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윤의 몸은 지아에게 이끌려 물속으로 들어갔는데, 잔잔한 물결이 부드럽게 일렁이자 지난 기억들이 서서히 떠올랐다.그 당시 도윤의 눈은 보이지 않았고, 지아는 항상 곁에서 치료를 도왔다. 그런데 다시 이곳에 돌아오니 묘하게 특별한 감정이 들었다. 따스한 물살 속에서 지아는 손을 들어 도윤의 옷을 하나하나 풀어냈고, 도윤의 탄탄한 몸에 몸을 기대며 도윤의 귓가에 속삭였다. “긴장하지 마, 도윤 씨.” 지아는 자신이 독벌레에게 당한 이후로 모두가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었고, 특히 도윤이 가장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아는 이미 생사를 몇 번이나 넘나든 사람이었기에 모든 일을 평온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지아는 원래 3년 전에 죽었어야 할 몸이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지아에게는 지금 이 순간은 덤으로 얻은 삶이나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사랑하는 가족들을 찾은 지금, 지아에게 후회란 없었고 미래를 걱정하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을 붙들고 싶다는 생각만이 들었다.오랜만에 느끼는 평온함과 기쁨이 도윤의 긴장된 마음을 서서히 풀었고, 도윤은 지아를 꼭 끌어안았다.마치 지아를 자신의 뼛속 깊이 새기기라도 하려는 것처럼.도윤은 간신히 되찾은 지아를 다시 잃게 될까 봐 너무도 두려웠는데, 일렁이던 물결이 점점 잦아들었지만, 도윤은 여전히 지아의 손을 놓지 않았다. “지아야, 너는 반드시 무사해야만 해.” 도윤의 걱정 어린 눈빛을 마주한 지아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끝으로 도윤의 이마와 눈썹을 쓸어내렸다. “알겠어.”“A시로 돌아가고 싶어.”도윤이 조용히 말했다. 비록 양쪽 집안 모두 A시에 있진 않았지만, 그곳은 그들이 함께한 추억이 담긴 장소였고, 도윤에겐 그곳이 곧 집이었다. “신혼집은 내가 새로 꾸미라고 지시했으니까 돌아가면 가족사진도 찍어서 걸어두자. 당신 아버지가 날 때려죽이더라도 이번엔 절대 당신을 놓지 않을 거야.” 다소 유치한 도윤의 말에 지아는 웃음을 터뜨렸다.“나는 당신이 하자는 대로
지아가 시월의 고통을 온전히 느끼는 것은 아니었는데, 단지 일부만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지아는 이미 견디기 힘든 고통을 느꼈기에 시월이 얼마나 더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심장에서 시작된 격렬한 통증은 점점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지아의 심장을 붙잡고 사정없이 찢어대는 듯한 고통이었다. “살려줘... 제발 살려줘...”한편, 시월은 바닥을 구르며 온갖 고통에 몸부림쳤다.손가락으로는 울퉁불퉁한 바닥을 움켜쥐느라 관리가 잘 되어 있던 손톱은 부러지고 갈라졌지만 시월은 그조차도 느낄 새가 없는 듯했다. 예린은 그런 시월을 내려다보며 차가운 시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비웃지도, 조롱하지도 않은 채로. 시월은 기어가듯 힘겹게 예린에게 다가가 애원하기 시작했다.“이예린... 부탁이야... 나 좀 살려줘. 너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어...”예린은 무표정하게 반쯤 몸을 굽혀 시월의 턱을 거칠게 붙잡고 냉랭하게 말했다.“자업자득이지, 뭐.”“소시월, 너 같은 X은 그런 일을 당해도 싸. 이미 몇 번이나 기회를 줬는데도 네가 우리의 손을 잡지 않은 거잖아.” “그 노친네한테 해독제가 있을 거야, 그렇지? 당장 나한테 해독제를 달라고 해. 그렇지 않으면 소지아도 무사하지 못할 거라고!” 시월은 지아를 방패 삼아 모두가 지아를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용하려 했다. “미안하지만, 오늘 밤에 어떤 일이 있어도 널 구해줄 수 없어. 그러니까 그 고통을 충분히 느껴보라고.” 시월은 극심한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졌고, 바닥에 미친 듯이 머리를 박기 시작했다.“차라리 날 죽여! 그냥 날 죽이라고...!”예린은 시월의 끔찍한 모습에 잠시 놀랐다.‘독벌레가 이 정도로 무서운 건 줄은 몰랐어.’ 예린은 곧장 손짓하여 경호원을 불렀고, 시월이 자해하지 못하도록 침대에 묶어 두게 했다. 시월의 눈가는 빨갛게 물들었는데, 팔다리와 입이 제압된 상태에서도 마치 뱀처럼 고통에 못 이겨 몸을 비틀었다. 하늘에 떠오
