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시의 부씨 가문 저택.도윤은 원래 올해 설을 아이들과 함께, 과거 자신과 지아가 살던 신혼집에서 보낼 계획이었다.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지아가 사라지면서, 그는 아이들 모두를 부씨 가문 저택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부씨 가문 저택은 온통 화려한 장식으로 설맞이 준비를 마쳤지만, 그 분위기는 그야말로 적막함 그 자체였다.부남진의 얼굴에는 웃음기 하나 없었고, 민연주 역시 하루 종일 한숨만 내쉬었다. 화연은 말없이 마음속으로 지아를 위해 기도했다.‘지아야... 무사히 위기를 극복하고, 건강히 돌아와 줘.’식탁에는 푸짐한 음식이 가득 차 있었지만, 아무도 젓가락을 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분위기는 아주 무거웠다.부남진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먹자. 배고프면 안 되잖니.”그가 아이들에게 직접 반찬을 집어 주자, 지윤이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말했다.“감사합니다, 증조할아버지.” 쌍둥이 남매는 눈물을 머금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엄마...” 도윤이 두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먹자.” 짧은 보름 동안, 도윤의 몸은 한눈에 보일 정도로 야위었고, 눈썹과 이마에는 지울 수 없는 피로가 묻어나 있었다. 그는 A시로 돌아왔지만, 수색 작업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지아의 소지품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지아가 살아 있다면, 지금쯤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섣달그믐날 밤, 온 가족이 모여야 할 시간, 지아도 분명히 집이 그리울 것이었다.식사 자리에는 그저 그릇과 젓가락 부딪히는 소리만이 들렸다. 웃음소리나 대화는 조금도 없었다. 식사가 끝난 후, 부남진은 준비해 둔 세뱃돈을 하나씩 후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부장경이 시큰둥하게 말했다.“아버지, 저도 이제 서른이 넘었어요. 세뱃돈은 받지 않겠습니다.” “네가 서른이 넘은 건 나도 알아. 그런데 아직도 며느리를 데려오지 못했잖니?”“기어코 나를 화나게 만들 셈이냐? 결혼하지 않는 이상, 너는 아직 어린애야!” 화연이 부장경을 찡그린 표정을 언
폭죽이 하늘로 솟구치며, 눈 내리는 밤하늘에 찬란한 빛을 수놓았다.아이들은 손에 천사봉을 들고 있었지만, 분위기는 여전히 차가웠다. “아빠, 엄마도 하늘의 불빛을 보고 빨리 집으로 돌아오겠죠?” 해경이 목이 메인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는 너희를 아주 사랑하셔. 꼭 돌아오실 거니까 울지 마.” 지윤은 뜰 안에 활짝 핀 매화를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조금만 더 있으면 벚꽃이 필 거예요. 엄마는 내년 벚나무 아래에서 만나자고 약속하셨으니, 절대 약속을 어기지 않으실 거예요.”아이들의 얼굴을 본 도윤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하늘도 알고 있을 것이다. 도윤이 누구보다도 간절히 지아를 찾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하지만 상대는 철저히 준비되어 있었고, 모든 흔적을 완벽히 지웠다.도윤은 그저 지아가 무사히 살아 있기를 기도할 뿐이었다. 그 시각, 섬.지아는 만두를 다 먹었지만, 배는 채워졌어도 마음은 허전하기만 했다. 밤하늘의 별은 그녀가 섬에서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오락거리였다.‘아이들은 분명 부씨 가문에서 가족들과 함께 단란한 식사를 하고 있겠지?’ 지아는 그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여기를 떠나고 싶어?”그 순간, 등 뒤에서 한대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나랑 결혼하겠다고 약속만 하면, 당장 이 섬을 떠나게 해줄게.” “만약 그 제안을 거절한다면, 날 여기 평생 가둘 건가?”“그게 아니면, 억지로라도 그렇게 만들겠다는 거야?” 한대경은 부드럽게 웃었다.‘소지아는 독한 약에도 면역이 있는 사람이야. 일반적인 약물로는 절대 제압할 수 없겠지.’게다가 그는 지아를 강제로 굴복시키고 싶지 않았다. 한대경이 원하는 것은 그녀의 진심뿐이었으니...“난 기다릴 거야. 물이 바위를 뚫듯, 천천히.”“하늘은 내 편이야. 나는 언젠가 네가 마음을 열 날이 올 거라 믿어.” 지아가 몸을 일으켰다.“그럼 계속 기다려.” 그녀는 해변으로 걸어가 폭죽을 터뜨렸다. 그것이 그녀만의 조촐한 설날이었다. 자정이 된 섬은
