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은 부남진의 차가운 두 눈을 마주하며, 이미 부남진에게서 어떠한 부녀의 정조차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애초에 이런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지난 수년간 사랑받던 천국에서 하루아침에 지옥으로 떨어진 듯한 이 감정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버지...”“나는 네 아버지인 적이 없었어. 자중하거라.” 미셸이 화연에게 저지른 일을 알고도, 부남진이 미셸을 갈기갈기 찢어놓지 않은 것은 이미 인내심의 끝이라고 할 수 있었다. 민연주가 막 입을 열려던 찰나, 미셸이 아무런 예고 없이 하씨 가문의 어르신 앞에 무릎을 꿇었다!이 행동은 모두를 놀라게 했지만, 지아는 곧 그녀의 의도를 깨달았다. ‘미셸, 어리석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조금 영리하게 움직이는구나.’ 지아는 일찍이 미셸의 가족이 깊은 산속에 있거나, A시를 몰래 떠나 해외로 도망쳤을 가능성을 생각했다. 하지만 후자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왜냐하면 부씨 가문과 하씨 가문이 그녀의 가족들이 떠나는 모든 경로를 철저히 차단했기 때문이었다. 설령 운 좋게 떠났다고 하더라도, 다시는 고국으로 돌아올 수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대대로 이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이주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미셸의 가족이 어느 산속에 숨어 있을 거라고 예상했던 것이었다. 게다가 미셸의 성격을 잘 아는 지아는, 수년간 부유한 삶을 누려온 사람이 가난한 삶을 견딜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미셸이 산에서 내려와 어떤 소비를 한다면, 바로 하용에게 발각될 터였다. 게다가 하용은 이미 그녀를 위해 ‘칼’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그런데 미셸은 혈로를 뚫고야 말았다. 그것은 바로 그녀 배 속의 아이가 하씨 가문의 핏줄이라는 것! 미셸이 오늘 연회장에 나타난 이유는 뻔했는데, 부남진 같은 사람이 사람들 앞에서 하씨 가문의 명예를 깎아내리지는 않을 테니 도박을 한 것이었다.‘이렇게 하면 하씨 가문은 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거야.’“어르신, 제가 지금은 부씨
하용은 미셸이 나타나자마자 이를 갈며 분노를 억누르고 있었는데, 미셸이 과거에 화연에게 저질렀던 일들이 아직도 눈에 선한 듯했다. 부남진과 민연주기 서로 눈을 마주쳤다.두 사람은 모두 특별한 신분을 가진 만큼, 가문의 추문을 사람들 앞에서 드러낼 수 없었다.괜히 말을 꺼냈다는 불필요한 조롱거리로 전락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지아가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그동안 제법 똑똑해졌나 보네요.”도윤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아주 미세한 차이일 뿐이지, 별거 아니야.” “하긴.” 지아가 차가운 시선으로 상황을 지켜보았다. 미셸이 저지른 짓들은 그녀에게 동정의 여지조차 남지 않은 듯했다.반면, 미셸이 이미 한 수를 던졌으니, 이제는 하광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만 남아 있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은 채 앞으로 나아갔다. 불쌍해 보이려는 의도가 뻔히 드러난 모습이었다.“어르신, 제발 저를 받아주세요. 만약 어르신께서도 저를 외면하신다면, 저는 정말 갈 곳이 없어요. 제발 저와 뱃속의 아이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이 아이는 이미 3개월이 되었단 말이에요.” 그녀의 말은 하광을 궁지로 몰아넣는 듯했다. 그는 절대 부남진을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미셸의 배 속에 아이가 있는 이상, 뾰족한 수는 없었다. 미셸은 이를 정확히 계산하고 있었다.‘체면을 중시하는 사람이니, 이런 자리에서 나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을 거야! 체면을 버린 사람은 세상의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법이니까!’ 하씨 가문 사람들은 아주 난처한 표정을 지었고, 하광은 복잡한 생각 끝에 결정을 내렸다. “각하, 이 혼사가 깨지긴 했지만, 저희 하씨 가문은 책임을 회피하지 않을 겁니다. 저 아이를 하씨 가문에서 데려가 잘 돌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부씨 가문과 하씨 가문을 오가며 움직였다. 그들은 모두 이 사건 뒤에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직감을 느꼈고, 호기심과 가십에 대한 열망이 들끓는 눈빛을 드러냈다. 하지만 부남진은 이
