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익은 방울 소리가 들리자 거대한 붉은 뱀이 빠르게 기어 왔다. 비록 진작에 이 뱀을 본 적이 있는 진봉과 지환이었지만, 이번에 다시 마주했을 때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산처럼 거대한 몸집의 뱀이 혀를 날름거리며 내뿜는 기운은 소름이 끼칠 정도였으니 말이다.특히 수직으로 된 동공이 사람을 바라볼 때면 진봉은 곧 세상을 떠난 외할머니를 만나러 갈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예린 역시 이렇게 큰 뱀은 처음 보는 터라 깜짝 놀랐다.게다가 그 뱀은 한 눈에도 독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에, 긴장한 예린은 몸을 움츠리며 숨을 죽였다. 하지만 일행 중 누구도 뱀을 피하려 하기는커녕 오히려 무무가 뱀을 향해 몇 걸음 다가갔다. “조심해!”예린은 본능적으로 무무를 잡아당기려 했으나,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그 거대한 뱀이 순순히 고개를 숙이며 무무 앞에 몸을 웅크린 것이었는데, 그렇게 거대한 몸집을 가진 뱀이 어린 소녀 앞에서 고분고분하게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무무는 거대한 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마치 ‘오랜만이야’라고 인사하는 듯했다. 예린은 지금껏 수많은 황당한 일을 겪었지만, 이런 장면은 처음이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무는 거대한 뱀 위에 올라타고 일행에게 손짓으로 말했다.“이제 출발해요!”지아의 상태는 조금도 지체할 수 없었고, 시월은 기진맥진한 상태로 입에는 헝겊이 물려 있고, 양손이 묶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시월은 그저 묵묵히 일행을 따라가며 그 기괴한 숲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작은 마을은 여전히 옛 모습 그대로였고, 세월이 흘러도 바깥의 화려한 도시와는 달리 전혀 변화가 없었다. 아무리 5년, 10년이 흘러도 가장 원초적이고 순수한 모습을 간직한 그 모습 그대로였다. 마당에서 약초를 말리던 조원주는 방울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무무는 재빨리 조원주를 향해 달려갔고, 조원주는 손에 든 당귀를 곧장 내려놓았다. “아가, 방학하면 날 보러 올 줄 알았단다.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니
예린이 진봉을 가로막으며 말했다.“죽이면 안 돼요. 만약 소시월이 한 말이 사실이라면, 새언니의 목숨은 저 여자랑 연결되어 있는 거잖아요. 소시월을 죽이면 새언니도 살 수 없게 된다고요!” 진봉은 나무 바가지를 바닥에 내던지고, 계단에 털썩 주저앉았다.“아가씨, 이게 대체 무슨 일이죠? 우리 대표님이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세요? 사모님께서 사라졌던 몇 년 동안 대표님은 하루하루 지옥 속에 살았어요. 분명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왜 이런 고난을 겪어야 하죠? 저 X처럼 나쁜 사람들은 멀쩡하게 잘만 살잖아요!” “정말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아요! 왜 저런 사람들은 일찍 죽지도 않는 거냐고요!” “알아요, 다 알아요.”“저는 오빠가 새언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에요. 지금 이 상황까지 오게 된 것도 저 때문이고요. 그래서 저도 소시월은 죽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요. 소시월은 절 속이고 새언니에게 해를 입히게 만들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잖아요. 소시월의 목숨을 붙들고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단 말이에요!” 눈가가 붉어진 진봉은 억울한 마음을 참지 못했는데, 진봉이 이렇게 슬퍼했던 건 도윤이 독에 중독되었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도윤이 독이 너무 깊어 곧 죽을 것이라 했지만, 도윤은 간신히 살아남았다. 하지만 1년도 안 되어 지아가 독벌레에게 당하고 만 것이었다.진봉은 문가에 서 있는 도윤을 바라보았는데, 도윤은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심각한 표정으로 방 안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토록 초조하면서도 신중한 모습은 예전의 도윤과 전혀 달랐다. ‘하늘은 왜 이렇게 무심한 걸까? 왜 이렇게 두 사람을 끊임없이 시험하는 거냐고...’한편, 진환은 구석에서 담배를 한 대 피우며 답답한 분위기 속에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먹을 것 좀 줘. 아가씨 말이 맞아. 그 여자를 죽이면 안 돼.” 시월은 이미 부상을 입은 데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거의 하루 동안 굶주린 상태였다. 그야말로 반쯤
