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급하게 의사를 찾는 환자의 무례함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기에 백아영은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그와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이쪽으로 앉으세요. 방이 좁은데 괜찮죠?”어릴 적부터 교양 있게 자란 제갈연준은 조금도 꺼리지 않았고 우아하게 소파에 앉더니 자연스레 손목을 내밀었다.백아영은 그의 맞은 편에 앉아 맥을 짚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병세를 알아낸 듯 한참을 망설이더니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죄송합니다. 어떠한 독에 중독되신 것 같은데 이건 제가 치료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그동안 많은 난치병을 치료 한건 맞으나 이 세상엔 그녀의 의술 범위에서 멀리 벗어나 있는 병들도 많았고, 특히 2, 3개월 사이에 이런 경우를 적지 않게 부딪쳤다.넓은 세상에 비하면 그녀도 작은 존재에 불과했다.제갈연준의 매력적인 미소는 순식간에 실망과 좌절로 변했다.“그동안 많은 의사를 찾아봤지만 하나같이 치료할 수 없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당신이 제 구원자인 줄 알았는데, 어떻게 마지막 지푸라기마저...”그는 갑자기 몸을 백아영에게 기울더니 매혹적인 눈빛을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아영 씨, 그동안 많은 난치병을 치료했잖아요. 정말 저는 방법이 없나요? 저 아직 어려요. 이렇게 빨리 생을 마감하고 싶지 않다고요. 살려만 주신다면 원하는 건 뭐든지 드릴게요. 수십, 수백억도 괜찮고 필요하다면... 이 몸마저 드릴 수 있어요.”잘생긴 얼굴을 가진 제갈연준이 여심을 자극하는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니 그 누가 감당할 수 있겠는가.백아영은 순간 몸에서 불타오르는 듯한 느낌이 솟구쳐 올랐다.그녀는 당황한 듯 황급히 뒷걸음질 치더니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서야 힘겹게 말을 이었다.“죄송해요. 이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그렇다고 포기하지는 마세요. 세상에는 저보다 의술이 뛰어난 사람들도 많으니까 계속 찾다 보면 치료할 수 있는 의사를 만나게 될 거예요!”옆에서 힘을 불어넣는 백아영과 달리 제갈연준은 실망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어쨌든 절 치료할 수 없다
노경우가 건달 두 명을 데리고 건방지게 들어왔다.손에 밧줄을 든 채 험상궂은 표정을 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뭔가 사고를 치려는 기색이 역력했다.백아영은 경계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물러섰다.“노경우,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노경우는 백채영의 대학 시절 남자친구로, 당시 재벌 2세였다. 그들은 알콩달콩한 커플로 소문이 자자했고, 노경우는 백채영을 위해서 그녀를 적잖이 괴롭혔다. 하여 백아영도 이 부잣집 도련님에게 아무런 호감이 없었다.감옥에서 나온 후 그들이 헤어졌다는 소식을 들었고, 백채영이 이성준과 사귄 뒤로 단 한 번도 노경우를 본 적이 없었다.그런데 이런 모습으로 만나게 될 줄이야!노경우는 손에 들고 있던 밧줄을 잡아당기며 숨김없이 말했다.“당연히 널 데려가려고 왔지.”“노경우, 난 너랑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왜 잡아간다는 거야? 게다가 납치는 불법이야!”백아영은 주머니에 손을 숨긴 채 조용히 핸드폰을 더듬으며 신고하려고 시도했다.몇 년간 건달 노릇을 해온 노경우는 단번에 그녀의 의도를 파악했고 부하들에게 핸드폰을 뺏어오라고 명령했다.부하 두 명이 달려들자, 백아영은 은침으로 반격하며 한 명을 찔러 쓰러뜨렸고 나머지 한 명을 상대하려고 정신을 다잡았다.“쓸모없는 놈, 여자한테 지다니!”노경우는 욕설을 퍼부으며 백아영을 향해 걸어갔다.노경우까지 달려든다면 백아영 한 명으로 그들을 상대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제갈연준이 노경우를 잡고, 백아영이 다른 한 명을 제압한다면 일이 훨씬 쉬워진다.백아영은 제갈연준을 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연준 씨, 저 사람 막아주세요!”우아하게 소파에 앉아있던 제갈연준은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여유롭게 백아영을 보며 입을 열었다.“도와주면 저한테 뭘 해줄 건가요?”젠틀하고 잘생긴 첫인상과 달리 위급한 상황에서 내뱉은 그의 질문은 백아영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고 어안이 벙벙했다.제갈연준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그 웃음은 여전히 매혹적이었지만 전에 없었던 사악함이 곁들어 있었다.
