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일은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소지아를 바라보았다.“그래, 내가 안배할게. 그러나 진희는 지금 매우 허약해서 대화하는 시간이 너무 길면 안 돼.”“주의할게요, 감사해요.”백정일은 한숨을 내쉬었다.“난 너를 강제로 끌고 왔고, 너의 의사를 무시하고 강제로 너에게 골수 검사를 진행했으니 너에게 사과하마. 미안하구나.”백정일의 초췌한 얼굴을 보고 지아는 원망하는 말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괜찮아요, 이렇게 보면 난 오히려 아저씨에게 감사하다고 해야 하는 걸요. 만약 아저씨가 아니었다면, 나는 줄곧 속아서 아무것도 몰랐을 거예요. 내가 사모님의 친딸이 아닌 이상 그 아이를 찾으면 사모님을 구할 수 있을 거예요.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그래, 진희의 병원으로 가자구나. 가서 그때의 일에 대해 알아보자.”백정일은 지아를 데리고 병원에 갔는데, 일시에 너무 많은 일이 발생했기에 지아는 머리가 아팠고, 따라서 이예린을 생각할 겨를이 전혀 없었다.‘변진희가 내 친어머니가 아니라면, 우리 아빠는?’그는 자신의 아버지일까, 아니면 그녀의 아버지는 또 다른 사람일까?소계훈은 자신의 신분에 대해 알고 있을까?어릴 때부터 소계훈과 함께 보낸 추억을 자세히 회상하면서 지아는 아무런 수상함도 찾지 못했다.바깥의 그 빽빽한 비를 바라보니, 마치 지아의 심정처럼 무척 난잡했다.차는 어느덧 병원에 도착했고, 지아는 급히 차에서 내렸는데,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백정일이 그녀를 부축했다.“조심해.”“네.” 지아는 담담하게 감사를 표시하며 얼른 따라갔다.이것은 변진희가 입원한 이후 지아가 처음으로 병문안을 하러 온 것인데, 지금 다시 그녀를 보니 지아의 마음속은 매우 복잡했다.‘그녀는 내가 그녀의 딸이 아니라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날 이렇게 냉담하게 대했던 것일까?’만약 정말 그렇다면, 변진희는 확실히 자신에게 빚진 것이 없었다.며칠 보지 못한 사이, 변진희에게 더 이상 전의 그 고귀하고 우아한 귀부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많이 야위
변진희는 아직 두 사람의 이상을 감지하지 못하고 여전히 자신의 추억에 잠겼다.“기억 속에서 나는 종래로 너의 학습에 관심을 돌린 적이 없고, 네 취향에 관심을 돌린 적이 없지. 심지어 떠나는 동안 너에게 전화 한 통도 하지 않고 그렇게 어린 너를 내팽개쳤으니 너도 틀림없이 이 엄마를 엄청 원망했을 거야.”“난…….”지아는 코를 훌쩍이며 마음속으로 그녀에게 사실을 알려줄까 말까 망설였다.백정일은 망설이다 한숨을 내쉬었다.“진희야, 진정해. 그리고 내 말 잘 들어.”지아는 눈물을 닦고 손을 들어 변진희를 위해 눈물을 닦아주었다.변진희는 한순간 멍해졌다. 그녀와 지아는 다시 만났을 때부터 지아는 줄곧 냉담했고, 이는 지아가 처음으로 자신과 친해진 것이었다.“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백정일은 간단하게 설명했다.“나쁜 소식은 지아의 골수가 일치하지 않다는 거야.”“응, 나는 이미 마음의 준비가 다 됐어.”“좋은 소식은 지아가 당신 딸이 아니고, 당신에게 친딸이 또 하나 있다는 거야. 그녀의 골수가 당신과 일치할지도 몰라.”이 말은 마치 몽둥이처럼 변진희의 머리를 내리쳤고, 그녀는 어지러웠다.“뭐, 뭐라고?”