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는 항암 치료 후 검진을 받지 않은 지 1년이 지났고, 지난 1년 동안 지아의 상태는 상당히 안정적이었다.지아는 항암치료의 부작용을 서서히 극복하고 있었고, 위도 더 이상 아프지 않았으며 종양도 훨씬 작아졌을 것 같았다.결과가 나오기 전에 지아는 마치 자신의 건강이 너무 나빠서 아기를 지워야 할 정당한 이유가 생길까 봐 불안했다.엄마로서 본능적으로 아이를 보호하고 싶었고, 좋든 싫든 작은 생명이 형성되었으니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이렇게 갈등하는 와중에 주원이가 결과를 들고나왔다.“주원아, 어때?”주원은 심각한 표정이었다.“지아 누나, 결과가 좋지 않아. 빨리 아이를 지우는 게 좋겠어.”지아는 MRI 결과에서 종양의 크기를 확인한 후 한 발짝 물러섰다.종양이 몸속에서 자라고 있었지만 눈에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었고, 지난 1년 동안 지아를 괴롭혔던 항암 치료의 부작용 때문인지 종양으로 인한 통증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주원아, 결과가 잘못된 건 아닐까?”“지아 누나, 내가 거짓말을 하겠어? 누나를 치료할 약을 찾으러 K국까지 다녀왔어. 난 누나를 위해서 이러는 거라고.”지아는 서둘러 말했다.“주원아, 화내지 마. 미안해, 내가 좀 우유부단했어. 네가 좋은 마음으로 그러는 거 알아.”“지아 누나, 누나가 착하다는 건 알지만 살다 보면 이기적인 것도 필요해. 항상 남을 배려하니까 오늘 같은 상황이 된 거야. 내가 이미 산부인과 과장님께 연락해 놨으니까 지금 검사하러 가면 돼!”주원에게 떠밀려 산부인과 진료실로 향하는 지아의 머릿속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주원이 미리 말해놓은 덕분인지 의사는 예의 있게 지아를 대했다.영어로 바지를 벗으라는 말에 지아는 갑자기 배에 통증이 느껴져 미안하다고 말하며 화장실로 갔다.“괜찮아요, 기다릴게요.”지아는 화장실을 찾으러 나왔다가 어쩌다 흡연구역으로 향했다.들어가기도 전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네가 거짓말한 걸 지아가 알면 어떡해?”“형, 지아 누나는 그렇다 쳐도 형까지 모르겠어? 누나
주원은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서둘러 껐다. 지아 앞에서는 늘 착한 소년의 이미지였던 주원의 얼굴은 약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주원이 독충 사람이라는 걸 지아가 안다고 하더라도 그곳에 제대로 된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주원은 최대한 감추는 쪽을 선택했다.“지아 누나, 다 들었어요?”지아는 배를 감쌌다.“배가 아픈데 화장실 어디 있어? 방금 무슨 얘기 했어?”하얀 얼굴에 조금의 의아함도 없는 걸 보아 조금 전 대화를 못 들은 것 같았다.주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많이 아파요? 검사 한 번 더 할까요?”“아니, 방금 초음파를 찍었으니 괜찮을 거야. 화장실부터 다녀올게.”“알았어요, 지아 누나, 내가 도와줄게요.”주원은 순한 모습이었다. 비록 이젠 성숙한 남자의 모습이지만 유치한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지아 앞에서는 그저 순진한 모습이었다.화장실에 간 지아는 문고리를 닫는 순간 가슴을 움켜쥐었다.