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는 아주 간단해, 시약이야.”이도윤은 마음이 좀 초조하여 바로 담배를 피우려 하다가 소지아가 아직 여기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동작을 멈추고 어색하게 코를 만지며 난감한 표정으로 계속 입을 열었다.“WHO를 포함한 모든 국가는 일부 전문 연구를 엄격히 금지하고 있어. 이러한 연구와 실험은 보통 인류의 도덕에 어긋나니까. 이 사회에서 배척당할 때, 일부 극단적인 학자들이 모이게 된 거지.”“그곳은 그들의 천국이야. 그들은 마음대로 자신의 연구를 할 수 있었고,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영향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었어. 그들이 사는 목적은 바로 자신의 성과를 성공시키는 거야.”지아가 물었다.“설령 이런 성과가 인류 사회에 아주 나쁜 결과를 가져다 준다 하더라도, 그들은 상관없는 거야?”“맞아, 아무도 시약을 하지 않으면 그들은 사람들에게 투입하여 인간을 천연의 시험 대상으로 삼았어. 그리고 그들은 미친 듯이 높은 곳에 서서 데이터를 기록한 후 계속 개량했지. 인간은 그들에게 있어 쥐나 개미 그리고 차가운 키보드를 두드려 적은 데이터와 다름없지.”도윤은 입술을 오므렸다.“그들은 확실히 많은 약물을 연구하였고 또 일부 기여를 했어, 나도 인정해.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미친놈들로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고 일반인들의 목숨을 갖고 장난을 쳤지.”지아는 보면 볼수록 끔찍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지금 마침내 무엇 때문에 주원이 쉽게 용병을 찾아올 수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지아야, 그는 진심으로 네 아버지를 구하려는 게 아니야. 그에게 있어, 네 아버지의 존재는 단지 너를 좌우하는 도구일 뿐이라고. 어젯밤 우리의 기습을 거쳐 이 쓰레기들은 아마 소굴을 바꾸어 숨었을 거야. 그래서 당분간 다시 나와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겠지. 그리고 주원은 더욱 함부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할 것이고.”도윤은 손을 지아의 어깨에 얹고 차분하게 말렸다.“네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 나만이 맹목적으로 너에게 잘해주는 사람이야. 그러니 네 아버
소지아는 잠시 이도윤의 곁에 남아 있기로 했다. 그는 그녀를 보호할 수 있었고 또 이예린이 그녀를 뼈에 사무치게 증오했기에, 만약 지아가 떠난다면 이예린은 오히려 잠잠해질 수 있었고, 지아는 도윤을 이용하여 이예린을 끌어내려 했다.지아는 도윤에게 주원이 레오란 일을 알려주지 않았다. 일이 아직 다 밝히지 않은 이상, 지아는 자신을 보호할 카드가 필요했다.적어도 레오에게 있으면 소계훈은 안전했고, 심지어 수술까지 해줘야 했기에 지아는 이때 레오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하루 종일 잤으니 막상 밤이 되자 지아는 잠이 조금도 오지 않았다.주원의 전화는 여전히 통하지 않았고, 지아는 그의 신분을 모르는 척하면서 그에게 여러 개의 문자를 보냈다.그 외에 전효도 아직 연락이 없었다.밤 2시에 지아는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도윤의 서재 불이 켜진 것을 보았고, 그 남자도 잠이 오지 않았다.예전 같으면 지아는 도윤이 굶을까 봐 야식을 챙겨줬을 것이다.그러나 지금, 그녀는 물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왔는데, 마치 도윤과는 모르는 사이인 것 같았다.다음날 아침, 지아는 경호원의 호송을 받으며 병원으로 갔다.지아는 변진희에게 자주 보러 올 것이라고 약속했는데, 물론 그것 외에 지아도 다른 사심이 있었다.백정일은 별로 쉬지 않은 모양이었고, 얼굴은 점점 초췌해졌다. 지아는 작은 소리로 불렀다.“아저씨.”한창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백정일은 그제야 눈을 들어 지아를 쳐다보며 겨우 정신을 차렸다.“왔어? 네가 진희와 말을 좀 하면 그녀도 기분이 좋아질 거야.”“그래요, 아저씨, 산후조리원의 일은 알아냈어요?”백정일은 한숨을 쉬고 나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지아야,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했어. 그 당시의 산후조리원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 모양이더라고.”“존재하지 않다뇨? 사장님이 그만 뒀더라도 기록을 조사하면 알아낼 수 있는 거 아닌가요?”백정일은 고개를 저었다.“그렇게 간단했으면 좋겠어. 20년 전에는 기술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아 병력까지 손으로 썼지.