변진희의 반응을 보니, 그녀도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아 백정일은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고 직접 손에 든 증거를 내놓았다.“한 번 봐.”변진희는 친자확인 보고서를 보고 안색이 크게 변하여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지아가 어떻게 내 딸이 아닐 수 있어?”지아는 변진희의 감정을 달래며 말했다.“엄, 아주머니, 일단 흥분하지 마세요. 나도 방금 이 소식을 알았는데, 아주머니와 같은 반응이었어요. 이 보고서는 가짜일 리가 없으니 틀림없이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을 거예요. 잘 생각해 보세요, 확실히 임신한 건 맞나요?”변진희는 중얼거렸다.“나는 비록 네 아빠를 좋아하진 않았지만, 내가 임신을 한 일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어. 그때 나는 입덧이 매우 심했고, 줄곧 몇 달 동안 토해서 엄청 짜증이 났거
백정일은 변진희의 손을 잡고 위로했다.“울지 마. 내가 당신 대신해서 친딸을 꼭 찾아줄게. 지아와 할 말이 많겠지? 그럼 나도 먼저 나가 있을게.”방안에는 두 사람만 남았고, 소지아와 변진희는 서로를 쳐다보았는데, 한동안 두 사람은 아직 현재의 신분에 적응하지 못했다.그것도 변진희가 먼저 이 기괴한 분위기를 깨뜨리며 지아의 손을 잡고 말했다.“우리가 친모녀든 아니든 결국 내가 너에게 빚진 거야. 지금 내가 불치병에 걸린 것도 다 내가 마땅히 받을 벌이고.”“아주머니,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일치한 골수를 찾는 건 시간 문제이나 푹 쉬세요.”“네 아버지는 괜찮아?”“그는…….”지아는 고개를 저었다.“여전히 그대로예요.”그때 병원에서 일어난 일은 이미 봉쇄되어 일반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몰랐다.지아조차도 구체적인 사상자 수를 알지 못했다.“만약 네 아버지가 깨어난다면, 그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이번 생엔 내가 그의 마음을 저버렸으니까. 그는 정말 좋은 사람이야. 이런 고난을 당해서는 안 될 정말 좋은 사람이지.”사람은 궁지에 몰렸을 때만 전에 발견하지 못했던 아름다움을 깨달을 수 있었다.비록 이 10여 년 동안 지아는 변진희를 기다리다 지쳤지만, 이 순간, 병상에 누운 그녀를 보면서 지아는 이미 원망을 내려놓았다.어머니로서 변진희는 확실히 책임을 다 하지 못했지만, 혈연관계는 정말 신기했다.몸에 같은 피가 흐르지 않았기에 변진희만 이렇게 차가운 여자인 것일지도 모른다.변진희의 상태가 좋지 않아 지아도 많이 말하지 못했다. 사실 두 사람의 현재 신분은 매우 어색해서 딱히 할 말도 없었다.지아는 몇 마디 당부한 다음 병원을 떠났다.그리고 사거리에 서서 쉬지 않고 오가는 차를 바라보았다.지아는 막연함을 느꼈다. 할 일이 그렇게 많은데도 그녀는 어떤 일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변진희는 지아의 어머니가 아니었으니 소계훈 역시 그녀의 친아버지가 아닐 확률이 높았다.‘그럼 내 진짜 가족은 어디에 있을까?’‘이렇게 오래
