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윤은 소지아를 위로한 다음 선실을 나섰다. 그리고 문이 닫힌 그 순간, 지아는 그제야 긴장을 천천히 풀 수 있었다.그녀는 손바닥에 맺힌 땀을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언제부터 나와 이도윤은 이렇게 서로를 방비하는 관계가 되었을까.’애인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며 상사와 직원의 관계도 아니었다.지아는 두 사람의 관계를 형용하기가 매우 어려웠다.그러나 도윤이 주원을 귀찮게 하지 않는 한, 오늘은 성공한 셈이었다.갑판 위, 광풍과 소나기를 맞으며 주원은 온몸이 이미 흠뻑 젖었다.도윤은 위아래로 주원을 한 번 훑어보았는데, 그의 눈빛을 마주하며 주원은 오히려 등을 곧게 펴고 조금도 굴복하려는 뜻이 없었다.그리고 맑은 두 눈은 도윤의 몸에 떨어졌다.사실 도윤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바로 주원과 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보기에 무척 단순했다.그래서 지난번 유람선에서 주원이 지아에게 그런 일을 하려고 했어도 도윤은 그냥 그를 아이라 생각하고 마음에 두지 않았다.지금 도윤은 오히려 주원이 신경 쓰였다. 그는 용감하고 생각이 있었는데, 만약 도윤이 즉시 반응하지 않았다면 그는 이미 성공했을 것이다. 그럼 그때 가서 다시 지아를 찾는 것은 하늘에 오르는 것보다 더 어려울 것이다.결국 주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이 대표님, 날 어떻게 처리하려는 거죠?”“나는 지아에게 널 다치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어. 그리고 난 말하는 대로 하는 사람이거든.”도윤은 주원의 눈빛을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그는 뜻밖에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주원은 지금 이미 생사에 관심이 없거나, 아니면 진작에 도윤이 자신을 어떻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을 것이다. 아무튼 모든 것은 주원의 예상대로였다.남에게 간파당한 이런 느낌에 도윤은 매우 불쾌했다.그러나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몸에 상처가 있다고 들었는데, 이제 약을 발라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들어와, 내가 사람 시켜 상처 싸매주라고 할게.”주원은 놀라움을 느꼈다.“당신…….”도윤은 차갑
진환은 말을 이어받았다.“그때 유람선에서는 백채원 아가씨가 다른 사람을 통해 그런 일을 꾸몄는데, 마침 그를 이용했죠. 만약 그가 진작에 문제를 발견하고 또 스스로 그 주스를 마셨다면, 이 소년은 정말 무서운 사람이군요!”“무서울 뿐만 아니죠. 그날 만약 대표님이 제때에 도착하지 않았다면 사모님은 기필코 당했을 거예요. 그때가 되면 그는 모든 일을 약효에 떠넘길 것이고, 자신은 아무 핑계나 대고 빠져나갔겠죠. 정말 공포스럽군요.”“그가 사모님의 아버지를 구했든 안 구했든, 오히려 그 일을 구실로 삼아 부상을 입어 사모님으로 하여금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다니. 지금 이 순간까지 사모님은 여전히 그를 동생처럼 생각하고 있지만, 사모님에 대한 그의 감정은 결코 그렇게 간단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이도윤은 눈살을 찌푸렸고, 검은 눈동자는 아주 차가웠다.