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온갖 아첨이 이어졌지만, 지아는 그 어떤 말도 귀담아듣고 싶지 않았다. 도윤은 지아의 미간에 드리운 짜증을 눈치채고는 그녀 옆에 앉아 불필요한 접대를 막아주었다. 사람이란 원래 이런 것이다. 힘이 있을 때는 모두가 달려들고, 몰락했을 때는 수십 년 지기 친구조차 순식간에 등을 돌린다. 그래서 쓸모없는 인간관계에 애쓰는 것은 무의미하다. 진정한 굳건함은 오로지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아의 시선이 멀리서 식사하는 미셸에게 향했다.그녀는 여전히 이전과 같은 거만한 태도로 잘난 척을 하고 있었다. 지아가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가끔은 낯가죽이 두꺼운 게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면 그만이니까.” 그녀의 말처럼, 화연과 미셸은 사뭇 다른 길을 걸어왔다. 화연은 어릴 적부터 하씨 가문이라는 불안정한 환경에서 온갖 고생을 하며 성격이 지나치게 소심해졌다. 도윤이 그녀에게 케이크 한 조각을 건네며 말했다.“하씨 가문은 미셸이 상상하는 그런 따뜻한 안식처가 아니야. 늑대의 소굴이나 다름없는 곳이지. 곧 가슴 치며 우는 날이 올 거야.” 지아의 시선을 느낀 미셸이 뻔뻔하게 그녀의 앞으로 걸어왔다. 미셸은 자기 행동에 대해 스스로 만족하는 듯, 입가에 얄미운 미소를 띤 채 말했다.“봐, 내가 다시 돌아왔잖아. 내 배 속에 있는 아이를 너희가 뭐 어쩔 건데? 하용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어르신 위에 설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나는 천성적으로 귀한 몸이라고.”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화연을 흘깃 쳐다보며 비웃었다.“저런 천한 것과는 다르지. 용포를 입으면 뭐 해? 태자 같지 않은데.” 외모만 보면 화연이 미셸을 훨씬 능가했지만, 미셸의 말처럼 화연은 아직 자신감이 부족해 보였다. 수억 원의 드레스를 입고 있어도, 얼굴에는 어딘가 주눅 든 기색이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반면, 지아는 어릴 적부터 소계훈의 교육을 받으며 자연스럽게 귀한 아가씨의 품격을 익혀 왔다. 그래서 이런 고급 연회
지아는 원래 남의 불행을 즐기며 공격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미셸은 스스로 나서서 모욕을 자초했고, 결국 수많은 시선을 뒤로한 채 쓸쓸히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에도 화연은 미셸을 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을 느꼈다.물론 그 두려움 속에는 분노와 증오도 자리하고 있었다. 미셸에게 맞아 유산했던 기억... 먼저 세상을 떠난 아이는 여전히 그녀의 악몽 속을 떠돌고 있었다. 민연주가 그녀의 손등을 두드렸다.“화연아, 무서워할 거 없어. 지금의 너는 부씨 가문의 아가씨잖아. 저 여자는 더 이상 너를 다치게 할 수 없을 거야.” 화연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엄마, 저 여자가 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는데도 처벌할 방법이 없는 거예요?” “이번 일에는 하씨 가문이 얽혀 있어서, 겉으로는 손을 댈 수 없지만...”순간, 민연주의 얼굴에 차가운 그림자가 스쳤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아졌고, 눈빛에는 싸늘한 결의가 서렸다.“저 여자가 모습을 드러낸 이상, 도망칠 곳은 없을 거야.” 연회가 끝난 후, 하용은 전용 밴으로 불려 갔다. 하광은 양손으로 지팡이를 짚은 채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물었다. 차 안이 숨조차 쉴 수 없는 무거운 분위기로 바뀌는 순간이었다.“미셸을 어떻게 할 생각이지?” 하용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답했다.“죽였으면 합니다.” “반대하진 않으마. 하지만 지금은 안 돼. 나는 우선 그 여자가 하씨 가문의 아이를 낳게 할 생각이야. 그 후에는 부씨 가문으로 돌려보낼 테니, 그다음은 네 마음대로 해라. 하지만 남은 몇 달 동안은...” “그럴 수 없습니다. 그 여자는 화연이의 아이를 죽였어요. 저는 그 아이를 낳게 두지 않을 겁니다!” 찰싹!하광이 단호한 손길로 하용의 뺨을 후려쳤다.“네가 정말 화연이한테 정신이 팔린 모양이구나! 미셸이 어떤 사람인지는 논하지 않으마. 다만, 그 여자의 배 속에 있는 아이는 네 아이이기도 해. 네 동생이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건 너도 잘 알 거라 믿는다. 하씨 가문은 대를 이을 혈육
