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씨 가문과는 다르게, 최근 부씨 가문은 연일 분주하고 활기가 넘쳤다. 지아가 돌아왔을 때, 고용인들은 온 집안을 환하게 밝힐 등을 걸고, 안팎으로 물청소하고 있었다. 그녀를 본 모든 이들이 친근하게 인사를 건넸다.“지아 아가씨, 돌아오셨군요.” 이명란이 떠난 후, 민연주가 집안을 새로 정비한 덕에 남아 있는 고용인들은 모두 온화하고 성실했다. 올해 부씨 가문은 모처럼 이런 북적임을 맞았다. 부남진은 다가올 새해를 맞이해 집 안 구석구석을 청소하라고 지시했다. 지아가 막 집에 들어서자, 화연이 그녀를 방으로 불렀다. 방에 들어간 지아는 고민에 빠진 그녀의 얼굴을 보고 다가가 물었다.“왜 그러세요, 고모님?” 방 한쪽에는 고급 맞춤 드레스들이 걸려 있었고, 색상과 디자인이 모두 달랐다. 지아는 그녀가 드레스 선택을 고민하는 줄 알고 말했다.“드레스 선택이 어려우신 건가요? 고모님은 아담한 체형이니까, 이 은색 드레스나 하얀색 드레스가 잘 어울린 것 같아요.” “그런 게 아니야.”화연이 지아의 손을 붙잡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나는 내일 밤 연회에 가고 싶지 않아.” “왜요? 거긴 인정받는 자리잖아요. 할아버지께서 모두에게 고모님이 진짜 딸임을 알리려는 건데, 고모님이 나가지 않으시는 건 말이 안 되죠.”지아는 그녀가 지나치게 민감하고 내성적이라 생각하며 다독였다.“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곁에 있을게요.” “내가 그 연회에 참석하면, 그 순간부터 정말 부씨 가문의 딸이 되는 거잖아.” “그렇죠, 설마 즐겁지 않으신 거예요?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삼촌까지 고모님을 찾아낸 걸 정말 기뻐하시잖아요.” 화연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오빠, 아버지, 어머니는 정말 나에게 잘 대해주셔. 그리고 과거의 모든 걸 보상해 주려 노력하시지. 하지만... 내가 부씨 가문의 딸이 되면 하용 오빠와는 끝이잖아. 나는 하씨 가문에서 오랫동안 살았기 때문에, 하씨 가문이 어떤 집안인지 너무도 잘 알아. 아버지는 절대 하용 오빠가 날 데려가는 걸 허락
지아가 한참 위로한 후에야, 화연의 감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지아가 서재로 돌아갔다. 평소 조용했던 서재는 보기 드물게 분주하고 활기가 넘쳤다. 부남진은 돋보기를 쓴 채 한쪽에 서 있었고, 그의 자리에는 지윤이 앉아 있었다. 지윤은 붓을 들고 한지 위에 여유롭게 먹물을 휘두르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해경도 붓을 들고 뭔가를 그리고 있었다. 평소 성격이 산만한 그 아이가 이렇게 진득하게 붓글씨를 연습하는 모습은 신기할 따름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누렇게 바랜 한지 위에는 상반신은 거북이, 하반식은 벌 모양을 한 이상한 동물이 그려져 있었다. “엄마, 제가 그린 ‘거북이꿀’ 좀 보세요, 어때요?” 지아가 피식 웃었다.“멋지네, 상상력이 대단하구나.” “엄마는 너무 착해요. 오빠가 그린 저 형편없는 그림 같은 건, 제가 하루에 5kg도 그리겠어요.” 옆에서 이 말을 들은 소망이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소망의 손 아래에서는 웅장하고 세밀한 산수화가 완성되고 있었는데, 그 그림은 해경의 장난스러운 그림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해결은 질세라 소망과 말다툼을 벌였지만, 지아는 두 아이의 다툼이 익숙한 듯 신경 쓰지 않았다. 무무는 붓 대신 해바라기씨를 쥐고 앵무새와 놀고 있었다. 지아는 무무의 머리를 쓰다듬고 그 아이를 안아 부남진의 옆으로 다가갔다. 부남진은 지윤이 마지막 획을 내리는 것을 지켜보며 크게 소리쳤다.“좋아! 아주 훌륭해!” 지윤은 붓을 내려놓고 고요한 얼굴로 일어섰다. 마치 도윤을 복제한 듯한 그 작은 얼굴에는 이 시대의 어린아이답지 않은 침착함이 서려 있었다.“엄마.” 지윤이 지아를 향해 다가왔다. 또래 아이들과 같은 활발함을 찾아볼 수는 없었지만, 그녀를 마주한 그 아이의 눈에서는 분명 반짝이는 빛이 스쳤다. 이제야 비로소 어린아이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지아는 무무를 내려놓고, 지윤의 어깨에 묻은 먼지를 손으로 털어주며 부드럽게 말했다.“정말 잘 썼네.”“엄마, 감사해요.”단순한 칭찬 한마디에
지아는 더 이상 에둘러 말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물었다.“할아버지, 고모님과 하용 씨를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부남진이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중재하러 온 게야?” “저도 여자인지라, 예전에 많은 일을 겪어봤어요. 물론 하용 씨가 과거에 잘못한 일이 많긴 하지만, 하용 씨가 한 모든 행동은 고모님을 위한 거였어요. 고모님은 건강이 좋지 않으신데, 하용 씨와 헤어진 후에 건강이 더 나빠질까 봐 걱정돼요.” 부남진은 붓을 들고 글씨를 쓰며 물었다.“그날 밤, 내가 두 사람과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아니?”“제가 어떻게 할아버지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겠어요.” “하용이한테 두 가지 조건을 제시했지. 첫째는 하씨 가문과 완전히 결별할 것.” “그건 이미 이루어졌잖아요.” 부남진은 깊은 뜻을 담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리석은 아이 같으니라고. 