세상에 아무런 대가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미셸은 자기가 자식을 가진 어머니로서 하씨 가문에서 입지를 다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하씨 가문은 분명 어머니는 버리고 자식만 남기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을 것이었다. 게다가 하용은 그녀와 아기가 모두 사라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만약 미셸이 이미 위기에서 벗어났다면, 깊은 산속에서 출산을 기다리는 것이 용이나 호랑이의 굴처럼 위험한 곳에서 삶을 구걸하는 것보다 나았을 것이었다. 한때는 지아도 소계훈의 손바닥 위에서 귀하게 키워진 보물이었다. 하지만 끝내 그녀는 가정을 책임지기 위하여 분주히 뛰어다녀야 했다. 하지만 미셸처럼 단 하루의 고난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미셸은 결국 자신의 탐욕 때문에 무너질 것이었는데, 이 점에서는 이명란만큼의 지혜도 없다고 할 수 있었다.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준비했던 어머니조차 서슴없이 배신했으니 말이다. 결국 그런 사람은 자기 행동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되어있다. 지아는 손에 든 와인잔을 흔들며, 차갑고 무심한 표정을 보였다. “지아야, 정말 오랜만이네. 네가 이렇게 잘 지내는 모습을 보니,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양기범이 여금청과 함께 다가왔다. 금청은 지아의 시선을 마주하자, 얼굴에 미묘한 죄책감을 띠었다. 그녀는 더듬거리며 말했다.“지아야, 그때는 정말 미안했어. 정말 그때 네 아버지가 나타나실 줄은 몰랐어. 그럴 줄 알았더라면, 절대 그런 일은...” “나도 알아.”금청은 단순히 지아를 탐탁지 않게 여겼을 뿐, 살인이나 방화 같은 잔인한 짓을 벌일 마음은 전혀 없었다. 게다가 금청이 아니었더라도, 소계훈은 결국 모든 진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었다. “이미 다 지나간 일이고, 너도 받을 만큼의 벌을 받았잖아.” 금청은 지아를 똑바로 볼 수 없었다. 비록 그녀는 목숨을 부지했지만, 이씨 가문은 흩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숙인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늘 직접 사과하고 싶었는데, 오늘에서야 이렇게 말하게 됐네. 내가
사람들의 온갖 아첨이 이어졌지만, 지아는 그 어떤 말도 귀담아듣고 싶지 않았다. 도윤은 지아의 미간에 드리운 짜증을 눈치채고는 그녀 옆에 앉아 불필요한 접대를 막아주었다. 사람이란 원래 이런 것이다. 힘이 있을 때는 모두가 달려들고, 몰락했을 때는 수십 년 지기 친구조차 순식간에 등을 돌린다. 그래서 쓸모없는 인간관계에 애쓰는 것은 무의미하다. 진정한 굳건함은 오로지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아의 시선이 멀리서 식사하는 미셸에게 향했다.그녀는 여전히 이전과 같은 거만한 태도로 잘난 척을 하고 있었다. 지아가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가끔은 낯가죽이 두꺼운 게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면 그만이니까.” 그녀의 말처럼, 화연과 미셸은 사뭇 다른 길을 걸어왔다. 화연은 어릴 적부터 하씨 가문이라는 불안정한 환경에서 온갖 고생을 하며 성격이 지나치게 소심해졌다. 도윤이 그녀에게 케이크 한 조각을 건네며 말했다.“하씨 가문은 미셸이 상상하는 그런 따뜻한 안식처가 아니야. 늑대의 소굴이나 다름없는 곳이지. 곧 가슴 치며 우는 날이 올 거야.” 지아의 시선을 느낀 미셸이 뻔뻔하게 그녀의 앞으로 걸어왔다. 미셸은 자기 행동에 대해 스스로 만족하는 듯, 입가에 얄미운 미소를 띤 채 말했다.“봐, 내가 다시 돌아왔잖아. 내 배 속에 있는 아이를 너희가 뭐 어쩔 건데? 하용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어르신 위에 설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나는 천성적으로 귀한 몸이라고.”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화연을 흘깃 쳐다보며 비웃었다.“저런 천한 것과는 다르지. 용포를 입으면 뭐 해? 태자 같지 않은데.” 외모만 보면 화연이 미셸을 훨씬 능가했지만, 미셸의 말처럼 화연은 아직 자신감이 부족해 보였다. 수억 원의 드레스를 입고 있어도, 얼굴에는 어딘가 주눅 든 기색이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반면, 지아는 어릴 적부터 소계훈의 교육을 받으며 자연스럽게 귀한 아가씨의 품격을 익혀 왔다. 그래서 이런 고급 연회