“저 배은망덕한 놈! 변덕스럽고 의리 없는 게 꼭 제 어미를 닮았어. 처음부터 널 낳는 게 아니었어!” “하용, 부씨 가문이 널 받아줄 것 같으냐? 꿈 깨라! 하씨 가문이 없으면,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화연과 오래 붙어먹더니 너까지 순진해진 모양이구나. 이 세상은 이익이 전부야! 그렇게 하면 너한테 남는 게 대체 뭐냐고!” 앞길을 가로막는 눈보라가 하용의 시야를 흐리게 했다. 얇은 옷을 걸친 그는 온몸이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펑펑 내리는 눈 속,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녀가 서 있었다. 두툼한 모피 코트를 걸친 그녀는 하용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화연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자, 하용은 그녀가 넘어질까 염려하며 재빨리 달려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두 사람은 눈보라 속에서 서로를 꼭 껴안았다.“하용 오빠, 미안해요.” “화연아, 난 이렇게 행복했던 적이 없어. 드디어 하씨 가문이라는 굴레를 벗어났으니, 이제부터는 나 자신을 위해서 살아보고 싶어.” “오빠, 내가 오빠의 곁에 있을게요.”“그래.”지아와 도윤은 멀리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도윤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이만 들어가자. 두 사람이 같이 있으니 괜찮을 거야.” 가로등 아래, 도윤은 지아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보았다. “순수한 사랑은 항상 아름다워. 그래서 더더욱 보호하고 싶어지지. 나는 지금도 가장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게, 그때 병원에서 고모님을 막았던 거야.” 지아는 자신의 과거를 떠올렸다. 적어도 그녀의 사랑은 항상 비참한 모습으로 끝났지만, 화연만큼은 하용의 변함없는 사랑을 받으며 살 것이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도윤은 가문과 능력 면에서 하용을 능가했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자신이 완전히 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자.”지아는 시선을 거둔 후 떠났고, 미셸은 스스로를 파멸의 길로 몰고 있었다. 인생은 자신이 선택한 길을 걷는 것이고, 한 번 선택한 길은 되돌릴 수 없는 법이다. 수많은 일을 겪은 지아는 지금의 삶
한편, 지아는 부남진의 곁에서 침을 놓고 있었다. 집사가 밖의 상황을 보고하자, 부남진은 눈도 뜨지 않고 말했다. “무릎 꿇는 걸 좋아하는 모양인데, 내버려둬.” 집사가 밖의 날씨를 흘끗 보며 말했다.“오늘 밤 기온이 영하 15도까지 떨어질 겁니다. 오래 무릎을 꿇으면...” “무릎 꿇다 죽어도 싼 인간들이야.”부남진이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부남진은 그 시절 아직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지아가 남의 집 대문 앞에서 밤새 무릎을 꿇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의 지아는 너무도 순진했다. 진심으로 사람들을 감동하게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인데, 부남진은 그 시절의 지아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무거웠다. 당시의 지아는 과거의 의리를 생각하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여겼지만, 상대의 생각은 달랐다. 엄한 가문의 미움을 살까 봐 두려웠던 것이 아니라, 그저 끼어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게다가 승승장구하며 자신들이 우위에 있다고 믿었던 우명석은 소씨 가문을 철저히 외면했다. 그때 집사가 우명석에게 상황을 전했을 때, 우명석은 차를 마시며 태연하게 말했다.“무릎을 꿇고 싶다면 꿇게 둬. 아직 젊으니까 벽에 부딪혀도 봐야지.” 그는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지아를 고립된 더 깊은 절망 속으로 밀어 넣었다. 강력한 지위와 권력을 가진 부남진이 우명석의 마음을 모를 리가 없었다. 부남진은 우씨 가문의 세 사람이 스스로 무릎을 꿇게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들이 부씨 가문의 대문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얼어 죽는다고 해도, 그 일을 세상에 폭로할 사람도 없었다. 지아가 마지막 침을 놓자, 부남진이 지아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얘, 고생 많았다. 이 할아버지가 너를 좀 더 일찍 찾았더라면, 네가 그런 시련을 겪지 않아도 됐을 텐데...” “괜찮아요, 할아버지. 이미 다 지나간 일이잖아요. 사실 제 양아버지는 제게 정말 잘해주셨어요. 오히려 어릴 적부터 파산하기 전까지는 귀중한 공주처럼 자랐으니까요. 오히려 고모님의 처지가 더 안타
