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이 내리던 날, 지아는 외출을 했다.지아는 잔혹한 훈련으로 위암이 심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임신한 후부터 그녀는 거의 속이 쓰린 적이 없었다.‘위의 상황이 어떤지 모르지만 확실한 건 종양이 더 이상 확산되지 않고 안정됐다는 거야.’지아에게 있어 이것이 가장 좋은 결과였다.그녀는 거의 일 년 동안 쇼핑을 제대로 하며 인생의 즐거움을 느껴보지 못했다.현재 가장 핫한 상업중심에 서서, 지아는 멀리서 오피스룩을 입은 한 여성이 하이힐을 신은 채 양모 외투를 입고 바삐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그녀는 광고판 아래에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귓가에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민아야.”민아가 즉시 뒤돌아보았는데, 지아는 검은색 양모 외투를 입은 채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그녀의 머리카락은 많이 길어졌고, 머리 뒤로 감았는데, 귀에는 간단한 귀걸이를 하고 있었다.‘뭐랄까, 예쁘긴 여전히 예쁘네.’예전의 지아는 해바라기 같았는데, 후에는 매그놀리아 같았고, 지금은 오히려 도도하여 흑장미와 같았다.아무튼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카리스마가 있었다.민아는 지아가 숨어서 아이를 낳았다는 것만 알고 있었고 뒤로는 줄곧 연락하지 않았다.이때 갑자기 지아를 보니, 민아는 기쁨을 느끼며 하이힐을 신은 채 얼른 지아를 향해 달려갔다.“너 드디어 내가 생각이 난 거지? 내가 널 얼마나 보고싶었는지 알아? 난 네 위치를 폭로할까 봐 감히 너한테 연락도 하지 못했는데. 그리고 아이도 보지 못했는데.”민아는 지아가 그동안 어떻게 지내왔는지 몰랐기에 그녀를 에워싸고 한 바퀴 돌았다.“더 활기차게 보이고, 안색도 좋아 보이네. 나이스, 나 방금 너 보고 깜짝 놀랐잖아. 분명히 똑같은 얼굴인데, 왜 네가 변한 것 같지?”민아는 흥분해하며 재잘거렸고, 아이가 너무 어리기 때문에 지아가 그들을 데리고 나오지 않은 줄 알았다.“어젯밤에 네가 나에게 전화를 했을 때, 나 정말 기뻐 죽는 줄 알았어. 가자, 이렇게 오랫동안 보지 못했는데, 내가 한 통 크게 낼게
민아는 깜짝 놀라서 지아의 손을 덥석 잡았다.“작별 인사? 너 어디에 가려고?”“걱정하지 마, 단지 쉴 곳 좀 찾고 싶을 뿐이야.”민아는 지아가 올 블랙으로 입은 것을 보았는데, 생기라곤 조금도 없었고 심지어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래서 그녀도 지아가 기분을 풀러 간다고 생각했다.“오래 있을 거야?”“응, 아마도.”“이 슬픈 곳을 떠나는 것도 나쁘진 않지.”줄곧 활발하고 명랑했던 민아는 지금 어떻게 지아를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가 받은 상처는 이미 말 한마디로 해결할 있는 것이 아니었다.슬픔과 분노를 식욕으로 바뀐 민아는 비싼 요리를 많이 시켰다.“먹어, 이 캐비어도 오늘 마음껏 먹어. 나 돈 있으니까 마음대로 시켜.”지아는 웃으며 말했다.“목소리 좀 낮춰. 누가 들으면 네가 졸부인 줄 알겠어.”“그게 뭐가 어때서, 난 내 능력으로 졸부가 된 거야. 지아야, 나도 솔직히 말할게, 예전에 고등학교 때, 너 나 엄청 많이 도와줬잖아, 그래서 난 앞으로 꼭 출세해서 언젠가는 네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으로 되고 싶었어.”“넌 지금 이미 충분히 훌륭해.”지아는 그야말로 민아의 성숙해진 과정을 목격했다.하지만 민아는 지아와 달랐다. 그녀는 일 중독이었고. 전에는 남자에게 발목을 잡혔지만, 찌질한 전남친을 찬 이후, 줄곧 꽃길만 걸었다.민아는 마침내 자신이 가고 싶은 길을 찾았으니 지아도 그녀를 위해 무척 기뻐했다.두 사람은 학창 시절 때처럼 식사도 하고 쇼핑도 하고 영화도 봤다.지아는 시종 가볍게 웃었고, 날이 어두워질 때, 하늘에서 눈송이가 흩날렸다.두 사람이 곧 헤어지려고 할 때, 민아는 갑자기 입을 열었다.“잠깐만.”그녀는 몸을 돌려 옆에 있는 부티크 가게에 들어갔고, 곧 스카프 하나를 들고나왔는데, 직접 지아의 목에 둘러주었다.“앞으로 어떤 길을 선택하든, 힘들다면 내가 줄곧 네 뒤에 있다는 거 잊지 마. 항상 몸 잘 챙기고, 시간 되면 자주 나에게 문자 보내. 네가 잘 지내고 있는지 알아야 나도 안심할 수 있으니까.”
