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윤은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알아. 잠들었을 때나 일어났을 때나 네 손을 놓기 싫었어.”도윤의 얼굴은 매우 창백했고, 가뜩이나 하얀 얼굴이 더욱 병들어 보였다.생사를 넘나들며 수술만 해도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깨어나자 멀쩡한 사람처럼 행동할 정도로 상태가 좋았다.“마취제를 안 썼다고 들었어.”“내가 죽으면 마지막으로 널 볼 수 없을까 봐 두려워서.”덤덤하게 대답했지만 사실 다른 이유가 있었다. 지아는 마취제에 대한 항체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다칠 때마다 힘겹게 버텨야 했다.출산으로 인한 출혈과 팔에 꿰맨 상처, 손목을 다쳤을 때도.도윤은 마취도 하지 않고 지아가 겪은 모든 고통을 마음속에 확실히 간직하고 싶었다.무엇보다 정신을 차리고 제일 먼저 지아를 보고 싶었다.어젯밤 응급처치가 정말 효과가 없었다면 도윤은 잠든 채로 이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지아는 도윤의 대답을 듣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두 사람 사이에 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먼저 말을 꺼낸 것은 도윤이었다.“가능한 한 빨리 섬으로 데려다줄게. 여긴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아.”“안전하지 않다는 건...”도윤은 진환을 불렀다.바삐 움직이던 진환은 눈이 충혈된 채 급한 표정으로 들어왔다.“보스, 저희가 제대로 지키지 못했습니다.”진환은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도윤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두 손 위로 턱을 괴고 있었다.“큰 재앙을 당한 뒤에 복이 찾아오겠지. 가서 지아를 빨리 데려다줘.” 도윤의 어조는 단호했다.이럴 때 가장 원하는 것은 곁에 있어 주는 것임이 분명했지만, 자신을 먼저 보내는 걸 보아 도윤이 뭔가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 같았다.사실 어젯밤부터 도윤은 이미 생각하고 있었다.지아는 진환을 바라보았다.“뭘 알아냈어요?”하지만 진환은 도윤을 바라보았고 도윤의 허락 없이는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지아야, 애들이 밤새 널 많이 그리워했어. 소망이와 해경이도 벌써 모였을 테니까 너도 서둘러 가. 난 이제 괜찮아.”너무 이상했다.
차라리 말하지 않으면 모를까, 도윤이 그런 말을 하자 지아의 표정이 갑자기 변했다.“언제까지 나를 위하는 척하면서 이기적으로 굴 거야?”지아는 그동안의 불만을 모두 쏟아냈다.“예전에 난 당신을 너무 사랑해서 당신을 위해 모든 걸 포기했어. 당신 일이 워낙 비밀스러우니까 묻지도 않았고 난 당신이 어디로 출장 가는 것도 몰랐어. 그게 당신을 사랑하는 방법인 줄 알았는데 결국 나한테 돌아온 건 뭐야?”“지아야.”도윤은 손을 뻗어 지아를 끌어당기려 했지만 지아는 피했다.“당신은 내 모든 걸 아니까 기분 좋을 땐 엄청난 돈을 들여서 나를 위한 선물까지 사주면서 아껴주다가, 기분 안 좋을 땐 그걸 다 뺏어가고 나를 궁지에 몰아넣잖아. 그럼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이 이도윤이라는 것 말고 내가 당신에 대해 아는 게 뭐가 있어? 애초에 당신은 나를 애완동물 대하듯 사랑했어. 그게 나를 위한 거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당신의 이기심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된 거 아냐?”도윤은 화난 지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지아는 그동안 자신에 대한 원망이 컸던 것 같다.“지아야...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내 정체를 아는 사람들은 위험해질 걸 알기 때문에 우리 집안도 이미 해외로 이주한 거야. 다가올 불행을 막으려고.”도윤은 한숨을 쉬었다.“그래, 이렇게 된 이상 네가 알고 싶은 건 다 말해줄게. 어차피 내 신분은 유출됐어. 진환아, 알아낸 거 다 말해. 여기 외부인도 없으니까.”진환은 허락받고 먼저 방 문을 닫은 뒤 지아에게 말했다.“사모님, 어젯밤 일은 사모님을 노린 게 아니라 누군가 보스를 죽이려고 한 거고, 사모님은 그냥 어쩌다가 함께 당한 겁니다.”역시 지아의 촉이 맞았다. 전에 겪었던 일행과 수법이 전혀 달랐으니까.“도대체 누구예요, 누가 감히?”“제가 초보적으로 알아낸 바에 따르면, 현지에 있는 일부 음지 조직인데 나라에서 이 지역을 매우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어서 일부 잔당이 존재하더라도 감히 그렇게 대담하게 행동하지 못했을 것입니다.”“그럼 왜...”