“내가 시킨 일은 어떻게 됐지?”“안심하세요. 그를 보내기 전, 이미 트렁크에 추적기와 도청기를 설치했습니다.”“도착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감시하게 하고, 절대로 들키면 안 돼.”도윤은 이 소년이 미리 준비하고 왔다는 것을 직감했다. 오늘 자신에게 잡혔으니 그는 틀림없이 다른 대책이 있을 것이다.“그럼 이 일을 사모님에게 알려야 합니까?”“아니.”진봉은 불평했다.“왜 사모님에게 말하지 않는 거죠? 이렇게 되면 사모님은 그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대표님을 줄곧 나쁜 놈이라 생각할 거잖아요.”진환은 그의 이마를 두드렸다.“멍청하긴. 그는 사모님의 마음속에 있어 이미 아주 좋은 사람이라고. 우리는 지금 확실한 증거가 없으니 사모님이 너의 말을 믿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이런 사람을 상대하려면 너는 그보다 더 예리해야 돼.”“그는 지아를 노리고 있으니 결코 이 두 가지 일만 한 게 아닐 거야. 잘 지켜보라고 해. 의외의 수확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도윤은 마지막 담배를 끄고 몸을 돌려 떠났다.진봉은 말을 하려다가 멈추었고, 진환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입단속 잘 해. 사모님한테
이날 밤, 바깥의 천둥과 번개, 그리고 수시로 흔들리는 배에 소지아는 이도윤의 품속에서 영문도 모른 채 깊이 잠들었다.그녀는 오랫동안 잠도 잘 못 잤고, 꿈에서도 자신이 다시 납치될까 봐 두려웠다.다시 한번 납치를 당하면, 지아는 틀림없이 목숨을 잃을 것이다.잠결에 지아는 줄곧 잠꼬대를 했다.“당신 도대체 누구지? 왜 나를 죽이려고 하는 거지!”“으악!”도윤은 지아를 꽉 껴안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대고 위로했다.“지아야, 두려워하지 마, 내가 있어.”지아의 정서는 서서히 가라앉았지만 도윤은 잠이 오지 않았다.희미한 빛을 빌어 지아의 수척한 얼굴을 바라보며, 도윤은 그녀의 가녀린 손을 만졌다.그리고 머릿속에 저도 모르게 과거의 지아를 떠올렸는데, 그녀는 항상 웃길 좋아하는 여자였다.방금 자신에게 시집왔을 때조차도 지아의 얼굴에는 젖살이 좀 있었고, 얼굴은 약간 앳돼 보였다.그때와는 달리, 지금의 지아는 살이 많이 빠졌고, 얼굴은 더욱 정교해졌지만 과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두 사람의 최근 만남을 떠올리니, 모두 슬픔과 분노로 가득 찼다. 도윤은 이미 오랫동안 지아가 진심으로 웃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도윤은 마음속으로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이 2년간의 괴롭힘이 아니었다면, 지아처럼 밝고 강인한 사람은 절대로 이렇게 빨리 시들지 않았을 것이다.그는 손을 뻗어 지아의 얼굴을 만지려 했지만, 그녀의 볼에서 1센티미터 떨어졌을 때, 도윤은 오히려 멈추었다.죄책감이 밀려오자 그는 뜻밖에도 겁을 먹었다.비록 도윤은 이미 남은 인생을 다 바쳐 지아를 치유할 준비가 되었지만, 최근 몇 년 동안 그녀가 받은 상처를 생각하면, 그는 가장 그녀의 곁에 있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지아는 아주 오랫동안 잠을 잤는데, 마치 요 며칠 부족한 수면을 모두 보충하려는 것 같았다.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바깥의 번개 소리는 이미 사라졌고, 창문을 통해 밖을 보니, 바깥의 날씨는 화창했다.곁에는 도윤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고양이