이튿날 아침, 지아는 작별하는 의미로 소계훈의 방에 들어갔고, 침대에 누워 뼈만 남은 남자를 바라보았다.소계훈의 근육은 말이 안 될 정도로 위축되었고, 얼굴은 더욱 주름지고 야위었다.그리고 방 안은 짙은 약 냄새가 풍겼다.지아는 이미 며칠 동안 들어오지 않았는데, 그럴 용기가 없었다.그녀는 자신이 마음을 먹으면 바로 소계훈과 이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밤새 내린 큰 눈은 정원에 두껍게 쌓였다.지아는 두꺼운 커튼을 치고 창문을 열었는데, 햇빛과 눈보라가 모두 방에 들어오도록 했다.“아빠, 바깥의 신선한 공기를 마시지 못한 지 오래됐죠? 또 한 해의 겨울이 찾아왔고, 눈이 왔네요.”지아의 오른손은 아직 왼손만큼 민첩하지는 않지만 일반적인 움직임에는 이미 문제가 없었다.그녀는 눈을 한 조각 움켜쥐더니 토끼 한 마리를 만들었다.“어렸을 때, 눈이 올 때마다 아빠는 나와 함께 정원에서 눈싸움을 하거나 눈사람을 만들었잖아요. 아빠는 항상 대단했죠. 그때 나는 아빠가 늙으면 휠체어를 밀고 계속 나랑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을 하자고 말했는데, 이제 그날을 기다릴 수 없을 것 같네요.”“아빠, 아빠는 내 마음속에서 영원히 젊고 잘생긴 그 모습 그대로였어요. 그런데 오늘 나는 갑자기 아빠도 많이 늙으셨고, 어깨도 더 이상 넓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이렇게 오랫동안 견지해 왔으니, 틀림없이 엄청 힘들었겠죠?”지아는 웃으며 눈물을 흘렸다.“미안해요, 아빠. 나의 이기심 때문에 한 번 또 한 번 아빠를 이곳에 붙잡아둬서.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않을게요. 아빠, 이제 아빠는 자유로운 사람이에요.”눈물은 소계훈의 얼굴에 떨어졌다.“사실 난 아빠가 내 친아빠가 아니라는 것을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도 없어요. 내 마음속에서 아빠는 영원히 나의 가장 좋은 아빠예요. 비록 앞으로 더 이상 내 곁에 있지 않더라도, 난 아빠가 남긴 그 추억들과 나에게 가르쳐준 도리로 계속 앞으로 나아갈 거예요.”지아가 이별의 말을 마치
백채원은 휠체어에 앉은 채 도윤이 지아를 위해 우산을 받쳐주는 것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하나는 서 있었고, 하나는 무릎을 꿇고 있었는데, 우수수 떨어지는 큰 눈을 등지고 있으니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그동안 그녀는 도윤에게 소계훈의 행방을 여러 차례 물어봤지만 도윤은 한 글자도 말해주지 않았고, 오늘 아침에야 백채원은 소계훈이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그녀는 심지어 소계훈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했고, 그와 마지막조차 함께 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소계훈은 자신의 친딸이 백채원이란 것을 죽을 때까지 몰랐다.이도윤은 정말 독했고, 그는 이것이 백채원이 응당히 받아야 할 벌이라고 말했다.‘하지만 난 또 무엇을 잘못했지?’백채원도 그동안 진수련에게 속아서 결국 자신의 친부모님을 죽인 범인으로 되었고, 죽을 때까지 양심의 가책을 받아야 했다.갓 귀국했을 때, 백채원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그녀는 화목한 가정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을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었으며, 또한 자신을 지켜주는 이도윤이 있었다.불과 1년 만에 그녀는 이 꼴로 되었다.백씨 집안은 큰 변화를 겪었는데, 도윤은 이미 백채원와 파혼했고, 그녀는 부모님도 없는 데다 심지어 자신까지 불구가 되었다.백채원은 휠체어를 밀고 다가가서 지아의 정교한 작은 얼굴을 바라보았다.‘이 천한 년은 오히려 갈수록 예뻐졌군.’“이제 만족하겠지!”지아는 슬픔에 잠겨 있었고, 백채원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지아는 눈시울이 빨개졌지만, 백채원을 본 순간, 슬픔이 눈에서 사라졌다.“만족해? 뭐가? 넌 분명히 골수가 일치했지만, 엄마에게 골수를 이식하는 것을 거절했고, 오히려 병세를 가중시켰어. 지금 나한테 이 일에 만족하냐고 물어보는 거야? 그리고 아빠가 분명히 다시 깨어났는데, 너는 오히려 아빠를 자극하여 다시 쓰러지게 했지. 백채원, 오늘 네가 본 이 모든 것은 모두 네가 직접 초래한 건데, 도대체 나더러 뭘 만족하라는 거지?”원래
