 믿고 있는 오미란은 설득하기를 포기했다. 나중에 이현무가 잠이 든 뒤 백채영을 불러왔다.그러나 태도만큼은 쌀쌀맞기 그지없었다.“현무의 친엄마만 아니었다면 평생 못 만나게 했을 텐데! 잘 보살피고 있어. 현무가 잠에서 깨면 트라우마가 남지 않도록 똑바로 사과하고 위로해줘.”백채영은 미안한 표정으로 진심을 담아서 말했다.“어머님, 알겠습니다. 친엄마로서 당연히 그 누구보다 현무를 사랑하지 않겠어요?”오미란을 보내고 문을 닫은 뒤, 백채영의 얼굴에 있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그녀는 싸늘한 눈빛으로 침대에서 자는 이현무를 바라보았다. 온종일 꾹꾹 눌러 담았던 분노가 폭발하면서 곧장 화풀이할 곳이 필요했다.“이게 다 네 탓이야. 네가 사고를 친 바람에 성준 씨가 날 싫어하고, 다른 사람도 무시하잖아! 대체 무슨 낯짝으로 잠을 자는 거야? 얼른 일어나지 못해?”이내 가방에서 가느다란 바늘을 꺼내 이현무의 팔을 세게 찔렀다.이현무는 아파서 비명을 질렀지만, 백채영이 입을 틀어막았다.“입 다물어!”잠에서 깨어나 눈앞에 있는 사람이 백채영이라는 걸 확인하는 순간 두 눈에 두려움이 가득한 이현무는 겁을 먹은 나머지 찍소리도 못했다.백채영을 보자 저도 모르게 벌벌 떨었다.“엄마, 잘못했어요...”그는 무의식중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었다.그러나 백채영은 한 치의 연민도 없이 모든 화를 이현무한테 풀었다.“잘못하면 그만이야? 이게 다 네 탓이야! 네 놈을 찔러 죽여야지, 원!”그녀가 바늘로 이현무을 찌르기 직전 방문이 갑자기 벌컥 열렸다.깜짝 놀란 백채영이 손을 부르르 떨면서 고개를 홱 돌렸다. 이내 입구에 서서 싸늘한 얼굴로 냉기를 뿜어내는 이성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또박또박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마치 날카로운 칼날 같았다.“지금 뭐 하는 거지?”“그, 그게...”
이성준은 백채영을 쫓아내면서도 시종일관 무표정이었다.서운함은 물론 미련도 느껴지지 않았다.그나마 따지자면 아마도 차마 티를 낼 수 없는 후련함 정도였다.이에 이성준은 저도 모르게 후회가 밀려왔다. 이상한 낌새를 일찌감치 알아차렸다면 여태껏 백채영이 이현무를 학대한 것도 막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그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현무야, 앞으로 겁먹지 않아도 돼. 저 사람은 더는 널 괴롭히지 못할 거야.”이현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머뭇거리다가 쭈뼛쭈뼛 물었다.“아빠, 혹시 스파이 누나 보러 가도 돼요?”방금 일어난 일 때문에 모든 게 물거품이 될까 봐 그는 조심스럽게 말을 보탰다.“오후에 약속했잖아요.”백아영을 언급하자 아이의 눈빛이 그제야 생기가 돌았다.이성준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일단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해줄래? 솔직하게 얘기해줘야 해.”“네!”“며칠 전 밤에 엄마가 널 데리고 꽃방에 가서 연을 만들라고 한 적이 있어?”이현무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면서 안절부절못했다.무언가를 눈치챈 이성준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엄마가 너한테 무슨 말을 했든 앞으로 신경 쓰지 마. 아빠가 묻는 말에 솔직하게 대답해줄래?”방금 백채영을 쫓아내면서 다시는 괴롭히는 일이 없도록 장담하는 이성준을 떠올리자 이현무도 용기를 내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네, 엄마가 아빠한테 얘기하지 말라고 했어요.”그동안 품어왔던 의심이 입증되는 순간이었다.그제야 이성준은 백아영이 했던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았다. 여태껏 그녀를 오해하고 있었다니!그는 이현무의 말랑한 손을 붙잡고 말했다.“아빠랑 같이 가자.”이현무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침실과 가까워질수록 이성준의 마음속에는 풀리지 않는 의혹과 모순으로 가득했다.그녀를 처음 봤을 때는 이현무에게 독약을 먹였고, 두 번째 만남에서는 거만한 모습으로 등장해 심사위원을 매수하기 위해 비열한 수법까지 동원했다. 이런 여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무리 훑어봐도 악녀가 따로
