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그 게시물들을 조사했는데, IP 주소는 전 세계 각기 다른 곳으로 나타났지만, 같은 시간에 발동된 것으로 보면 프로 해커인 것 같습니다.”“일이 일어난 후,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이 지경까지 할 수 있다니, 그 사람 역시 만만치 않은 것 같군.”진환은 안색이 굳어졌다.“대표님은 지금 블랙X의 킬러들을 매수한 주모자를 의심하시는 겁니까?”“음, 수백 억이란 돈을 들여 블랙X 의 100명 킬러들을 출동시킬 수 있고, 또 일이 발생한 후 즉시 해커를 조직하여 여론을 인도할 수 있다니. 권력과 돈이 있는 것 외에 이 사람은 분명히 심술이 궂은 악당일 거야.”도윤은 눈썹을 세게 찌푸렸다.‘이렇게 오랫동안 조사했지만 아무런 정보도 알아내지 못했다니.’상대방은 아주 신중해서 매번 미리 빠져나갈 계획을 세웠는데, 설령 그들이 끝까지 조사한다 하더라도 결국 중요하지 않은 시체를 찾았을 뿐이었다.“사모님은 도대체 어떤 사람의 미움을 샀을까요? 상대방은 분명히 사모님을 사지로 몰아넣으려 하고 있습니다.”“상대는 아마 다음 계획을 준비하고 있을 거야. 가능한 한 빨리 해결책을 찾아야 해.”진환은 한숨을 내쉬었다.“현재 진봉이 범인이란 증거는 없지만, 그때 사건 현장에 나타난 데다 또 살인 동기까지 있어 경찰서에는 잠시 그를 풀어주지 않을 것입니다. 장민호도 지금 구석에 숨었으니 이것은 정말 파국입니다.”“꼭 그렇지는 않아. 일이 주아담 때문에 일어난 이상, 그녀부터 조사해. 도대체 누가 그 여자의 목숨을 원하고 있는지.”“하지만 대표님, 설사 알아냈다 하더라도 상대방이 스스로 뛰쳐나와 자신이 사람을 죽였다고 말하겠어요?”“아니, 하지만 적어도 협상할 여지가 있겠지. 그 사람 손에는 틀림없이 증거가 있을 거야.”도윤이 이렇게 말하자, 진환은 즉시 신심이 생겼다.“알겠습니다. 지금 사람들로 하여금 조사에 착수하라고 하겠습니다. 최근 주아담 씨는 몇 명의 남자에게 접근했는데, 그들을 조사하면 틀림없이 무언가를 알아낼 것입니다.”“음.”도윤은 피곤
도윤은 싸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지금 내가 아주 중요한 일로 가봐야 해서, 무슨 문제 있으면 내 비서와 얘기하지.”도윤이 막 떠나려 하자 연광준은 즉시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죄송하지만, 살인사건 외에 또 YH 그룹에 탈세 등의 문제가 있다고 신고가 들어와서요. 저희와 같이 가시죠.”이 시점에서 누군가 일부러 이런 일을 꾸며 도윤을 붙잡고 있었고, 도윤의 평온한 얼굴에 짜증이 드러났다.“무슨 일이든 내 변호사와 비서에게 말할 수 있으니 비켜.”연광준은 아예 수갑을 꺼냈다.“이 대표님, 계속 이렇게 나온다면 저희도 강경한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어요. 이쪽은 카메라로 기록을 하고 있으니, 규정에 따라 저희를 협조했으면 좋겠는데.”“꺼지라고!”도윤은 손을 들어 연광준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려 했고 연광준은 마치 그가 화내길 기다리는 것처럼 피하지 않았다. 이때 진환은 재빨리 앞으로 가서 도윤을 막더니 그에게 눈짓을 했다.“대표님, 이 사람들도 규정에 따라 일을 처리하고 있으니 먼저 가보세요. 다른 일은 저에게 맡기시고요.”이 다사다난한 시점에 어떻게 이렇게 공교롭게도 경찰이 탈세의 문제로 찾아올 수 있겠는가? 이 일을 더욱 크게 벌이기 위해서 누군가가 일부러 암암리에 조종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도윤은 지아에 관한 일에 이성을 잃기 쉬웠으니, 만약 지금 또 경찰을 습격한 죄명이 더 많아진다면 일은 더욱 까다로워질 것이다.도윤도 냉정을 회복했다. 그는 지금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그래, 그럼 너에게 맡기겠어.”“안심하십시오.”진환이 대답을 마치자 연광준은 또 진환을 가로막았다.“미안하지만, 진 비서도 우리와 함께 가줘야 할 거 같아. 세금 문제 외에 당신이 회사 장부를 위조했다는 신고가 들어왔거든.”도윤은 눈을 부릅뜨더니 더는 자신의 차가운 기운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는 연광준의 멱살을 잡으며 말했다.“내가 당신을 알아보지 못한 거 같아? 연 형사, 지금 내 앞에서 위세 부릴 생각하지도 마!”눈빛이 마주치자, 상황은 일
분명히 본 적이 없는 아이였지만, 그 울음소리를 듣자, 지아는 가슴이 아팠다.그녀는 묵묵히 건장한 남자 곁으로 가서 입을 열었다.“도와줄까요?”이 말이 나오자, 착각인지, 지아는 남자의 몸이 굳어진 것을 분명히 느꼈다.남자는 지아를 등지고 있었고 또 마스크를 쓰고 있었기에 표정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그녀는 즉시 설명했다.“오해하지 마요. 난 그냥 혼자 두 아이를 데리고 있는 당신이 불편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요.”남자는 여전히 침묵하며 말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유모차 안의 아이가 더욱 슬프게 울었다.지아의 시선은 그 아이에게 떨어졌다.