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혼자 자라다시피한 지윤에게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양옆에서 쌍둥이들이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울어대니, 어떻게 달래야 할지도 몰랐다. ‘나도 무슨 일인지 모르는데...’ 지윤은 무릎을 꿇고 쌍둥이들 눈높이에 맞춰 말했다.“아빠가 나한테도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말해주지 않았어. 그냥 엄마를 안전하게 데리고 오겠다고 했으니까, 우리는 아빠를 믿어야 해.” 지윤이 이렇게 말하자, 쌍둥이는 할 말이 없어졌다.“증조할아버지한테 가야겠어!” 두 아이는 부씨 집안의 영향력을 잘 알고 있었다.이럴 때 도움을 청하지 않으면 언제 하겠는가? 도윤은 부씨 가문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직접 부탁하기 어려웠지만, 쌍둥이는 달랐다. 아이들은 지윤의 손을 붙잡고 부남진의 서재로 달려갔다. 부남진은 멀리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서둘러 나왔다.“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야? 내 새끼들이 왜 이렇게 우는 거야?” 부남진은 다급히 두 아이를 품에 안았다.“증조할아버지, 엄마 좀 구해주세요! 큰일 났어요!”“착하지? 울지 말고 천천히 말해봐. 엄마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지윤은 자신이 아는 선에서 부남진에게 설명했다. 부남진은 더 깊게 묻지 않았고, 곧장 도윤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확인했다. 도윤은 처음에 부남진에게 말하지 않으려 했다. 이 일이 알려지면 걱정하는 사람만 늘어날 뿐이니 말이다. 게다가 부남진은 연로했기 때문에, 일이 확실히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알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직접 나선 상황이니, 어쩔 수 없이 사실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부남진은 곧장 결단을 내렸다.“장경이를 보내마. 지아를 반드시 빨리 찾아야 해!” 섬.지아는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별들이 반짝이는 고요한 밤이었다. 조용한 섬에 들리는 것은 바닷물 소리와 간간이 들려오는 벌레 소리뿐이었다. 지아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아이들과 도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도윤 씨가 나랑 연락이 닿지 않아서
두 사람은 비교적 차분하게 대화를 이어갔지만, 자신의 입장을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그래서 밤이 깊도록 이야기했지만, 문제는 결국 제자리걸음이었다. “이해가 안 돼. 대체 뭘 망설이는 거야? 그 사람을 좋아한다면 다시 결혼하면 될 일 아니야? 내가 유부녀를 데려가겠다는 건 아니니까.”“하지만 네가 그 사람한테 기회를 주지 않는 건, 결국 그 사람을 믿지 못한다는 거잖아? 이전의 실패를 반복하기 싫은 거겠지.”“그럼 왜 나한테는 기회를 주지 않는 거야?”“한대경, 내가 도윤 씨한테 기회를 주지 않는다고 해서, 당신한테 기회를 주겠다는 뜻은 아니야.”“나는 혼자 살면 안 된다는 거야? 결혼이라는 감옥에서 드디어 벗어났는데, 또 다른 구렁텅이로 뛰어들고 싶진 않아.” “정말 그렇다면, 그 사람이랑 밤낮으로 뒹굴진 않았겠지. 결국 네 마음속엔 아직 그 사람을 위한 자리가 있는 거야.”“하지만 네가 믿는 그 사람의 사랑이 얼마나 오래갈 것 같아?”“날 이렇게나 설득하려고 애쓰다니, 참 대단하네. 우리 두 사람이 얼마나 오래 알고 지냈는지 당신이 알기나 해? 내가 자취를 감춘 3년 동안, 그 사람은 단 한 번도 나를 포기하지 않았어. 그게 사랑이 아니면 뭔데?” 한대경이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건 네가 살아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지. 네가 죽었다고 생각했어도 그랬을까?”지아의 얼굴이 굳어졌다.“무슨 뜻이야?” “오는 길에 비행기 갈아탄 거, 기억하지? 첫 번째 비행기가 공중에서 자폭했어. 탑승자 전원 사망, 너도 그중 하나지.” “한대경, 이게 재밌다고 생각해?” 지아는 즉시 몸을 일으켰다.“당신도 알다시피, 우리 할아버지는 연세가 많으셔. 이런 충격을 어떻게 견디시겠냐고!”“그리고 내 아이들... 내 아이들도 하루하루를 눈물로 살 거야.”