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식간에 지아에게 쏟아지던 시선이 금청에게 향했다.그녀가 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한 얼굴로 부남진을 바라보자, 그가 말했다.“괜찮습니다. 본 대로 말해보세요.” 분명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 순간 부남진의 태도는 이웃집 할아버지처럼 따뜻하고 편안했다. 금청은 곁눈으로 기범을 한번 보았다. 상황이 여기까지 온 이상, 기범도 별다른 방법이 없지 않겠는가.‘오늘 이 연회에 초대받은 건 형님이 힘을 쏟은 덕분인데...’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군!’ 결국 그는 포기한 듯 말했다.“그냥 사실대로 말씀드려.” 금청은 어쩔 수 없이 모든 것을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했지만, 김혜정은 그 이야기에 만족하지 않았다.“각하, 두 사람이 동창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객관적이지 못한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객관적이지 못한 부분이라뇨? 당신이 조금 전까지 지아가 스폰서를 따라 들어온 사람이라고 모욕했던 것까지 부인하려고요? 지아의 신분이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다며 대놓고 비하한 거, 여기 있던 모두가 들었습니다. 높은 지위에 있다고 사람을 무시한 거 아닙니까?” “그만해.”기범이 낮은 목소리로 상황을 중단시키려 했다. 하지만 우명석이 온화한 미소를 띤 채, 차분하게 말했다.“죄송합니다, 각하. 사소한 일로 폐를 끼쳤습니다. 애초에 인사를 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모두 제 잘못입니다.” 우명석은 연배를 앞세워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 사과하는 척하며, 지아를 더 곤란하게 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간과했다. 그것은 바로... 부남진의 얼굴에 분노가 어리진 않았지만, 그의 태도에는 차가운 불만이 엿보였다는 것!“사소한 일? 내가 소중히 여기는 부씨 가문의 사람이 모욕당했는데, 그게 사소한 일이라고요?” 우명석의 미소가 굳어졌다.“부씨 가문이요?” 부남진이 지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지아야, 이리 오거라.” 그녀는 침착한 걸음으로 그의 곁에 걸어가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할아버지
그토록 화려해 보이던 우씨 가문 사람들은, 찰나의 경솔한 말로 자신들의 앞날을 송두리째 망쳐버렸다. 연회장 한쪽에서는 과거에 지아를 괴롭혔던 몇몇 사람들이 몸을 떨고 있었다. 혹시라도 그녀가 이번 일을 계기로 자신들에게 복수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었다. 그들의 시선은 더 이상 경멸이 아니라 연민으로 바뀌었다.‘바람 부는 A시에서 아무리 높은 곳에 올라간들 무슨 소용이야?’ ‘예로부터 천하가 왕의 땅인 것처럼, 부남진 각하께서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우씨 가문에게 그랬던 것처럼 몰락시켜 버리면 그만인데!’ 금청은 멀어지는 지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지아가 갑자기 부씨 가문의 사람이 되었다고?” “그들만의 비밀이 있겠지만, 우리가 무슨 수로 알겠어? 하지만 지금 지아의 모습을 보니, 옛날에 학교 다닐 때의 지아가 떠오르긴 하네. 아니, 오히려 지금이 훨씬 더 빛나 보여.” 금청이 그의 팔을 꼬집었다.“아직도 지아를 좋아하는 거야?” “벌써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그럴 리가? 그때는 단지 아름다운 것에 대한 호감이었을 뿐이야. 하지만 지아가 이 자리에 있는 걸 보니까 진심으로 기쁘네.”지아는 이 자리에 오기까지 수많은 시련을 겪었지 않은가. 그녀는 누구보다도 지금의 모든 것을 누릴 자격이 있었다. 금청은 문득 자신이 이제껏 품어왔던 감정이 허무하다는 것을 깨달았다.‘지아는 원래부터 저렇게 뛰어난 사람이었어. 그런 지아를 질투하다니, 내가 왜 그랬을까?’ 하지만 그녀와 달리, 미셸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미셸은 과거 친밀했던 친구들과의 채팅방에서 오늘 부씨 가문에서 열리는 가족 연회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미셸의 친구들은 아직 부씨 가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지만, 궁금한 마음에 미셸에게 연회에 관해 물어보았다. 그래서 잠시 고민하던 미셸이 연회장에 오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나한테 그렇게 잘해주시던 부모님이 정말 나를 버렸을 리 없어. 우리가 함께 살아온 세월이 얼만데...’ ‘개를 키워도