문을 박차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백채원이었다. 그녀는 분노 가득한 채 소지아를 향해 달려들었고, 손을 들며 바로 지아의 얼굴을 때리려 했다.“미친 년, 또 너야? 너 아주 거머리처럼 달라붙는구나.”백정일은 손을 뻗어 백채원을 막았고, 자신의 딸에 대해 이미 엄청난 실망을 느꼈다.백씨 집안의 딸로서 그녀는 훌륭하지 않을 수도, 영리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그렇게 악독하진 말아야 했다.변진희는 전에 백채원의 앞에서 죽을 뻔했지만, 그녀는 오히려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고, 심지어 환자에게 주먹질과 발길질을 했다.게다가 지금은 또 다짜고짜 지아를 때리려 했다. 백정일은 자신의 딸이 왜 지금의 이런 흉악한 모습으로 변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백채원, 그만하지 못해? 내가 병원에 오지 말라고 했지?”이 말에 백채원은 더욱 화가 났다.“지난번에는 그 천한 엄마에, 오늘은 또 이 천한 딸이라니. 잊지 마요, 내가 아빠 친딸이라고요!”찰싹 하는 소리와 함께 백정일은 다시 백채원의 얼굴에 뺨을 내리쳤다.백채원은 놀라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오늘 그녀는 말 한마디밖에 하지 못했다.“이 몇 년 동안 진희는 자신의 딸을 떠나버리고 매일 세심하게 너를 돌보았는데, 넌 그 은혜에 고맙다고 생각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그 은혜를 원수로 갚다니. 너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야! 그리고, 말끝마다 천한 년이라 욕을 하는데, 너 아직 교양이 살아잇나?”“내가 교양이 없다고요? 그럼 소지아가 다른 사람의 가정을 망치는 게 교양이 있는 짓이라고 생각하나요? 그 엄마에 그 딸이라고, 두 사람은 천성적으로 남의 남편이나 엿보는 것을 좋아하잖아요. 그런 게 교양이 있는 짓이라면, 난 교양 없이 사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해요!”백정일의 가뜩이나 좋지 않은 안색은 백채원 때문에 화가 나서 더욱 보기 흉해졌다. 그는 기복이 심한 가슴을 잡았다.지아는 이상함을 느끼며 백채원과 다투지 않고 재빨리 앞으로 가서 백정일을 부축했다.“아저씨, 화내지 마세요. 일단 좀 앉아서 쉬어요.”