몇 년 전의 일로 미루어 보아 주원은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순한 사람이 아니라 극단적이었고, 반대로 전효는 냉정해 보이지만 지아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짧은 순간 지아의 손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역시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 1년 전의 치료가 효과가 있었기에 지난 1년 동안 병이 발작하지 않았다.종양의 크기는 수술이 가능한 수준이어서 많이 아팠을 때보다는 훨씬 나아졌다.주원은 지아를 낙태시키려고 일부러 의사와 공모해 가짜 결과를 만들었고, 지아는 그가 자신을 위해 그런 짓을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전효의 말처럼 혹시나 자신의 말대로 이 무고한 어린 생명을 지킬 수도 있지 않나.해경과 소망도 지아가 아기를 낳겠다고 고집하지 않았다면 지금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흐릿했던 지아의 머릿속이 정리되며 지아는 결단을 내렸다.아이 아빠에 대한 감정이 어떻든 아이는 결코 잘못이 없었고, 아이가 자신을 선택한 이상 그냥 포기할 수 없었다.지아가 걸어 나오자 주원이 얼른 다가왔다.“지아 누나, 좀 나아졌
석 달이 지났지만 도윤은 무수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도 지아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 우서진으로 이미 밑밥까지 깔아놓았다.지아가 스승인 우규현을 봐서라도 협회에 연락해 의학 공부를 계속할 줄 알았다. 그렇다면 자주 만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어디 있는지, 어떻게 지내는지는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현실은 아무런 소식도 들리지 않았다.방 안에서 도윤은 담배를 연신 피웠고 세찬은 술잔을 연거푸 마셨는데 분위기는 무서울 정도로 침울했다.3개월이 지나서야 세찬은 자신의 마음을 깨달았고 민아가 자신에게 단순한 장난감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안타깝게도 민아는 이 세상에서 사라진 것과 다름없었다.가족을 이용해 협박하고 싶어도 민아와 연락이 닿지 않으니 주먹으로 솜을 치는 격이었다.도윤은 상사병이 났다. 지아가 자신을 떠나면 무척 안전하겠지만 그녀를 완전히 잃은 셈이었다.도윤은 자신이 정말 옳은 일을 한 건지 계속해서 되새겼다.세찬은 태연한 척하는 도윤을 보며 비웃었다.“이렇게 되니까 행복해?”“솔직히 생각만큼 기쁘지 않네.”도윤은 손에 쥐고 있던 담배를 끄고 무심코 술 한 병을 집어 들이켰다.“지아도, 애들도 보고 싶어.”“허.”세찬은 코웃음 쳤다.“넌 그냥 잘난 척만 하는 놈이야!”보내줄 거면 지아만 보내주지 왜 민아까지!세찬은 눈을 감을 때마다 민아가 떠올랐다. 회사 곳곳에도 민아의 잔영이 보이고 집안 어디에도 둘이 사랑을 나누던 흔적뿐이었다.민아가 떠난 후, 주변에 먼저 다가오는 여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하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순간 세찬은 더욱 화가 났고, 그 순간 민아는 이미 오래전에 자신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이 넓은 지구에서 일행이 낯선 곳에 이름을 감춘 채 조용히 살아가면 아무리 그들이라도 쉽게 찾을 수 없었다.천지를 뒤흔들만한 힘을 가진 두 남자가 이런 일에 쩔쩔매고 있었다.지아의 양부모는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고, 지아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조금의 미련도 남아있지 않았다.적
