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린은 냉정한 표정으로 손을 멈추지 않고 움직였다. “날 죽이고 싶지? 내가 너희 모두를 가지고 논 걸 생각하면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겠지. 하지만 어쩌지? 너희는 날 죽일 수 없는데. 게다가 너는 내 시중까지 들어야 하잖아.” 꼬르륵!예린은 시월의 머리를 세차게 눌러 물속에 처박았다. 시월은 나무 욕조 가장자리를 붙잡고 필사적으로 몸을 빼내려 했지만, 예린은 전혀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다. 게다가 말보단 행동이 앞서는 예린은 시월의 머리채를 잡아 몇 번이고 물속에 넣었다가 꺼냈고, 시월이 막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자마자 다시 힘껏 눌러 버렸다. 예린은 시월의 머리카락을 단단히 움켜쥔 채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내가 널 죽일 수는 없지만, 죽도록 괴롭힐 수는 있어. 한번 당해 볼래?” 예린의 상반신은 이미 물에 흠뻑 젖어 있었지만, 예린이 시월의 머리채를 잡아당기는 힘은 거의 머리카락을 뽑아버릴 기세였다. 시월은 팽팽히 당겨지는 머리카락에 몸을 비틀었지만 도무지 빠져나갈 수 없었다.예린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번지려던 찰나, 갑자기 방 안에서 아무런 예고도 없이 지아가 눈을 번쩍 뜨며 깨어났다. 도윤은 기쁨에 찬 얼굴로 재빨리 다가가며 외쳤다.“자기야, 괜찮아? 당신...”지아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침대 가장자리를 움켜잡은 채 헛구역질했지만 아무것도 토해내지는 못했다. 곧이어 지아는 자기 목을 움켜쥐고 괴로운 듯 신음하기 시작했다. “어르신, 지아가 이상합니다!” 도윤은 지아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보고 다급하게 외쳤지만, 주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지아를 함부로 건드릴 순 없었다. 방으로 들어온 조원주가 손을 들어 도윤을 제지했다.“지아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눈을 뜨자마자 이런 상태가 됐어요.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요.” “뭔가 이상해. 지아와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면 소시월과 관련된 문제일 거야.” 조원주가 심각한 표정으로 도윤을 바라보았다.“지아를 곁에서 잘 지켜봐. 절대 이상한 짓을 하지
지아는 기절하기 직전의 기억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그래, 목에서부터 번지는 날카로운 통증을 느낀 이후로 기억이 없어.’ 지아는 잠시 진정한 후에야 눈앞의 풍경이 조금 익숙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 여긴...”지아는 막 깨어난 탓인지 몸 여기저기가 불편했는데, 특히 머리가 어지럽고 무거워 정신이 몽롱했다. “여긴 이전에 우리가 머물렀던 마을이야. 네가 독벌레에게 당한 이후로 어르신이라면 해결 방법을 아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여기로 오게 된 거야.” 도윤은 지아를 부드럽게 안아주었고, 지아는 자연스럽게 도윤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도윤 씨, 그 독벌레... 아주 심각한 거야? 어르신께서 해결해 주실 수 있을까?”지아는 여러 번 생사를 넘나든 경험 덕에 일반 사람들처럼 두려움에 떨지 않았고, 다소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지만 그 독벌레는 좀 까다로워. 너랑 소시월의 운명을 서로 묶어버렸거든. 소시월이 살면 너도 살고, 소시월이 죽으면 너도 죽는 수밖에 없대. 아무래도 독벌레를 심은 사람이 아니면 어르신도 뾰족한 방법이 없을 것 같아.” “그래서 아까 숨이 막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 거구나. 소시월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겠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도윤이 부드럽게 위로했다.“지아야, 걱정하지 마. 소시월은 단지 너를 이용해 조건을 내걸려는 것뿐이야. 그 사람들이 원하는 조건만 들어주면 널 해치진 않을 거라고.” “만약 그 사람들의 조건이 소시월을 놓아주는 거라면?” “어떤 조건이든 네가 무사할 수만 있다면 받아들일 생각이야.” “하지만...”지아는 도윤의 품에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당신도 알잖아. 내가 이렇게 된 건 다 소시월 때문이야. 그리고 내 가족들도... 소시월을 놓아주면 다시는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 “우리는 모두 그 여자가 죽기만을 바라고 있어. 하지만 너만 있다면 난 아무것도 필요 없어. 네가 살아있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지아는 말없이 침묵했고, 도윤은 지아의 등을 가만히 두드리며