이 한마디는 평지에 벼락이 떨어진 듯한 충격이었다. 도윤은 손에 들고 있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번쩍 고개를 들었다.“뭐? 지아는 어디에 있어?!” “카리니에 계신 것으로 확인됩니다!” 도윤은 즉각 반응했다.“카리니? 거긴 한대경이 태어난 곳인데... 젠장, 역시 그 자식이었어. 진작에 생각했어야 했는데!” 만약 지아를 죽이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녀는 이미 비행기 승무원들과 같은 운명을 맞이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그녀의 흔적을 감추고, 가짜 죽음을 꾸밀 사람은 오직 한대경뿐이었다. ‘사랑을 얻지 못한다는 이유로, 지아를 납치해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감정을 표현하려 하다니!’ “한대경은 항상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일도 충분히 벌일 수 있는 사람이죠. 보스, 지금 당장 사모님을 데리러 갑시다!” 도윤이 손을 들어 저지했다.“안 돼, 한대경은 분명이 우리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을 거야. 우리가 조금이라도 흔들리는 순간, 그 자식은 자극받을 거라고!”“보스의 말씀이 맞습니다만, 이젠 어쩌죠?”“사모님을 그냥 놔둘 순 없잖아요. 한대경이 사모님을 다른 곳으로 옮길 가능성도 있으니까요.”“움직여야 해. 하지만 내가 직접 나설 순 없어.” 도윤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나는 계속 수색 작업을 진행하는 척해야겠어. 그래야 그 자식의 의심을 피할 수 있을 테니까. 나뿐만 아니라, 너희도 국경을 넘으면 안 돼.”“카리니는 한대경의 영토야. 우리가 들어가면 곧바로 들키고 말 거라고.” 진봉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누구를 보내야 마음이 놓이시겠습니까?”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지아가 한대경의 손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조금 안심이 돼. 그 자식의 성격대로라면, 긴 시간을 들여 지아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려 할 거야. 즉, 당분간은 지아를 해치지 않을 거란 뜻이지.” “각하께는...”“당분간 알리지 마. 눈치 보는 사람들이 있을까 봐 걱정돼.” “예, 보스.”“그런데 한대경은 왜 하필
카리니.지아는 ‘카리니’라는 도시의 이름을 여러 번 들어본 적이 있었다. 특히 한대경의 과거를 조사하면서, 그가 이곳 출신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한 카리니는 상상 이상이었다. 도로 위에는 차량이 끊임없이 오갔고, 교통은 매우 편리했으며, 곳곳에 연결된 고속도로는 도시의 번영을 보여주고 있었다.하지만 도시 한쪽 구석에 있는 슬럼가에 발을 들이자, ‘양극화’가 무엇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그것은 단순한 ‘양극화’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나는 천국이고, 다른 한쪽은 지옥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여러 도시를 다녀보았고, 난민들도 많이 보아왔다. 하지만 이렇게 극단적인 곳은 처음이었다. 도시 중심부는 번화하고, 공항 시설도 국내 주요 도시들을 능가할 정도로 현대적이었다. 하지만 한쪽의 이재민들은 도시 전체가 파괴되면서 나타난 피해자들이었다. 지아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이렇게 번화한 곳에 이렇게 가난한 사람들이 있다고?’‘사람은 어디까지 가난할 수 있는 걸까?’ 다른 도시의 집이 없는 사람들은 고가도로 아래에서 살기 마련이지만, 카리니에서는 가족과 함께 공동묘지에서 사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아이들의 얼굴은 먼지로 가득했고, 큰 눈만이 밝게 빛났다.하지만 그 눈빛 속에는 경계와 낯섦이 가득했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는 열 살 남짓의 아이들이 맨발에 남루한 옷을 입고 도망치고 있었다. 손에는 방금 훔쳐 온 물건이 들려 있었고, 뒤에서는 어른들이 욕설을 퍼부으며 쫓아가고 있었다. “저 녀석들을 죽여! 때려죽이라고!” 지아가 이 장면에 놀라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한 아이가 그녀 옆을 스치며 부딪쳤다.작은 손이 지아의 주머니를 더듬던 순간,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 아이는 곧장 손을 떼며 말했다.“죄송합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지아가 아이의 손을 단단히 잡으며 말했다.“돈을 훔치려던 거야? 그런데 어쩌지? 요즘 같은 세상에 현금을 들고 다니는 사람은 별로 없는데. 차라리 내가 좋은 방
