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 지아는 땀에 흠뻑 젖은 채로 잠에서 깼다. 전날 밤의 황당하고도 기묘했던 꿈이 떠오르자, 그녀는 이마의 식은땀을 닦으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지아는 시영은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고, 오직 사진으로만 봤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꿈속의 시영은 너무나 생생했으며 현실감마저 느껴졌다. 특히 시영의 미소는 따뜻하고 부드러웠는데, 죽은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친근하고 온화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마치 이웃집 언니처럼 다정했다. 지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만약 그 사람이 아직 살아 있었다면, 지금쯤 스물아홉이 되었겠지? 세상은 참 잔인한 거구나...’ 그렇게 뛰어난 재능을 가진 시영이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이 다시금 안타깝게 느껴졌다. 바로 그 순간, 귓가에 부드러운 악기 소리가 들려왔다.지아는 서둘러 매무새를 정리하고 밖으로 나갔다. 밖에서는 시하가 단소를 연주하는 무무를 다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너무나 평화로워 보였고, 심지어 시후의 얼굴에도 오랜만에 편안한 기색이 감돌고 있었다. 지아가 부드럽게 물었다.“오빠, 치료는 어떻게 되고 있어요?”“이미 아주 좋아졌어. 루이스 박사님께서도 내가 너 이후로 가장 성공적인 약인 사례라고 하셨어.” 지아는 그 말에 기뻐하며 크게 웃었다.“그럼 오빠도 희망이 있는 거네요!” “아직 좋아하긴 일러. 몸 상태가 더 좋아지고, 적합한 신장이 확보되어야 수술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그래도 정말 다행이에요.”지아는 마치 자신이 구원받은 것처럼 벅찬 기쁨을 느꼈다. 바로 그때, 시하가 그녀를 보고 밝게 웃으며 다가왔다.“지아야.” “오빠, 다리는 좀 어때요?” “아직은 좀 아프지만, 로봇 조수가 문제없을 거라고 했어.”“수술 후 첫 주는 통증이 있는 게 정상이에요. 아플수록 수술이 성공적이었다는 증거인 거고, 통증이 없다면 오히려 이상한 거죠. 하지만 꾸준히 검사받아야 하고, 초기에는 너무 오래 서 있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요.” “지아야
시월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이전에 이화천이 그렇게 말했을 때, 그녀는 그저 우스운 농담으로 여겼다.‘오빠가 어떤 집안사람인데? 하늘처럼 높은 눈높이를 가진 사람이었다고!’‘하지만 눈앞에 있는 저 여자는... 몸매가 좋은 것과 피부가 하얗다는 걸 제외하면, 형편없는 이목구비를 가진 데다 아이까지 딸린 이혼녀잖아!’ ‘오빠가 미친 걸까? 아니면 저 여자가 오빠한테 무슨 술수를 쓴 건가?’시월은 처음부터 눈앞의 여자가 수상쩍다고 생각했지만, 미처 손을 쓰기도 전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오빠, 지... 지금 농담하는 거지?”시월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바로 이때, 지아가 자연스럽게 시하의 팔짱을 끼며 부드럽게 말했다.“아가씨, 저와 시하 오빠는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어요. 오빠는 제가 이혼녀라는 걸 신경 쓰지 않았고, 저 또한 오빠의 다리를 개의치 않으니까요.” “게다가 무무는 정말 착하고, 음악에도 재능이 넘치는 아이야. 나는 그 아이가 아주 마음에 들어.” 시하가 지아의 손을 가볍게 토닥이며 웃었다. 시월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자, 시하가 미소를 지은 채 물었다.“월아, 무슨 문제 있어?” “아니, 너무 갑작스럽잖아. 두 사람이 알고 지낸 지 얼마나 됐다고... 결혼은 어린아이들의 장난이 아니잖아.”시하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월아, 항상 내 행복을 바라던 거 아니었어? 나는 소희 덕분에 어둠에서 벗어났어. 그러니까 너도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오빠가 누군가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건 너무 기쁘지. 하지만 나는... 아직도 오빠가 세라 언니를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이잖아. 산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야지.”지아가 시하의 팔을 가볍게 꼬집으며 말했다.“시하 오빠...” “그래, 소희야, 다 지나간 일이야. 이젠 네가 있으니까 괜찮아.” 시하가 시월을 바라보며 덧붙였다.“월아, 너무 피곤해서 우리는 먼저 들어가서 쉴게.”“항상 나를 걱정해 줘서 고