백채원은 슬픔을 금할 길이 없었다. 요 며칠 그녀도 나름 반성을 했고, 자신이 그런 짓을 하면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마터면 변진희를 죽일 뻔했다니.그래서 백채원은 특별히 과일 바구니를 사왔고, 변진희에게 사과하려고 했다. 그러나 오자마자 백정일이 한 그런 말을 들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백채원은 사과를 하긴커녕, 도리어 백정일과 사이가 틀어졌다.그녀는 억울해서 손등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이도윤은 이미 전의 인내심이 없어졌고, 백채원은 이미 전림의 모든 가치를 소모했다. 도윤은 지금 그녀를 바라보는 것조차 혐오를 느끼곤 했다.그는 입으로는 백채원과 결혼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좀처럼 그녀와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다.백채원은 많은 일들이 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도윤은 그녀를 사랑할 리가 없었다.그녀의 아버지조차도 더 이상 그녀에 대한 믿음이 없었고,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에 오직 실망 그뿐이었다.‘전에는 손만 까딱하면 가질 수 없는 게 없었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됐을까?’백채원은 집으로 돌아가 할아버지 앞에서 울며불며 하소연할 수밖에 없었다.“할아버지, 우리 아빠 또 소지아 그 년 때문에 날 때렸어요. 심지어 소지아를 자신의 딸로 삼고 싶다고 했단 말이에요.”어르신은 화가 나서 책상을 두드렸다.“뭐야? 그 모녀에게 속아서 자신의 친딸까지 버리다니! 정말 한심하군.”백채원은 더욱 억울해졌다.“아빠뿐만 아니라 도윤 씨도 날 피하고 있어요. 모두 소지아 그 년 때문이에요! 할아버지, 나 좀 도와주세요. 그녀가 살아있기만 하면, 도윤은 날 쳐다보지도 않을 거예요.”어르신은 백채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눈빛은 무척 자상했다.“울지 마라. 이 할아버지가 있잖아.”지아를 언급하지 어르신은 눈살을 찌푸렸다.“그 천한 년은 운도 참 좋지. 뜻밖에도 또 살아남았다니.”지난번 떠들썩한 납치 사건에 모두들 지아가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그녀는 무사했다.백채원은 흐느끼며 더욱 심하게 울었다.“할아버지, 좀 도와주세요. 이러다
이 말을 듣자 백채원은 저도 모르게 몸이 떨렸고 어르신은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무엇이 두려운 게야? 젊었을 때, 난 전쟁터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몰라. 네 아버지가 백씨 집안을 위해 아이를 낳으란 내 말을 듣지 않고 또 지나치게 그 여자에게 빠졌으니, 나한테 또 무슨 다른 방법이 있겠는가?”“그러니까, 그 여자가 백혈병에 걸린 게 우연이 아니란 말씀이세요?” 백채원은 충격을 느끼며 어르신을 쳐다보았다.어르신의 눈에는 흩어질 수 없는 살의가 가득했고, 입꼬리는 차갑게 올라갔다.“그야 당연하지. 그 당시 네 어머니가 뜻밖에 세상을 떠난 후, 난 네 아버지에게 우리 백씨 집안과 알맞은 여자를 소개해 주려 했어. 그러나 그가 뜻밖에도 변진희와 결혼할 줄이야. 유산 후 더 이상 임신할 방법이 없자 나는 그에게 얼른 몸이 좋은 여자를 찾아 아이를 낳으라고 했지. 그는 그렇게 하려 하지 않았으니 나도 이럴 수밖에 없었어.”백채원은 자기도 모르게 의자의 팔걸이를 꽉 잡았다. 