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는 멍하니 복도에 앉아 있었다.‘왜 하필 지금이지?’ 딸랑- 딸랑-잔잔한 종소리와 함께 무무가 지아의 곁으로 다가왔다. 무무는 지아의 안색이 좋지 않음을 눈치채고는 조심스레 그녀의 손바닥에 머리를 비비며 애교를 부렸다. 무무는 산골 마을에서 오래 머물렀던 덕분에 동물들과 친근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 아이의 행동 중 많은 것이 동물과 비슷하기도 했다. 지아는 무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왜 언니, 오빠들이랑 안 놀아?” 무무는 고개를 저으며 손짓으로 답했다.“엄마가 걱정돼서요.”어른들이 나눈 대화를 어렴풋이 들었는지, 지아가 남의 일로 슬퍼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말하지 못하는 무무였지만, 따뜻한 마음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지아는 딸을 품에 안으며 속삭였다.“엄마는 괜찮아. 그냥 세상에 어떤 사람들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어서, 엄마가 도울 수 없더라고.”“하지만 엄마 주변에 있는 사람들만큼은 엄마가 지키고 싶어.” 지아가 잠시 말을 멈추고 난색을 보였다.“그런데 말이야, 엄마가 잠시 집을 떠나야 할 것 같아. 2, 3일이면 되는데, 그동안 아버지랑 잘 지낼 수 있지? 엄마는 곧 돌아올 거야.”무무는 내심 엄마가 떠나지 않기를 바랐으나, 지아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또 손짓했다.“엄마가 어떤 선택을 하든, 엄마를 응원할 거예요!” 지아가 무무의 얼굴에 입을 맞췄다.“역시 우리 무무야.” 무무는 지아의 가장 아픈 손가락이었다. 무무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지아를 바라보았다.그날 밤 지아는 아이들에게 동화를 들려주며 세 아이를 모두 재웠다. 그러고는 지윤의 방에 갔는데, 지윤은 한참 책을 읽고 있었다. 지아는 지윤과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고, 자신이 며칠 동안 집을 비울 예정이라는 사실도 털어놓았다.지윤은 지아의 말을 듣고 동생들을 잘 돌보겠다는 약속을 했다. 모든 준비를 마친 지아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도윤은 오랫동안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 같았다
목걸이는 화려하거나 복잡하지 않고, 살아 움직이는 듯한 작은 물고기 모양이었다. 지아는 고개를 들어 도윤의 옆모습에 입을 맞추었다.“마음에 들어, 고마워.”늦게 일어난 지아는 일어나 깔끔하게 단장한 후, 아이의 방을 살펴보고 나서야 조용히 집을 나섰다. 도윤이 배웅해 주겠다고 했지만, 지아는 단호히 거절했다. 그녀는 혼자서 부두로 향했다. 그곳에서 환승한 후, 비행기를 타고 섬으로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지아는 다른 얼굴로 변장한 채 쾌속정을 타고 있었다. 깊은숨을 들이쉬자 코안에 차가운 공기가 가득 찼다. 몇 번의 환승 끝에 약속 장소에 도착한 지아는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시억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시억의 사지가 멀쩡한 것을 본 지아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저를 기다리려고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그럼요, 이번 S등급 임무에는 단 세 명만 왔으니까요.” “나머지는 누구예요?” “도착하면 알게 될 거예요.” 지아는 시억과 대화를 나누면서 그가 ‘블랙 X’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음을 느꼈다. 그래서 자연스레 보스에 대한 것을 다시 물어보았다. “보스한테 왜 그렇게 신경 쓰는 거예요? 혹시,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지아의 눈동자가 별빛처럼 반짝였다,“그 정도 실력으로 블랙 X를 조직했다면 존경하지 않을 수 없잖아요.” “만약 보스가 여자라면요?”시억이 의도를 알 수 없는 말을 던졌다. 지아는 순간 멍해졌지만 곧 대답했다.“그래도 존경하죠.” 그녀는 시억의 표정에서 어떤 단서를 찾으려 했지만, 그 역시 인조 얼굴을 쓰고 있어서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지아의 마음속에 약간의 경계심이 일렁이기 시작했다.‘설마... 블랙 X의 보스가 흑막의 주인공일 리는 없겠지?’하지만 곧 이 생각을 떨쳐냈다. ‘아니야, 블랙 X는 실패한 후에 완전히 손을 뗐었잖아. 정말 그 사람이었다면 죽을 때까지 끝을 보려고 했을 거야.’ “남자든 여자든, 이번에는 얼굴을 드러낼 거예요. 곧 알 수 있겠네요.” 석양이 질 무렵, 두
