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지아가 위암 양성 판정을 받았던 날, 이도윤은 자신의 첫사랑과 함께 그녀의 아들과 아동 병원에 있었다.병원 복도에서 임건우는 검사 보고서를 들고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지아야, 검사 결과 나왔어. 악성 종양 말기야, 수술 성공하면 5년 생존율은 15~30% 정도고.”소지아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어깨에 멘 숄더백 끈을 잡아당겼고, 약간 창백한 작은 얼굴에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선배, 수술 안 하면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요?”“6개월에서 1년, 사람마다 다르지. 네 상황은 먼저 약물치료를 두 번 받은 뒤, 수술을 하는 게 좋을 거야. 이렇게 하면 암세포의 확산과 전이의 위험을 막을 수 있거든.”소지아는 입술을 깨물며 힘겹게 말했다.“고마워요, 선배.”“나한테 고맙긴, 바로 입원 수속 밟자.”“됐어요, 치료할 생각이 없어요. 약물 치료 견디기 힘들 거예요.”임건우는 몇 마디 더 설득하고 싶었지만 소지아는 공손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선배, 이건 일단 비밀로 해줘요. 가족들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소씨 가문 파산 이후로 아버지의 거액의 입원비를 내는 것만으로도 소지아는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차마 가족에게 자신이 암에 걸렸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임건우는 소지아의 상황을 안타까워하며 한숨을 쉬었다.“걱정 마. 입 꼭 다물고 있을게. 참, 너 결혼했다고 들었는데, 네 남편 쪽은...”“선배, 우리 아빠 잘 부탁할게요, 신경 좀 많이 써주세요. 난 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요.”소지아는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듯 임건우의 대답도 듣지 않고 재빨리 떠났다.임건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지아가 대학을 휴학하고 결혼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의학계의 천재로 불리던 소지아는 그렇게 의학계에서 사라져 지금은 만신창이가 되었다.지아의 아버지 소계훈이 치료를 받는 최근 2년 동안, 오직 소지아만이 바쁜 일정을 쪼개 그를 돌보았다. 정작 소지아 자신은 아파서 쓰러졌을 때도 지나가던 행인이 병원으로 데려다 주었고,
어두컴컴한 밤, 소지아는 혼자 욕실로 돌아왔다.수도꼭지를 돌려 뜨거운 물을 틀자 소지아를 둘러싸고 있던 추위가 씻겨나갔다. 빨갛게 부은 눈을 비비며 문을 열고 한 방으로 들어갔다. 아늑한 분위기의 인테리어를 한 어린이 방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가볍게 벨을 흔들자, 오르골 음악 소리가 방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방의 조명은 무척 따뜻했고 아름다운 모습이었지만 소지아의 눈에서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아마도 이게 내가 받아야 할 벌인가 봐. 뱃속의 아이를 지켜내지 못해서 지금 신이 이제 내 생명까지 빼앗으려는 건가...’소지아는 1.2미터 길이의 어린이 침대에 올라 누워 몸을 웅크렸다. 왼쪽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오른쪽 눈으로 흘러내리며 볼에서 미끄러져 아래에 깔린 담요까지 촉촉하게 적셨다.침대 위에 있던 인형을 꼭 안고 중얼거렸다.“미안해, 아가야, 다 엄마 잘못이야. 엄마가 너를 지켜내지 못 했어. 근데 무서워하지 마. 엄마가 곧 갈게.”아이가 세상을 떠난, 소지아의 정신상태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마치 아름다운 꽃이 나날이 시들어가는 것 같았다.어둠에 잠긴 바깥 풍경을 보면서 아버지에게 이 돈만 남기면 자신의 아이를 찾아 떠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이튿날 아침, 날이 밝기도 전에 소지아는 이미 옷차림을 단정히 하고 고개를 숙여 웨딩드레스를 입고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자신의 결혼사진을 바라보았다.눈 깜짝할 사이에 3년이란 시간이 지나갔다.그녀는 특별히 위에 좋다는 음식으로 아침을 먹었다. 비록 오래 살지는 못하지만, 가능한 한 좀 더 오래 살아서 아버지를 돌보고 싶었다.소지아는 외출하자마자 병원의 전화를 받았다.“보호자님, 지금 환자분께서 갑자기 심장이 발작을 일으켜서 이미 수술실로 옮겼습니다.”“곧 갈게요!”소지아는 재빨리 병원으로 달려갔고, 수술은 아직 끝나기 전이었다. 수술실 문밖에서 두 손을 모아 기도하며 기다렸다. 이미 모든 것을 잃었고, 이제 유일한 희망은 아버지가 건강하게 회복하여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다