배신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배이혁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배이혁이 그의 시선을 느끼고 험악한 표정으로 물었다.“뭘 봐? 내 말이 틀렸어?” “형, 전에는 소 선생님이 만든 만두를 아주 좋아하지 않았어? 만두를 먹을 땐 입을 다물고 있었으면서... 난 요즘 들어 보스가 예전보다 훨씬 행복해 보인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면 된 거 아니야?” “멍청하긴. ‘억지로 딴 과일은 달지 않다’라는 말 못 들어봤어? 보스가 사랑에 빠져 약해지기라도 하면, 예전부터 보스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놈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아?” “칼로 난도질당할 게 뻔하다고.”“소 선생님이 아니더라도 다른 여자가 나타날 거야. 형, 보스를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하려는 건 아니지?” 한편, 지아는 한대경의 안내를 받아 낡고 허름한 건물로 들어섰다. 만약 이곳이 해안 지대였다면, 태풍에 전부 쓸려나갔을 법한 구조였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계단에는 여러 겹으로 겹친 광고지가 여기저기 붙어 있었고, 올라가는 동안 각종 냄새가 섞여 코를 찔렀다. 한대경은 한 낡은 나무문 앞에 멈춰 섰고, 입구의 작은 화분 아래에서 여분의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지아는 그를 따라 들어가며 이곳이 그의 과거를 담은 집일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문이 열리고, 따뜻한 분위기의 집을 마주한 지아는 자신의 예상이 빗나갔음을 알아차렸다.아주 작은 집의 바닥에는 타일도, 나무 마루도 깔려 있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소파에는 손으로 짠 듯한 뜨개질 담요가 덮여 있었다. 집 안에는 고양이 몇 마리가 있었다. 품종묘는 아니었지만, 모두 포동포동 살이 올라 건강해 보였다.창가에는 향긋한 향기를 풍기는 치자꽃이 피어 있었고, 햇빛을 받으며 활짝 미소 짓는 해바라기 화분도 보였다. 깨끗하게 정리된 집에는 오래된 텔레비전이 하나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깔끔한 뜨개질 덮개가 덮여 있었다. 누가 봐도 손재주 좋은 사람이 정성 들여 꾸민 공간이었다. 비록 세상은 거칠고 낡았을지 몰라도, 이 집만큼은 그들의 노
“이모, 얘가 정확히 말하지 않은 거예요. 이미 이혼한 상태라고요.” 양정숙은 곧장 한대경의 귀를 잡아 비틀었다.“이 아가씨는 너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아직도 모르겠니?”“아이든 이혼이든 전부 핑계라고! 솔직히 말해, 억지로 이 아가씨를 끌고 온 거지?” 지아는 그만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당돌하고 두려울 거 없어 보이던 한대경도 저렇게 무서워하는 사람이 있다니, 정말 의외인데?’ “이모, 이 손 놓으세요!” “아가씨, 솔직히 말해줘요. 이 녀석이 아가씨를 협박해서 데려온 거죠?”“내가 대신 혼내줄게요.” 지아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한대경이 이 여자분을 존경하는 건 분명하지만, 진실이 밝혀져도 그저 훈계하는 정도에서 끝날 거야.’ ‘게다가 한대경 같은 사람이 이 여자분의 말을 들을 리 없잖아? 그런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나를 이런 곳에 데려오지도 않았겠지.’ ‘게다가 이 여자분... 마음속으로 한대경이 결혼하기를 바라셔서, 이 상황을 즐기시는 것 같은데?’‘그렇다면 굳이 눈치 없이 행동할 필요 없겠어.’지아가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말했다.“아니에요, 한 선생님께서는 제 의술이 뛰어난 걸 알고, 이모님의 건강을 봐달라고 부탁하신 거예요.” 한대경은 놀라서 멍해졌다.‘바로 진실을 말해버릴 줄 알았는데, 상황을 정확히 파악한 모양이네.’ ‘소지아, 정말 똑똑해.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여자야.’지아는 자연스럽게 자신과 한대경의 관계를 분리했고, 동시에 그를 난처한 상황에 빠뜨리지도 않았다. 게다가 양정숙은 실제로 건강에 문제가 있었으니, 한대경이 그녀를 데려온 이유도 그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정말요? 꽤 어려 보이는데, 의사라고요?”양정숙이 한대경의 귀를 놓으며 물었다. 양정숙은 화장하지 않았지만, 지아는 그녀의 실루엣만으로도 그녀가 젊은 시절 아주 예쁘장한 사람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성격이 불같고, 급했을 것 같기도 해.’지아가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안색을 보니까 간과 폐 상태가 좋지