미셸은 부남진의 차가운 두 눈을 마주하며, 이미 부남진에게서 어떠한 부녀의 정조차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애초에 이런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지난 수년간 사랑받던 천국에서 하루아침에 지옥으로 떨어진 듯한 이 감정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버지...”“나는 네 아버지인 적이 없었어. 자중하거라.” 미셸이 화연에게 저지른 일을 알고도, 부남진이 미셸을 갈기갈기 찢어놓지 않은 것은 이미 인내심의 끝이라고 할 수 있었다. 민연주가 막 입을 열려던 찰나, 미셸이 아무런 예고 없이 하씨 가문의 어르신 앞에 무릎을 꿇었다!이 행동은 모두를 놀라게 했지만, 지아는 곧 그녀의 의도를 깨달았다. ‘미셸, 어리석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조금 영리하게 움직이는구나.’ 지아는 일찍이 미셸의 가족이 깊은 산속에 있거나, A시를 몰래 떠나 해외로 도망쳤을 가능성을 생각했다. 하지만 후자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왜냐하면 부씨 가문과 하씨 가문이 그녀의 가족들이 떠나는 모든 경로를 철저히 차단했기 때문이었다. 설령 운 좋게 떠났다고 하더라도, 다시는 고국으로 돌아올 수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대대로 이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이주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미셸의 가족이 어느 산속에 숨어 있을 거라고 예상했던 것이었다. 게다가 미셸의 성격을 잘 아는 지아는, 수년간 부유한 삶을 누려온 사람이 가난한 삶을 견딜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미셸이 산에서 내려와 어떤 소비를 한다면, 바로 하용에게 발각될 터였다. 게다가 하용은 이미 그녀를 위해 ‘칼’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그런데 미셸은 혈로를 뚫고야 말았다. 그것은 바로 그녀 배 속의 아이가 하씨 가문의 핏줄이라는 것! 미셸이 오늘 연회장에 나타난 이유는 뻔했는데, 부남진 같은 사람이 사람들 앞에서 하씨 가문의 명예를 깎아내리지는 않을 테니 도박을 한 것이었다.‘이렇게 하면 하씨 가문은 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거야.’“어르신, 제가 지금은 부씨
하용은 미셸이 나타나자마자 이를 갈며 분노를 억누르고 있었는데, 미셸이 과거에 화연에게 저질렀던 일들이 아직도 눈에 선한 듯했다. 부남진과 민연주기 서로 눈을 마주쳤다.두 사람은 모두 특별한 신분을 가진 만큼, 가문의 추문을 사람들 앞에서 드러낼 수 없었다.괜히 말을 꺼냈다는 불필요한 조롱거리로 전락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지아가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그동안 제법 똑똑해졌나 보네요.”도윤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아주 미세한 차이일 뿐이지, 별거 아니야.” “하긴.” 지아가 차가운 시선으로 상황을 지켜보았다. 미셸이 저지른 짓들은 그녀에게 동정의 여지조차 남지 않은 듯했다.반면, 미셸이 이미 한 수를 던졌으니, 이제는 하광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만 남아 있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은 채 앞으로 나아갔다. 불쌍해 보이려는 의도가 뻔히 드러난 모습이었다.“어르신, 제발 저를 받아주세요. 만약 어르신께서도 저를 외면하신다면, 저는 정말 갈 곳이 없어요. 제발 저와 뱃속의 아이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이 아이는 이미 3개월이 되었단 말이에요.” 그녀의 말은 하광을 궁지로 몰아넣는 듯했다. 그는 절대 부남진을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미셸의 배 속에 아이가 있는 이상, 뾰족한 수는 없었다. 미셸은 이를 정확히 계산하고 있었다.‘체면을 중시하는 사람이니, 이런 자리에서 나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을 거야! 체면을 버린 사람은 세상의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법이니까!’ 하씨 가문 사람들은 아주 난처한 표정을 지었고, 하광은 복잡한 생각 끝에 결정을 내렸다. “각하, 이 혼사가 깨지긴 했지만, 저희 하씨 가문은 책임을 회피하지 않을 겁니다. 저 아이를 하씨 가문에서 데려가 잘 돌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부씨 가문과 하씨 가문을 오가며 움직였다. 그들은 모두 이 사건 뒤에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직감을 느꼈고, 호기심과 가십에 대한 열망이 들끓는 눈빛을 드러냈다. 하지만 부남진은 이
