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란은 참다못해 주건에게 달려들어 격렬한 싸움을 벌였고, 싸우는 도중에 그녀의 동생인 이명장의 이름을 불렀다. 옆방에 있던 이명장은 그 소리를 듣고 나가려 했지만, 손톱을 칠하던 그의 아내가 손을 붙잡고 만류했다.“어딜 가려고요? 아주버님이 괜히 속상해서 저러시는 걸 거예요. 나가서 당신까지 얻어맞기라도 하면 어떡해요?”“하지만 나의 누님이잖아. 우리가 이렇게 잘 사는 건 다 누님 덕분이야. 누님이 아니었으면 당신이 그렇게 비싼 옷을 입을 수 있었겠어?” “웃기지 마세요.”“하긴, 맞아요.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게 다 형님 덕분이긴 하죠. 하지만 지금도 그럴까요? 시내에 있는 그 몇 채나 되는 집을, 우리는 쓰지도 못하잖아요. 돈이 있어도 쓸 수가 없고요. 도대체 언제까지 이 산속에 숨어 지내야 하는 거예요? 당신도 형님이 건드린 상대가 누군지 잘 알잖아요. 애초에 형님이 없었다면, 우리가 이렇게 고생하진 않았을 거예요. 가난했더라도 이런 곳에서 숨죽이고 살진 않았을 거라고요!” 이명란은 문 앞에 서서 박은숙이 하는 말을 모두 들었다. 과거의 박은숙은 언제나 활짝 웃으며 그녀에게 ‘형님, 형님’하며 친근하게 굴었는데, 이제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화가 치밀어 오른 이명란이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여태 날 그렇게 생각했겠다?” 예전 같으면 그녀가 살짝 눈썹을 찡그리기만 해도 긴장하던 박은숙은 그저 손톱을 칠하며 차갑게 말했다.“아주버님이 너무 약하게 때린 모양이네요.” 이명장이 그녀를 매섭게 노려보았다.“말 좀 가려서 해!” “내 말이 틀렸어요? 우리는 원래 A시에서 잘 나갔다고요. 그런데 형님 때문에 다 여기로 도망 온 거잖아요. 당신은 참을 수 있을지 몰라도, 나는 못 참아요!” 이명란이 붉게 붉어오른 뺨과 이마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차갑게 대답했다.“싫으면 떠나. 누가 붙잡을 줄 알고?” “떠나라고요? 형님이 부씨 가문을 건드렸잖아요. 우리한테 무슨 선택지가 남았는데요?” 박은숙은 발밑에 놓인 나무 의자를 걷어차며 이명란을
미셸은 한 번도 그런 표정을 짓는 하용을 본 적이 없었다. 비록 그가 그녀에게 잘해주던 시절에도 미소를 띠곤 했지만, 화연을 바라볼 때의 그 미소와는 차원이 달랐다. 따스함이 감도는 눈빛과 눈썹, 그리고 눈동자. 그것이야말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었다.마치 화연이 깨지기 쉬운 도자기라도 되는 듯, 살짝만 부딪혀도 부서질까 조심스럽게 다루는 모습... 그에 비하면, 미셸에게 보여준 것은 그저 겉치레에 불과한 가짜 애정이었다. 진실을 알게 된 순간, 미셸은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한기가 서서히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고, 하용과 화연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분명 난방이 잘 되는 곳에 서 있었지만, 온몸은 얼음장같이 차가웠고 얼굴에는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설령 미셸이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이제는 알 수 있을 것이었다. 하용이 단 한 번도 그녀를 사랑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그가 수년간 미셸에게 다가간 이유는 오로지 부씨 가문에 접근하기 위해서였다. ‘오빠와 아빠가 일찍부터 경고했었어. 하지만 그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어. 내 머릿속에는 오로지 이도윤에 대한 복수밖에 없었으니까.’ 미셸은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았다. 하용이 화연을 위해 하씨 가문의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다는 건, 화연이 그의 마음속에서 그 무엇보다 중요한 존재임을 의미했다. 그녀가 아랫배를 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내 계획이 모두 물거품이 되었구나.’ 