오늘의 바닷바람이 너무 부드러워서인지, 아니면 석양이 너무 따뜻해서인지, 아니면 소지아가 엄동설한에 오래 갇힌 외로운 환자라서인지, 그녀는 남의 조그마한 호의에 천천히 방비를 내려놓았다.지아는 귀신에 홀린 듯 이도윤의 뒤를 따라 섬에 올라갔는데, 하루는 매우 얌전해서 그녀가 떠나는 것을 보고 쉴 새 없이 따라갔다.이 섬은 매우 아름다웠다. 비록 크지는 않지만 시설은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섬에는 많은 꽃들이 심어져 있었고, 사시사철 그에 맞는 꽃이 피곤 했다.예를 들어 지아가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의 양쪽에는 큰 벚꽃이 가득 심어져 있었다.인공의 간섭 없이 벚꽃은 자유롭게 자라고 있었고, 길가에는 이미 두꺼운 꽃잎이 깔려 있었다.미풍이 불면, 온 하늘에는 꽃잎이 흩날리고 있었다.하루는 이곳이 마음에 들었는지 꽃밭에서 힘껏 뒹굴었다.그리고 바로 옆에는 아름다운 바다가 있었는데, 바닷물은 아주 맑았고 조금의 티끌도 없었으며 해변의 모래조차도 아주 부드러운 우유 빛깔이었다.파도는 잔잔했고, 부드러운 햇빛에 흠뻑 젖은 해면 위에는 자잘한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의심의 여지없이 이곳은 매우 아름다웠다!마치 천국처럼, 5분만 있으면 모든 불쾌함을 잊을 수 있었다.도윤은 가볍게 지아의 손을 잡고 섬 가운데로 걸어갔다. 지아는 벚꽃 숲을 떠나 또 은행나무를 심은 길을 지나갔다.도로 양쪽에는 100년이 넘은 은행나무들이 심어져 있었고, 나뭇가지에는 새싹이 나타났는데, 가을이 되면 이곳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더 앞으로 가면 매화들이었다.그곳에는 과수원, 날짐승, 그리고 비옥한 땅도 있었다.이것은 바로 지아가 전에 도윤에게 말한 그 환상의 하우스였다. 이런 무인도에 있으면 지아는 바깥의 소란과 번뇌 따위를 잠시 잊을 수 있었다.그 하우스의 다지인조차도 도시의 별장과 달리 대나무와 일반 나무로 지어져 풍격이 원시적이지만, 안의 설비는 매우 현대적이었다.이곳은 하루 이틀 건설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기에 지아는 나름 감동
소지아는 진봉과 진환이 모두 오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이 섬에는 적지 않은 하인과 셰프가 있었는데 그녀에게 특별히 해산물 만찬을 준비해 주었다.지아는 말을 하지 않고 죽 먹는 것에 몰두했다.이도윤은 이 어색한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먼저 말문을 열었다.“지아야, 너 전에 말이 정말 많았잖아.”지아는 멈칫했다. 그렇다, 예전에 그녀는 말이 적지 않았다.그때의 도윤은 매일 바빴는데, 그는 항상 출장을 가거나 회사에 있어서 그녀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매우 적었다.지아는 도윤과 함께 있는 매 순간을 매우 소중히 여겼기에 말을 하면 안 되는 식사 시간에 그녀는 오히려 가장 활발했고, 작은 입을 놀리며 끊임없이 얘기를 했다.그러다 여러 번 사레가 들려 계속 기침을 해도 지아는 물 몇 모금을 마시고는 계속 웃음을 지었다.하지만 지금, 지아의 표정은 기쁘지도, 심지어 슬프지도 않았다.지아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술을 닦으며 반문했다.“그럼 내가 무슨 말을 했으면 좋겠어? 요즘 일이 잘 돼가냐고 물어봐 줘?”도윤은 말문이 막혔다. 언제부터인지 그와 지아는 정상적인 소통조차 없었다.그도 입맛이 떨어져 포크를 내려놓고 씁쓸하게 말했다.“나는 네가 기뻐할 줄 알았어. 