백채원은 하얀 고급 캐시미어 외투를 입고 있었고, 귀에 있는 호주산 진주는 그녀를 부드럽고 기품 있도록 돋보이게 했다.목에 두른 숄만 해도 수백만 원을 호가했고, 점원은 백채원을 알아보고 얼른 맞이했다.“사모님, 오늘은 대표님께서 함께 주얼리 보러 오시지 않으셨네요?”“사모님, 가게에 또 신상이 들어왔는데, 다 사모님과 잘 어울리는 거 같아요.”“사모님, 지난번에 말씀하신 비취가 도착했는데, 이따가 한 번 착용해 보세요. 사모님 피부색과 아주 잘 어울릴 거예요.”점원이 사모님 사모님 하자 백채원은 미소를 지으며 소지아를 쳐다보았고, 득의양양한 눈빛으로 승리에 도취되었다.세상 사람들은 모두 이도윤이 백채원을 무척 아낀다고 알고 있었지만, 소지아가 그의 공식적인 법적 아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소지아는 두 주먹을 꼭 쥐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왜 하필 가장 힘든 순간에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나는 것일까?백채원이 부드럽게 물었다.“이렇게 좋은 재질의 반지를 가지고 와서 돈을 바꾸면, 손해가 상당할 것 같은데요.”소지아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손을 뻗어 반지를 도로 빼앗아왔다.“안 팔래요.”“안 판다고요? 정말 아쉽네요. 이 반지 정말 맘에 드는데, 그래도 아는 사이니까 비싼 값에 사려고 했어요. 소지아 씨는 돈이 필요한 거 아니에요?”소지아의 손은 제자리에 굳어졌다. 그렇다, 그녀는 돈이 필요했다. 아주 간절하게. 백채원은 이 점을 알고 거리낌 없이 그녀를 짓밟았다.옆에 있던 점원이 나서서 얼른 충고했다.“아가씨, 이 분은 이씨 그룹 대표님의 약혼녀인데, 아가씨 반지가 마음에 든다고 하시니 높은 가격을 제시하실 거예요. 이렇게 하면 아가씨도 저희 쪽 절차를 기다리지 않고 돈을 받을 수 있죠.”사모님이란 호칭은 소지아의 귀에 무척 거슬렸다. 분명히 1년 전까지만 해도 절대로 이도윤과 이혼하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하며 백채원이 감히 이도윤의 아내가 되겠다는 꿈도 꾸지 못하게 했었는데.겨우 1년만에, 사람들은 모두 백
변진희는 소지아가 8살 때 떠났다. 그날은 소계훈의 생일이었는데, 집에 돌아와 아버지의 생일을 축하할 생각으로 신나게 들어왔다. 그러나 들어가자마자 본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혼 합의서였다.소지아는 엄마를 쫓아가다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고, 신발이 벗겨져도 모른 채 달렸다. 마침내 붙잡은 변진희의 다리를 안고 끊임없이 울부짖었다.“엄마, 가지 마요!”고귀한 여자는 그녀의 앳된 볼을 쓰다듬었다. “미안.”“엄마, 나 이번에 전교 일등 했는데, 아직 내 시험지 못 봤잖아요. 엄마 사인받아야 한단 말이에요.”“엄마, 가지 마요, 나 말 잘 들을게요, 앞으로 놀이동산에도 안 가고 더 이상 엄마 화나게 하지 않을게요, 말 잘 들을 테니까 제발...”소지아는 당황하여 엄마를 붙잡기 위해 애걸복걸했다. 변진희는 단지 남편과의 결혼생활이 행복하지 않았으며, 지금은 진정한 행복을 찾았다고 말했다.소지아는 낯선 아저씨가 그녀를 대신해서 트렁크를 차에 실은 뒤 손을 잡고 떠난 것을 보았다.그리고 맨발로 땅에 넘어질 때까지 수백 미터를 쫓아갔고, 무릎과 발바닥은 모두 상처투성이였으며,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을 것처럼 차가 떠나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그때는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다. 커서야 엄마가 바람을 피웠다가 아버지에게 들켰다는 것을 알고 아예 이혼을 제기하고 홀몸으로 나가 딸을 포함한 모든 재산을 포기했다는 것을 알았다.십여 년 동안 소지아는 변진희와 연락한 적이 없었고, 평생 다시는 엄마를 만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그러나 운명은 정말 아이러니했다. ‘결국 엄마에게 고개를 숙여야 하다니.’목이 메여오자 소지아는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변진희도 딸의 마음을 알고 일어나서 소지아를 자신의 곁으로 끌어와 앉혔다.“네가 나 미워하는 거 알아. 그때 너는 너무 어렸고, 많은 일들은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었어. 엄마는 다 설명할 수 없었어.”변진희는 손을 뻗어 소지아의 얼굴을 어루만졌다.“내 딸 많이 컸네, 엄마가 이번에는 귀국해서 오래 있을