지아는 원래 남의 불행을 즐기며 공격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미셸은 스스로 나서서 모욕을 자초했고, 결국 수많은 시선을 뒤로한 채 쓸쓸히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에도 화연은 미셸을 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을 느꼈다.물론 그 두려움 속에는 분노와 증오도 자리하고 있었다. 미셸에게 맞아 유산했던 기억... 먼저 세상을 떠난 아이는 여전히 그녀의 악몽 속을 떠돌고 있었다. 민연주가 그녀의 손등을 두드렸다.“화연아, 무서워할 거 없어. 지금의 너는 부씨 가문의 아가씨잖아. 저 여자는 더 이상 너를 다치게 할 수 없을 거야.” 화연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엄마, 저 여자가 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는데도 처벌할 방법이 없는 거예요?” “이번 일에는 하씨 가문이 얽혀 있어서, 겉으로는 손을 댈 수 없지만...”순간, 민연주의 얼굴에 차가운 그림자가 스쳤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아졌고, 눈빛에는 싸늘한 결의가 서렸다.“저 여자가 모습을 드러낸 이상, 도망칠 곳은 없을 거야.” 연회가 끝난 후, 하용은 전용 밴으로 불려 갔다. 하광은 양손으로 지팡이를 짚은 채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물었다. 차 안이 숨조차 쉴 수 없는 무거운 분위기로 바뀌는 순간이었다.“미셸을 어떻게 할 생각이지?” 하용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답했다.“죽였으면 합니다.” “반대하진 않으마. 하지만 지금은 안 돼. 나는 우선 그 여자가 하씨 가문의 아이를 낳게 할 생각이야. 그 후에는 부씨 가문으로 돌려보낼 테니, 그다음은 네 마음대로 해라. 하지만 남은 몇 달 동안은...” “그럴 수 없습니다. 그 여자는 화연이의 아이를 죽였어요. 저는 그 아이를 낳게 두지 않을 겁니다!” 찰싹!하광이 단호한 손길로 하용의 뺨을 후려쳤다.“네가 정말 화연이한테 정신이 팔린 모양이구나! 미셸이 어떤 사람인지는 논하지 않으마. 다만, 그 여자의 배 속에 있는 아이는 네 아이이기도 해. 네 동생이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건 너도 잘 알 거라 믿는다. 하씨 가문은 대를 이을 혈육
“저 배은망덕한 놈! 변덕스럽고 의리 없는 게 꼭 제 어미를 닮았어. 처음부터 널 낳는 게 아니었어!” “하용, 부씨 가문이 널 받아줄 것 같으냐? 꿈 깨라! 하씨 가문이 없으면,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화연과 오래 붙어먹더니 너까지 순진해진 모양이구나. 이 세상은 이익이 전부야! 그렇게 하면 너한테 남는 게 대체 뭐냐고!” 앞길을 가로막는 눈보라가 하용의 시야를 흐리게 했다. 얇은 옷을 걸친 그는 온몸이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펑펑 내리는 눈 속,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녀가 서 있었다. 두툼한 모피 코트를 걸친 그녀는 하용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화연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자, 하용은 그녀가 넘어질까 염려하며 재빨리 달려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두 사람은 눈보라 속에서 서로를 꼭 껴안았다.“하용 오빠, 미안해요.” “화연아, 난 이렇게 행복했던 적이 없어. 드디어 하씨 가문이라는 굴레를 벗어났으니, 이제부터는 나 자신을 위해서 살아보고 싶어.” “오빠, 내가 오빠의 곁에 있을게요.”“그래.”지아와 도윤은 멀리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도윤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이만 들어가자. 두 사람이 같이 있으니 괜찮을 거야.” 가로등 아래, 도윤은 지아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보았다. “순수한 사랑은 항상 아름다워. 그래서 더더욱 보호하고 싶어지지. 나는 지금도 가장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게, 그때 병원에서 고모님을 막았던 거야.” 지아는 자신의 과거를 떠올렸다. 적어도 그녀의 사랑은 항상 비참한 모습으로 끝났지만, 화연만큼은 하용의 변함없는 사랑을 받으며 살 것이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도윤은 가문과 능력 면에서 하용을 능가했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자신이 완전히 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자.”지아는 시선을 거둔 후 떠났고, 미셸은 스스로를 파멸의 길로 몰고 있었다. 인생은 자신이 선택한 길을 걷는 것이고, 한 번 선택한 길은 되돌릴 수 없는 법이다. 수많은 일을 겪은 지아는 지금의 삶