양정숙은 말투가 시원스러웠다. “그 전에 저 녀석이 데려왔던 의사들이죠.”“하나같이 절에서 나온 스님처럼 굴었어요. 잔소리만 해댔고요.”“오늘은 담배 끊어라, 내일은 술 끊어라... 정말 사람 짜증 나게.”지아는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양정숙은 비록 나이가 많았지만, 간과 폐를 제외하면 건강은 매우 양호했다. 아마 꾸준히 건강 관리를 해온 결과일 것이었다. 게다가 이곳의 주변은 꽤 평화로웠고, 처음에 봤던 도둑이나 강도 같은 일들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양정숙이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도 안전하게 지내는 이유는, 이 지역에서 그녀를 보호해 주는 더 강한 세력이 있다는 뜻이었다. “한 선생님께서 걱정하시는 건, 이모님에 대한 존경에서 비롯된 거예요. 제 말을 믿으신다면 건강을 더 잘 돌볼 수 있도록 한약을 지어드릴게요.”양정숙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착한 아가씨네요. 아주 훌륭한 집안에서 자란 모양인데, 이름이 뭐예요? 왠지 낯이 익어요.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지아가 태연하게 말했다.“소지아라고 합니다.” “혹시 제 할아버지와 아시는 사이일까요? 제 할아버지 성함은 ‘부남진’입니다.”지아는 양정숙이 혹시라도 환희와 아는 사이라면, 그 실마리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부남진?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아, A국의 그 유명한 분이죠? 아가씨, 아주 대단한 집안 출신이었네요.”지아는 약간 실망한 듯 말했다.“저는 이모님께서 저희 할아버지와 친구신 줄 알았어요. 그래서 저한테 낯익다고 하신 줄 알았거든요.” “아가씨 할아버지와는 아는 사이가 아니에요. 단지...” “단지 뭐요?”지아가 궁금해했다. 양정숙이 머리를 짚으며 말했다.“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예전 일이 잘 기억이 안 나네요. 그냥 아가씨 얼굴이 왠지 낯이 익다 이거예요.”바로 이때, 부엌에서 한대경이 과일을 씻어 들고 나왔다. 그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덧붙였다.“이모는 젊었을 때 머리를 심하게 다친 적이 있어. 그러고는 여기로 팔려
한대경은 손에 든 대파의 흙을 떼어내며 무심하게 말했다.“몰라,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버려졌거든. 그래도 남자애라서 누군가 날 주워다 키웠어.”“물론 그 집에도 친아들도 있어서, 날 다시 다른 사람에게 팔아 넘겼지만 말이야.”“그 후에는 이리저리 떠돌았고, 세 살쯤 되던 해에 여기로 버려졌지. 그 이후로 여기가 내 집이 됐어.” 그는 대파 껍질을 쓰레기통에 버리며 말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흙 속에서 자라는 잡초 같아. 아무리 환경이 척박해도, 목숨을 걸고 땅에서 나와 살아남아야 하거든.” 한대경은 몇 마디로 자신의 험난한 과거를 간단히 말했다.지아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가 지금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배경도 없이, 어린 시절부터 도둑질과 강도질만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살아온 한대경의 인생은... 충분히 전설적이야.’ 지아는 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이 사람... 가족에게 버려지지만 않았다면, 어느 명문가의 자제였을지도 몰라.’ “자, 이만 나가봐. 내가 이런 음식을 몇 년간 만들어왔는지 알아? 이 부엌만큼은 너보다 내가 더 잘 알아.”“대신, 이모님하고 시간 좀 보내줘. 그럼 고맙게 생각할게.” 지아가 부엌 조리대에 기대며 말했다.“고마우면 나를 돌려보내 줄 거야?”“그건 안 돼.”“그럼 뭐가 고맙다는 거야?”지아는 말을 마치고 부엌을 떠났다. 하지만 한대경이 그녀를 쉽게 놓아줄 리 없다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거실에 있던 양정숙은 무릎 위에 고양이를 올려 둔 채 모자를 뜨고 있었다. 카리니의 겨울은 10도 이하로 내려가는 경우가 거의 없었고, 대부분 20도 전후의 온화한 날씨였다. 양정숙은 이곳에서 60년 이상 살았지만, 여전히 옛날의 습관을 유지하고 있었다.그것은 바로 겨울이 되면 늘 무언가를 뜨는 것. 지아가 그녀 곁으로 다가가자, 양정숙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누굴 닮았지? 정말 낯익은데... 왜 도무지 생각이 안 나는 걸까?”무릎 위의 고양이가