하씨 가문과의 결별이 말로만 되는 거라고 생각하니? 그건 혈연뿐만 아니라, 수많은 관계가 얽혀 있는 거란다. 하용이 하씨 가문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해도, 하씨 가문이 그렇게 쉽게 놓아주지 않을 거야.” “그럼 두 번째 조건은 뭐였어요?”‘첫 번째가 이렇게 어려우면, 두 번째는 분명히 더 어려울 거야.’ “하씨 가문을 혼수로 주면, 화연이를 하용이에게 시집보내겠다고 했지.”말문이 막힌 지아는 눈을 크게 떴다.‘역시 정치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비즈니스에 종사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냉혹하구나.’ 부남진이 그녀의 할아버지가 아니었더라면, 욕을 한마디 뱉었을 것이었다. “속으로 날 욕하는 건 아니겠지?” 지아가 억지로 웃으며 대답했다.“그럴 리가요, 할아버지.” “나를 욕하는 것도 이해한다. 너희가 보기에는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잔인해 보일 테니까. 하지만 정치 세계는 너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냉혹해. 하씨 가문을 없애지 않으면, 나는 편히 잠들 수 없으니까.”“그리고 하용이는 이 일을 할 수 있는 최적의 인물이야. 하씨 가문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그 관계에서 깨끗이 벗어나야만, 내가
부남진의 제안에 지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했다.“할아버지, 제가 정말로 한대경 각하께 관심이 있었다면 도망치지 않았을 거예요. 저는 재혼할 생각이 없어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부남진은 약간의 실망을 숨기지 못했지만, 지아에게 강요하지는 않았다.“그렇게 하렴. 내가 바라는 건 네가 매일 행복한 것뿐이니까. 하지만 내일 연회에는 꼭 참석해야 해. 드레스는 마음에 드니?” “네, 마음에 들어요. 그런데요, 할아버지,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아이들은 참석하지 않았으면 해요.” “그래, 아이들은 아직 어리니까 잘 보호해야지.” “할아버지, 상대는 내일 움직일 가능성이 높아요. 저를 사무치게 원망하는 그 사람은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을 거예요.” 부남진이 손에 들고 있던 붓을 탁 내려놓으며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걱정하지 마라, 아가. 내가 그 인간을 두려워할 것 같으냐? 그 인간이 제 발로 찾아온다면,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하지도 말아야 할 거야! 네 삼촌에게도 이미 단단히 준비하라고 일러두었어.” 지아가 한숨을 내쉬었다.“그 사람은 제 친가와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높아요. 할아버지, 정말 할머니의 행방을 모르시나요?”“할머니만 찾을 수 있다면, 모든 진실이 밝혀질지도 몰라요. 혹시 할머니나 아버지 세대의 원한 때문이 아닐까요?” “그때의 네 할머니는 아무 말도 없이 떠났지. 나는 그 사람을 찾기 위해 큰 노력을 했지만, 큰 해일을 만나면서 또 환희와 헤어지고 말았어. 그때 내가 그 사람의 손을 더 꽉 잡았더라면, 그 사람은 떠나지 않았을 거야.” 그날의 일을 떠올린 부남진은 여전히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마치 타이타닉의 여주인공이 얼음 속에서 남주인공이 바다에 잠기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인간은 대자연 앞에서 바다의 물방울처럼 작고 보잘것없다. 그러니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바다에 삼켜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부남진은 다른 곳으로 떠밀려갔는데, 후에 여러 곳을 찾아다녔지만 환희
지아의 밝은 기분과 달리, 화연은 초조한 표정으로 다가와 그녀 앞에 섰다.“지아야, 어젯밤에 하용 오빠가 집에 돌아오지 않았어. 너무 걱정돼.” 지아는 그가 돌아오지 않은 원인을 알고 있었다. 하광에게 그리 심하게 맞았으니, 화연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숨어 있을 것이었다. “설 연휴가 다가오니 다들 바쁠 거예요. 하용 씨뿐만 아니라 도윤 씨도 정신없이 바쁜걸요. 고모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보세요, 삼촌도 매일 야근하고 계시잖아요.” “하지만...”“아무 일도 아닐 거예요. 게다가 지금 고모님께서 하셔야 할 일은 충분한 휴식과 피부 관리예요. 오후에는 스타일링 해주러 사람이 올 거예요. 오늘 밤에는 고모님이 주인공이니까 아름다운 모습으로 등장해야죠.” 화연은 분명 지아보다 몇 살 더 많았지만, 그녀 앞에서는 어린 동생처럼 굴었다. 오히려 지아가 그녀를 달래야 할 정도였다. “오늘 밤 연회에 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대단한 분들이세요. 부씨 가문의 아가씨가 초췌한 모습을 보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전에 가짜 아가씨였던 미셸은 매일 으스댔잖아요. 고모님은 이제 부씨 가문의 진짜 아가씨로서 당당한 모습을 보여야 해요. 앞으로는 부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명실상부하게 자리 잡으실 거니까요. 