한편, 지아는 부남진의 곁에서 침을 놓고 있었다. 집사가 밖의 상황을 보고하자, 부남진은 눈도 뜨지 않고 말했다. “무릎 꿇는 걸 좋아하는 모양인데, 내버려둬.” 집사가 밖의 날씨를 흘끗 보며 말했다.“오늘 밤 기온이 영하 15도까지 떨어질 겁니다. 오래 무릎을 꿇으면...” “무릎 꿇다 죽어도 싼 인간들이야.”부남진이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부남진은 그 시절 아직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지아가 남의 집 대문 앞에서 밤새 무릎을 꿇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의 지아는 너무도 순진했다. 진심으로 사람들을 감동하게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인데, 부남진은 그 시절의 지아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무거웠다. 당시의 지아는 과거의 의리를 생각하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여겼지만, 상대의 생각은 달랐다. 엄한 가문의 미움을 살까 봐 두려웠던 것이 아니라, 그저 끼어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게다가 승승장구하며 자신들이 우위에 있다고 믿었던 우명석은 소씨 가문을 철저히 외면했다. 그때 집사가 우명석에게 상황을 전했을 때, 우명석은 차를 마시며 태연하게 말했다.“무릎을 꿇고 싶다면 꿇게 둬. 아직 젊으니까 벽에 부딪혀도 봐야지.” 그는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지아를 고립된 더 깊은 절망 속으로 밀어 넣었다. 강력한 지위와 권력을 가진 부남진이 우명석의 마음을 모를 리가 없었다. 부남진은 우씨 가문의 세 사람이 스스로 무릎을 꿇게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들이 부씨 가문의 대문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얼어 죽는다고 해도, 그 일을 세상에 폭로할 사람도 없었다. 지아가 마지막 침을 놓자, 부남진이 지아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얘, 고생 많았다. 이 할아버지가 너를 좀 더 일찍 찾았더라면, 네가 그런 시련을 겪지 않아도 됐을 텐데...” “괜찮아요, 할아버지. 이미 다 지나간 일이잖아요. 사실 제 양아버지는 제게 정말 잘해주셨어요. 오히려 어릴 적부터 파산하기 전까지는 귀중한 공주처럼 자랐으니까요. 오히려 고모님의 처지가 더 안타
밤이 깊어질수록 눈보라는 더욱 거세졌다. 기온은 급격히 떨어졌고, 김혜정이 입고 있던 밍크코트는 이미 눈으로 뒤덮였다.그녀는 수년간 우씨 가문의 안주인으로 살아오면서 자신이 이렇게 모욕적인 상황에 부닥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었다. 두 시간이 지나자, 김혜정은 끝내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 경호원들이 그녀를 차로 옮기자, 부씨 가문의 집사가 단호히 말했다.“부씨 가문의 모든 분은 주무시는 중입니다. 오늘 밤에는 문을 열 일이 없을 겁니다.” 우명석은 결국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무거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부남진은 침묵으로 그에게 메시지를 보낸 셈이었다.‘협상 불가!’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도윤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그가 냉혹한 목소리로 지시했다.“진환, 우씨 가문의 좋은 날은 오늘로 끝이야. 당장 가서 우씨 가문의 약점을 알아봐!” “예.”우명석은 퇴직했다고 해서 모든 것이 깨끗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저 운이 좋아서 정계 생활을 무사히 마친 거겠지.’ “우명석은 교활한 인간이야. 그 사람의 아들을 공략해!” “알겠습니다.”‘우명석이라는 배후를 가진 우창민이라면 더더욱 흥미로운 결과가 나올 거야.’ 이튿날 아침, 도윤과 부남진은 동시에 비밀리에 작성된 보고서를 손에 쥐게 되었다. 조사 결과를 확인한 부남진의 얼굴이 즉시 굳어졌다. “우씨 가문의 악행은 정말이지 끝이 없구먼!” 우명석은 단순히 뇌물수수와 부패에 그쳤지만, 그의 아들 우창민은 그야말로 인간 이하의 삶을 살고 있었다. 불법 도박, 매춘, 그리고 조직 폭력까지... 심지어 그의 아내와 관련된 사건은 더욱 끔찍했다. 우창민은 대학 시절 몇 년 동안 교내 미인을 쫓아다녔다. 하지만 그 여학생은 이미 약혼까지 한 상태였고, 우창민은 그녀가 결혼하기 전날 그녀를 폭행했다. 피해자의 약혼자는 고소를 시도했지만, 우창민의 손에 의해 불구가 되었고, 결국 그 여학생은 우창민과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소상현은 오랜 세월을 그렇게 살아왔고, 그의 자식들도 자연스럽게 그런 영향을 받아 소지훈 역시 같은 생각을 품게 되었다. 형들보다 뒤처진다는 열등감과 질투심을 마음속 깊이 새기며 말이다. 그래서 소지훈은 연예계로 진출했는데, 스타가 되면 가장 눈부신 존재가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뜨거운 인기를 얻게 된 배경에 소임호의 존재가 있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다. 당시 소지훈은 일부러 자신의 신분을 철저히 숨기고,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성공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인맥 하나 없는 상태에서 연예계에서 두각을 드러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소임호는 그런 소지훈을 위해 아무 말 없이 훌륭한 매니저를 은밀히 붙여 소지훈이 어떤 부당한 대우나 불합리한 관행에 휘말리지 않도록 철저히 보호했다.