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일들은 한 번 실마리를 풀기 시작하면, 그다음부터는 물 흐르듯이 진행되기 마련이다.도윤은 살아남은 예린이 직접 진실을 듣기를 바랐다. 한편, 지아는 이미 부남진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는데,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부남진의 기운 넘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얘, 이렇게 오랫동안 전화 한 통도 없고, 너 때문에 걱정돼 죽을 뻔했구나. 그래도 도윤이가 너랑 있었다니 참 다행이었어.] 지아의 치료 덕분에, 부남진의 건강은 눈에 띄게 좋아졌고, 목소리에서도 힘이 넘쳤다. 가족의 목소리를 들은 지아는 벅찬 감정에 휩싸였다. “할아버지, 정말 큰 소식이에요.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거예요.” 부남진의 목소리가 한층 진지해졌다.[좋은 소식이야, 나쁜 소식이야?]“좋은 소식이에요. 저, 친아빠를 찾았어요!” 쨍그랑!지아는 수화기 너머에서 컵이 떨어져 깨지는 소리를 들었는데, 부남진이 손에 들고 있던 컵을 놓친 것이 분명했다. [얘, 정말이니? 거짓말 아니지?]“더 일찍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너무 복잡하던 상황이 이제야 조금 안정됐어요.”지아는 모든 과정을 차근차근 설명했고, 부남진은 감격에 겨워했다.부남진에게 있어서 이 소식은 하늘이 내려준 선물과 같았다. 특히 지아의 아버지가 살아있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자신이 그토록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혈육이었다는 사실에 눈물이 차오를 정도로 기뻤다. 하지만 소임호가 크게 다쳤다는 소식을 듣자, 부남진의 표정에는 곧장 걱정이 어렸다.‘그 아이는 유일한 내 혈육이야!’[지아야, 네 아버지는 좀 어떠니? 많이 다친 게야?]“할아버지, 오빠가 방금 아빠를 구해냈어요. 지금 당장 생명에 지장은 없을 것 같아요. 남은 치료는 저한테 맡겨주세요.”지아의 차분한 목소리에, 부남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래, 네가 있다니 안심이구나. 지아야, 네 아버지는 네가 잘 보살펴주길 바란다.]“네, 상황이 정리되는 대로 다시 연락드릴게요.” [그래, 이만 들어가 봐라.]수화기 너머의 부남진은 기쁨에
지아는 뒤돌아 도윤을 한 번 바라보았고, 도윤은 지아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난 조금 있다가 바로 갈게.” 지아는 아버지를 빨리 만나고 싶었기에 더는 따지지 않고, 시후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시언과 시후는 이미 소임호의 곁에 있었는데, 지아가 방에 들어섰을 때, 그들은 모두 충혈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죽을 고비를 넘기고 다시 만난 기쁨과 과거의 날들에 대한 후회가 뒤섞여 있었다. 만약 조금만 더 빨리 알아챘더라면, 그 많은 고난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스친 모양이었다.지아의 심장은 빠르게 뛰었고, 그녀의 눈앞에는 소임호가 있었다. 소임호는 이전에 봤던 사진과 영상보다는 훨씬 젊어 보였지만, 몸 상태는 더 약해 보였고, 얼굴엔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눈앞의 소임호가 바로 지아가 그렇게도 오랫동안 찾아 헤맸던 아버지였다.소임호를 눈앞에서 보게 된 순간, 지아는 그대로 멈춰 서버렸다. 마치 누군가 지아의 움직임을 봉인한 것처럼 말이다. 지아는 소계훈이 친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수없이 상상해 왔다.‘내 부모님은 어떤 분들이실까?’‘그분들은 날 사랑해 주실까?“지아야, 왜 그래?”시후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지아를 깨웠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분이... 소 대표님이신가요?”두 사람의 대화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단숨에 끌어당겼고, 소임호는 지아를 보자마자 멈칫했다.시월은 지아를 본떠 성형했지만, 지아와 똑같이 될 수는 없었다. 지아의 얼굴은 환희와 너무 닮아 있었다. 하지만 환희는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기에, 다른 자녀들은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희미했다.다만, 소임호만큼은 환희의 얼굴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소임호가 환희와 함께 했던 시간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그... 그쪽은...”소임호가 지아를 보자마자 몸을 일으키려 하자, 시언이 부드럽게 설명했다.“제가 전에 말씀드렸던 소지아 선생님이에요. 저희와 의형제를 맺기도 했죠.”“이번에도 지아 덕분에 많은 도움을