결국 제 발 저린 나머지 횡설수설 말했다.“현무한테 마지막으로 침을 놔주려고 찾아가던 참이었어. 마침 먼저 찾아왔으니 안방에서 놔줄게. 은침 좀 줄래?”이성준은 선우경진한테 은침을 부탁하는 대신 방으로 걸어 들어가 침대맡에 있는 서랍에서 정교한 박스를 꺼냈다.안에는 은침이 몇 개 들어 있었는데 예전에 백아영이 사용했던 것으로 그동안 보물처럼 간직하고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눈에 익은 은침을 보자 백아영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성준한테 그녀의 은침이 왜 있냐는 말이지?하지만 감히 대놓고 물어보지는 못하고 그냥 아무것도 모른 척했다.“그, 그럼 시작할게?”그녀가 물었다. 날카로운 시선을 온몸으로 받으면서 불안함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영문을 알 수 없어 섬뜩할 지경이었다.이성준은 그녀한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응.”숨이 막히는 압박감 속에서 백아영은 애써 침착함을 유지한 채 이현무를 침대에 눕히더니 침을 놓기 시작했다.어쨌거나 그녀의 전문분야인 만큼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자 확실히 이성준을 덜 신경 쓰게 되면서 해독하는 데 전념했다.마지막이자 제일 중요한 치료인지라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었다.이성준은 계속해서 그녀를 관찰했다.의심이 드는 순간 침을 놓는 수법만 봐도 백아영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얼굴만 빼고 분위기, 느낌, 의술까지 너무 흡사했다.이때 황당무계한 가설이 마치 땅에 뿌린 작은 씨앗이 하늘을 찌를 듯한 나무로 자라나는 것처럼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한 시간 뒤, 백아영은 마지막 은침을 뽑아냈다.그녀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면서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다 됐어, 현무야. 완쾌한 걸 축하해!”말을 마치고 나서 침대에 기댔는데, 제집처럼 편해서가 아니라 상처가 회복되기도 전에 고도의 집중력까지 발휘해서 침을 놓는 바람에 극심한 정신적, 체력적 소모로 인해 얼굴에 피곤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고, 눈조차 뜨기 힘들었다.“스파이 누나, 고생하셨어요. 얼른 누워서 쉬세요.”이현무는 얌전하게
분명 맛있는 음식인데도 백아영은 입맛이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몇 입 먹고 난 뒤 배가 아플 정도였다. 그녀는 이성준의 품에 안겨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 이성준은 긴장된 표정으로 그녀를 껴안고 자리에서 크게 화를 냈다. “윌리엄스, 혹시 음식에 독을 넣은거예요?!”윌리엄스는 놀라서 얼굴이 창백해져서 급히 변명했다.“아니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 백아영은 힘겹게 이성준의 손목을 잡고 힘없이 입을 열었다. “윌리엄스가 독을 넣지 않았어. 내가...”“너 왜 그래?” 이성준은 땀을 뻘뻘 흘리며 백아영을 안은 팔뚝을 가볍게 떨었다. 백아영은 몹시 아팠지만 눈길은 부드러웠고 약간 희색을 띠었다. “윌리엄스에게 실례지만, 국왕께 하룻밤 묵을 방을 빌려달라고 부탁해 줘. 그리고 산부인과 의사를 불러줘.”이성준이 눈치를 채지 못하자 백아영은 창백한 얼굴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방금 맥을 짚었는데, 나 임신했어.” 이성준의 동공은 움츠러들었다가 한참 만에 겨우 회복되었다. 찰나의 놀라움 뒤에는 오히려 걱정이 밀려왔다.“임심했는데 통증이 이렇게 심해?”그는 조바심이 나서 윌리엄스에게 의사를 불러오도록 재촉했다. 백아영은 아파서 힘이 없었던 나머지 그의 품에 푹 기대어 있었다. 전에 백아영은 이런 비슷한 환경에서 한 아이가 강제로 유산되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임신한 사실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하고 산에 가서 실랑이를 벌였고, 이로 인해 병세가 심했다. 이 아이를 키우고 싶지만, 고생할까봐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백아영은 가볍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정상적이야.”‘정상이라니?’ 이성준은 다른 여자가 임신을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몰랐지만, 백아영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진작 알았더라면 둘째를 갖지 않았을 것이다. 8개월 후. 산부인과 수술실 문이 열리자 이성준이 급히 달려들였다. 점잖던 남자는 안달복달한 얼굴로 물었다.“제 마누라는 어때요? 무사한가요?”“모녀는 무사합니다.”