시월의 초췌함에 비해 지아는 너무도 생기 있고 빛이 나는 모습이었다. 시월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지아를 노려보며 말했다.“이렇게 멀쩡하다고...? 분명 나는 너한테 연심독충을 심었어. 내가 아프면 너도 아파야 한다고!” “네 기대를 저버려서 미안하지만, 난 별로 아프지 않았어. 그런데 너는 어젯밤에 너무 아파서 미쳐버릴 뻔했다면서?” 시월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그 남자가 분명히 그랬는데? 그 독벌레는 오랜 세월 연구해서 만든 새로운 독벌레로, 소지아를 겨냥해 준비된 거라고.’ 시월은 그 독벌레를 마지막 카드로 삼고 있었는데, 자신의 정체가 들통나더라도 최소한 지아를 이용해 협상을 시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을 보니 지아는 독벌레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은 듯했기에, 시월의 자신감은 크게 꺾이고 말았다. 지아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앞으로 너는 보름달이 뜨는 밤마다 어젯밤의 고통을 또 겪게 될 거야. 그리고 그 고통은 점점 더 심해지겠지. 물론 나는 상관없어. 너랑 같이 끝까지 버티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네가 그 고통을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고통이 반복된다’는 말을 들은 시월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었다.고작 이틀 만에 시월은 눈에 띄게 수척해졌는데, 몇 번의 보름달을 더 겪는다면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차라리 죽는 게 나을 만큼 비참해질 게 분명했다. “그건 안 돼! 협... 협상하자. 내 조건을 말할게.” “이제야 말이 좀 통하네. 하지만 이번엔 제대로 된 협상 태도를 보여야 할 거야. 만약 또 꾀를 부릴 생각이라면 언제든 상대해 줄게.” 시월처럼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는 고통이 가장 큰 협상 도구였다.시월은 지아보다 훨씬 더 죽음을 두려워했으니 말이다. 시월은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 벗어나 호화로운 삶을 누리며 살아왔고, 그런 생활에 익숙해진 사람으로서 죽음을 감당할 수 없어서 고작 하룻밤의 고통으로 바로 태도를 바꾸었다. 도윤은 즉시 준비를 마치고 그들을 데리고 외곽의 한 소도시로 나
그뿐만 아니라, 시월은 새로운 조건을 내세웠다.“30분 내로 내가 지정한 해외 계좌에 400억을 송금해. 돈이 확인되어야만 이 거래가 성사된 걸로 간주할 거야.” “문제없어.”도윤이 망설임 없이 동의하며 말했다.“지금 당장 처리할게.” 도윤이 자리를 뜨자 시월은 지아를 향해 천연덕스럽게 말했다.“날 너무 원망하지는 마. 비록 우리의 인생이 뒤바뀌긴 했지만, 넌 운이 참 좋았잖아? 널 사랑해 주는 사람도 생겼고 아이들까지 생겼으니, 이제 해독만 하면 넌 소씨 가문의 친딸로 인정받을 수 있을 거야. 네가 잃어버린 모든 걸 그 사람들이 다 메꿔 줄 거라고.” 시월은 가벼운 말투는 마치 지아가 큰 이득을 본 것처럼 느껴지게 했지만, 지금껏 지아가 겪은 수많은 고난과 생사의 고비, 그리고 지아가 소중한 사람들을 잃은 고통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것이었다. “뭘 그렇게 쳐다봐? 내 말이 틀렸다는 거야? 다른 건 몰라도 네 양아버지가 죽은 건 나 때문이 아니잖아. 그 사람은 그냥 기구한 팔자를 타고났던 거라고...”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지아는 들고 있던 찻잔을 바닥에 내던졌고, 순식간에 시월에게 다가가 그녀의 옷깃을 움켜쥐고 힘껏 뺨을 갈겼다. “소지아, 네가 감히 날 때려?!” 찰싹! 찰싹! 찰싹!지아는 연이어 손을 휘둘렀는데, 그 눈빛에는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소시월, 나는 단 하루도 너에 대한 원한을 잊은 적이 없었어. 네 목숨이 그렇게 하찮고 쓸모없는 거라면 언제든지 상대해 줄게! 내 인생에 대해 입을 뗄 자격이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너니까!!” 지아의 강력한 기세에 겁먹은 시월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이... 이거 놔.” “나는 가까스로 지옥에서 기어 나온 사람이라 너처럼 죽음 따윈 두렵지 않아. 내 인생은 이미 풍비박산이 났다고. 그러니까 그 잘난 ‘죽이겠다’는 말로 날 협박하려 들지 마! 전혀 소용없으니까!!” 지아의 눈빛이 더욱 차갑게 얼어붙었다.“널 산산조각 내버리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
