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기일마다 시하는 세라의 묘를 찾았지만, 그녀에 대한 그의 감정은 한결같았다. “세라야, 오늘 이후로는 여기 오지 않을 거야.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지 않을 생각이거든. 하늘에서 보고 있다면, 분명 기뻐할 거라고 믿어. 난... 이제야 벗어났어.” 시하는 손가락으로 묘비 사진 속 세라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의 얼굴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석양 아래 차갑게 빛났다. “그때 일은 정말 미안해.” ‘내가 아니었다면, 세라의 가족이 모두 목숨을 잃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오자, 언덕 위의 유채꽃이 바람에 맞춰 춤을 추었고, 살구꽃과 복숭아꽃의 꽃잎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마치 아름다운 무용수가 섬세한 자태를 뽐내며 춤을 추는 것처럼 말이다. 그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지아는 멀지 않은 논두렁 위에서 농사일을 하는 한 노파를 발견했다. 그 사람은 산 꽃들 사이에 서서 시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지아의 시선을 느낀 노파는 놀란 듯 급히 시선을 돌리고는 다시 밭일을 하기 시작했다. 지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무무에게 몇 마디를 지시한 후, 논두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방금 그녀는 아주 똑똑히 보았다. 노파의 눈에 맺힌 눈물은 그녀가 시하를 알고 있음을 암시했다. ‘강세라의 가족은 모두 죽었어. 이 마을에는 소씨 가문의 친척도 없는데, 저런 사람이 갑자기 나타난다고?’ ‘게다가 나랑 시선이 마주쳤을 때 재빨리 눈을 피하는 모습도 수상쩍었어.’ 지아는 재빨리 논두렁을 올라갔지만, 그녀가 도착했을 때는 밭에 유채꽃만 가득 심겨 있었다. 주변에는 몇 개의 농기구와 크지도 작지도 않은 구덩이만 있을 뿐, 작업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그리고 방금까지 있던 노파는 사라지고 없었다. 지아는 논두렁을 돌아 다른 쪽을 살펴보았다. 그녀는 상대가 빠르게 움직이며 이미 시야에서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방금까지만 해도 의심했지만, 이제는 확신으로 바뀌었다.‘그 노파... 확실히 이상해.’ 지아는 함께 온 경호원들을 불러 그 노파
지아는 가면으로 가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얼굴은 특별히 아름답지 않았지만, 그녀가 미소를 지을 때면 검은 눈동자가 햇살을 받아 얼굴 전체에 신비로운 빛을 더해주었다. 저녁 햇살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 순간, 지아는 등 뒤로부터 뱀처럼 날카로운 시선을 느꼈다.그녀는 갑자기 뒤를 돌아보았는데, 조금 전 논두렁에서 보았던 노파가 눈에 들어왔다. 노파의 시선은 지아와 시하가 맞잡은 손 위에 머물렀으나, 특별히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심지어 전에는 도망치듯 사라졌던 노파가 이번에는 대담하게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도련님, 세라를 추모하러 오셨군요?” 시하가 천천히 손을 거두며 담담히 대답했다.“네, 오랜만입니다.” 이화천은 차에서 몇 가지 선물을 내려놓으며 노파와 친숙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둘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 듯했다. 노파는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말했다.“밥은 다 차려뒀어요. 곧 날이 어두워지고 길도 험하니, 오늘 밤은 자그마한 제 집에서 묵고 가세요.” 시하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았다.“시간이 늦었으니 하룻밤만 묵고 가시죠.” 지아의 시선이 그 노파에게 머물렀다.‘아무래도 수상해.’하지만 과거의 진실을 확인하고 싶던 참이었기에, 지아는 그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네, 도련님 말씀대로 할게요.” 우순자가 자연스럽게 시하의 휠체어를 밀며 그와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얼굴이 예전보다 훨씬 좋아 보이시네요. 그 시간 동안 잘 극복해 주셨다니, 하늘에 있는 세라도 이제는 마음이 놓일 것 같습니다.” 지아는 묵묵히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시하가 웃으며 대답했다.“다 소 선생님 덕분이에요. 선생님께서 제 불면증을 치료해 주셨고, 살아갈 용기를 북돋아 주셨거든요.” 우정순이 지아를 힐끗 보며 말했다.“나이가 어려 보이는데, 실력이 대단하신 모양이네요.” 지아는 그 노파의 말투에서 어딘가 모르게 묘한 적대감을 느꼈다. “도련님의 적극적인 협조 덕분입니다.