밤이 깊어질수록 눈보라는 더욱 거세졌다. 기온은 급격히 떨어졌고, 김혜정이 입고 있던 밍크코트는 이미 눈으로 뒤덮였다.그녀는 수년간 우씨 가문의 안주인으로 살아오면서 자신이 이렇게 모욕적인 상황에 부닥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었다. 두 시간이 지나자, 김혜정은 끝내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 경호원들이 그녀를 차로 옮기자, 부씨 가문의 집사가 단호히 말했다.“부씨 가문의 모든 분은 주무시는 중입니다. 오늘 밤에는 문을 열 일이 없을 겁니다.” 우명석은 결국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무거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부남진은 침묵으로 그에게 메시지를 보낸 셈이었다.‘협상 불가!’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도윤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그가 냉혹한 목소리로 지시했다.“진환, 우씨 가문의 좋은 날은 오늘로 끝이야. 당장 가서 우씨 가문의 약점을 알아봐!” “예.”우명석은 퇴직했다고 해서 모든 것이 깨끗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저 운이 좋아서 정계 생활을 무사히 마친 거겠지.’ “우명석은 교활한 인간이야. 그 사람의 아들을 공략해!” “알겠습니다.”‘우명석이라는 배후를 가진 우창민이라면 더더욱 흥미로운 결과가 나올 거야.’ 이튿날 아침, 도윤과 부남진은 동시에 비밀리에 작성된 보고서를 손에 쥐게 되었다. 조사 결과를 확인한 부남진의 얼굴이 즉시 굳어졌다. “우씨 가문의 악행은 정말이지 끝이 없구먼!” 우명석은 단순히 뇌물수수와 부패에 그쳤지만, 그의 아들 우창민은 그야말로 인간 이하의 삶을 살고 있었다. 불법 도박, 매춘, 그리고 조직 폭력까지... 심지어 그의 아내와 관련된 사건은 더욱 끔찍했다. 우창민은 대학 시절 몇 년 동안 교내 미인을 쫓아다녔다. 하지만 그 여학생은 이미 약혼까지 한 상태였고, 우창민은 그녀가 결혼하기 전날 그녀를 폭행했다. 피해자의 약혼자는 고소를 시도했지만, 우창민의 손에 의해 불구가 되었고, 결국 그 여학생은 우창민과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다행히도 시체 냄새는 아니었다. 오랜 시간 환기되지 않은 습기와 썩어가는 음식의 악취였다.쇠사슬에 묶인 한 여성이 침대 위에 웅크린 모습이 보였다.뼈만 남은 듯한 앙상한 몸과 비정상적으로 창백한 피부, 그녀는 온몸에 생기를 잃고 멍하니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민정아!!”도우명은 휠체어를 굴려 다급히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지아는 많은 풍파를 겪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끔찍한 광경 앞에서는 동요를 감출 수 없었다. ‘우창민은 정말 인간도 아니야! 남의 가정을 파탄 내고 억지로 빼앗은 아내를 귀하게 여기기는커녕 학대해서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까!’ 민정은 오랜 시간 감금된 탓에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그저 눈앞의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볼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눈가가 붉어진 지아는 사람들에게 담요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지아는 거의 벗은 상태였던 민정의 몸을 조심스럽게 담요로 감쌌다.도우명도 민정을 소중히 여기며, 미동도 없이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또 한 번 진정시키듯 속삭였다.“민정아, 두려워하지 마. 내가 왔어. 이제는 괜찮을 거야.” 지아는 두 사람을 병원으로 옮긴 후, 병원 밖으로 나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전에는 세상에서 내가 가장 불쌍한 사람인 줄 알았어. 하지만 나만큼이나, 아니 나보다 더 비참한 사람들이 너무도 많은 것 같아.’도윤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위로했다.“걱정하지 마. 내가 우씨 가문을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마음이 약해진 아버지가 우씨 가문을 돕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버지도 자기 행동으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상처받게 될 줄 아셨다면, 틀림없이 후회하셨을 거야.”“지아야, 이 세상에는 우씨 가문과 같은 가문이 훨씬 더 많을 거야. 태양은 온 세상을 비추지만, 여전히 어둠 속에는 숨어 있는 수많은 벌레가 존재하잖아.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는 법이고.” “하긴, 이만 돌아가자.”지아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지금 자신이 누리는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깨달았다.오후가
