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에 담긴 의미는 저마다 달랐고, 심지어 농락하듯 휘파람 부는 사람도 있었다.탱크톱 디자인의 미니 웨딩드레스는 등이 찢어지면서 통으로 흘러내릴 뻔했다. 백아영은 일단 가슴이라도 가리자는 생각에 훤히 드러난 등은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민망함이 극에 달한 그녀는 얼른 고개를 숙이고 피팅룸으로 뛰어갔다.그런데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서 피팅룸 도어락이 고장 났는지 아무리 애를 써도 열리지 않았다.그녀는 조급한 나머지 손마저 떨렸다. 적나라한 시선과 희롱 섞인 농담은 마치 발가벗고 공개 처형당하는 기분이었다.백채영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망신당해 어쩔 줄 몰라 하는 백아영의 모습을 지켜봤다. 이제는 이성준에게 집적대는 용기마저 없을 테니까.어쩌면 이성준도 백아영한테 실망할지도 모른다.하지만 미소를 짓고 있던 백채영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이성준은 슈트 재킷을 벗더니 재빨리 백아영의 어깨에 걸쳐 몸을 완전히 감쌌다.이내 단단한 팔로 그녀의 어깨를 두르고 품에 끌어안았다. 커다란 몸집은 마치 난공불락의 성벽처럼 단번에 모든 시선과 악의를 차단했다.게다가 이성준의 싸늘한 목소리는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함부로 쳐다봤다가 눈알 파버리는 줄 알아!”무시무시한 기운은 섬뜩할 정도였다.아까만 해도 구경하기 바쁜 사람들은 겁을 먹고 황급히 시선을 피하더니 뒤꽁무니를 뺐다.백아영은 고개를 들고 이성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빨갛게 물든 눈시울에서 더는 참지 못하고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다이아몬드처럼 맑고 깨끗한 눈물은 이성준의 마음마저 적셨다.그동안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던 애틋함이 물밀 듯이 몰려왔다.“집에 데려다줄게.”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더니 백아영을 끌어안고 매장을 나섰다.백채영은 자신이 안중에도 없는 듯 백아영만 챙기고 떠나는 이성준을 보자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재킷을 벗어서 입혀주고, 백아영을 챙겨주는 것도 모자라 데리고 떠나기까지 하다니? 우스갯거리도 아니고 이걸 본 사
백아영은 떨리는 몸으로 그의 머리를 끌어안고 목 놓아 울었다. 그동안 뛰어난 의술로 각종 난치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자부했지만, 지금은 부족하고 얄팍한 의술 때문에 눈앞의 사람조차 구하지 못한다는 자신이 너무나 한심했다.난장판이 된 현장과 울며불며 난리 치는 사람들 틈으로 훤칠한 그림자가 유유히 다가와 백아영 앞에 멈춰 섰다.선우경진은 허리를 굽혀 재빨리 이성준의 컨디션을 체크하더니 입을 열었다.“아직 살릴 수 있어.”말을 마치고 나서 옆에서 겁에 질려 벙쪄 있는 백채영을 바라보았다.“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가르쳐줬던 침술 있지? 그 방법으로 이성준의 목숨을 구할 수 있으니까 얼른 와서 침을 놔줘.”물론 그동안 선우경진이 가르쳐준 내용을 백채영은 하나도 익히지 못했다.더욱이 직접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건 말도 안 되었다.그녀는 당황한 마음에 연신 고개를 저었다.“아직 실전에 써 본 적도 없는데 성준 씨 목숨으로 시험할 수는 없어요. 오빠가 먼저 성준 씨한테 침을 놔주면 안 돼요? 난 다른 사람도 구해줘야 하니까.”이번 교통사고는 대형 사고라서 피바다 속에 누워있는 사람이 주변에 널렸다. 조금만 지체한다면 그들은 목숨마저 위태로울지 모른다.선우경진은 백채영을 끌어당겨 은침을 그녀의 손에 쥐여줬다.“이성준은 네 남자야. 목숨을 살릴 수 있는지 없는지는 네 손에 달렸어.”말을 마친 선우경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중상을 입은 다른 환자들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그의 의도는 뻔했다. 만약 백채영이 진짜 의학 천재라면 평소에 아무리 농땡이를 피우거나 잔꾀를 부린다고 해도 비상 상황에서는 천재 본능을 발휘하여 이성준을 구할 것이다.그러나 그의 목숨을 구하지 못한다면 천부적인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심지어 신분조차 조작일 가능성이 컸다.따라서 이성준도 더는 선우 일가의 사위가 아니며, 죽든 지 말든지 그의 알 바가 아니었다.선우경진의 단호한 뒷모습이 점점 멀어지자 은침을 든 백채영의 손이 저도 모르게 덜덜 떨렸고, 하얗게 질린 얼