지아가 조원주를 바라보며 물었다.“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그 여자가 너한테 연심독충을 심었어. 그 독벌레는 24시간 이내에 알에서 부화할 거고, 부화한 후엔 저 여자 몸속의 독벌레와 공명하게 될 거야. 이제부터 그 여자와 네가 함께 영광을 누리고, 함께 고통받게 될 거란 뜻이지. 나도 네가 그 여자의 감각까지 선명하게 느끼게 될 줄은 몰랐구나.” 조원주의 얼굴이 심각해졌다.“보아하니 그 여자의 배후에 있는 주술사가 상당한 실력자인 것 같아.” 조원주는 자신이 함부로 지아에게서 독벌레를 제거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일반적인 연심독충이 아닌 모양이야. 상대에게 최적화된 벌레였던 거라고!’ 과학이 날이 갈수록 발전하듯, 독벌레는 이미 세상에서 잊힌 소수의 전통이 여전히 남아있는 몇몇 사람들에 의해 더욱 강력하게 이어져 왔고, 그런 사람들은 대개 비범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시월은 나무 욕조 가장자리에 몸을 기대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알면 됐네. 내 목숨은 물론, 내 모든 감각은 소지아와 연결돼 있어. 만약 소지아가 나와 함께 고통받게 하고 싶다면 날 마음껏 괴롭혀 봐.” 지아는 깨어난 후 내내 몸이 좋지 않았다.처음에는 오래 잤기 때문이라 생각했지만, 그 원인이 시월에게 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셈이었다.특히 몸 곳곳에서 은은한 통증이 느껴졌는데, 시월이 전에 다쳤기 때문에 지아도 그 영향을 받은 듯했다. 예린 또한 시월의 이상함을 느끼던 참이었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이해하고 조금 전 자신이 시월에게 가한 행동이 지아에게도 고통을 줬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꼈다. “미안해요...”예린의 얼굴엔 미안함이 가득했다.‘난 이미 소지아에게 갚아야 할 빚이 너무 많아.’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고 살아 있는 것도 죄를 씻기 위해서인데...’ 하지만 예린은 이번에도 의도치 않게 지아를 해치고 말았는데, 그 생각에 예린은 더욱 괴로워졌다. 과거에 예린은 지아에게 너무도 많은 잘못을 저질렀는데,
지아가 시월을 바라보며 말했다.“너도 뭐 좀 먹어.” 이제 지아의 목숨뿐만 아니라 지아의 몸 상태도 시월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아무리 시월을 증오한다고 해도 지아를 생각해서 당분간 시월을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이었다. 다른 이들의 눈엔 증오가 서려 있었지만, 지아는 너무나도 평온한 모습으로 도윤을 바라보며 말했다.“시월을 상처를 치료해 줄 사람을 좀 불러줘.” “응.”도윤은 별다른 반응 없이 진환에게 눈짓했고, 진환은 즉시 시월의 상처를 치료해 주기 시작했다. 지아는 식사를 마치자마자 시월의 옆에서 친절하게 붕대를 감는 법과 매듭을 더 깔끔하고 편하게 묶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이 광경을 본 진봉은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사모님, 그 여자는 사모님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이에요. 그런데도 여유롭게 붕대 묶는 법까지 가르쳐 주시다니, 저라면 당장 그 붕대로 그 X 목을 졸라 죽였을 겁니다.” 지아는 진봉을 찬찬히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몇 년이 지났는데도 성격이 하나도 안 변했구나? 여전히 조금만 기다리면 불같이 화를 내네.” “사모님은 너무 많이 변하셨어요.” 지아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비록 내가 독벌레에 당하긴 했지만, 지금 당장 죽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야. 불행한 일에 신경 쓰느라 시간을 낭비하느니, 차라리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잘 보낼지 생각하는 게 낫지 않겠어?” 지아는 한가한 듯 소독용 알코올을 집어 들어 시월의 다른 상처도 처치하기 시작했다. 시월은 지아에게 묘한 감정을 갖고 있었다.‘나는 소지아가 나를 모를 때부터 소지아를 평생의 적으로 여겨왔어. 