그때 변진희가 유산한 이유는 바로 그녀 때문이었다.백채원은 어릴 때부터 변진희를 싫어했고, 그녀가 엄마를 향한 아빠의 사랑을 전부 빼앗아 갔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들이 아이를 낳는다면 자신은 아빠조차 잃을 것이다.백채원은 원래 변진희가 이번 생에 아이를 낳을 수 없어서 은근히 기뻐하고 있었는데, 이 일이 할아버지로 하여금 그녀에 대한 살의를 가지게 할 줄은 어찌 알았겠는가.백채원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어르신은 태도가 부드러워졌다.“채원아, 이건 할아버지가 너에게만 하는 말이지만, 만약 마음을 독하게 먹지 않으면 지위가 흔들릴 거야. 이 할아버지가 모질다고 탓하지 마. 나도 다 너와 우리 집안을 위해서 그러는 거야.”“알겠어요, 할아버지.”“알면 됐다. 넌 할아버지와 같은 편에 서야지, 절대 네 아버지에게 말하면 안 돼. 안심해라. 오늘은 변진희가 죽을 것이고, 내일이면 바로 소지아의 차례가 될 테야. 네가 먼저 골수가 일치하다는 것을 폭로하지 않는 한,
어르신이 나타나자 백채원은 나무 뒤에 숨어 숨을 죽이고 나뭇잎으로 자신의 몸을 가렸다.앞에 있는 여자는 무척 섹시했지만 온몸에는 강하고 위험한 기운이 감돌았다.마치 원시림에 핀 꽃처럼, 예쁘지만 독이 있어 사람으로 하여금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게 했다.“오랜만이에요, 어르신.” 여자의 목소리는 본래의 음색을 알아들을 수 없도록 일부러 변성한 것 같았다.어르신은 그 여자를 방비하고 있는 듯, 비록 그녀가 치마를 입고 있어 몸에 아무것도 숨길 수 없는 것 같지만 여전히 그녀에게 다가가지 않았다.“이번에 너희들이 얼마나 큰 문제를 일으켰는지, 알기나 하는 게야!” 어르신은 지팡이를 땅에 세게 짚었는데, 표정은 더욱 차가웠다.“이번에는 확실히 내 수하가 부주의로 행방을 누설했어요. 어르신, 우리를 엄호해 준 것에 감사하기 위해서, 이번에 내가 직접 약을 드리러 왔잖아요.”약이란 말을 듣자, 어르신의 안색은 좀 보기 좋아졌다.그녀가 손바닥을 펼치자 어르신은 지체 없이 여자의 손에서 약병을 가져갔다.이렇게 조급해하고 심지어 미친 듯이 기뻐하는 어르신을 백채원은 여태껏 본 적이 없었다.어르신은 안의 용량을 똑똑히 본 다음, 미간을 찌푸렸다.“왜 30알밖에 없는 게야?”“그날 밤, 우리는 너무 갑작스럽게 전이되어 많은 약제를 가져가지 못했어요. 어르신, 탓하려면 이도윤을 탓해요. 그가 어르신의 계획을 망쳤으니까요.”이 이름을 듣자, 백채원은 눈이 휘둥그레졌다.‘도윤 씨 때문이라고? 대체 무슨 일이지?’‘이 여자는 도대체 무슨 사람이지?’“내 앞에서 그를 헐뜯지 마라. 나도 네 의도를 잘 알고 있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양보는 바로 너희들의 행방을 숨겨 주는 거야.”어르신은 약을 잘 넣어두었다.“너희들이 만약 우리나라에서 일을 저지른다면, 난 가장 먼저 너희들의 소굴을 없애버릴 거야.”여자는 가볍게 웃었다.“알았어요.”“요즘 밖은 위험하니, 너희들은 잘 숨어 있어, 밖으로 얼굴을 내밀지 말고. 날 난처하게 하지 말란 말이야.
소지아는 재빨리 백정일을 응급실에 보냈다.“의사 선생님, 어떻게 됐어요?”“걱정할 필요 없어요. 아마 과로로 인해 혼수상태에 빠졌을 거예요. 잠시 후 몇 가지 검사를 더 해야 최종 결과를 확정할 수 있고요.”지아는 그제야 한숨을 돌렸고, 떠나지 않고 백정일의 곁을 지키며 그에게 따뜻한 물 한 잔을 따랐다.“아저씨, 지금 몸이 안 좋으시니 푹 쉬어야 한다고 제가 말했잖아요.”백정일은 고개를 저었다.“난 괜찮아. 줄곧 몸이 좋았으니까.”“아무리 좋은 몸이라도 밤새 잠을 자지 않으면 얼마 버티지 못할 거예요. 이러다 진희 아주머니보다 먼저 쓰러지겠어요. 