게다가 소지훈이 직설적인 성격 탓에 적을 많이 만들어도, 그때마다 소임호가 뒤에서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소임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소지훈에게 맞춤형 성공 전략을 만들어 주었으며, 소지훈이 맡을 작품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고르기도 했다.그 결과, 소지훈은 단번에 톱스타로 떠오를 수 있었고, 스캔들 하나 없이 꾸준히 높은 인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소상현 부자의 성공 뒤에는 늘 소임호가 있었다. 하지만 소상현 가족과 달리, 소영수의 셋째 아들인 소재호 일가는 예술을 사랑하며 재산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 소영수의 넷째 아들인 소윤성은 심예지와 파혼한 뒤 소씨 가문을 떠나 해외로 가서 조용히 지냈다. 즉, 이 집안은 소임호가 없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무너졌을 것이었다!소영수가 소임호를 특별히 아낀 이유도 바로 이것이었다. 제멋대로인 다른 아들들에 비해 소임호야말로 소씨 가문을 이끌 적임자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소임호가 소씨 가문을 위해 조용히 헌신해온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 위기가 닥쳤을 때 소상현은 소임호를 도울 생각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아들들을 짓누르며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려 했다. 하지만 부장
어릴 때부터 소상현은 모든 면에서 소임호보다 못했고, 태어난 그날부터 소임호의 후광 아래 살았다. 소상현이 소임호를 향해 품은 원망과 분노는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었다. ‘비즈니스계의 천재’라는 수식어가 소임호 대신 자신에게 붙었다면 어땠을까, 그런 상상을 수도 없이 해 왔을 정도였다. ‘아버지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소임호도 별 거 아니었을 거야.’ 소임호가 소영수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소상현의 마음은 크게 들떴다. 비록 자신의 능력이 소임호를 따라가지 못한다 해도, 신분만큼은 소임호보다 우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부장경이 이곳에 나타나자, 소상현은 자랑스러웠던 신분마저 산산이 무너지는 듯했다.소상현의 얼굴은 보기 민망할 정도로 일그러졌지만, 이미 주위 사람들은 전부 부장경과 소임호에게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고, 소상현 부자에게 관심을 갖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부장경은 지아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은 채, 다른 식으로 입을 열었다.“형님,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부장경이라고 합니다. 아버지께서 특수한 신분인 탓에 직접 오시지 못해, 제가 대신 왔습니다. 저는 아버지와 같은 핏줄이지만 어머니가 다른, 형님의 동생입니다.”“아버지, 아버지...”소임호의 눈가가 약간 붉어졌다. 사실 소임호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어릴 적 의식을 갖기 시작했을 무렵, 어머니와 단둘이 지내면서도 ‘아버지는 누구일까?’ 하고 궁금해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어머니는 그때마다 다정하게 미소를 지으며 소임호의 머리를 쓰다듬을 뿐이었다. 그러다 소영수를 만난 뒤에는 그분이 바로 아버지라고 말해주었고, 실제로 소영수는 소임호를 친아들처럼 다정히 대했다. 물론 소임호는 소영수가 친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진실을 밝히지 않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거라 믿으며 더 이상 묻지 않았다.게다가 소영수는 친아들 이상으로 소임호를 아껴 주었기에, 소임호는 그저 이대로도 좋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이렇게 아버지가 먼저
부장경은 국내에서 먼 길을 달려왔는데, 오기 전까지만 해도 소씨 가문에 대한 몇몇 영상과 사진을 통해 단편적인 정보만 알고 있었다.부장경은 소씨 가문 사람들과는 달랐다.비록 부장경도 소임호의 이복형제이지만, 부장경은 오래전부터 부남진이 젊은 시절에 사랑했던 여인이 있었고, 그 여인이 부남진에게 평생의 후회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만약 그 여인이 부남진에게 아들이나 딸을 남겨줬다면, 부남진의 후회를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었을 것이었다. 부장경은 지난 삶을 미셸을 사랑하며 보냈지만, 미셸은 결국 가짜 여동생에 불과했다. 만약 비즈니스적으로 뛰어난 형이 있다면, 부장경에게 그것은 하늘이 준 기회와도 같을 것이었다. 