하얀 유모차에서 핑크색 커버롤을 입은 어린 여자아이가 울고 있었는데, 심하게 울어서 얼굴까지 쭈글쭈글해졌고, 뽀얀 작은 얼굴에는 억울한 기색이 가득했다.지아는 얼른 아이를 안았지만 남자는 막지 않았다.“아가야, 배고픈 거야? 울지 마.”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마력이라도 있는 듯, 방금까지 소란을 피우던 아이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너무 오래 울어서인지, 아이는 지아의 품에 안겨 흐느끼며 울고 있었다.지아는 그제야 아이의 얼굴을 똑똑히 보았는데, 아이는 이목구비가 아주 정교할 뿐만 아니라 특히 그 한 쌍의 눈은 포도처럼 크고 동그랬다.그리고 길고 촘촘한 긴 속눈썹에는 맑은 눈물 몇 방울까지 맺혀 있었다.‘정말 너무 예쁘게 생겼네, 천사 같아.’그런데 지아는 갈수록 이 아이가 좀 낯이 익다고 생각했다.그 아이도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웃기 시작했고, 왼쪽 볼에는 아주 작은 보조개가 있었는데, 얼굴이 통통하기 때문에 그리 뚜렷하지 않았다.지아는 정신을 차리더니 얼른 사과했다.“미안해요, 방금 마음이 좀 급해서 아이를 안은 거예요. 이제 울음을 멈췄어요.”옆에 있던 남자는 지아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날 잊어버린 건가?”남자의 목소리는 나지막하면서도 약간 잠겼다.그의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지아는 심지어 자신이 착각하고 있다고 느꼈다.그녀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고 이
이 남자는 지아를 알고 있었지만, 옷차림을 보면 또 자신의 정체를 애써 숨기려는 듯 했다. 그리고 몸에서 풍기는 기운도 일반인 같지가 않았고 무척 위험해 보였다.그러나 이런 괴이한 남자가 품에 두 아기를 안고 있어 오히려 사람들에게 반전매력을 주었다.‘유괴범이라 하기엔 좀 그런데. 유괴한 아이들에게 이렇게 많은 옷을 사주는 유괴범이 정말 있을까?’지아는 눈을 들어 그 가격들을 바라보았다. 평범한 옷 한 벌이라도 가격이 수십만 원 했는데, 그 안에는 심지어 기저귀와 분유까지 가득 들어있었다.그가 산 물건들은 적어도 몇백만 원 정도 했으니 이런 통이 큰 유괴범이 정말 있을까?아이들은 여전히 울고 있었지만 남자는 조금도 짜증을 내지 않았고 심지어 주머니에서 작은 젖꼭지 두 개를 꺼냈다.젖꼭지는 무균 봉투에 밀봉되어 있었고, 외출하기 전에 남자는 이미 소독을 했던 것이었다. 작은 젖꼭지를 아이들의 입에 넣자, 울음소리는 마침내 그쳤다.지아는 두 아이가 각각 남자의 어깨에 엎드려 있는 것을 보았는데, 통통한 얼굴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이 어려 있었다.동그란 큰 눈은 지아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코끝이 빨간 게 깜찍하고 귀여운 작은 두 고양이와 같았다.지아는 좀 이상하다고 느꼈다. 이렇게 안을 수 있는 아기는 보통 3개월 정도인데, 그녀가 방금 안은 그 아이는 매우 가벼웠고, 마치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사모님, 무엇을 보고 있는 거예요?” 아주머니는 허허 웃으며 작은 옷 몇 벌을 들고 지아 곁으로 걸어갔다.“아주머니, 그 남자가 안고 있는 아이가 몇 개월인 것 같아?”남자는 아이를 안고 곧 엘리베이터까지 걸어갔는데, 아주머니는 힐끗 쳐다본 다음 대답했다.“제 손자와 비슷한 것 같은데. 제 손자는 태어난 지 1개월도 되지 않아 몸이 말랑말랑하고 머리도 들지 못했으니 저렇게 안으면 안 되거든요.”아주머니는 지아의 생각과 똑같았고, 잠시 후 또 한마디 덧붙였다.“하지만 다른 가능성이 있을 수 있죠. 사모님, 그것은 한 쌍의 쌍둥
아주머니는 그저 주방에서 일하는 가정주부였기에 인터넷에서 벌어진 그 사건들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지아도 오직 진봉이 억울하게 구속됐다는 것만 알고 있었을 뿐, 현재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 전혀 몰랐다.그러던 중, 누군가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지아는 영문 모른 채 그 사람들을 바라보았고, 두 사람 모두 무슨 상황인지 알지 못했다.순간, 모든 사람들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고, 지아는 그제야 그들이 들고 있는 현수막을 보았다. 그리고 물통을 들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안에는 알록달록한 페인트와 같은 액체가 들어있었다.지아를 발견하자마자, 그들은 마치 좀비처럼 지아를 에워쌌다. 경호원들은 얼른 나서서 그들을 막았고, 아주머니도 따라서 다급하게 말했다. “사모님, 어서 떠나세요.”“못된 재벌들, 당신들도 다 죽어버려.”뒤에서 분노에 찬 목소리가 울리자, 지아는 바로 고개를 돌렸고, 그 사람이 무언가를 자신에게 끼얹는 것을 보았다.“조심하세요, 사모님.” 아주머니는 재빨리 지아를 뒤에 감쌌다.그러나 지아의 반응속도도 아주 빨랐는데, 그녀는 한손으로 아주머니를 밀어낸 다음, 다른 한손으로는 가방을 들어 일부 튀어나온 액체를 막았다.아주머니는 그녀에게 밀려 땅에 넘어졌지만 아픔을 느낄 겨를도 없이 지아가 다친 것을 보았다.지아는 최선을 다해 막았지만 손등에는 여전히 몇 방울 액체가 떨어졌고 순간 강하고 따끔거리는 통증이 손등에서 전해왔다.“황산이야!”“세상에, 사모님, 괜찮으세요!”아주머니는 이미 놀라서 정신이 없었다. 황산을 뿌린 사람은 미처 떠나지 않았지만, 옆에 또 누군가 칼을 들고 지아를 향해 달려들었다.경호원들은 지아를 위해 다른 소란을 피우는 사람들을 막고 있었는데, 어떻게 보면 그 사람들은 마치 계획적으로 경호원들을 방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그 사람은 동작이 번개처럼 빨랐고, 날카로운 칼은 지아의 심장을 찌르기 직전이었다.‘이 사람은 일반인이 아니라 훈련을 받은 프로 킬러야.’머릿속으로 이 생각이 스친 순간,