갑자기 발생한 일은 소지아의 모든 계획을 망쳤고, 그녀도 이 사람을 버릴 수 없었다.의사가 환자는 위험에서 벗어나 곧 깨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자 지아는 그제야 급히 떠났다.남자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다음, 자신이 다른 마음씨 착한 사람에 의해 병원에 보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바로 고마움을 표시하려 했다.“이거 정말 안 됐네요. 그 아가씨는 환자분을 대신해서 비용을 납부하고 바로 떠났어요.”“그녀는 떠난지 얼마 됐죠?”“얼마 안 됐어요.”남자는 몸을 돌려 침대에서 내려왔고, 간호사는 뒤에서 소리쳤다.“지금 갈 수 없어요. 아직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요.”남자는 듣지도 않고 빠른 걸음으로 쫓아갔다.길가에서 그는 가녀린 뒷모습만 보았을 뿐,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지아는 이미 택시에 올랐다.지아는 택시를 타고 묘지에 도착했는데, 꽃집을 지날 때 할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꽃을 샀다.이번에 그녀는 먼저 할머니의 무덤으로 찾아갔고, 꽃을 묘비 옆에 놓은 다음 얘기를 나누었다.그런 일이 없었다면 지아는 더 이상 이예린의 무덤에 발을 들여놓고 싶지 않았다.날은 이미 개였고, 사방은 마른 가지와 낙엽으로 가득했는데 마치 어젯밤의 광풍과 폭우를 원망하고 있는 것 같았다.지아는 다시 이예린의 무덤으로 갔다. 그녀는 묘비 위의 그 사진을 자세히 살펴보았다.그리고 처음 왔을 때와는 기분이 많이 달랐는데, 그때의 지아는 그녀가 젊은 나이에 죽었다고 불쌍하게 여겼다.지아는 몸을 웅크리고 손을 뻗어 소녀의 얼굴을 가렸고 오직 두 눈만 드러냈다.‘맞아, 바로 이런 눈빛이야!’‘날 죽이려는 사람의 눈빛은 이 아이와 똑같아.’물론 이것은 단지 지아의 추측일 뿐, 진정한 증거를 얻으려면 오직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그녀의 눈빛은 묘비 뒤의 무덤에 떨어졌다.그러나 무덤을 파서 뼈를 꺼내려면 도윤의 동의가 필요했다. ‘그는 여동생을 그렇게 아꼈으니 동의할까?’지아는 자신이 없었다.그녀가 몇 번 더 보았을 때, 갑자기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무덤 주
방안은 매우 어두웠다. 이도윤이 편안하게 잠들 수 있도록 그들은 커튼을 꽁꽁 쳤고 소지아는 살금살금 가서 커튼을 살짝 당겼는데, 방에 그제야 한 줄기 빛이 들어왔다.지아는 조심스럽게 침대 옆으로 향했고, 만약 예전 같았으면 도윤은 아마 벌써 깨어났을 것이다.그러나 지금 그는 두 눈을 꼭 감고 옆에 링거까지 놓여 있었다.지아는 손을 뻗어 도윤의 뜨거운 이마를 살펴보았는데, 열이 아직 내리지 않았다.도윤의 몸은 줄곧 아주 좋아서 이렇게 아픈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이예린의 일은 그가 깨어난 후에 다시 이야기해야 할 것 같군.’지아가 손을 떼자마자 도윤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다음 순간, 남자는 그녀를 세게 잡아당기더니 지아는 남자의 품속으로 떨어졌다.지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도윤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그의 쉰 목소리를 들었다.“가지 마.”지아는 그의 두 눈동자를 마주했고, 한 줄기 빛을 빌어 그녀는 도윤의 어렴풋이 붉어진 두 눈을 보았는데, 마치 불쌍한 아이와 같았다.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지만 끝내 반항하지 않고 얌전히 그의 품에 기댔다.도윤은 매우 기뻐했고 두 팔은 그녀를 꼭 안았다.뜨거운 기운이 사방팔방에서 지아를 감싸고 있어서 그녀는 매우 불편했다.