시월이 고개를 끄덕였다.“오빠, 절대 오빠를 실망하게 하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오빠도 건강을 잘 챙겨야 해요.” “그래.”시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나는 아버지 일부터 정리할게. 월아, 집안을 부탁해.” “오빠, 걱정하지 마세요. 집안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떠나기 전, 시후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덧붙였다.“그리고 월아, 소 선생님도 우리 사람이야. 무슨 일이든 소 선생님께 털어놓고 도움을 받도록 해.” “네, 알겠어요.”사람들 앞에서의 시월은 언제나 순종적이고 단아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의 표정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시월의 얼굴은 감출 수 없는 분노로 가득해졌다. “죽일 X! 그 X이 뭔데 나랑 같이 소씨 가문을 관리한다는 거야?” 심장후는 그런 시월의 손을 잡으며 위로했다.“됐어, 우리 계획은 이미 반이나 성공했잖아. 이제 소씨 가문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할 거야. 이미 도마 위에 올라간 생선이나 다름없으니, 더 이상 발버둥칠 여력도 없을 거라고.” “그래도 분하단 말이야. 지금이야말로 소씨 가문을 접수하기 가장 좋은 기회인데...” “소시후도 너를 걱정해서 그러는 걸 거야. 네가 혼란에 휩싸일까 봐 두려운 거지. 여태 기다렸는데, 이제 와서 조급해할 거 없어. 조금만 진정해 봐.” 시월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다리를 꼬며 담배를 꺼내 들었는데, 심장후는 서둘러 그녀에게 불을 붙여 주었다. 빨간 입술 사이로 한 줄기 연기가 피어오르고, 시월의 얼굴은 어느새 차분함을 되찾았다. “소씨 가문의 인간들 따위는 두렵지 않아. 이제 남은 건 그 노친네 하나뿐이야. 그 인간만 죽으면 소씨 가문은 완전히 끝장날 거라고. 한 명은 팔 하나를 잃었고, 하나는 절름발이가 됐잖아? 이제 별거 아닌 잡것들만 남았어.”“하지만 그 노친네는 만만치 않은 상대잖아.” “그래봤자 그 노친네의 시대는 가고, 우리의 시대가 왔어. 늙은 데다가 병까지 든 노친네가 무슨 힘을 쓰겠어? 내가 불쏘시개 하나만 더 던지면, 불길은
시후도 맞장구쳤다.“역시 우리 월이가 생각이 깊구나.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야.” “왜요, 오빠?”“상대의 목표는 우리 부모님뿐만이 아니야. 우리는 연이어 위기에 처했고, 이제 남은 건 너 하나뿐이야. 그 사람은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월아, 앞으로는 외출할 때 늘 경호원을 대동하고, 출발 전에 차량도 철저히 점거해야 해. 그리고 당분간은 모든 공개 활동을 중단하도록 해.” 시월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큰오빠, 저는 우리 소씨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 우리 가문은 대대로 이어져 왔고, 아빠도 많은 걸 바치셨잖아요. 아빠가 심혈을 기울인 모든 게 물거품이 되는 건 싫어요. 지금은 저만이 가문을 책임질 수 있는데, 저는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이 복잡해질까 봐 걱정된다고요!”“네 마음은 잘 알겠어. 하지만 지금 상황은 결코 낙관적이지 않아. 월아, 넌 우리 가문의 마지막 희망이야. 오빠들이 너를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잖아. 게다가 아버지도 떠나시기 전에 시간을 벌 수 있는 준비를 해두셨을 테니까, 당분간은 집에만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어디든 나가면 안 돼, 알겠지?” 시후가 시월의 어깨를 두드리며 다정하게 말했다.“너 자신을 꼭 돌봐야 해. 오빠들은 너까지 잃고 싶지 않아.” “형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월이를 꼭 지킬 겁니다.” “그래.”시후가 고개를 돌려 심장후를 바라보았다.“장후야, 우리가 이 사건과 연관 있는 심세호라는 사람을 찾아냈는데, 혹시 심씨 가문의 사람일까?” 심장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형님께서 말씀하시는 심세호가 저희 할아버지의 사생아인지는 모르겠네요. 저희 아버지에게 큰아버지 이전에 사생아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 사람은 할아버지를 무대에서나 볼 수 있는 하찮은 술집 여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었어요.”“하지만 그 술집 여자와 사생아 모두 우리 심씨 가문에서는 인정받지 못했죠. 제 아버지조차 그 사람과 왕래가 거의 없었으니, 우리 같은 후손들은 더 말할 것도 없죠.