3년 전, 도윤의 정체가 다크웹에 공개되면서 복수를 노리는 많은 적들이 몰려들었다.그들 중 일부는 도윤을 죽일 수 없어서 YH 그룹에 손댔다.한동안 그룹 산하의 모든 산업 체인에 큰 문제가 생겼고 사람들은 원인을 알지 못한 채 그저 다른 사업가가 경쟁을 위해 손을 쓴 것이라 생각했다.이씨 가문은 이미 재계에 손꼽히는 재벌이었는데 누가 감히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단 말인가.온 나라가 들썩여도 도윤은 느긋하게 하나하나 조사해 갔다.이씨 가문이 무너지면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어둠의 조직들뿐만 아니라 거대하고 강력한 가문들도 뒤섞여 있었다.도윤은 조직을 하나씩 찾을 때마다 직접 사람들을 이끌고 그들을 소탕했다. 범법자는 범에 따라 처리하고 우두머리 보스는 목을 잘라 다크웹에 올리며 번호를 달았다.1번, 2번, 3번...도윤은 사냥감이 아니라 사냥꾼이 되었고, 관련된 모든 이들이 도윤의 먹잇감이 되었다.예전에는 그래도 양심껏 재계에서 독점하지 않았다.우선 이씨 가문은 수백 년에 걸쳐 축적한 재산을 수십 대에 걸쳐 이씨 가문의 후손들에게 나눠줄 수 있었다.도윤은 천문학적인 재산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돈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게다가 도윤은 나라를 위해 나라에 위협이 되는 것들을 제거하며 조용히 나라를 지켰고, 이런 일들은 위험했지만 대통령이 되어 돈을 버는 것보다 훨씬 더 의미 있는 일이었다.재계에서도 홀로 독식하지 않고 어느 정도 타인의 몫을 남겨두곤 했다.그러나 그 양반들은 고마워하기는커녕 가문에 문제가 생긴 틈을 타 부채질하고 불을 지폈다.지아가 떠난 후 도윤의 성품은 급격히 변했고, 꿍꿍이가 있는 재벌 후계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도윤은 서씨 가문, 민씨 가문, 강씨 가문과 손을 잡고 손쉽게 다른 가문을 무너뜨리며 그들이 가지고 있던 사업을 나눠 이 판을 정리했다.한동안 A시를 중심으로 주변의 여러 경제 구역의 재벌들은 자신의 지갑을 사수하기 바빴다.3 년 동안 도윤 때문에 파산당한 크고 작은 가문이 20개가 넘었다.이들
도윤은 위장복 전체가 다른 사람의 피로 물들었고 자신은 팔에 가벼운 상처만 입었을 뿐이었다.도윤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3년이 지났는데도 지아는 소식이 없고, 그는 피에 굶주린 괴물로 전락해 버렸다.“금상어가 도망쳤다고? 상관없어, 모든 거점이 내 손에 무너졌으니 이제 독 안에 든 쥐새끼야. 어디로 도망칠 수 있겠어?”도윤의 입가에 피에 굶주린 미소가 번졌다.“보스, 손 다쳤어요.”“이 정도로 뭘.”그건 여자의 단도에 슬쩍 베인 작은 상처였다.지아와 제법 닮은 여자 때문에 총을 겨눌 때 정신이 팔려 잠깐 한눈을 팔았다.도윤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팔에서 마치 독사에게 물린 것처럼 고통이 밀려왔다.일격에 여자를 죽여버린 다음 도윤은 미련 없이 떠났다.그들에게 다치는 것은 흔한 일이었기 때문에 도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하지만 그 순간 팔의 상처 주변 색이 변했고, 도윤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눈앞이 캄캄해지며 쓰러졌다.“보스!”도윤의 가면을 벗기자 검게 변한 입술이 보였다.“큰일 났어, 중독된 거야!”“빌어먹을 금상어, 이 순간을 위해 일부러 사모님과 비슷한 여자를 남겨둔 거야! 칼에 강한 독이 묻어 있었나 봐!”“3년이나 지났는데 여전히 사모님을 마음에 품고 계셨어. 그 일편단심이 결국 해가 된 거야!”