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씨 가문은 한때 A시에서 이름을 날리던 명문가였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파산으로 인해 많은 이들의 충격과 동정을 불러일으켰다.그리고 소씨 가문의 아가씨인 소지아마저 그 이후로 자취를 감췄다. 오늘 이 자리에서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다면, 아마 대부분은 그녀를 완전히 잊었을 것이었다. 한동안 소씨 가문은 술자리에서 빠지지 않는 화젯거리였다.지아가 어떻게 이씨 가문의 그 사람을 건드렸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결국 가문이 파산하고, 가족이 뿔뿔이 흩어진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물론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이런 자리에서 대놓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조금 전 지아의 단호한 태도는 우명석을 화나게 했다. 우명석은 한때 높은 자리에서 은퇴한 사람으로, 어디서나 모두의 존경을 받는 위치에 있었다. 그런 사람이 어찌 이런 자리에서 지아로 인해 체면을 구길 수 있겠는가. 마음속에 앙금이 남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과거에는 소계훈마저 우명석에게 고개를 숙이며 아첨했었는데, 지금은 외로운 고아가 된 그녀가 그의 체면을 깎아내리다니, 이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가볍게 말을 건넸을 뿐인데, 감히 날 무시하려 들어?!’ 사람은 높이 오를수록 속이 좁아지는 법이다. 자신의 위세에 반하는 이들을 용납하지 못하면서도, 더 높은 권력자 앞에서는 한없이 비굴해지는 것.그것이 바로 불쌍하고도 슬픈 인간의 본성이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도 환심을 사려는 어릿광대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강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우명석의 편에 서서 지아를 조롱하며 분위기를 띄우려 했던 것이었다. “아, 소씨 가문, 기억납니다. 소씨 가문이 파산한 건 이씨 가문의 그 분을 건드렸기 때문이라죠?” “작디작은 비즈니스 가문이 대체 무슨 배짱으로 그런 분을 건드린 건지 모르겠네요. 파산해도 할 말이 없는 거죠.” “근데 참 신기하네요. 소씨 가문은 파산했는데, 소지아 씨는 어떻게 이런 자리에 온 걸까요? 몇 년 동안 소식이 없었는데, 설마...”
우명석이 입을 열지 않았다면, 지아는 이미 과거의 일을 잊고 지나쳤을 것이었다. 그때는 그런 선택이 그의 처세술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었기에, 그녀는 이들에 대한 복수를 꿈꾼 적도 없었다. 하지만 우씨 가문은 최근 몇 년간 너무도 순탄한 나날을 보내다 보니, 이 자리가 어떤 곳인지조차 망각한 듯했다. 지아가 그의 가식적인 태도에 응하지 않자, 우명석은 이내 거만한 태도를 보였다.그녀는 더 이상 참지 않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과거에 어르신이 국토부의 한낱 말단 직원이었을 때, 제 아버지와 친분을 맺고 승진을 위해 하소연하셨던 일, 기억하시죠? 그때 제 아버지는 어르신을 돕기 위해 인맥을 소개해 드렸고, 덕분에 어르신은 국토교통부 장관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죠.”“저희 아버지의 은혜를 기억하길 바란 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해에 소씨 가문이 몰락했을 때, 제 아버지는 병원에서 긴급 수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직접 어르신의 댁을 찾아갔지만, 어르신은 댁에 계셨으면서도 저를 피해 숨으셨죠.”“귀찮은 일을 피하고 싶었던 마음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가식적인 몇 마디 말로 모든 걸 덮으려는 어르신의 태도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저는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제가 왜 사과를 해야 하죠? 대체 그게 무슨 논리입니까?” 지아의 말은 단숨에 숨겨진 우명석의 과거를 드러내며, 그의 체면을 구겨 벼렸다. 그 순간, 사람들 사이에서 익숙한 얼굴이 눈에 띄었다. 그 사람은 여금청이었다. 과거 금청은 채원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소씨 가문과 소계훈을 비난하는 말을 했고, 그 일은 소계훈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이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씨 가문은 파산을 맞이했고, 그것은 도윤의 작품이었다. 금청이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양기범은 그녀를 집으로 데려갔다. 두 사람이 결혼한 후, 그녀는 1남 1녀를 낳으며 완전히 다른 삶을 살기 시작했다. 후에 기범은 도윤의 지원 덕분에 A시에서 꽤나 중요한 인물이 되었고, 그