백아영은 은침을 빼앗아 오더니 이성준에게 침을 놓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피가 멈췄고, 호흡도 점점 규칙적으로 변해갔다.그는 드디어 구사일생했다.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백아영은 온몸의 힘이 쭉 빠지고 맥없이 피 웅덩이에 털썩 주저앉았다. 눈물은 여전히 볼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지만, 기쁜 마음에 입꼬리는 점점 올라갔다.그와 동시에 구급차도 빠르게 현장에 도착했다.구급대원들이 우르르 뛰어와서 응급구조를 했고, 부상자를 하나둘씩 구급차에 태웠다.이성준의 차례가 왔을 때 백채영은 백아영의 손에 든 은침을 빼앗아 가더니 표독스러운 얼굴로 경고했다.“아까 성준 씨를 구해준 사람이 너란 걸 함부로 발설하지 마!”만약 선우 일가에서 백아영이 사람을 구했고, 심지어 단번에 선우 일가 의술을 익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자신의 신분을 의심하기 마련이다.“선우 일가 의술은 대외비야. 네가 지금 몰래 배웠는데 가만둘 거로 생각해? 백아영, 너만 입단속 잘하면 서로 좋지 않겠어?”백아영도 급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몰래 의술을 배우게 된 셈이니 화를 자초할 생각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들것을 밀고 이성준과 함께 구급차에 올라타려고 했다.하지만 발을 떼기도 전에 백채영이 그녀를 옆으로 밀쳤다.“성준 씨는 내 약혼남인데, 네가 왜 따라가? 혼자 집에나 가!”백아영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이성준을 내려다보자 마치 심장이 쥐어뜯기는 고통에 괴롭기 그지없었다.하지만 입장도 애매하고, 더욱이 따라갈 자격이 어디 있겠는가?이내 이성준은 구급차에 실렸다. 이때, 그의 손가락이 움찔했지만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선우경진도 다가와서 구급차에 올라탔고, 이내 문이 닫히더니 쏜살같이 출발했다.구급차 안에서 이성준의 상태를 체크하던 선우경진은 흐뭇한 얼굴로 백채영의 어깨를 토닥이더니 그녀를 향한 의심도 깨끗이 지웠다.“백 년에 한 번 나타날까 말까 하는 천재라더니 사실이구나! 실전이 처음인 것치곤 완벽한데? 심지어 침술을 업그레이
의사를 보내고 나서 백채영은 따뜻한 물을 받아 침대맡에 놓았다. 이성준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이글이글 타오를 지경이었다.이내 손을 뻗어 단추를 하나씩 풀자 쇄골부터 가슴, 복근까지 눈앞에 훤히 드러났다.백채영은 눈을 떼지 못했다. 몸매가 이 정도로 좋을 줄이야! 예전에 만났던 남자와 비교하면 그들은 비실비실한 약골에 불과했다.멋진 남자란 바로 이런 사람을 말하는 건가?그녀는 온몸이 후끈 달아오르더니 저도 모르게 복근을 향해 손을 뻗었다.그러나 손끝이 닿기도 전에 커다란 손이 백채영의 손목을 덥석 붙잡더니 순식간에 쳐냈다.“아!”백채영은 아픈지 비명을 질렀고, 고개를 드는 순간 이성준의 서늘한 눈빛과 딱 맞닥뜨렸다.“뭐 하는 거야?”“몸, 몸 좀 닦아주려고...”백채영은 서둘러 설명했다.“봐봐, 물수건도 있잖아.”이성준은 옆에 있는 대야를 흘끔 쳐다보더니 싸늘하던 표정이 서서히 풀렸다. 그제야 백채영을 놔주고는 다시 자신의 옷을 잠그기 시작했다.물론 말투는 여전히 차갑고 소외감이 느껴졌다.“네가 닦아줄 필요는 없어.”딱 잘라 선을 긋는 이성준의 쌀쌀맞은 모습에 백채영은 울컥했다. 이내 목숨까지 구해준 은인에게 오미란마저 태세를 전환했는데, 당사자인 이성준은 더 감지덕지해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었다.그러자 상처받은 표정을 짓더니 훌쩍이며 말했다.“성준 씨, 아직 상처가 덜 회복되어서 따뜻한 물수건으로 몸을 닦아주면 건강에 좋대. 치료요법에 적극 협조해줘야 하지 않겠어? 지금 결코 가벼운 상처가 아니라고! 만약 제때 치료하지 않았더라면 목숨마저 잃었을지도 몰라. 성준 씨가 교통사고 당하고 나서 내가 치료해주려고 침을 놓았을 때 얼마나 가슴 아프고 두려웠는지 알아? 당시 걷잡을 수 없이 떨리는 손을 진정하기 위해 엄청난 의지력을 발휘했었어. 난 다시는 그런 끔찍한 경험을 하고 싶지 않아. 제발 성준 씨를 잘 돌볼 수 있게 해주면 안 돼?”이성준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다.“날 구한 사람이 너라고?”백채영의 눈빛은 의기양양하기
“채영아, 왜 다시 왔어?”막 외출하려던 선우경진은 넋이 나간 백채영을 발견했다.“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어디 아파?”걱정된 선우경진은 그녀의 맥을 짚었고 아무 이상이 없는 모습에 마음을 놓았다.도둑이 제 발 저린 듯 마음이 조마조마해진 백채영은 대충 둘러댈 핑계를 생각했다.“성준 씨가 임신한 몸으로 계속 병원에 있는 게 아이한테 안 좋을 거라며 얼른 돌아와서 쉬라고 하더라고요.”그녀의 말을 들은 선우경진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산모와 아이를 걱정하는 모습에 훌륭한 약혼자라는 생각이 들었다.“병원에 계속 있는 게 안 좋은 건 맞는데 어쩔 수 없이 다시 한번 다녀와야겠네.”선우경진은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사고 현장에서 했던 침술은 그저 일부였고 지금 상태에서 추가로 맞아야 후유증 없이 완벽하게 회복할 수 있어. 마침 돌아온 김에 내가 계속 가르쳐줄 테니까 배우고 병원 가.”그 말에 아연실색한 백채영은 너무 놀란 나머지 두피가 저려올 것만 같았다.한 번만으로도 이미 들통난 마당에 계속 침을 놓는다는 건 이성준한테 자신을 폭로하는 격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마땅히 거절할 만한 이유가 없었던 그녀는 마지못해 선우경진을 따라 다음 침술을 배웠다....