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시의 부씨 가문 저택.도윤은 원래 올해 설을 아이들과 함께, 과거 자신과 지아가 살던 신혼집에서 보낼 계획이었다.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지아가 사라지면서, 그는 아이들 모두를 부씨 가문 저택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부씨 가문 저택은 온통 화려한 장식으로 설맞이 준비를 마쳤지만, 그 분위기는 그야말로 적막함 그 자체였다.부남진의 얼굴에는 웃음기 하나 없었고, 민연주 역시 하루 종일 한숨만 내쉬었다. 화연은 말없이 마음속으로 지아를 위해 기도했다.‘지아야... 무사히 위기를 극복하고, 건강히 돌아와 줘.’식탁에는 푸짐한 음식이 가득 차 있었지만, 아무도 젓가락을 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분위기는 아주 무거웠다.부남진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먹자. 배고프면 안 되잖니.”그가 아이들에게 직접 반찬을 집어 주자, 지윤이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말했다.“감사합니다, 증조할아버지.” 쌍둥이 남매는 눈물을 머금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엄마...” 도윤이 두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먹자.” 짧은 보름 동안, 도윤의 몸은 한눈에 보일 정도로 야위었고, 눈썹과 이마에는 지울 수 없는 피로가 묻어나 있었다. 그는 A시로 돌아왔지만, 수색 작업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지아의 소지품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지아가 살아 있다면, 지금쯤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섣달그믐날 밤, 온 가족이 모여야 할 시간, 지아도 분명히 집이 그리울 것이었다.식사 자리에는 그저 그릇과 젓가락 부딪히는 소리만이 들렸다. 웃음소리나 대화는 조금도 없었다. 식사가 끝난 후, 부남진은 준비해 둔 세뱃돈을 하나씩 후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부장경이 시큰둥하게 말했다.“아버지, 저도 이제 서른이 넘었어요. 세뱃돈은 받지 않겠습니다.” “네가 서른이 넘은 건 나도 알아. 그런데 아직도 며느리를 데려오지 못했잖니?”“기어코 나를 화나게 만들 셈이냐? 결혼하지 않는 이상, 너는 아직 어린애야!” 화연이 부장경을 찡그린 표정을 언
폭죽이 하늘로 솟구치며, 눈 내리는 밤하늘에 찬란한 빛을 수놓았다.아이들은 손에 천사봉을 들고 있었지만, 분위기는 여전히 차가웠다. “아빠, 엄마도 하늘의 불빛을 보고 빨리 집으로 돌아오겠죠?” 해경이 목이 메인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는 너희를 아주 사랑하셔. 꼭 돌아오실 거니까 울지 마.” 지윤은 뜰 안에 활짝 핀 매화를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조금만 더 있으면 벚꽃이 필 거예요. 엄마는 내년 벚나무 아래에서 만나자고 약속하셨으니, 절대 약속을 어기지 않으실 거예요.”아이들의 얼굴을 본 도윤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하늘도 알고 있을 것이다. 도윤이 누구보다도 간절히 지아를 찾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하지만 상대는 철저히 준비되어 있었고, 모든 흔적을 완벽히 지웠다.도윤은 그저 지아가 무사히 살아 있기를 기도할 뿐이었다. 그 시각, 섬.지아는 만두를 다 먹었지만, 배는 채워졌어도 마음은 허전하기만 했다. 밤하늘의 별은 그녀가 섬에서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오락거리였다.‘아이들은 분명 부씨 가문에서 가족들과 함께 단란한 식사를 하고 있겠지?’ 지아는 그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여기를 떠나고 싶어?”그 순간, 등 뒤에서 한대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나랑 결혼하겠다고 약속만 하면, 당장 이 섬을 떠나게 해줄게.” “만약 그 제안을 거절한다면, 날 여기 평생 가둘 건가?”“그게 아니면, 억지로라도 그렇게 만들겠다는 거야?” 한대경은 부드럽게 웃었다.‘소지아는 독한 약에도 면역이 있는 사람이야. 일반적인 약물로는 절대 제압할 수 없겠지.’게다가 그는 지아를 강제로 굴복시키고 싶지 않았다. 한대경이 원하는 것은 그녀의 진심뿐이었으니...“난 기다릴 거야. 물이 바위를 뚫듯, 천천히.”“하늘은 내 편이야. 나는 언젠가 네가 마음을 열 날이 올 거라 믿어.” 지아가 몸을 일으켰다.“그럼 계속 기다려.” 그녀는 해변으로 걸어가 폭죽을 터뜨렸다. 그것이 그녀만의 조촐한 설날이었다. 자정이 된 섬은