지아는 예린과 시후 사이에 얽힌 사연을 알지 못했기에, 예린이 이곳에 나타난 것이 다소 놀라웠다. 하지만 예린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 지아는 특별히 실망하지도 않았다. 예린의 정체를 고려하면, 지아의 입장에서는 예린이 죽는 게 마땅했겠지만, 도윤의 입장에서 예린이 죽었다면, 그는 분명히 괴로웠을 터였다. 그래서 지아는 예린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예린의 등장은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이 지아가 방금 던진 말의 의미를 되새기던 찰나, 시후가 예린에게 물었다.“괜찮은 거야?”예린은 상처를 입은 곳에 붕대를 감고 있었으나, 지아는 공기 중에 희미하게 풍기는 피비린내를 감지했다. “전 괜찮아요.” “아버지, 이 사람이 아버지를 구한 사람이에요. 만약 이 사람의 전폭적인 도움이 없었다면, 저도 손쓸 수 없었을 거예요.” 소임호는 지금 모든 관심이 지아에게 쏠려 있었지만, 예린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마워요. 꼭 보답하겠습니다.” 예린은 소씨 가문 사람들 앞에서 유난히 어색해 보였고, 손을 연신 내저을 뿐이었다.“아니에요, 보답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소임호의 시선이 다시 지아에게 향했다.“소 선생님, 방금 한 말이 사실인가요?” 그들은 조경선과 심세호를 의심했지만, 정작 그들이 오랫동안 사랑했던 딸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시월이 그들 앞에서 너무도 완벽한 연기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도윤은 예린을 한 번 힐끗 본 뒤 성큼성큼 걸어왔다.“제가 대신 말씀드리겠습니다.” 도윤은 지금 지아의 감정이 아주 격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지아를 먼저 의자에 앉힌 후 예린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는 무릎 꿇고 들어!” 그 순간, 예린은 긴장감에 휩싸였는데, 소씨 가문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결과는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기에 아무 말 없이 무릎을 꿇었다. 도윤은 지아의 기구하고 복잡한 출생의 비밀과 그녀가 국내에서
지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아빠, 이번 생에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만족해요.” “지아야, 소시월이 그렇게 악랄한 사람인 줄 몰랐어. 그 X은 너를 몇 번이고 암살하려 했고, 우리 가족을 산산조각 냈어!” “전에 오빠가 너에 대한 편견을 가졌던 걸 용서해 줄 수 있겠어?” “여러분이 제 가족이라는 걸 몰랐을 때도, 저는 한 번도 오빠들을 원망한 적 없어요.” 가족이 다시 한자리에 모였고, 모두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지만, 이예린만큼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충격에 빠져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말도 안 돼. 소지아가 날 속였다니, 어떻게 날 속인 거지?”예린은 자신이 믿어왔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시후는 예린이 아직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을 보고 말했다. “괜찮아? 이만 일어나.”예린은 시후의 손을 강하게 뿌리쳤고, 지아의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모든 게 내 잘못이에요.” 본래 예린은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도윤이 그녀의 손과 발의 힘줄을 끊었을 때조차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예린은 자신을 용서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죄에 대해 속죄하기 위해 미친 듯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머리를 몇 번 조아리자, 예린의 이마에서는 선혈이 흐르기 시작했고, 머리뼈와 바닥이 부딪히는 소리가 뚜렷하게 울렸다. “그러지 말고 일어나서 이야기해.” 하지만 시후의 말은 예린의 귀에 들리지 않는 듯했다.예린은 지아의 손목을 붙잡은 채, 피와 눈물로 얼굴을 적셨다. “언니, 미안해요. 저도 속아서 그 끔찍한 짓을 저지른 거예요. 용서는 바라지도 않을게요. 그냥 저를 죽여주세요. 제발 죽여주세요!” 예린은 자신이 더 이상 세상을 살아갈 자격이 없다고 느꼈고, 죽음을 간절히 원했다. 하지만 지아는 예린을 그렇게 쉽게 놓아주지 않았고, 후회로 가득 찬 예린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너는 분명히 죽어 마땅하지만,