교통사고가 난 지 이틀이 지났는데, 백아영은 여전히 선우 일가의 별장에 갇혀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이성준에 관한 소식마저 들을 수 없었던 그녀는 하루 종일 마음이 심란해져 안절부절못했고 회복은 잘하고 있는지, 괜찮은 게 맞는지 단 한 번만이라도 그를 만나고 싶었다.“백아영.”백채영은 어쩔 수 없이 백아영을 찾아왔고 질투와 증오로 가득 차 있는 그녀의 모습에 마음속 분노가 조금 일그러졌다.“성준이 지금 어떻게 됐어?”백아영은 다급하게 물었고 그 모습에 순간 이성준이 자신을 대하던 싸늘함과 소홀함이 떠오른 백채영은 모든 게 백아영의 탓이라며 질책했다!“많이 걱정되나 봐?”백채영은 일부러 그녀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고 조롱 섞인 말투로 되물었다.백아영은 멈칫했다.
병원에 도착한 백아영은 다급하게 병실 문을 열었고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채 초췌한 모습의 이성준이 보였다.자신을 구하려고 사고 난 그의 모습에 가슴이 미어졌고 미친듯이 아파왔다.그날 이성준은 망설임 없이 그녀를 밀어냈다...백아영을 마주하자 싸늘함으로 가득 차던 이성준의 눈빛은 조금 풀려졌다.“나 보러 온 거야?”목이 쉰 채 간신히 입을 연 그의 목소리는 유난히 듣기 좋았다.백채영은 자신한테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상냥한 이성준의 모습에 질투가 나서 어쩔 줄을 몰랐다!‘백아영, 이 망할 불여우 같으니.’“성준 씨의 부상은 계속 침을 맞아야 후유증이 안 남는데, 침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사람이 놓는 게 회복에 좋을 것 같아서 내가 백아영 데려왔어. 침술은 내가 가르쳐줬으니 선우 일가에 들키면 혼이 나겠지만 당신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내가 기꺼이 할 수 있지.”애틋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백채영과 달리 이성준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자신이 할 줄 몰랐기에 백아영을 데려온 걸 그도 있었고 까발리는 게 귀찮아서 아무 말 안 했을 뿐이다. 그의 시선은 줄곧 백아영을 향했다.“넌 다친 데 없어?”사고 당시 이성준은 그녀를 밀어냈고 바닥에 쓰러지는 모습까지 지켜보고 있었다.심한 부상을 입은 사람이 자신을 신경 쓰고 걱정하는 모습에 백아영은 코끝이 찡해졌다.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성준아, 그날 구해줘서 고마웠어.”“너도 날 구했잖아?”잘생긴 그의 얼굴에서 희미하게 웃음기가 보였고 백아영은 그저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한참이나 말없이 서로를 마주봤고 병실안은 미묘한 분위기가 맴돌았다.질투와 분노로 가득 찬 백채영은 뚜껑이 열릴 직전이었고 당장이라도 백아영을 내쫓고 싶었다.“백아영,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얼른 치료해!”이를 악물며 말하는 백채영의 모습에 정신이 번쩍 든 백아영은 병상으로 다가갔다.“성준아, 여기 있는 붕대 잠깐 풀게.”이성준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그는 침대에 앉아 모
아물지 않은 상처를 보며 백아영은 가슴이 아파지기 시작했다.그녀는 면봉을 들더니 조심스럽게 그의 상처를 소독했다.이성준은 꼼꼼하고 정성스럽게 자신을 치료하는 백아영을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봤고, 밖에서 헛구역질하는 백채영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눈꼴이 사나웠다.그는 이제야 비로소 백아영의 매력을 알아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결혼할 상대는 백채영이다...30분뒤 백아영은 치료를 마쳤고 상처를 다시 감쌌다.“상처에 물이 닿지 않도록 주의하고, 며칠 동안은 최대한 침대에서 내려오지 말고 편안하게 쉬어. 단백질 많이 섭취하고, 야채랑 과일...”주의사항을 알려주는 의사가 분명히 있었겠지만, 백아영은 다시 신신당부했다.그녀는 장황하게 말을 길게 늘어놓았고 이성준은 참을성 있게 끝까지 들었다.“알겠어, 다음에는 언제 와?”모두 세 차례의 침술이 이어져야 한다.“모레, 그때는 내가 올 때 국이라도...”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백채영은 그녀의 팔을 잡아당기며 내쫓기 시작했다.“됐어, 끝났으면 얼른 돌아가. 집에 아직 네가 해야 할 일 많이 남았잖아!”백아영은 병실에서 밀려났고 나오자마자 부랴부랴 이것저것 사 온 뚱보 아줌마와 마주쳤다.“사모님... 아영 씨.”뚱보 아줌마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저...”백아영이 입을 열려고 하자 백채영은 경고의 눈빛을 보냈고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도련님 만나러 왔어요.”뚱보 아줌마는 깜짝 놀라 물었다.“채영 씨랑 함께 오신 거예요?”