방금의 일은 정말 너무 위험하고 아슬아슬해서 경찰은 재빨리 현장에 도착했다. 전에 소란을 일으키던 팬들도 모두 겁에 질린 채 전부 끌려갔다.지아는 반드시 빨리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했기에 그들과 함께 경찰서에 가지 않았다.다행히 상처의 면적이 크지 않은 데다가 지아가 제때에 응급처치를 했기 때문에 큰 문제를 초래하지 않았다.병원은 그녀에게 진일보한 치료를 해주었고, 아주머니는 그제야 마음이 놓이며 한숨을 돌렸다.“사모님, 이번에 아주 빨리 반응을 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그렇지 않았다면 큰일 났을 거예요.”지아는 아주머니의 어깨를 두드렸다.“괜찮아, 나도 지금 별일 없잖아? 아주머니도 참, 그때 얼마나 위험했는데 어떻게 앞으로 나설 수가 있어? 만약 그렇게 많은 황산에 맞았다면, 상상조차 못 할 거 같아.”이 얘기를 꺼내자 아주머니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 나쁜 자식이 황산을 뿌릴 줄 누가 알았겠어요? 저는 기껏해야 물감이나 페인트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심장이 다 떨리네요.”“이 사람들은 미리 준비를 하고 왔으니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악독해. 오늘 많이 놀랐지?”“사모님, 제발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원래 이것도 다 제 잘못인데…….”“다 지나간 일이니 우리도 이제 집에 돌아가자. 오늘 저녁에 맛있는 것 좀 만들어 줘. 운동을 했더니 배가 다 고프네.”지아는 농담을 하며 말했다.“네.” 아주머니도 몰래 눈물을 닦았다.설령 반평생을 살았다 하더라도, 방금 그 일을 생각하면 그녀는 여전히 등골이 오싹했다.오늘 이 일에 자그마한 착오라도 생기면, 지아의 인생은 완전히 망한 거나 다름없었다.병원을 나서자, 차갑고 살을 에는 듯한 찬바람이 사방으로 몰아쳤고, 지아는 정신이 좀 들었다.이때, 누군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더니 지아를 품에 와락 안았다.그리고 머리 위에서 도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지아야, 괜찮아?”이렇게 도윤에게 꼭 안기자 지아는 숨을 쉴 수 없을 것만 같았다.남자의 심장이 빠르게 뛰고 또 몸까지 가볍
도윤은 놀란 지아를 태우며 집으로 돌아갔고, 지아는 백화점에서 발생한 일을 떠올리더니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도윤아, 나 오늘 한 남자를 만났는데…….”도윤은 매우 바빴는데, 가는 길 내내 전화가 끊어지지 않았다. 이때 전화벨 소리가 재차 울리면서 지아가 하려던 말을 끊었다.“응, 금방 갈게.”도윤은 전화를 끊은 다음 지아를 보았다.“지아야, 방금 무슨 말을 하려고 했어? 백화점에서 뭐?”지아는 한숨을 쉬었다.“중요한 일 아니니까 먼저 가서 일 처리해. 일찍 돌아오고.”“알았어.”도윤은 가볍게 지아의 머리를 어루만진 다음 몸을 돌려 떠났다.그리고 지아는 그 수상한 사람에 대해 생각했다. ‘정말 나쁜 사람이 아니더라도 중요한 사람은 아니겠지?’그녀는 단지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앞으로 어떻게 될지에 대해 걱정하고 있을 뿐이었다.도윤은 뒷좌석에 기대어 앉았는데, 음침한 날씨에 그의 표정도 많이 음침해 보였다.진봉과 진환 두 사람은 아직 경찰서에 있는 데다, 지아가 또 이런 일을 당했으니 그의 심정은 정말 너무나도 좋지 않았다.그리고 그는 줄곧 여론의 방향을 주시하고 있었다.“대표님, 일이 이렇게까지 커졌는데, 왜 아직도 해명하시지 않는 겁니까?”도윤은 손가락으로 한 번 또 한 번 반지를 매만지며 말했다.“그럴 필요 없으니까. 증거가 없는 한, 아무도 믿지 않을 거야. 하물며…….”도윤은 잠시 멈칫했고, 염경훈은 백미러를 통해 도윤의 그 냉혹하기 그지없는 얼굴에 살기가 가득 차 있는 것을 보았다.“나도 누가 뒤에서 이런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 궁금하거든. 소란 피우라고 그래, 그동안 많이 참고 살았던 거 같던데.”도윤은 말하지 않았지만 염경훈은 왠지 모르게 그가 마음속으로 다른 속셈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이 앞이 바로 써니웨이 장원입니다.”도윤은 작은 소리로 콧방귀를 뀌었다.도윤은 이미 주아담 사건의 배후를 조사해냈는데, 뜻밖에도 그가 아는 사람이었다.써니웨이는 해변에 있는 장원이었고, 20세기에 남겨진 건