집사는 경악했다.“폐하, 그들은 굴러들어 온 복도 차버리니 분명 본때를 보여줘야 하는데, 어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윌리엄스의 안색을 본 집사는 목이 메었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윌리엄스는 조금 전까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던 모습은 사라지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성준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경외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고, 간신히 이빨 사이로 글자를 밀어냈다.이, 이 대표?” 이성준은 경멸하듯 그를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윌리엄 집안의 자식이 확실히 다 컸네.” 윌리엄스의 얼굴이 더 새하얗게 질렸다. 엄청난 두려움이 엄습했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 이성준을 처음 만났다. 그때 이성준은 아직 소년이었지만, 기세가 등등하고, 과감하며, 감히 국왕인 윌리엄스의 아버지와 거래를 논했다. 그 당시 그의 아버지조차도 이성준을 대단하게 여겼다. 심지어 윌리엄스에게 앞으로 절대 이성준의 미움을 사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온 나라의 세력이 처참하게 약해질 것이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부터 이성준은 악마라고 마음에 새겨 두었다. 게다가 윌리엄스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었다. 이성준은 그의 나라에 협조하지 않는 대신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반년 동안 누워계셨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너무 커서 윌리엄스는 일찌감치 이번 생은 절대 H 국에 가지 않기로 했고, 절대로 이성준을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기존의 거래 협력을 모두 점진적으로, 완곡하게 해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항상 악마를 멀리하려고 했지만 이렇게 엮일 줄은 몰랐다. 백아영은 뜻밖에도 이성준의 아내였다! 어떤 생명의 은인 규칙, 첫눈에 반한 사랑 따위는 모두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는 어떤 계획도 할 수 없었다. 단지 자신의 왜 행동을 하기 전에 백아영의 신원을 조사하지 않았는지 후회되었다! 악마를 끌어들여 버렸다... “복을 차버린다나 뭐라나, 말을 그렇게밖에 못해?” 윌리엄스가 집사를 발로 매우 세게 찼
차에 타고 있던 남자들도 일어서더니 기세등등하게 백아영과 이성준을 포위했다. 험상궂은 얼굴의 한 남자가 환영 반 협박 반인 어투로 말했다. “두 분, 차에서 내리십시오.”차 밖에서는 윌리엄스가 활짝 웃으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백아영이 차에서 내리기를 목 빠지게 기다렸다. 곁에 있던 집사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폐하, 궁전의 수비를 모두 강화 완료했습니다. 궁전 주위에 800명의 호위 병사를 추가로 파견했어요. 이분들은 이미 독 안에 든 쥐가 되셔서 도망갈 수 없습니다.” “이혼 변호팀 사람들은 이미 도착하셨고 두 분이 차에서 내리시면 바로 처리할 수 있어요.”“폐하, 곧 미인을 품에 안게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윌리엄스의 입꼬리는 한껏 올라갔다. 산 위에서 백아영의 워낙 강인한 모습에 사람도모자라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지금은 백아영의 대단한 솜씨도, 그녀의 남편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단념할 수밖에 없다. 모두 생명의 은인으로 보고 첫눈에 반하게 만든 백아영 탓이었다. 그는 이 나라의 왕이다. 그가 마음에 드는 한 반드시 그의 것이다. 또한 결혼 후 백아영을 자신의 매력에 매료시켜 점차 이성준을 잊게 할 자신이 충만했다. 윌리엄이 생각을 하던 중, 차 문이 열리고 관광버스에서 백아영이 내렸다. 윌리엄스는 넥타이를 매만지며 그녀를 반겼다.“아가씨, 또 뵙네요.”윌리엄스가 아양을 떠는 모습을 보고 백아영은 입을 다물었다. 백아영의 뒤로 큰 덩치의 이성준이 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머리 위로 이성준은 차갑게 말했다.“내 아내를 뺏으려는 게 너야?” 이성준은 포위망 속에 서 있었다. 다른 사람의 구역에서 그는 독 안에 든 쥐였지만 그는 움츠러들지도 않고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이성준의 기는 모두를 앞질러 버려 마치 모든 것을 장악하는 왕인 것 같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서늘한 몇 글자가 사람을 더욱 섬뜩하게 했다. 집사는 높은 인물들을 많이 보았었기에 즉시 이성준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만 이곳은 그들의 궁전이