아줌마 역시도 두 사람이 물과 불처럼 서로 용납할 수 없는 대립 관계라는걸 알고 있었기에 지금 이 상황이 너무 놀라웠다.“도우미 주제에 뭘 그렇게 많이 물어봐요? 얼른 들어가서 물건 치우고 할 일 하세요. 계속 여기서 주절주절 말하면서 농땡이 피우면 확 잘라버릴 거예요!”백채영은 두 사람이 대화할수록 조마조마해졌고 비밀이 폭로될까 봐 호통을 치며 거들먹거렸다.그녀의 말에 난처해진 뚱보 아줌마는 화가 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별장으로 돌아온 백채영은 일부러 못되게 굴면서 백아영더러 별장 전체를 혼자서 청소하도록 시켰고 청소가 끝날 때까지 자지 못하게 했다.백채영은 모든 걸 태연하게 받아들였고 며칠 동안 한가할 틈이 없었다.그 시각 백채영은 선우소훈의 서재로 불려 갔고 그곳엔 선우경진도 있었다. 선우소훈은 기대에 가득 찬 눈빛으로 백채영을 바라봤다.“채영아, 치료는 잘되어 가?”“네, 세 차례 치료가 끝나면 성준 씨는 아무런 후유증도 남기지 않을 겁니다.”자신만만한 그녀의 모습에 선우소훈은 마음이 놓이는 듯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역시 내 손녀야. 의술이 뛰어나네!”선우경진과 눈이 마주치자, 그는 옆에 있는 금고에서 세월의 흔적이 담긴 의서 한 권을 꺼냈다.“이건 해독 침술에 관한 건데, 배울 수 있는지 한번 봐봐.”세월의 흔적과 달리 책은 매우 잘 보존되어 있었고 거의 파손되지 않았다.펼쳐보자 온통 알아볼 수조차 없는 천문기호였지만 백채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할 수 있어요!”그녀의 답에 선우소훈의 미소는 더욱 환해졌고 흐뭇해졌다.“그럴 줄 알았어! 결혼까지 열흘 남짓 남았으니 결혼 전에 다 배울 수 있겠지?”그러자 백채영은 망설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어디 제가 치료해 주길 기다리는 사람이 있나요?”만약 그렇다면 그녀는 배울 수 없다고 말하려고 했다.선우소훈은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부담을 덜었다.“할아버지는 네가 결혼식 전에 다 배웠으면 하는 바람일 뿐이야. 배운다면 세상에서 가장 성대한 결혼식을 준비해 줄게.”성대한 결혼식이라는 말에 욕심이 생긴 백채영은 두 눈이 탐욕으로 가득 찼다.“결혼 전에 꼭 다 배우겠습니다!”해독 침술이 필요한 사람이 없다면 그녀는 모든 걸 거짓말로 대충 넘어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선우소훈은 기뻐서 웃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해독 침술은 너무 심오하여 선우 일가 그 누구도 배워낼 수 없었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백채영한테서 그들은 가능성을 보았다.그녀는 선우경진을 따라 공부하면서
분명 맛있는 음식인데도 백아영은 입맛이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몇 입 먹고 난 뒤 배가 아플 정도였다. 그녀는 이성준의 품에 안겨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 이성준은 긴장된 표정으로 그녀를 껴안고 자리에서 크게 화를 냈다. “윌리엄스, 혹시 음식에 독을 넣은거예요?!”윌리엄스는 놀라서 얼굴이 창백해져서 급히 변명했다.“아니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 백아영은 힘겹게 이성준의 손목을 잡고 힘없이 입을 열었다. “윌리엄스가 독을 넣지 않았어. 내가...”“너 왜 그래?” 이성준은 땀을 뻘뻘 흘리며 백아영을 안은 팔뚝을 가볍게 떨었다. 백아영은 몹시 아팠지만 눈길은 부드러웠고 약간 희색을 띠었다. “윌리엄스에게 실례지만, 국왕께 하룻밤 묵을 방을 빌려달라고 부탁해 줘. 그리고 산부인과 의사를 불러줘.”이성준이 눈치를 채지 못하자 백아영은 창백한 얼굴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방금 맥을 짚었는데, 나 임신했어.” 이성준의 동공은 움츠러들었다가 한참 만에 겨우 회복되었다. 찰나의 놀라움 뒤에는 오히려 걱정이 밀려왔다.“임심했는데 통증이 이렇게 심해?”그는 조바심이 나서 윌리엄스에게 의사를 불러오도록 재촉했다. 백아영은 아파서 힘이 없었던 나머지 그의 품에 푹 기대어 있었다. 전에 백아영은 이런 비슷한 환경에서 한 아이가 강제로 유산되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임신한 사실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하고 산에 가서 실랑이를 벌였고, 이로 인해 병세가 심했다. 이 아이를 키우고 싶지만, 고생할까봐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백아영은 가볍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정상적이야.”‘정상이라니?’ 이성준은 다른 여자가 임신을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몰랐지만, 백아영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진작 알았더라면 둘째를 갖지 않았을 것이다. 8개월 후. 산부인과 수술실 문이 열리자 이성준이 급히 달려들였다. 점잖던 남자는 안달복달한 얼굴로 물었다.“제 마누라는 어때요? 무사한가요?”“모녀는 무사합니다.”