연지은은 천천히 일어났고, 도윤은 그제야 그 긴 양털 외투에 감춰진 그녀의 다리가 의족인 것을 발견하였다.“네 다리가…….”도윤은 확실히 놀라움을 느꼈다.연지은은 붉은색 립스틱을 바른 입술로 미소를 지었다.“이상해요? 날 버리고 떠났을 때, 당신은 이런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단 것을 알았을 텐데.”도윤은 그녀의 말에 심기가 불편했지만 바로잡기가 귀찮아서 그저 냉담하게 말했다.“말해봐, 무엇을 원하는 거지?”연지은은 자신의 다리를 본 뒤에도 도윤이 이렇게 차가울 줄은 몰랐고, 언뜻 불쾌감을 드러냈다.그녀는 마음속의 불만을 억누르고 더욱 환하게 웃었다.“난 대표님한테 돈이 부족하지 않다는 거 잘 알고 있으니 돈과 같은 물질 따윈 원하지 않아요. 난 그저 대표님이 나와 하룻밤을 보냈으면 하는데.”사진을 들던 도윤은 멈칫하더니 순간 자기가 잘못 들었다고 느꼈다.“뭐라고?”그러나 연지은은 난감하기는커녕 오히려 눈빛에 광기가 돌더니 갑자기 몸을 숙여 뒤에서 도윤을 안았다.도윤은 미간을 찌푸리며 연지은을 밀어냈다.그녀의 다리는 원래 문제가 있었으니 이렇게 밀리자 똑바로 서지도 못하고 바로 땅에 넘어졌다.“도윤 오빠, 어쩜 예전과 다름없이 이렇게 매정한 거죠?” 연지은은 눈물을 글썽였다.도윤은 의자를 밀고 일어났고,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다.“너도 여전히 착각을 하고 있군. 연지은, 5년 전에 말했지, 난 너를 좋아하지 않는다고.”연지은은 씁쓸하게 웃었다.“그때 가난한 날 도운 이유가 나의 이 얼굴 때문이죠?”도윤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응, 지아와 꽤 닮았거든. 특히 옆모습.”이 진실은 너무 잔혹했고, 연지은이 줄곧 품은 환상을 단번에 깨뜨렸다.10년전, 도윤은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지만 성적이 우수한 연지은을 지원했다. 그녀는 온갖 고생 끝에 그 작은 시골을 벗어나 A시로 와서 자신이 줄곧 그리워하던 은인을 만났다.그 당시 도윤은 비록 성격이 냉담했지만 물질적으로는 그녀를 가혹하게 대하지 않았다. 심지어 연지은이 학교에서
시하와 시언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모두 완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는데, 도무지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 없는 듯했다. 심지어 소시월조차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이걸... 오빠들은 알고 있었어?” 두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아니,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어.” 소시월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내 계획이 성공하려던 찰나에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어. 절대 다른 사람이 내 계획을 망치게 둘 순 없어!’“단지 사진 한 장으로 뭘 증명한다는 거죠? 아빠와 할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고, 아빠는 비행기 사고로 시신조차 찾지 못했어요. 두 사람의 친자확인도 없이, 대체 무슨 증거를 내놓겠다는 거냐고요!” “이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했던 혈액형 검사야. 두 분은 모두 O형이야. 즉, 두 분은 O형의 자녀만 낳을 수 있다는 뜻이지. 하지만 당신들 아버지는 B형이었어. 혈액형에 돌연변이가 생길 확률이 아주 적다는 건 알고 있겠지? 과연 당신들 아버지가 그 예외일까?” 소지훈은 다시 다른 사진을 꺼냈다.“혈액형 이야기는 우선 접어두자고.”“이건 할아버지의 여러 아들들 사진이야. 우리 아버지와 삼촌, 작은삼촌은 할아버지와 60% 이상 닮았지만, 네 아버지는 전혀 닮은 점이 없어!” 지아는 소임호의 실물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대형 스크린에 비춰진 소임호의 얼굴을 보자, 그녀는 그 자리에 멍하니 굳어버렸다. 지아는 이성을 잃고 도윤의 손을 꽉 잡았다.“저 사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아?” “많이 본 정도가 아니라, 완전 똑같아!” 두 사람의 대화는 오직 서로만 이해할 수 있었다. 소임호가 부남진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부남진은 나이가 들어 얼굴이 많이 변했지만, 가까운 사람들은 그가 젊었을 때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소임호는 분명히 부남진의 젊은 시절을 그대로 닮은 모습이었다. “설마...”지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자신이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진실이 이렇게 갑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시언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분노를 참지 못했는데, 그의 손이 여전히 멀쩡했다면, 지금쯤 소지훈의 뺨을 때렸을 것이었다. 