윌리엄스는 어안이 벙벙했다.백아영의 솜씨는 정말 놀라웠다. 그녀의 기묘한 침을 꽂는 기술이 더욱 놀라웠다. 보기만 해도 눈이 즐거워지는 백아영의 몸에는 빛이 보였다.그녀의 아름다움은 남달라서 비길 것도 없이 아름다웠다.백아영은 여전히 은침을 손에 들고 윌리엄스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만 좀 건드리세요. 알아들으셨죠?”“저는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윌리엄스의 의욕 넘치는 말은 눈앞으로 가까워져 오는 침에 놀라 목이 메었다. 순식간에 덮쳐 온 위험과 두려움이 그를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게 했다.백아영은 다시 경고했다.“잘 가세요. 바래다 드리지는 않을게요.”젊고 고집스러운 윌리엄스는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위협은 그를 이성적으로 뒤로 물러나 타협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백아영은 바늘을 다시 집어넣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네 부하는 경련을 일으키다가 10여 분 만에 의식을 회복했다. 그들은 서로를 부축하며 몸을 일으키자 멀리 떨어진 곳에 백아영이 보였다. 비록 뒷모습뿐이었지만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폐하, 죄송합니다. 저희가 너무 부족했어요.”윌리엄스는 백아영을 탐욕스럽게 바라보았다.“너희 탓이 아니야. 저 소녀가 너무 강할 뿐이야. 가자. 이제 내려가야지.”부하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 여왕님을... 그냥 이렇게 포기하시려고요?”윌리엄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그럼 내가 지금 뭘 할 수 있겠어?”말이 통하지도 않고 싸워서 이기지도 못하니 부하는 조용히 입을 꾹 닫았다.하지만 윌리엄스는 미소를 띠었다.“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이야.”이성준은 열매 한 봉지 가득 따왔다. 그는 열매를 깨끗이 씻은 뒤 쟁반에 담아 백아영 앞에 대령했다. 하지만 안색이 좋지 않았다.“방금 돌아오는 길에 들었는데 누가 너를 귀찮게 했다면서?”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도리도리 저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문제를 일으켰어.”이성준은 자초지종을 듣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백아영은 잠시 멈칫하더니 웃었다. “아파서 머리까지 다쳤나. 걱정 마세요, 위험했지만 목숨은 건졌어요. 돌아가시면 의사부터 보세요. 잘 케어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에요.”백아영은 진지하게 당부했지만 상대방은 한마디도 귀담아듣지 않았다.백아영이 그만 몸을 일으키려 하자 청년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저 지금 진지해요.”“이것은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규칙이기도 합니다. 생명을 구해준 은인은 반드시 몸으로 갚아야 합니다.”윌리엄스 왕족?백아영은 입헌군주제인 국가에 왔다. 이곳은 현대사회와 어우러졌지만 여전히 왕권을 시행하고 있다. 지금의 왕은 20대 초반의 청년으로 나이는 어리지만 듬직하고 성숙하며 상당한 재주를 가졌다고 전해졌다. 왕은 1년 넘게 국가 정무를 질서 있게 처리했다.다시 이 풋풋하고 고집 센 청년을 본 백아영은 목이 메었다. 왕은 소문과는 좀 다른듯했다.백아영은 청년한테 잡힌 손을 빼냈다.“그냥 눈에 보여서 구해준 거니 고마워하실 필요 없으세요. 그리고 저는 결혼까지 한 여자에요.”“결혼하셨군요...”청년은 매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젊고 예쁜 백아영이 일찍 결혼했으니 흔치는 않은 일이다. 그러나 청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저는 재혼에 대해 편견이 없어요. 남편분과 이혼해도 그대를 왕후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저는 이혼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청년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는 그제야 난처한지 땅바닥에서 일어나 앉아서는 백아영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무슨 복잡한 일을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백아영은 혼자 심각하게 고민하는 청년이 이해가 되지 않아 벌떡 일어나 자리를 뜨려고 했다.곧이어 청년도 벌떡 일어났다. 너무 갑자기 몸을 일으킨 탓인지 몸을 휘청거리자 곁에 있던 남성이 얼른 그를 부축해 주었다.청년은 휘청거리는 몸을 아랑곳하지 않고 백아영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막아섰다. 그의 맑은 눈은 어느새 포악해졌다.“아가씨, 억양을 들어보면 외국인인 것 같네요. 아직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룰에 대해 잘 모