지아는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한대경을 쳐다보며 서서히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스쳤다.“영지, 도망갈 수 없을 겁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시억이었다! 그는 해변 의자에 느긋하게 앉아 다리를 꼬더니, 이전과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지아는 그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당신이 블랙 X의 보스군요?” “그래요, 영지가 원하는 대로 내가 직접 나섰어요.” 지아는 시억을 매섭게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날 속였어요?!” “영지, 내가 블랙 X에 들어온 사람들한테 해주는 말이 있어요. 이 조직엔 친구란 없고, 거래만 있다는 거죠.” 지아는 처음부터 친구를 만들 생각 따윈 없었다. 그녀는 단지 보스에게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보스가 S급 킬러일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더욱이 자신과 몇 번이고 임무를 수행했던 사람일 줄은... “블랙 X는 원래 어떤 임무도 가리지 않는 용병 조직이에요. 그런데 이번에는 영지의 이름을 콕 집어서 요청한 사람이 있었어요. 그게 바로 이번 임무이고요.” 시억은 태연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그러니 날 탓하진 마세요. 나는 거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는 오렌지 주스를 다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즐거운 밤이 되길 바라요. 난 이만 가볼게요.” 시억이 지아를 이 사적인 섬으로 유인하는 데 공을 들인 이유는 단 하나, 절대로 그녀가 도망갈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다른 사람들도 알아서 자리를 비웠고, 섬에는 이제 두 사람만 남았다. 지아는 결국 옆에 있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커다란 파라솔이 따가운 햇빛을 가리고 있었고, 부드러운 해풍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흩날렸다.“한대경, 이렇게까지 하면서 얻고 싶은 게 뭐야?” 한대경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난 이미 충분히 내 의사를 표현했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찾아가 청혼했을 때 거절하지만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지 하진 않았을 거야.” 지아가 냉소적인 표정으로 쏘아붙였다.“한 나
지아의 눈썹이 미세하게 떨리며 찌푸려졌다.그녀의 눈빛은 삽시간에 얼음처럼 차갑게 변했다.“날 협박하는 거야?” “아니, 나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한대경이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나는 바닥에서 기어오르며 사람들에게 짓밟히던 쓰레기였어. 그런 내가 여기까지 올라오면서 얼마나 많은 걸 희생했는지 알기나 해? 내가 남들처럼 자비를 베풀었다면, 벌써 백 번도 넘게 죽었을 거야. 그러니까 좋은 말로 얘기할 때 얌전히 들어. 그렇지 않으면,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아이들은 지아의 약점이었다. 그녀의 눈빛이 날카로워졌고, 손을 들어 그의 따귀를 떄렸다.“아이들한테 손만 대 봐. 정말 죽여버릴 거야!” 한대경은 지아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으며 차갑게 웃었다.“강단 있는 모습이 참 좋단 말이지.” 그가 손을 뻗어 지아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가면을 벗겨냈다.“역시 이 얼굴이 더 마음에 든다니까?”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얼굴은 예술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다만 한대경은 의아했다.‘아이를 넷이나 낳았다면서 몸이 왜 이렇게 탄탄하고 늘씬한 거지? 배도 늘어진 흔적조차 없이 팽팽하고, 몸매도 처녀처럼 완벽하단 말이지...’ “다른 사람이 건드린 여자가 그렇게 좋아? 당신 스스로가 더럽게 느껴지진 않아?” 한대경은 지아를 힘껏 잡아당겨 물 밖으로 끌어 올렸고, 그녀의 몸에 자기 몸을 밀착시켰다.물에 젖은 옷은 지아의 몸매를 한층 더 선명하게 드러냈다. 그는 자연스레 그녀의 목에 남겨진 자국들을 발견했다. 그것은 다른 남자가 남긴 것이었는데, 어젯밤, 그녀가 누군가와 격정적인 밤을 보냈다는 증거였다. 평소의 한대경이라면 절대 이런 여자를 건드리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마음이 흔들린 이상, 이제 와서 후회한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그의 마음속에는 불길 같은 열망이 타올랐고, 지아를 완전히 정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지아는 몸을 비틀며 한대경의 품에서 벗어나더니, 그를 상대로