“날 돌려보내 줘” “너한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서 어쩔 수 없었어. 남자란 다 새로운 걸 좋아하고 오래된 걸 싫어하는 존재야. 이도윤이 네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그날 밤, 지아는 밤새 몸을 뒤척였다.섬에 온 지 벌써 닷새째.지아는 섬 구석구석을 완전히 파악했고, 어느 암초 아래 몇 마리의 바다거북이 숨어 있는지까지도 정확히 알게 되었다.수평선이 끝없이 이어지는 바다를 보며, 그녀는 머릿속으로 열 가지가 넘는 탈출 계획을 세웠다.하지만 그 계획들은 실행해 보기도 전에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계산해 본 결과, 지아가 바다로 뛰어든다 해도 살아남을 가능성은 고작 3일에서 5일이었다. 바다는 예측할 수 없는 위험으로 가득한 법이다. 맑았던 하늘이 한순간에 폭풍우로 변하고, 어디서든 갑작스러운 위협이 닥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녀는 대나무 뗏목이라고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주변 섬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무작정 탈출하는 것은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한대경이 지아를 이 섬에 가둔 이유는 뻔했다. 그녀가 탈출을 시도할 걸 이미 계산했다는 것. 이 섬에서 빠져나가는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을 것이었다. 바다에서 죽느니, 이 섬에 남아 있는 편이 나았다. ‘하지만 이곳에서 얼마나 더 머물러야 할까?’지아는 한대경이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지, 혹은 그녀를 이용해 부남진과 아이들을 협박하려는 것은 아닌지 불안해졌다. 섬에 도착한 지 사흘째 되던 날, 한대경은 섬을 떠났다.조용한 섬에는 지아와 몇 명의 고용인들만 남았다. 하지만 한대경은 떠나기 전에 고용인들에게 단단히 명령을 내렸다.“소지아와 절대 대화하지 마세요!” 지아가 멀리서 누군가를 발견하고 다가가려고 하면, 그 사람은 항상 서둘러 도망쳤다. 3일에 한 번씩은 군용 헬리콥터가 식량을 실어 왔는데, 음식을 밧줄로 내려놓기만 할 뿐, 절대 착륙하지 않았다. 지아는 손으로 턱을 괴고 바닷가에 앉아, 식량을 싣고 온 군용 헬리콥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전혀 접근할 방법이 없었다. 날짜를 세어 보니 새해까지 겨우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녀는 아이들과 함께 새해를 보내기로 약속하지 않았는가. 새해 전날, 아이들과 함께 만두를 빚고,
겉으로는 감히 그렇게 대답할 수 없으니, 배신혁은 공손하게 말했다.“아닙니다. 소 선생님은 바다거북의 집을 옮겨주느라 바쁘시고, 산에서 약초를 캐던 중 다리가 부러진 다람쥐 한 마리를 구하기도 했습니다.”“밤에는 사격 연습을 하시고, 자기 전에는 뜨개질까지 하신다고 하더군요.”탁!한대경이 눈앞의 비밀 서류봉투를 세게 내리쳤다.“자기가 휴가라도 왔다고 생각하는 건가? 탈출하려는 생각은 전혀 없는 거야?” “없는 것 같습니다. 며칠 전까진 해변을 몇 바퀴 돌고, 모래게 서너 마리의 둥지를 파헤치고, 바닷고기를 몇 마리 낚았죠.” “하지만 그 후로는 거의 해변에 가지 않으셨습니다.” “게다가 생활 패턴도 아주 규칙적입니다. 매일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 달리기하고, 운동을 하고, 하루의 일과를 시작한답니다. 아, 잠은 밤 열 시 정각에 드십니다.”“솔직히 말씀드리면, 연세가 많은 제 할머니보다 더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계십니다.” “음식은?” “아주 건강하게 드십니다. 과식도 금식도 하지 않고, 균형 있게 식사하시죠. 오히려...” 배신혁은 슬쩍 한대경의 푸르스름한 눈 밑을 보았다. “보스, 섬에서 돌아오신 뒤로 단 하루도 제대로 주무신 적이 없지 않습니까?” 한대경은 마치 소중한 보물을 손에 쥔 사람 같았다. 부서질까 두려워 소중히 다루고, 녹아버릴까 두려워 간직했으며, 누군가에게 빼앗길까 두려워 숨겨둔 사람처럼 말이다. 그는 지아를 섬에 가두기로 했지만, 정작 본인도 볼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한대경은 밤낮으로 그녀 생각에 골몰했다.지아의 얼굴, 목소리, 웃음이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편안히 먹고 마시며 규칙적으로 지내고 있지만, 정작 한대경은 끔찍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던 것이었다. ‘대체 누가 누구를 가둔 건지...’몸이 갇힌 사람과 마음이 갇힌 사람, 두 사람 중 누가 더욱 불행한 것인가?“A시 상황은 어떻지?”“이도윤 씨는 여전히 소 선생님이 잠시 머물렀던 수서도에 머물면서, 아주 많은 인원