하용 씨도 오늘 밤에는 나타나실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지아는 부드러운 말투로 설득하며 화연을 쉬게 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각자의 인연과 운명이 있는 법이다. 지아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산더미처럼 쌓인 상황에서, 화연의 삶에 지나치게 간섭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 지아는 아주 오랜만에 연회에 참석하는 것이었다. 도윤과 함께 지낼 때 그녀는 혼인 사실을 숨기고 있었고, 이후에는 몇 번의 이별과 재결합을 반복했으니 연회 참석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렇게 따지면 그녀가 가장 빛났던 시절은 소씨 가문이 파산하기 전이었다. 부남진은 화연에게 드레스 몇 벌을 선물했고, 지아도 정성껏 준비시켰다.딸이든 손녀든, 그는 똑같이 소중했다.
화연의 어색함과 달리, 지아는 훨씬 여유롭고 당당한 모습이었다. 화려한 드레스와 은은한 향수, 명문가의 품격이 묻어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녀는 마치 오래된 지인을 만난 듯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그중에는 과거에 지아와 친분이 있던 이들도 있었다. 그녀를 한눈에 알아본 이들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지아니?”그중 한 사람이 지아에게 다가와 물었다. 지아 또한 그 사람이 우명석이라는 것을 곧바로 알아보았다. 그는 과거에 소계훈이 프로젝트를 위해 자주 집에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던 어느 기관의 국장급 인사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그는 소계훈과 꽤 가까운 사이였다. 하지만 소씨 가문이 파산했을 때, 소계훈이 병원비를 감당하지 못해 도움을 요청하려던 순간, 그는 철저히 지아를 외면했었다. 지아는 돈과 관련된 일에서는 그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게다가 우명석은 소계훈과 가장 친한 사람이었기에, 지아는 자신만만하게 우명석을 찾아갔다. 하지만 만나기는커녕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지아는 우명석의 집 문 앞에서 비를 맞으며 무릎을 꿇어야만 했다. 그날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이었다. ‘무릎을 꿇은 채 정신을 잃었을 때도 보지 못한 사람을, 부씨 가문의 연회에서 만날 줄이야.’ 하지만 이미 11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우명석은 자리를 떠난 지 오래였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이유는 단 하나, 자기 아들을 업계 사람들에게 소개하기 위한 것! 우명석의 아들인 우창민은 젊은 나이에 인근 도시의 부시장 자리까지 오른,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인재였다. 그래서 그런 아들의 탄탄대로를 만들어 주기 위해 오늘의 연회에 온 것이었다. 여기서 지아를 만난 우명석도 다소 놀랐다. ‘소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지 오래인데?’ ‘물론 나중에 누군가가 소씨 가문을 재건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소계훈은 이미 죽었으니 남의 회사일 뿐이라고 생각했어.’ ‘오랫동안 연락이 없던 지아를 이런 자리에서 만날 줄이야.’ “안녕하세요, 정말 오랜만에 뵙
소씨 가문은 한때 A시에서 이름을 날리던 명문가였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파산으로 인해 많은 이들의 충격과 동정을 불러일으켰다.그리고 소씨 가문의 아가씨인 소지아마저 그 이후로 자취를 감췄다. 오늘 이 자리에서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다면, 아마 대부분은 그녀를 완전히 잊었을 것이었다. 한동안 소씨 가문은 술자리에서 빠지지 않는 화젯거리였다.지아가 어떻게 이씨 가문의 그 사람을 건드렸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결국 가문이 파산하고, 가족이 뿔뿔이 흩어진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물론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이런 자리에서 대놓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조금 전 지아의 단호한 태도는 우명석을 화나게 했다. 우명석은 한때 높은 자리에서 은퇴한 사람으로, 어디서나 모두의 존경을 받는 위치에 있었다. 그런 사람이 어찌 이런 자리에서 지아로 인해 체면을 구길 수 있겠는가. 마음속에 앙금이 남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과거에는 소계훈마저 우명석에게 고개를 숙이며 아첨했었는데, 지금은 외로운 고아가 된 그녀가 그의 체면을 깎아내리다니, 이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가볍게 말을 건넸을 뿐인데, 감히 날 무시하려 들어?!’ 사람은 높이 오를수록 속이 좁아지는 법이다. 자신의 위세에 반하는 이들을 용납하지 못하면서도, 더 높은 권력자 앞에서는 한없이 비굴해지는 것.그것이 바로 불쌍하고도 슬픈 인간의 본성이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도 환심을 사려는 어릿광대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강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우명석의 편에 서서 지아를 조롱하며 분위기를 띄우려 했던 것이었다. “아, 소씨 가문, 기억납니다. 소씨 가문이 파산한 건 이씨 가문의 그 분을 건드렸기 때문이라죠?” “작디작은 비즈니스 가문이 대체 무슨 배짱으로 그런 분을 건드린 건지 모르겠네요. 파산해도 할 말이 없는 거죠.” “근데 참 신기하네요. 소씨 가문은 파산했는데, 소지아 씨는 어떻게 이런 자리에 온 걸까요? 몇 년 동안 소식이 없었는데, 설마...”