시월과 심장후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지아는 도윤을 바라보며 물었다.“이게 어떻게 된 거지? 저 사람이 한 말이 사실이야?” 도윤은 고개를 숙이고 지아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방금 들은 소식인데, 이 사진 속 사람을 한 번 봐봐.” 도윤은 핸드폰 속 사진을 열어 서른쯤의 매혹적인 여성을 지아에게 보여주었다. 지아는 그녀의 눈가에 있는 검은 점을 보자마자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우리 할머니잖아!” 흑백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환희의 모습이 컬러로, 게다가 훨씬 선명한 화질로 나타난 것이었다. “맞아.”지아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혹시 할머니의 행방을 알아낸 거야?” 도윤이 논쟁으로 가득 찬 현장을 보며 말했다.“아마 저 사람들이 답을 줄지도 몰라.” 소지훈의 폭로는 현장을 술렁이게 했다.“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지훈 도련님께서 파문을 일으킬 만한 거짓말을 할 리가 없잖아요?” “당연하죠, 아무리 무례한 사람이라도 이런 자리에서 저런 말을 할 순 없으니까요!” “어머, 정말 흥미진진한데요?”시월은 마음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오빠, 시언 오빠와 오해가 있는 건 알지만, 그런 거짓말은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늘은 할아버지를 배웅해 드리는 날인데,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고요.” “할아버지? 허, 네가 무슨 자격으로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거야?” “오빠, 적당히 좀 하세요!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웃기지도 않는다고요!” “웃기는 건 너희 같은 잡종들이지!”소지훈이 손뼉을 치며 준비된 프로젝터를 가리켰다.“여러분, 죄송합니다만, 이 자리에서 모든 이야기를 공개하고, 소씨 가문의 족보를 깨끗이 해야 할 것 같습니다.”“죽어서도 소씨 가문에 매달리려는 사람이 없도록 말이죠!” “도대체 숨
밤이 깊어지자, Z국에서 전통적인 가족 고별 의식이 시작되었다.지아는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 섞여 소씨 가문의 방대한 자손들과 그들의 복잡한 계보를 바라보았다. 소영수의 직계 자손들 외에도 그의 둘째 동생과 셋째 동생 등의 곁가지 후손들까지 합쳐져, 효성과 의리를 다하는 자식들과 손주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고별 의식은 곧 시작될 예정이었다.첫 번째로 향을 올리는 순서는 원래 장남의 몫이었지만, 장남이 사고를 당하면서 그 역할은 둘째에게 넘어갔다. 다른 자손들도 각자 자신의 향을 챙기러 움직였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시언과 시하를 대신해 시월이 나서서 향을 가지러 갔다. 하지만 소시월이 향에 손을 대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냉랭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소지훈이었다.“오늘은 가족을 위한 작별의 자리야. 미안하지만, 너는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시언이 즉각 반응했다.“소지훈, 적당히 좀 하지 그래? 여긴 할아버지의 영정이 모셔진 자리야. 할아버지께서 편히 눈감지도 못하게 할 작정이야?” ‘예전의 작은 다툼은 다 넘어갈 수 있어. 하지만 오늘처럼 외부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서 저렇게 무례한 말을 하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 시하는 상대적으로 차분해 보였지만, 그는 이 상황이 단순하지 않음을 직감했다. ‘연예계에서 단련된 소지훈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저런 말을 했을 리 없어. 뭔가 계획이 있는 게 분명해.’ 시하가 둘째 삼촌인 소상현을 바라보았다. 소상현은 아들의 죽음으로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소명담의 시신이 발굴되었을 때, 소상현은 자기 친아들이 이토록 오래전에 죽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백발의 노인이 흑발의 자식을 보내는 고통은 이루 형용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소상현은 소지훈의 말을 듣고도 아무 말 없이 공허한 눈빛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입을 연 사람은 소상현의 부인인 오연희였다.“시언아, 너무 흥분하는 거 아니니