지아는 백채원의 슬픈 목소리를 듣고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백채원은 하인의 부축조차 받지 않고 굳이 도윤의 곁으로 기어가려 했다.그런 무기력하고 불쌍한 모습은 지아로 하여금 1년 전의 자신을 떠올리게 했다. 그때 그녀는 도윤과 이혼을 하지 않으려고 무릎을 꿇고 그에게 빌었다.‘그때의 내가 이렇게 불쌍해 보였구나.’“이렇게 내버려둘 거야?”지아는 두 손으로 가슴을 안았고, 도윤이 자신 때문에 백채원을 무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내 생각이나 심정을 상관할 필요가 없어. 난 하나도 관심 없거든.”도윤은 이 말에 상처를 받았고, 얼른 지아의 손을 잡았다.“지아야, 난 백채원을 종래로 사랑한 적이 없어. 그때 그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한 것은 단지 한 사람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였어.”지아는 싸늘하게 웃었다.“그 은혜를 침대에 가서 갚은 거야? 재미있네.”“지아야, 사실 지윤이는…….”도윤은 바로 말하려 했지만, 눈을 감자, 그날 밤 바다에서 거의 죽어가는 지아를 건져낸 모습이 떠올랐고, 그는 마음이 아팠다.‘지아를 암살한 사람이 누군지 아직 모르니, 만약 그들이 지윤이 바로 지아의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지윤이도 위험에 빠질 거야!’도윤은 다시 이 비밀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지아도 그의 설명을 기다리지 않았고, 도윤을 힐끗 쳐다보더니 자리를 떠났다.도윤은 지아를 사랑했기에 이 일을 설명하고 싶었지만, 지아는 이미 도윤에 대한 감정이 없었기에 더 이상 도윤의 변명을 듣고 싶지 않았다.백채원은 거의 두 사람 앞으로 다가갔지만, 도윤과 지아가 다시 가버릴 줄은 정말 몰랐다. 그녀는 허탕을 쳐서 비명을 질렀고, 그 소리는 산꼭대기에 울려 퍼졌다.“이도윤!!”그녀는 절대로 사람들 앞에서 전림의 이름을 말할 수 없었다. 전림은 그녀의 마지막이자 유일한 카드였다.비록 도윤이 두 사람의 혼사를 취소했지만, 백채원이 먹고 쓰는 방면에서는 여전히 예전과 같았고, 도윤 역시 예전처럼 백씨 집안을 많이 쳉겨주었다.지금의 백씨 집안은 빈껍데기인
울화도는 지옥의 섬이라고도 불리며, 총 다섯 개의 섬으로 이루어졌다.이곳은 각국의 사형수, 노예 등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쓰레기 수용소일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도망치고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 콜로세움이었다.전 세계의 모든 강력한 에이스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이 지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었다.규칙은 바로 시련에 참가하는 새내기들이 랜덤으로 가장자리에 있는 네 개의 섬에 투입된 후, 그 정글에서 살아남는 것이다.3개월 안에 90% 를 탈락시킨 다음, 남은 10%는 이 4개의 섬에서 메인 섬으로 진출해 top 3를 가려야 했고, 그렇게 우승한 세 사람은 이번 시련을 통과함과 동시에 비싼 가격에 찍힐 것이다.앞으로 그들은 국방부의 고급 경호원이 될 수도 있고, 비밀 조직의 에이전트로 될 수도 있으며 또 어느 용병 집단의 골든 킬러가 될 수도 있었다.지아는 지옥의 섬에서 살아남은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블랙X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소문으로만 듣던 신비한 조직이었고, 이도윤조차 이번 일을 조사하면서 많은 시간을 들였지만 결국 희생양만 찾아냈을 뿐 여전히 주모자가 누군인지 알 수 없었다.지아는 가만히 앉아서 그 사람에게 당하고 싶지 않았다.도윤은 지아를 위해 새로운 신분을 준비해 줬는데, 그녀는 값싼 옷을 입고 몸을 누렇게 칠했으며 또 흉터 스티커로 본래의 미모를 가렸다.떠나기 전, 도윤은 지아에게 목걸이를 하나 차 주었는데, 그 안에는 위치 추적기와 구조 요청기가 있었다.이 밖에 도윤은 또 만일을 대비하여 지아에게 소형 폭탄 두 개를 주었고, 지아는 자신의 안전을 보장하는 물건을 거절하지 않았다.그녀는 지옥의 섬 근처의 입구에서 내렸다. 비행기에서 지아는 아래의 지형을 관찰했는데, 이 섬은 숲으로 뒤덮였고 사방은 바다였다.이것은 그녀가 전에 본 지도보다 더 충격적이었다.지아는 곧 이곳에서 몇 개월 동안 다른 참가자들과 싸우며 살아남아야 했다.도윤은 아쉬움을 금치 못하고 그녀를 바라보았다.“지아야, 정말 갈 거야? 마음먹었어?”“이도윤
진환은 그제야 도윤의 생각을 알아차렸다. 그는 처음부터 진심으로 지아를 울화도로 보내려는 게 아니었고, 단지 기회를 찾아 그녀에게 약물을 주사하고 싶었던 것이다.그러나 진환은 이렇게 하는 것이 매우 타당하지 않다고 느꼈다.“하지만 대표님, 비록 사모님은 과거의 일 때문에 엄청난 상처를 입으셨지만, 기억을 지우든 말든, 그 결정의 권리는 여전히 사모님께 있습니다. 대표님이 이렇게 사모님의 의사를 무시하고 몰래 그 약물을 주입하시다니, 만약 앞으로 사모님의 기억이라도 돌아오신다면 틀림없이 대표님을 탓하실…….”“내가 이런 생각을 안 해봤을 거 같아? 지아가 그동안 얼마나 힘들게 지내왔는지, 너도 잘 알잖아. 지금 지아의 마음속에는 오직 복수밖에 남지 않았고, 그때의 트라우마 때문에 예민해져 매일 잠도 잘 자지 못하고, 바람이라도 크게 불면 바로 놀라 깨어났다고. 심지어 잠들어도 악몽은 끊이지 않았어.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 두 사람 사이도 점차 멀어지고 있다는 거야. 나도 정말 다른 방법이 없어서 그래.”도윤은 자신의 결혼반지를 들었고, 은색의 반지는 햇빛 아래에서 차가운 광택을 반짝이고 있었다.“이것은 내가 오랜 고민 끝에 생각해낸 가장 적절한 방법이야. M-1를 주사하기만 하면, 지아는 내가 그녀에게 준 상처를 포함한 과거의 모든 고통스러운 기억을 잊어버릴 거야.”여기까지 말하자, 도윤은 미친듯이 흥분하기 시작했다.“지아는 다시 나 밖에 보이지 않는 그때의 소녀로 돌아갈 거야. 우리의 결혼생활은 완벽할 것이고, 더 이상 그 누구도 우리를 갈라놓지 못할 거야.”진환은 입을 벌렸으나 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모든 것이 정말 대표님의 뜻대로 됐으면 좋겠는데…….’지아가 따라가고 있는 남자는 매우 우람하고 건장했고, 얼굴은 또 무척 까무잡잡하게 탔다.“아가씨가 여기에 오신 이유에 대해 이미 들었어요. 저도 최선을 다해 아가씨를 보호할 거예요. 참, 제 이름은 전표식이라고, 그냥 표식이라고 부르시면 돼요.”지아는 고개를 끄덕였다.“응,