지아 가족은 시월을 데리고 세이아 섬으로 향했는데, 비행기에 탑승한 시월은 지아가 보디가드 대신 무무를 데려온 것을 의심스러운 눈길로 쳐다보았다.“분명히 경고하는데, 수작은 부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네 엄마의 행방이 궁금하지 않다면 모를까, 약속한 세 명이면 세 명이지, 단 한 명이라도 더 데리고 오면 안 돼!” “걱정하지 마. 우리 딸이 주술을 조금 다룰 줄 아는데, 네 몸에 있는 심벌레를 풀어줄 수 있을지도 몰라서 그래.” 시월은 미간을 찌푸리며 무무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비웃듯 말했다.“차라리 다른 사람을 데리고 오는 게 낫지 않았겠어? 고작 애 하나 데려와서 주술을 하겠다니, 내가 그 말을 믿을 줄 알고?” 비록 시월은 주술사가 아니었지만, 주술을 배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주술사는 보통 어릴 때부터 독벌레에 둘러싸여 자라거나, 타고난 재능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소지아랑 이도윤은 상류층에서 자란 사람들인데, 저 꼬마가 주술을 다룰 줄 안다는 게 말이나 돼?’ “분명히 말하지만, 네가 먼저 내 몸에서 심벌레를 풀어주지 않는 한 우리 쪽에서도 너희에게 해독제를 주지 않을 거야. 그리고 어린애 하나로 날 속이려 했다간 너도 무사하지 못할 줄 알라고.” 지아는 여유로운 미소만 지었을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무무의 능력은 단순히 해독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는데, 지아는 아이의 진짜 능력을 드러낼 생각이 없었다. 그건 지아가 가진 가장 강력한 비장의 카드이기 때문이었다. 몇 시간의 비행 끝에, 일행은 해가 지기 전에 세이아 섬에 도착했다. 섬은 아주 황량하고 척박한 곳이었는데, 전략적 위치라는 이유로 섬에 살던 원주민들은 대부분 떠나가고 지금은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지아가 이곳을 거래 장소로 선택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A국과 C국은 오랜 적대 관계에 있었고, 이곳은 도윤과 지아에게 아주 불리한 위치였다. 지아는 비행기에서 내려 손목과 발목을 가볍게 풀었다. 얼굴엔 시원한 바
지아는 천천히 몸을 돌려 멀리 떨어진 야자수 나무 아래의 남자에게 시선을 옮겼다.그 사람은 지아도 아는 사람이었는데, 심씨 가문의 도련님이자 소시월의 약혼자인 심장후였다. 지아는 이곳에서 장후를 만나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제 보니 저 두 사람, 진정한 사랑인 것 같네?’ ‘심장후는 처음부터 내 정체를 알고, 나를 위한 계획을 준비했을 수도 있어.’ 심규철의 얼굴이 한대경과 매우 닮았다는 점을 떠올리며, 지아의 마음속 추측은 더욱 확신으로 변해갔다. 시월을 본 순간, 장후는 서둘러 달려와 말했다.“월아, 너 괜찮아?” 시월의 얼굴은 결코 괜찮다고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 사람에게 맞고, 저 사람에게 맞아 연고를 발랐음에도 완전히 가라앉지 않아 부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후는 안타까움이 가득한 얼굴로 시월을 위아래로 살피며 물었다.“어디 다친 거야?” 장후는 방금 시월이 다리를 절뚝거리는 걸 본 후, 시월이 겪은 상황이 절대 좋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장후는 시월을 단숨에 자신의 뒤로 감쌌는데, 장후의 몸에서는 묘하고도 섬뜩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장후가 등장한 후로, 원래 부드럽고 산만하여 조금의 존재감도 없던 무무는 자발적으로 지아의 옆에 섰다. 무무는 말하지 못하는 대신 주변 변화를 더욱 민감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사람이든 물건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지아는 무무의 눈빛만으로도 장후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하지만 내가 전에 접했던 자료에는 심장후가 우유부단하고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라고 적혀 있었는데...’장후는 도윤과 전혀 반대되는 사람이었다. 도윤은 아무리 사람들 속에 툭 던져져도 군계일학의 존재였지만, 장후는 공격성이 전혀 없어 곧바로 사람들 사이에 묻힐 존재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유형의 사람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존재인 법이었다. 흔히들 ‘짖지 않는 개가 더 무섭다’고 말하지 않는가?시월이 장후를 자기 동료로 선택한 것도 분명 장후의 정체가 평범하지 않기 때문일