여긴 코코넛, 파도, 모래사장, 햇빛이 있으니까, 내일 우리 잠수하러 가자.”지아는 가볍게 웃었다.“그럼 난 앞으로 오랫동안 여기서 지내야 하는 거야?”“너 살이 많이 빠졌더라. 섬에서는 아무도 널 방해하지 않을 테니까 몸 좀 잘 조리해. 그리고 난 이미 사람 시켜 네 아버지를 추적하라고 했어. 소식이 있으면 가장 먼저 너에게 알려줄게.”“이거 그냥 변칙적인 구금이잖아?”다만 이번에 지아가 구금된 철장은 범위가 좀 커졌다. 도윤은 더 이상 그녀를 가둘 필요가 없었는데, 여긴 사방이 바다여서 지아는 도망갈 길이 전혀 없었다.그녀는 바로 도윤에게 갇힌 애완 동물이었고, 철장을 바꾸어도 처지는 여전히 같았다.“난 그런 뜻이 없어, 그냥…….”그러나 지아는 더 이상 도윤이 말하는
이도윤은 몇 개월 전부터 왠지 모르게 불안하기 시작했다. 그는 소지아가 아파서 이렇게 수척해진 것일까 봐 두려웠다. 이 때문에 도윤은 특별히 지아에게 전신 검사를 했는데, 그 결과 그녀는 큰 병이 없었다.지아가 약을 먹고 있는 것을 보고, 도윤은 즉시 긴장했고, 그녀는 이미 약을 삼켰다.그리고 지아는 물 한 모금을 들이켠 다음 휴지로 입가의 물을 닦고서야 손을 도윤에게서 빼냈다.“위약.”‘참, 그녀에게 위장병이 있었지, 오래 전에 이미 말한 것 같은데.’도윤은 눈살을 약간 찌푸렸다.“내일 의사더러 한 번 오라고 할게.”“이미 나한테 검사를 해 봤잖아? 당신도 그 결과를 보았고. 난 아주 건강하다고!”지아는 말하면서 입가에 싸늘한 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신체검사받은 날, 도윤의 그 표정을 떠올렸다.전에 그녀는 몇 번이나 자신이 아프다고 말했지만 결국 도윤의 비웃음만 받았다.그래서 지아는 더 이상 비굴하게 도윤에게 설명하고 싶지 않았고, 괜히 욕을 먹고 싶지도,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았다.도윤은 고개를 숙이고 지아의 약병을 바라보았는데, 그 위에는 아무런 글자도 없었다.“이 약에는 왜 아무런 정보가 없지?”지아는 답답하게 말했다.“한 병의 양이 너무 적어서. 난 귀찮아서 아예 몇 병의 약을 한 병에 담았고.”이것은 주원이 특별히 지아에게 가져다준 약인데, 전에 제때에 약을 먹어야 한다고 신신당부하였다.그녀의 설명은 도윤으로 하여금 조금의 문제도 발견하지 못하게 했고, 지아는 이미 뒤로 물러났다.“나 이제 쉬러 가도 되는 거야?”도윤은 입을 벌렸지만 결국 한 글자도 말하지 못했다.지금의 지아는 이미 그와 한담을 나누고 싶지 않았고, 그의 기분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며 심지어 그와 말다툼조차 하지 않았다.그녀는 햇빛도 광풍과 폭우도 없는 사해처럼 발버둥치는 것조차 원하지 않았다.이런 지아의 모습에 도윤은 더욱 괴로웠다. 그는 그녀가 차라리 자신을 때리고 욕하는 것을 원했고, 이렇게 다투지도 떠들지도 않고 낯선 사람처럼 자신을 대하는
환한 반딧불 속에서, 이도윤의 표정은 유난히 진지해 보였다.소지아는 마른 입술을 핥으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이도윤, 넌 도대체 충동 때문에 백채원 씨와 함께한 거야 아니면 정말 그녀가 네 첫사랑이라서 그런 거야?”도윤은 쓴웃음을 지었다.“만약 첫사랑에 대해 미련이 남았다면, 내가 왜 너와 결혼했겠어? 지아야, 넌 정말 널 향한 내 마음을 모르는 거야?”도윤은 지아에게 상처를 입혔지만, 그녀에게 잘해 준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아도 줄곧 손 놓기 아쉬워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럼 충동 때문이겠네? 날 질투하게 하기 위해서?”2년이란 시간이 흐르면서 비록 그들은 이미 끝났지만, 지아는 여전히 사실을 알고 싶었다.