우명석이 입을 열지 않았다면, 지아는 이미 과거의 일을 잊고 지나쳤을 것이었다. 그때는 그런 선택이 그의 처세술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었기에, 그녀는 이들에 대한 복수를 꿈꾼 적도 없었다. 하지만 우씨 가문은 최근 몇 년간 너무도 순탄한 나날을 보내다 보니, 이 자리가 어떤 곳인지조차 망각한 듯했다. 지아가 그의 가식적인 태도에 응하지 않자, 우명석은 이내 거만한 태도를 보였다.그녀는 더 이상 참지 않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과거에 어르신이 국토부의 한낱 말단 직원이었을 때, 제 아버지와 친분을 맺고 승진을 위해 하소연하셨던 일, 기억하시죠? 그때 제 아버지는 어르신을 돕기 위해 인맥을 소개해 드렸고, 덕분에 어르신은 국토교통부 장관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죠.”“저희 아버지의 은혜를 기억하길 바란 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해에 소씨 가문이 몰락했을 때, 제 아버지는 병원에서 긴급 수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직접 어르신의 댁을 찾아갔지만, 어르신은 댁에 계셨으면서도 저를 피해 숨으셨죠.”“귀찮은 일을 피하고 싶었던 마음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가식적인 몇 마디 말로 모든 걸 덮으려는 어르신의 태도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저는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제가 왜 사과를 해야 하죠? 대체 그게 무슨 논리입니까?” 지아의 말은 단숨에 숨겨진 우명석의 과거를 드러내며, 그의 체면을 구겨 벼렸다. 그 순간, 사람들 사이에서 익숙한 얼굴이 눈에 띄었다. 그 사람은 여금청이었다. 과거 금청은 채원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소씨 가문과 소계훈을 비난하는 말을 했고, 그 일은 소계훈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이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씨 가문은 파산을 맞이했고, 그것은 도윤의 작품이었다. 금청이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양기범은 그녀를 집으로 데려갔다. 두 사람이 결혼한 후, 그녀는 1남 1녀를 낳으며 완전히 다른 삶을 살기 시작했다. 후에 기범은 도윤의 지원 덕분에 A시에서 꽤나 중요한 인물이 되었고, 그
시월도 소영수의 침상에 엎드린 채 흐느꼈다.“할아버지, 조금만 더 기다려주지 그러셨어요... 저희가 마지막 모습을 뵐 수 있었을 텐데요...” “아가씨,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어르신께서는 너무 갑작스럽게 가셨고,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아마 마음의 상처를 받으신 게 큰 원인이었던 것 같습니다.”시하가 억지로 눈물을 삼키며 이를 악물었다.“집사님, 소식을 철저히 숨겼는데, 어떻게 할아버지께서 알게 되신 거죠? 대체 누굽니까? 누가 전화를 한 겁니까?”“이미 번호를 추적해 봤는데, 해외에서 걸려 온 가상번호였습니다. 발신자의 신원은커녕 구체적인 IP 주소조차 찾을 수 없었어요. 아무래도 처음부터 철저히 준비한 모양입니다.” 양준철의 두 주먹은 떨리듯 꽉 쥐어졌고, 붉게 충혈된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그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기만 하면, 그놈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뼈까지 갈아버려서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하게 할 거라고요!” 40년 전만 해도 양준철의 수법은 세상을 공포에 떨게 했다. 양준철은 어릴 때부터 거리에서 생계를 이어갔고, 살아남기 위해 무슨 짓이든 저질렀다. 소영수가 양준철을 부하로 삼은 것도 그의 잔혹함을 높이 샀기 때문이었는데, 사람들은 양준철의 이름만 들어도 겁에 질릴 정도였다.하지만 그런 양준철이 지켜야 할 은인이 눈앞에서 허망하게 떠나버렸다. 이는 양준철에게 있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오빠, 지금은 큰 오빠가 없으니까 오빠가 결단을 내려야 해. 할아버지 장례는 어떻게 할 거야?” 시하는 피눈물을 머금은 듯 입술을 깨물며 입을 열었다.“입관하고 조용히 묻어 드리자. 최소한... 할아버지께서 편히 잠들도록 해드려야지. 양 집사님, 장례를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시하는 소영수의 시신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할아버지, 평생을 할머니 곁에 가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이제야 소원을 이루셨네요.”“하지만 이렇게 급히 떠나시다니... 다 제 잘못입니다.
