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찬뿐만 아니라 도윤도 요즘 미쳐버리기 직전이었다. 전효가 그의 부하들에게서 벗어난 지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들려오는 소식은 없었다.전효의 정체를 알기 전까지 도윤은 그에게 별다른 악감정이 없었다.전효에 대해 알아보니 전림의 쌍둥이 형제로서 태어났을 때부터 몸이 매우 허약하여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점쟁이의 점괘에 따라 아이를 밖에 내보내서는 안 되기에 재앙을 막기 위해 절에 가둬야만 했다.그래서 전씨 가문에서 대외에 공개한 아들은 한 명뿐이고 도윤조차 전효의 존재를 몰랐다.진봉은 한숨을 쉬었다.“참 이상하네요. 그때 점쟁이는 전씨 가문 아들 중 한 명만 살 수 있다고 했는데 몸이 약한 전효가 아니라 그의 형이 죽을 줄이야. 그때 전림이 늘 비밀스럽게 절에 갔었는데 우리는 또 기도라도 하는 줄 알았죠. 동생을 보러 갔던 거네요. 그러면 전효도 자신의 형이 보스 때문에 죽었다는 걸 알 텐데, 사모님한테 해코지하지는 않을까요?”전씨 가문 사람들조차도 이 아들에 대해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누구도 이 가능성을 확신할 수 없었다.전림의 사망 소식이 전씨 가문에 전해지자 전씨 가문 사람들은 슬퍼하며 전효를 다시 데려와 키우자고 제안했다.그러나 전씨 가문 사람들이 급히 절에 가보니 전효는 이미 오래전에 떠났다는 말을 들었고, 그때부터 전효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전림은 늘 병든 사람에 대해 중얼거리곤 했는데, 이제 도윤은 그가 말하는 병든 사람이 전효라는 사실을 깨달았다.적어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전효와 전림은 형제애가 좋다는 것이었다.전림의 복수를 위해서라면 지아에게 접근한 게 이해가 되었다.다만 도윤이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지난 2년 동안 자신의 아이를 이용해 무언가를 할 기회가 있었지만, 전효는 아이를 해치지 않았고 자신을 위협한 적도 없었다는 점이었다.도윤은 전효가 정확히 무슨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 알 수 없었고, 그저 하루라도 빨리 지아와 아기를 데려오고 싶을 뿐이었다.하지만 전효는 지아와 아이들, 그리고 민아와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
세찬은 도윤을 똑바로 쳐다보았다.“섬도 네 거고 사람도 너희 쪽 사람들인데 네가 시킨 게 아니고서야 도망칠 수 있겠어?”세찬은 바보가 아니었고 지아에 대한 도윤의 태도 변화를 오래전부터 감지하고 있었다.“너한테 숨길 수 없다는 걸 알았어.”도윤은 부정하지 않았다.“너희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든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내 일에 참견해서는 안 됐어.”세찬은 도윤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두 남자의 티격태격하는 분위기를 지켜보던 백현은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었다.“됐어, 너 같은 놈은 떨어져 봐야 자기 마음을 깨닫지. 도윤이 탓하지 마. 민아 씨가 원하지 않았다면 데려갈 수도 없었을 거야. 친구 탓하기 전에 왜 민아 씨가 널 떠나려고 하는지 생각해 보는 건 어때?”세찬은 낙담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이유가 뭔데, 돈도 많이 줬잖아. 돈 좋아하지 않아? 그런데 결국 날 떠났어.”“넌 멍청한 거야, 멍청한 척하는 거야? 돈으로만 여자를 살 수 있으면 널 진심으로 좋아하는 게 아니겠지. 근데 돈을 버리고 떠났다는 건 널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거잖아. 그런데도 너는 여전히 여자를 노리개로 취급한다면 당연히 이런 관계를 견디지 못하고 떠날 수밖에 없지.”관계에서 대부분은 지켜보는 사람들은 다 알아도 정작 상황에 처한 본인은 깨닫지 못할 때가 많았다.세찬은 당황했다.“그 여자가 나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처음부터 우리는 감정을 배제하는 걸 원칙으로 삼았어.”도윤은 눈을 흘겼다.“너한테 그 여자가 그냥 장난감이라면, 왜 그렇게 장난감에 집착하는 건데?”“난...”“놀잇감은 누구든 대체할 수 있지만 연인은 대체할 수 없다는 걸 몰라? 넌 오래전에 그 여자와 사랑에 빠졌는데 아직도 그걸 모르잖아.”“난 그 여자를 사랑하지 않아. 기껏해야 조금 특별할 뿐이야.”“그래, 사랑하지 않는다고 쳐. 그럼 왜 요즘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는 거야? 여자 때문에 친구한테도 막 대하고.”도윤이 허를 찌르자 세찬의 표정도 동요했다.“그냥 인정해