세상에 아무런 대가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미셸은 자기가 자식을 가진 어머니로서 하씨 가문에서 입지를 다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하씨 가문은 분명 어머니는 버리고 자식만 남기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을 것이었다. 게다가 하용은 그녀와 아기가 모두 사라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만약 미셸이 이미 위기에서 벗어났다면, 깊은 산속에서 출산을 기다리는 것이 용이나 호랑이의 굴처럼 위험한 곳에서 삶을 구걸하는 것보다 나았을 것이었다. 한때는 지아도 소계훈의 손바닥 위에서 귀하게 키워진 보물이었다. 하지만 끝내 그녀는 가정을 책임지기 위하여 분주히 뛰어다녀야 했다. 하지만 미셸처럼 단 하루의 고난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미셸은 결국 자신의 탐욕 때문에 무너질 것이었는데, 이 점에서는 이명란만큼의 지혜도 없다고 할 수 있었다.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준비했던 어머니조차 서슴없이 배신했으니 말이다. 결국 그런 사람은 자기 행동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되어있다. 지아는 손에 든 와인잔을 흔들며, 차갑고 무심한 표정을 보였다. “지아야, 정말 오랜만이네. 네가 이렇게 잘 지내는 모습을 보니,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양기범이 여금청과 함께 다가왔다. 금청은 지아의 시선을 마주하자, 얼굴에 미묘한 죄책감을 띠었다. 그녀는 더듬거리며 말했다.“지아야, 그때는 정말 미안했어. 정말 그때 네 아버지가 나타나실 줄은 몰랐어. 그럴 줄 알았더라면, 절대 그런 일은...” “나도 알아.”금청은 단순히 지아를 탐탁지 않게 여겼을 뿐, 살인이나 방화 같은 잔인한 짓을 벌일 마음은 전혀 없었다. 게다가 금청이 아니었더라도, 소계훈은 결국 모든 진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었다. “이미 다 지나간 일이고, 너도 받을 만큼의 벌을 받았잖아.” 금청은 지아를 똑바로 볼 수 없었다. 비록 그녀는 목숨을 부지했지만, 이씨 가문은 흩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숙인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늘 직접 사과하고 싶었는데, 오늘에서야 이렇게 말하게 됐네. 내가
사람들의 온갖 아첨이 이어졌지만, 지아는 그 어떤 말도 귀담아듣고 싶지 않았다. 도윤은 지아의 미간에 드리운 짜증을 눈치채고는 그녀 옆에 앉아 불필요한 접대를 막아주었다. 사람이란 원래 이런 것이다. 힘이 있을 때는 모두가 달려들고, 몰락했을 때는 수십 년 지기 친구조차 순식간에 등을 돌린다. 그래서 쓸모없는 인간관계에 애쓰는 것은 무의미하다. 진정한 굳건함은 오로지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아의 시선이 멀리서 식사하는 미셸에게 향했다.그녀는 여전히 이전과 같은 거만한 태도로 잘난 척을 하고 있었다. 지아가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가끔은 낯가죽이 두꺼운 게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면 그만이니까.” 그녀의 말처럼, 화연과 미셸은 사뭇 다른 길을 걸어왔다. 화연은 어릴 적부터 하씨 가문이라는 불안정한 환경에서 온갖 고생을 하며 성격이 지나치게 소심해졌다. 도윤이 그녀에게 케이크 한 조각을 건네며 말했다.“하씨 가문은 미셸이 상상하는 그런 따뜻한 안식처가 아니야. 늑대의 소굴이나 다름없는 곳이지. 곧 가슴 치며 우는 날이 올 거야.” 지아의 시선을 느낀 미셸이 뻔뻔하게 그녀의 앞으로 걸어왔다. 미셸은 자기 행동에 대해 스스로 만족하는 듯, 입가에 얄미운 미소를 띤 채 말했다.“봐, 내가 다시 돌아왔잖아. 내 배 속에 있는 아이를 너희가 뭐 어쩔 건데? 하용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어르신 위에 설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나는 천성적으로 귀한 몸이라고.”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화연을 흘깃 쳐다보며 비웃었다.“저런 천한 것과는 다르지. 용포를 입으면 뭐 해? 태자 같지 않은데.” 외모만 보면 화연이 미셸을 훨씬 능가했지만, 미셸의 말처럼 화연은 아직 자신감이 부족해 보였다. 수억 원의 드레스를 입고 있어도, 얼굴에는 어딘가 주눅 든 기색이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반면, 지아는 어릴 적부터 소계훈의 교육을 받으며 자연스럽게 귀한 아가씨의 품격을 익혀 왔다. 그래서 이런 고급 연회