시월이 방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놀라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 “오빠, 괜찮아?” 멀찍이 떨어져 있던 지아가 차분하게 말했다.“아가씨, 멀리 떨어지세요. 감정 상태가 아주 불안정한 것 같아요. 아가씨까지 다칠 수도 있어요.”“우리 오빠가 왜 이렇게까지 된 거예요?” 장덕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방금 어르신의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대표님께서는 아직 비행기 사고로 연락이 안 되고, 시언 도련님은 이제 막 수술을 마친 터라, 지금 집안을 돌볼 수 있는 사람은 시하 도련님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소식을 전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할아버지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예요?”시월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할아버지가 왜요?” “집안에 닥친 변고를 들으신 순간 심장 발작으로...” “거짓말! 그 따위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집어치우라고!!” 시하는 옆에 있던 신발을 장덕수에게 집어 던졌고, 깜짝 놀란 장덕수는 급히 몸을 움직였다. “다 끝났어요, 시하 도련님도 미쳐버리셨다고요!” 지아가 침착하게 말했다.“두 분은 나가 있으세요. 시하 오빠는 제가 돌볼게요. 지금은 큰 충격을 받아서 안정할 시간이 필요해요.”“안 됩니다, 소 선생님, 그건 너무 위험해요. 도련님이 정신을 잃고 선생님을 다치게 할지도 모릅니다.”“괜찮아요. 시하 오빠의 다리 상태를 모르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저를 해칠 수 없을 거예요.” 지아가 무무를 불러 문을 잠그자, 방 안에는 차가운 공기만이 남았고, 피리 소리가 은은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문밖에서는 장덕수가 안절부절못하며 한숨을 내쉬었다.“이걸 어쩌죠... 도련님께선 원래도 심신이 불안정하셨는데, 이번 일로 완전히 무너지신 모양입니다. 이 와중에 어르신까지...”“본가로 갑시다!”목소리의 주인공은 시언이었다. 모두 고개를 돌리자, 휠체어에 앉은 그의 모습이 보였다.흉터를 감싼 붕대가 여기저기 엉성하게 드러났지만, 시언의 표정만큼은 이전과 다르게 단단하고 결의에 차 있었다. “오빠...”시
그 순간, 지아의 말에 시하의 눈빛이 굳어졌다.“그러니까... 아직 우리 가문에 스파이가 있다는 거야?”“잘 생각해 보세요. 소명담의 부검 결과가 나왔잖아요. 그 사람이 죽은 건 불과 몇 년 전이에요. 즉, 심세호가 그 사람의 신분을 사용한 것도 몇 년 안 되는 일이라는 뜻이죠.”“하지만 소씨 가문의 불행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잖아요. 족히 십여 년은 되었다고요! 내부에서 도와주는 자가 없었다면, 그 사람이 이렇게 순조롭게 일을 진행할 수 있었겠어요?”지아의 지적에 시하는 마침내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지아야, 네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어.” “물론 오빠를 탓할 수는 없어요. 소씨 가문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일들 때문에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원래 당사자는 상황을 제대로 살필 수 없는 법이잖아요.”“상대는 십 년,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을 들여 판을 짰을 거예요. 혼자만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 거란 뜻이죠.” 시하의 얼굴에 깊은 걱정이 스쳤다.“그럼 큰형이 더 위험하다는 말이잖아?”조경숙이 끌려간 것도 끝이 아닐 수 있었으며, 어쩌면 그게 시작일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안 돼, 큰형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해. 지금 저렇게 나서는 건 누군가의 함정에 빠져드는 것일 뿐이라고!” 시하는 안절부절못하며 목소리를 높였다.“형한테 당장 알려야겠어. 그리고 이 일은 할아버지께 비밀로 해야 해. 요즘 들어 할아버지의 건강이 많이 나빠지셨어. 이 사실을 알게 되시면 그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실 거야.” 지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시하를 달래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문밖에서 갑자기 노크 소리가 울렸다. “누구야?!”시하의 얼굴에는 불안이 그대로 드러났는데, 극도의 긴장 속에서 작은 소리조차 불길하게 들리는 듯했다.“도련님, 큰일 났습니다!”또 장덕수의 목소리가 들리자, 시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설마가 사람을 잡는다더니...”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 제가 먼저 나가 볼게요.”지아가 시하의