조원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원칙적으로는 그래. 하지만 상대가 지아에게 이렇게 강한 독벌레를 심을 정도라면 절대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야. 지금 지아의 목숨은 그 사람의 손에 달려 있으니, 그 사람이 목숨을 빌미로 협박하면 너희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 거야.” “그럼 이제 어쩌죠?”“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맞서야 해. 상대가 지아에게 독벌레를 심었다면 우리도 그 사람에게 독벌레를 심어야 한다는 거지. 그래야만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할 수 있을 거고, 나중에 그 사람이 배신하려 해도 너희가 끌려 다니지 않을 수 있어.” 도윤의 눈동자에 한 줄기의 희망이 비쳤다.“저는 독벌레에 대해 아는 게 없습니다. 이번 일은 전적으로 어르신께 맡겨야 할 것 같습니다.” 도윤은 그렇게 말하며 두 무릎을 꿇고 간절히 부탁했다.“제발 제 아내를 구해 주십시오. 저는 어떤 대가라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조원주는 도윤의 진심 어린 모습에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두 사람이 전생에 얼마나 큰 인연으로 얽혔길래... 이만 일어나. 굳이 그렇게까지 부탁하지 않아도 난 지아와의 인연을 생각해서 지아를 내버려 두지 않을 테니까.” 조원주는 도윤을 부축하며 일으켰고, 여전히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이 정도로 강한 독벌레를 심을 수 있는 M족 사람이라면 상당히 대단한 사람일 거야. 아직 상대의 정체는 알 수 없으니 그동안 지아가 어떻게 그 사람들과 얽히게 된 건지 차근차근 이야기해봐.” “예, 알겠습니다.”조원주가 옆에 서 있던 무무에게 몇 마디를 전하자 아이는 즉시 밖으로 나갔다. 도윤은 조원주가 ‘어미 독벌레’를 언급하는 것을 들었으나, 독벌레에 대해 잘 모르기에 궁금한 듯 물었다.“뭘 준비하시는 건가요?” “우리 같은 사람들은 독벌레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어. 내가 지아 몸속의 독벌레를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지만, 지아를 최대한 보호할 수는 있어. 혹시 모를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는 거지.” “최악의 상황에 대비한다고요?”“지아 몸속에 호
진봉이 간단한 음식을 준비해 오자마자, 시월은 한 입 먹고는 바로 그릇을 내던졌다.“이게 뭐야? 나더러 이 따위 음식을 먹으라는 거야?” 예린은 말없이 손바닥을 올려 시월의 뺨을 세게 내리쳤다.“너 같은 인간이 먹을 게 어디 있다고 그래? 이 정도면 감지덕지해야지, 뭘 또 가리려고 들어?” “이예린, 분명히 경고하는데, 소지아의 목숨은 내 손에 달려 있어. 나한테 잘해주지 않으면 소지아도 죽는다는 걸 알아야지!” 시월은 자신이 가진 마지막 카드로 모두를 협박하려 했는데, 진봉은 독벌레에 대해 잘 알지 못했기에 화를 억누르며 차분하게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너도 봤겠지만 이 마을은 세상과 단절된 곳이야. 이곳 사람들은 자급자족하며 살아가고, 네가 무시하는 그 쌀도 마을 사람들의 땀과 노력으로 얻어진 거야. 여긴 간식도, 산해진미도 없어. 지금 준 음식이 이 마을에서 해줄 수 있는 최선이고, 네가 더 좋은 음식을 원한다 해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고.” 시월은 오면서 이곳이 오래된 마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기에 진봉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시월이 얼굴에 서린 불만을 억누르며 말했다.“좋아, 그럼 달걀 프라이에 밥이나 좀 볶아 와. 이런 곳에도 달걀 정도는 있겠지?” “이제는 메뉴까지 고르시겠다? 네가 아직도 소씨 가문의 아가씨인 줄 알아?”진봉이 화가 나서 소리치자, 진환이 진봉을 말리며 말했다.“흥분하지 말고, 달걀이라도 찾아와서 밥이라도 볶아주자.” 진봉은 분을 삼키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달걀을 구하러 갔고, 시월은 진환을 유심히 바라보며 속으로 계산했다.‘저 사람이 가장 침착한 사람이구나?’ “내 손 좀 풀어줘. 혈액 순환이 안 돼서 손이 망가질 것만 같아, 내 몸에 있는 독벌레가 다치고 네 사모님의 몸에 무슨 일이 생기면, 책임은 네가 져야 할 걸?” “어차피 난 하찮은 목숨일 뿐이지만, 소지아는 다르잖아? 그 여자는 부잣집 딸이고, 명문가 며느리니까. 내 목숨 하나로 소지아의 목숨을