지아가 입가에 미묘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우선 지켜보자고요.” 연극을 더 완벽하게 하기 위해, 지아는 아예 시하의 방에서 머물기로 했다.지아와 무무가 침대에서 자고, 시하는 스위트룸 안의 서재에서 잠을 잤는데, 시월은 두 사람이 이미 함께 지내기 시작했다는 소식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이렇게 빠른 전개라니.’ 그녀는 분노에 얼굴이 붉어진 채 자신의 별장으로 돌아갔다. 문을 열자마자, 한 남자가 다가와 시월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왜 이렇게 늦게 들어와? 소시하 생각밖에 없는 거야? 그럼 나는?” 시월은 남자를 힘껏 밀어내고, 담배를 꺼내 들며 말했다.“저리가. 지금 기분 안 좋아.” “튕기기는! 밖에서는 얌전한 고양이처럼 굴더니, 내 앞에서는 호랑이처럼 이빨을 드러내네? 내가 널 너무 오냐오냐했나 봐. 아, 그게 아니면 그 의사라는 여자가 또 널 건드린 건가?”“그러게 내가 그 여자를 처리해 주겠다고 했는데, 네가 자꾸 망설인 거잖아.” 시월의 마음속에 후회가 밀려들었다.시후가 줄곧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지 않는 탓에, 시월은 불길한 예감을 느끼던 참이었다. 게다가 그가 이미 조사를 시작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시후가 자신을 의심할까 두려워서 서두르지 않고 참고 있었다.하지만 지금 상황이 이렇게 꼬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오빠가 그 여자한테 반해버렸어.” “그럴 리가? 그 여자는 얼굴도 평범하고, 네 말대로 아이까지 딸린 여자잖아.” “미치지 않고서야 왜 그런 여자를 좋아하겠어?” 시월이 짜증스럽게 대꾸했다.“어떻게 된 건지 내가 어떻게 알아?!” “다리만 못 쓰는 게 아니라, 눈까지 멀어버렸나 보지.” “그렇다고 그렇게 화낼 필요는 없잖아? 네 오빠는 장애가 있는데, 그 여자가 뭘 할 수 있겠어? 게다가 그 여자는 그냥 이름 없는 의사일 뿐이잖아. 네 입장에선 아무 위협도 안 되는 사람이라고.” 그 남자가 말했다.“아니, 오빠가 완전히 달라졌어. 과거의 어두움을 떨쳐내고, 다시 힘을 내기 시작했다고!! 절대
이튿날 아침, 시하는 소씨 가문 가족들에게 미리 연락해 지아를 집으로 데려가겠다고 알렸다.그는 지아를 곁에 앉히며 조심스럽게 말했다.“소씨 가문은 아주 큰 가문이고, 여러 산업을 이끌고 있었어. 원래 우리 가문은 번창하고 있었지만, 큰형이 신장병을 앓기 시작한 이후로 점점 쇠퇴하기 시작했지.”“큰형은 오랫동안 외국을 떠돌았고, 넷째는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어. 오빠들이 모습을 감추던 와중에 시영이는 세상을 떠났고, 내가 사고를 당하면서, 우리 집안은 사실상 시월이가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셈이야.” “그럼 아버님, 어머님은요?”“소씨 가문의 사업은 너무 커서, 아버지는 세계 각지의 사업을 관리하느라 정신이 없으셔. 어머니는 월이를 낳은 후로 계속 요양하시면서 외출도 하지 않으시지. 심지어 내가 자살을 시도했던 일도 걱정하실까 봐 말씀드리지 않았어.”시하가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오늘은 단지 우리 가족끼리 만나는 자리니까 너무 부담 가질 거 없어.” 지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우린 그 배후에 있는 자를 밝혀내는 게 목적이잖아요. 진짜로 시댁에 인사하러 가는 것도 아닌데, 제가 왜 긴장하겠어요?” “하긴.”“참, 이 집사님이 어머니께 너에 관한 이야기를 했는데, 어머니께서 장말 기뻐하셨대.” 지아는 소씨 가문 가족들이 겪었을 고통을 상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많은 일이 있었으니, 사모님께서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하셨을지 짐작이 가요.” “지금이라도 오빠가 다시 일어나 주니, 정말 기쁘시겠죠.” “오빠, 진상을 조사하는 것 외에, 제가 사모님의 건강도 돌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참, 네 의술이 훌륭하다는 걸 깜빡 잊을 뻔했어! 내 동생 지아야, 그럼 부탁 좀 할게. 어머니께서 너를 만나면 틀림없이 아주 좋아하실 거야. 그리고 앞으로는 너의 양어머니인 셈이니 호칭을 바꾸는 게 어떨까?”지아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소씨 가문의 자녀들은 다 훌륭한 사람들이야. 사모님도 분명히 우아한 어른이시겠지?’ 지아는 미리 정성스럽