요 며칠 동안 도윤은 하루에 몇 시간밖에 잠을 자지 못했다. 그는 직접 바다에 뛰어들기를 수없이 반복했고, 기진맥진할 때까지 잠수했다.결국 진환이 그를 막아야 했다. “보스, 이러다간 보스가 죽겠습니다. 벌써 하루 종일 잠도 안 자고 잠수만 하셨잖아요.” 도윤은 갑판 위에 털썩 앉아 있었는데, 오늘만 해도 몇 번이나 바다에 들어갔는지 셀 수 없을 정도였다.그의 눈은 초점을 잃었고, 손발도 떨리고 있었다. 육체는 이미 한계에 이른 듯했다. 그럼에도 도윤은 붉어진 눈으로 중얼거렸다.“난 아직 괜찮아.” “보스, 몇 년 전에 사모님께서 거짓 죽임을 당하셨던 거, 기억하시죠? 이번에도 그런 상황일 수 있어요.” 진환은 지금 지아가 살아 있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도윤이 이렇게 무너지게 둘 수는 없지 않은가. 그는 도윤이 살아갈 수 있도록 작은 희망의 불씨를 심어주고 싶었다. 과연 도윤의 눈동자가 약간 흔들리더니 약간의 광채를 띠었다.“지아는 무사할 거야. 분명히 무사할 거야.”그러나 도윤은 곧 스스로를 부정하기 시작했다.“그 사람은 늘 지아를 죽이려고 했어. 기회를 잡은 이상, 절대 지아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을 거야.” 사실 도윤은 지난 몇 년간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래서 지아를 찾는 동시에, 진수련이라는 여자를 찾고 있었다. 진수련은 당시의 진실을 아는 유일한 사람일 테니. 긴 시간을 들인 도윤은 드디어 2년 전에 진수련을 찾았다. 하지만 그가 발견한 것은 진수련의 시신이었다. 그녀는 백정일의 묘비 앞에서 자기 머리를 찢어 생을 마감했다.진수련의 이마에서 흐른 핏자국이 묘비를 붉게 물들였고, 그녀의 몸은 묘비에서 서서히 미끄러져 내려온 상태였다. 그날은 폭설이 내리던 날이었다. 진수련은 눈 속에서 사흘이나 방치되었고, 발견되었을 때는 이미 온몸이 꽁꽁 얼어 있었다.유일한 실마리는 그렇게 끊겨버렸다. 물론 이예린에게도 여러 방법을 동원해 봤다. 회유와 협박을 거듭했지만 그녀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며칠이 지났다. 만약 지아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면, 도윤은 이미 마음을 접었을 것이었다.하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고, 도윤이 지아에게 선물한 목걸이조차 바다에서 인양되지 않았다. ‘그 사람이 단 하나의 실마리도 남기지 않았다는 건, 이 모든 게 철저히 계획된 일이라는 걸 의미해. 대체 누가 이런 일을 벌인 걸까?’ 도윤은 밤하늘의 무수한 별을 바라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곧 설날이네.” 무무는 양손을 바닥에 짚고 발끝을 흔들며 고개를 끄덕였다.‘이번 설은 가족과 함께 보내기로 했는데... 지금쯤 엄마는 어디에 있을까?’ 한편, 설날이 가까워질수록 섬에 있던 지아는 점점 더 바빠졌다.며칠 전, 그녀는 섬에 있던 사람들에게 한지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한지를 적당한 크기로 자른 후, 붓을 들자 매끄럽게 흘려진 글씨가 종이 위에 생동감 있게 살아났다. ‘행복 가득한 집, 가족 모두 건강하길.’지아는 설날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복조리를 문 앞에 달기도 했다. 마치 혼자서도 설날 분위기를 내려는 듯했다.심지어 지아를 감시하던 사람들도 그녀의 부탁을 받아 섬 곳곳에 작은 복조리 장식을 걸어주었다. 그 덕에 섬은 마치 오색 비단옷을 입은 듯 아름답게 빛났다. 섣달그믐 밤.한대경은 섬에 도착하자마자 풍성한 음식 냄새를 맡았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지아가 오늘 밤 만두를 만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돼지고기는 오늘 아침에 신선하게 공수되었고, 채소는 섬에서 직접 뽑았다. 파조차도 뒤뜰에서 갓 딴 것이었다. 비록 아무도 지아와 말을 섞을 수 없었지만, 모두가 자발적으로 그녀를 도왔다. 지아는 섬에서 함께 지내는 모든 사람을 위해 넉넉히 준비했다.‘설날에 집에도 가지 못하고 나를 지켜야 하다니, 모두 너무 안쓰러워.’ 주방에서는 반죽하다가 얼굴에 밀가루를 묻힌 지아가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얇은 셔츠 아래로 능숙하고 빠른 손놀림이 이어졌다. 평소의 고고한 모습과는 달리, 평범한 주부처럼 정겹고