학창시절, 금청은 줄곧 지아를 좋아하지 않았다. 뭐든 그녀와 비교하려 들었으니 말이다. 특히 기범이 지아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는 더욱 지아와 대립각을 세우곤 했다.게다가 나중에는 백채원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백채원의 편에 서기도 했다. 그 시절 일이 어찌 됐든, 지아는 그녀들의 말이 화근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여금청의 탓이든 아니든, 우리 아버지는 어머니의 죽음을 알게 되었을 거야.’ 이씨 가문이 파산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지아는 특별히 기뻐하지도 않았고, 남의 불행을 비웃지도 않았다. 기범의 결혼 소식도 어느 정도는 들었지만, 당시의 그녀는 자신의 처지조차 감당하기 버거워 그의 결혼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금청이 기범의 팔짱을 끼고 우아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예전의 경박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오히려 차분하고 안정된 모습이었다. 하지만 우창민은 그녀를 경멸하는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누구긴요, 몰락한 소씨 가문의 딸이 아니면 또 누구겠습니까?”아직 젊기 때문일까.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나이 지긋한 우명석과 달리, 우창민은 모든 감정을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어쩌면 그들처럼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것을 누리며 살아온 사람들은 스스로가 남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우명석은 헛기침을 하며 아들에게 너무 날뛰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정계에 있는 사람들은 사업가들과 다르지 않은가. 너무 눈에 띄는 행동은 오히려 해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됐다, 창민아. 상대는 여자잖니. 너무 모욕을 주지는 말거라.” “아버지는 너무 착하시다니까요. 그래서 늘 사람들이 아버지의 머리 위에 오르려고 하는 거잖아요.” 그 순간, 주위에 모여든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고, 모든 시선이 지아에게 쏠렸다. 그들의 시선에서는 호의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말씀해 보십시오. 이런 여자한테 무슨 신분이 있다는 겁니까?” “부시장님, 저 분이 이 대표님의 전처라는 걸 모르시는 건가
“오랜만이야.”이전에 기범이 지아를 도운 적이 있었기에, 그녀는 그 은혜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기범에게만큼은 너그러운 태도를 보였다. 지아가 여유롭게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자, 자신들과 우씨 가문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고 생각한 김혜정이 비아냥거렸다. “역시 소지아 씨는 아는 남자분이 많으시네요. 오늘은 대체 누구를 따라 들어오신 거죠?” 지아가 가볍게 미소 지으며 응수했다.“왜 남자를 따라 들어와야 하죠? 제가 스스로 올 순 없나요? 아, 여태 남자에게 의지하며 구미호처럼 살아오셔서 세상의 모든 여자가 그렇게 산다고 착각하시는 건가요?” 그녀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그 흔한 손가방이나 초대장조차도.“설마, 여기서 남자를 낚으려는 건 아니죠? 소지아 씨, 여기가 어떤 수준의 연회인지는 알고 있어요?” 주변에 모여든 여자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남자들은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지아를 바라보는 눈빛에서는 호의라는 것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초대장이 없다니, 누가요? 우리랑 같이 온 사람이에요. 저와 기범 씨의 동창이죠.” 지아는 약간 놀랐다.‘세상에, 여금청이 내 편을 들어주는 날이 올 줄이야!’ 기범이 이런 수준의 연회에 참석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의 형 양요한과 도윤의 관계 덕분이었다.하지만 단순한 ‘동창’이라는 금청의 말은 사람들의 신뢰를 얻지 못했다. 지아는 주위 사람들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고, 담담하게 김혜정을 향해 대답했다.“당연히 알죠.” 그녀의 이런 담담한 태도와 자신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눈빛은 김혜정을 더욱 화나게 했다.“알면서도 여기 서 있다니, 당신은 정말...” 그녀가 말을 더 이어가기도 전에, 차갑기 그지없는 두 남자의 목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여기가 아니면, 어디에 서야 한다는 거죠?” “왜 여기 있으면 안 된다는 겁니까?” 도윤과 부장경이었다. 두 사람은 바쁜 일을 마치자마자 먼 길을 달려온 듯했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길을 비켜 두 남자에게 통로를 내주었