‘그렇게 많은 선택지를 줬는데 정말 간다고? 사리 분별 못하는 거야?’이성준은 화가 난 채로 핸드폰을 툭 내려놓더니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계속해!”싸늘한 그의 말투에 임원들은 자세를 다잡았고 숨도 함부로 내쉬지 못했다.업무 보고하던 임원은 어쩔 수 없이 다시 보고를 이어갔고 회의가 시끄럽고 따분하게 느껴진 이성준은 참을성마저 없어졌다.“됐어!”그는 차가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핸드폰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오늘은 그만하자.”수십 명의 임원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화가 난 건지 알 수 없어 난감했다.이성준은 화가 잔뜩 난 채로 직접 운전해서 백아영의 집으로 향했다.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녀의 방문이 닫히지 않은 걸 본 이성준은 마음 한구석의 긴장은 풀렸지만, 여전히 화는 식지 않았다.그는 성큼성큼 방으로 걸어갔다.“백아영, 조건이 마음에 안 들어? 그럼 도대체 뭘 원하는 거야...”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수라장이 된 방을 발견했다. 옷과 생활용품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짓밟힌 캐리어가 바닥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누가 봐도 몸싸움이 일어난 흔적이다!백아영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성준의 표정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분노는 어느새 걱정으로 뒤바뀌었고 이성준은 재빨리 아래층으로 내려오면서 인근 CCTV를 샅샅이 조사하라고 명령했다.그러나 이상하게도 백아영의 모습이 찍힌 CCTV는 전부 고장 났다.이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범위 넓혀! 수상한 차량이나 사람 단 하나도 놓쳐서는 안 돼!”“대표님, 그 정도까지 확인하려면 시간이 많이...”“무슨 수를 써서라도 빨리 알아내!”...백아영은 손발이 묶이고 입이 막힌 채 뒷좌석에 앉아 꼼짝도 못 했고, 좌우로 건달 한 명씩 앉아있어 도망갈 틈조차도 없었다.그녀는 번화한 도시에서 점점 외진 산속으로 변해가는 차창 밖의 광경을 무기력하게 바라보고 있었다...얼마나 운전했는지 날이 어두워지고서야 차가 멈췄다.그들은 거
얼마나 지났는지 모른다. 몇 분인지 몇 시간인지도 모를 만큼의 절망 속에서 백아영은 끊긴 비탈길이 보였다.아래는 괴석이 겹겹이 쌓여있는 마른 바닥이었고 이대로 차가 돌진한다면 뼈마저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게 된다.이런 상황에서 더는 자신을 구할 수 없게 된 그녀는 절망한 채 배를 움켜쥐며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쿵!귀를 찢는 폭발음이 낭떠러지에서 전해왔고 시커먼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노경우는 산길 옆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더니 일이 성사된 듯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그는 곧바로 다른 차에 올라타 자리를 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급 레스토랑에 도착한 후 어느 룸으로 들어갔다.테이블은 진수성찬으로 차려져 있었고 의자에 앉아있던 백채영이 다급하게 물었다.“죽었어?”“내가 나섰는데 당연히 죽어야지.”노경우는 백채영의 의자에 걸터앉아 다정하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물었다.“귀염둥이, 일은 잘 끝났는데 어떻게 보상해 줄 거야?”백아영이 죽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 백채영은 가방 안에서 카드 한 장을 꺼냈다.“이거 줄게. 카드 안에 90억 있어.”카드를 건네받은 노경우의 손은 점점 그녀의 어깨를 타고 밑으로 내려갔다.“내가 널 위해서 사람을 죽였어. 이런 큰일을 돈으로만 해결하면 안 되지.”“그럼 뭘 원하는 거야?”백채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손을 붙잡았다.“나 곧 사모님 될 사람이야. 함부로 손대지 마.”“우리 원래 알콩달콩했잖아. 이게 어떻게 함부로 하는 거야?”그는 백채영의 손을 뿌리치더니 거리낌 없이 밑으로 향했다.“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네. 오랜만에 한 번 만져볼까?”이성준을 만난 뒤로 그녀는 노경우가 자신에게 어울릴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다시 인연을 맺을 생각도 없거니와 함부로 손을 대는 그가 혐오스럽게 느껴졌다.“노경우, 경고하는데 그 더러운 손 치워!”“경고? 귀염둥이가 이런 말 하면 나 너무 속상해. 그러다가 백아영 죽였다는 걸 말할 수도...”백채영은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성준은 그녀를 등에 업고 한참이나 걸었다. 몸의 상처는 고통으로 마비되었고 두 다리는 마치 자기 것이 아닌 듯 기계적으로 움직였다.그렇게 날이 희미하게 밝아올 무렵에야 마침내 한 마을을 보았다.