도윤은 갑자기 그녀를 껴안았고, 지아는 그가 자신의 귓가에 대고 한숨을 쉬는 것을 들었다.“지아야, 나와 그녀의 일은 내가 있는 그대로 말해줄게. 그러나 지금은 안 돼. 지아야, 날 마지막으로 믿어줄 순 없어?”지아가 거절할까 봐 두려운 듯 도윤은 또 한마디 덧붙였다.“인터넷에서 떠도는 첫사랑이니 뭐니 하는 소문 믿지 마. 나에게 있어 그녀는 그저 같이 자란 여동생일 뿐이야. 그러나…….”도윤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지아와 눈을 마주쳤다.“나에게는 확실히 첫사랑이 있어. 그 사람은 백채원이 아니라…….”지아는 그의 뜨거운 눈빛을 마주하며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벚꽃과 반딧불이는 두 사람의 주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는데, 이곳의 모든 것은 말도 안 될 정도로 아름다웠고, 도윤에 대한 그녀의 혐오감도 점차 희미해졌다.도윤이 막 입을 열려고 할 때, 주머니속의 휴대폰이 끊임없이 진동했다.조용한 섬, 이 늦은 밤에 새들까지 모두 휴식하고 있었기에 오직 진동소리만 울리고 있었다.“받아.” 지아가 담담하게 말했다.도윤은 번호를 확인해 보았는데 진환이었다.그는 분명 중요한 일로 자신에게 전화하는 것이었기에, 도윤은 어쩔 수 없이 받았다.“음.”“대표님, 큰일 났습니다.”도윤은 진환이 무슨 일을 말하는 건지 몰랐
이도윤은 소지아의 표정을 살피며 계속 말했다.“네 어머니가 아픈 것에 대해 알고 있는 거야?”“응,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골수를 기증할 생각이 없어.”“아주 잘 생각했어. 사실 나도 네가 더 이상 그 여자와 얽히는 것을 원하지 않거든. 요 며칠, 백정일은 많은 정력을 들였지만 줄곧 그녀의 골수와 일치하는 사람을 찾지 못했어. 그리고 지금 너만 골수 검사를 하지 않았고.”“백씨 집안이 날 가만두지 않을 것 같아?”“틀림없을 거야. 나는 백정일의 성격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거든. 이렇게 말하면 넌 기분이 나쁠 수 있겠지만, 그는 네 어머니를 확실히 사랑하고 있어. 네 어머니를 살릴 수만 있다면 그는 모든 대가를 치를 수 있다고.”도윤은 두 손을 들어 지아의 어깨에 올려놓으며 설득했다.“지아야, 우리 사이에 많은 오해가 있지. 나는 전에 너를 아프게 했지만, 지금 널 보호하려는 마음은 진심이야. 네 아버지는, 내가 사람을 더 파견하여 찾을 테니까 넌 순순히 이곳에서 한동안 휴식하는 게 어때? 내가 모든 일을 다 처리하면 널 데리러 올게.”이때 바깥의 잔디밭에서 헬리콥터 프로펠러 소리가 나더니 어느새 도윤을 재촉하는 의미가 더해졌다.지아는 도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알겠어.”도윤은 지아의 머리를 안으며 그녀의 이마에 키스를 했다.“지아야, 나에게 시간을 좀 줘. 내가 모든 일을 다 조사할게. 난 우리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장담해.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너에게 줄 수 있단 말이야.”한동안 지아는 어떻게 대답해야 도윤을 화나게 하지 않을지 몰랐다.도윤은 주머니에서 반지 두개를 만져냈는데 그것은 바로 그와 지아의 결혼반지였다.그는 지아의 손가락을 잡고 그녀에게 끼워줬는데, 진지한 모습은 그때와 똑같았다.지아는 이런 남자가 어떻게 변심할 수 있는지 정말 납득할 수가 없었다.지윤의 존재는 바로 도윤이 바람을 피운 증거였다.반지가 지아의 야윈 손가락에 끼워졌지만, 전보다 많이 컸다.그녀는 살이 많이 빠졌고 손가락까지 가늘어졌다.지아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