차가 서쪽 교외 호숫가에 다다르자, 멀리서부터 아름다운 호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잔잔한 바람이 갈대를 스치고, 물새들이 무리를 지어 호수 위를 날며, 연잎 위를 살짝 스쳐 지나갔다.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 아래, 잔잔히 일렁이는 호수와 호숫가에 흩어진 꽃잎이 고요하면서도 우아한 멋을 더했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네요.” “그렇지? 어머니께서는 몸이 좋지 않으셔서 조용한 곳에서 요양하셔야 하거든. 아무래도 주변 환경이 좋아야 어머니 마음도 편안하실 테니까.” 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통일된 복장을 한 고용인들이 정돈된 자세로 기다리고 있었다. 차가 멈추자마자, 깔끔한 인상의 중년 여성 집사가 차 문을 열며 공손히 인사했다.“셋째 도련님, 드디어 집으로 돌아오셨군요.”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이곳은 ‘집’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소씨 가문의 오래된 본가는 도심 한 가운데에 있었지만, 요양에는 적합하지 않아 부모님께서 이곳에 머물렀기 때문이었다. 자녀들에게는 그다지 정이 있는 장소가 아니었으나, 그들 형제자매에게는 부모님이 계신 곳이 바로 집이었다. 사실 이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부모님이 이곳에 계시는 이상, 이곳이 집이라는 것이었으니 말이다.특히 소씨 가문처럼 부유한 가문에서는 부모님이 집안의 중심이자 뿌리였다. 즉, 부모님이 머무르는 곳이 그들의 안식처인 셈이었다. “임 집사님, 오랜만입니다.” “도련님, 건강해 보시여서 정말 다행입니다.”임현숙은 시하의 어머니를 오랜 세월 보필했던 믿음직한 사람으로, 소씨 가문의 자녀들을 손수 키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모두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고용인들이 휠체어를 내리자, 지아도 무무를 데리고 차에서 내렸다. “임 집사님, 소 선생님과 무무입니다.” “전화로 들었습니다. 소씨 가문의 큰 은인이시라고요... 소 선생님, 안으로 들어가시죠. 사모님께서 오랫동안 기다리셨습니다.” “네.”지아는 상대가 자신의 출신을 의식하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임현숙의 태도는 무한한 감사로 가득
지아는 눈앞의 귀부인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단정한 면 소재 원피스를 입은 채, 머리를 단정히 뒤로 묶고 있었다. 얼굴에는 화장기 하나 없었지만, 젊어 보이는 피부 덕분에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심지어 서른다섯 살 쯤의 언니처럼 보일 정도였으니 말이다. 다만 조경숙의 눈동자는 약간 흐릿했고, 먼지가 낀 보석처럼 빛을 잃은 상태였다. “사모님께서는 매일 자녀들 걱정으로 눈물을 흘리시다가 눈이 망가지셨어요. 하지만 시하 도련님께서 다시 일어섰으니, 사모님께서도 마음이 놓이실 겁니다.” “시하야, 이 엄마한테 얼굴 좀 보여주렴.” “어머니, 저 여기 있어요.”시하가 그녀의 치마를 살짝 잡아당겼다. 조경숙은 몸을 숙여 어린 시절처럼 시하의 얼굴을 어루만졌다.“우리 시하가 이렇게 컸구나. 이 엄마는 잘 볼 수 없지만 말이야.” 그녀는 겨우 윤곽 정도만 식별할 수 있을 뿐, 정확히 사물을 볼 수는 없었다. “왜 진작 말씀하지 않으셨어요?”시하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조경숙을 잡았다. “사모님께서는 도련님의 감정이 더 나빠질까 걱정하시면서 비밀로 하자고 하셨습니다. 시월 아가씨 외에는 아무도 몰랐지요.” “아버지도 모르시나요?” “네, 대표님께서는 요즘 너무 바쁘신 탓에 지난 6개월간 집에 오지도 못하셨거든요.” “됐어요, 이런 이야기는 그만하자고요.”“시하야, 오늘 친구를 데려왔다고?”조경숙의 시선이 지아 쪽으로 향했다. 지아는 조경숙의 이야기에 넋을 놓고 있었다.‘이 일에도 소시월이 관련되어 있다니...!’ ‘어디를 가든 그 여자의 이름이 들리는 게 어쩐지 꺼림칙해.’하지만 지아는 조경숙의 질문에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사모님, 처음 뵙겠습니다.” “어머니, 이분이 바로 소희 선생님이에요. 제 불면증과 마음의 병을 고쳐준 사람이죠.” “정말 명의이신가 보네요. 그동안 국내외의 내로라하는 명의들이 시하를 진찰했지만, 병이 호전되기는커녕 악화하기만 했거든요. 소 선생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이네요.” “사모님, 과찬이세