집사는 경악했다.“폐하, 그들은 굴러들어 온 복도 차버리니 분명 본때를 보여줘야 하는데, 어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윌리엄스의 안색을 본 집사는 목이 메었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윌리엄스는 조금 전까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던 모습은 사라지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성준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경외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고, 간신히 이빨 사이로 글자를 밀어냈다.이, 이 대표?” 이성준은 경멸하듯 그를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윌리엄 집안의 자식이 확실히 다 컸네.” 윌리엄스의 얼굴이 더 새하얗게 질렸다. 엄청난 두려움이 엄습했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 이성준을 처음 만났다. 그때 이성준은 아직 소년이었지만, 기세가 등등하고, 과감하며, 감히 국왕인 윌리엄스의 아버지와 거래를 논했다. 그 당시 그의 아버지조차도 이성준을 대단하게 여겼다. 심지어 윌리엄스에게 앞으로 절대 이성준의 미움을 사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온 나라의 세력이 처참하게 약해질 것이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부터 이성준은 악마라고 마음에 새겨 두었다. 게다가 윌리엄스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었다. 이성준은 그의 나라에 협조하지 않는 대신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반년 동안 누워계셨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너무 커서 윌리엄스는 일찌감치 이번 생은 절대 H 국에 가지 않기로 했고, 절대로 이성준을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기존의 거래 협력을 모두 점진적으로, 완곡하게 해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항상 악마를 멀리하려고 했지만 이렇게 엮일 줄은 몰랐다. 백아영은 뜻밖에도 이성준의 아내였다! 어떤 생명의 은인 규칙, 첫눈에 반한 사랑 따위는 모두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는 어떤 계획도 할 수 없었다. 단지 자신의 왜 행동을 하기 전에 백아영의 신원을 조사하지 않았는지 후회되었다! 악마를 끌어들여 버렸다... “복을 차버린다나 뭐라나, 말을 그렇게밖에 못해?” 윌리엄스가 집사를 발로 매우 세게 찼
차에 타고 있던 남자들도 일어서더니 기세등등하게 백아영과 이성준을 포위했다. 험상궂은 얼굴의 한 남자가 환영 반 협박 반인 어투로 말했다. “두 분, 차에서 내리십시오.”차 밖에서는 윌리엄스가 활짝 웃으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백아영이 차에서 내리기를 목 빠지게 기다렸다. 곁에 있던 집사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폐하, 궁전의 수비를 모두 강화 완료했습니다. 궁전 주위에 800명의 호위 병사를 추가로 파견했어요. 이분들은 이미 독 안에 든 쥐가 되셔서 도망갈 수 없습니다.” “이혼 변호팀 사람들은 이미 도착하셨고 두 분이 차에서 내리시면 바로 처리할 수 있어요.”“폐하, 곧 미인을 품에 안게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윌리엄스의 입꼬리는 한껏 올라갔다. 산 위에서 백아영의 워낙 강인한 모습에 사람도모자라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지금은 백아영의 대단한 솜씨도, 그녀의 남편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단념할 수밖에 없다. 모두 생명의 은인으로 보고 첫눈에 반하게 만든 백아영 탓이었다. 그는 이 나라의 왕이다. 그가 마음에 드는 한 반드시 그의 것이다. 또한 결혼 후 백아영을 자신의 매력에 매료시켜 점차 이성준을 잊게 할 자신이 충만했다. 윌리엄이 생각을 하던 중, 차 문이 열리고 관광버스에서 백아영이 내렸다. 윌리엄스는 넥타이를 매만지며 그녀를 반겼다.“아가씨, 또 뵙네요.”윌리엄스가 아양을 떠는 모습을 보고 백아영은 입을 다물었다. 백아영의 뒤로 큰 덩치의 이성준이 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머리 위로 이성준은 차갑게 말했다.“내 아내를 뺏으려는 게 너야?” 이성준은 포위망 속에 서 있었다. 다른 사람의 구역에서 그는 독 안에 든 쥐였지만 그는 움츠러들지도 않고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이성준의 기는 모두를 앞질러 버려 마치 모든 것을 장악하는 왕인 것 같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서늘한 몇 글자가 사람을 더욱 섬뜩하게 했다. 집사는 높은 인물들을 많이 보았었기에 즉시 이성준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만 이곳은 그들의 궁전이