지아는 원래 남의 불행을 즐기며 공격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미셸은 스스로 나서서 모욕을 자초했고, 결국 수많은 시선을 뒤로한 채 쓸쓸히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에도 화연은 미셸을 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을 느꼈다.물론 그 두려움 속에는 분노와 증오도 자리하고 있었다. 미셸에게 맞아 유산했던 기억... 먼저 세상을 떠난 아이는 여전히 그녀의 악몽 속을 떠돌고 있었다. 민연주가 그녀의 손등을 두드렸다.“화연아, 무서워할 거 없어. 지금의 너는 부씨 가문의 아가씨잖아. 저 여자는 더 이상 너를 다치게 할 수 없을 거야.” 화연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엄마, 저 여자가 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는데도 처벌할 방법이 없는 거예요?” “이번 일에는 하씨 가문이 얽혀 있어서, 겉으로는 손을 댈 수 없지만...”순간, 민연주의 얼굴에 차가운 그림자가 스쳤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아졌고, 눈빛에는 싸늘한 결의가 서렸다.“저 여자가 모습을 드러낸 이상, 도망칠 곳은 없을 거야.” 연회가 끝난 후, 하용은 전용 밴으로 불려 갔다. 하광은 양손으로 지팡이를 짚은 채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물었다. 차 안이 숨조차 쉴 수 없는 무거운 분위기로 바뀌는 순간이었다.“미셸을 어떻게 할 생각이지?” 하용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답했다.“죽였으면 합니다.” “반대하진 않으마. 하지만 지금은 안 돼. 나는 우선 그 여자가 하씨 가문의 아이를 낳게 할 생각이야. 그 후에는 부씨 가문으로 돌려보낼 테니, 그다음은 네 마음대로 해라. 하지만 남은 몇 달 동안은...” “그럴 수 없습니다. 그 여자는 화연이의 아이를 죽였어요. 저는 그 아이를 낳게 두지 않을 겁니다!” 찰싹!하광이 단호한 손길로 하용의 뺨을 후려쳤다.“네가 정말 화연이한테 정신이 팔린 모양이구나! 미셸이 어떤 사람인지는 논하지 않으마. 다만, 그 여자의 배 속에 있는 아이는 네 아이이기도 해. 네 동생이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건 너도 잘 알 거라 믿는다. 하씨 가문은 대를 이을 혈육
“저 배은망덕한 놈! 변덕스럽고 의리 없는 게 꼭 제 어미를 닮았어. 처음부터 널 낳는 게 아니었어!” “하용, 부씨 가문이 널 받아줄 것 같으냐? 꿈 깨라! 하씨 가문이 없으면,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화연과 오래 붙어먹더니 너까지 순진해진 모양이구나. 이 세상은 이익이 전부야! 그렇게 하면 너한테 남는 게 대체 뭐냐고!” 앞길을 가로막는 눈보라가 하용의 시야를 흐리게 했다. 얇은 옷을 걸친 그는 온몸이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펑펑 내리는 눈 속,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녀가 서 있었다. 두툼한 모피 코트를 걸친 그녀는 하용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화연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자, 하용은 그녀가 넘어질까 염려하며 재빨리 달려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두 사람은 눈보라 속에서 서로를 꼭 껴안았다.“하용 오빠, 미안해요.” “화연아, 난 이렇게 행복했던 적이 없어. 드디어 하씨 가문이라는 굴레를 벗어났으니, 이제부터는 나 자신을 위해서 살아보고 싶어.” “오빠, 내가 오빠의 곁에 있을게요.”“그래.”지아와 도윤은 멀리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도윤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이만 들어가자. 두 사람이 같이 있으니 괜찮을 거야.” 가로등 아래, 도윤은 지아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보았다. “순수한 사랑은 항상 아름다워. 그래서 더더욱 보호하고 싶어지지. 나는 지금도 가장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게, 그때 병원에서 고모님을 막았던 거야.” 지아는 자신의 과거를 떠올렸다. 적어도 그녀의 사랑은 항상 비참한 모습으로 끝났지만, 화연만큼은 하용의 변함없는 사랑을 받으며 살 것이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도윤은 가문과 능력 면에서 하용을 능가했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자신이 완전히 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자.”지아는 시선을 거둔 후 떠났고, 미셸은 스스로를 파멸의 길로 몰고 있었다. 인생은 자신이 선택한 길을 걷는 것이고, 한 번 선택한 길은 되돌릴 수 없는 법이다. 수많은 일을 겪은 지아는 지금의 삶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