지아는 잠시 후 눈썹을 찌푸렸다. “어때?”시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지아가 손을 거두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께서는 몸이 아주 허약하세요. 아무래도 출산 때 몸이 많이 망가진 것 같아요. 천천히 조리하면 조금 나아지실 거예요.” “제 몸은 이제 조리로 나아질 상태가 아니에요. 하루하루 연명하면서 살면 그만인 거죠.” “어머니, 그게 무슨 소리세요!”시하는 조경숙의 말을 듣기 싫다는 듯 단호히 말했다. “됐어, 이 얘기는 그만하자꾸나.”“배도 고플 텐데, 이만 안으로 들어가시죠.” 지아는 곧장 조경숙을 부축하며 물었다.“여긴 참 아름다워요. 하지만 오랜 시간 혼자 계시면 아주 적적하시겠어요.” “저는 원래 조용한 걸 좋아해요. 게다가 우리 소씨 가문은 단합이 잘 돼서 자식들이 자주 찾아오거든요. 그래서 외롭다고 느낀 적은 없어요.”지아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군요. 시하 오빠가 이제 마음의 짐을 내려놓았으니, 앞으로 사모님의 곁에서 계속 함께 할 거예요.” 시하가 약간 의아한 표정으로 지아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단지 식사하러 왔을 뿐, 함께 머물겠다는 이야기는 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지아와 지내며 그녀가 침착한 성격임을 알고 있었기에,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굳이 나서지는 않았다.조경숙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좋네요. 아들이 오랫동안 마음의 문을 닫고 있어서 늘 걱정했는데, 이제부터 함께 지낼 수 있다니 정말 좋아요. 더군다나 선생님과 아이도 있으니,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 같네요.” 조경숙은 곧장 임현숙에게 객실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사모님, 걱정하지 마세요. 언젠가 시하 오빠의 다리도 다 나을 날이 올 거예요.”“자녀분들이 이렇게 출중하신데, 사모님께서도 몸을 잘 돌보셔야 하고요, 아셨죠?” “그래요, 죽는 것보다 사는 게 낫다는 건 저도 잘 아니까요.” “조심하세요, 앞에 계단이 있어요.”지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계단 쪽으로 다가가자 계단 앞에 달린
조경숙은 몸이 약해 매일 잠깐씩 잠을 잤다. 시하는 그녀가 잠든 틈을 타서야 지아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 물었다.“지아야, 솔직하게 말해줘. 어머니 상태는 어때?” 지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사모님께서도 중독된 증상이 있었어요. 게다가 사모님의 눈도 과도한 눈물로 망가져 버린 게 아니라, 독으로 인해 망막이 손상된 것 같아요.” 시하는 얼굴 가득 분노가 서렸다.“대체 어떤 새X가 겁도 없이 우리 어머니까지 해치려 한 거지?!” “오빠, 듣기 불편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오빠와 사모님의 검사 결과를 조작할 수 있는 사람일 거예요. 그 사람은 손을 써서 모든 걸 덮을 수 있는 위치에 있을 거고, 소씨 가문에서 상당히 중요한 사람 중 한 명일 거예요.” “지아야,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저는 그 사람이...”지아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난처한 표정은 임현숙이 급히 달려왔다.“큰일 났습니다!”“도련님, 방금 전화가 왔는데, 시언 도련님께서 오시는 길에 사고를 당했고, 시월 아가씨는 이미 병원으로 옮겨졌답니다!” “뭐라고요?!”시하는 걱정돼 바로 일어나려 했지만, 지아가 빠르게 그의 어깨를 눌러 앉혔다. “임 집사님, 자세히 말씀해 보세요. 둘째 형한테 교통사고가 났는데, 왜 월이까지 다친 거죠?” “제가 제대로 말씀드리지 못했네요. 시언 도련님은 여기로 오던 길에 시월 아가씨와 만나셨고, 같은 차를 타고 오다가 사고가 난 겁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둘째 형에게 그렇게 조심하라고 당부했었는데, 이런 문제가 생겼을 줄이야!’ “일단 병원에 가봐야겠어요.”“소 선생은 우리 어머니의 곁에 있어 줘. 어머니께서도...” “천천히요.”지아가 시하를 붙잡았다.“이럴 때일수록 침착함을 유지해야 해요.” “나도 알아. 하지만 지금은 둘째 형과 월이가 다쳤어! 우리 소씨 가문은 더 이상 어떠한 위기도 감당할 수 없다고!” 다급한 상황일수록 침착함을 유지하는 것.이것은 누구나 알 만한 이치였다. 하지만 어둠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