그들은 이미 오랫동안 이렇게 친밀한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옛 애인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지아는 좀 어찌할 바를 몰랐다.“힘 좀 풀어, 나 숨 막힐 것 같단 말이야.” 지아는 작은 소리로 항의했다.도윤은 여전히 잠을 자는 상태라 손을 놓기는커녕 오히려 그녀를 더욱 꼭 껴안고 입으로 끊임없이 중얼거렸다.“지아야, 내가 잘못했어, 내가 정말 잘못했으니까 날 떠나지 마.”지금은커녕 이 장면은 예전에 놓아도 꽤 충격적이었다.도윤은 높은 곳에 있는 신과도 같은 존재였으니, 그가 어떻게 잘못을 할 수 있겠는가?그러나 지금 무기력한 아이처럼 잘못했다고, 떠나지 말라는 말만 계속 중얼거리다니.지아는 또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남자의 손가락이 갑자기 그녀의 얇은 옷 속으로
소지아는 깜짝 놀랐다. 전에 배에서 이도윤은 비록 자신을 건드렸지만 가볍게 키스를 했을 뿐이었다.지아가 이상함을 깨달았을 때, 그녀는 이미 도윤의 함정에 걸려들어 벗어날 수 없었다.도윤은 마치 원시림의 덩굴처럼 한사코 그녀를 휘감고 있었고, 잠시도 숨을 돌릴 기회를 주지 않았다.멀쩡한 상태였다면 도윤은 아마 지아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껴 조심스럽게 행동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 도윤은 정신이 없었고 완전히 본능에 따라 몸을 움직였다.지아는 발버둥쳤지만 소용없었다.그녀에게서 나는 익숙한 냄새를 맡고서야 도윤은 비로소 안정감을 느꼈다.“이도윤, 정신 차려. 너 지금 뭐 하는지 알기나 하는 거야?”도윤은 지아의 손을 머리 위로 들어 가볍게 그녀의 공격을 피했다.그의 이마에는 땀이 촘촘히 배어 있었고, 목구멍은 칼에 베인 것처럼 잠겼다.“지아야, 나는 지금처럼 이렇게 멀쩡한 적이 없어. 내가 말했지, 우리에게 또 아이가 있을 거라고.”아이…….지아는 도윤이 왜 아이에 집착하고 있는지 몰랐고, 그녀는 지금 도망가고 싶을 뿐이었다.“놔, 이도윤, 아니면 널 평생 증오하게 될지도 몰라.”“만약 증오가 우리 사이의 사슬이 될 수 있다면, 그렇게 해.”방안에는 한 줄기의 빛만 쏟아져 들어왔는데, 마침 도윤의 턱에 떨어졌다.그의 얼굴은 어둠 속에 숨어 마치 어두운 밤의 장미처럼 아름다운 꽃을 피웠다.매혹적이면서도 강한 독을 지니고 있었다.……남자는 고열 속에서 깊이 잠들었고, 지아는 이를 악물고 욕실에 가서 씻은 다음 잊지 않고 도윤의 몸까지 한바탕 정리했다.그가 이것이 꿈이라고 생각한 이상 이 일을 꿈으로 만들면 됐기에 지아는 더 이상 도윤과 얽히고 싶지 않았다.지아는 아무렇지 않은 척 떠났다.“열이 심하게 나서 아직 깨어나지 않았어.”“의사는 이미 링거를 놓아주었는데, 아이고, 이렇게 계속 열이 나는 것도 방법이 아닌데 말이죠.”진봉은 틈틈이 말했다.“사모님, 그동안 대표님은 한 번도 제대로 쉬지 못했어요. 특히 사모님에게
이도윤은 잠을 아주 오래 잤는데 날이 어두워질 때에야 천천히 깨어났다.눈을 뜬 순간, 그는 가장 먼저 자신의 곁을 바라보았고, 아무도 없었다.이불을 젖히자 도윤은 멀쩡하게 차려입은 자신을 바라보았다.그리고 마음속으로 영문 모를 실망을 느꼈다.‘내가 지아를 너무 그리워하고, 그녀를 잃을까 봐 너무 두려워서 그런 꿈을 꾸었단 말인가?’만약 이 시기에 도윤이 정말 그런 짓을 했다면 지아는 틀림없이 그를 더욱 싫어할 것이다.그는 어질어질한 머리를 짚었다. 이번에 도윤은 마침내 피로를 깨끗이 씻어냈고, 열까지 내려가서 정신도 많이 들었다.목욕을 하고 상쾌하게 나가자, 장씨 아주머니는 앞치마를 입은 채 주방에서 바쁘게 들락날락했다.도윤이 내려오는 것을 보자마자 그녀는 상하게 말했다.