지아는 물 한 잔을 건네며 시언에게 진정하라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는데,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스파이가 누구라는 거예요?” “방금 떠난 사람은 소지훈이에요. 지금은 연예계에서 활동 중인 사람인데, 우리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이고, 얼마 전에 죽은 소명담의 동생이기도 하죠.” “그동안 큰형이 다른 사람을 의심하지 않았던 건, 우리가 모두 한 핏줄이고, 소씨 가문의 번영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가족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에요.”“누가 감히 가족이 자기 가문을 망가뜨리려 한다고 생각했겠어요?”“그런데 이젠 확실히 알겠어요. 저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한테 원한을 품고 있었던 거라고요.” 지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어르신은 왜 편애하셨던 걸까요?” “원래 황제는 장남을 사랑하는 법이잖아요. 우리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첫 번째 아이여서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각별히 아끼셨어요. 어쩌면 과도한 애정을 쏟는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요.” “그래서 손자들인 저와 형제들에게도 각별히 대해주셨어요. 사촌들과 다툴 때마다 늘 우리 편을 드셨으니까요. 하지만 그 작은 편애가 쌓여 그 사람들의 원한이 된 거예요.” 지아가 시언의 얼굴에서 깊은 슬픔을 읽으며 말했다.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사연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제 생각에는 저 사람이 소씨 가문을 해치려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왜죠?”“세상에 자기 이마에 나쁜 사람이라는 글자를 써 붙이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게다가 상대는 10년, 20년을 준비했잖아요. 저 사람보다 더 차분하고 계획적인 사람일 거예요. 소지훈 씨 같은 사람이 그런 일을 꾸몄을 리 없어요.” “그 말도 일리가 있네요. 그럼...”지아의 표정은 여전히 깊은 뜻을 품고 있었다.“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이미 체스판 위의 말이 된 거예요. 판은 이미 시작되었고요.” 지아의 위로에 시언의 감정도 점차 안정되었다. “대체 우리 큰형과 무슨 계획을 꾸미는 겁니까?” “아무것도 하지
시언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인 소지훈이 서 있었다.몇 년 사이, 예전의 어린 철부지는 이제 연예계에서 가장 뜨거운 스타로 떠올라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과거 얽힌 사연도 적지 않았다. 어린 시절, 시언은 1년의 세월을 들여 목각으로 ‘행려풍속도’를 복원했다. 하지만 문제가 일어난 것은 방대한 작업을 간신히 완성했을 무렵이었다. 그것은 바로 시언보다 열 살이나 어린 소지훈이 고용인이 없는 틈을 타 정신없이 놀다가 실수로 작품을 망가뜨린 것.이는 대회 출품을 목표로 하던 시언에게 큰 충격이었고, 그는 동생을 가차 없이 혼내며 매질하고 말았다.두 사람 모두 소영수 내외의 후손들이지만, 둘째 집과 셋째 집은 어릴 적부터 소영수가 장남을 더 편애한다고 여겨왔다. 그래서 그들의 자식들까지도 소영수에 눈에 들지 못하고, 늘 냉대를 받으며 자랐다. 가문의 중심인 소영수는 이 일에 분노하며 소지훈의 손바닥을 피가 날 정도로 때린 뒤, 그를 사당에 무릎 꿇게 하며 삼 일 밤낮으로 벌을 주었다. 이 사건은 어린 소지훈의 마음에 깊은 원망의 씨앗을 심었다. 이후 시언이 이성을 되찾고 사과했지만, 소지훈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가문의 둘째와 셋째는 사이가 좋았지만, 유독 첫째인 소임호와는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불운한 이는 넷째였다. 그는 심예지와 청소년기를 함께 보냈지만 버림받았고, 그로 인해 사랑에 상처받아 결혼하지 않고 홀로 지내며 자손마저 두지 못했다. 시언이 소지훈의 눈에 담긴 냉소를 보며 말했다.“할아버지께서 생전에 똑똑히 말씀하셨을 텐데? 소씨 가문은 흥망을 같이해야 한다고. 소씨 가문이 이렇게 어려움에 부닥친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니?” 소지훈은 고개를 숙이고 시언의 옷깃을 잡았다.“그거 알아요? 나는 당신 집안이 너무 싫어요. 항상 체면을 차리려는 모습은 역겨울 정도라고요.”“허, 할아버지한테 대체 무슨 마법을 걸었길래 당신들만 그렇게 아낀 거예요? 우리도 분명 소씨 가문 사람이었는데... 지금이라