가장 가까운 마당에 30대 중반의 여자가 일찍 일어나 돼지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고, 갑자기 들이닥친 피투성이 된 남녀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당신들...”이성준은 천천히 백아영을 내려놓더니 여자에게 건네주며 쉰 목소리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이 사람 살려줘요...”말을 마친 그는 힘이 빠져 그대로 기절했다....다음 날 아침, 백아영이 눈을 번쩍 떴다. 심한 어지럼증과 함께 온몸 곳곳에 난 상처가 아파지기 시작했다.‘아파... 도대체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두통과 함께 머릿속에 당시 상황이 생각났다. 차가 부딪친 후 누군가가 그녀를 차에서 끌어 내렸고 한참이나 업혀 다닌 기억이 떠올랐다.등에서는 피가 끊임없이 흘러나와 멈출 줄 몰랐지만, 그 사람은 마치 단단한 강철처럼 걸음이 비틀거리긴 했어도 절대 쓰러지지 않았다.차오르는 눈물이 시야를 가렸고 그녀는 황급히 방안을 둘러봤지만, 비좁은 방에는 그녀뿐이었다.백아영은 아픈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침대에서 내려와 밖으로 향했다.막 문을 열려는 순간 방문이 열리면서 50대로 보이는 여성이 눈을 반짝이며 그녀를 쳐다봤다.“일어났네?”“아주머니,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와 함께 온 그 남자는요?”“옆방에 있어.”옆방으로 가니 피투성이가 된 이성준이 침대에 누워있었고 눈을 감고 있는 그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상처로 뒤덮인 그의 몸은 아무런 처치도 되어있지 않아 피가 그대로 흘러내려 딱지가 앉거나 짓무르는 지경에 이르렀다.백아영은 심장이 무언가에 찔린 듯 숨이 막힐 정도로 아팠다.“이 사람 상처에는 왜 약이 안 발라져 있죠?”백아영의 몸에 있는 상처에는 약이 발려져 있었다.‘시간이 없었나? 아니면 약이 부족한가?’아주머니는 예상치도 못한 답을 내놓았다.“우리 집 약을 아
무고한 사람의 목숨으로 타협을 강요하는 그들의 모습에 모든 호감이 사라졌고 백아영은 이를 악문 채 불편함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아주머니, 전 정말 아들분과 결혼 못 해요. 실은...”그녀는 잠깐 머뭇거리더니 중상을 입고 초췌해진 이성준의 모습을 보며 말을 이었다.“저희 이미 결혼했고 제가 저 사람 아내예요. 그러니까 아들분과 결혼 못 합니다. 이제 다 나으면 아들분께 괜찮은 여성분 소개해 드릴게요.”“아내? 사기 치지 마!”아주머니는 조금도 믿지 않았고 논리적으로 분석했다.“내가 시골에 산다고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해? 나도 좋은 건 알아. 저 사람은 명품을 입고 있는데 넌 싸구려 옷을 입고 있잖아. 그런데 두 사람이 어떻게 부부일 수가 있겠어. 기껏 해 봤자 비서겠지 뭐.”“저희 둘은...”백아영이 설명하려고 하자 아주머니는 귀찮다는 듯 호통을 치며 말했다.“허튼소리 하지 마. 내 아들이 널 좋아하니까 넌 무조건 시집와야 해. 어쨌든 결론만 말하자면, 네가 내 아들이랑 결혼해야 저 남자를 구할 수 있어. 싫으면 그냥 죽게 놔두던지!”아주머니의 고집스러운 모습을 보고 백아영은 자신이 더 이상 무슨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렇게 된 이상,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내야만 한다.“아주머니, 살려주신 건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고 꼭 보답하러 다시 올게요. 저 사람 치료할 약은 제가 다른 곳에서 구해보도록 할 테니까 신세 지지 않겠습니다.”말을 마친 백아영은 침대 곁으로 다가가 이성준을 조심스럽게 일으켜 세우고 떠나려 했다.그녀는 자신이 의사이기 때문에 산에서 약초를 캐도 이성준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그런데 그때 아주머니가 다가와 그녀의 팔을 잡아당기며 힘껏 떼어냈다. 그녀의 품에서 떨어진 이성준은 딱딱한 침대에 그대로 부딪혔고 처리되지 않은 상처는 순식간에 다시 터져 피가 흘렀다.안색은 점점 더 창백해졌고 백아영은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성준아!”다가가려고 하자 아주머니는 어찌나 힘이 센지 그녀의 팔을 꽉 잡은
아주머니는 예상이라도 한 듯 만족스럽게 웃었고 바보 아들은 옆에서 환호했다.“나 마누라 생겼다~”환호로 가득 찬 집안은 백아영을 소름 돋게 했고 오한이 느껴졌다.아주머니는 이성준에게 접근하지도 못하게 하며 손수 치료하는 건 더더욱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을 의사를 불러와 이성준을 치료했고 백아영은 비좁은 방에 갇혀 내일 있을 결혼식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밤이 되자 누군가가 방문을 열었다. 바보 아들은 구멍 난 반바지만 입고 아주머니의 손에 이끌려 방에 들어왔다.“결혼하겠다고 약속했으니까 내 말 잘 들어. 오늘 밤 내 아들이랑 같이 자. 뭘 해야 하는지는 너도 알지?”아들은 침을 질질 흘리며 반짝이는 두 눈으로 백아영을 노려봤다.“마누라, 마누라. 나랑 같이 자자...”말을 마친 그는 팔을 뻗으며 백아영을 향해 달려들었다. 꼴을 보니 멍청한 건 맞지만 자려면 뭘 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듯했다.