그래서 소지아가 더 불행할수록, 더 분노할수록 기쁨을 느꼈지.’ 시월은 지아가 독벌레에 물린 후 깨어나 분노하거나 애원하는 모습을 기대했지만, 지아의 지나치게 침착한 모습에 되려 속이 뒤틀리는 듯했다. “대체 무슨 꿍꿍이야? 너, 속으로는 날 미친 듯이 증오하고 있잖아!”시월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예린은 예전에 시월을 심하게 괴롭힌 데다가, 조금 전에도 시월을 거의 질식시킬 뻔했다.하지만 두 사람은 본질적으로 같은 부류의 사람이었는데, 둘 다 잔인하고 악독하다는 것만큼은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었다. 시월은 그 복수를 반드시 되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린은 본래 지아의 적이었으니, 시월은 이번 요구가 무리한 것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지아에게 예린은 그저 무관한 사람일 테니 말이다. 예린은 시월의 요구를 듣고 두 눈이 싸늘하게 식었지만, 지금은 지아가 시월에게 제압당한 상황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분노를 꾹 눌러야만 했다. ‘이것도 새언니에 대한 속죄의 일부야.’ 예린은 분노에 휩싸여 두 손을 꽉 움켜 쥐었고, 옆에서 그 요구를 들은 도윤도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어쨌든 예린은 그의 친여동생이지 않은가? 하지만 도윤 역시 예린과 같은 생각이었다.‘이건 우리가 지아에게 속죄하는 방법 중 하나야.’결국 도윤 또한 저항하지 않고 예린처럼 시월의 조건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건 안 돼.”지아의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모두가 지아를 향해 시선을 돌렸는데, 이런 상황에서 거절하는 사람이 지아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왜지? 이예린은 널 죽도록 괴롭혔잖아. 설마 저 X이 불쌍해지기라도 한 거야?” “원칙은 원칙이야. 너랑 이예린 사이의 일은 너희끼리 해결하고, 너와 나의 일에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진 마.” 시월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내가 널 싫어하는 가장 큰 이유가 뭔지 알아? 언제나 잘난 척하며 모든 사람을 동정하는 태도를 보인다는 거야. 소지아, 여자는 독해야만 자기 자리를 지킬 수 있어. 너처럼 마음 약하게 굴다간 언젠가 크게 당할 거라고!” “돈이 필요하다고 했지? 네 뒤에 있는 사람과 연락하게 해줘. 한 사람은 돈, 다른 한 사람은 해독제를 들고 만나는 거야.” 시월의 몸에도 독충이 심겨 있었기 때문에 양측 모두 빨리 해독해야만 했다. “400억 외에도 인질이
지아는 무무를 단숨에 품 안으로 끌어안으며 말했다.“아가, 엄마를 위한 마음인 건 잘 알지만, 엄마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널 위험에 빠뜨리지 않을 거야.” 상대는 악랄하고 전과가 있는 사람일 뿐 아니라, 지아에게 강한 적의를 품고 있는 자였다.지아가 어떻게 그런 사람에게 딸을 인질로 내어줄 수 있겠는가?무무는 고개를 저으며 필사적으로 지아를 설득하려는 손짓을 보냈다.“저는 하나도 안 무서워요.” 지아는 부드럽게 아이를 안고 속삭였다.“하지만 엄마는 무서워. 무무야, 넌 엄마가 목숨을 걸고 지켜낸 세상에 둘도 없는 소중한 보물이야. 엄마가 널 이 세상에 데려왔으니, 널 지킬 책임도 엄마한테 있는 거라고. 엄마가 어떤 일을 겪든, 널 이런 일에 끌어들이진 않을 거야.” 도윤은 그제야 아이들이 왜 그토록 밝고 순수하면서도 사랑스러운지 이해할 수 있었다.‘어떤 상황에서도 아이들을 포기하지 않는 지아 덕분이었구나.’ ‘그리고 지아의 모든 노력은 아이들로부터 오는 사랑으로 보답받고 있었던 거야.’ 지아는 무무를 달래고 나서야 시월을 향해 눈길을 달렸다.“그 누구도 네 인질이 될 순 없어.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거래 장소를 네가 정하는 것뿐이야. 잊지 마, 네 몸에도 심벌레가 있다는걸!” “소지아, 넌 뭐 그렇게 잘났어? 내가 고통을 겪는 이상 너도 편할 리가 없잖아! 난 네가 내 고통을 함께 느꼈으면 좋겠다고!” “난 세상의 모든 고통을 다 느껴봤어. 네 고통이라고 못 견딜 줄 알아?” 지아가 냉소하며 말했다.“지금 누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지나 제대로 파악해. 여기선 절대 네 멋대로 굴 수 없어. 대화하고 싶으면 기회를 줄 테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 고통을 견디며 기다리기나 하라고.”말을 마친 지아는 무무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는데, 한 번도 시월을 돌아보지 않았다. 비록 지아가 연심독충에게 당하긴 했지만, 주변 사람들은 모두 지아에게 피해가 갈까 봐 시월에게 함부로 손대지 못하고 있었으며 그저 속으로만 분노를 삭일 뿐이