같은 혈연으로 맺어진 형제인 것도 중요하지만, 정치와 비즈니스가 결합된다는 점에서 부씨 가문은 더 큰 번영을 가져올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지아가 부남진에게 이 이야기를 전했을 때, 부씨 가문은 이미 대화를 나누며 준비하던 참이었다. 민연주 역시 그 여인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더 이상 따질 것이 없었다. 어차피 그것은 자신이 등장하기 이전의 일이었으니 말이다.게다가 소임호의 능력은 아주 뛰어났다. 그런 양자를 받아들이는 것은 부씨 가문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것과 동시에 큰 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 선택이었다. 민연주는 손익을 따져보았고, 무엇보다 부남진이 어렵게 찾은 아들을 반대해도 소용없겠다는 결과에 다다랐다. ‘그래, 오히려 통 크게 받아들이는 게 낫겠어.’부남진은 특수한 신분 탓에 떠날 수 없었기에, 대신 부장경이 부씨 가문을 대표해 소임호와 정식으로 인연을 확인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부장경은 결단력 있는 기운을 풍기며 빠르게 걸어왔다. 회의실을 아주 넓었는데, 부장경과 그의 일행이 들어오자 그들이 내뿜는 살벌한 기운이 전장을 휩쓸 듯 회의실을 가득 메웠다. 부장경의 정체를 모르는 사람들조차 등골이 오싹해졌다. 최근 소씨 가문에는 너무 많은 일이 벌어져서, 지아조차 부씨 가문의 이야기를
이 말이 나오자마자,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이 몸을 움츠렸고, 그들 중에는 한때 소임호의 뒤를 따르던 사람도 적지 않았다. 비행기 사고 소식이 전해지며 소씨 가문이 혼란에 빠지자, 그 사람들은 곧장 새로운 선택을 했다.본래 군자는 좋은 벗을 택하는 법이지 않은가? 소임호가 죽었다고 생각한 그들은, 시후가 병으로 쇠약해지고 있는 모습을 보며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 판단했다. 게다가 다른 형제들도 믿음직하지 못하니, 결국 사람들은 소상현 쪽으로 몰리고 만 것이었다. 하지만 소임호가 죽음을 위장하고, 이렇게 난감한 시점에 돌아올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일명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들’은 즉각 태도를 바꾸었고, 앞다투어 소임호에게 아부하며 말했다. “대표님, 무사하시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저희는 날마다 대표님을 위해 기도드리며...”소임호가 차갑게 그들의 말을 끊었다.“빨리 극락에 가서 뼈도 남지 않길 바랐다고?” “허허, 여전히 유머러스하시네요.” “저희는 대표님께서 하루빨리 돌아오시길 바랐습니다. 대표님께서 부재중인 동안 회사가 이렇게 큰일을 겪었으니까요.” “이쪽으로 오시죠.”방금까지는 시후를 몰아세우며 목소리를 높이던 한 원로가, 소임호를 보자마자 태도를 바꿔 소지훈의 머리를 세게 때렸다.“여긴 너 같은 애송이가 앉을 곳이 아니야! 어서 비켜, 대표님께서 오셨다고!”이 세상에서 진정한 힘은 실력뿐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모두 이 회사가 누구의 손에서 태어났는지, 누구의 피와 땀으로 이뤄진 것인지, 누구의 뿌리이자 삶의 전부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본래 소임호가 없다고 생각하고 산 정상에 꽂힌 깃발을 훔치려 했지만, 고지에 닿기도 전에 장군이 병력을 이끌고 역습을 해온 꼴이었다.상황을 지켜보던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들’은 자연스레 소임호의 편을 들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소상현의 편에 서 있었으나, 소임호가 등장하자마자 모든 사람이 소상현에게 등을 보였다. 이 상황에 소상현도 살짝 당황했
소상현과 소임호는 원래 이복형제였지만, 어린 시절의 소상현은 아버지에게서 아주 엄격한 대우를 받았다. 그가 가장 많이 들은 말은...“네 형의 반이라도 닮으렴.”“형은 똑똑하고 재능이 있는데, 넌 왜 그렇게 어리석니?” “이렇게 간단한 보고서도 이해 못 한다니, 네 형이라면...”소상현은 집안의 둘째였기에 형인 소임호와 비교되는 일이 많았다. 소임호의 빛나는 존재감 아래, 소상현은 얼마나 평범해 보였는지 모른다. 소상현은 이미 열심히 노력했지만 노력과 재능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다. 소임호는 단순히 똑똑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노력도 부족함이 없었는데, 천부적인 재능 위에 더해진 노력은 금상첨화라고 할 수 있었다.즉, 소상현은 평생을 다 바쳐도 소임호를 따라잡을 수 없을 터. 소임호는 소상현의 평생의 트라우마였다. 그러던 오늘, 드디어 진실이 밝혀졌다.이번 기회에 소상현은 당당히 소임호와 그의 가족을 몰아내고 자신들의 모든 것을 되찾을 참이었다. “시후야, 너도 똑똑한 사람이니 길게 말하진 않으마. 네가 약간의 지분을 샀다고 해도, 우리 손엔 여전히 아버지의 지분이 있어. 결국 너희는 ‘패배’했단 뜻이지! 뭐 하러 사서 고생을 하니? 결국 사람들한테 비웃음이나 살 텐데.” 시월은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그 말은 옳지 않아요! 우리 아빠가 할아버지의 친아들이 아니라고 해도, 우리는 한 핏줄로 연결된 가족이에요. 우리 몸에는 할머니의 피도 흐르고 있으니까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그렇게 오랜 세월을 애틋하게 사랑하며 함께 살아오셨는데, 우리한테 상속권이 없다는 게 말이나 돼요?” “게다가 이 회사는 우리 아빠가 맨손으로 일궈낸 거예요. 그런데 이제 와서 이렇게 크게 성장한 회사에 숟가락을 얹겠다니, 세상에 이렇게 구차한 일이 어디 있어요?” 소지훈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아버지, 더는 말싸움할 것도 없어요.” 소지훈은 손뼉을 치며 전문 변호사팀을 불러들였다. 그와 동시에 시후 측의 변호사들도 들어왔는데, 그들은