이 한마디는 평지에 벼락이 떨어진 듯한 충격이었다. 도윤은 손에 들고 있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번쩍 고개를 들었다.“뭐? 지아는 어디에 있어?!” “카리니에 계신 것으로 확인됩니다!” 도윤은 즉각 반응했다.“카리니? 거긴 한대경이 태어난 곳인데... 젠장, 역시 그 자식이었어. 진작에 생각했어야 했는데!” 만약 지아를 죽이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녀는 이미 비행기 승무원들과 같은 운명을 맞이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그녀의 흔적을 감추고, 가짜 죽음을 꾸밀 사람은 오직 한대경뿐이었다. ‘사랑을 얻지 못한다는 이유로, 지아를 납치해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감정을 표현하려 하다니!’ “한대경은 항상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일도 충분히 벌일 수 있는 사람이죠. 보스, 지금 당장 사모님을 데리러 갑시다!” 도윤이 손을 들어 저지했다.“안 돼, 한대경은 분명이 우리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을 거야. 우리가 조금이라도 흔들리는 순간, 그 자식은 자극받을 거라고!”“보스의 말씀이 맞습니다만, 이젠 어쩌죠?”“사모님을 그냥 놔둘 순 없잖아요. 한대경이 사모님을 다른 곳으로 옮길 가능성도 있으니까요.”“움직여야 해. 하지만 내가 직접 나설 순 없어.” 도윤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나는 계속 수색 작업을 진행하는 척해야겠어. 그래야 그 자식의 의심을 피할 수 있을 테니까. 나뿐만 아니라, 너희도 국경을 넘으면 안 돼.”“카리니는 한대경의 영토야. 우리가 들어가면 곧바로 들키고 말 거라고.” 진봉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누구를 보내야 마음이 놓이시겠습니까?”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지아가 한대경의 손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조금 안심이 돼. 그 자식의 성격대로라면, 긴 시간을 들여 지아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려 할 거야. 즉, 당분간은 지아를 해치지 않을 거란 뜻이지.” “각하께는...”“당분간 알리지 마. 눈치 보는 사람들이 있을까 봐 걱정돼.” “예, 보스.”“그런데 한대경은 왜 하필
카리니.지아는 ‘카리니’라는 도시의 이름을 여러 번 들어본 적이 있었다. 특히 한대경의 과거를 조사하면서, 그가 이곳 출신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한 카리니는 상상 이상이었다. 도로 위에는 차량이 끊임없이 오갔고, 교통은 매우 편리했으며, 곳곳에 연결된 고속도로는 도시의 번영을 보여주고 있었다.하지만 도시 한쪽 구석에 있는 슬럼가에 발을 들이자, ‘양극화’가 무엇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그것은 단순한 ‘양극화’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나는 천국이고, 다른 한쪽은 지옥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여러 도시를 다녀보았고, 난민들도 많이 보아왔다. 하지만 이렇게 극단적인 곳은 처음이었다. 도시 중심부는 번화하고, 공항 시설도 국내 주요 도시들을 능가할 정도로 현대적이었다. 하지만 한쪽의 이재민들은 도시 전체가 파괴되면서 나타난 피해자들이었다. 지아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이렇게 번화한 곳에 이렇게 가난한 사람들이 있다고?’‘사람은 어디까지 가난할 수 있는 걸까?’ 다른 도시의 집이 없는 사람들은 고가도로 아래에서 살기 마련이지만, 카리니에서는 가족과 함께 공동묘지에서 사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아이들의 얼굴은 먼지로 가득했고, 큰 눈만이 밝게 빛났다.하지만 그 눈빛 속에는 경계와 낯섦이 가득했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는 열 살 남짓의 아이들이 맨발에 남루한 옷을 입고 도망치고 있었다. 손에는 방금 훔쳐 온 물건이 들려 있었고, 뒤에서는 어른들이 욕설을 퍼부으며 쫓아가고 있었다. “저 녀석들을 죽여! 때려죽이라고!” 지아가 이 장면에 놀라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한 아이가 그녀 옆을 스치며 부딪쳤다.작은 손이 지아의 주머니를 더듬던 순간,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 아이는 곧장 손을 떼며 말했다.“죄송합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지아가 아이의 손을 단단히 잡으며 말했다.“돈을 훔치려던 거야? 그런데 어쩌지? 요즘 같은 세상에 현금을 들고 다니는 사람은 별로 없는데. 차라리 내가 좋은 방