이번에 미셸이 돌아온 것은 배 속의 아이를 핑계로 하용에게 자신을 받아달라고, 잘 지내보자고 부탁과 설득을 하기 위해서였다. 어쩌면 하용과 화연의 관계를 미리 알게 된 것이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경솔하게 하용의 앞에 달려들어 시체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미셸은 화연이 자신의 자리, 자신의 남자를 빼앗아 가는 모습을 두고만 볼 수 없었다.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그 순간, 지아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화연이 그녀의 이상한
부남진은 지아가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온 것과 부씨 가문이 친딸을 찾은 일을 기념하여, 대대적인 연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제 모든 사람에게 자기 딸이 미셸이 아닌 화연임을 알릴 계획인 것이었다. 이 소식은 삽시간에 퍼져, 사회의 중요한 인물들에게도 초대장이 전해졌다. 그 무렵 지아는 오랜만에 전화 한 통을 받았는데, 전화의 주인공은 바로 장민호였다. 민호가 한동안 연락이 없었던 터라, 지아는 그가 다시 나타난 것이 흥미로웠다. 그녀가 민호의 삶에 진한 흔적을 남기고 돌연 자취를 감추었을 때, 그는 심각한 상사병에 걸린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그의 어머니조차도 지아가 훌륭한 사람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며, 그녀를 꼭 붙잡으라 권하기도 했다. 민호는 지아와 자신의 사이에 피맺힌 원한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언젠가 지아가 자신이 강미연을 살해한 장본인임을 알게 된다면, 분명히 분노할 테니까.그런데도 마음은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심장 속에는 지아에 대한 감정이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민호는 지난 2년간의 채팅을 보면서 지아와의 만남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그는 자신이 이미 깊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요 며칠 지아가 냉담하게 민호를 대했던 것은 본래 그가 바란 결과였다. 하지만 막상 그녀의 무관심이 지속되자, 그는 그녀에 대한 생각에 밤을 지새우는 날이 많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민호는 새로운 지령을 받고 지아에게 다시 연락할 구실을 찾은 듯했다. 그는 급한 일이 있다며 그녀와 한적한 식당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민호는 맑은 눈망울과 새하얀 치아를 가진 지아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웠고, 몇 년 전보다 더 매혹적이고 고귀해 보였다. 마치 빛나는 진주처럼 눈부신 지아, 민호는 그녀를 정면으로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원래 민호는 지아가 자신에게 접근한 목적을 의심하곤 했으나, 오랫동안 연락이 끊긴 뒤에는 그녀에 대한 마음을 더욱 키우게 되었다.“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요?”민호가 먼저
민호는 무언가 말하려다가 망설이는 듯했다. 지아는 그에게 따지듯 몰아붙이지 않고, 그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천천히 빼냈다.“말하기 힘들면 안 해도 돼요. 일단 식사나 해요. 저는 곧 돌아가야 하니까요.”“지아 씨, 나는...”마침내 결단을 내린 듯, 민호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지아 씨, 나한테는 친구가 하나 있어요. 어떤 비밀 조직에 속한 녀석인데, 최근에 한 가지 소식을 들었다고 했어요.” “비밀 조직이요? 그게 뭔데요?”지아가 모르는 척하며 물었다. “국제 용병 조직 같은 거예요. 돈만 받으면 어떤 임무든 맡는데, 이를테면... 살인 같은 것도요.” “살인이요?”지아는 과거의 나쁜 기억이 떠오른 듯 얼굴을 굳혔다. “두려워하지 마요.”