그 시각 저택에는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반듯한 얼굴에 올곧은 자세, 우아하게 술잔을 들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그동안 도윤과 공개적으로 맞서 싸우던 하용이었다.3년 동안 도윤은 성난 짐승이 사방으로 불을 뿜는 것 같았고, 하씨 가문은 이제 마지막 기력만 겨우 남은 상태였다.절망한 하용은 도윤의 곁에 몰려드는 사람을 보며 이런 대책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다른 한 사람은 도망친 금상어였는데, 험상궂은 얼굴에 눈가에 상처가 있었다.“됐어!”금상어는 손에 든 잔을 깨뜨렸다.“고스트 이 망할 자식, 내 사람들을 그렇게 많이 죽이고 내 앞길을 망쳤는데 이대로 그냥 죽이기엔 너무 아까워!”금상어는 조금도 분이 풀리
금상어는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물었다.“뭐야?”“사장님, 우리 앞에 시체가 있는 것 같아요.”“그냥 소란 피우지 말고 밟아버려.”금상어의 몸놀림은 멈추지 않았고, 그의 밑에 있던 여자는 애걸복걸하고 있었다.운전기사가 고개를 내밀고 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사장님, 저, 저거 부사장님 시체 같은데요.”복어가 도윤에게 참수당했다는 소식은 이미 오래전에 전해졌고, 그 사진은 다크웹에 올라온 상태였다.그러나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누워 있는 시체는 다름 아닌 복어의 몸통이었다.“말도 안 돼, 시체가 수백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여기 있을 수 있어?”운전기사가 차를 세우고 확인해 보니 이미 차가워진 시신의 팔에는 청룡 문신이 있었고, 운전기사는 순식간에 눈물을 흘렸다.“사장님, 정말 부사장님이 맞아요. 이 문신은 제가 함께 가서 새긴 거예요.”금상어는 머리 없는 시신에 등골이 서늘해져 주섬주섬 바지를 입고 차에서 내렸다.“왜 시체가 여기 나타나? 누가 장난친 게 틀림없어. 당장 여기를 떠나!”그 말이 떨어지자 뒤따르던 네다섯 대의 차가 갑자기 모두 폭발했다!불빛 아래서 금상어는 느린 걸음으로 걸어 나오는 한 인물을 보았다.굴곡진 몸매에 검은 옷을 입은 상대는 여자였다!“너, 너 누구야?”금상어는 너무 겁이 나서 바지 속에 있던 권총을 꺼냈다.이미 두려움에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고, 역광 때문에 여자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금상어가 총을 뽑아 든 순간 요란한 소리와 함께 여자가 그의 손을 부러뜨리고 무기를 바닥에 떨구었다.운전기사는 그 틈을 타 총을 겨누려 했지만 번쩍이는 빛이 그의 힘장을 관통했다. 고개를 숙여 보니 가슴에 단검이 꽂혀 있었다.운전사는 입가에 다량의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금상어도 풍파를 많이 겪어봤다고 생각했지만 오늘의 사건은 너무 기괴했다.더 무서운 것은 자신이 손이 부러진 채 도망치려는데 또 한 번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총알이 무릎에 박혔다.금상어가 움직이는 곳마다 총알이 날아들었다.불
더운 여름날 태양은 대지를 태우는 커다란 불덩어리 같았다.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무문이 열렸다.양요한이 고개를 숙이고 걸어 나오자 진환이 급하게 물었다.“어떻게 됐습니까?”“상황이 좋지 않아요. 검사를 위해 혈액 표본을 채취했는데 대표님이 이번에 희귀한 독에 맞으셨어요. 이 독은 독성이 강한 여러 가지 독에서 추출한 겁니다.”“어떤 종류의 독인지 알 수 있습니까?”“이미 실험실에 연락해서 야근하더라도 알아내라고 했지만 알아내도 방법이 없습니다. 약을 주사해서 일시적으로 독이 심장으로 가는 것을 지연시킬 수밖에 없어요. 