히죽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지아는 평온하게 사방을 힐끗 둘러보았다.방안에는 총 11명이 있었는데, 그중 남자는 9명, 여자는 2명밖에 없었다.지아 말고 다른 한 여자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사형수인 이상, 그들은 수단이 악랄하고 마음이 독한 사람일 것이다.지아는 도윤이 틀림없이 여지를 남겨둘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 사람들 속에 아마 그의 사람이 있을 것이다.그녀는 아무도 없는 구석에 가서 몸을 쪼그려 앉았고, 그녀를 보자마자 입을 열던 남자가 천천히 다가왔다.샤워를 안 한 지 오래되었는지 가까이 다가오자 이상한 냄새가 풍겨왔다.남자는 몸집이 우람했고, 한 손으로 지아의 뒤에 있는 벽을 짚었다. 지아는 눈썹을 찌푸리며 목소리가 차가웠다.“무슨 일이지?”“네가 무엇 때문에 들어왔든 상관없지만, 여기에 온 이상, 내 말을 들어야 해.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알았어?”지아는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무엇을 원하는데?”남자는 즉시 입을 벌리고 음흉하게 웃으며 누런 이를 드러냈다.“이곳은 거의 남자들뿐이고, 지금 여자가 왔으니 내가 뭐 시킬 거 같아? 옷 좀 벗어봐, 우리도 제대로 한 번 감상해 봐야지.”다른 남자들도 모두 지아에게 다가갔고, 눈은 위아래로 그녀를 훑어보았다.“이 여편네는 비록 못생겼지만 몸매는 꽤 핫하군. 이 S라인 좀 봐, 딱 봐도 섹시하잖아.”“형님, 이따가 먼저 일 보세요. 저한테 국물만 좀 남겨주시면 돼요.”“뭘 봐, 옷 벗으라고. 네 눈알을 확 그냥 파 버리는 수가 있어.”“됐어요, 지금 이 여자 부끄러움 타는 거 같으니까 우리가 도와줘야죠.”그 사람의 손이 몸에 닿기도 전에, 지아는 그의 손목을 잡아당기더니 어깨너머로 쓰러뜨렸고, 남자는 반응할 겨를도 없이 땅에 떨어졌다.지아는 동작이 너무 빨랐고, 정신을 차렸을 때, 남자는 이미 땅에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그녀가 있는 이 방에는 에이전트와 같은 사람이 없었고, 그들은 또 프로가 아니었기에 지아에게 그대로 당했던 것이다.“이 년이 지금 죽으려고
시하와 시언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모두 완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는데, 도무지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 없는 듯했다. 심지어 소시월조차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이걸... 오빠들은 알고 있었어?” 두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아니,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어.” 소시월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내 계획이 성공하려던 찰나에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어. 절대 다른 사람이 내 계획을 망치게 둘 순 없어!’“단지 사진 한 장으로 뭘 증명한다는 거죠? 아빠와 할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고, 아빠는 비행기 사고로 시신조차 찾지 못했어요. 두 사람의 친자확인도 없이, 대체 무슨 증거를 내놓겠다는 거냐고요!” “이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했던 혈액형 검사야. 두 분은 모두 O형이야. 즉, 두 분은 O형의 자녀만 낳을 수 있다는 뜻이지. 하지만 당신들 아버지는 B형이었어. 혈액형에 돌연변이가 생길 확률이 아주 적다는 건 알고 있겠지? 과연 당신들 아버지가 그 예외일까?” 소지훈은 다시 다른 사진을 꺼냈다.“혈액형 이야기는 우선 접어두자고.”“이건 할아버지의 여러 아들들 사진이야. 우리 아버지와 삼촌, 작은삼촌은 할아버지와 60% 이상 닮았지만, 네 아버지는 전혀 닮은 점이 없어!” 지아는 소임호의 실물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대형 스크린에 비춰진 소임호의 얼굴을 보자, 그녀는 그 자리에 멍하니 굳어버렸다. 지아는 이성을 잃고 도윤의 손을 꽉 잡았다.“저 사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아?” “많이 본 정도가 아니라, 완전 똑같아!” 두 사람의 대화는 오직 서로만 이해할 수 있었다. 소임호가 부남진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부남진은 나이가 들어 얼굴이 많이 변했지만, 가까운 사람들은 그가 젊었을 때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소임호는 분명히 부남진의 젊은 시절을 그대로 닮은 모습이었다. “설마...”