민호는 조산한 그날 밤이 그녀의 악몽이 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나는 당신을 다치게 두지 않을 거예요.” “미스터 정의 친구분이 들었다는 소식이 뭔데요?” “최근에 살해 의뢰를 받았대요.” “나를 죽이라는 의뢰군요, 맞죠?”지아가 씁쓸하게 웃었다.“이젠 익숙해요. 이미 수많은 살해 위협을 받아왔으니까요. 이번이 처음도, 마지막도 아닐 거예요. 저를 친구로 여겨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나는 이만 가볼게요.” 지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려 하자, 민호가 그녀의 손목을 급히 붙잡았다.“가지 말아요.” “나는 불행을 몰고 다니는 사람이에요. 가족도, 친구도, 심지어 애완동물조차도 나 때문에 해를 입었죠. 당신에게도 불행이 닥칠 거예요.”“지아 씨, 내가 진실을 밝히는 건, 당신을 돕고 싶기 때문이에요.” 민호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이번에 당신을 노리는 사람은 평범한 상대가 아니에요. 지아 씨, 제발 나와 함께 가요. 여기 머물면 언젠가는...” 오래도록 놓은 미끼가 드디어 물고기를 건진 순간이었다. 게다가 이 물고기는 그야말로 대어라고 할 수 있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아주 오래전부터 누군가가 날 죽이려 하고 있어요. 여러 방법으로 계속해서 날 쫓
지아의 맑은 두 눈동자에 주저함이 스쳤다.“됐어요, 더 이상 미스터 정을 이 위험천만한 일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요. 그 사람은 아주 잔인하고 무자비해요. 이전에 몇 번이나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건, 단지 운이 좋았던 거였다고요. 하지만 미스터 정은 평범한 사람이잖아요. 정말이지 미스터 정까지 위험에 빠뜨리고 싶진 않아요.” “지아 씨, 내가 정말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그런 친구를 사귀었겠어요?”민호는 지아와 함께하고 싶다는 진심을 내보이기로 결심했다. “당신은 대체...” “언젠가 내가 누군지 밝힐 날이 올 거예요. 하지만 그 전에, 반드시 그 악마 같은 사람을 잡아줄게요.” 지아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날 죽이려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요?” “아니요, 하지만 알아낼 수 있어요. 나만의 방법이 있으니까요. 지아 씨, 나한테 조금만 시간을 줘요. 그리고 한 가지 약속해 줘요. 꼭 조심하고, 전남편이 지아 씨를 보호해 줄 수 있다면... 잠시라도 그 사람의 곁에 머물러요.” “그러지 마세요. 나는 이미 친구가 거의 없어요. 미스터 정마저 잃고 싶지 않다고요.”지아가 걱정이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안심하세요, 나는 가장 안전한 곳에 있으니까요.” 민호는 손가락으로 지아의 얼굴을 살며시 어루만졌다.“살아남아서 내가 전할 소식을 기다려줘요.” 그는 이 말을 끝으로 황급히 떠났다. 그러나 민호가 떠난 후, 지아의 걱정스러웠던 얼굴은 순식간에 냉담해졌다. 그녀는 뜨거운 물수건을 집어 들고, 그가 어루만졌던 얼굴을 닦아냈다. 닦고 또 닦아, 피부가 빨갛게 달아오를 때까지 말이다. ‘역겨워, 저런 인간에게 닿은 흔적이라니.’ ‘당신, 나를 실망하게 하지 않길 바라요.’ 지아가 팔찌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미연아, 조금만 기다려. 곧 저 사람을 네 곁으로 보내서 사과하게 만들어 줄게.” 모든 것이 끝을 향해가고 있었다. 전효와 민호의 양쪽 지원을 받는다면, 이번에는 반드시 진실을 밝힐 수 있을 것이었다. 거미줄 같은 단서라도 발견한다면