도윤과 비교하면 한대경은 그야말로 깡패나 다름없었다.그의 행동 방식은 전혀 논리적이지 않았고, 오직 자신의 기분에 따라 움직였다.이런 사람은 도리와 윤리가 전혀 통하지 않아서 오히려 더 위험했다.한대경은 이내 지아를 침실로 데려갔다.“먼저 샤워부터 해. 입을 옷은 방 안에 준비돼 있으니까.” 그는 지아를 좋아했지만, 성급히 무리한 짓을 할 생각은 없었다.지아를 이 섬에 데려오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한계를 넘어선 일이었기에, 지금 당장 억지로 무언가를 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지아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창문과 테라스가 있긴 했지만, 탈출할 수 있을 만한 모든 곳 아래엔 사람들로 가득했다. 상대를 제압하고 해변으로 도망친다고 해도, 교통수단이 없는 상태에서 망망대해를 헤엄친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대경은 지아를 위한 ‘감옥’을 치밀하게 준비해 둔 것임이 분명했다. 지아는 문을 안에서 잠그고 욕조로 들어가 흠뻑 젖은 몸을 담갔다. 머릿속에는 지하실에서 보았던 민정의 모습만이 가득했다. 팔다리가 쇠사슬에 묶인 채, 먹고 마시고 자며, 심지어 용변까지 작은 방 안에서 해결하던 모습. 누구와도 대화할 수 없고, 식사는 남은 음식으로 겨우 연명할 뿐이었다. 민정은 불과 반년 만에 정신적, 육체적으로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그녀는 2년이 지나도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었다. ‘한대경이 우창민과 다를 바가 있을까? 결국 두 사람 다 여자를 가두려는 사람들이잖아!’ 다만, 지아의 활동 범위가 민정보다 넓을 뿐이었다. 민정의 감옥이 몇 평 남짓이었다면, 그녀는 이 화려한 황금 감옥인 섬 전체를 배회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지금 한대경을 자극해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기회를 찾을 때까지 참아야 해. 그래야만 탈출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그녀는 한대경이 이미 모든 것을 준비해 놓았다는 사실을 몰랐다.지아가 탑승했던 비행기는 공중에서 폭발해 기체마저 바다로 추락했다. 이 소식은
도윤은 도무지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어떻게 그렇게 기막힌 우연이...!’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단호히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진봉의 눈가는 붉어져 있었다.“저도 믿고 싶지 않습니다. 보스께서 사모님께서 떠나실 때부터 불안해하셨잖아요. 그래서 저희가 사람을 붙여서 사모님께서 비행기에 탑승하시는 걸 직접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지나가던 화물선의 누군가가 비행기 폭발 순간을 촬영했더군요.” 진봉은 영상을 꺼내 보여주었다.비행기는 갑작스럽게 폭발했고, 기체는 바다로 추락했다. 폭발 순간부터 추락까지, 기체에서 탈출한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너무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믿을 수 없어. 당장 조사해! 모든 걸 확인해야 한다고!”도윤은 핸드폰을 꺼내어 지아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그의 손가락은 통제되지 않는 듯 떨렸고, 몇 번이나 시도한 끝에 핸드폰을 꺼냈지만, 그만 손에서 떨어뜨리고 말았다. 진봉은 재빨리 그를 대신해서 핸드폰을 주웠다.“보스...” 도윤은 떨리는 손으로 번호를 눌렀다.아주 익숙한 번호였지만, 듣고 싶지 않은 음성이 들려올 뿐이었다.[연결이 되지 않아, ‘삐’소리 후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되며, 통화료가 부과됩니다.]‘참, 목걸이!’이번에 지아가 떠나기 전에 특별히 준비한 목걸이가 있었다. 목걸이 안에는 위치 추적용 칩이 삽입되어 있었고, 그걸로 그녀를 찾을 수 있을 것이었다. 도윤은 마지막 희망을 안고 위치를 추적하려 했지만, 지아의 위치는 지도에서 사라진 상태였다. 오직 하나, 칩이 바다 깊숙이 가라앉아 신호를 잡을 수 없게 된 듯했다. ‘정말 지아가 바닷속에 묻혔다고?!’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뭔가 잘못된 게 분명해.’ 도윤은 침착한 얼굴로 진환을 찾았다.“지아가 떠난 곳부터 조사해. 그리고 블랙 X, 그들의 흔적을 찾아내! 땅을 파헤쳐서라도 지아를 찾아와야 해. 지아가 죽었다니, 말도 안 된다고!” “예.”“비행기도 준비해. 내가 직접 그 해역으로 가야겠어