“대표님, 요즘 공적인 일도 있고 사업적으로 처리해야 할 것도 많은데 사모님 때문에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다가 완전히 치료하지 못한 몸이 무너지면 어떡합니까?”진환이 말렸다.다크웹에 도윤의 정체가 공개된 이후 이씨 가문에도 큰 충격을 받았다.YH 그룹의 산하에는 꽤 많은 산업 체인이 있는데, 요즘은 부동산이든 식품 산업이든 모두 문제가 생겼다.누군가 온갖 어둠의 세력을 동원해 이 모든 걸 조종하고 있었다.사업을 하면서 가장 무서운 게 보이지 않는 공격인데 백현도 정보를 입수했다.“이대로 가다가는 큰 손해를 볼 텐데 어떡할 거야?”“내 성격 알잖아.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백배로 갚아줄 거야.”도윤은 콧방귀를 뀌었다.“내 손에 그놈들 약점이 있다는 걸 자기도 잘 알겠지. 그러면 그놈은 질 수밖에 없어. 급하면 이씨 가문과 지아에게 손을 대겠지만 내가 이제 지아를 보내줬잖아. 나도 모르는 지아의 행방을 그놈들이 알 리가 없지. 약점이 없으면 그놈이 무슨 수를 쓰겠어?”원래는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었고, 지아를 떠나보낸 뒤에는 걱정 없이 사업을 할 수 있었다.유일한 변수는 전효였다.전효가 아군이라면 이번엔 도윤의 승리겠지만 전효가 손을 쓰면 도윤은 지아 때문에 크게 패할 것이다.“형수를 못 찾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야. 전효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자. 정말 무슨 수작을 부릴 생각이었으면 2년 동안 그렇게 많은 기회가 있었고 네 자식을 데리고 있으면서도 아무 짓도 안 했잖아.”도윤은 한숨을 쉬었다.“그러길 바라야지.”도윤은 모든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어 더 이상 돌발 상황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지아야, 무사해야 해.도윤의 생각을 감지한 듯 지아는 꿈에서 벌떡 깨어나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지아는 꿈속에서 아이의 애절한 울음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지아 눈앞에는 달빛을 받아 차가운 빛을 발산하는 차가운 마스크의 남자가 서 있었다.옆에서 자는 두 아이를 보며 지아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무, 무슨 일이
전효는 무슨 말을 할지 안다는 듯이 말했다.“말해.”“우리는 아주 짧게 알고 지냈고, 그때는 만수 아저씨처럼 섬에 있는 사람들을 봐서 나 대신 알아봐 줬지만, 나중에는 왜 그랬어요? 몰래 나를 도와주고 내 아이를 키워주고, 내가 탈출을 도와달라고 부탁했을 때도 불평 없이, 심지어 헌신적으로 도와주었어요. 우리는 가족도 아닌데 당신은 나를 위해 목숨이 위험한 일들을 감행했어요. 이유가 뭔가요?”어느새 전효의 손에는 차갑고 날카로운 칼날이 들려 있었고, 지아는 처음으로 그의 무기를 보았다. 섬뜩하고 예리했다.전효는 신비롭고 무기처럼 섬뜩한 분위기가 있었다.“내가 왜 도와줬을까, 네가 맞춰볼래?”낮은 전효의 목소리에 특히 오늘 같은 밤 지아는 왠지 모르게 등줄기에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모르겠어요. 다만 세상에 이유 없는 호의는 없다는 걸 알아요. 얻은 만큼 베풀어야죠. 전효 씨, 원하는 게 뭐예요?”지아는 전효를 만난 후 2년 동안 아이를 돌봐준 대가로 돈을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나 같은 사람은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세상의 차가움과 따뜻함, 삶과 죽음에 익숙해져 있었어. 그때 우연히 만수 아저씨가 구해줘서 섬에 살다가 네가 나타난 뒤로 섬도 새롭게 발전했지. 나는 내 길을 계속 가려다가 조직에서 너와 관련된 명령을 발견하고 도와준 거야. 아이도 얼떨결에 구한 거고. 난 지금 사람들에게 쫓기고 있어서 이젠 돌아갈 길이 없어.”전효는 지아를 돌아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널 구한 이유는 아마 너한테서 삶의 의미를 봤기 때문일 거야. 좀 웃기지?”지아는 전효가 사연이 있는 남자라는 것을 직감했다.“가족은 없나요?”“가족? 그딴 것 없어.”역시 전효에게서 느껴지는 타고난 외로움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유일한 가족도 이 세상을 떠났고, 나에겐 이제 가족이 없어.”그 말을 하는 전효에게서 지아는 끝없는 외로움을 느낄 뿐이었다.“전효 씨, 당신만 원한다면 나와 아이를 가족으로 생각해도 돼요. 만약 나에게 오빠가 있었다면 당