지아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심장후가 주술사라고? 사람은 겉모습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말이 딱 맞구나!” 몇 사람은 아직 식사하지 않은 상태라, 근처의 한 식당을 찾아 식사하기로 했다. 원래는 생사를 가르는 원수였지만, 지금의 분위기는 꽤 평화로웠다. 마치 폭풍우가 몰아치기 전의 고요함처럼 말이다. 하지만 도윤은 장후가 다시 주술을 이용할까 봐 염려되어 손수 아내와 딸을 위해 음식을 만들었다. 도윤이 파인애플 볶음밥 한 접시를 만드는 동안, 시월은 이미 식사를 시작했는데, 그것들은 전부 섬 특유의 별미들이었다. 무무는 계속해서 장후를 주시하며, 장후가 어떤 음흉한 짓을 벌이지 않을까 경계하고 있었다. 지아와 도윤은 이 섬에 오기 전에, 주술사에 대해 상상해 본 적이 있었다.‘숙련된 주술사는 분명 냉혈하고 악랄한 인물일 거야.’ 하지만 장후가 나타난 순간, 지아의 주술사에 대한 고정관념은 완전히 무너졌다. 지아가 알고 있는 주술사란 시골 마을의 주민들이었고, 그들은 낙후되었지만 순박하고 특별한 주술을 대대로 전수해 왔다. 하지만 장후의 모습은 한없이 유순하고 점잖은 군자 같았고, 주술사라는 이미지와 전혀 연관이 없어 보였다. 지금도 장후는 볶음밥 속의 파를 골라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시월은 끝없이 투덜거리며 말했다.“내가 파를 제일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그런 거지?” “미안해. 주방에 분명히 신신당부했는데, 아마 요리사가 깜빡한 것 같아. 그래도 다른 반찬을 많이 먹고, 국도 좀 마셔.” “난 새우볶음밥 먹을 테니까 오빠는 파나 골라내!” “알았어, 알았어. 그럼 우선 국부터 먹어. 몸에 좋은 거야.” 지아는 턱을 괴고 앉아 속으로 생각했다‘혹시 소시월이 심장후에게 강력한 주술을 건 게 아닐까? 소시월이야말로 진짜 주술사인 거 아니냐고.’ ‘어쩜 저렇게 다를 수 있지? 한 명은 너무 강하고, 다른 한 명은 너무 나약하잖아!’ 하지만 시월을 원해서라면 장후도 배수의 진을 칠 정도로 강력한 주술을 사용할 것이 분명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장후는 삽시간에 다른 사람처럼 변해버렸는데, 이전의 온화하고 점잖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얼굴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지아는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닌지 의심했지만, 장후의 눈썹 사이에서는 은은하게 검은 기운이 퍼져 나오는 것 같았다. ‘이제야 주술사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군.’ “네가 먼저 연심독충을 풀어주기 싫다면, 나는 얼마든지 시간을 끌 수 있어. 하지만 너도 잘 알다시피, 심벌레는 보름달이 뜨는 밤마다 발작할 거야. 그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소시월의 몸에는 큰 문제가 생길 거야. 너는 소시월이 그 시간을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해?” 시월은 장후의 팔을 꼭 붙들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너무 아파. 더는 못 참겠다고!” 장후는 시월의 품에 안고 설명했다.“월이를 구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연심독충을 풀려면 반드시 조용하고 안정된 환경이 필요해. 게다가 모체가 아무런 손상을 입지 않아야 독벌레를 뽑아낼 수 있다고!”“월이가 이렇게 아파하는 상태에서는 너희한테도 좋을 게 없어. 심벌레가 숙주에게서 치명적인 위험을 감지한다면, 자폭을 선택할 가능성도 있을 테니까!” 지아는 심각한 표정으로 무무를 바라보았고, 무무는 손짓으로 ‘가능하다’고 말했다. 독벌레는 결국 기계가 아니므로 100% 통제할 수 없고, 예상치 못한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도 있었다. 이 말을 들은 도윤은 지아에게 어떤 해가 되는 일을 허락할 수 없어서 속으로 긴장하기 시작했다. “좋아, 우리가 먼저 심벌레를 풀어줄게.”지아는 도윤을 나무라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는데, 마치 도윤이 너무 충동적이라고 꾸짖는 것 같았다. 도윤이 지아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자기야, 괜찮아. 나는 당신의 안전이 가장 중요해.” “무무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무무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의 뜻을 보였다. “좋아, 오늘 밤에 심벌레를 풀면 연심독충도 풀어줄 수 있는 거지?” “꼭 그렇지만은 않아. 두 사람의 신체 상태가 조건을 충족해야 하고, 독벌레를 푸는 동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