부남진은 손을 흔들며 부드러운 미소로 말했다.“다들 너무 예의 차릴 필요 없습니다.”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지아를 향했다. 인파의 중심이 그녀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본 그가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우명석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작은 일일 뿐입니다. 말씀드릴 만한 것도 아니고요. 오늘은 각하께서 좋은 소식을 전해주시는 날이지 않습니까.” 도윤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가 들어왔을 때, 지아가 누군가에게 손가락질받는 것을 분명히 보았지만, 부남진이 이 자리에 있는 이상, 자신이 나설 차례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부남진은 먼저 주변 사람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사람들의 관심이 화연에게 쏠려 있는 것을 확인한 그는, 우명석의 질문에 대답하기도 전에 손짓으로 화연을 부르며 말했다. “화연아, 이리 오거라.” 화연은 다소 긴장한 얼굴로 사람들 틈에 섞인 이전의 하씨 가문의 사람들을 보았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은 더 이상 혐오로 물들어 있지 않았다. 대부분은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지만, 모두의 시선이 화연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그녀는 긴장한 나머지 드레스를 움켜쥐었다. 부남진은 화연의 손을 잡으며 부드럽게 말했다.“봄이 다가오는 이렇게 좋은 날, 미리 새해 인사를 드리는 것 외에, 기쁜 소식을 하나 전하려 합니다. 이 아이가 바로... 이제야 찾게 된 제 딸, 부화연입니다.”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설마 각하의 사생아인가? 미셸 아가씨는 왜 자취를 감춘 거지?’ 민연주는 사람들의 속내를 눈치챈 듯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오해로 인해 친딸과 오랜 세월 떨어져 지냈습니다. 다행히 최근에야 다시 만날 수 있었고요.” 그 순간, 사람들 속에서 독기 서린 시선이 그녀들을 매섭게 주시하고 있었다.그렇다, 경호원들이 이번 연회에 대해 의문을 품던 틈을 타, 미셸이 몰래 연회장에 들어온 것이었다. 그녀의 눈빛은 아주 탐욕스러웠다. ‘원래 나한테 쏟아졌어야 할 시선들이야! 그게 이제는 저 X한테 향하
순식간에 지아에게 쏟아지던 시선이 금청에게 향했다.그녀가 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한 얼굴로 부남진을 바라보자, 그가 말했다.“괜찮습니다. 본 대로 말해보세요.” 분명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 순간 부남진의 태도는 이웃집 할아버지처럼 따뜻하고 편안했다. 금청은 곁눈으로 기범을 한번 보았다. 상황이 여기까지 온 이상, 기범도 별다른 방법이 없지 않겠는가.‘오늘 이 연회에 초대받은 건 형님이 힘을 쏟은 덕분인데...’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군!’ 결국 그는 포기한 듯 말했다.“그냥 사실대로 말씀드려.” 금청은 어쩔 수 없이 모든 것을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했지만, 김혜정은 그 이야기에 만족하지 않았다.“각하, 두 사람이 동창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객관적이지 못한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객관적이지 못한 부분이라뇨? 당신이 조금 전까지 지아가 스폰서를 따라 들어온 사람이라고 모욕했던 것까지 부인하려고요? 지아의 신분이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다며 대놓고 비하한 거, 여기 있던 모두가 들었습니다. 높은 지위에 있다고 사람을 무시한 거 아닙니까?” “그만해.”기범이 낮은 목소리로 상황을 중단시키려 했다. 하지만 우명석이 온화한 미소를 띤 채, 차분하게 말했다.“죄송합니다, 각하. 사소한 일로 폐를 끼쳤습니다. 애초에 인사를 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모두 제 잘못입니다.” 우명석은 연배를 앞세워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 사과하는 척하며, 지아를 더 곤란하게 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간과했다. 그것은 바로... 부남진의 얼굴에 분노가 어리진 않았지만, 그의 태도에는 차가운 불만이 엿보였다는 것!“사소한 일? 내가 소중히 여기는 부씨 가문의 사람이 모욕당했는데, 그게 사소한 일이라고요?” 우명석의 미소가 굳어졌다.“부씨 가문이요?” 부남진이 지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지아야, 이리 오거라.” 그녀는 침착한 걸음으로 그의 곁에 걸어가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할아버지