지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자신이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진실이 이렇게 갑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시언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분노를 참지 못했는데, 그의 손이 여전히 멀쩡했다면, 지금쯤 소지훈의 뺨을 때렸을 것이었다. 시월과 심장후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지아는 도윤을 바라보며 물었다.“이게 어떻게 된 거지? 저 사람이 한 말이 사실이야?” 도윤은 고개를 숙이고 지아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방금 들은 소식인데, 이 사진 속 사람을 한 번 봐봐.” 도윤은 핸드폰 속 사진을 열어 서른쯤의 매혹적인 여성을 지아에게 보여주었다. 지아는 그녀의 눈가에 있는 검은 점을 보자마자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우리 할머니잖아!” 흑백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환희의 모습이 컬러로, 게다가 훨씬 선명한 화질로 나타난 것이었다. “맞아.”지아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혹시 할머니의 행방을 알아낸 거야?” 도윤이 논쟁으로 가득 찬 현장을 보며 말했다.“아마 저 사람들이 답을 줄지도 몰라.” 소지훈의 폭로는 현장을 술렁이게 했다.“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지훈 도련님께서 파문을 일으킬 만한 거짓말을 할 리가 없잖아요?” “당연하죠, 아무리 무례한 사람이라도 이런 자리에서 저런 말을 할 순 없으니까요!” “어머, 정말 흥미진진한데요?”시월은 마음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오빠, 시언 오빠와 오해가 있는 건 알지만, 그런 거짓말은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늘은 할아버지를 배웅해 드리는 날인데,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고요.” “할아버지? 허, 네가 무슨 자격으로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거야?” “오빠, 적당히 좀 하세요!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웃기지도 않는다고요!” “웃기는 건 너희 같은 잡종들이지!”소지훈이 손뼉을 치며 준비된 프로젝터를 가리켰다.“여러분, 죄송합니다만, 이 자리에서 모든 이야기를 공개하고, 소씨 가문의 족보를 깨끗이 해야 할 것 같습니다.”“죽어서도 소씨 가문에 매달리려는 사람이 없도록 말이죠!” “도대체 숨
밤이 깊어지자, Z국에서 전통적인 가족 고별 의식이 시작되었다.지아는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 섞여 소씨 가문의 방대한 자손들과 그들의 복잡한 계보를 바라보았다. 소영수의 직계 자손들 외에도 그의 둘째 동생과 셋째 동생 등의 곁가지 후손들까지 합쳐져, 효성과 의리를 다하는 자식들과 손주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고별 의식은 곧 시작될 예정이었다.첫 번째로 향을 올리는 순서는 원래 장남의 몫이었지만, 장남이 사고를 당하면서 그 역할은 둘째에게 넘어갔다. 다른 자손들도 각자 자신의 향을 챙기러 움직였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시언과 시하를 대신해 시월이 나서서 향을 가지러 갔다. 하지만 소시월이 향에 손을 대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냉랭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소지훈이었다.“오늘은 가족을 위한 작별의 자리야. 미안하지만, 너는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시언이 즉각 반응했다.“소지훈, 적당히 좀 하지 그래? 여긴 할아버지의 영정이 모셔진 자리야. 할아버지께서 편히 눈감지도 못하게 할 작정이야?” ‘예전의 작은 다툼은 다 넘어갈 수 있어. 하지만 오늘처럼 외부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서 저렇게 무례한 말을 하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 시하는 상대적으로 차분해 보였지만, 그는 이 상황이 단순하지 않음을 직감했다. ‘연예계에서 단련된 소지훈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저런 말을 했을 리 없어. 뭔가 계획이 있는 게 분명해.’ 시하가 둘째 삼촌인 소상현을 바라보았다. 소상현은 아들의 죽음으로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소명담의 시신이 발굴되었을 때, 소상현은 자기 친아들이 이토록 오래전에 죽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백발의 노인이 흑발의 자식을 보내는 고통은 이루 형용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소상현은 소지훈의 말을 듣고도 아무 말 없이 공허한 눈빛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입을 연 사람은 소상현의 부인인 오연희였다.“시언아, 너무 흥분하는 거 아니니