지아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아주머니, 왜 그러세요?” 우순자가 당황한 듯 베갯잇을 재빨리 주워 들며 말했다.“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자꾸 손이 미끄러지네요.” 그녀는 서둘러 침구를 정리하고 나서 덧붙였다.“불편하겠지만 하루만 버텨주세요.”“참, 부엌에 고기를 끓여 둔 걸 깜빡해서 이만. 더 이상 방해하지 않을게요.” 우정순은 서둘러 방을 떠났다. 빠르게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지아는 심상치 않은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바로 이때, 도윤에게서 온 전화가 울렸다. [지아야, 조사에 진전이 있어서 전화했어. 강세라 씨의 가족은 몇 년 전에 죽은 게 맞아. 하지만...] 도윤은 말끝에 약간의 여운을 남겼다.지아가 긴장된 목소리로 물었다.“하지만 뭐?” [수상한 점이 있어. 당시 소시하는 병원에서 수술받고 있었고, 강세라 씨 가족의 시신을 수습한 사람은 먼 친척이었다고 하더라고. 그분들이 묻힌 곳은 ‘살구꽃 마을’인데, 그 시골 지역에서는 무슨 일이 있든 온 마을이 도와주는 게 관례래. 특히 장례식은 날짜를 잡고 최소 3일에서 7일간 치르는데, 때로는 좋은 날을 기다리느라 열흘, 보름, 심지어 한 달을 기다리기도 한다더라고. 하지만 강세라 씨 가족은 사고 이튿날 대충 장례를 치렀어.] 도윤은 잠시 멈추었다가 계속 말했다.[가난한 마을일수록 장례 절차에 엄격하고, 특히 가족 모두가 사고로 죽었다면 죽은 자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 더 신중하게 진행하는 법이잖아. 그런데 강세라 씨 가족의 장례는 이상하리만치 간단하게 끝났어.][그 점이 좀 의심스러워. 조금만 더 시간을 주면 더 많은 정보를 찾아낼 수 있을 거야.]지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고마워, 도윤 씨.” 하지만 도윤은 이내 불만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가족끼리 고맙다니, 조금 섭섭하네.][지아야, 소씨 가문 사건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해. 거기 오래 머무르는 건 위험하다고.]지아도 상황이 점점 위험해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시하와 시후
아이들은 지아를 가장 신뢰했다. 심지어 지아가 무언가 의도적으로 행동할 때, 아이들은 그녀에게 이유가 있다고 믿을 정도였다. 시하 역시 지아의 행동을 잠시 의아하게 여겼지만, 밖에서 그녀가 자신을 특별히 챙겨준다는 생각에 깊이 의심하지는 않았다. 일주일간의 동거로 인해 지아의 인품은 이미 신뢰받고 있었고, 그녀가 아이까지 데리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일을 벌이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 눈에는 두 사람의 관계가 유난히 친밀하게 보였다.지아는 틈틈이 우정순을 주의 깊게 살폈는데, 그녀의 눈빛에는 독기가 스며 있었다. 그녀들의 눈이 마주쳤을 때, 우정순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내 착각이 아니었어. 저 여자는 분명 뭔가를 숨기고 있다고!’ 식사가 끝난 후, 산골 마을은 완전히 어둠 속에 잠겼다.조용한 밤, 작은 벌레들의 울음소리와 가끔 들리는 개 짖는 소리만이 마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밤바람이 부드럽게 불어오자, 경호원들을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주변을 순찰하며 위험 요소를 점검했다. 후에는 두 명이 교대로 야간 경비를 맡고, 나머지는 차로 돌아가 쉬기로 했다. 지아는 우정순에게 부탁해 뜨거운 물을 받았고, 평소처럼 시하의 족욕을 도왔다. 평소에는 침술을 하곤 했지만, 오늘 밤은 마사지로 대신할 생각이었다. 방에 들어선 우정순은 지아와 시하가 마주 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마치 완벽한 한 쌍처럼 보이는 그 장면에 우정순은 주먹을 꽉 쥐었다. 지아는 그녀의 시선을 감지하고 물었다.“아주머니, 무슨 일 있으세요?” 우정순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조금 전에 마을에서 연락이 왔어요. 곧 정전이 된다는데, 도시처럼 밝지 않아서 깜깜한 밤에 불편하실까 봐 알려드리러 왔어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시죠.”지아는 손을 거두며 말했다. ‘그런 상황에서 무슨 일을 벌일지 보고 싶은걸?’ 지아는 순순히 방으로 돌아갔고, 우정순은 그녀를 방까지 친절히 배웅하며 말했다.“가끔은 밤에 산에서