시후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괜찮아. 일단 진정 좀 해봐.” 시후가 도윤을 바라보며 덧붙였다.“많이 흥분한 것 같은데, 어서 데려가서 좀 쉬게 해줘.” 도윤의 입장에서 계속 이곳에 머무는 것은 이미 불편한 일이었다. 소씨 가문의 남자들이 맹수처럼 당장이라도 도윤을 물어뜯을 기세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도윤의 목적은 예린에게 진실을 알리는 것이었는데, 예린은 고집이 세고 완고했기 때문에,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 뻔했다. “장인어른, 몸조리 잘하세요. 다음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도윤이 예의 바르게 인사하자, 소임호는 도윤에게 베개를 집어 던지며 소리쳤다.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소임호의 얼굴은 분노로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는데, 자기 딸이 밖에서 고생하며 학대받을 때, 도윤이 그저 방관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니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듯했다.지아가 급히 다가가 소임호를 달랬다.“아빠, 진정하세요. 아직은 몸이 회복되지 않으셨잖아요.” “이름이 지아라고 했나?”소임호는 지아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지아는 환희와 많이 닮아 있었지만, 눈매와 이목구비는 소임호와 조경숙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네, ‘지혜 지’에 ‘맑을 아’예요.”“아주 훌륭한 이름이구나.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겠니... 너를 잘 키워주신 양아버지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은데, 내가 직접 방문할 기회가 없어서 아쉬울 따름이구나.” “제 양아버지께서 하늘에서 이 소식을 들으신다면, 저를 가족들과 만나게 해 주신 것을 아주 기뻐하실 거예요.” 지아는 이 방에서 가장 어린 사람이었지만, 가장 침착한 모습을 보였다. 비록 가족을 만나던 순간에는 눈물을 참지 못했지만, 지금은 이미 평정을 되찾은 상태였다. “아빠, 제가 처방전을 써드릴게요. 그대로만 복용하시면 곧 건강을 회복하실 수 있을 거예요.” 지아가 처방전을 쓰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런데... 다들 소시월은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세요?” 지아는 무심한 듯 물었지만, 소시월은 소씨 가문 사람
한편, 도윤은 혼란스러운 예린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예린은 총알에 스쳐 가벼운 상처만 입었지만, 표정은 마치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사람처럼 공허하고 무기력했다. 예린은 차량 뒷좌석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온몸이 부서질 듯한 상태였다. 진실이 주는 충격은 예린에게 너무도 컸다. 그녀의 마음은 죄책감과 혼란으로 가득 찼는데, 고개를 들어 도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빠, 그때 날 죽이지 않은 이유가 이거였구나? 이게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결과라는 걸 알았으니까.” 예린은 손으로 얼굴을 가렸는데, 눈물이 손가락 사이로 줄줄 흘러내렸다.“나도 이렇게 되길 원치 않았어. 나는 소 선생님을 돕고 싶었을 뿐인데,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나는 소 선생님의 여동생을 죽일 뻔했어. 나는 죽어야 해!” 도윤은 스스로를 질책하는 예린을 보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나는 신도 아니고, 미래를 내다볼 능력도 없어. 내가 네 목숨을 살려둔 건, 너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서였다고.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새롭게 시작하라는 뜻이었어.”도윤이 예린의 어깨 위에 손을 얹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예린아, 우리는 원래부터 정상적인 환경에서 태어나지 못했잖아. 우리 부모님의 잘못된 선택이 우리에게도 왜곡된 마음을 심어줬어. 그래서... 우리는 극단적인 선택을 쉽게 하게 된 거지. 오빠도 과거에는 너처럼 많은 잘못을 저질렀어. 지아가 어떤 벌을 내리든, 나는 받아들일 생각이야. 내가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이유는 과거를 속죄하기 위해서거든.”“잘못은 잘못이고, 그걸 변명할 수는 없어. 하지만 과거에 얽매여 계속 괴로워한다면, 소 선생님이 널 구할 필요가 있었겠어?” 예린은 시후의 이름이 언급되자, 눈동자에 희미한 생기가 돌았다. “그분의 선의를 배신하지 마. 넌 살아야 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해. 과거가 아무리 어둡더라도,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면 파란 하늘과 따뜻한 햇살을 볼 수 있을 거야.” “예린아, 앞으로는 반듯하게 살아가야 해.” “오빠