백아영은 순식간에 소름이 돋았고 속이 뒤집혀 메스꺼움을 느꼈다.그녀는 상처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몸을 일으켜 피했지만, 1초 만에 아주머니한테 붙잡혀 뺨을 맞았다.상처가 터지면서 볼도 화끈거리며 아파졌다.“감히 피해? 죽고 싶어 환장했어?”아주머니는 백아영의 살을 비틀며 그녀를 밀었다.“침대 가서 똑바로 누워. 내 아들 만족시키지 못하면 그 남자 확 죽여버릴 거야!”몸부림치던 백아영은 순식간에 그대로 굳어버렸고 저도 모르게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이성준을 위해서라면 더 이상 반항할 여지가 없었다.그녀는 멍청하기 그지없는 아들을 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결혼식은 내일이잖아요. 내일 밤에는 제가 제대로 할 테니까 오늘은 안 돼요! 결혼하기로 했으면 이 정도 예의는 지켜야죠. 그렇지 않으면 이 결혼 없던 일로 할 거예요!”“감히 나한테 조건을 걸어? 내가 오늘 밤이라면 무조건 오늘 밤이야!”아주머니는 곧바로 욕설을 퍼부었고 또 때리려고 하자 백아영은 피하지 않고 강인함을 보이며 말했다.“계속 강요하면 오늘 밤 여기서 죽어버릴 거예요. 그
여자는 따듯한 물 한 잔을 백아영에게 건네줬다.산속의 밤은 유난히 더 추웠는데 그녀는 구멍이 난 얇은 겉옷 하나만 입고 있었고 팔뚝에는 멍 자국이 군데군데 남아있었다.자주 맞는 게 분명했다. 백아영은 울렁거리는 속을 억누르며 그녀를 바라봤다.“당신도... 이곳에 갇힌 거예요?”“네, 스물두 살 때 속아서 이곳에 왔어요. 도망치려고 여러 번 시도했지만, 마을 사람 전부 한통속이라 매번 잡혀 왔고 그럴 때마다 맞았어요.”그녀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아직 상처가 있으니까 그 남자 신경 안 쓰고 도망친다고 해도 멀리 못 갔을 거예요.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게 마음 편해요.”운명이라는 단어를 들은 순간 또다시 속이 메스꺼웠다.“그 남자가 구해줄 거라고 기대하지도 말아요. 잘생겼던데 상처가 나으면 아마 마을 이장 딸에게 팔릴 거예요. 쇠사슬로 묶여서 도망갈 수도 없어요.”‘이성준이 쇠사슬에 묶인 채 다른 여자랑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그 모습을 상상만 해도 백아영은 온몸이 소름 돋아 견딜 수가 없었다.이성준은 차라리 죽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할 사람이다.정말로 그렇게 된다면 그를 구한 게 아니라 불구덩이로 밀어 넣은 거나 다름없는 꼴이 된다. 절대 그런 처지에 놓이게 할 수도 없었고 그녀 역시도 바보 아들과 부부가 되는 건 싫었다.재빨리 머리를 굴린 백아영은 마음을 먹은 듯 입을 열었다.“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죠?”여자는 체념하며 답했다.“당연하죠, 그런데 그럴 수가...”“할 수 있어요!”백아영은 여자의 손을 붙잡으며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은 듯 간절하게 말했다.“내일 결혼하면 모든 사람의 관심이 저한테로 쏠릴 거예요. 제가 시간을 끌 테니까 그 기회를 틈타서 성준이랑 같이 도망쳐요.”결혼식은 마을 전체가 참여하니 절호의 기회인 건 맞다. 그러나 여자는 망설였다.“계속 의식을 잃고 있으면 저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요.”“의식을 찾을 방법이 있어요. 걷고 뛸 수도 있으니까 은침 하나만 구해줘요. 하나면 돼요!”“
분명 맛있는 음식인데도 백아영은 입맛이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몇 입 먹고 난 뒤 배가 아플 정도였다. 그녀는 이성준의 품에 안겨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 이성준은 긴장된 표정으로 그녀를 껴안고 자리에서 크게 화를 냈다. “윌리엄스, 혹시 음식에 독을 넣은거예요?!”윌리엄스는 놀라서 얼굴이 창백해져서 급히 변명했다.“아니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 백아영은 힘겹게 이성준의 손목을 잡고 힘없이 입을 열었다. “윌리엄스가 독을 넣지 않았어. 내가...”“너 왜 그래?” 이성준은 땀을 뻘뻘 흘리며 백아영을 안은 팔뚝을 가볍게 떨었다. 백아영은 몹시 아팠지만 눈길은 부드러웠고 약간 희색을 띠었다. “윌리엄스에게 실례지만, 국왕께 하룻밤 묵을 방을 빌려달라고 부탁해 줘. 그리고 산부인과 의사를 불러줘.”이성준이 눈치를 채지 못하자 백아영은 창백한 얼굴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방금 맥을 짚었는데, 나 임신했어.” 이성준의 동공은 움츠러들었다가 한참 만에 겨우 회복되었다. 찰나의 놀라움 뒤에는 오히려 걱정이 밀려왔다.“임심했는데 통증이 이렇게 심해?”그는 조바심이 나서 윌리엄스에게 의사를 불러오도록 재촉했다. 백아영은 아파서 힘이 없었던 나머지 그의 품에 푹 기대어 있었다. 전에 백아영은 이런 비슷한 환경에서 한 아이가 강제로 유산되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임신한 사실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하고 산에 가서 실랑이를 벌였고, 이로 인해 병세가 심했다. 이 아이를 키우고 싶지만, 고생할까봐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백아영은 가볍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정상적이야.”‘정상이라니?’ 이성준은 다른 여자가 임신을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몰랐지만, 백아영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진작 알았더라면 둘째를 갖지 않았을 것이다. 8개월 후. 산부인과 수술실 문이 열리자 이성준이 급히 달려들였다. 점잖던 남자는 안달복달한 얼굴로 물었다.“제 마누라는 어때요? 무사한가요?”“모녀는 무사합니다.”