도윤은 음윤한 심장후에 비해 훨씬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을 자랑해서, 두 사람이 함께 서 있을 때는 대비가 확연했다.한 사람은 강인하고 압도적인 기운을 풍기고, 다른 한 사람은 부드럽고 우아한 매력을 가진 극과 극의 존재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도윤은 시선으로 심장후를 가볍게 스치고 난 뒤,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대신했다. “형님, 제 약혼녀인 소시월입니다.”심장후가 소개했다.“반갑습니다.”도윤의 시선이 닿는 소시월의 얼굴에는 지아와 약간 닮은 점이 있었다. 그 순간, 시월의 눈동자에 긴장이 스쳤고, 그녀는 급히 입을 열었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그렇습니까? 저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들으신 거죠?”도윤의 질문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했지만, 그 속에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 특유의 위엄과 탐색이 깃들어 있었다. 게다가 도윤은 소시월보다 훨씬 키가 컸기에,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빛에서 압도적인 아우라가 느껴졌다.소시월은 마음을 다잡고 답했다.“이 대표님께서 비즈니스계에서 쌓으신 명성은 제가 Z국에 있을 때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이번 기회를 통해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비즈니스에 있어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이제 한 가족이 될 텐데, 앞으로도 많은 지도와 조언 부탁드리겠습니다.” 소시월의 답변은 빈틈이 없었고, 흠잡을 곳도 없었다.“좋습니다.”도윤은 시선을 돌리고 심규철과 함께 다른 친척들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소시월은 극도로 긴장했던 마음을 그제야 풀었지만, 찰나의 눈 맞춤에도 온몸에서 땀이 배어 나오는 듯했다. ‘눈빛이 정말 무서웠어. 한 번이라도 나를 더 쳐다봤다면 숨통이 막혔을 것 같다니까?’‘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차갑고 카리스마 넘쳤어.’“괜찮아?”심장후가 소시월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물었다. 소시월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괜찮아, 손님들이 또 많이 온 것 같던데, 나 먼저 가볼게.”“너무 무리하지는 마.” 소영수는 장례식은
지아는 처음부터 심씨 가문의 두 삼촌 얼굴이 어디서 본 듯 낯익다고 느꼈다. 그런데 심규철이 나타난 순간,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한대경이 심규철과 아주 닮았기 때문이었는데, 심지어 다른 두 삼촌의 얼굴에서도 미세하게 비슷한 인상을 느낄 수 있었다.“왜?”“저, 저분... 자녀가 몇 명 있어요?” “한 명뿐이야. 월이랑 약혼했다던 장후, 너도 어제 봤잖아.”“아, 네...”‘세상에는 닮은 사람이 정말 많구나. 소시월도 나랑 닮았지만 혈연관계는 아니잖아.’ 하지만 지아는 왠지 불안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한대경 역시 어릴 때부터 C국의 빈민가에 버려졌고, 친부모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더욱 의심이 들었다. “심장후 씨가 아버지를 닮지 않은 건, 어머니를 닮았기 때문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분은 오래전에 돌아가셔서 나도 기억이 거의 없어.”“그나저나 참 한결같은 분이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재혼하지 않으셨으니까.지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묻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더욱 복잡해졌다.반면, 도윤은 심씨 가문과의 재회에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지아는 도윤의 마음을 몇 번이고 헤아릴 수 있었다. ‘가족의 울타리가 그리웠을 거야.’심예지는 눈물을 닦으며 도윤의 손을 잡아 앞으로 이끌었다.“네 셋째 삼촌이셔.” 도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삼촌, 안녕하세요.”강춘옥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이제라도 돌아와서 다행이구나. 이젠 여기가 네 집이니 다 잊고 살으렴.”“그리고 오늘은 소씨 가문 어르신의 장례식이니 더는 지난 이야기를 하지 말자꾸나.”“네, 엄마.”심예지가 나지막이 대답하자 강춘옥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흐느끼듯 대답했다. “그래...”강춘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도윤아, 방금 와서 피곤할 텐데 뒤뜰에서 잠시 쉬고 오너라.”“괜찮습니다. 소씨 가문과 심씨 가문은 원래 인연이 깊었으니, 소씨 가