변진희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이도윤을 바라보았다. 이도윤이 결혼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이 대표, 우리는 외국에서 생활한 지 오래돼서, 국내 뉴스에 대해 잘 모르는데, 우리 딸이 자네와 무슨 관계지?”이도윤은 담담한 표정으로 한마디 내뱉었다.“관계가 있다 하더라도 지나간 일이에요. 지금 이혼 수속 밟고 있어요.”소지아는 자신의 진심이 결국 그가 과거일 뿐이란 말로 얼버무릴 줄은 몰랐다.‘화를 내야 할까?’당연히 화가 났다.더 큰 감정은 한심하다는 느낌이었다. 정말 눈이 멀어 이런 짐승 같은 인간을 남편으로 삼았다는 것이 수치스러웠다.소지아는 다이아몬드 반지 상자를 꺼내 이도윤의 이마에 세게 던졌다.“너 같은 쓰레기는 이제 꺼져. 내가 평생 가장 후회하는 일이 바로 당신과 결혼한 일이야. 내일 9시에 우리 이혼해. 가정법원에 나타나지 않으면 겁쟁이야!”상자가 그의 이마에 부딪혀 빨갛게 멍이 들었다. 땅에 떨어졌고 반지는 발밑으로 떨어졌다. 이번에 소지아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반지를 밟고 문을 내팽개치고 떠났다.최근 2년 동안 소지아에게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는데, 이 일은 마지막으로 자신을 무너뜨린 것 같았다. 그녀는 멀리까지 뛰지 못하고 길가에서 기절했다.하늘에서 끊임없이 내리는 빗방울은 마치 이 세상이 그녀에 대해 드러내는 적의와 같았다.그냥 이대로 죽어도 좋을 것 같았다.음모가 가득한 세상에 더는 미련이 없었다.다시 깨어났을 때, 낯선 방에서 눈을 떴다. 따뜻한 불빛은 어둠을 몰아냈고, 방 안의 보일러는 봄처럼 따뜻했다.“깼어?”소지아는 눈을 뜨자마자 임건우의 부드러운 눈을 보았다.“선배, 날 구한 거예요?”“퇴근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네가 길가에 쓰러져 있길래 데려왔어. 그리고 몸이 흠뻑 젖은 것을 보고 하인에게 옷 갈아 입히라고 했고.”남자의 눈빛은 맑고 깨끗하며 조금의 음흉함도 없었다.“고마워요, 선배.”“죽을 끓이고 있으니 물 먼저 마셔.”소지아는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서 내려왔다.“아니
차가운 강바람이 정면으로 불어와 칼처럼 추위는 뼛속 깊이 스며들었고 소지아는 일어나 계속 쫓아갔다.그러나 형편없이 망가진 소지아의 몸은 얼마 뛰지 못하고 심하게 넘어졌다. 차 문이 다시 열리자, 반질반질한 구두 한 켤레가 나타났다.소지아는 남자의 빳빳한 바짓가랑이를 따라 천천히 위로 바라보며 이도윤의 차가운 두 눈을 마주했다.“이...”소지아는 허약하게 입을 열었다.뼈마디가 분명한 두 손이 그녀 위에 떨어졌고, 순간 소지아는 그녀를 반하게 했던 하얀 셔츠의 소년을 본 것 같았다. 자신도 모르게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두 손을 맞잡은 순간, 이도윤은 차갑게 손을 빼서 소지아에게 희망을 주었다가 순식간에 절망으로 바뀌며 소지아의 몸이 재차 바닥으로 떨어졌다.소지아가 넘어지는 순간 마침 바닥의 깨진 유리 파편에 눌려 눈부신 피가 손바닥을 따라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그의 검은 눈동자는 잠시 놀랐지만 미동도 하지 않았다.소지아는 어렴풋한 기억이 떠올랐다. 전에는 소지아의 손가락에 작은 상처만 나도 한밤중에 병원으로 데려간 이도윤이었다.의사는 또 웃으며 말했다.“일찍 오셨으니 다행이지 좀만 더 늦었으면 상처가 아물어 흉터가 남을 뻔했네요.”기억 속의 사람은 앞에 있는 남자와 겹쳐졌고, 눈매는 여전히 과거와 같지만 달라진 것은 애정 어린 관심이 싸늘함으로 변했다는 사실이다.이도윤은 차갑고 매정하게 말했다.“소지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널 잘 알지. 마라톤 달리면서 공중제비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몇 걸음 달렸다고 넘어져?”소지아를 바라보는 이도윤의 눈빛은 마치 차가운 비수를 그녀의 몸에 꽂은 것처럼 경멸로 가득 차 있었다.소지아는 다소 창백한 입술을 깨물며 해석했다.“아니야, 널 속인 것 없어. 요새 좀 아파서 몸이 좀 약해진 거지...”설명이 다 끝나기도 전에 키 큰 남자가 허리를 굽히고 몸을 숙여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거친 손가락은 소지아의 바싹 마른 입술을 어루만졌다.“역시 그 아버지에 그 딸이군. 넌 너의 그 위선적
소지아는 그 사람을 언급할 때 목소리가 매우 평온해서 이미 다 정리한 것 같았다.그러나 임건우는 진정으로 한 사람을 사랑한 사람은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 없단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저 상처를 숨겼을 뿐, 아무도 없을 때 혼자 눈물을 흘릴 게 뻔해.’임건우는 더 이상 묻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아버지 수술 비용 지불 전이지? 내가 먼저 빌려줄게, 나중에 갚으면 돼.”그는 소지아가 혼자 돈을 벌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에 몇 번이나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지만 소지아는 모두 거절했다.소지아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선배, 그럴 필요 없어요.”“지아야, 아버지 치료가 중요하지. 설마 너 그 인간 쓰레기에게 굴욕을 당할지언정 내 호의는 못 받아들이겠다는 거야? 나는 아무런 조건도 없고, 단지 너를 돕고 싶을 뿐이야. 우리 집안이 비록 이씨 가문보다 못하지만, 일반 가정이 아니라는 거 너도 잘 알잖아. 이 정도는 나도 괜찮으니 부담을 가질 필요 없어.”소지아는 두 손에 물컵을 들고 천천히 임건우를 바라보았다. 얼굴이 창백하여 보기만 해도 마음이 아팠다.“선배는 좋은 사람이지만... 난 미래가 없잖아요.”이 신세도, 이 돈도 갚을 수 없었다.링거를 거의 다 맞아가자, 소지아는 망설이지 않고 주삿바늘을 뽑았다. 소독솜으로 지혈하지 않아 피가 솟구쳤다.전혀 개의치 않고 일어나 외투를 들었다.“선배, 돈 걱정은 걱정하지 마요. 이혼하기만 하면, 남편이 나에게 20억을 줄 거예요. 우리 아빠 수술받으신 지 얼마 안 됐으니 이제 병원에 가서 좀 만나봐야겠어요.”천재로 알려진 소지아는 성격이 집요해서 그때 왜 학업을 포기하고 바로 결혼에 뛰어들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그녀를 잘 알고 있는 교수님조차도 소지아와의 식사 자리마다 소지아의 재능을 아까워했다. ‘얼마나 훌륭한 학생인데, 이렇게 재능을 펼칠 기회를 빼앗다니.’임건우가 데려다 주겠다는 말을 하려는 것을 알고 있는 듯, 소지아는 휴대폰을 흔들었다.“내가 부른 차 도착했어요.