집사는 경악했다.“폐하, 그들은 굴러들어 온 복도 차버리니 분명 본때를 보여줘야 하는데, 어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윌리엄스의 안색을 본 집사는 목이 메었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윌리엄스는 조금 전까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던 모습은 사라지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성준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경외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고, 간신히 이빨 사이로 글자를 밀어냈다.이, 이 대표?” 이성준은 경멸하듯 그를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윌리엄 집안의 자식이 확실히 다 컸네.” 윌리엄스의 얼굴이 더 새하얗게 질렸다. 엄청난 두려움이 엄습했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 이성준을 처음 만났다. 그때 이성준은 아직 소년이었지만, 기세가 등등하고, 과감하며, 감히 국왕인 윌리엄스의 아버지와 거래를 논했다. 그 당시 그의 아버지조차도 이성준을 대단하게 여겼다. 심지어 윌리엄스에게 앞으로 절대 이성준의 미움을 사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온 나라의 세력이 처참하게 약해질 것이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부터 이성준은 악마라고 마음에 새겨 두었다. 게다가 윌리엄스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었다. 이성준은 그의 나라에 협조하지 않는 대신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반년 동안 누워계셨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너무 커서 윌리엄스는 일찌감치 이번 생은 절대 H 국에 가지 않기로 했고, 절대로 이성준을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기존의 거래 협력을 모두 점진적으로, 완곡하게 해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항상 악마를 멀리하려고 했지만 이렇게 엮일 줄은 몰랐다. 백아영은 뜻밖에도 이성준의 아내였다! 어떤 생명의 은인 규칙, 첫눈에 반한 사랑 따위는 모두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는 어떤 계획도 할 수 없었다. 단지 자신의 왜 행동을 하기 전에 백아영의 신원을 조사하지 않았는지 후회되었다! 악마를 끌어들여 버렸다... “복을 차버린다나 뭐라나, 말을 그렇게밖에 못해?” 윌리엄스가 집사를 발로 매우 세게 찼
차에 타고 있던 남자들도 일어서더니 기세등등하게 백아영과 이성준을 포위했다. 험상궂은 얼굴의 한 남자가 환영 반 협박 반인 어투로 말했다. “두 분, 차에서 내리십시오.”차 밖에서는 윌리엄스가 활짝 웃으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백아영이 차에서 내리기를 목 빠지게 기다렸다. 곁에 있던 집사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폐하, 궁전의 수비를 모두 강화 완료했습니다. 궁전 주위에 800명의 호위 병사를 추가로 파견했어요. 이분들은 이미 독 안에 든 쥐가 되셔서 도망갈 수 없습니다.” “이혼 변호팀 사람들은 이미 도착하셨고 두 분이 차에서 내리시면 바로 처리할 수 있어요.”“폐하, 곧 미인을 품에 안게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윌리엄스의 입꼬리는 한껏 올라갔다. 산 위에서 백아영의 워낙 강인한 모습에 사람도모자라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지금은 백아영의 대단한 솜씨도, 그녀의 남편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단념할 수밖에 없다. 모두 생명의 은인으로 보고 첫눈에 반하게 만든 백아영 탓이었다. 그는 이 나라의 왕이다. 그가 마음에 드는 한 반드시 그의 것이다. 또한 결혼 후 백아영을 자신의 매력에 매료시켜 점차 이성준을 잊게 할 자신이 충만했다. 윌리엄이 생각을 하던 중, 차 문이 열리고 관광버스에서 백아영이 내렸다. 윌리엄스는 넥타이를 매만지며 그녀를 반겼다.“아가씨, 또 뵙네요.”윌리엄스가 아양을 떠는 모습을 보고 백아영은 입을 다물었다. 백아영의 뒤로 큰 덩치의 이성준이 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머리 위로 이성준은 차갑게 말했다.“내 아내를 뺏으려는 게 너야?” 이성준은 포위망 속에 서 있었다. 다른 사람의 구역에서 그는 독 안에 든 쥐였지만 그는 움츠러들지도 않고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이성준의 기는 모두를 앞질러 버려 마치 모든 것을 장악하는 왕인 것 같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서늘한 몇 글자가 사람을 더욱 섬뜩하게 했다. 집사는 높은 인물들을 많이 보았었기에 즉시 이성준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만 이곳은 그들의 궁전이