평소 조심하시던 분이 이번에는 왜 방심하셨답니까?”진봉은 한숨을 쉬었다.“그 망할 놈 때문이죠. 일부러 사모님을 닮은 여자를 찾았어요. 보스가 지난 몇 년 동안 겉으로는 아무 말도 안 했지만 사실은 사모님을 무척 그리워한다는 걸 알잖아요! 매번 사모님에 대한 흔적이 보일 때마다 직접 갔지만 허탕만 칠 뿐이었죠.”“어휴, 이번에 곤란하게 됐습니다. 방법이 없으면 대표님이 이대로...”“이미 군의관에게 알렸고, 우 박사님이 직접 사람을 대동하고 오실 겁니다. 대충 오실 때가 됐네요.”도윤의 몸은 이미 독에 잠식당한 상태였고, 정맥에서 올라오는 통증이 몸에 퍼져 온몸이 쑤셨다.피부 표면에 나타난 짙고 붉은 무늬가 사지로 빽빽하게 퍼져 있었다.부하들과 함께 달려온 우서진은 붉은 무늬를 보자마자 표정이 급변했다.“어쩌다 이런 독에 당한 건가?”“사고였습니다. 무슨 독입니까?”“구심독이네.”우서진은 경계하는 표정이었다.“아홉 가지 맹독에서 정제된 독으로, 중독된 사람은 보통 72시간 이상 살 수 없고, 피부 표면에 붉은 선이 나타나며, 붉은 선이 심장까지 퍼지면 생명줄도 끊기지. 보통 구역에서 배신자를 벌하는 독인데 대체 어쩌다 방심한 거야?”도윤의 실력이면 쉽게 다가올 사람이 없을 텐데 어쩌다 공격할 빈틈을 준 것일까.“금상어가 보스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사모님과 아주 비슷한 여자를 찾았어요, 그래서...”“또 그년
소쿠리 촌은 원시림 끝자락에 있는 작고 오래된 마을로, 어느 나라 관할에도 속하지 않고 사방에 독초와 독충이 많아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당시 우서진은 스승의 소개로 우연히 소쿠리 촌에 들어갔고, 소쿠리 촌에 들어가는 방법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마을 바깥쪽은 안개가 자욱했고, 북쪽은 절벽과 바위로 둘러싸여 있었다.일반인이 함부로 마을에 들어가면 독사에게 물려 죽거나 독기에 중독되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우서진이 미리 준비한 방호복과 방독면을 쓰고 모두들 도윤을 들것에 실은 채 들어갔다.도윤은 점점 상태가 나빠지고 정신이 혼미해졌다.낯선 곳에 처음 온 진봉도 잔뜩 경계하고 있었다.완전 무장을 했음에도 발밑에서 독사와 전갈이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슈슉-“형, 소리 들려?”진환은 도윤의 곁에 서서 덤덤하게 대답했다.“여기에는 독사가 많아서 뱀 소리가 나는 건 당연한 거야.”“그런데 평범한 뱀 소리와는 좀 다른 것 같아.”“기분 탓이야.”진봉은 이런 독이 있는 곳에 오느니 차라리 공동묘지에 가서 무덤을 파는 게 낫겠다며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문득 머리 위 나무에서 주먹보다 큰 거미가 떨어졌다.“젠장!”진환의 미간이 펄떡펄떡 뛰었다.“여긴 열대우림과 가까워서 동물이 큰게 당연해. 동물의 왕국 못 봤어? 아마존에는 수십 미터 길이의 보아뱀도 있어.”이 나이에도 호들갑을 떠는 동생을 보며 진환은 머리가 지끈하며 할 말을 잃었다.갑자기 진봉의 눈을 크게 뜬 채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목소리가 떨렸다.“형, 형, 혹시 저게...”“또 뭘 본 거야?”진환이 꾸짖으려는 순간, 고개를 들어 보니 갑자기 독기 중에 커다랗고 긴 그림자가 나타났다.진봉은 두 다리가 덜덜 떨렸다.“이게 전설 속에 나오는 거대한 뱀은 아니겠지?”“내가 그런 소설 그만 보라고 했지, 뱀이 똑같은 뱀이지 전설 속의 뱀은 또 뭐야? 저렇게 큰 건 아마 비단뱀일 거야. 비단뱀은 독 없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 물체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