진환은 심각한 표정이었다.“보스의 정체가 드러나면 과거 보스에게 원한을 품었던 여러 세력이 반드시 보복을 위해 굶주린 늑대처럼 달려들 겁니다. 어젯밤 사건과 마찬가지로 이 사람들의 배후에 있는 조직은 10년 전 S지역의 중심인물인데 무모하게 나서기로 유명합니다. 그들은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죽기 전에 보스를 끌어내릴 생각인 겁니다.”지아는 그 말에 소름이 돋았다.“그럼 이제 도윤 씨가 위험하지 않나요?”“여기는 아직 안전하지만 군사 지역을 벗어나면 모든 곳이 위험으로 가득 차 있으며, 저희가 블랙 넷에서 누군가가 익명의 현상금 게시물을 게시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보스를 죽이면 200억을 받을 수 있다는데 이러한 고가의 현상금 게시물은 보통 일부 개인 암살자와 용병까지 끌어모으죠. 큰 보상에는 용자가 나서는 법이니까요.”도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지아를 위로했다.“전에 널 내 곁에 둔 건 내가 지켜줄 수 있었기 때문이지만 이젠 내 곁이 제일 위험하니까 떠나야 해.”자기는 목숨을 걸면서 지아에겐 떠나라고 한다.지아는 이미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떠날게,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당신 등에 난 상처가 아물면 떠날 거야.”“지아야, 너...”도윤은 지아가 이유를 듣고 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날 줄 알았는데, 이곳에 남겠다고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오해하지 마, 계산은 확실히 할 거야. 당신이 내게 상처 준 건 잊지 않았어. 하지만 이 상처는 나 때문에 생긴 거니까.”“하지만...”“진환 씨가 여긴 안전하다고 하지 않았어? 며칠 더 있어도 괜찮지 않나?”도윤은 예상치 못한 호의에 다소 놀랐다.“당연히 괜찮죠. 이런 때에 사모님께서 여기 계시면 저는 오히려 좋죠.”진환은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는 것을 보고 서둘러 자리를 뜨려 했다.“대표님, 작은 도련님과 아가씨는 이미 챙겨드리고 있고 상대도 여지를 남겨 놓았으니 일단 치료부터 하고 처리하시죠. 지금은 푹 쉬세요.”진환이 그렇게 말하며 문을 나서
소지아는 간호사가 약을 바꾸는 방법을 열심히 지켜보았고, 방안에 두 사람만 남겨지게 되자 그제야 이도윤에게 화를 냈다.“여보?”“그렇게 부르지 않으면 끈질기게 조르는 걸 어떡해.”지아는 여전히 쌀쌀맞게 말했다.“이 대표는 스캔들도 많네.”이불을 들추자 붕대로 칭칭 감긴 등이 보였다.도윤이 계속해서 변명을 늘어놨다.“지아야, 그 사람은 딱 한 번 붕대를 갈아줬을 뿐이야. 그것도 어깨 쪽 붕대, 딱 한 번뿐이야.”“우린 이혼한 사이니까 그 사람이 당신한테 무슨 일을 하더라도 아무 상관없는 걸?”지아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면서 붕대를 가위로 잘랐다.“지아야,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 몸에 손을 댈 수 있는 여자는 너뿐이야. 다른 여자는 없어.”도윤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지아는 계속해서 비꼬려고 했으나 붕대 아래 적나라하게 드러난 상처에 말이 막혔다.상처가 심각할 거라 예상했지만 직접 보니 기분이 달랐다.등에 온전한 부위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지아는 가슴이 아파졌다.엎드린 도윤은 지아의 표정을 볼 수가 없었고 지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몰랐다.“지아야, 나와 백채원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이미 이렇게 된 이상 더는 숨길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지아는 일단 상처를 소독하며 이어질 도윤의 말에 기대보다는 두려움을 느꼈다.충동적으로 벌인 일이라거나, 누군가 약을 먹여 조종했다는 말이 나올가 두려웠다.도윤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사실 오래전부터 너한테 진실을 밝히고 싶었어. 하지만 그때의 넌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였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잖아. 내가 어젯밤에 수술대에서 죽어버렸다면 넌 영원히 진실을 알지 못할 거야. 난 더 이상 여한을 남기고 싶지 않아. 지아야, 저번에 내가 너한테 건넨 친자확인서는 가짜가 아니야.”지아의 손이 뚝 멈춰 섰다.“뭐라고?”“처음부터 난 백채원과 아무런 사이가 아니라고 했잖아. 그런데 어떻게 우리 둘 사이에 아이가 있겠어? 지윤은 이미 세상을 떠난 줄 알았던 우리 첫