지아는 멍하니 복도에 앉아 있었다.‘왜 하필 지금이지?’ 딸랑- 딸랑-잔잔한 종소리와 함께 무무가 지아의 곁으로 다가왔다. 무무는 지아의 안색이 좋지 않음을 눈치채고는 조심스레 그녀의 손바닥에 머리를 비비며 애교를 부렸다. 무무는 산골 마을에서 오래 머물렀던 덕분에 동물들과 친근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 아이의 행동 중 많은 것이 동물과 비슷하기도 했다. 지아는 무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왜 언니, 오빠들이랑 안 놀아?” 무무는 고개를 저으며 손짓으로 답했다.“엄마가 걱정돼서요.”어른들이 나눈 대화를 어렴풋이 들었는지, 지아가 남의 일로 슬퍼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말하지 못하는 무무였지만, 따뜻한 마음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지아는 딸을 품에 안으며 속삭였다.“엄마는 괜찮아. 그냥 세상에 어떤 사람들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어서, 엄마가 도울 수 없더라고.”“하지만 엄마 주변에 있는 사람들만큼은 엄마가 지키고 싶어.” 지아가 잠시 말을 멈추고 난색을 보였다.“그런데 말이야, 엄마가 잠시 집을 떠나야 할 것 같아. 2, 3일이면 되는데, 그동안 아버지랑 잘 지낼 수 있지? 엄마는 곧 돌아올 거야.”무무는 내심 엄마가 떠나지 않기를 바랐으나, 지아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또 손짓했다.“엄마가 어떤 선택을 하든, 엄마를 응원할 거예요!” 지아가 무무의 얼굴에 입을 맞췄다.“역시 우리 무무야.” 무무는 지아의 가장 아픈 손가락이었다. 무무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지아를 바라보았다.그날 밤 지아는 아이들에게 동화를 들려주며 세 아이를 모두 재웠다. 그러고는 지윤의 방에 갔는데, 지윤은 한참 책을 읽고 있었다. 지아는 지윤과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고, 자신이 며칠 동안 집을 비울 예정이라는 사실도 털어놓았다.지윤은 지아의 말을 듣고 동생들을 잘 돌보겠다는 약속을 했다. 모든 준비를 마친 지아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도윤은 오랫동안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 같았다
목걸이는 화려하거나 복잡하지 않고, 살아 움직이는 듯한 작은 물고기 모양이었다. 지아는 고개를 들어 도윤의 옆모습에 입을 맞추었다.“마음에 들어, 고마워.”늦게 일어난 지아는 일어나 깔끔하게 단장한 후, 아이의 방을 살펴보고 나서야 조용히 집을 나섰다. 도윤이 배웅해 주겠다고 했지만, 지아는 단호히 거절했다. 그녀는 혼자서 부두로 향했다. 그곳에서 환승한 후, 비행기를 타고 섬으로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지아는 다른 얼굴로 변장한 채 쾌속정을 타고 있었다. 깊은숨을 들이쉬자 코안에 차가운 공기가 가득 찼다. 몇 번의 환승 끝에 약속 장소에 도착한 지아는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시억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시억의 사지가 멀쩡한 것을 본 지아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저를 기다리려고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그럼요, 이번 S등급 임무에는 단 세 명만 왔으니까요.” “나머지는 누구예요?” “도착하면 알게 될 거예요.” 지아는 시억과 대화를 나누면서 그가 ‘블랙 X’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음을 느꼈다. 그래서 자연스레 보스에 대한 것을 다시 물어보았다. “보스한테 왜 그렇게 신경 쓰는 거예요? 혹시,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지아의 눈동자가 별빛처럼 반짝였다,“그 정도 실력으로 블랙 X를 조직했다면 존경하지 않을 수 없잖아요.” “만약 보스가 여자라면요?”시억이 의도를 알 수 없는 말을 던졌다. 지아는 순간 멍해졌지만 곧 대답했다.“그래도 존경하죠.” 그녀는 시억의 표정에서 어떤 단서를 찾으려 했지만, 그 역시 인조 얼굴을 쓰고 있어서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지아의 마음속에 약간의 경계심이 일렁이기 시작했다.‘설마... 블랙 X의 보스가 흑막의 주인공일 리는 없겠지?’하지만 곧 이 생각을 떨쳐냈다. ‘아니야, 블랙 X는 실패한 후에 완전히 손을 뗐었잖아. 정말 그 사람이었다면 죽을 때까지 끝을 보려고 했을 거야.’ “남자든 여자든, 이번에는 얼굴을 드러낼 거예요. 곧 알 수 있겠네요.” 석양이 질 무렵, 두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