소씨 가문은 완전히 혼란에 빠져 있었고, 시월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 비록 지금은 소임호의 신분을 입증할 절대적인 증거가 없었지만, 소씨 가문 사람들은 이미 소임호가 소영수의 친아들이 아니라고 믿고 있었다. 이에 따라 소임호의 혈통은 소씨 가문 내에서 더욱 혼란스러워졌다.시월과 조경선의 원래 계획은 소씨 가문을 후손 없이 무너뜨려 소씨 가문의 대부분 재산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그 재산은 실로 어마어마했으니 말이다.게다가 소씨 가문 사람들이 시월은 아무리 아껴주어도, 결국 시월은 시집가야 할 운명이었다. 하지만 결혼 후 시월이 얻을 수 있는 것은 그저 한몫의 축의금뿐이었고, 그것마저 심씨 가문으로 가져가야 할 것이었다.게다가 결혼한 뒤에는 시월이 남자의 부속물이 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시월이 이렇게까지 하려는 이유는 단지 조경선을 위해 복수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시월은 철저히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였는데, 조경선처럼 사랑에 집착하는 사람과는 달리, 시월은 훨씬 더 영리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게 바로 사랑이야.’ 물질적인 안정만이 시월에게 충분한 안정감을 제공할 수 있었다. 조경선은 시월이 친딸이라고 주장했지만, 시월은 이미 자신의 출생 비밀을 철저히 파헤쳤다. 조경선은 평생 소임호만을 사랑하며 집착했기에, 다른 남자를 받아들일 리 없었다. 사실, 시월은 생모는 깊은 산골에 살던 농부의 아내였다. 시월은 집안의 남아선호 사상으로 인해 태어나자마자 죽을 뻔했지만, 마음이 약해진 시월의 생모는 시월을 산에 버렸고, 마침 산속으로 숨어들었던 조경선이 그녀를 발견해 데려간 것이었다. 조경선은 그 순간부터 복수를 위한 계획을 마음속에 세웠다.시월은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알고 난 후 더욱 노력했고, 조경선이 자신을 산속에서 데려온 것에 감사함을 느꼈다. 비록 시월은 뛰어나지 않았지만, 노력으로 부족함을 메웠다. 게다가 소씨 가문의 풍부한 자원과 훌륭한 교육을 받으며, 무사히 어린 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시후는 약간 놀랐다. 조경선을 모든 게 들통나자마자 꼬리를 자르고 도망쳤는데, 오히려 소시월은 도망치지 않고 시후에게 전화를 걸었으니 말이다. ‘지아 말이 맞았어. 소시월은 독하기만 한 게 아니라, 야망도 끝이 없었던 거라고.’ 시후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그래, 오빠야, 무슨 일이야?] “오빠, 그동안 연락이 안 돼서 정말 걱정했어요. 괜찮은 거예요?” [난 괜찮아. 아버지가 죽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고, 아버지를 구출하려고 노력 중이었거든.]“그럼 아빠는 어떻게 됐어요? 구했어요?”시월의 목소리에는 초조함이 가득했다.만약 시후가 진실을 알지 못했다면, 시월의 태도와 과거의 일을 연결 짓지 못했을 것이었다. ‘정말 무서운 여자였구나.’ ‘나이는 어리지만, 보통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야망과 담력을 가지고 있었어.’ ‘이런 사람을 그냥 죽여버리는 건, 너무 가벼운 처벌이야!’ 시후는 지아가 미리 알려준 대로 대처했고, 시월은 즉시 소임호를 보러 오겠다고 했다. [그래, 하지만 지금은 아직 안전하지 않으니, 올 때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게 조심해. 괜히 문제를 더 키울 수도 있으니까.] “오빠, 알겠어요.”전화를 끊은 후, 시후는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지아야, 역시 네 말이 맞았어. 소시월은 도망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계속 계획을 진행하려고 하는 중이었다고.” “소시월은 아주 오랫동안 계획을 세워왔어요. 저는 죽이려 한 것만 봐도, 소시월이 얼마나 철저한지 알 수 있잖아요. 그 여자는 절대 본인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을 거예요.” “제가 할머니의 사진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아직도 소시월한테 속고 있었을 거예요. 그 여자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었을 거라고요!” “그렇게 독한 사람은 죽이는 것도 아까워!”시하는 책상을 치며 일어섰다.“내 다리, 내가 잃어버린 지난 세월이 다 소시월 때문이었어! 그리고 시영이의 죽음도... 다 그 여자 때문이었다고! 나는 그 여자를 죽이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