소지아는 여전히 어리둥절해했고 이도윤이 대답했다.“조금 더 자세하게 말해봐. 전혀 이해가 안 돼.”“전림은 어렸을 때부터 나랑 같이 훈련을 받았고 나랑 생김새가 비슷하니 내 대역 중 하나였어. 우린 생과 사를 함께 할 운명이었으나 그 사람은 절대 사랑해서는 안 될 백채원을 사랑하게 된 거야. 백채원을 임신시키고 나와 함께 나간 현장에서 나 대신 치명타를 입고 말았어. 그리고 죽기 전에 나한테 백채원을 잘 부탁한다고 했지.”“전림의 희생에 나는 백채원의 요구라면 무조건 들어줬어. 그때의 난 소씨 가문과 내 동생 사이를 의심하고 있었고, 두 사건이 얽히게 되었어. 나는 한편으로 소씨 가문에 복수를 하며 임신 중인 백채원을 돌봤어. 그러다 보니 넌 내가 바람을 핀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었고, 난 너의 질문에도 해석할 수가 없었어.”“백채원은 자신의 아이가 아버지가 없는 가정에서 자라게 할 수는 없다며 나한테 가정을 만들어 달라고 빌었어.”지아는 마음이 씁쓸해졌다.“그래서 그렇게 한 거야?”“전림의 목숨으로 바꾼 조건이니 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 그래서 너와 이혼을 제안했었지. 하지만 백채원이 원하는 건 그것뿐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어. 병원이며, 드레스, 블린 시트, 너의 몫은 모두 빼앗으려고 했어.”지아는 그 시절을 떠올리며 가슴 아파했다.“그 사람이 날 바다로 밀어버리려고 했던 것도 알고 있었어?”“두 사람의 성격을 모두 알고 있으니 백채원이 어떤 짓을 벌일지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야. 바다에 빠지고 본능적으로 널 구하려고 했지만, 죽어버린 전림의 얼굴과 유언이 자꾸 떠오르고, 진봉과 진환도 바다로 들어오고 있었으니 그 사람한테로 간 거야.”지아의 눈가가 붉어졌고 애써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그럼 아이는 대체 어떻게 된 건데?”“백채원은 제왕절개로 아이를 낳았고 너는 순산이었으나, 백채원의 한 아이가 죽어버렸어. 지윤은 미숙아였으나 상태가 아주 좋았어. 넌 마취할 수 없어 고통에 몸부림을 치고 있었는데 나라고 마음이 아프지 않았던
이건 기쁨에 흐르는 눈물이었다. 소지아는 기쁨과 감격에 겨워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몰랐으며 머릿속엔 온통 귀여운 아이의 얼굴만 떠올랐다.그럴 줄 알았다면 아이의 옆을 더 많이 지켜줄 걸, 자꾸 후회되었다.“지아야, 울지마. 백 번 천 번 생각해도 모두 내 탓이라는 걸 알아.”지아는 이도윤의 어깨를 내리치며 말했다.“당연히 네 탓이지.”상처를 피했지만, 상처가 당겨졌는지 도윤이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지아는 그동안 계속 지윤이 내 아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환상했었다. 그런데 이제 환상이 아닌 현실이 되었다.너무 갑작스레 찾아온 행복에 그동안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되었다.비 온 뒤 개임이라는 게 이제야 비로소 느껴졌다.“전림의 얼굴을 봐서라도 백채원을 반복해서 용서했지만 백채원은 그칠 줄을 몰랐어. 이제 전림에 대한 빚은 모두 갚았다고 생각해 혼약을 파기한 거야. 앞으로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평생 평온하게 지내게 지원해 주는 것 외에는 없어.”지아는 도윤의 등에 약을 발랐다. 지윤이 살아있다는 소식에 손놀림이 한층 조심스러워졌다.“아이는 지금 어디 있어?”“그 아이는 날 많이 닮았더라고. 누군가 지윤을 해치려고 했던 그날부터 특별 훈련을 시키고 있어.”“그 아이도 네 길을 걷게 하려고?”도윤의 얼굴에 우울한 표정이 스쳤다.“지아야, 우리 이씨 가문이 백 년 동안 꿋꿋이 버티고 있는 건 모두 보이는 게 다가 아니야.”숨겨진 많은 일들은 지아에게 곧이곧대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지금 후퇴하려고 해도 너무 늦어버렸어. 난 계속해서 위로 올라가야만 너랑 우리 아이들을 지킬 수 있어.”지아는 무슨 이유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으나 이씨 가문이 평범한 재벌가가 아님을 눈치챌 수 있었다.“이 길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네가 더 잘 알고 있잖아. 그런데 아이를 그 길을 걷게 한다고?”“지아야, 난 어쩔 수가 없어. 지윤은 재능이 있고, 첫째 아들인 지윤이 다른 가문 도련님처럼 곱게 자라지 못하는 건 운명적인 일인 거야. 그 아이는 이씨 가