배신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배이혁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배이혁이 그의 시선을 느끼고 험악한 표정으로 물었다.“뭘 봐? 내 말이 틀렸어?” “형, 전에는 소 선생님이 만든 만두를 아주 좋아하지 않았어? 만두를 먹을 땐 입을 다물고 있었으면서... 난 요즘 들어 보스가 예전보다 훨씬 행복해 보인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면 된 거 아니야?” “멍청하긴. ‘억지로 딴 과일은 달지 않다’라는 말 못 들어봤어? 보스가 사랑에 빠져 약해지기라도 하면, 예전부터 보스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놈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아?” “칼로 난도질당할 게 뻔하다고.”“소 선생님이 아니더라도 다른 여자가 나타날 거야. 형, 보스를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하려는 건 아니지?” 한편, 지아는 한대경의 안내를 받아 낡고 허름한 건물로 들어섰다. 만약 이곳이 해안 지대였다면, 태풍에 전부 쓸려나갔을 법한 구조였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계단에는 여러 겹으로 겹친 광고지가 여기저기 붙어 있었고, 올라가는 동안 각종 냄새가 섞여 코를 찔렀다. 한대경은 한 낡은 나무문 앞에 멈춰 섰고, 입구의 작은 화분 아래에서 여분의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지아는 그를 따라 들어가며 이곳이 그의 과거를 담은 집일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문이 열리고, 따뜻한 분위기의 집을 마주한 지아는 자신의 예상이 빗나갔음을 알아차렸다.아주 작은 집의 바닥에는 타일도, 나무 마루도 깔려 있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소파에는 손으로 짠 듯한 뜨개질 담요가 덮여 있었다. 집 안에는 고양이 몇 마리가 있었다. 품종묘는 아니었지만, 모두 포동포동 살이 올라 건강해 보였다.창가에는 향긋한 향기를 풍기는 치자꽃이 피어 있었고, 햇빛을 받으며 활짝 미소 짓는 해바라기 화분도 보였다. 깨끗하게 정리된 집에는 오래된 텔레비전이 하나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깔끔한 뜨개질 덮개가 덮여 있었다. 누가 봐도 손재주 좋은 사람이 정성 들여 꾸민 공간이었다. 비록 세상은 거칠고 낡았을지 몰라도, 이 집만큼은 그들의 노
“이모, 얘가 정확히 말하지 않은 거예요. 이미 이혼한 상태라고요.” 양정숙은 곧장 한대경의 귀를 잡아 비틀었다.“이 아가씨는 너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아직도 모르겠니?”“아이든 이혼이든 전부 핑계라고! 솔직히 말해, 억지로 이 아가씨를 끌고 온 거지?” 지아는 그만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당돌하고 두려울 거 없어 보이던 한대경도 저렇게 무서워하는 사람이 있다니, 정말 의외인데?’ “이모, 이 손 놓으세요!” “아가씨, 솔직히 말해줘요. 이 녀석이 아가씨를 협박해서 데려온 거죠?”“내가 대신 혼내줄게요.” 지아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한대경이 이 여자분을 존경하는 건 분명하지만, 진실이 밝혀져도 그저 훈계하는 정도에서 끝날 거야.’ ‘게다가 한대경 같은 사람이 이 여자분의 말을 들을 리 없잖아? 그런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나를 이런 곳에 데려오지도 않았겠지.’ ‘게다가 이 여자분... 마음속으로 한대경이 결혼하기를 바라셔서, 이 상황을 즐기시는 것 같은데?’‘그렇다면 굳이 눈치 없이 행동할 필요 없겠어.’지아가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말했다.“아니에요, 한 선생님께서는 제 의술이 뛰어난 걸 알고, 이모님의 건강을 봐달라고 부탁하신 거예요.” 한대경은 놀라서 멍해졌다.‘바로 진실을 말해버릴 줄 알았는데, 상황을 정확히 파악한 모양이네.’ ‘소지아, 정말 똑똑해.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여자야.’지아는 자연스럽게 자신과 한대경의 관계를 분리했고, 동시에 그를 난처한 상황에 빠뜨리지도 않았다. 게다가 양정숙은 실제로 건강에 문제가 있었으니, 한대경이 그녀를 데려온 이유도 그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정말요? 꽤 어려 보이는데, 의사라고요?”양정숙이 한대경의 귀를 놓으며 물었다. 양정숙은 화장하지 않았지만, 지아는 그녀의 실루엣만으로도 그녀가 젊은 시절 아주 예쁘장한 사람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성격이 불같고, 급했을 것 같기도 해.’지아가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안색을 보니까 간과 폐 상태가 좋지