지아는 물 한 잔을 건네며 시언에게 진정하라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는데,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스파이가 누구라는 거예요?” “방금 떠난 사람은 소지훈이에요. 지금은 연예계에서 활동 중인 사람인데, 우리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이고, 얼마 전에 죽은 소명담의 동생이기도 하죠.” “그동안 큰형이 다른 사람을 의심하지 않았던 건, 우리가 모두 한 핏줄이고, 소씨 가문의 번영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가족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에요.”“누가 감히 가족이 자기 가문을 망가뜨리려 한다고 생각했겠어요?”“그런데 이젠 확실히 알겠어요. 저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한테 원한을 품고 있었던 거라고요.” 지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어르신은 왜 편애하셨던 걸까요?” “원래 황제는 장남을 사랑하는 법이잖아요. 우리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첫 번째 아이여서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각별히 아끼셨어요. 어쩌면 과도한 애정을 쏟는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요.” “그래서 손자들인 저와 형제들에게도 각별히 대해주셨어요. 사촌들과 다툴 때마다 늘 우리 편을 드셨으니까요. 하지만 그 작은 편애가 쌓여 그 사람들의 원한이 된 거예요.” 지아가 시언의 얼굴에서 깊은 슬픔을 읽으며 말했다.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사연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제 생각에는 저 사람이 소씨 가문을 해치려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왜죠?”“세상에 자기 이마에 나쁜 사람이라는 글자를 써 붙이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게다가 상대는 10년, 20년을 준비했잖아요. 저 사람보다 더 차분하고 계획적인 사람일 거예요. 소지훈 씨 같은 사람이 그런 일을 꾸몄을 리 없어요.” “그 말도 일리가 있네요. 그럼...”지아의 표정은 여전히 깊은 뜻을 품고 있었다.“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이미 체스판 위의 말이 된 거예요. 판은 이미 시작되었고요.” 지아의 위로에 시언의 감정도 점차 안정되었다. “대체 우리 큰형과 무슨 계획을 꾸미는 겁니까?” “아무것도 하지
시언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인 소지훈이 서 있었다.몇 년 사이, 예전의 어린 철부지는 이제 연예계에서 가장 뜨거운 스타로 떠올라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과거 얽힌 사연도 적지 않았다. 어린 시절, 시언은 1년의 세월을 들여 목각으로 ‘행려풍속도’를 복원했다. 하지만 문제가 일어난 것은 방대한 작업을 간신히 완성했을 무렵이었다. 그것은 바로 시언보다 열 살이나 어린 소지훈이 고용인이 없는 틈을 타 정신없이 놀다가 실수로 작품을 망가뜨린 것.이는 대회 출품을 목표로 하던 시언에게 큰 충격이었고, 그는 동생을 가차 없이 혼내며 매질하고 말았다.두 사람 모두 소영수 내외의 후손들이지만, 둘째 집과 셋째 집은 어릴 적부터 소영수가 장남을 더 편애한다고 여겨왔다. 그래서 그들의 자식들까지도 소영수에 눈에 들지 못하고, 늘 냉대를 받으며 자랐다. 가문의 중심인 소영수는 이 일에 분노하며 소지훈의 손바닥을 피가 날 정도로 때린 뒤, 그를 사당에 무릎 꿇게 하며 삼 일 밤낮으로 벌을 주었다. 이 사건은 어린 소지훈의 마음에 깊은 원망의 씨앗을 심었다. 이후 시언이 이성을 되찾고 사과했지만, 소지훈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가문의 둘째와 셋째는 사이가 좋았지만, 유독 첫째인 소임호와는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불운한 이는 넷째였다. 그는 심예지와 청소년기를 함께 보냈지만 버림받았고, 그로 인해 사랑에 상처받아 결혼하지 않고 홀로 지내며 자손마저 두지 못했다. 시언이 소지훈의 눈에 담긴 냉소를 보며 말했다.“할아버지께서 생전에 똑똑히 말씀하셨을 텐데? 소씨 가문은 흥망을 같이해야 한다고. 소씨 가문이 이렇게 어려움에 부닥친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니?” 소지훈은 고개를 숙이고 시언의 옷깃을 잡았다.“그거 알아요? 나는 당신 집안이 너무 싫어요. 항상 체면을 차리려는 모습은 역겨울 정도라고요.”“허, 할아버지한테 대체 무슨 마법을 걸었길래 당신들만 그렇게 아낀 거예요? 우리도 분명 소씨 가문 사람이었는데... 지금이라