제가 백채원에게 전화를 걸어 아저씨 돌보라고 할게요.”백정일은 재빨리 지아의 손을 잡았고, 표정은 머뭇거렸다.“하지 마, 지아야, 내 부탁이라 생각하고 그녀에게 전화하지 마. 그녀가 오면 난 더 빨리 죽을 거야.”“아이고, 말하자면 참 창피하지. 요 몇 년 동안 진희는 채원이 어머니가 일찍 돌아간 데다 또 너와 헤어졌기 때문에 모든 모성애를 그녀에게 주었어. 이 아이는 진희의 사랑을 받아서 얼마나 버릇없이 굴었는지 몰라. 난 몇 번이나 혼쭐 좀 주려고 했는데 결국 진희가 막아서 그 아이가 지금 이 꼴로 된 거야.”지아는 원래 이 일의 피해자였지만 지금은 백정일까지 위로해야 했다.“아저씨,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다 잘 될 거예요.”“그래, 그래도 네가 착하구나.”백정일은 지아를 바라보는 눈빛이 무척 자애로웠다. ‘지아가 내 딸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만약 다른 사람을 믿지 못하신다면, 오늘 밤 제가 남아서 아주머니 돌볼게요. 비록 혈연관계가 없지만, 어쨌든 저도 그동안 아주머니를 엄마라고 불렀잖아요.”“네가 이전의 일을 따지지 않고 그녀를 돌볼 수 있다면, 나도 정말 기쁘구나. 너에게 이런 효심이 있다니, 진희가 알면 틀림없이 매우 기뻐할 거야.”“아저씨, 그럼 오늘 밤 푹 쉬세요, 제가 있잖아요.”지아는 병원에서 바삐 돌아쳤다. 그녀는 분명히 백정일에 의해 잡혀왔는데, 지금은 오
지아는 병원에서 변진희를 돌보았다. 그녀의 병실은 단칸방에 큰 침대가 있었는데, 밤이 깊어지자, 지아가 힘들게 자는 모습을 보고, 변진희는 올라와 함께 자자고 말했다.이런 느낌은 매우 신기했다. 지아는 10여년을 기다렸지만 단 한 번도 어머니와 같이 잠을 자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오히려 출생의 비밀이 밝혀진 후에야, 그녀는 엄마와 화목하게 지낼 수 있었다.변진희는 지아의 한 손을 꼭 잡으며 매우 온화하게 말했다.“지아야, 내 친딸이 누구든, 내가 널 무시한 건 사실이야. 요 며칠 침대에서 나도 많은 것을 회상했는데, 과거에 나는 정말 너와 계훈 오빠를 모질게 대한 것 같더라. 그래서 내가 이런 병에 걸린 것도 다 하느님이 내린 벌일 거야. 나는 이미 죽을 준비가 되어 있어. 이번 생에 나는 정일의 사랑을 충분히 받았으니 이제 아무런 후회도 없어.”이 말을 할 때 지아는 바깥의 불빛을 빌어 변진희가 행복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지아야, 네가 나를 미워하고 나를 엄마로 생각하지 않아도 좋아. 나는 시종 너를 나의 딸로 여겼으니까. 그때 엄마는 네 결혼식에 가지 못했고, 심지어 네가 이혼을 당하며 온갖 억울함을 당했을 때도 널 도와주지 못했지. 내가 정말 너에게 많은 것을 빚졌구나. 그리고 그동안 난 투자를 하며 돈을 좀 모았어.”“네 아버지가 사고 당했을 때, 나는 이미 수속을 밟았고, 이 돈은 이미 정일더러 네 카드에 넣으라고 했어.”변진희는 베개 밑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 지아의 손바닥에 놓았다.“이것은 엄마가 널 위해 모은 혼수야. 많진 않지만 내 마음이니까 받아.”지아는 이 순간, 과거의 모든 괴로움이 모두 사라진 것 같다고 느꼈다.“난 돈이 부족하지도, 돈을 쓸 경우도 거의 없어요. 아주머니가 이렇게 말해준 것만으로도 나는 매우 감격해하고 있고요.”“받아, 적어도 이렇게 해야 내 마음이 좀 편해질 테니까. 지아야, 내가 마지막으로 부탁 좀 하면 안 될까?”“말씀하세요.”변진희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한 글자 한 글자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