양정숙은 말투가 시원스러웠다. “그 전에 저 녀석이 데려왔던 의사들이죠.”“하나같이 절에서 나온 스님처럼 굴었어요. 잔소리만 해댔고요.”“오늘은 담배 끊어라, 내일은 술 끊어라... 정말 사람 짜증 나게.”지아는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양정숙은 비록 나이가 많았지만, 간과 폐를 제외하면 건강은 매우 양호했다. 아마 꾸준히 건강 관리를 해온 결과일 것이었다. 게다가 이곳의 주변은 꽤 평화로웠고, 처음에 봤던 도둑이나 강도 같은 일들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양정숙이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도 안전하게 지내는 이유는, 이 지역에서 그녀를 보호해 주는 더 강한 세력이 있다는 뜻이었다. “한 선생님께서 걱정하시는 건, 이모님에 대한 존경에서 비롯된 거예요. 제 말을 믿으신다면 건강을 더 잘 돌볼 수 있도록 한약을 지어드릴게요.”양정숙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착한 아가씨네요. 아주 훌륭한 집안에서 자란 모양인데, 이름이 뭐예요? 왠지 낯이 익어요.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지아가 태연하게 말했다.“소지아라고 합니다.” “혹시 제 할아버지와 아시는 사이일까요? 제 할아버지 성함은 ‘부남진’입니다.”지아는 양정숙이 혹시라도 환희와 아는 사이라면, 그 실마리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부남진?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아, A국의 그 유명한 분이죠? 아가씨, 아주 대단한 집안 출신이었네요.”지아는 약간 실망한 듯 말했다.“저는 이모님께서 저희 할아버지와 친구신 줄 알았어요. 그래서 저한테 낯익다고 하신 줄 알았거든요.” “아가씨 할아버지와는 아는 사이가 아니에요. 단지...” “단지 뭐요?”지아가 궁금해했다. 양정숙이 머리를 짚으며 말했다.“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예전 일이 잘 기억이 안 나네요. 그냥 아가씨 얼굴이 왠지 낯이 익다 이거예요.”바로 이때, 부엌에서 한대경이 과일을 씻어 들고 나왔다. 그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덧붙였다.“이모는 젊었을 때 머리를 심하게 다친 적이 있어. 그러고는 여기로 팔려
한대경은 손에 든 대파의 흙을 떼어내며 무심하게 말했다.“몰라,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버려졌거든. 그래도 남자애라서 누군가 날 주워다 키웠어.”“물론 그 집에도 친아들도 있어서, 날 다시 다른 사람에게 팔아 넘겼지만 말이야.”“그 후에는 이리저리 떠돌았고, 세 살쯤 되던 해에 여기로 버려졌지. 그 이후로 여기가 내 집이 됐어.” 그는 대파 껍질을 쓰레기통에 버리며 말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흙 속에서 자라는 잡초 같아. 아무리 환경이 척박해도, 목숨을 걸고 땅에서 나와 살아남아야 하거든.” 한대경은 몇 마디로 자신의 험난한 과거를 간단히 말했다.지아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가 지금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배경도 없이, 어린 시절부터 도둑질과 강도질만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살아온 한대경의 인생은... 충분히 전설적이야.’ 지아는 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이 사람... 가족에게 버려지지만 않았다면, 어느 명문가의 자제였을지도 몰라.’ “자, 이만 나가봐. 내가 이런 음식을 몇 년간 만들어왔는지 알아? 이 부엌만큼은 너보다 내가 더 잘 알아.”“대신, 이모님하고 시간 좀 보내줘. 그럼 고맙게 생각할게.” 지아가 부엌 조리대에 기대며 말했다.“고마우면 나를 돌려보내 줄 거야?”“그건 안 돼.”“그럼 뭐가 고맙다는 거야?”지아는 말을 마치고 부엌을 떠났다. 하지만 한대경이 그녀를 쉽게 놓아줄 리 없다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거실에 있던 양정숙은 무릎 위에 고양이를 올려 둔 채 모자를 뜨고 있었다. 카리니의 겨울은 10도 이하로 내려가는 경우가 거의 없었고, 대부분 20도 전후의 온화한 날씨였다. 양정숙은 이곳에서 60년 이상 살았지만, 여전히 옛날의 습관을 유지하고 있었다.그것은 바로 겨울이 되면 늘 무언가를 뜨는 것. 지아가 그녀 곁으로 다가가자, 양정숙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누굴 닮았지? 정말 낯익은데... 왜 도무지 생각이 안 나는 걸까?”무릎 위의 고양이가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