하용이 무릎을 꿇었다.“아버지, 제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앞으로 하씨 가문의 일과 저는 무관합니다. 하씨 가문에 속하는 제 것은 이른 시일내에 모두 돌려드리겠습니다.” “멍청한 놈! 하씨 가문의 수많은 비밀을 알고 있는 주제에, 이대로 떠나겠다고? 네 할아버지가 너를 살려 둘 것 같으냐?” 하용이 낮게 웃었다.“저는 하씨 가문과 싸울 마음이 없습니다. 그저 사랑하는 여자가 평안하게 살아가길 바랄 뿐이니까요. 하지만 아버지와 할아버지께서 저를 죽이려 한다면, 저도 숨겨왔던 비밀을 터뜨릴 수밖에 없겠네요. 제가 몇 년간 하씨 가문을 위해 일하면서 알게 된 것들이 어디 있는지는, 저도 알고 있으니까요.”“은혜도 모르는 놈 같으니라고!”하광은 다시 그의 몸을 주먹과 발로 마구 때렸다. 그렇게 한참을 퍼부은 후에야 침을 뱉고는 경멸스럽게 말했다.“너도 네 어미랑 똑같구나. 도무지 구제할 수 없는 자식이야!” 지아는 급히 화분 뒤로 몸을 숨겼고, 분노에 찬 하광은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광이 떠난 후, 하용은 비틀거리며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더니 라이터를 들어 불을 붙이려 했다. 하지만 방금 하광에게 맞아 탈골된 손에서 라이터가 떨어졌고, 그것은 지아의 발치에 떨어졌다. 그녀는 라이터를 주워 하용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하용의 피투성이 얼굴은 잿빛이 되었지만, 지아를 보고도 놀라지 않고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게 되었네요.” 검은 양복에는 여기저기 발자국이 묻어 있었다. 지아는 이렇게까지 망가진 하용을 처음 봤기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저기...”하용은 담벼락에 기대어 앉아 깊은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연기가 그의 수려한 얼굴을 희미하게 가리자, 목젖이 움직였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그분은 제 아버지지만, 저는 하씨 가문의 사생아예요. 제 어머니는 밤거리를 전전하던 여자였죠.” 지아는 깜짝 놀랐다. 하용의 출생 비밀은 도윤조차 몰랐던 것이었다. ‘하씨 가문이 하
하씨 가문과는 다르게, 최근 부씨 가문은 연일 분주하고 활기가 넘쳤다. 지아가 돌아왔을 때, 고용인들은 온 집안을 환하게 밝힐 등을 걸고, 안팎으로 물청소하고 있었다. 그녀를 본 모든 이들이 친근하게 인사를 건넸다.“지아 아가씨, 돌아오셨군요.” 이명란이 떠난 후, 민연주가 집안을 새로 정비한 덕에 남아 있는 고용인들은 모두 온화하고 성실했다. 올해 부씨 가문은 모처럼 이런 북적임을 맞았다. 부남진은 다가올 새해를 맞이해 집 안 구석구석을 청소하라고 지시했다. 지아가 막 집에 들어서자, 화연이 그녀를 방으로 불렀다. 방에 들어간 지아는 고민에 빠진 그녀의 얼굴을 보고 다가가 물었다.“왜 그러세요, 고모님?” 방 한쪽에는 고급 맞춤 드레스들이 걸려 있었고, 색상과 디자인이 모두 달랐다. 지아는 그녀가 드레스 선택을 고민하는 줄 알고 말했다.“드레스 선택이 어려우신 건가요? 고모님은 아담한 체형이니까, 이 은색 드레스나 하얀색 드레스가 잘 어울린 것 같아요.” “그런 게 아니야.”화연이 지아의 손을 붙잡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나는 내일 밤 연회에 가고 싶지 않아.” “왜요? 거긴 인정받는 자리잖아요. 할아버지께서 모두에게 고모님이 진짜 딸임을 알리려는 건데, 고모님이 나가지 않으시는 건 말이 안 되죠.”지아는 그녀가 지나치게 민감하고 내성적이라 생각하며 다독였다.“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곁에 있을게요.” “내가 그 연회에 참석하면, 그 순간부터 정말 부씨 가문의 딸이 되는 거잖아.” “그렇죠, 설마 즐겁지 않으신 거예요?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삼촌까지 고모님을 찾아낸 걸 정말 기뻐하시잖아요.” 화연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오빠, 아버지, 어머니는 정말 나에게 잘 대해주셔. 그리고 과거의 모든 걸 보상해 주려 노력하시지. 하지만... 내가 부씨 가문의 딸이 되면 하용 오빠와는 끝이잖아. 나는 하씨 가문에서 오랫동안 살았기 때문에, 하씨 가문이 어떤 집안인지 너무도 잘 알아. 아버지는 절대 하용 오빠가 날 데려가는 걸 허락