도윤은 향을 올리고 나서 조용히 심예지의 곁을 지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심씨 가문 사람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심예지가 여기에 나타난 것을 보고 지아보다 더 놀란 듯했다. 특히 강춘옥이 오랜만에 눈앞에 나타난 딸을 보고 휘청거리며 다가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망할 X, 네가 여긴 왜 와?!”심예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어머니의 그늘진 얼굴을 마주했고, 세월이 자신의 어머니를 노쇠하게 만든 것에 마음이 아렸다.그 순간, 심예지는 자신이 허망한 세월을 보내며 부모 곁에서 효도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정말 어리석었구나.’“엄마...”“나를 엄마라고 부르지도 마. 나는 너 같은 딸은 낳은 적 없으니까!” “그만하세요, 엄마. 예지가 지금이라도 돌아왔는데 아직도 화가 나세요?”심예지의 큰오빠가 서둘러 중재에 나섰다.“맞아요, 이제 그만하세요. 예지도 아주 힘들었을 거예요.”둘째 오빠도 거들며 말했다.“그리고... 네가 도윤이니? A국에서 네 소식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구나. 나를 삼촌이라고 부르면 된단다.”소씨 가문의 장례식었지만, 어느새 심씨 가문의 화해의 장처럼 분위기가 흘러갔다. “작은삼촌, 큰삼촌, 안녕하십니까.”도윤은 비록 말수가 적었지만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두 사람은 도윤이 마음에 드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참 착하구나. 돌아와 줘서 고맙다. 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서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몰라. 네 어머니와의 일 때문에 나도 별수 없었다만, 이렇게 돌아왔으니 된 거야.” 강춘옥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말했다.“흥, 난 저런 불효녀를 절대 용서할 생각이 없어!” “네 외할머니는 마음이 약하신 분이야. 괜찮으니까 이제 ‘외할머니’라고 부르면 돼.”도윤은 어릴 때부터 사랑이 부족한 환경에서 자란 탓에 혈육의 정을 갈망해 왔다. 게다가 도윤은 심씨 가문과 많은 인연이 없었지만, 심씨 가문이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자기 어머니에게 상처받아서 이런
지아는 처음에 그저 시하의 다리 치료를 위해 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소씨 가문은 정말 끝장나겠구나!’지아의 손끝에 살짝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무무가 조심스레 지아의 손끝을 꼭 잡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엄마는 괜찮아.” 하지만 세상은 무심했다.소영수가 생전 Z국의 거물로 이름을 날린 만큼, 그의 장례식은 당연히 떠들썩했다. 불과 하루 밤낮 사이에 수많은 조문객이 줄을 이었으니 말이다.지아는 시하의 휠체어 옆에 서 있었다. 평범한 얼굴 덕분에 모두 지아를 그저 시하를 돌보는 고용인쯤으로 생각했다.소영수는 Z국에서 이름난 인물들이었기에,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 중에는 거물급 인사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지아는 이곳에서 도윤과 심예지를 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도윤은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고 서 있었는데, 넥타이조차도 깊은 먹색이었다. 그의 옆에는 검은 우산 모양의 드레스와 반쯤 가린 진주 베일을 쓴 심예지가 함께였다.두 사람이 등장하자마자, 장내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을 향했다. “저 여자가 바로 심씨 가문의 못난 딸이라지? 들었어? 어릴 적 소꿉친구를 마다하고 기어코 이씨 가문에 시집갔다더라? 근데 남편은 저 여자를 눈곱만큼도 사랑하지 않았대.” “남자는 원래 그렇잖아. 아무리 여자의 집안이 좋아도, 밖의 여우 같은 여자가 더 끌리는 법이니까. 그나저나, 심예지도 참 멍청하다. 자기 집안에 걸맞은 남자를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왜 한 남자한테만 매달린 걸까?” “그러니까! 자살 소동까지 벌였을 때, 심씨 가문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렇게 이혼시키려 했는데, 끝까지 버티면서 이씨 가문에 남겠다고 했대. 그 일로 심씨 가문과도 등을 졌으니, 남은 게 없잖아! 딱히 잘난 것도 없는데 말이지.” “누가 아니래? 시댁에선 좋은 대접을 받지도 못하고, 친정과도 연락을 끊었잖아. 바보라고 해야 할지, 순애보라고 해야 할지... 그런데 이제야 돌아왔네? 철이 든 건가? 늦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