어려서부터 혼자 자라다시피한 지윤에게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양옆에서 쌍둥이들이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울어대니, 어떻게 달래야 할지도 몰랐다. ‘나도 무슨 일인지 모르는데...’ 지윤은 무릎을 꿇고 쌍둥이들 눈높이에 맞춰 말했다.“아빠가 나한테도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말해주지 않았어. 그냥 엄마를 안전하게 데리고 오겠다고 했으니까, 우리는 아빠를 믿어야 해.” 지윤이 이렇게 말하자, 쌍둥이는 할 말이 없어졌다.“증조할아버지한테 가야겠어!” 두 아이는 부씨 집안의 영향력을 잘 알고 있었다.이럴 때 도움을 청하지 않으면 언제 하겠는가? 도윤은 부씨 가문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직접 부탁하기 어려웠지만, 쌍둥이는 달랐다. 아이들은 지윤의 손을 붙잡고 부남진의 서재로 달려갔다. 부남진은 멀리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서둘러 나왔다.“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야? 내 새끼들이 왜 이렇게 우는 거야?” 부남진은 다급히 두 아이를 품에 안았다.“증조할아버지, 엄마 좀 구해주세요! 큰일 났어요!”“착하지? 울지 말고 천천히 말해봐. 엄마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지윤은 자신이 아는 선에서 부남진에게 설명했다. 부남진은 더 깊게 묻지 않았고, 곧장 도윤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확인했다. 도윤은 처음에 부남진에게 말하지 않으려 했다. 이 일이 알려지면 걱정하는 사람만 늘어날 뿐이니 말이다. 게다가 부남진은 연로했기 때문에, 일이 확실히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알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직접 나선 상황이니, 어쩔 수 없이 사실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부남진은 곧장 결단을 내렸다.“장경이를 보내마. 지아를 반드시 빨리 찾아야 해!” 섬.지아는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별들이 반짝이는 고요한 밤이었다. 조용한 섬에 들리는 것은 바닷물 소리와 간간이 들려오는 벌레 소리뿐이었다. 지아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아이들과 도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도윤 씨가 나랑 연락이 닿지 않아서
두 사람은 비교적 차분하게 대화를 이어갔지만, 자신의 입장을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그래서 밤이 깊도록 이야기했지만, 문제는 결국 제자리걸음이었다. “이해가 안 돼. 대체 뭘 망설이는 거야? 그 사람을 좋아한다면 다시 결혼하면 될 일 아니야? 내가 유부녀를 데려가겠다는 건 아니니까.”“하지만 네가 그 사람한테 기회를 주지 않는 건, 결국 그 사람을 믿지 못한다는 거잖아? 이전의 실패를 반복하기 싫은 거겠지.”“그럼 왜 나한테는 기회를 주지 않는 거야?”“한대경, 내가 도윤 씨한테 기회를 주지 않는다고 해서, 당신한테 기회를 주겠다는 뜻은 아니야.”“나는 혼자 살면 안 된다는 거야? 결혼이라는 감옥에서 드디어 벗어났는데, 또 다른 구렁텅이로 뛰어들고 싶진 않아.” “정말 그렇다면, 그 사람이랑 밤낮으로 뒹굴진 않았겠지. 결국 네 마음속엔 아직 그 사람을 위한 자리가 있는 거야.”“하지만 네가 믿는 그 사람의 사랑이 얼마나 오래갈 것 같아?”“날 이렇게나 설득하려고 애쓰다니, 참 대단하네. 우리 두 사람이 얼마나 오래 알고 지냈는지 당신이 알기나 해? 내가 자취를 감춘 3년 동안, 그 사람은 단 한 번도 나를 포기하지 않았어. 그게 사랑이 아니면 뭔데?” 한대경이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건 네가 살아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지. 네가 죽었다고 생각했어도 그랬을까?”지아의 얼굴이 굳어졌다.“무슨 뜻이야?” “오는 길에 비행기 갈아탄 거, 기억하지? 첫 번째 비행기가 공중에서 자폭했어. 탑승자 전원 사망, 너도 그중 하나지.” “한대경, 이게 재밌다고 생각해?” 지아는 즉시 몸을 일으켰다.“당신도 알다시피, 우리 할아버지는 연세가 많으셔. 이런 충격을 어떻게 견디시겠냐고!”“그리고 내 아이들... 내 아이들도 하루하루를 눈물로 살 거야.”“날 돌려보내 줘” “너한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서 어쩔 수 없었어. 남자란 다 새로운 걸 좋아하고 오래된 걸 싫어하는 존재야. 이도윤이 네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