소지아의 가발이 다 헝클어졌고 이도윤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그래도 예전 머리가 더 좋아. 부드럽고 향기로웠어.”“짜증나.”지아는 흥-하고 몸을 일으켜 계속해서 도윤 등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았다.도윤이 앞으로 큰 일을 앞두고 있어 자꾸 자신을 떠나보내려는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두 사람은 이혼을 했으니 도윤이 앞으로 어떤 일을 앞두고 있는지 알려줄 의무는 없었다.아이가 살아있다고 해서 도윤이 지아에게 줬던 상처가 없어지는것도 아니었다.다른 사람의 은혜를 갚기 위해 자신에게 상처를 줬던건 지아에게 있어 너무 불공평했다.두 사람도 아이 때문에 사이가 회복되지는 않을것이다. 두 사람이 서로 연락을 주고 받았던것은 모두 부모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였다.도윤을 7일동안 보살핀건, 자신을 살려준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고 할수 있었다.두 사람은 앞으로 각자의 걸을 것이다. 지아도 본인의 길을 찾았다.그후로부터 며칠동안 두 사람은 평화로운 일상을 보냈다. 서로의 등에 칼을 꽂거나 가시 돋힌 말은 하지 않았다.지아는 인내심을 가지고 정성껏 도윤의 식단부터 재활까지 도왔다.도윤이 진봉과 진환에게 어떤 비밀스러운 일을 맡겼는지 며칠 동안 도통 보이지 않았다.그에 반면 미셸은 하루가 멀다하고 찾아왔는데 보는 지아가 더 피곤했다.“도윤 오빠.”미셸은 꼬박꼬박 오빠를 붙여서 도윤을 불렀는데, 그러면 둘 사이가 더 가깝게 느껴지는것 같은 뉘앙스를 풍겼다.“사과 깎아왔으니까 맛 좀 봐.”지아가 잠시 방을 비운 사이 미셸이 틈을 타서 들어와다.도윤이 인상을 찌푸리며 거절했다.“사과는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너나 많이 먹어.”“오빠 위해 일부러 깎은건데?”대체 누구한테서 배운 말버릇인지 미셸은 요즘들어 말꼬리를 올리고 몸도 배배 꼬았다. 그러나 듣는 도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미셸은 여성 평균 키를 넘겼고 골격도 있는 편이었으며 태어나길 피부가 까무잡잡했다.키는 지아와 거의 비슷했는데, 168cm에 60kg의 몸매는 가장 이상적이었지만 지
이도윤은 고개도 들지 않고 소지아가 건네는 과일을 받아먹었다. 지아를 향한 무조건적인 믿음이 있었다.미셸은 그제야 자신이 웃음거리가 된 것을 깨달았다.두 사람은 호흡이 잘 맞았는데, 도윤이 실수로 과즙을 입가에 흘리자, 지아는 빠르게 휴지로 입가를 닦아주었다.과일을 먹고 난 후 지아는 침대 옆에 앉아 한참을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지금 시간 괜찮으면 약을 새로 갈아야 할 것 같아.”“그래.”도윤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지아는 화장실에서 미지근한 온수와 물수건을 챙겨나오며 미셸에게 말했다.“미셸 씨, 지금 약을 다시 갈아야 할 것 같은데요.”“도윤 오빠 약 가는 걸 제가 보면 안 돼요?”미셸은 속에서 천불이 나고 있었다. 자신이 깎은 사과는 나 몰라라 하고, 지아가 깎은 건 잘만 받아먹었으니.지아가 대체 무슨 수로 도윤을 구워삶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내 아내를 제외한 다른 사람이 내 상처를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미셸은 억울해서 외쳤다.“하지만 도윤 오빠! 두 사람은 이미 이혼했잖아요.”도윤은 지아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난 재결합하고 싶지만, 아직 지아가 허락하지 않아 못하고 있는 거야. 아무리 우리가 이혼했더라도 내 마음속 아내는 지아 하나뿐이고.”미셸은 발을 쿵쿵 구르며 병실을 나갔다.하지만 지아는 미셸을 잘 알고 있었다. 아마 내일 아침쯤에는 도시락을 들고 또 쫄래쫄래 찾아올 것이다.미셸은 도윤의 마음을 집요하게 갈구했다.다른 사람이었다면 진작 포기했을지 몰라도 미셸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지아는 문을 닫고 침대 곁으로 다가와 약 몇 가지를 챙긴 채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옷 벗어.”며칠 사이 지아는 약을 가는 과정을 자주 지켜봐 온 탓에 거의 간호사처럼 익숙해졌다.도윤은 꼼짝도 하지 않고 지아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벗겨줘. 움직이면 등이 당겨서 못 하겠어.”‘핑계하고는... 참 뻔하네.’‘아파서 못한다고? 마취도 안 하고 견딘 사람이 고작 이걸 참지 못한다니 말도 안 되지.’‘그래 나 대신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