도윤의 몸은 지아에게 이끌려 물속으로 들어갔는데, 잔잔한 물결이 부드럽게 일렁이자 지난 기억들이 서서히 떠올랐다.그 당시 도윤의 눈은 보이지 않았고, 지아는 항상 곁에서 치료를 도왔다. 그런데 다시 이곳에 돌아오니 묘하게 특별한 감정이 들었다. 따스한 물살 속에서 지아는 손을 들어 도윤의 옷을 하나하나 풀어냈고, 도윤의 탄탄한 몸에 몸을 기대며 도윤의 귓가에 속삭였다. “긴장하지 마, 도윤 씨.” 지아는 자신이 독벌레에게 당한 이후로 모두가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었고, 특히 도윤이 가장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아는 이미 생사를 몇 번이나 넘나든 사람이었기에 모든 일을 평온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지아는 원래 3년 전에 죽었어야 할 몸이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지아에게는 지금 이 순간은 덤으로 얻은 삶이나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사랑하는 가족들을 찾은 지금, 지아에게 후회란 없었고 미래를 걱정하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을 붙들고 싶다는 생각만이 들었다.오랜만에 느끼는 평온함과 기쁨이 도윤의 긴장된 마음을 서서히 풀었고, 도윤은 지아를 꼭 끌어안았다.마치 지아를 자신의 뼛속 깊이 새기기라도 하려는 것처럼.도윤은 간신히 되찾은 지아를 다시 잃게 될까 봐 너무도 두려웠는데, 일렁이던 물결이 점점 잦아들었지만, 도윤은 여전히 지아의 손을 놓지 않았다. “지아야, 너는 반드시 무사해야만 해.” 도윤의 걱정 어린 눈빛을 마주한 지아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끝으로 도윤의 이마와 눈썹을 쓸어내렸다. “알겠어.”“A시로 돌아가고 싶어.”도윤이 조용히 말했다. 비록 양쪽 집안 모두 A시에 있진 않았지만, 그곳은 그들이 함께한 추억이 담긴 장소였고, 도윤에겐 그곳이 곧 집이었다. “신혼집은 내가 새로 꾸미라고 지시했으니까 돌아가면 가족사진도 찍어서 걸어두자. 당신 아버지가 날 때려죽이더라도 이번엔 절대 당신을 놓지 않을 거야.” 다소 유치한 도윤의 말에 지아는 웃음을 터뜨렸다.“나는 당신이 하자는 대로
지아가 시월의 고통을 온전히 느끼는 것은 아니었는데, 단지 일부만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지아는 이미 견디기 힘든 고통을 느꼈기에 시월이 얼마나 더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심장에서 시작된 격렬한 통증은 점점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지아의 심장을 붙잡고 사정없이 찢어대는 듯한 고통이었다. “살려줘... 제발 살려줘...”한편, 시월은 바닥을 구르며 온갖 고통에 몸부림쳤다.손가락으로는 울퉁불퉁한 바닥을 움켜쥐느라 관리가 잘 되어 있던 손톱은 부러지고 갈라졌지만 시월은 그조차도 느낄 새가 없는 듯했다. 예린은 그런 시월을 내려다보며 차가운 시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비웃지도, 조롱하지도 않은 채로. 시월은 기어가듯 힘겹게 예린에게 다가가 애원하기 시작했다.“이예린... 부탁이야... 나 좀 살려줘. 너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어...”예린은 무표정하게 반쯤 몸을 굽혀 시월의 턱을 거칠게 붙잡고 냉랭하게 말했다.“자업자득이지, 뭐.”“소시월, 너 같은 X은 그런 일을 당해도 싸. 이미 몇 번이나 기회를 줬는데도 네가 우리의 손을 잡지 않은 거잖아.” “그 노친네한테 해독제가 있을 거야, 그렇지? 당장 나한테 해독제를 달라고 해. 그렇지 않으면 소지아도 무사하지 못할 거라고!” 시월은 지아를 방패 삼아 모두가 지아를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용하려 했다. “미안하지만, 오늘 밤에 어떤 일이 있어도 널 구해줄 수 없어. 그러니까 그 고통을 충분히 느껴보라고.” 시월은 극심한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졌고, 바닥에 미친 듯이 머리를 박기 시작했다.“차라리 날 죽여! 그냥 날 죽이라고...!”예린은 시월의 끔찍한 모습에 잠시 놀랐다.‘독벌레가 이 정도로 무서운 건 줄은 몰랐어.’ 예린은 곧장 손짓하여 경호원을 불렀고, 시월이 자해하지 못하도록 침대에 묶어 두게 했다. 시월의 눈가는 빨갛게 물들었는데, 팔다리와 입이 제압된 상태에서도 마치 뱀처럼 고통에 못 이겨 몸을 비틀었다. 하늘에 떠오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