윌리엄스는 어안이 벙벙했다.백아영의 솜씨는 정말 놀라웠다. 그녀의 기묘한 침을 꽂는 기술이 더욱 놀라웠다. 보기만 해도 눈이 즐거워지는 백아영의 몸에는 빛이 보였다.그녀의 아름다움은 남달라서 비길 것도 없이 아름다웠다.백아영은 여전히 은침을 손에 들고 윌리엄스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만 좀 건드리세요. 알아들으셨죠?”“저는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윌리엄스의 의욕 넘치는 말은 눈앞으로 가까워져 오는 침에 놀라 목이 메었다. 순식간에 덮쳐 온 위험과 두려움이 그를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게 했다.백아영은 다시 경고했다.“잘 가세요. 바래다 드리지는 않을게요.”젊고 고집스러운 윌리엄스는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위협은 그를 이성적으로 뒤로 물러나 타협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백아영은 바늘을 다시 집어넣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네 부하는 경련을 일으키다가 10여 분 만에 의식을 회복했다. 그들은 서로를 부축하며 몸을 일으키자 멀리 떨어진 곳에 백아영이 보였다. 비록 뒷모습뿐이었지만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폐하, 죄송합니다. 저희가 너무 부족했어요.”윌리엄스는 백아영을 탐욕스럽게 바라보았다.“너희 탓이 아니야. 저 소녀가 너무 강할 뿐이야. 가자. 이제 내려가야지.”부하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 여왕님을... 그냥 이렇게 포기하시려고요?”윌리엄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그럼 내가 지금 뭘 할 수 있겠어?”말이 통하지도 않고 싸워서 이기지도 못하니 부하는 조용히 입을 꾹 닫았다.하지만 윌리엄스는 미소를 띠었다.“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이야.”이성준은 열매 한 봉지 가득 따왔다. 그는 열매를 깨끗이 씻은 뒤 쟁반에 담아 백아영 앞에 대령했다. 하지만 안색이 좋지 않았다.“방금 돌아오는 길에 들었는데 누가 너를 귀찮게 했다면서?”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도리도리 저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문제를 일으켰어.”이성준은 자초지종을 듣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백아영은 잠시 멈칫하더니 웃었다. “아파서 머리까지 다쳤나. 걱정 마세요, 위험했지만 목숨은 건졌어요. 돌아가시면 의사부터 보세요. 잘 케어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에요.”백아영은 진지하게 당부했지만 상대방은 한마디도 귀담아듣지 않았다.백아영이 그만 몸을 일으키려 하자 청년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저 지금 진지해요.”“이것은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규칙이기도 합니다. 생명을 구해준 은인은 반드시 몸으로 갚아야 합니다.”윌리엄스 왕족?백아영은 입헌군주제인 국가에 왔다. 이곳은 현대사회와 어우러졌지만 여전히 왕권을 시행하고 있다. 지금의 왕은 20대 초반의 청년으로 나이는 어리지만 듬직하고 성숙하며 상당한 재주를 가졌다고 전해졌다. 왕은 1년 넘게 국가 정무를 질서 있게 처리했다.다시 이 풋풋하고 고집 센 청년을 본 백아영은 목이 메었다. 왕은 소문과는 좀 다른듯했다.백아영은 청년한테 잡힌 손을 빼냈다.“그냥 눈에 보여서 구해준 거니 고마워하실 필요 없으세요. 그리고 저는 결혼까지 한 여자에요.”“결혼하셨군요...”청년은 매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젊고 예쁜 백아영이 일찍 결혼했으니 흔치는 않은 일이다. 그러나 청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저는 재혼에 대해 편견이 없어요. 남편분과 이혼해도 그대를 왕후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저는 이혼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청년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는 그제야 난처한지 땅바닥에서 일어나 앉아서는 백아영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무슨 복잡한 일을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백아영은 혼자 심각하게 고민하는 청년이 이해가 되지 않아 벌떡 일어나 자리를 뜨려고 했다.곧이어 청년도 벌떡 일어났다. 너무 갑자기 몸을 일으킨 탓인지 몸을 휘청거리자 곁에 있던 남성이 얼른 그를 부축해 주었다.청년은 휘청거리는 몸을 아랑곳하지 않고 백아영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막아섰다. 그의 맑은 눈은 어느새 포악해졌다.“아가씨, 억양을 들어보면 외국인인 것 같네요. 아직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룰에 대해 잘 모