소지아는 고개를 숙이고 한 번 보았는데, 종이에는 묘지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설마 그의 여동생은 이미 죽었단 말인가? 그런데 그의 여동생의 죽음은 자신의 아버지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소지아는 소계훈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절대로 여자아이를 해칠 사람이 아니었다.두 사람이 더 이상 정보를 말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소지아도 두 사람을 계속 난처하게 하지 않고 조용히 이씨 가문 본가로 향했다.다시 익숙한 곳에 도착하자 소지아는 만감이 교차했다.진환은 예의 바르게 물었다.“사모님, 내려가시겠습니까?”“아니야, 난 여기서 기다리면 돼.”그녀와 이도윤의 마지막 만남은 이혼 수속을 밟는 것이고, 다른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하물며 이곳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마저 모두 두 사람의 추억을 담고 있었으니 더욱 괴로웠다.탓하려면 그 남자가 자신을 무척 아꼈던 것을 탓해야 한다.비록 지금은 점점 냉담해져도, 소지아의 기억 속 이도윤은 항상 다정한 사람이었다.분명히 극도로 증오해야 할 사람인데, 소지아는 끝내 마음을 모질게 먹지 못했다.차는 시동이 꺼지지 않은 상태에서 히터가 켜져 있었고, 차 안에는 소지아 혼자만 남았다. 위가 또 아프기 시작하자, 몸을 웅크리고 자신의 두 무릎을 꼭 안고 의자에 쪼그리고 앉아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겨울은 날이 늦게 밝았기에 7시가 넘었지만 하늘은 여전히 어슴푸레했다.정원의 은행나무 잎은 벌써 다 떨어졌고, 소지아는 자기도 모르게 예전 기억을 떠올렸다.황금색 열매가 익는 계절, 소지아가 은행 꼬치를 먹고 싶다고 하면 이도윤은 정원에 있는 10여 미터에 달하는 큰 키의 은행나무에 올라가 소지아에게 나무를 흔들어 열매를 따주었다.푸른 잎사귀와 은행 열매들이 우수수 떨어지며 마치 그녀에게 황금빛 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그때의 이도윤은 상냥했고, 또 요리 솜씨도 좋은 소지아를 무척 아꼈다.생각에 빠진 소지아는 어느새 혼자 그 나무 밑으로 걸어갔고, 은행나무는 아직 남아 있었지만 이도윤과 소
시후는 총성이 들려오자, 그것이 예린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양지운이 초조한 표정으로 말했다.“소씨 가문은 지금 완전히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만약 도련님께 무슨 일이 생기면, 다른 형제는 어떡하라고 이러십니까? 사모님은 행방불명이고, 대표님은 많이 다치셨습니다. 도련님께서 중심을 잡아주지 않으시면, 그분들이 어떻게 버틸 수 있겠냐고요.” 시후는 이를 악물며 돌아섰다.“가자!” 이는 예린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만들어준 기회였다. 지금 예린이 어떤 상황에 부닥쳐 있더라도, 시후는 여기 머무를 수 없었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뒤돌아보지 말자! 지금은 아버지를 구하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시후는 날이 밝기 전에 소임호를 데리고 자신의 별장으로 돌아왔고, 이 일을 지아에게만 알렸다. 지아는 아버지와 오빠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가슴속 깊이 자리 잡았던 무거운 걱정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전화를 끊기 전, 지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빠, 이예린 씨는 어떻게 됐어요?] 시후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대답했다.“그 별장을 떠날 때 총소리를 들었어. 하지만 상황이 너무 혼란스러워서 아버지를 모시고 떠날 수밖에 없었지.” “사람들은 시켜 길목에서 기다리게 했지만, 그 아이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어. 아마도 그 아이는...” [그래요, 알겠어요. 저도 금방 갈게요.] 지아는 시후의 말을 도윤에게 전했고, 도윤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당신의 아버지가 무사하시니, 예린이의 희생이 헛되지 않은 셈이야.” 도윤의 눈가가 살짝 붉어진 것을 본 지아는 도윤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지 짐작할 수 있었다. “예전에 아가씨가 나한테 저질렀던 일 때문에 내가 미안하다고 말할 수는 없어. 하지만 위로는 해주고 싶은 마음이야. 지금은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겠지만 말이야.” 예린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소임호를 구출했지만, 결국 예린이 한 일은 그동안의 죄에 대해 속죄하기 위한 것이었다. 예린이 저지른 잘못은 이번만