시월이 고개를 끄덕였다.“오빠, 절대 오빠를 실망하게 하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오빠도 건강을 잘 챙겨야 해요.” “그래.”시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나는 아버지 일부터 정리할게. 월아, 집안을 부탁해.” “오빠, 걱정하지 마세요. 집안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떠나기 전, 시후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덧붙였다.“그리고 월아, 소 선생님도 우리 사람이야. 무슨 일이든 소 선생님께 털어놓고 도움을 받도록 해.” “네, 알겠어요.”사람들 앞에서의 시월은 언제나 순종적이고 단아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의 표정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시월의 얼굴은 감출 수 없는 분노로 가득해졌다. “죽일 X! 그 X이 뭔데 나랑 같이 소씨 가문을 관리한다는 거야?” 심장후는 그런 시월의 손을 잡으며 위로했다.“됐어, 우리 계획은 이미 반이나 성공했잖아. 이제 소씨 가문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할 거야. 이미 도마 위에 올라간 생선이나 다름없으니, 더 이상 발버둥칠 여력도 없을 거라고.” “그래도 분하단 말이야. 지금이야말로 소씨 가문을 접수하기 가장 좋은 기회인데...” “소시후도 너를 걱정해서 그러는 걸 거야. 네가 혼란에 휩싸일까 봐 두려운 거지. 여태 기다렸는데, 이제 와서 조급해할 거 없어. 조금만 진정해 봐.” 시월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다리를 꼬며 담배를 꺼내 들었는데, 심장후는 서둘러 그녀에게 불을 붙여 주었다. 빨간 입술 사이로 한 줄기 연기가 피어오르고, 시월의 얼굴은 어느새 차분함을 되찾았다. “소씨 가문의 인간들 따위는 두렵지 않아. 이제 남은 건 그 노친네 하나뿐이야. 그 인간만 죽으면 소씨 가문은 완전히 끝장날 거라고. 한 명은 팔 하나를 잃었고, 하나는 절름발이가 됐잖아? 이제 별거 아닌 잡것들만 남았어.”“하지만 그 노친네는 만만치 않은 상대잖아.” “그래봤자 그 노친네의 시대는 가고, 우리의 시대가 왔어. 늙은 데다가 병까지 든 노친네가 무슨 힘을 쓰겠어? 내가 불쏘시개 하나만 더 던지면, 불길은
시후도 맞장구쳤다.“역시 우리 월이가 생각이 깊구나.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야.” “왜요, 오빠?”“상대의 목표는 우리 부모님뿐만이 아니야. 우리는 연이어 위기에 처했고, 이제 남은 건 너 하나뿐이야. 그 사람은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월아, 앞으로는 외출할 때 늘 경호원을 대동하고, 출발 전에 차량도 철저히 점거해야 해. 그리고 당분간은 모든 공개 활동을 중단하도록 해.” 시월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큰오빠, 저는 우리 소씨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 우리 가문은 대대로 이어져 왔고, 아빠도 많은 걸 바치셨잖아요. 아빠가 심혈을 기울인 모든 게 물거품이 되는 건 싫어요. 지금은 저만이 가문을 책임질 수 있는데, 저는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이 복잡해질까 봐 걱정된다고요!”“네 마음은 잘 알겠어. 하지만 지금 상황은 결코 낙관적이지 않아. 월아, 넌 우리 가문의 마지막 희망이야. 오빠들이 너를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잖아. 게다가 아버지도 떠나시기 전에 시간을 벌 수 있는 준비를 해두셨을 테니까, 당분간은 집에만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어디든 나가면 안 돼, 알겠지?” 시후가 시월의 어깨를 두드리며 다정하게 말했다.“너 자신을 꼭 돌봐야 해. 오빠들은 너까지 잃고 싶지 않아.” “형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월이를 꼭 지킬 겁니다.” “그래.”시후가 고개를 돌려 심장후를 바라보았다.“장후야, 우리가 이 사건과 연관 있는 심세호라는 사람을 찾아냈는데, 혹시 심씨 가문의 사람일까?” 심장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형님께서 말씀하시는 심세호가 저희 할아버지의 사생아인지는 모르겠네요. 저희 아버지에게 큰아버지 이전에 사생아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 사람은 할아버지를 무대에서나 볼 수 있는 하찮은 술집 여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었어요.”“하지만 그 술집 여자와 사생아 모두 우리 심씨 가문에서는 인정받지 못했죠. 제 아버지조차 그 사람과 왕래가 거의 없었으니, 우리 같은 후손들은 더 말할 것도 없죠.