하지만 백아영은 현무가 힘들어할까 봐 차마 너무 많은 프로젝트를 참가하지 못하게 하고 관광지 한 곳만 더 돌고 남원에 돌아갈 생각이었다.이성준은 진지하게 말했다. “출산 장려 정책은 참 옳아.”백아영은 어리둥절했다.“자식이 많아야 집도 떠들썩하고, 현무도 동생이 생기지.”어린 노동자가 하나 더 필요하다는 그의 뜻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이성준은 방긋 웃으며 백아영을 벽에 바짝 붙였다. “여보, 우리 현무에게 동생 만들어주자.”이날 현무와 백아영은 영상통화를 했다. “엄마, 안색이 안 좋아. 어디 아파?”화면 속에서 백아영의 안색은 살짝 하얗게 보였다.하지만 별다르게 불편한 곳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낮에 산에 오르느라 피곤해서 그런가 봐. 괜찮아, 좀 쉬면 괜찮아 질 거야.” “그럼, 내일 일단 산을 내리지 말고 호텔에서 쉬는 거예요?”내일 하산할 예정이었지만 백아영은 단호하게 답했다.“맞아.”그제야 현무는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통화를 끊고 백아영의 이마에 길쭉한 손이 닿았다. 이성준은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정말 괜찮은 거 맞아?”실제로 봤을 때 백아영은 이상이 없어 보였지만 이성준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아. 내가 의사인데 모르겠어?”“하룻밤을 묵어도 좋으니까, 난 네가 좋아하는 열매를 좀 따올게.”이 산의 열매는 특산물이었기에 백아영이 매우 좋아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한 후, 이성준은 혼자 산꼭대기에 가서 열매를 땄고, 백아영은 아름다운 산기슭에 앉아 차를 마시며 아침 풍경을 감상했다. 그녀는 조용히 열매를 기다리고 있었다.기다리는 동안 찻집 안에서 갑자기 시끄러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도와주세요! 여기 도와주세요!”“의사 없어요? 응급처치할 줄 아는 사람 혹시 있어요? 좀 살려주세요! 저의 도련님을 살려주세요...”식당에서 대략 이십 대 초반의 한 청년이 땅에 누워있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
한 달 뒤.인천공항에서 현무는 양복을 차려입고 반듯하게 서서 웃음을 가득 머금고 백아영을 배웅했다.“엄마, 걱정하지 말고 잘 놀다 와요. 여기 일은 저한테 맡겨요.” 현무는 이성준의 아들답게 한 달 만에 기본적인 경영 업무를 배웠고, 심지어 위정을 도울 수 있었다.또한 그는 이성준의 외아들인 만큼 이성그룹의 후계자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는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나이에도 모든 주주와 직원들을 위협하기에 충분했기에 일을 더 쉽게 추진할 수 있었다.게다가 이성준의 한 달간 밑받침을 잘 깔아놓은 덕에 안심하고 현무와 위정에게 이성그룹을 맡길 수 있게 되었다.위정의 불평도 적어졌다. 그는 앞으로 일할 날에 희망이 생긴 것 같았다.“내 아들 최고.”백아영은 현무를 꼭 끌어안고 그의 볼에 쪽 뽀뽀했다.“엄마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영상통화 해. 날마다 기분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누가 감히 너를 괴롭히면, 엄마와 아빠가 바로 날아와서 때려 놓을 거야.”백아영의 품에서 현무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순간 엘리트에서 어린 아기가 되어 자신도 모르게 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하지만 이성준의 말과 백아영의 행복을 생각하며 현무는 마음을 가다듬고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였다.“엄마 걱정하지 마, 외삼촌과 위정 아저씨가 계셔서 아무도 날 못 괴롭혀. 내가 좀 더 크면 내가 엄마를 보호해야 해.”백아영은 감동되어서 감정이 벅차 놀랐다. 현무는 너무 든든한 아들이었다.선우경진은 팔짱을 낀 채 한쪽에 서 있었다. “이씨 가문의 일은 해결됐지만 아직 선우 일가가 남아있다는 것을 잊지 마.”“그리고, 여유가 있으면 새로운 아이템도 많이 생각해 둬.”한 달 동안 그들은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급한 불은 거의 다 껐다. 하지만 의학은 끝이 없고 신약 연구는 더 중요했기에 선우경진은 수시로 백아영을 감시했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다른 곳에서 시야를 넓히고 영감을 얻으면 신약을 개발하는데 더 쉬웠다.이성준은 한쪽에