지아는 아이의 애절한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던 꿈을 떠올리며 밤하늘을 바라보았다.아이가 엄마의 마음을 알아챈 걸까?“모르겠어요.”“지아 누나, 이 아이는 키우면 안 돼요.”주원도 인기척을 듣고 걸어 나와 지아 옆에 앉았다.“전에도 항암치료 받아서 알잖아요. 항암치료 부작용은 오래갈 텐데 아이가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어요. 그리고 내가 준 약을 쓰면 아이가 죽지 않더라도 기형이 될 확률이 높아요.”지아가 시간을 세어보니 마지막 항암 치료 후 7개월을 머물다 떠난 뒤 두 달을 바다에서 지냈고, 배가 해적에 의해 파괴된 뒤 한 달 넘게 섬에서 쉬었다가 다시 출발해 보름이 지난 뒤 생긴 아이였다.어쩌다 보니 항암치료를 마친 지 1년이 지났다.아기는 안전할지 모르지만 주원의 말이 맞았다. 전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고 해도 다음 약을 먹으면 기형아를 출산할 확률이 높아질 것이 분명했다.“방법이 있긴 해. 당분간 약을 쓰지 않고 아이를 낳을 때까지 기다리면...”주원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지아 누나, 미쳤어요? 이 아이의 목숨을 걸고 도박하시겠다고요? 혹시 재발하면 누나와 아기 모두 지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요?”“하지만 주원아... 나는 죽음의 문턱을 여러 번 오갔잖아. 죽어봐야 생명이 귀한 걸 알아. 이 아이는 이미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고 그래도 이 세상에 왔는데 이대로 생명을 빼앗을 수는 없어.”주원은 힘없이 한숨을 내쉬었다.“제가 무슨 말을 해주길 바라요? 이 아이의 아빠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설령 아이를 안전하게 가질 수 있다고 해도 사랑할 거라고 장담할 수 있어요?”“그럴 거야, 내 자식이니까 똑같이 대할 거야.”“형, 내 말은 소용없는 것 같으니까 형이 설득해. 아이를 남겨두어서는 안 돼.”전효는 지아를 쳐다봤고, 그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지아가 먼저 나서서 말했다.“MRI 결과 보고 다시 얘기해. 내 상태가 좋아서 당분간 재발하지 않으면 아이를 낳고 완치해도 되잖아.”“그
지아는 항암 치료 후 검진을 받지 않은 지 1년이 지났고, 지난 1년 동안 지아의 상태는 상당히 안정적이었다.지아는 항암치료의 부작용을 서서히 극복하고 있었고, 위도 더 이상 아프지 않았으며 종양도 훨씬 작아졌을 것 같았다.결과가 나오기 전에 지아는 마치 자신의 건강이 너무 나빠서 아기를 지워야 할 정당한 이유가 생길까 봐 불안했다.엄마로서 본능적으로 아이를 보호하고 싶었고, 좋든 싫든 작은 생명이 형성되었으니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이렇게 갈등하는 와중에 주원이가 결과를 들고나왔다.“주원아, 어때?”주원은 심각한 표정이었다.“지아 누나, 결과가 좋지 않아. 빨리 아이를 지우는 게 좋겠어.”지아는 MRI 결과에서 종양의 크기를 확인한 후 한 발짝 물러섰다.종양이 몸속에서 자라고 있었지만 눈에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었고, 지난 1년 동안 지아를 괴롭혔던 항암 치료의 부작용 때문인지 종양으로 인한 통증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주원아, 결과가 잘못된 건 아닐까?”“지아 누나, 내가 거짓말을 하겠어? 누나를 치료할 약을 찾으러 K국까지 다녀왔어. 난 누나를 위해서 이러는 거라고.”지아는 서둘러 말했다.“주원아, 화내지 마. 미안해, 내가 좀 우유부단했어. 네가 좋은 마음으로 그러는 거 알아.”“지아 누나, 누나가 착하다는 건 알지만 살다 보면 이기적인 것도 필요해. 항상 남을 배려하니까 오늘 같은 상황이 된 거야. 내가 이미 산부인과 과장님께 연락해 놨으니까 지금 검사하러 가면 돼!”주원에게 떠밀려 산부인과 진료실로 향하는 지아의 머릿속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주원이 미리 말해놓은 덕분인지 의사는 예의 있게 지아를 대했다.영어로 바지를 벗으라는 말에 지아는 갑자기 배에 통증이 느껴져 미안하다고 말하며 화장실로 갔다.“괜찮아요, 기다릴게요.”지아는 화장실을 찾으러 나왔다가 어쩌다 흡연구역으로 향했다.들어가기도 전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네가 거짓말한 걸 지아가 알면 어떡해?”“형, 지아 누나는 그렇다 쳐도 형까지 모르겠어? 누나