하지만 백아영은 현무가 힘들어할까 봐 차마 너무 많은 프로젝트를 참가하지 못하게 하고 관광지 한 곳만 더 돌고 남원에 돌아갈 생각이었다.이성준은 진지하게 말했다. “출산 장려 정책은 참 옳아.”백아영은 어리둥절했다.“자식이 많아야 집도 떠들썩하고, 현무도 동생이 생기지.”어린 노동자가 하나 더 필요하다는 그의 뜻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이성준은 방긋 웃으며 백아영을 벽에 바짝 붙였다. “여보, 우리 현무에게 동생 만들어주자.”이날 현무와 백아영은 영상통화를 했다. “엄마, 안색이 안 좋아. 어디 아파?”화면 속에서 백아영의 안색은 살짝 하얗게 보였다.하지만 별다르게 불편한 곳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낮에 산에 오르느라 피곤해서 그런가 봐. 괜찮아, 좀 쉬면 괜찮아 질 거야.” “그럼, 내일 일단 산을 내리지 말고 호텔에서 쉬는 거예요?”내일 하산할 예정이었지만 백아영은 단호하게 답했다.“맞아.”그제야 현무는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통화를 끊고 백아영의 이마에 길쭉한 손이 닿았다. 이성준은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정말 괜찮은 거 맞아?”실제로 봤을 때 백아영은 이상이 없어 보였지만 이성준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아. 내가 의사인데 모르겠어?”“하룻밤을 묵어도 좋으니까, 난 네가 좋아하는 열매를 좀 따올게.”이 산의 열매는 특산물이었기에 백아영이 매우 좋아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한 후, 이성준은 혼자 산꼭대기에 가서 열매를 땄고, 백아영은 아름다운 산기슭에 앉아 차를 마시며 아침 풍경을 감상했다. 그녀는 조용히 열매를 기다리고 있었다.기다리는 동안 찻집 안에서 갑자기 시끄러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도와주세요! 여기 도와주세요!”“의사 없어요? 응급처치할 줄 아는 사람 혹시 있어요? 좀 살려주세요! 저의 도련님을 살려주세요...”식당에서 대략 이십 대 초반의 한 청년이 땅에 누워있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
한 달 뒤.인천공항에서 현무는 양복을 차려입고 반듯하게 서서 웃음을 가득 머금고 백아영을 배웅했다.“엄마, 걱정하지 말고 잘 놀다 와요. 여기 일은 저한테 맡겨요.” 현무는 이성준의 아들답게 한 달 만에 기본적인 경영 업무를 배웠고, 심지어 위정을 도울 수 있었다.또한 그는 이성준의 외아들인 만큼 이성그룹의 후계자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는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나이에도 모든 주주와 직원들을 위협하기에 충분했기에 일을 더 쉽게 추진할 수 있었다.게다가 이성준의 한 달간 밑받침을 잘 깔아놓은 덕에 안심하고 현무와 위정에게 이성그룹을 맡길 수 있게 되었다.위정의 불평도 적어졌다. 그는 앞으로 일할 날에 희망이 생긴 것 같았다.“내 아들 최고.”백아영은 현무를 꼭 끌어안고 그의 볼에 쪽 뽀뽀했다.“엄마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영상통화 해. 날마다 기분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누가 감히 너를 괴롭히면, 엄마와 아빠가 바로 날아와서 때려 놓을 거야.”백아영의 품에서 현무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순간 엘리트에서 어린 아기가 되어 자신도 모르게 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하지만 이성준의 말과 백아영의 행복을 생각하며 현무는 마음을 가다듬고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였다.“엄마 걱정하지 마, 외삼촌과 위정 아저씨가 계셔서 아무도 날 못 괴롭혀. 내가 좀 더 크면 내가 엄마를 보호해야 해.”백아영은 감동되어서 감정이 벅차 놀랐다. 현무는 너무 든든한 아들이었다.선우경진은 팔짱을 낀 채 한쪽에 서 있었다. “이씨 가문의 일은 해결됐지만 아직 선우 일가가 남아있다는 것을 잊지 마.”“그리고, 여유가 있으면 새로운 아이템도 많이 생각해 둬.”한 달 동안 그들은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급한 불은 거의 다 껐다. 하지만 의학은 끝이 없고 신약 연구는 더 중요했기에 선우경진은 수시로 백아영을 감시했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다른 곳에서 시야를 넓히고 영감을 얻으면 신약을 개발하는데 더 쉬웠다.이성준은 한쪽에