“도련님, 드디어 깨어나셨군요. 이렇게 오랫동안 주무셨으니 배고프시죠? 안심하세요. 제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요. 오늘은 도련님과 사모님이 좋아하는 음식을 가득 만들었어요.”도윤은 눈썹을 찌푸렸다.“사모님?”“그래요, 참, 사모님이 도련님을 보러 왔을 때 도련님은 아직 고열이 내리지 않아서 사모님이 온 일도 몰랐겠네요.”도윤의 깊은 눈빛은 순식간에 밝아졌다.“그녀가 아직도 여기에 있다고?”“네, 사모님도 엄청 피곤해 보였어요. 도련님을 찾아 무슨 말을 하려다, 도련님께서 열이 나는 것을 보고 방해하지 않고 옆방에 가서 주무셨는데.”아주머니는 갑자기 도윤의 손을 잡더니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도련님 마음속에 아직 사모님이 있다는 거, 저도 알아요. 그러니 이번 기회를 잘 잡아요. 사람을 더 이상 화나게 하지 말고. 하루 종일 잤으니 얼른 가서 사모님 불러 식사해야죠.”“음.”도윤은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비바람은 이미 멈추었다. 마치 그와 지아의 관계처럼, 잠시 싸움을 멈춘 것 같았다.이예린에 관해서 도윤은 아직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다.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그의 머릿속에는 마치 두 사람이 다투고 있는 것 같았다.“그녀를 사랑한다면 그녀에게 모든
소지아는 전에 이도윤의 사랑을 받던 그 시절을 꿈꾸었다.그는 자신이 무심코 장미가 아름답다고 한 말에, 특별히 그녀를 위한 장미 장원을 만들어 줄 수 있었다.그 안에는 수십 가지의 모양과 색깔이 제각기 다른 장미꽃이 있었고, 원예사가 잘 다듬고 있었다.도윤은 일년이란 시간을 들여 장미 정원을 만들었는데, 완성한 그날은 마침 지아의 생일이었다.그는 그날 접대가 있어서 그녀와 저녁을 먹을 수 없다고 말했다.지아는 전화를 끊은 뒤 실망을 감추지 못했지만 도윤을 탓하지도 않았다.이씨 집안의 권력이 모두 그의 손에 있는데다, YH 그룹 아래에는 또 수많은 크고 작은 산업이 있었기에 그가 바쁜 것도 당연했다.‘단지 내 생일을 잊어버렸을 뿐이잖아. 어차피 해마다 보낼 수 있고, 난 아직 젊었으니 그와 함께 수많은 생일을 보낼 수 있어.’그날 점심, 지아는 자신에게 작은 케이크를 구웠는데, 기분이 좋지 않아서 여러 개의 케이크를 구웠지만 모두 실패했다.그래서 지아는 맛있든 없든 실패한 케이크 위에 크림을 마구 발랐다.그리고 작은 입을 삐죽 내밀며 도윤이 저녁에 돌아오면 그에게 먹이려고 했다.지아는 하루가 이렇게 길다는 것을 처음 느꼈다. 이날, 도윤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오히려 진봉이 찾아왔다. 그는 그녀를 데리고 갈 곳이 있다고 했다.지아는 그렇게 아무 것도 모른 채 낯선 곳으로 끌려갔고 진봉은 심지어 그녀의 눈을 가렸다.그녀는 남자가 무엇을 하려는 몰랐지만, 안대를 벗기도 전에 향기를 맡았다.그것은 치자나무처럼 단아하지 않는 짙은 향기였다.누군가가 지아의 안대를 벗었는데, 그녀는 지척에 서 있는 정장을 입은 남자가 입가에 옅은 웃음이 어려 있는 것을 보았다.그리고 그녀는 손을 뻗어 그를 두드렸다.“돌아오지 않는다면서…….”말이 뚝 그치더니 지아는 그제야 자신과 도윤이 뜻밖에도 장미밭에 처해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눈에 들어오는 것은 온통 크고 아름답게 핀 꽃송이들이어서 지아는 눈이 휘둥그레졌다.“너, 너, 너…….”지아는 놀라서 말까지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