지아는 새로 등장한 인물이 너무도 당황스러웠다. 낯선 얼굴이었지만, 소시월과의 관계는 아주 가까워 보였다. 지아의 의문을 눈치챘는지, 시후가 차분히 설명했다.“심씨 가문의 장남, 심장후예요. 월이의 약혼자이기도 하죠.” ‘심씨 가문?’지아는 순간 이 세상이 참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돌고 돌아 같은 곳으로 되돌아온 셈이었으니 말이다. 도윤의 어머니인 심예지 역시 심씨 가문의 사람이었으나, 과거의 그녀는 사랑을 택하며 심씨 가문과의 인연을 끊었다. 그런 심씨 가문의 후계자가 소시월의 약혼녀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지자, 심장후가 자연스럽게 지아를 바라보았다. “이분은...?”시월이 눈물을 훔치며 소개했다.“내가 얘기했던 뛰어난 의술을 갖춘 소 선생님이셔. 우리 시하 오빠가 마음에 두고 있는 분이기도 하지.” 지아가 심장후의 손을 잡아끌며 지아 쪽으로 향했다.“소 선생님, 제 약혼자예요.” “안녕하세요.”지아가 무심한 듯 담담하게 인사했다. “소 선생님, 반갑습니다. 젊은 나이에 그렇게 뛰어난 의술을 가졌다니, 정말 존경스럽습니다.”지아는 고개를 끄덕일 뿐, 더는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심장후 역시 지아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시후에게 걱정스러운 눈길을 돌렸다.“소 대표님께서는...” 지아의 눈빛이 경계심으로 살짝 굳어지자, 시월이 급히 설명했다.“미안해, 오빠, 내가 이야기했어. 장후 오빠랑 전화하면서 울음을 참지 못하는 바람에...” 시후는 이런 일을 외부에 알리고 싶지 않았지만, 시월과 장후의 사이를 알기에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원래 올해 두 가문이 결혼 문제를 상의할 계획이었으나, 지금 같은 상황에선 모든 것이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장후도 우리 소씨 가문의 사람인 셈이니까.” 이미 온 사람을 돌려보낼 수도 없었으니, 시후는 애써 평정심을 유지했다.하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그의 손끝은 마음속의 혼란을 드러내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께서 타신 비행기가 폭발했어. 아
시하는 시언이 하고 싶었던 말을 대신했다.“나도 잘못이 있어. 그동안 책임은커녕 모두에게 짐이 되었으니까.” “그만 좀 하세요!”지아가 탁자를 치며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지금은 서로에게 사과할 때가 아니에요. 여러분이 이럴수록 심세호를 기쁘게 할 뿐이라고요. 아직 비행기 사고로 대표님의 사망을 확정할 수는 없어요. 섣불리 결론을 내릴 수 없다고요.” 지아는 곧은 자세로 서 있었다.‘내가 소씨 가문에서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여러분은 최악의 상황도 대비해야 해요. 만약 대표님께서 정말 돌아가셨다면, 여러분이 아들로서 소씨 가문을 지켜내야 한다고요. 가족을 슬프게 하고, 원수를 기쁘게 만드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해요.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사모님께서 어디에 계시는지 찾아내는 일이에요. 사모님은 최대한 빨리 눈을 치료해야 한다고요. 그렇지 않으면 회복이 불가능해질 거예요!” “게다가 소 대표님은 해외 사업을 접고 귀국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 일을 이어받을 사람이 필요해요. 나라에는 왕이 하루도 없어선 안 되는 법이잖아요. 이런 상태라면, 소씨 가문은 곧 무너지고 말 거라고요!” 이어서 지아는 시언에게 조언했다.“건강을 반드시 회복하셔야 합니다. 하루라도 빨리 나아지셔야 가족 모두가 안정을 찾고 희망을 가질 수 있을 테니까요.”지아는 몇 마디로 어지러운 상황을 안정시켰다. 함께한 시간이 길지 않았고, 나이도 그들보다 어렸지만, 그녀의 말에는 이상할 정도의 신뢰감이 묻어나고 있었다. “맞습니다. 우리는 절대 무너지면 안 돼요. 소 선생님이 있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지아가 시후를 부축해 앉혔는데, 사실 지아가 가장 걱정하는 사람은 바로 소시후였다. 시후는 지아 다음으로 성공한 실험체였지만, 신장병은 여전히 완치되지 않은 상태였고, 예전보다 살아남을 확률이 조금 더 높아졌을 뿐이었다. 시후의 몸과 마음은 이미 지쳐 있었기에, 지아는 그가 버티지 못할까 봐 걱정되었다. 지아는 이런 걱정을 안고 시후를 부드럽게
지금 소씨 가문 사람들이 가장 듣기 싫은 소식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그 말이 전해지자 모두의 눈가가 떨리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장 집사님, 장 집사님은 집안의 어른이시잖아요. 어쩜 그렇게 경솔할 수 있으세요?” 지아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지아는 처음 소씨 가문에 왔을 때 자신을 맞이하던 장덕수의 침착함과 신중함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지금 이토록 당황하며 문턱에서 넘어질 정도로 급하게 들어왔다는 갓은, 사건이 간단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장 집사님, 대체 무슨 일이에요?”시월이 다급히 그를 부축하며 물었다. 장덕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께서 탑승하신 개인 비행기가... 비행 중에 화염에 휩싸였습니다. 비행기가... 