윌리엄스는 어안이 벙벙했다.백아영의 솜씨는 정말 놀라웠다. 그녀의 기묘한 침을 꽂는 기술이 더욱 놀라웠다. 보기만 해도 눈이 즐거워지는 백아영의 몸에는 빛이 보였다.그녀의 아름다움은 남달라서 비길 것도 없이 아름다웠다.백아영은 여전히 은침을 손에 들고 윌리엄스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만 좀 건드리세요. 알아들으셨죠?”“저는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윌리엄스의 의욕 넘치는 말은 눈앞으로 가까워져 오는 침에 놀라 목이 메었다. 순식간에 덮쳐 온 위험과 두려움이 그를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게 했다.백아영은 다시 경고했다.“잘 가세요. 바래다 드리지는 않을게요.”젊고 고집스러운 윌리엄스는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위협은 그를 이성적으로 뒤로 물러나 타협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백아영은 바늘을 다시 집어넣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네 부하는 경련을 일으키다가 10여 분 만에 의식을 회복했다. 그들은 서로를 부축하며 몸을 일으키자 멀리 떨어진 곳에 백아영이 보였다. 비록 뒷모습뿐이었지만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폐하, 죄송합니다. 저희가 너무 부족했어요.”윌리엄스는 백아영을 탐욕스럽게 바라보았다.“너희 탓이 아니야. 저 소녀가 너무 강할 뿐이야. 가자. 이제 내려가야지.”부하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 여왕님을... 그냥 이렇게 포기하시려고요?”윌리엄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그럼 내가 지금 뭘 할 수 있겠어?”말이 통하지도 않고 싸워서 이기지도 못하니 부하는 조용히 입을 꾹 닫았다.하지만 윌리엄스는 미소를 띠었다.“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이야.”이성준은 열매 한 봉지 가득 따왔다. 그는 열매를 깨끗이 씻은 뒤 쟁반에 담아 백아영 앞에 대령했다. 하지만 안색이 좋지 않았다.“방금 돌아오는 길에 들었는데 누가 너를 귀찮게 했다면서?”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도리도리 저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문제를 일으켰어.”이성준은 자초지종을 듣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백아영은 잠시 멈칫하더니 웃었다. “아파서 머리까지 다쳤나. 걱정 마세요, 위험했지만 목숨은 건졌어요. 돌아가시면 의사부터 보세요. 잘 케어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에요.”백아영은 진지하게 당부했지만 상대방은 한마디도 귀담아듣지 않았다.백아영이 그만 몸을 일으키려 하자 청년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저 지금 진지해요.”“이것은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규칙이기도 합니다. 생명을 구해준 은인은 반드시 몸으로 갚아야 합니다.”윌리엄스 왕족?백아영은 입헌군주제인 국가에 왔다. 이곳은 현대사회와 어우러졌지만 여전히 왕권을 시행하고 있다. 지금의 왕은 20대 초반의 청년으로 나이는 어리지만 듬직하고 성숙하며 상당한 재주를 가졌다고 전해졌다. 왕은 1년 넘게 국가 정무를 질서 있게 처리했다.다시 이 풋풋하고 고집 센 청년을 본 백아영은 목이 메었다. 왕은 소문과는 좀 다른듯했다.백아영은 청년한테 잡힌 손을 빼냈다.“그냥 눈에 보여서 구해준 거니 고마워하실 필요 없으세요. 그리고 저는 결혼까지 한 여자에요.”“결혼하셨군요...”청년은 매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젊고 예쁜 백아영이 일찍 결혼했으니 흔치는 않은 일이다. 그러나 청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저는 재혼에 대해 편견이 없어요. 남편분과 이혼해도 그대를 왕후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저는 이혼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청년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는 그제야 난처한지 땅바닥에서 일어나 앉아서는 백아영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무슨 복잡한 일을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백아영은 혼자 심각하게 고민하는 청년이 이해가 되지 않아 벌떡 일어나 자리를 뜨려고 했다.곧이어 청년도 벌떡 일어났다. 너무 갑자기 몸을 일으킨 탓인지 몸을 휘청거리자 곁에 있던 남성이 얼른 그를 부축해 주었다.청년은 휘청거리는 몸을 아랑곳하지 않고 백아영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막아섰다. 그의 맑은 눈은 어느새 포악해졌다.“아가씨, 억양을 들어보면 외국인인 것 같네요. 아직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룰에 대해 잘 모