그토록 화려해 보이던 우씨 가문 사람들은, 찰나의 경솔한 말로 자신들의 앞날을 송두리째 망쳐버렸다. 연회장 한쪽에서는 과거에 지아를 괴롭혔던 몇몇 사람들이 몸을 떨고 있었다. 혹시라도 그녀가 이번 일을 계기로 자신들에게 복수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었다. 그들의 시선은 더 이상 경멸이 아니라 연민으로 바뀌었다.‘바람 부는 A시에서 아무리 높은 곳에 올라간들 무슨 소용이야?’ ‘예로부터 천하가 왕의 땅인 것처럼, 부남진 각하께서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우씨 가문에게 그랬던 것처럼 몰락시켜 버리면 그만인데!’ 금청은 멀어지는 지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지아가 갑자기 부씨 가문의 사람이 되었다고?” “그들만의 비밀이 있겠지만, 우리가 무슨 수로 알겠어? 하지만 지금 지아의 모습을 보니, 옛날에 학교 다닐 때의 지아가 떠오르긴 하네. 아니, 오히려 지금이 훨씬 더 빛나 보여.” 금청이 그의 팔을 꼬집었다.“아직도 지아를 좋아하는 거야?” “벌써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그럴 리가? 그때는 단지 아름다운 것에 대한 호감이었을 뿐이야. 하지만 지아가 이 자리에 있는 걸 보니까 진심으로 기쁘네.”지아는 이 자리에 오기까지 수많은 시련을 겪었지 않은가. 그녀는 누구보다도 지금의 모든 것을 누릴 자격이 있었다. 금청은 문득 자신이 이제껏 품어왔던 감정이 허무하다는 것을 깨달았다.‘지아는 원래부터 저렇게 뛰어난 사람이었어. 그런 지아를 질투하다니, 내가 왜 그랬을까?’ 하지만 그녀와 달리, 미셸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미셸은 과거 친밀했던 친구들과의 채팅방에서 오늘 부씨 가문에서 열리는 가족 연회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미셸의 친구들은 아직 부씨 가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지만, 궁금한 마음에 미셸에게 연회에 관해 물어보았다. 그래서 잠시 고민하던 미셸이 연회장에 오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나한테 그렇게 잘해주시던 부모님이 정말 나를 버렸을 리 없어. 우리가 함께 살아온 세월이 얼만데...’ ‘개를 키워도
미셸은 부남진의 차가운 두 눈을 마주하며, 이미 부남진에게서 어떠한 부녀의 정조차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애초에 이런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지난 수년간 사랑받던 천국에서 하루아침에 지옥으로 떨어진 듯한 이 감정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버지...”“나는 네 아버지인 적이 없었어. 자중하거라.” 미셸이 화연에게 저지른 일을 알고도, 부남진이 미셸을 갈기갈기 찢어놓지 않은 것은 이미 인내심의 끝이라고 할 수 있었다. 민연주가 막 입을 열려던 찰나, 미셸이 아무런 예고 없이 하씨 가문의 어르신 앞에 무릎을 꿇었다!이 행동은 모두를 놀라게 했지만, 지아는 곧 그녀의 의도를 깨달았다. ‘미셸, 어리석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조금 영리하게 움직이는구나.’ 지아는 일찍이 미셸의 가족이 깊은 산속에 있거나, A시를 몰래 떠나 해외로 도망쳤을 가능성을 생각했다. 하지만 후자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왜냐하면 부씨 가문과 하씨 가문이 그녀의 가족들이 떠나는 모든 경로를 철저히 차단했기 때문이었다. 설령 운 좋게 떠났다고 하더라도, 다시는 고국으로 돌아올 수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대대로 이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이주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미셸의 가족이 어느 산속에 숨어 있을 거라고 예상했던 것이었다. 게다가 미셸의 성격을 잘 아는 지아는, 수년간 부유한 삶을 누려온 사람이 가난한 삶을 견딜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미셸이 산에서 내려와 어떤 소비를 한다면, 바로 하용에게 발각될 터였다. 게다가 하용은 이미 그녀를 위해 ‘칼’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그런데 미셸은 혈로를 뚫고야 말았다. 그것은 바로 그녀 배 속의 아이가 하씨 가문의 핏줄이라는 것! 미셸이 오늘 연회장에 나타난 이유는 뻔했는데, 부남진 같은 사람이 사람들 앞에서 하씨 가문의 명예를 깎아내리지는 않을 테니 도박을 한 것이었다.‘이렇게 하면 하씨 가문은 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거야.’“어르신, 제가 지금은 부씨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