예린은 잠시 멍해졌지만 곧 평소처럼 순종적인 태도로 대답했다.“알겠습니다.” 예린이 대답하자 조경선이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다른 사람이었다면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예린은 조경선의 곁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기에 그녀의 아주 미세한 표정 변화도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사모님, 푹 쉬세요.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그래, 이만 나가 봐.”예린은 돌아서서 나가려는 순간, 위험이 자신을 덮쳐오는 것을 느꼈고, 재빨리 몸을 돌려 조경선이 자신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것을 보았다. 탕!총성이 울렸고, 예린은 고개를 돌려 겨우 총알을 피했다.조금만 늦었어도 예린은 이미 조경선의 총에 맞아 죽었을 것이었다. “사모님, 저한테 왜 이러세요?”예린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조경선을 바라보았다. 조경선은 총을 쥔 손으로 예린을 겨누며 시원한 대답을 내놓았다. 아마 예린이 도망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네가 소시후를 짝사랑하는 걸 내가 모를까 봐? 그 사람을 그렇게 사랑하면서, 정말 그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저를 시험하셨군요!”예린은 자신이 오랜 세월 충성을 바쳤는데도 믿음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그래, 너는 아주 잘 쓰이던 꼭두각시였지. 하지만 이제 더는 쓸모가 없어. 편히 죽으라고!” 조경선이 방아쇠를 당기기도 전에, 별장 전체에 안전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침입자 발견!” 조경선이 표정을 구기며 소리쳤다.“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예린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사모님도 아셨잖아요, 제가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걸요. 하지만 제가 그 사람을 위해 뭔가 할 거라는 건 예상하지 못하신 모양이네요. 지금쯤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소 대표님을 구하러 갔을 거예요.”“키워준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것!” 예린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사모님께서 가르쳐주신 거잖아요. ‘여자는 강해지지 않으면 자리를 지킬 수 없다’고요.” “빌어먹을!”한편, 시후는 사람들을 데리고 별장을 침입했고
“약? 내가 약을 왜 먹어? 난 하나도 안 아프다고!” 어디서 자극을 받은 건지 조경선은 갑자기 예린을 세게 밀쳐냈다. “사모님 겁내지 마세요. 저예요.” 조경선의 흐릿한 눈동자가 서서히 초점을 잡기 시작했고, 표정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래, 내가 키운 아이구나. 네가 날 해칠 리가 없지.” 조경선은 약을 삼키고 물 한 잔을 마셨다. “소씨 가문은 어떻게 됐지?” “여전히 난장판이에요. 상속권 문제로 서로 심하게 다투고 있고, 시월 아가씨는 깊이 연루되어 있죠. 지금까지 나타난 증거로는 시월 아가씨가 불리한 상황이지만, 혈액형 유전법칙은 최근 들어 완벽하지 않다는 반박도 나오고 있어서 무조건 신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에요. 게다가 소 대표님이 없는 상황에서는 DNA 검사를 진행할 수도 없고요.” 조경선이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한숨을 쉬었다.“그런 변수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 “사모님, 아주 피곤해 보이시는데, 잠깐이라도 쉬는 게 어떠세요? 여기는 제가 지킬게요.” “아니야, 침입자가 있으니 내가 직접 지켜야 해. 너는 우리가 언제든 여길 떠날 준비를 해 둬. 여긴 이미 안전하지 않아.”“알겠습니다.”예린은 공손히 물러났지만, 조경선이 마신 물에 약을 섞어 두었다.몇 분 후, 조경선이 잠에 들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예린은 먹을거리 몇 가지를 준비해 다시 방으로 향했다.문에 다다르자, 조경선이 통화 중인 소리가 들려왔다. 조경선은 약간 진정된 상태였지만, 완전히 침착하지는 않은 듯했다.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멍청한 녀석, 지금이 절호의 기회야. 지금 당장 소시언과 소시하를 없애버리고 이 모든 걸 다른 방계의 사람들에게 뒤집어씌워. 한 명은 팔이 부러지고, 한 명은 다리가 부러졌으니, 지금이 손쉽게 처리할 때라고!!” “나는 소임호가 평생 고통 속에 살게 할 거야!” 예린은 문 앞에서 몸이 굳어버렸다.소씨 가문의 몇몇 형제들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처음엔 다른 적들의 소행인 줄 알았지