지아가 한참 위로한 후에야, 화연의 감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지아가 서재로 돌아갔다. 평소 조용했던 서재는 보기 드물게 분주하고 활기가 넘쳤다. 부남진은 돋보기를 쓴 채 한쪽에 서 있었고, 그의 자리에는 지윤이 앉아 있었다. 지윤은 붓을 들고 한지 위에 여유롭게 먹물을 휘두르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해경도 붓을 들고 뭔가를 그리고 있었다. 평소 성격이 산만한 그 아이가 이렇게 진득하게 붓글씨를 연습하는 모습은 신기할 따름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누렇게 바랜 한지 위에는 상반신은 거북이, 하반식은 벌 모양을 한 이상한 동물이 그려져 있었다. “엄마, 제가 그린 ‘거북이꿀’ 좀 보세요, 어때요?” 지아가 피식 웃었다.“멋지네, 상상력이 대단하구나.” “엄마는 너무 착해요. 오빠가 그린 저 형편없는 그림 같은 건, 제가 하루에 5kg도 그리겠어요.” 옆에서 이 말을 들은 소망이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소망의 손 아래에서는 웅장하고 세밀한 산수화가 완성되고 있었는데, 그 그림은 해경의 장난스러운 그림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해결은 질세라 소망과 말다툼을 벌였지만, 지아는 두 아이의 다툼이 익숙한 듯 신경 쓰지 않았다. 무무는 붓 대신 해바라기씨를 쥐고 앵무새와 놀고 있었다. 지아는 무무의 머리를 쓰다듬고 그 아이를 안아 부남진의 옆으로 다가갔다. 부남진은 지윤이 마지막 획을 내리는 것을 지켜보며 크게 소리쳤다.“좋아! 아주 훌륭해!” 지윤은 붓을 내려놓고 고요한 얼굴로 일어섰다. 마치 도윤을 복제한 듯한 그 작은 얼굴에는 이 시대의 어린아이답지 않은 침착함이 서려 있었다.“엄마.” 지윤이 지아를 향해 다가왔다. 또래 아이들과 같은 활발함을 찾아볼 수는 없었지만, 그녀를 마주한 그 아이의 눈에서는 분명 반짝이는 빛이 스쳤다. 이제야 비로소 어린아이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지아는 무무를 내려놓고, 지윤의 어깨에 묻은 먼지를 손으로 털어주며 부드럽게 말했다.“정말 잘 썼네.”“엄마, 감사해요.”단순한 칭찬 한마디에
시월도 소영수의 침상에 엎드린 채 흐느꼈다.“할아버지, 조금만 더 기다려주지 그러셨어요... 저희가 마지막 모습을 뵐 수 있었을 텐데요...” “아가씨,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어르신께서는 너무 갑작스럽게 가셨고,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아마 마음의 상처를 받으신 게 큰 원인이었던 것 같습니다.”시하가 억지로 눈물을 삼키며 이를 악물었다.“집사님, 소식을 철저히 숨겼는데, 어떻게 할아버지께서 알게 되신 거죠? 대체 누굽니까? 누가 전화를 한 겁니까?”“이미 번호를 추적해 봤는데, 해외에서 걸려 온 가상번호였습니다. 발신자의 신원은커녕 구체적인 IP 주소조차 찾을 수 없었어요. 아무래도 처음부터 철저히 준비한 모양입니다.” 양준철의 두 주먹은 떨리듯 꽉 쥐어졌고, 붉게 충혈된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그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기만 하면, 그놈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뼈까지 갈아버려서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하게 할 거라고요!” 40년 전만 해도 양준철의 수법은 세상을 공포에 떨게 했다. 양준철은 어릴 때부터 거리에서 생계를 이어갔고, 살아남기 위해 무슨 짓이든 저질렀다. 소영수가 양준철을 부하로 삼은 것도 그의 잔혹함을 높이 샀기 때문이었는데, 사람들은 양준철의 이름만 들어도 겁에 질릴 정도였다.하지만 그런 양준철이 지켜야 할 은인이 눈앞에서 허망하게 떠나버렸다. 이는 양준철에게 있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오빠, 지금은 큰 오빠가 없으니까 오빠가 결단을 내려야 해. 할아버지 장례는 어떻게 할 거야?” 시하는 피눈물을 머금은 듯 입술을 깨물며 입을 열었다.“입관하고 조용히 묻어 드리자. 최소한... 할아버지께서 편히 잠들도록 해드려야지. 양 집사님, 장례를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시하는 소영수의 시신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할아버지, 평생을 할머니 곁에 가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이제야 소원을 이루셨네요.”“하지만 이렇게 급히 떠나시다니... 다 제 잘못입니다.