하지만 백아영은 현무가 힘들어할까 봐 차마 너무 많은 프로젝트를 참가하지 못하게 하고 관광지 한 곳만 더 돌고 남원에 돌아갈 생각이었다.이성준은 진지하게 말했다. “출산 장려 정책은 참 옳아.”백아영은 어리둥절했다.“자식이 많아야 집도 떠들썩하고, 현무도 동생이 생기지.”어린 노동자가 하나 더 필요하다는 그의 뜻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이성준은 방긋 웃으며 백아영을 벽에 바짝 붙였다. “여보, 우리 현무에게 동생 만들어주자.”이날 현무와 백아영은 영상통화를 했다. “엄마, 안색이 안 좋아. 어디 아파?”화면 속에서 백아영의 안색은 살짝 하얗게 보였다.하지만 별다르게 불편한 곳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낮에 산에 오르느라 피곤해서 그런가 봐. 괜찮아, 좀 쉬면 괜찮아 질 거야.” “그럼, 내일 일단 산을 내리지 말고 호텔에서 쉬는 거예요?”내일 하산할 예정이었지만 백아영은 단호하게 답했다.“맞아.”그제야 현무는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통화를 끊고 백아영의 이마에 길쭉한 손이 닿았다. 이성준은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정말 괜찮은 거 맞아?”실제로 봤을 때 백아영은 이상이 없어 보였지만 이성준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아. 내가 의사인데 모르겠어?”“하룻밤을 묵어도 좋으니까, 난 네가 좋아하는 열매를 좀 따올게.”이 산의 열매는 특산물이었기에 백아영이 매우 좋아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한 후, 이성준은 혼자 산꼭대기에 가서 열매를 땄고, 백아영은 아름다운 산기슭에 앉아 차를 마시며 아침 풍경을 감상했다. 그녀는 조용히 열매를 기다리고 있었다.기다리는 동안 찻집 안에서 갑자기 시끄러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도와주세요! 여기 도와주세요!”“의사 없어요? 응급처치할 줄 아는 사람 혹시 있어요? 좀 살려주세요! 저의 도련님을 살려주세요...”식당에서 대략 이십 대 초반의 한 청년이 땅에 누워있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
한 달 뒤.인천공항에서 현무는 양복을 차려입고 반듯하게 서서 웃음을 가득 머금고 백아영을 배웅했다.“엄마, 걱정하지 말고 잘 놀다 와요. 여기 일은 저한테 맡겨요.” 현무는 이성준의 아들답게 한 달 만에 기본적인 경영 업무를 배웠고, 심지어 위정을 도울 수 있었다.또한 그는 이성준의 외아들인 만큼 이성그룹의 후계자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는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나이에도 모든 주주와 직원들을 위협하기에 충분했기에 일을 더 쉽게 추진할 수 있었다.게다가 이성준의 한 달간 밑받침을 잘 깔아놓은 덕에 안심하고 현무와 위정에게 이성그룹을 맡길 수 있게 되었다.위정의 불평도 적어졌다. 그는 앞으로 일할 날에 희망이 생긴 것 같았다.“내 아들 최고.”백아영은 현무를 꼭 끌어안고 그의 볼에 쪽 뽀뽀했다.“엄마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영상통화 해. 날마다 기분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누가 감히 너를 괴롭히면, 엄마와 아빠가 바로 날아와서 때려 놓을 거야.”백아영의 품에서 현무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순간 엘리트에서 어린 아기가 되어 자신도 모르게 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하지만 이성준의 말과 백아영의 행복을 생각하며 현무는 마음을 가다듬고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였다.“엄마 걱정하지 마, 외삼촌과 위정 아저씨가 계셔서 아무도 날 못 괴롭혀. 내가 좀 더 크면 내가 엄마를 보호해야 해.”백아영은 감동되어서 감정이 벅차 놀랐다. 현무는 너무 든든한 아들이었다.선우경진은 팔짱을 낀 채 한쪽에 서 있었다. “이씨 가문의 일은 해결됐지만 아직 선우 일가가 남아있다는 것을 잊지 마.”“그리고, 여유가 있으면 새로운 아이템도 많이 생각해 둬.”한 달 동안 그들은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급한 불은 거의 다 껐다. 하지만 의학은 끝이 없고 신약 연구는 더 중요했기에 선우경진은 수시로 백아영을 감시했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다른 곳에서 시야를 넓히고 영감을 얻으면 신약을 개발하는데 더 쉬웠다.이성준은 한쪽에