폭발했다고요!” “뭐, 뭐라고요?!”시월은 그 자리에서 바로 기절하고 말았다. “월아!”시후는 곧장 시월을 안아 들었는데, 이는 혼란스러운 소씨 가문이 더욱 큰 혼란에 빠져드는 순간이었다. 지아는 빠르게 다가가 시월의 상태를 살폈다.“걱정하지 마세요. 아가씨는 단지 충격으로 실시하신 것뿐이에요. 잠시 쉬면 곧 깨어나실 거예요.” “누가 월이 좀 방으로 옮겨주세요! 휴식이 필요합니다!” “예, 도련님!”고용인이 시월을 방으로 데려가자, 거실에 남은 사람들의 표정은 말 그대로 참혹해졌다. 시후는 아직 치료받지 않아 병약한 얼굴로 서 있었고, 시언은 수술을 막 끝낸 상태에서 시하와 마찬가지로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게다가 시월은 너무 놀라 혼절하기까지.“형, 아버지는...”가장 강인하던 시언의 눈시울조차 붉어져 있었다. 하지만 가장 어려운 상황에 놓인 것은 장남인 시후였다. 그는 집안의 가장으로서, 누구보다 힘들었지만 지금은 더욱 강한 척해야만 했다. “괜찮을 거야. 단지 비행기 사고일 뿐이야. 기적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시하는 두 주먹을 꽉 쥔 채 휠체어를 세게 내리쳤는데, 그의 눈가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 “분명 심세호가 한 짓이야! 사랑이 증오로 변한
다행히 지금은 60년 전처럼 정보가 부족한 시대가 아니어서, 원하기만 하면 충분히 알아낼 수 있을 것이었다. 게다가 조경숙은 조씨 가문 출신으로, 이름 높은 명문가 자제였다.집안에는 여섯 명의 오빠가 있었고, 조경숙은 유일한 딸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온 가족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즉, 집안의 보석 같은 존재로, 아름다운 외모와 온화한 성품을 겸비한 인물이 된 것이었다.조경숙은 성인이 되기 전부터 이미 여러 집안에서 혼인을 청했고, 심지어 해외의 명문가들도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조경숙의 수많은 구혼자 중에서도 한 사람만이 유독 특별했다.그 시절 조경숙을 쫓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부호들이었기에, 단순히 재산만으로는 그들의 우열을 가릴 수 없었다.하지만 그중 한 명은 천재 발명가로 불리며, 동시에 뛰어난 의술로 이름을 떨쳤던 인물이었다. 그의 사랑은 그야말로 뜨겁고 격렬했으며, 조경숙을 얻기 위해 극단적인 행동까지 서슴지 않았다.조경숙이 소임호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음에도, 그는 결코 그녀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소임호가 무슨 방법을 썼는지, 그 천재 발명가는 갑작스레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 의학 미치광이의 소개서를 읽은 지아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역시 지아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 천하의 악당 같은 의학 천재는 루이스가 길러낸 첫 번째 제자였는데, 이미 사제 관계가 파탄 나긴 했으나, 지아는 그를 ‘선배’라고 불러야 했다. ‘이미 파문되었다던 그 사람이 사모님과 그렇게 깊은 연관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어.’ ‘그래서 그 사람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피부에서 별다른 징후를 발견하지 못했던 거구나.’그의 나이를 추정하면 이미 50세가 되었을 것이었다.얼굴은 가면으로 감출 수 있겠지만, 몸은 속일 수 없지 않겠는가?그 사람의 피부는 마치 20대나 30대처럼 매끄럽고 탱탱해, 지아는 그가 소명담이 아닐 거라고 의심하지 못했다. 루이스 역시 젊음을
조경숙이 갑자기 납치되면서 소씨 가문의 안팎은 큰 혼란에 빠졌다. 심지어 병상에 누워 있던 시언조차 몸을 일으키려 애썼으니 말이다. 시후는 곧장 소명담의 본가로 향했다.‘사람은 도망칠 수 있어도 근거지는 숨길 수 없는 법이지.’ 하지만 소명담을 잡기도 전에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한편, 지아는 무무의 머리를 땋고 있었는데, 아이의 머릿결은 매끄럽고 윤기가 흘러, 까만 머리카락이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도윤은 모녀의 곁에서 작은 수납 상자를 들고 서 있었고, 상자 안에는 아이들의 머리끈과 머리핀들이 가득했다. 도윤이 초록색 리본 모양의 머리핀을 건넸다.“이걸로 하자. 초록색이 예쁘잖아.” 지아는 그것을 받아 무무의 머리를 묶어주었고,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우리 딸, 정말 예쁘다.”무무의 초록색 눈동자에 웃음기가 만연해지는 순간이었다. 아이는 한 손으로 지아를, 다른 손으로 도윤을 잡고 아주 행복해했다. 바로 이때, 진봉이 급히 들어왔다.“사모님, 나쁜 소식입니다!” 지아는 대충 짐작이 갔다.“소명담이 도망친 거야?” 이는 지아도 예상했던 일이었기에,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소명담이 그렇게 오랫동안 치밀하게 준비해 온 일을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렇게 쉽게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아니요, 죽었습니다.”지아가 빗을 들고 있던 손을 멈추며 물었다.“뭐라고? 죽었다고?” 이것은 지아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말도 안 돼!’“그게 말이 돼? 설마... 그 사람 뒤에 또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걸까?” 지아는 과거 자신과 대면했던 소명담을 떠올렸다.‘그 사람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깊이를 알 수 없는 사람이었어.’‘그런 사람이 갑자기 죽었다고?’ 그때 진환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제가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진봉이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것 같네요.”“소명담은 죽은 게 맞습니다만, 죽은 지는 이미 수년이 지났다고 합니다.” “그럼... 지금까지 우리가 본 소명담은 누군가가 변장했던 거야?” 지