시월이 방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놀라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 “오빠, 괜찮아?” 멀찍이 떨어져 있던 지아가 차분하게 말했다.“아가씨, 멀리 떨어지세요. 감정 상태가 아주 불안정한 것 같아요. 아가씨까지 다칠 수도 있어요.”“우리 오빠가 왜 이렇게까지 된 거예요?” 장덕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방금 어르신의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대표님께서는 아직 비행기 사고로 연락이 안 되고, 시언 도련님은 이제 막 수술을 마친 터라, 지금 집안을 돌볼 수 있는 사람은 시하 도련님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소식을 전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할아버지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예요?”시월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할아버지가 왜요?” “집안에 닥친 변고를 들으신 순간 심장 발작으로...” “거짓말! 그 따위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집어치우라고!!” 시하는 옆에 있던 신발을 장덕수에게 집어 던졌고, 깜짝 놀란 장덕수는 급히 몸을 움직였다. “다 끝났어요, 시하 도련님도 미쳐버리셨다고요!” 지아가 침착하게 말했다.“두 분은 나가 있으세요. 시하 오빠는 제가 돌볼게요. 지금은 큰 충격을 받아서 안정할 시간이 필요해요.”“안 됩니다, 소 선생님, 그건 너무 위험해요. 도련님이 정신을 잃고 선생님을 다치게 할지도 모릅니다.”“괜찮아요. 시하 오빠의 다리 상태를 모르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저를 해칠 수 없을 거예요.” 지아가 무무를 불러 문을 잠그자, 방 안에는 차가운 공기만이 남았고, 피리 소리가 은은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문밖에서는 장덕수가 안절부절못하며 한숨을 내쉬었다.“이걸 어쩌죠... 도련님께선 원래도 심신이 불안정하셨는데, 이번 일로 완전히 무너지신 모양입니다. 이 와중에 어르신까지...”“본가로 갑시다!”목소리의 주인공은 시언이었다. 모두 고개를 돌리자, 휠체어에 앉은 그의 모습이 보였다.흉터를 감싼 붕대가 여기저기 엉성하게 드러났지만, 시언의 표정만큼은 이전과 다르게 단단하고 결의에 차 있었다. “오빠...”시
그 순간, 지아의 말에 시하의 눈빛이 굳어졌다.“그러니까... 아직 우리 가문에 스파이가 있다는 거야?”“잘 생각해 보세요. 소명담의 부검 결과가 나왔잖아요. 그 사람이 죽은 건 불과 몇 년 전이에요. 즉, 심세호가 그 사람의 신분을 사용한 것도 몇 년 안 되는 일이라는 뜻이죠.”“하지만 소씨 가문의 불행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잖아요. 족히 십여 년은 되었다고요! 내부에서 도와주는 자가 없었다면, 그 사람이 이렇게 순조롭게 일을 진행할 수 있었겠어요?”지아의 지적에 시하는 마침내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지아야, 네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어.” “물론 오빠를 탓할 수는 없어요. 소씨 가문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일들 때문에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원래 당사자는 상황을 제대로 살필 수 없는 법이잖아요.”“상대는 십 년,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을 들여 판을 짰을 거예요. 혼자만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 거란 뜻이죠.” 시하의 얼굴에 깊은 걱정이 스쳤다.“그럼 큰형이 더 위험하다는 말이잖아?”조경숙이 끌려간 것도 끝이 아닐 수 있었으며, 어쩌면 그게 시작일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안 돼, 큰형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해. 지금 저렇게 나서는 건 누군가의 함정에 빠져드는 것일 뿐이라고!” 시하는 안절부절못하며 목소리를 높였다.“형한테 당장 알려야겠어. 그리고 이 일은 할아버지께 비밀로 해야 해. 요즘 들어 할아버지의 건강이 많이 나빠지셨어. 