전 세계의 대부분의 여성은 연체동물에 대해 두려움이나 혐오감을 느낀다. 나뭇가지에서 우연히 팔 위로 떨어지기만 해도 자리에서 펄쩍 뛰며 비명을 지를 정도이니 말이다. 하지만 무무는 어린 나이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시월의 입 안에 한 마리의 벌레를 던져 넣었다. 시월은 입 안으로 무언가 부드럽고 꿈틀거리는 생물이 들어온 걸 똑똑히 느꼈다. “으악!!”여자의 비명이 하늘을 찔렀다. “시끄러워 죽겠네.”예린은 시월의 입에 재빨리 천 조각을 밀어 넣었고, 시월은 반응할 틈도 없이 벌레를 꿀꺽 삼켜버렸다.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시월은 그 벌레가 식도를 따라 천천히 내려가는 것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그 순간, 온몸에 개미가 기어가는 것 같은 극도의 혐오감이 엄습했다.무무는 시월이 벌레를 완전히 삼킨 것을 확인한 후에야 시월의 입에서 천 조각을 빼냈고, 시월은 땅에 무릎을 꿇고 미친 듯이 입 안의 벌레를 토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꼬박 하루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탓에 위액과 담즙만 나올 뿐이었다. 시월이 무무를 매섭게 노려보며 외쳤다.“나한테 대체 뭘 먹인 거야?!” 무무는 시월을 향해 간단하게 손짓했다.예린은 비록 손짓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분위기만으로도 좋은 것이 아닐 거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바로 그때, 방 안에서 도윤이 모습을 드러냈다. 도윤의 몸에는 살기가 가득했으며, 눈빛은 한없이 차가웠다.“심벌레야. 심장을 파고드는 벌레지.” 시월은 헛구역질하던 동작을 멈추고, 도윤의 표정을 살피며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감히 나한테 그런 걸 먹이다니! 소지아의 목숨이 필요 없다는 거야?” 그 순간, 노인의 거친 목소리가 무겁게 울려 퍼졌다. “걱정하지 마. 심벌레가 당장 네 목숨을 앗아가진 않을 테니까. 다만 보름달이 뜨는 밤, 너는 극심한 고통을 느끼게 될 거야. 해독제를 원한다면 네 편한테 지아의 몸에 있는 독벌레를 제거하라고 전해.” 시월은 이를 악물고 조원주를 노려보았다.“어디 한 번 해보시지.
예린은 냉정한 표정으로 손을 멈추지 않고 움직였다. “날 죽이고 싶지? 내가 너희 모두를 가지고 논 걸 생각하면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겠지. 하지만 어쩌지? 너희는 날 죽일 수 없는데. 게다가 너는 내 시중까지 들어야 하잖아.” 꼬르륵!예린은 시월의 머리를 세차게 눌러 물속에 처박았다. 시월은 나무 욕조 가장자리를 붙잡고 필사적으로 몸을 빼내려 했지만, 예린은 전혀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다. 게다가 말보단 행동이 앞서는 예린은 시월의 머리채를 잡아 몇 번이고 물속에 넣었다가 꺼냈고, 시월이 막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자마자 다시 힘껏 눌러 버렸다. 예린은 시월의 머리카락을 단단히 움켜쥔 채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내가 널 죽일 수는 없지만, 죽도록 괴롭힐 수는 있어. 한번 당해 볼래?” 예린의 상반신은 이미 물에 흠뻑 젖어 있었지만, 예린이 시월의 머리채를 잡아당기는 힘은 거의 머리카락을 뽑아버릴 기세였다. 시월은 팽팽히 당겨지는 머리카락에 몸을 비틀었지만 도무지 빠져나갈 수 없었다.예린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번지려던 찰나, 갑자기 방 안에서 아무런 예고도 없이 지아가 눈을 번쩍 뜨며 깨어났다. 도윤은 기쁨에 찬 얼굴로 재빨리 다가가며 외쳤다.“자기야, 괜찮아? 당신...”지아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침대 가장자리를 움켜잡은 채 헛구역질했지만 아무것도 토해내지는 못했다. 곧이어 지아는 자기 목을 움켜쥐고 괴로운 듯 신음하기 시작했다. “어르신, 지아가 이상합니다!” 도윤은 지아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보고 다급하게 외쳤지만, 주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지아를 함부로 건드릴 순 없었다. 방으로 들어온 조원주가 손을 들어 도윤을 제지했다.“지아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눈을 뜨자마자 이런 상태가 됐어요.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요.” “뭔가 이상해. 지아와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면 소시월과 관련된 문제일 거야.” 조원주가 심각한 표정으로 도윤을 바라보았다.“지아를 곁에서 잘 지켜봐. 절대 이상한 짓을 하지