도윤은 지아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걱정하지 마, 자기야. 이미 사람들을 보내 조사하고 있는데,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 같아.” 도윤의 세력은 대부분 A국에 집중되어 있어서 이곳에서는 섣불리 행동하기 쉽지 않았다. 게다가 심세호는 이날을 위해 오랜 세월 동안 계획을 세웠으니, 심세호를 단번에 찾아내는 것은 당연히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소임호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고, 소임호가 보낸 사람들마저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져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도윤은 이틀 동안 무릎을 꿇은 탓에 체력이 바닥나 빗속에서 기절할뻔했지만, 소씨 가문 사람들은 조금의 동정도 보이지 않았다.시하가 냉담하게 말했다.“저러다 죽으면 더 좋겠어.” 시언도 맞장구쳤다.“좋은 사람은 오래 못 산다더니, 나쁜 놈은 천년이 가도 안 죽는구나.” 소임호는 그저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당장 끌어내. 내 눈앞에서 치워버리라고!”지아는 그들의 태도에 머리가 아팠다.‘아무래도 가족들이 도윤 씨를 받아들이는 건 단기간에 이루어질 일이 아닌 것 같아.’ 지아는 진봉에게 도윤을 방으로 옮겨 정성껏 간호하라고 지시했다. 소씨 가문에서 도윤에 대해 가장 악의가 적은 사람은 시후였는데, 시후가 천천히 지아의 곁으로 다가왔다.“소시월이 자금을 다 모았어.” “그럼 이제 우리가 연극을 시작할 때네요.” 시월이 밤새 달려와 도착하자, 시후는 일부러 얼굴에 화장하고 아주 쇠약한 모습을 연출했다.“콜록콜록... 월아, 왔구나.” “오빠, 이틀 만에 상태가 왜 이렇게 악화된 거예요? 절대 쓰러지시면 안 돼요.” “걱정하지 마, 월아. 오래된 병이라서 그래. 그나저나 돈은 다 모은 거야?” “네, 오빠, 지금 상황은 좀 어때요?” “내가 있는 한, 무슨 일이 있어도 아버지의 재산을 지켜내려 하겠지만...” 시후는 일부러 기침을 몇 번 더 하며 말했다.“월아, 앞으로 우리 소씨 가문은 너한테 달렸어.” “오빠, 괜찮을 거예요.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시월은 겉으
어떤 고통은 직접 겪어보기 전에는 절대 공감할 수 없는 법이지만, 사실 지아는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이미 많은 것을 내려놓았다. 첫째, 지아는 여전히 도윤을 사랑하고 있었다.둘째, 지아와 도윤 사이에는 네 명의 자녀가 있었다.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고, 가족과 재회한 후에야 지아는 가족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고, 복수에 시간을 허비하기보다는 현재를 소중히 여기고 지금 가진 것들을 꼭 붙드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느꼈다. 지아는 누구보다 지금의 평온을 애틋하게 아끼고 있었다.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지아와 같은 마음가짐이 아니었다. 도윤이 예전에 저지른 일들로 인해, 도윤이 백번을 죽는다 해도 소씨 가문은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었다. 도윤은 정원에서 하루 밤낮 동안 무릎을 꿇고 있었다. 지아가 몇 번이고 도윤을 말렸지만, 도윤은 부드럽게 말했다.“자기야, 난 당신이랑 재혼하고 싶어. 당신한테 성대한 결혼식을 선물하고 싶다고. 하지만 부모님의 축복이 없는 결혼은 완벽하지 않은 거잖아.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당신 가족의 용서를 구하고 싶어.”“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지아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모든 일이 이 지경에 이른 건 다 내 잘못이야. 당신이 살아 있고, 나를 받아들일 의향이 있다면 이 정도 고통쯤은 아무것도 아니야.”도윤의 무릎은 이미 감각이 없었지만, 도윤은 등을 곧게 펴고 있었고 눈빛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그리고 내가 겪는 고통은 당신의 만분의 일도 안 될 거야.” 그날 밤, 하늘에서 폭우가 내리기 시작했고, 도윤은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은 상태였다.여자라면 이미 기절했을지도 모르지만, 도윤은 강인한 체력으로 끝까지 버티고 있었다. 한편, 지아는 집 안으로 들어갔는데, 소임호는 어제보다 상태가 훨씬 좋아 보였다. 소임호가 지아를 보자마자 빙그레 웃었다.“우리 지아 왔니? 네가 처방해 준 약이 효과가 정말 좋더구나. 오늘 몸이 한결 가벼워졌어.”소임호의 얼굴에는 약간의 혈색이 돌았지만, 아내를 걱정하며