지아는 새로 등장한 인물이 너무도 당황스러웠다. 낯선 얼굴이었지만, 소시월과의 관계는 아주 가까워 보였다. 지아의 의문을 눈치챘는지, 시후가 차분히 설명했다.“심씨 가문의 장남, 심장후예요. 월이의 약혼자이기도 하죠.” ‘심씨 가문?’지아는 순간 이 세상이 참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돌고 돌아 같은 곳으로 되돌아온 셈이었으니 말이다. 도윤의 어머니인 심예지 역시 심씨 가문의 사람이었으나, 과거의 그녀는 사랑을 택하며 심씨 가문과의 인연을 끊었다. 그런 심씨 가문의 후계자가 소시월의 약혼녀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지자, 심장후가 자연스럽게 지아를 바라보았다. “이분은...?”시월이 눈물을 훔치며 소개했다.“내가 얘기했던 뛰어난 의술을 갖춘 소 선생님이셔. 우리 시하 오빠가 마음에 두고 있는 분이기도 하지.” 지아가 심장후의 손을 잡아끌며 지아 쪽으로 향했다.“소 선생님, 제 약혼자예요.” “안녕하세요.”지아가 무심한 듯 담담하게 인사했다. “소 선생님, 반갑습니다. 젊은 나이에 그렇게 뛰어난 의술을 가졌다니, 정말 존경스럽습니다.”지아는 고개를 끄덕일 뿐, 더는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심장후 역시 지아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시후에게 걱정스러운 눈길을 돌렸다.“소 대표님께서는...” 지아의 눈빛이 경계심으로 살짝 굳어지자, 시월이 급히 설명했다.“미안해, 오빠, 내가 이야기했어. 장후 오빠랑 전화하면서 울음을 참지 못하는 바람에...” 시후는 이런 일을 외부에 알리고 싶지 않았지만, 시월과 장후의 사이를 알기에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원래 올해 두 가문이 결혼 문제를 상의할 계획이었으나, 지금 같은 상황에선 모든 것이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장후도 우리 소씨 가문의 사람인 셈이니까.” 이미 온 사람을 돌려보낼 수도 없었으니, 시후는 애써 평정심을 유지했다.하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그의 손끝은 마음속의 혼란을 드러내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께서 타신 비행기가 폭발했어. 아
시하는 시언이 하고 싶었던 말을 대신했다.“나도 잘못이 있어. 그동안 책임은커녕 모두에게 짐이 되었으니까.” “그만 좀 하세요!”지아가 탁자를 치며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지금은 서로에게 사과할 때가 아니에요. 여러분이 이럴수록 심세호를 기쁘게 할 뿐이라고요. 아직 비행기 사고로 대표님의 사망을 확정할 수는 없어요. 섣불리 결론을 내릴 수 없다고요.” 지아는 곧은 자세로 서 있었다.‘내가 소씨 가문에서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여러분은 최악의 상황도 대비해야 해요. 만약 대표님께서 정말 돌아가셨다면, 여러분이 아들로서 소씨 가문을 지켜내야 한다고요. 가족을 슬프게 하고, 원수를 기쁘게 만드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해요.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사모님께서 어디에 계시는지 찾아내는 일이에요. 사모님은 최대한 빨리 눈을 치료해야 한다고요. 그렇지 않으면 회복이 불가능해질 거예요!” “게다가 소 대표님은 해외 사업을 접고 귀국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 일을 이어받을 사람이 필요해요. 나라에는 왕이 하루도 없어선 안 되는 법이잖아요. 이런 상태라면, 소씨 가문은 곧 무너지고 말 거라고요!” 이어서 지아는 시언에게 조언했다.“건강을 반드시 회복하셔야 합니다. 하루라도 빨리 나아지셔야 가족 모두가 안정을 찾고 희망을 가질 수 있을 테니까요.”지아는 몇 마디로 어지러운 상황을 안정시켰다. 함께한 시간이 길지 않았고, 나이도 그들보다 어렸지만, 그녀의 말에는 이상할 정도의 신뢰감이 묻어나고 있었다. “맞습니다. 우리는 절대 무너지면 안 돼요. 소 선생님이 있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지아가 시후를 부축해 앉혔는데, 사실 지아가 가장 걱정하는 사람은 바로 소시후였다. 시후는 지아 다음으로 성공한 실험체였지만, 신장병은 여전히 완치되지 않은 상태였고, 예전보다 살아남을 확률이 조금 더 높아졌을 뿐이었다. 시후의 몸과 마음은 이미 지쳐 있었기에, 지아는 그가 버티지 못할까 봐 걱정되었다. 지아는 이런 걱정을 안고 시후를 부드럽게