현무는 계획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지만, 다섯 살짜리 꼬마에게는 좀 시기상조였다. 하지만 이성준은 그런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그러나 이성준의 엄숙한 표정을 보니 바로 계획을 하나 만들어 내야 할 것 같았다.현무는 골똘히 생각했다.“공부를 열심히 해서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고 매일 엄마와 아빠와 함께 있고 싶어요.”“엄마를 기쁘게 해주는 것과 함께 있는 것을 동시에 이룰 수 없어.”“왜요?”현무가 공부해서 잘하고 매일 학교 갔다 오면 자연스레 백아영을 볼 수 있고 그녀도 즐거워하는 게 일상이었다.“너 그동안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잊었어?”현무가 네 살 되기 전까지 백아영은 그의 곁에 있어줄수 없었다. 백아영이 돌아온 후, 비록 온 가족이 드디어 모였지만,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았고 때마다 백아영은 떠나야 했고, 항상 바쁜 일상에 기쁠 때도 있었지만 힘들 때가 더 많았다. 현무는 그런 백아영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엄마는 나와 함께 있어서 기분이 나쁜 거예요?”어린 현무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돌기도 전에 이성준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너 때문이 아니야. 엄마가 놓인 상황 때문이지. 남원에서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일들과 언제든지 생기는 변화 때문이야.”“만약 누군가가 이 짐을 대신 나눠주고, 그런 일들을 완전히 해결해 주고, 엄마가 마음껏 여행을 다닐 수 있게 해준다면 매일 즐거워할 거야.”현무는 어리지만 총명해서 즉시 이성준의 뜻을 알아차렸다.“아빠, 제가 엄마의 일을 나누어서 해도 돼요?”이성준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너는 할 수 있어.”“그런데 힘들 거야. 엄청 힘들 수 있어. 대신에 엄마를 오랫동안 못 볼 텐데, 그래도 할래?”현무는 힘든 것은 두렵지 않지만, 오랫동안 백아영을 볼 수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현무는 머뭇거렸다. 그는 섭섭해서 고뇌했다.“나 그냥 엄마랑 여행 가면 안 돼?”이성준은 자애로운 아버지의 미소를 지었다. “네가 경영대를 일찍 졸업하면 돼.”현무는 지능이 높아서, 월반하는
이성준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 은퇴할 생각이야.”‘역시!’백아영이 머릿속으로만 하던 황당한 추측을 이성준 입으로 직접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믿기지 않았다. 왜 이성준이 갑자기 도망 오려 했던 건지, 그리고 왜 그 큰 짐을 위정과 선우경진한테 내던졋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성준은 그들을 훈련하고 있었다.수단이 좀 잔인했을 뿐이다.“왜 갑자기 은퇴하고 싶은 거야?”백아영은 아직 앞날이 밝은 이성준이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성준은 백아영을 응시하며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쓱쓱 만졌다.“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이성준은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아 수많은 고통을 겪었다.이성준의 괴로운 심정은 눈에 훤히 비쳤다. 그는 사실 오래전부터 은퇴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영아, 앞으로 남은 생 동안 나는 네가 조용하고 평온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은퇴하고 쇼핑센터를 떠나면 원한도 모두 훨훨 털어 버릴 수 있다. 두 사람은 세계 여행하며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된다.백아영의 머릿속은 멍해졌다.백아영은 이성준이 은퇴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자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성준이 계획한 미래에 항상 그녀가 있었다. 그의 미래는 온통 백아영 한사람이었다.백아영은 감동되어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가 환상하던 미래는 정말 기대할 만한 것같았다.“하지만 지금은 내가 선우경진과 위정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 같아.”겨우 보름밖에 안 되었는데, 그들은 고통을 호소하며 참지 못하는데 정말 큰 일이라면 더 감당하기 어려워할 게 뻔했다.이성준은 눈썹을 찡그리며 잠시 사색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현무 이제 다섯 살이니까 남자 다 됐지.”백아영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현무에게 맡길 생각은 아니지?”이성준은 담담하게 되물었다.“안 될 게 뭐가 있어?”‘안 될 게 뭐가 있겠냐고? 현무 이제 겨우 다섯 살인데!’이성준은 여전히 꿈쩍하지 않았다. “내가 다섯 살 때, 이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