도윤이 예전에 지아에게 저지른 일들은 정말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물며 지아의 가족들이 그녀의 과거 고통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겠는가? 지아가 아무리 ‘다 지나간 일이다’라고 말한다 한들, 깊은 밤 홀로 고통과 싸우며 버틴 지아의 고통은 절대 그렇게 쉽게 잊힐 수 없는 것이었다. 소임호는 도윤을 원수 대하듯 노려보았다. “아빠,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지금은 안정을 취하셔야 해요.”지아가 부드럽게 달래자, 소임호는 가슴을 쓰다듬으며 간신히 감정을 추슬렀다.“딸아, 우리 집안에 어떤 일이 생기든, 나는 절대로 저 자식과 네가 엮이게 두지 않을 거란다.” 소임호는 도윤을 향해 다시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다.“뭘 그렇게 보고만 있어?! 당장 썩 꺼지지 못해? 우리 소씨 가문은 너 같은 놈을 환영하지 않아! 예전에 네가 우리 딸을 어떻게 괴롭혔는지는 벌써 잊은 게야? 그때는 우리가 없어서 네가 설치게 내버려뒀지만, 이제 내 딸한테 가까이 오기만 해 봐! 나는 평생 내 딸을 지킬 거야!” “장인어른, 제가 과거에 저지른 잘못은 씻어낼 수 없는 죄악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잘못을 사죄하고, 가능한 한 보상하고 싶습니다.” “필요 없어! 사과로 모든 게 해결된다면 세상에 경찰이랑 법은 왜 필요하겠나? 진심이든 아니든, 네 사과 따윈 듣고 싶지 않아!” “장인어른.”“그 따위로 부르지 말게. 난 너 같은 사위는 둔 적 없으니까!” “저와 지아는 두 아들과 두 딸, 총 네 아이를 두고 있습니다. 그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저희를...”아이들 이야기가 나오자 소임호는 더욱 격분했다. “빌어먹을 자식 같으니라고! 이제 와서 아이들을 들먹이다니! 예전에 지아가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 네가 백채원을 살리겠다고 지아를 유람선에서 밀어 조산하게 했던 건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지? 지아가 목숨 걸고 낳은 아이를 왜 네 입에 들먹여! 그 망할 ‘은혜’ 때문에, 어미로서 자식을 사랑할 권리마저 뺏겠다는 건가?”소임호의 목소리는 격해지며 갈라
밤하늘 아래, 무무는 조용히 서로를 껴안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이의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 있었고, 두 사람의 애틋한 장면은 영상 통화를 통해 중계되고 있었다.수화기 너머에서 해경의 흥분된 목소리가 들려왔다.[좀 더 가까이 찍어봐! 잘 안 보여!]소망은 지윤의 머리를 밀쳐내며 핀잔을 주었다.[좀 조용히 해. 엄마랑 아빠를 방해하지 말란 말이야! 그리고 그 큰 머리 좀 치워봐! 하나도 안 보이잖아!] [누구 머리가 크다고 그래? 형, 형이 판단 좀 해줘. 우리는 쌍둥이잖아. 내 머리가 크다면, 쟤도 똑같은 거지? 그렇지?]두 아이는 만나기만 하면 다투기 일쑤였지만, 지윤과 무무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비록 무무는 말할 줄 모르지만, 부모가 서로 껴안고 있는 모습을 눈앞에 두고, 남매들이 다투는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듯했다. ‘가족은 원래 이런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 ‘엄마는 A시로 돌아가면 아빠랑 재혼할 거라고 했어. 그때가 되면 우리는 진정한 가족이 될 수 있을 거야.’ 그날은 금방 올 것 같았고, 그동안 지아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숨어서 가족들을 보살폈다. 소임호는 온화한 눈빛으로 지아를 바라보았다.‘지아가 내 곁에 있으니 마음이 한결 편해진 것 같군.’ 소임호는 오랜 세월이 흘러 마주한 딸을 애틋하게 바라보며, 지아가 걸어온 지난날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 지아는 침을 놓으면서 차분히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사실 어릴 때는 큰 고생을 하지 않았어요. 양아버지께서 절 많이 사랑해 주셨거든요. 물질적으로도 부족함이 없었고, 무엇보다 제게 온전한 사랑을 주셨어요.” 소임호는 손을 들어 지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정말 온화한 분이셨던 모양이구나. 너를 이렇게 훌륭하게 키워주셨으니까.” “네, 만약 그분이 살아 계셨다면, 제가 가족을 찾은 걸 정말 기뻐하셨을 거예요. 물론 제 인생에도 어두운 순간들이 있었지만, 그분이 주신 빛이 제 삶의 어둠을 몰아내고, 제가 진흙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