현무는 계획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지만, 다섯 살짜리 꼬마에게는 좀 시기상조였다. 하지만 이성준은 그런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그러나 이성준의 엄숙한 표정을 보니 바로 계획을 하나 만들어 내야 할 것 같았다.현무는 골똘히 생각했다.“공부를 열심히 해서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고 매일 엄마와 아빠와 함께 있고 싶어요.”“엄마를 기쁘게 해주는 것과 함께 있는 것을 동시에 이룰 수 없어.”“왜요?”현무가 공부해서 잘하고 매일 학교 갔다 오면 자연스레 백아영을 볼 수 있고 그녀도 즐거워하는 게 일상이었다.“너 그동안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잊었어?”현무가 네 살 되기 전까지 백아영은 그의 곁에 있어줄수 없었다. 백아영이 돌아온 후, 비록 온 가족이 드디어 모였지만,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았고 때마다 백아영은 떠나야 했고, 항상 바쁜 일상에 기쁠 때도 있었지만 힘들 때가 더 많았다. 현무는 그런 백아영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엄마는 나와 함께 있어서 기분이 나쁜 거예요?”어린 현무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돌기도 전에 이성준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너 때문이 아니야. 엄마가 놓인 상황 때문이지. 남원에서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일들과 언제든지 생기는 변화 때문이야.”“만약 누군가가 이 짐을 대신 나눠주고, 그런 일들을 완전히 해결해 주고, 엄마가 마음껏 여행을 다닐 수 있게 해준다면 매일 즐거워할 거야.”현무는 어리지만 총명해서 즉시 이성준의 뜻을 알아차렸다.“아빠, 제가 엄마의 일을 나누어서 해도 돼요?”이성준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너는 할 수 있어.”“그런데 힘들 거야. 엄청 힘들 수 있어. 대신에 엄마를 오랫동안 못 볼 텐데, 그래도 할래?”현무는 힘든 것은 두렵지 않지만, 오랫동안 백아영을 볼 수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현무는 머뭇거렸다. 그는 섭섭해서 고뇌했다.“나 그냥 엄마랑 여행 가면 안 돼?”이성준은 자애로운 아버지의 미소를 지었다. “네가 경영대를 일찍 졸업하면 돼.”현무는 지능이 높아서, 월반하는
이성준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 은퇴할 생각이야.”‘역시!’백아영이 머릿속으로만 하던 황당한 추측을 이성준 입으로 직접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믿기지 않았다. 왜 이성준이 갑자기 도망 오려 했던 건지, 그리고 왜 그 큰 짐을 위정과 선우경진한테 내던졋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성준은 그들을 훈련하고 있었다.수단이 좀 잔인했을 뿐이다.“왜 갑자기 은퇴하고 싶은 거야?”백아영은 아직 앞날이 밝은 이성준이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성준은 백아영을 응시하며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쓱쓱 만졌다.“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이성준은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아 수많은 고통을 겪었다.이성준의 괴로운 심정은 눈에 훤히 비쳤다. 그는 사실 오래전부터 은퇴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영아, 앞으로 남은 생 동안 나는 네가 조용하고 평온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은퇴하고 쇼핑센터를 떠나면 원한도 모두 훨훨 털어 버릴 수 있다. 두 사람은 세계 여행하며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된다.백아영의 머릿속은 멍해졌다.백아영은 이성준이 은퇴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자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성준이 계획한 미래에 항상 그녀가 있었다. 그의 미래는 온통 백아영 한사람이었다.백아영은 감동되어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가 환상하던 미래는 정말 기대할 만한 것같았다.“하지만 지금은 내가 선우경진과 위정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 같아.”겨우 보름밖에 안 되었는데, 그들은 고통을 호소하며 참지 못하는데 정말 큰 일이라면 더 감당하기 어려워할 게 뻔했다.이성준은 눈썹을 찡그리며 잠시 사색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현무 이제 다섯 살이니까 남자 다 됐지.”백아영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현무에게 맡길 생각은 아니지?”이성준은 담담하게 되물었다.“안 될 게 뭐가 있어?”‘안 될 게 뭐가 있겠냐고? 현무 이제 겨우 다섯 살인데!’이성준은 여전히 꿈쩍하지 않았다. “내가 다섯 살 때, 이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