몇 분간 조용히 기다린 후, 지아는 살금살금 문을 열고 나갔다.무무는 몸에 방울을 달고 있었고,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확신할 수 없었기에, 지아는 아이를 방 안에 남겨두기로 했다. 문을 나서자, 소씨 가문의 경호원들이 문 옆에 기대어 깊은 잠에 빠진 것이 보였다. 심지어 차 안에 있는 경호원들도 모두 잠들어 있었다. 마치 마녀가 마법을 부려 세상이 전부 꿈속에 빠져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그 가짜 우정순이 하려는 일은 분명 시하 도련님과 관련이 있을 거야.’지아는 잠든 사람들이 생명에는 지장이 없음을 확인한 후, 몰래 시하의 방 앞으로 다가갔다. 녹슨 유리창의 틈새를 통해 방 안을 들여다보니, ‘우정순’으로 보이는 사람이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지아의 예상대로, 그 가짜 우정순은 이미 가면을 벗어 던진 채, 놀랍도록 청초하고 매혹적인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지아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저 사람은... 강세라?!’ ‘죽은 거 아니었어?’세라는 얇은 흰색 실크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늘어뜨린 채 있었다. 그녀의 몸매는 매혹적이었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유려한 실루엣이 드러났다. 시하는 식사 중에 섭취한 약물 때문에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세라는 그의 침대 곁에 앉아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강세라는 왜 자기 죽음을 가장한 걸까?’ ‘소씨 가문의 다른 가족들도 정말 죽은 게 맞을까?’ 세라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시하에게 입을 맞췄고, 과거의 애정을 나눌 것처럼 보였다.지아는 조용히 발길을 돌려 밖으로 나왔고, 원봉과 원설을 깨웠다. 눈을 뜬 두 사람은 곧장 어지러움을 호소했다.“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저희가 잠들다니요!” 두 사람은 훈련을 통해 높은 경계심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지아가 눈앞에 올 동안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에 스스로를 자책했다. 지아가 손가락을 입에 대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목소리 낮추세요. 아마 약에 취한 걸 거예요. 저를 따라오세요.”
처음에 원봉과 원설은 믿지 못하고 망설였지만, 모든 쥐가 사람을 해치려는 기색 없이 흙 속으로 파고들어 작은 앞발로 흙을 파내는 모습을 보자, 두 사람이 눈은 휘둥그레졌다.원봉은 핸드폰을 꺼내 이 장면을 촬영해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생각했다.‘진짜 죽이는데?!’ 쥐들의 도움으로 곧 관이 드러났다. 어두컴컴한 관은 달빛 아래에서 기묘하고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하지만 지아는 전혀 두려움 없이 검은 관을 가리키며 말했다.“열어보세요.” “예.”두 사람은 재빠르게 관에 박힌 못을 제거하고 뚜껑을 열 준비를 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관 속을 들여다본 두 사람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관 안에는 인간의 유골이라고는 없고, 야생 고양이와 개의 뼈만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죠? 강세라 씨 가족은 모두 죽었다고 하지 않았나요?” “나머지 관도 열어볼까요?” “그럴 필요 없어요. 관부터 다시 묻어주세요.” 지아가 핸드폰으로 관 손을 촬영하여 증거를 남겼고, 무무는 다시 피리를 불어 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쥐들은 지시에 따라 질서 있게 흩어져 사라졌고, 집에서 키우는 동물처럼 순종적으로 굴었다. 두 사람이 흙을 덮는 동안, 지아는 촬영한 영상을 시후에게 보냈다. 이번 여정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커다란 단서를 발견했으니 말이다. 시후는 지아의 메시지를 받고 곧장 전화를 걸어왔다.[지아야,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지아는 자신이 발견한 사실을 하나하나 상세히 설명했다.“진짜 강세라는 죽지 않았어요. 그 여자는 자기 죽음을 가장한 연극을 벌여서 시하 도련님에게 죄책감을 심어준 거라고요. 물론, 그 여자의 가족도 이 연극에 동참했고요. 저는 이 모든 게 오래전부터 계획된 함정이라고 생각해요. 강세라조차도 누군가의 말에 따라 움직이는 것 같다고요.” 시후가 분노를 억누르며 물었다.[왜 이렇게까지 치밀하게 일을 꾸미는 거지? 왜 직접적인 방법을 쓰지 않는 거냐고!] “아마도 주목받는 걸 피하기 위해서