지금 소씨 가문 사람들이 가장 듣기 싫은 소식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그 말이 전해지자 모두의 눈가가 떨리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장 집사님, 장 집사님은 집안의 어른이시잖아요. 어쩜 그렇게 경솔할 수 있으세요?” 지아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지아는 처음 소씨 가문에 왔을 때 자신을 맞이하던 장덕수의 침착함과 신중함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지금 이토록 당황하며 문턱에서 넘어질 정도로 급하게 들어왔다는 갓은, 사건이 간단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장 집사님, 대체 무슨 일이에요?”시월이 다급히 그를 부축하며 물었다. 장덕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께서 탑승하신 개인 비행기가... 비행 중에 화염에 휩싸였습니다. 비행기가... 폭발했다고요!” “뭐, 뭐라고요?!”시월은 그 자리에서 바로 기절하고 말았다. “월아!”시후는 곧장 시월을 안아 들었는데, 이는 혼란스러운 소씨 가문이 더욱 큰 혼란에 빠져드는 순간이었다. 지아는 빠르게 다가가 시월의 상태를 살폈다.“걱정하지 마세요. 아가씨는 단지 충격으로 실시하신 것뿐이에요. 잠시 쉬면 곧 깨어나실 거예요.” “누가 월이 좀 방으로 옮겨주세요! 휴식이 필요합니다!” “예, 도련님!”고용인이 시월을 방으로 데려가자, 거실에 남은 사람들의 표정은 말 그대로 참혹해졌다. 시후는 아직 치료받지 않아 병약한 얼굴로 서 있었고, 시언은 수술을 막 끝낸 상태에서 시하와 마찬가지로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게다가 시월은 너무 놀라 혼절하기까지.“형, 아버지는...”가장 강인하던 시언의 눈시울조차 붉어져 있었다. 하지만 가장 어려운 상황에 놓인 것은 장남인 시후였다. 그는 집안의 가장으로서, 누구보다 힘들었지만 지금은 더욱 강한 척해야만 했다. “괜찮을 거야. 단지 비행기 사고일 뿐이야. 기적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시하는 두 주먹을 꽉 쥔 채 휠체어를 세게 내리쳤는데, 그의 눈가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 “분명 심세호가 한 짓이야! 사랑이 증오로 변한
다행히 지금은 60년 전처럼 정보가 부족한 시대가 아니어서, 원하기만 하면 충분히 알아낼 수 있을 것이었다. 게다가 조경숙은 조씨 가문 출신으로, 이름 높은 명문가 자제였다.집안에는 여섯 명의 오빠가 있었고, 조경숙은 유일한 딸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온 가족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즉, 집안의 보석 같은 존재로, 아름다운 외모와 온화한 성품을 겸비한 인물이 된 것이었다.조경숙은 성인이 되기 전부터 이미 여러 집안에서 혼인을 청했고, 심지어 해외의 명문가들도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조경숙의 수많은 구혼자 중에서도 한 사람만이 유독 특별했다.그 시절 조경숙을 쫓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부호들이었기에, 단순히 재산만으로는 그들의 우열을 가릴 수 없었다.하지만 그중 한 명은 천재 발명가로 불리며, 동시에 뛰어난 의술로 이름을 떨쳤던 인물이었다. 그의 사랑은 그야말로 뜨겁고 격렬했으며, 조경숙을 얻기 위해 극단적인 행동까지 서슴지 않았다.조경숙이 소임호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음에도, 그는 결코 그녀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소임호가 무슨 방법을 썼는지, 그 천재 발명가는 갑작스레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 의학 미치광이의 소개서를 읽은 지아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역시 지아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 천하의 악당 같은 의학 천재는 루이스가 길러낸 첫 번째 제자였는데, 이미 사제 관계가 파탄 나긴 했으나, 지아는 그를 ‘선배’라고 불러야 했다. ‘이미 파문되었다던 그 사람이 사모님과 그렇게 깊은 연관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어.’ ‘그래서 그 사람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피부에서 별다른 징후를 발견하지 못했던 거구나.’그의 나이를 추정하면 이미 50세가 되었을 것이었다.얼굴은 가면으로 감출 수 있겠지만, 몸은 속일 수 없지 않겠는가?그 사람의 피부는 마치 20대나 30대처럼 매끄럽고 탱탱해, 지아는 그가 소명담이 아닐 거라고 의심하지 못했다. 루이스 역시 젊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