도윤은 음윤한 심장후에 비해 훨씬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을 자랑해서, 두 사람이 함께 서 있을 때는 대비가 확연했다.한 사람은 강인하고 압도적인 기운을 풍기고, 다른 한 사람은 부드럽고 우아한 매력을 가진 극과 극의 존재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도윤은 시선으로 심장후를 가볍게 스치고 난 뒤,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대신했다. “형님, 제 약혼녀인 소시월입니다.”심장후가 소개했다.“반갑습니다.”도윤의 시선이 닿는 소시월의 얼굴에는 지아와 약간 닮은 점이 있었다. 그 순간, 시월의 눈동자에 긴장이 스쳤고, 그녀는 급히 입을 열었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그렇습니까? 저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들으신 거죠?”도윤의 질문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했지만, 그 속에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 특유의 위엄과 탐색이 깃들어 있었다. 게다가 도윤은 소시월보다 훨씬 키가 컸기에,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빛에서 압도적인 아우라가 느껴졌다.소시월은 마음을 다잡고 답했다.“이 대표님께서 비즈니스계에서 쌓으신 명성은 제가 Z국에 있을 때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이번 기회를 통해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비즈니스에 있어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이제 한 가족이 될 텐데, 앞으로도 많은 지도와 조언 부탁드리겠습니다.” 소시월의 답변은 빈틈이 없었고, 흠잡을 곳도 없었다.“좋습니다.”도윤은 시선을 돌리고 심규철과 함께 다른 친척들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소시월은 극도로 긴장했던 마음을 그제야 풀었지만, 찰나의 눈 맞춤에도 온몸에서 땀이 배어 나오는 듯했다. ‘눈빛이 정말 무서웠어. 한 번이라도 나를 더 쳐다봤다면 숨통이 막혔을 것 같다니까?’‘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차갑고 카리스마 넘쳤어.’“괜찮아?”심장후가 소시월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물었다. 소시월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괜찮아, 손님들이 또 많이 온 것 같던데, 나 먼저 가볼게.”“너무 무리하지는 마.” 소영수는 장례식은
지아는 처음부터 심씨 가문의 두 삼촌 얼굴이 어디서 본 듯 낯익다고 느꼈다. 그런데 심규철이 나타난 순간,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한대경이 심규철과 아주 닮았기 때문이었는데, 심지어 다른 두 삼촌의 얼굴에서도 미세하게 비슷한 인상을 느낄 수 있었다.“왜?”“저, 저분... 자녀가 몇 명 있어요?” “한 명뿐이야. 월이랑 약혼했다던 장후, 너도 어제 봤잖아.”“아, 네...”‘세상에는 닮은 사람이 정말 많구나. 소시월도 나랑 닮았지만 혈연관계는 아니잖아.’ 하지만 지아는 왠지 불안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한대경 역시 어릴 때부터 C국의 빈민가에 버려졌고, 친부모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더욱 의심이 들었다. “심장후 씨가 아버지를 닮지 않은 건, 어머니를 닮았기 때문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분은 오래전에 돌아가셔서 나도 기억이 거의 없어.”“그나저나 참 한결같은 분이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재혼하지 않으셨으니까.지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묻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더욱 복잡해졌다.반면, 도윤은 심씨 가문과의 재회에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지아는 도윤의 마음을 몇 번이고 헤아릴 수 있었다. ‘가족의 울타리가 그리웠을 거야.’심예지는 눈물을 닦으며 도윤의 손을 잡아 앞으로 이끌었다.“네 셋째 삼촌이셔.” 도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삼촌, 안녕하세요.”강춘옥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이제라도 돌아와서 다행이구나. 이젠 여기가 네 집이니 다 잊고 살으렴.”“그리고 오늘은 소씨 가문 어르신의 장례식이니 더는 지난 이야기를 하지 말자꾸나.”“네, 엄마.”심예지가 나지막이 대답하자 강춘옥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흐느끼듯 대답했다. “그래...”강춘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도윤아, 방금 와서 피곤할 텐데 뒤뜰에서 잠시 쉬고 오너라.”“괜찮습니다. 소씨 가문과 심씨 가문은 원래 인연이 깊었으니, 소씨 가