“우린 이미 정체를 들켰어요! 여긴 위험합니다. 어서 떠나야 한다고요!” 원봉이 다급히 말했다. 지아가 유리병 하나를 던져주며 말했다.“해독제예요. 모두 깨워서 정신 차리게 하세요. 이 마을에서 나가는 길은 단 하나뿐이니, 아직 멀리 가지는 못했을 거예요. 무엇보다 시하 도련님의 안전을 지키는 게 최우선이예요, 아시겠죠?” 시후가 증원을 보냈지만, 가장 빠른 헬리콥터도 도착하려면 최소 30분은 걸렸다. “예.”모두가 깨어난 뒤, 이화천은 여전히 어질어질한 머리를 흔들었다.“방금 아내에게 무사하다고 전화했는데, 어쩌다 잠든 거죠? 머리가 어질어질하네요.” 평소에는 약기운이 완전히 사라져야만 깨어났기 때문에 몸이 멀쩡했지만, 이번에는 강제적으로 깨워서 그런지 불편함이 느껴졌다. “이 집사님, 시하 도련님이 강세라한테 끌려갔어요. 얼른 쫓아가야 해요!” “잠꼬대하시는 겁니까? 세라 아가씨는 이미 죽은 지 몇 년이나 지났다고요. 지금쯤이면 뼛가루도 남지 않았을 텐데...” “강세라와 그 여자의 가족들이 모두 죽은 척했던 거예요. 방금 이 집사님이 잠들어 있는 사이에 제가 직접 묘를 파헤쳐 확인했어요. 그 여자가 가짜 우정순 아주머니로 변장해 시하 도련님을 데려고 갔단 말이에요! 시하 도련님이 위험해요!!” 지아는 짧은 한마디로 상황을 요약했다.하지만 정보량이 너무 많은 탓에 이화천은 아직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됐어요, 더 이상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어서 강세라의 뒤를 쫓으세요!” “그럼... 소 선생님은요?” “저는 사람들과 마을을 수사할게요. 강세라는 혼자니까, 시하 도련님처럼 다리가 불편한 사람을 멀리 데려가지는 못했을 거예요. 아직 이 마을 어딘가에 숨어 있을 가능성이 높아요. 첫째 도련님께는 이미 상황을 알렸고, 증원도 곧 도착할 거예요. 시간이 없으니 빨리 움직이세요!” 지아는 이화천을 차에 태워 보냈다. 원봉이 다소 초조한 얼굴로 말했다.“만약 그 여자에게 공범이 있다면, 여기 남아 있는 게 더 위험한 선택이 될
지아는 신중히 생각했다. ‘만약 강세라가 정말로 시하 도련님의 목숨을 원했다면, 지난 몇 년간 충분히 기회가 있었을 거야. 시하 도련님은 이미 몇 번이고 죽었어야 했다고.’ 하지만 세라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것만으로도 그녀에게 시하를 해치려는 의도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지아는 세라가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과 시하가 무덤 앞에서 했던 말을 떠올렸다.‘강세라는 내가 의도적으로 시하 도련님에게 호의를 베푸는 모습을 보면서, 강한 질투심을 느꼈을 거야.’ ‘그럼 예전처럼 시하 도련님을 사랑하면서, 왜 시하 도련님의 곁을 떠나려 했던 걸까?’ 결국 세라가 오늘 밤 시하를 데리고 간 것은 충동적인 선택이었을 것이었다. 따라서 시하는 당장 생명의 위협은 없겠지만, 시간이 길어지면 상황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빨리 두 사람을 찾아야 해.’이 마을은 크지 않지만, 사람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특히 이곳은 외딴 시골이라 도시처럼 집마다 CCTV가 설치된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밤이 되어 어둠이 짙어지면 가시성도 매우 낮아졌다. 즉, 외부의 도움 없이는 수색이 간단하지 않을 터. 지아는 남은 희망을 개들에게 걸기로 했다. 무무는 지아의 손을 잡고 걱정하지 말라는 손짓을 했다. “엄마는 이미 최선을 다했어요. 만약 그 삼촌한테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해도, 그건 운명일 뿐인 거예요.” 무무처럼 어린아이도 아는 사실을 지아가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지아는 이상하게도 시하의 비극적인 과거에 마음이 쓰였다.‘시하 도련님이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다행히 하늘은 지아의 간절함을 외면하지 않았다.곧 개들이 단서를 발견한 듯한 신호를 보내온 것인데, 지아와 일행은 개들이 향하는 방향으로 따라갔다.예상대로, 강세라는 시하를 마을 안에 남겨둔 듯했다.개들은 한 숲으로 들어갔다.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숲은 달빛조차 들어오지 않아 음산하고 어두웠다. 나뭇가지 사이로 간혹 새들이 날아다니고, 부엉이가 구슬프게 울어댔다.이 분위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