예전에 예린은 두 사람 사이의 도화선이었지만, 이제는 도윤이 예린을 포기한 셈이었다.도윤은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지아는 도윤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지아가 도윤의 손을 잡고 말했다.“많이 아프지?” “당신이 그때 겪었던 아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자기야, 난 괜찮아. 이젠 우리 모두 어른이 되었잖아. 그 애가 끝까지 고집을 부린다면, 나도 다른 방법이 없어. 게다가 이번에는 나쁜 일을 하려는 것도 아니잖아.”“자기야, 만약 예린이가 이번에 정말로 당신 아버지를 구해낸다면, 과거에 당신에게 진 빚을 갚은 걸로 생각해 줄 수 있을까?”도윤은 중간에 끼어 있는 입장에서 아주 괴로웠다.예전에 도윤과 그의 가족이 지아에게 저지른 일은 여전히 도윤의 마음속 깊이 남아 있는 상처였다. ‘살아 있는 동안에 어떻게든 이 상처를 풀고 싶어.’ 이제 많은 일은 겪은 지아는 더 이상 예전의 소녀가 아니었다. 지아는 예린이 이번 일에 목숨을 걸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 아가씨가 더는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면 말이야.” 도윤은 오빠로서 무력감을 느꼈다.만약 소임호가 그 별장 안에 있지 않았다면, 도윤은 어떤 폭력적인 방법도 서슴지 않았을 것이었다. 비록 살아 있는 증인을 얻지 못한다고 해도, 그곳에 있는 적을 철저히 없애버렸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소임호의 존재는 도윤이 손을 쓸 수 없게 만들었다.시언조차 신중하게 움직이고 있는 상황에서, 도윤은 더욱더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제 그 복잡한 매듭을 풀어야 할 사람은 예린이었다.운명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이다. 예전에 예린이 지아에게 빚진 것을 이제는 이런 방식으로 갚아야만 했다. 두 사람 모두 피곤했지만, 한 명은 아버지의 문제로, 다른 한 사람은 여동생의 문제로 쉽사리 잠들 수 없었다.도윤이 지아의 손을 맞잡고 말했다.“같이 기다려 보자.”“그래.”날이 밝으면 결과가 나올 것이었다. 한편, 시후는 초조한 시간을 보내고
지아는 오랜 세월 도윤과 함께해 온 만큼, 도윤의 평소와 다른 행동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당신,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아니야?” “혹시 우리 아빠 쪽에서 무슨 새로운 소식이라도 있는 거야?” 도윤은 손을 들어 지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아니야, 소식이 있으면 당신한테 제일 먼저 알려줄게. 당신, 요즘 제대로 쉬지도 못했잖아. 좀 쉬어, 다 내가 알아서 할게.” 지아는 원래 잠이 오지 않았지만, 몸은 이미 한계에 도달했음을 그녀에게 계속 경고하고 있었다.지아는 한숨을 쉬고는 방으로 돌아가 소식을 기다리기로 했다. 지금 지아는 몹시 초조했고, 소씨 가문과 아버지를 위해 무엇이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의 소씨 가문은 이미 복잡한 소용돌이가 되었기에,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도윤은 지아를 부드럽게 다독였고, 지아가 깊이 잠들 때까지 곁에 있었다. 도윤이 핸드폰을 꺼냈을 때,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는데, 전화를 건 사람은 진환이었다. [보스, 방금 미행 중인 사람이 보고했습니다. 아가씨께서 얼굴을 바꾸고 변장한 채, 도시 외곽에 있는 별장으로 가셨답니다.]도윤의 사람들은 이미 소임호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별장은 이미 위험한 장소로 알려진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예린은 호랑이가 있는 산을 알면서도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다.예린은 도윤의 사람으로서, 이렇게 큰일은 당연히 그의 허락을 구해야만 했다. “알고 있어.”[그럼 아가씨를 막아야 할까요? 거긴 정말 위험합니다.]도윤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의 둥근 달을 바라보았다. 달빛은 아름다웠지만, 그 달빛 아래의 세상은 유난히 쓸쓸해 보였다. 도윤은 잠시 침묵하더니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그럴 필요 없어. 걔는 이미 어른이야. 자신이 무슨 일을 하려는 건지 잘 알고 있으니, 자신의 선택에 책임질 줄도 알아야 해.”[하지만...]“이번 일에는 우리가 개입할 필요 없어. 살든 죽든, 그건 걔의 운명이니까.” [알겠습니다.]진봉도 도윤의 의도를 이