도윤은 향을 올리고 나서 조용히 심예지의 곁을 지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심씨 가문 사람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심예지가 여기에 나타난 것을 보고 지아보다 더 놀란 듯했다. 특히 강춘옥이 오랜만에 눈앞에 나타난 딸을 보고 휘청거리며 다가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망할 X, 네가 여긴 왜 와?!”심예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어머니의 그늘진 얼굴을 마주했고, 세월이 자신의 어머니를 노쇠하게 만든 것에 마음이 아렸다.그 순간, 심예지는 자신이 허망한 세월을 보내며 부모 곁에서 효도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정말 어리석었구나.’“엄마...”“나를 엄마라고 부르지도 마. 나는 너 같은 딸은 낳은 적 없으니까!” “그만하세요, 엄마. 예지가 지금이라도 돌아왔는데 아직도 화가 나세요?”심예지의 큰오빠가 서둘러 중재에 나섰다.“맞아요, 이제 그만하세요. 예지도 아주 힘들었을 거예요.”둘째 오빠도 거들며 말했다.“그리고... 네가 도윤이니? A국에서 네 소식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구나. 나를 삼촌이라고 부르면 된단다.”소씨 가문의 장례식었지만, 어느새 심씨 가문의 화해의 장처럼 분위기가 흘러갔다. “작은삼촌, 큰삼촌, 안녕하십니까.”도윤은 비록 말수가 적었지만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두 사람은 도윤이 마음에 드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참 착하구나. 돌아와 줘서 고맙다. 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서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몰라. 네 어머니와의 일 때문에 나도 별수 없었다만, 이렇게 돌아왔으니 된 거야.” 강춘옥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말했다.“흥, 난 저런 불효녀를 절대 용서할 생각이 없어!” “네 외할머니는 마음이 약하신 분이야. 괜찮으니까 이제 ‘외할머니’라고 부르면 돼.”도윤은 어릴 때부터 사랑이 부족한 환경에서 자란 탓에 혈육의 정을 갈망해 왔다. 게다가 도윤은 심씨 가문과 많은 인연이 없었지만, 심씨 가문이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자기 어머니에게 상처받아서 이런
지아는 처음에 그저 시하의 다리 치료를 위해 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소씨 가문은 정말 끝장나겠구나!’지아의 손끝에 살짝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무무가 조심스레 지아의 손끝을 꼭 잡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엄마는 괜찮아.” 하지만 세상은 무심했다.소영수가 생전 Z국의 거물로 이름을 날린 만큼, 그의 장례식은 당연히 떠들썩했다. 불과 하루 밤낮 사이에 수많은 조문객이 줄을 이었으니 말이다.지아는 시하의 휠체어 옆에 서 있었다. 평범한 얼굴 덕분에 모두 지아를 그저 시하를 돌보는 고용인쯤으로 생각했다.소영수는 Z국에서 이름난 인물들이었기에,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 중에는 거물급 인사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지아는 이곳에서 도윤과 심예지를 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도윤은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고 서 있었는데, 넥타이조차도 깊은 먹색이었다. 그의 옆에는 검은 우산 모양의 드레스와 반쯤 가린 진주 베일을 쓴 심예지가 함께였다.두 사람이 등장하자마자, 장내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을 향했다. “저 여자가 바로 심씨 가문의 못난 딸이라지? 들었어? 어릴 적 소꿉친구를 마다하고 기어코 이씨 가문에 시집갔다더라? 근데 남편은 저 여자를 눈곱만큼도 사랑하지 않았대.” “남자는 원래 그렇잖아. 아무리 여자의 집안이 좋아도, 밖의 여우 같은 여자가 더 끌리는 법이니까. 그나저나, 심예지도 참 멍청하다. 자기 집안에 걸맞은 남자를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왜 한 남자한테만 매달린 걸까?” “그러니까! 자살 소동까지 벌였을 때, 심씨 가문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렇게 이혼시키려 했는데, 끝까지 버티면서 이씨 가문에 남겠다고 했대. 그 일로 심씨 가문과도 등을 졌으니, 남은 게 없잖아! 딱히 잘난 것도 없는데 말이지.” “누가 아니래? 시댁에선 좋은 대접을 받지도 못하고, 친정과도 연락을 끊었잖아. 바보라고 해야 할지, 순애보라고 해야 할지... 그런데 이제야 돌아왔네? 철이 든 건가? 늦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