A시의 부씨 가문 저택.도윤은 원래 올해 설을 아이들과 함께, 과거 자신과 지아가 살던 신혼집에서 보낼 계획이었다.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지아가 사라지면서, 그는 아이들 모두를 부씨 가문 저택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부씨 가문 저택은 온통 화려한 장식으로 설맞이 준비를 마쳤지만, 그 분위기는 그야말로 적막함 그 자체였다.부남진의 얼굴에는 웃음기 하나 없었고, 민연주 역시 하루 종일 한숨만 내쉬었다. 화연은 말없이 마음속으로 지아를 위해 기도했다.‘지아야... 무사히 위기를 극복하고, 건강히 돌아와 줘.’식탁에는 푸짐한 음식이 가득 차 있었지만, 아무도 젓가락을 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분위기는 아주 무거웠다.부남진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먹자. 배고프면 안 되잖니.”그가 아이들에게 직접 반찬을 집어 주자, 지윤이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말했다.“감사합니다, 증조할아버지.” 쌍둥이 남매는 눈물을 머금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엄마...” 도윤이 두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먹자.” 짧은 보름 동안, 도윤의 몸은 한눈에 보일 정도로 야위었고, 눈썹과 이마에는 지울 수 없는 피로가 묻어나 있었다. 그는 A시로 돌아왔지만, 수색 작업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지아의 소지품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지아가 살아 있다면, 지금쯤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섣달그믐날 밤, 온 가족이 모여야 할 시간, 지아도 분명히 집이 그리울 것이었다.식사 자리에는 그저 그릇과 젓가락 부딪히는 소리만이 들렸다. 웃음소리나 대화는 조금도 없었다. 식사가 끝난 후, 부남진은 준비해 둔 세뱃돈을 하나씩 후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부장경이 시큰둥하게 말했다.“아버지, 저도 이제 서른이 넘었어요. 세뱃돈은 받지 않겠습니다.” “네가 서른이 넘은 건 나도 알아. 그런데 아직도 며느리를 데려오지 못했잖니?”“기어코 나를 화나게 만들 셈이냐? 결혼하지 않는 이상, 너는 아직 어린애야!” 화연이 부장경을 찡그린 표정을 언
폭죽이 하늘로 솟구치며, 눈 내리는 밤하늘에 찬란한 빛을 수놓았다.아이들은 손에 천사봉을 들고 있었지만, 분위기는 여전히 차가웠다. “아빠, 엄마도 하늘의 불빛을 보고 빨리 집으로 돌아오겠죠?” 해경이 목이 메인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는 너희를 아주 사랑하셔. 꼭 돌아오실 거니까 울지 마.” 지윤은 뜰 안에 활짝 핀 매화를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조금만 더 있으면 벚꽃이 필 거예요. 엄마는 내년 벚나무 아래에서 만나자고 약속하셨으니, 절대 약속을 어기지 않으실 거예요.”아이들의 얼굴을 본 도윤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하늘도 알고 있을 것이다. 도윤이 누구보다도 간절히 지아를 찾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하지만 상대는 철저히 준비되어 있었고, 모든 흔적을 완벽히 지웠다.도윤은 그저 지아가 무사히 살아 있기를 기도할 뿐이었다. 그 시각, 섬.지아는 만두를 다 먹었지만, 배는 채워졌어도 마음은 허전하기만 했다. 밤하늘의 별은 그녀가 섬에서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오락거리였다.‘아이들은 분명 부씨 가문에서 가족들과 함께 단란한 식사를 하고 있겠지?’ 지아는 그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여기를 떠나고 싶어?”그 순간, 등 뒤에서 한대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나랑 결혼하겠다고 약속만 하면, 당장 이 섬을 떠나게 해줄게.” “만약 그 제안을 거절한다면, 날 여기 평생 가둘 건가?”“그게 아니면, 억지로라도 그렇게 만들겠다는 거야?” 한대경은 부드럽게 웃었다.‘소지아는 독한 약에도 면역이 있는 사람이야. 일반적인 약물로는 절대 제압할 수 없겠지.’게다가 그는 지아를 강제로 굴복시키고 싶지 않았다. 한대경이 원하는 것은 그녀의 진심뿐이었으니...“난 기다릴 거야. 물이 바위를 뚫듯, 천천히.”“하늘은 내 편이야. 나는 언젠가 네가 마음을 열 날이 올 거라 믿어.” 지아가 몸을 일으켰다.“그럼 계속 기다려.” 그녀는 해변으로 걸어가 폭죽을 터뜨렸다. 그것이 그녀만의 조촐한 설날이었다. 자정이 된 섬은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