아무도 소시월의 입가에 떠오른 희미한 미소를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옆에서 조용히 관찰하던 지아는 시월의 표정을 정확히 포착했다. 시월은 마치 자기 행동을 들킨 것처럼 고개를 돌려 지아와 눈을 마주쳤다. 곧이어 시월은 다시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소 선생님, 왜 그러세요?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지아가 침착하게 대답했다.“아니요, 아가씨께서 너무 아름다워서 그냥 한 번 더 보고 싶었을 뿐이에요.”시월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지아의 팔을 살며시 잡았다.“소 선생님, 오랫동안 고생하셨으니 잠시 옆 방에서 쉬는 게 어떠세요? 여긴 우리가 지키고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지아는 은근히 자기 손목을 향하는 시월의 시선을 감지했다.그 손목은 몇 년 전 도윤의 총에 맞았던 곳이었다. “아가씨, 왜 그러세요?” “피부가 정말 하얗고 매끄러우시네요. 정말 부러워요. 평소엔 어떻게 관리하세요?” 지아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아가씨, 사모님께서 갑자기 사라지셨는데도 그다지 걱정하지 않으시네요? 평소에 가족에게 효심이 지극하신 분이, 왜 이런 일엔 관심이 적으신 거죠?” 지아의 말은 정확히 급소를 찔렀고, 시월은 당황한 듯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우리 소씨 가문에 이렇게 많은 일이 연달아 터지는데, 제가 어떻게 신경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저 지금은 제가 조급해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그래서 오빠들을 도와 손님들을 챙기려 했던 거라고요.”“그런데 소 선생님께서 갑자기 저를 의심하는 듯한 질문을 하시니까 조금 속상하네요.” 두 사람은 몇 번의 수를 주고받았지만, 어느 쪽도 명확한 단서를 잡지 못했다.시월은 지아의 정체를 의심했다. 그녀는 지아의 손목에 총상 흉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눈앞의 지아는 매끈한 손목을 가지고 있었으며 전혀 총알 자국이 없었다. 지아 역시 시월에게서 의심스러운 점을 느꼈다.하지만 모든 증거가 소명담을 가리키고 있었고, 시월과는 아무런 관련이
“세라야, 네가 알고 있는 모든 걸 말해줘.”시하가 부드럽게 설득했다. 시하와 강세라의 대화는 다른 방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시하 오빠의 미남계가 통한 모양이네요.” 시후는 책상을 세게 내리치며 분노했다.“역시 그 자식일 줄 알았어! 망할 자식 같으니라고!” 지아는 마음 한편이 실망스러웠다. 지아는 모든 일이 시월과 연관이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지금 보니 그렇지 않았다. 그 순간, 양지운이 검사 결과를 들고 들어왔다. “소 선생님, 사모님께서 사용하시는 화장품과 약물을 검사했는데, 매일 사용하시는 안약에서 추가적인 약물이 발견됐습니다. 그 약물은 정기적으로 사용할 경우 시력을 저하시켜 실명에 이를 수 있습니다!” “나쁜 새X!” 시후가 분노하며 벌떡 일어섰다.“드디어 증거를 잡았어! 양 비서, 당장 그 자식을 붙잡아! 우리 소씨 가문을 이렇게 망쳐놓다니, 여태까지의 모든 대가를 치르게 해주자고!”“예!”시하가 시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형, 너무 화내지 마. 화내다 몸 상하면 안 되잖아. 이제 그 능구렁이를 잡았으니, 나도 안심이야.”지아는 옆에서 말없이 상황을 지켜보았다.“지아야, 왜 아직도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어? 모든 게 네 계획대로 되고 있잖아. 혹시 뭔가 잘못된 거라도 있어?” 지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모든 게 계획대로라는 게 오히려 마음에 걸려요. 너무 순조롭잖아요.” “순조로운 게 어때서?” “그냥 좀 불안해요. 물론 제가 괜한 걱정을 하는 걸 수도 있겠지만요.”“이제 원인을 찾았으니, 사모님께선 약물을 끊은 후에 제대로 진찰받고 휴식까지 취하시면 시력을 회복할 수 있을 거예요.” “좋아, 나는 이 좋은 소식을 시언이한테 알려야겠어. 마음 놓고 푹 쉴 수 있도록 말이야.”“저도 같이 갈게요.” 지아는 곧 동이 트려는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했다.‘모든 일이 해결되었으니, 남은 일은 소 선생님께 맡기면 될 거야.’ 하지만 그때 불길한 소식이 전해질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양지운이 급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