이예린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네, 엄마가 저를 사랑하신다니, 그걸로 됐어요.” 이는 모녀간의 응어리가 풀리는 순간이었다.예린은 심예지를 밀어내고, 눈앞의 여인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고향에 돌아와서인지, 심예지는 예전보다 훨씬 더 건강해 보였다. “엄마, 아직 갈 길이 멀어요. 엄마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나서 남은 삶은 잘 살아가세요. 더는 엉뚱한 사람들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아가,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엄마는 너를 다시 찾은 게 가장 큰 행복이야. 앞으로 이 엄마의 가장 큰 소원은 너와 네 오빠가 평생 행복하고 안전하게 사는 거란다.” 예린은 심예지의 말에 점점 마음이 흔들렸다. ‘여기 더 머물다가는 떠나지 못할 것 같아.’ “저는 단지 소씨 가문의 어르신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생각이 조금 많아졌을 뿐이에요. 엄마, 오늘 아주 피곤하셨을 텐데 이만 돌아가서 쉬세요. 저는 조금 걷고 올게요.” “그래, 너무 늦지 않게 들어오렴.” 심예지는 예린의 어깨를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하지만 예린이 급히 떠난 후, 심예지는 딸의 말이 평소와는 다르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우리 모녀가 함께 한 시간은 길지 않았고, 그동안 예린이는 대부분 침묵 속에 지냈어. 그런 예린이가 오늘은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했을까?’ ‘더구나 방금 그 말은 작별 인사 같았는데...’ 심예지는 어린아이가 아니었기에, 곧바로 의심을 품고 도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사실, 도윤은 심예지가 예린을 몰래 데려온 일을 일부러 눈감아주고 있었다.“도윤아, 네가 여전히 예린이를 미워한다는 건 알지만, 그 아이는 결국 네 친여동생이야. 너는 그동안 그 아이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모를 거야. 이 엄마는 그 아이가 나쁜 생각이라도 할까 봐 너무 무섭단다.” [알겠어요, 제가 알아서 처리할게요.]도윤은 전화를 끊고서 최근 소씨 가문에서 일어난 일들을 떠올렸고, 이내 예린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분명 소 선생님을 도우려는 걸
이예린은 비록 나이가 많지 않았지만, 노련한 태도로 전혀 흔들림 없이 대답했다.“새로운 곳에 와서 그런지 잠이 안 오네요. 좀 걸으려고요.” “네 오빠도 여기 있잖니. 그 아이가 네가 나가는 걸 보면 분명히...” 이예린은 곧장 심예지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오빠가 제 손발이 이미 회복된 걸 모를 거라고 생각하세요?” “오빠가 정말 저를 죽이고 싶었다면, 이미 3년 전에 끝냈을 거예요. 하지만 오빠는 누군가처럼 사랑에 눈이 멀어버리는, 마음 여린 사람이라고요.” 당시 도윤은 예린을 죽이지 않고, 단지 손과 발의 힘줄을 끊어버렸다. 그것만으로 지아를 위해 복수를 한 셈이었다.더구나 지아는 죽지 않았기에, 도윤은 더 이상 예린을 해치지 않았다.“너는 전혀 우리를 닮지 않은 모양이구나.”예린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러게요.”사실, 사랑에 눈이 멀어버리는 것은 그들 가문에 흐르는 피와 같았다.부모는 말할 것도 없고, 도윤도 그러했으며, 예린도 다르지 않았으니 말이다. 시후가 예린을 구해준 순간부터, 예린은 자신의 목숨이 영원히 시후의 것임을 알았다. “그래, 주변에서만 걸어 다니렴. 괜한 문제는 일으키지 말고.” “알겠어요.”예린은 몇 발짝 걸어가다가 멈추더니, 뒤돌아 심예지를 바라보았다.“엄마.”심예지는 온몸이 굳어버렸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예린을 바라보며 물었다.“방금... 뭐라고 했니?” 심예지는 지난 몇 년 동안 예린에게 모든 것을 맞춰주었지만, 예린은 늘 과묵했으며, 좀처럼 말하지 않았다. 예린은 태도마저 차갑고 무관심했기에, 심예지는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잘못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모든 것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저 여생 동안 속죄할 기회가 있다는 것에 만족했다. 심예지는 많은 것을 바라지도 않았는데, 예린의 입에서 나온 ‘엄마’라는 단어는 너무나 큰 의미를 지니는 듯했다.심예지는 그 자리에서 눈물이 차올랐고, 다시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뭐... 뭐라고?”“엄마.”이번에는 예린