지아는 기절하기 직전의 기억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그래, 목에서부터 번지는 날카로운 통증을 느낀 이후로 기억이 없어.’ 지아는 잠시 진정한 후에야 눈앞의 풍경이 조금 익숙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 여긴...”지아는 막 깨어난 탓인지 몸 여기저기가 불편했는데, 특히 머리가 어지럽고 무거워 정신이 몽롱했다. “여긴 이전에 우리가 머물렀던 마을이야. 네가 독벌레에게 당한 이후로 어르신이라면 해결 방법을 아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여기로 오게 된 거야.” 도윤은 지아를 부드럽게 안아주었고, 지아는 자연스럽게 도윤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도윤 씨, 그 독벌레... 아주 심각한 거야? 어르신께서 해결해 주실 수 있을까?”지아는 여러 번 생사를 넘나든 경험 덕에 일반 사람들처럼 두려움에 떨지 않았고, 다소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지만 그 독벌레는 좀 까다로워. 너랑 소시월의 운명을 서로 묶어버렸거든. 소시월이 살면 너도 살고, 소시월이 죽으면 너도 죽는 수밖에 없대. 아무래도 독벌레를 심은 사람이 아니면 어르신도 뾰족한 방법이 없을 것 같아.” “그래서 아까 숨이 막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 거구나. 소시월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겠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도윤이 부드럽게 위로했다.“지아야, 걱정하지 마. 소시월은 단지 너를 이용해 조건을 내걸려는 것뿐이야. 그 사람들이 원하는 조건만 들어주면 널 해치진 않을 거라고.” “만약 그 사람들의 조건이 소시월을 놓아주는 거라면?” “어떤 조건이든 네가 무사할 수만 있다면 받아들일 생각이야.” “하지만...”지아는 도윤의 품에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당신도 알잖아. 내가 이렇게 된 건 다 소시월 때문이야. 그리고 내 가족들도... 소시월을 놓아주면 다시는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 “우리는 모두 그 여자가 죽기만을 바라고 있어. 하지만 너만 있다면 난 아무것도 필요 없어. 네가 살아있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지아는 말없이 침묵했고, 도윤은 지아의 등을 가만히 두드리며
지아가 조원주를 바라보며 물었다.“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그 여자가 너한테 연심독충을 심었어. 그 독벌레는 24시간 이내에 알에서 부화할 거고, 부화한 후엔 저 여자 몸속의 독벌레와 공명하게 될 거야. 이제부터 그 여자와 네가 함께 영광을 누리고, 함께 고통받게 될 거란 뜻이지. 나도 네가 그 여자의 감각까지 선명하게 느끼게 될 줄은 몰랐구나.” 조원주의 얼굴이 심각해졌다.“보아하니 그 여자의 배후에 있는 주술사가 상당한 실력자인 것 같아.” 조원주는 자신이 함부로 지아에게서 독벌레를 제거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일반적인 연심독충이 아닌 모양이야. 상대에게 최적화된 벌레였던 거라고!’ 과학이 날이 갈수록 발전하듯, 독벌레는 이미 세상에서 잊힌 소수의 전통이 여전히 남아있는 몇몇 사람들에 의해 더욱 강력하게 이어져 왔고, 그런 사람들은 대개 비범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시월은 나무 욕조 가장자리에 몸을 기대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알면 됐네. 내 목숨은 물론, 내 모든 감각은 소지아와 연결돼 있어. 만약 소지아가 나와 함께 고통받게 하고 싶다면 날 마음껏 괴롭혀 봐.” 지아는 깨어난 후 내내 몸이 좋지 않았다.처음에는 오래 잤기 때문이라 생각했지만, 그 원인이 시월에게 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셈이었다.특히 몸 곳곳에서 은은한 통증이 느껴졌는데, 시월이 전에 다쳤기 때문에 지아도 그 영향을 받은 듯했다. 예린 또한 시월의 이상함을 느끼던 참이었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이해하고 조금 전 자신이 시월에게 가한 행동이 지아에게도 고통을 줬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꼈다. “미안해요...”예린의 얼굴엔 미안함이 가득했다.‘난 이미 소지아에게 갚아야 할 빚이 너무 많아.’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고 살아 있는 것도 죄를 씻기 위해서인데...’ 하지만 예린은 이번에도 의도치 않게 지아를 해치고 말았는데, 그 생각에 예린은 더욱 괴로워졌다. 과거에 예린은 지아에게 너무도 많은 잘못을 저질렀는데,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