현무는 계획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지만, 다섯 살짜리 꼬마에게는 좀 시기상조였다. 하지만 이성준은 그런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그러나 이성준의 엄숙한 표정을 보니 바로 계획을 하나 만들어 내야 할 것 같았다.현무는 골똘히 생각했다.“공부를 열심히 해서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고 매일 엄마와 아빠와 함께 있고 싶어요.”“엄마를 기쁘게 해주는 것과 함께 있는 것을 동시에 이룰 수 없어.”“왜요?”현무가 공부해서 잘하고 매일 학교 갔다 오면 자연스레 백아영을 볼 수 있고 그녀도 즐거워하는 게 일상이었다.“너 그동안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잊었어?”현무가 네 살 되기 전까지 백아영은 그의 곁에 있어줄수 없었다. 백아영이 돌아온 후, 비록 온 가족이 드디어 모였지만,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았고 때마다 백아영은 떠나야 했고, 항상 바쁜 일상에 기쁠 때도 있었지만 힘들 때가 더 많았다. 현무는 그런 백아영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엄마는 나와 함께 있어서 기분이 나쁜 거예요?”어린 현무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돌기도 전에 이성준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너 때문이 아니야. 엄마가 놓인 상황 때문이지. 남원에서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일들과 언제든지 생기는 변화 때문이야.”“만약 누군가가 이 짐을 대신 나눠주고, 그런 일들을 완전히 해결해 주고, 엄마가 마음껏 여행을 다닐 수 있게 해준다면 매일 즐거워할 거야.”현무는 어리지만 총명해서 즉시 이성준의 뜻을 알아차렸다.“아빠, 제가 엄마의 일을 나누어서 해도 돼요?”이성준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너는 할 수 있어.”“그런데 힘들 거야. 엄청 힘들 수 있어. 대신에 엄마를 오랫동안 못 볼 텐데, 그래도 할래?”현무는 힘든 것은 두렵지 않지만, 오랫동안 백아영을 볼 수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현무는 머뭇거렸다. 그는 섭섭해서 고뇌했다.“나 그냥 엄마랑 여행 가면 안 돼?”이성준은 자애로운 아버지의 미소를 지었다. “네가 경영대를 일찍 졸업하면 돼.”현무는 지능이 높아서, 월반하는
이성준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 은퇴할 생각이야.”‘역시!’백아영이 머릿속으로만 하던 황당한 추측을 이성준 입으로 직접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믿기지 않았다. 왜 이성준이 갑자기 도망 오려 했던 건지, 그리고 왜 그 큰 짐을 위정과 선우경진한테 내던졋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성준은 그들을 훈련하고 있었다.수단이 좀 잔인했을 뿐이다.“왜 갑자기 은퇴하고 싶은 거야?”백아영은 아직 앞날이 밝은 이성준이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성준은 백아영을 응시하며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쓱쓱 만졌다.“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이성준은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아 수많은 고통을 겪었다.이성준의 괴로운 심정은 눈에 훤히 비쳤다. 그는 사실 오래전부터 은퇴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영아, 앞으로 남은 생 동안 나는 네가 조용하고 평온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은퇴하고 쇼핑센터를 떠나면 원한도 모두 훨훨 털어 버릴 수 있다. 두 사람은 세계 여행하며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된다.백아영의 머릿속은 멍해졌다.백아영은 이성준이 은퇴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자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성준이 계획한 미래에 항상 그녀가 있었다. 그의 미래는 온통 백아영 한사람이었다.백아영은 감동되어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가 환상하던 미래는 정말 기대할 만한 것같았다.“하지만 지금은 내가 선우경진과 위정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 같아.”겨우 보름밖에 안 되었는데, 그들은 고통을 호소하며 참지 못하는데 정말 큰 일이라면 더 감당하기 어려워할 게 뻔했다.이성준은 눈썹을 찡그리며 잠시 사색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현무 이제 다섯 살이니까 남자 다 됐지.”백아영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현무에게 맡길 생각은 아니지?”이성준은 담담하게 되물었다.“안 될 게 뭐가 있어?”‘안 될 게 뭐가 있겠냐고? 현무 이제 겨우 다섯 살인데!’이성준은 여전히 꿈쩍하지 않았다. “내가 다섯 살 때, 이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