주원은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서둘러 껐다. 지아 앞에서는 늘 착한 소년의 이미지였던 주원의 얼굴은 약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주원이 독충 사람이라는 걸 지아가 안다고 하더라도 그곳에 제대로 된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주원은 최대한 감추는 쪽을 선택했다.“지아 누나, 다 들었어요?”지아는 배를 감쌌다.“배가 아픈데 화장실 어디 있어? 방금 무슨 얘기 했어?”하얀 얼굴에 조금의 의아함도 없는 걸 보아 조금 전 대화를 못 들은 것 같았다.주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많이 아파요? 검사 한 번 더 할까요?”“아니, 방금 초음파를 찍었으니 괜찮을 거야. 화장실부터 다녀올게.”“알았어요, 지아 누나, 내가 도와줄게요.”주원은 순한 모습이었다. 비록 이젠 성숙한 남자의 모습이지만 유치한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지아 앞에서는 그저 순진한 모습이었다.화장실에 간 지아는 문고리를 닫는 순간 가슴을 움켜쥐었다.몇 년 전의 일로 미루어 보아 주원은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순한 사람이 아니라 극단적이었고, 반대로 전효는 냉정해 보이지만 지아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짧은 순간 지아의 손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역시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 1년 전의 치료가 효과가 있었기에 지난 1년 동안 병이 발작하지 않았다.종양의 크기는 수술이 가능한 수준이어서 많이 아팠을 때보다는 훨씬 나아졌다.주원은 지아를 낙태시키려고 일부러 의사와 공모해 가짜 결과를 만들었고, 지아는 그가 자신을 위해 그런 짓을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전효의 말처럼 혹시나 자신의 말대로 이 무고한 어린 생명을 지킬 수도 있지 않나.해경과 소망도 지아가 아기를 낳겠다고 고집하지 않았다면 지금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흐릿했던 지아의 머릿속이 정리되며 지아는 결단을 내렸다.아이 아빠에 대한 감정이 어떻든 아이는 결코 잘못이 없었고, 아이가 자신을 선택한 이상 그냥 포기할 수 없었다.지아가 걸어 나오자 주원이 얼른 다가왔다.“지아 누나, 좀 나아졌
석 달이 지났지만 도윤은 무수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도 지아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 우서진으로 이미 밑밥까지 깔아놓았다.지아가 스승인 우규현을 봐서라도 협회에 연락해 의학 공부를 계속할 줄 알았다. 그렇다면 자주 만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어디 있는지, 어떻게 지내는지는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현실은 아무런 소식도 들리지 않았다.방 안에서 도윤은 담배를 연신 피웠고 세찬은 술잔을 연거푸 마셨는데 분위기는 무서울 정도로 침울했다.3개월이 지나서야 세찬은 자신의 마음을 깨달았고 민아가 자신에게 단순한 장난감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안타깝게도 민아는 이 세상에서 사라진 것과 다름없었다.가족을 이용해 협박하고 싶어도 민아와 연락이 닿지 않으니 주먹으로 솜을 치는 격이었다.도윤은 상사병이 났다. 지아가 자신을 떠나면 무척 안전하겠지만 그녀를 완전히 잃은 셈이었다.도윤은 자신이 정말 옳은 일을 한 건지 계속해서 되새겼다.세찬은 태연한 척하는 도윤을 보며 비웃었다.“이렇게 되니까 행복해?”“솔직히 생각만큼 기쁘지 않네.”도윤은 손에 쥐고 있던 담배를 끄고 무심코 술 한 병을 집어 들이켰다.“지아도, 애들도 보고 싶어.”“허.”세찬은 코웃음 쳤다.“넌 그냥 잘난 척만 하는 놈이야!”보내줄 거면 지아만 보내주지 왜 민아까지!세찬은 눈을 감을 때마다 민아가 떠올랐다. 회사 곳곳에도 민아의 잔영이 보이고 집안 어디에도 둘이 사랑을 나누던 흔적뿐이었다.민아가 떠난 후, 주변에 먼저 다가오는 여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하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순간 세찬은 더욱 화가 났고, 그 순간 민아는 이미 오래전에 자신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이 넓은 지구에서 일행이 낯선 곳에 이름을 감춘 채 조용히 살아가면 아무리 그들이라도 쉽게 찾을 수 없었다.천지를 뒤흔들만한 힘을 가진 두 남자가 이런 일에 쩔쩔매고 있었다.지아의 양부모는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고, 지아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조금의 미련도 남아있지 않았다.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