전화를 받은 이예린은 당황해서 더듬거리며 말했다.[말씀만 해주세요. 제 목숨을 구해주셨으니, 선생님을 위해서라면 불 속이라도 뛰어들겠어요.]이 대답은 시후가 예상한 대로였다. 과거에도, 그리고 얼마 전에 재회했을 때도, 예린은 시후를 볼 때마다 두려워하며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평소의 당당한 이예린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시후는 연애 경험은 없었지만, 비즈니스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며 다양한 유형의 여성을 접해왔다. 그래서 예린이 단순히 자신에게 감사함을 느끼는 것 외에도, 깊은 연모의 감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예린이 이씨 가문의 아가씨라 할지라도, 시후 앞에서는 늘 자신감 없는 태도를 보였으니 말이다. 예린은 시후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하며, 늘 자격지심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시후는 상황을 간단히 설명했다. [제가 선생님의 아버지를 구출하라는 말씀이시죠?] “그래, 할 수 있겠어?”시후는 예린에게 모든 진실을 털어놓았지만, 속으로는 그녀가 해낼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예린은 주저하지 않고 답했다.[어려울 순 있겠지만, 반드시 해낼게요.]예린은 나이가 어리지만 결단력이 있었다. 예린의 대답에 시후는 한결 안도했다.“뭐든 얘기해줘. 최선을 다해서 널 도울게.”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저 혼자로도 충분하니까요. 사람이 많아지면 오히려 적에게 이상한 낌새만 줄 뿐이에요.]시후는 곧 이예린의 놀라운 능력을 직접 보게 되었다. 예린은 명석한 두뇌와 치밀한 계획, 냉혹하면서도 질서 정연한 방식으로 일을 처리했다. 만약 예린이 적이었다면, 정말로 두려운 상대가 되었을 것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양지운이 시후를 바라보며 물었다.“어떻게 됐습니까?” “우리 사람들을 철수시켜.” “그 여자의 말을 믿으시는 거예요? 오랜 세월 동안 보지 못했던 사람인데요.” 시후는 길가에 떨어진 나뭇잎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때로는 은혜 하나만으로도 평생 기억되는 법이지
이 말을 할 때 조경선의 얼굴은 거의 광기에 사로잡혀 있었고, 입가에는 미친 듯한 웃음이 번졌다.“꼭 살아남아서, 그 모든 걸 똑똑히 지켜보도록 해.” 조경선은 다시 소임호에게 영양제를 주사했다. 소임호는 침대에 누운 채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는데, 조경선과 대화를 나눈 것만으로도 남은 힘을 모두 소진한 것 같았다. 소임호가 눈을 감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병약한 모습을 보자, 조경선은 결국 자신이 원하던 것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조경선은 수년간 어둠 속에서 모든 것을 계획해 왔다.조경선이 상상했던 장면은 소임호가 무릎을 꿇고 자신에게 애원하며 사과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소임호를 붙잡고 나서도, 소씨 가문이 이렇게 망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소임호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심지어 자살 시도까지 했으니, 조경선의 분노를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온 힘을 다해 날린 주먹이 솜사탕에 파묻힌 것 같은 기분이었다.조경선의 가슴속은 분노와 억울함으로 가득 찼다. 그토록 오랜 시간 공들여 계획했지만, 조경선은 결국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조경선은 뼛속 깊이 소임호를 증오하면서도, 소임호가 그렇게 약해진 모습을 보임에도 불구하고, 절대 그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소임호는 조경선이 평생 이루지 못한 소원이자, 사랑하면서도 증오하던 대상이기 때문이었다. 소임호를 미워할수록 사랑도 더 깊어졌기에, 조경선은 소임호를 죽이기보다는 그가 자신에게 굴복하며 돌아오기를 원했다.해가 저물 무렵.조경선은 잠시 쉬고 있었는데, 갑자기 경보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별장 안팎에 놓인 꽃들과 각종 장식은 사실 특정한 용도로 설계된 것이었다. “침입자 발견! 침입자 발견!”기계음이 별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조경선은 두 눈을 번쩍 뜨며 침대 옆 협탁에서 가면을 꺼내 얼굴에 썼고, 입가에 음흉한 웃음을 그렸다. “감히 여길 들어오다니, 죽고 싶어서 환장한 모양이지?”조경선이 손을 한 번 흔들자, 벽에 설치된 스크린에 실시간 CCTV 화면이 투사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