이 사실을 알게 되시면 그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실 거야.” 지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시하를 달래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문밖에서 갑자기 노크 소리가 울렸다. “누구야?!”시하의 얼굴에는 불안이 그대로 드러났는데, 극도의 긴장 속에서 작은 소리조차 불길하게 들리는 듯했다.“도련님, 큰일 났습니다!”또 장덕수의 목소리가 들리자, 시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설마가 사람을 잡는다더니...”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 제가 먼저 나가 볼게요.”지아가 시하의
시월이 고개를 끄덕였다.“오빠, 절대 오빠를 실망하게 하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오빠도 건강을 잘 챙겨야 해요.” “그래.”시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나는 아버지 일부터 정리할게. 월아, 집안을 부탁해.” “오빠, 걱정하지 마세요. 집안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떠나기 전, 시후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덧붙였다.“그리고 월아, 소 선생님도 우리 사람이야. 무슨 일이든 소 선생님께 털어놓고 도움을 받도록 해.” “네, 알겠어요.”사람들 앞에서의 시월은 언제나 순종적이고 단아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의 표정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시월의 얼굴은 감출 수 없는 분노로 가득해졌다. “죽일 X! 그 X이 뭔데 나랑 같이 소씨 가문을 관리한다는 거야?” 심장후는 그런 시월의 손을 잡으며 위로했다.“됐어, 우리 계획은 이미 반이나 성공했잖아. 이제 소씨 가문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할 거야. 이미 도마 위에 올라간 생선이나 다름없으니, 더 이상 발버둥칠 여력도 없을 거라고.” “그래도 분하단 말이야. 지금이야말로 소씨 가문을 접수하기 가장 좋은 기회인데...” “소시후도 너를 걱정해서 그러는 걸 거야. 네가 혼란에 휩싸일까 봐 두려운 거지. 여태 기다렸는데, 이제 와서 조급해할 거 없어. 조금만 진정해 봐.” 시월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다리를 꼬며 담배를 꺼내 들었는데, 심장후는 서둘러 그녀에게 불을 붙여 주었다. 빨간 입술 사이로 한 줄기 연기가 피어오르고, 시월의 얼굴은 어느새 차분함을 되찾았다. “소씨 가문의 인간들 따위는 두렵지 않아. 이제 남은 건 그 노친네 하나뿐이야. 그 인간만 죽으면 소씨 가문은 완전히 끝장날 거라고. 한 명은 팔 하나를 잃었고, 하나는 절름발이가 됐잖아? 이제 별거 아닌 잡것들만 남았어.”“하지만 그 노친네는 만만치 않은 상대잖아.” “그래봤자 그 노친네의 시대는 가고, 우리의 시대가 왔어. 늙은 데다가 병까지 든 노친네가 무슨 힘을 쓰겠어? 내가 불쏘시개 하나만 더 던지면, 불길은
시후도 맞장구쳤다.“역시 우리 월이가 생각이 깊구나.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야.” “왜요, 오빠?”“상대의 목표는 우리 부모님뿐만이 아니야. 우리는 연이어 위기에 처했고, 이제 남은 건 너 하나뿐이야. 그 사람은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월아, 앞으로는 외출할 때 늘 경호원을 대동하고, 출발 전에 차량도 철저히 점거해야 해. 그리고 당분간은 모든 공개 활동을 중단하도록 해.” 시월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큰오빠, 저는 우리 소씨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 우리 가문은 대대로 이어져 왔고, 아빠도 많은 걸 바치셨잖아요. 아빠가 심혈을 기울인 모든 게 물거품이 되는 건 싫어요. 지금은 저만이 가문을 책임질 수 있는데, 저는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이 복잡해질까 봐 걱정된다고요!”“네 마음은 잘 알겠어. 하지만 지금 상황은 결코 낙관적이지 않아. 월아, 넌 우리 가문의 마지막 희망이야. 오빠들이 너를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잖아. 게다가 아버지도 떠나시기 전에 시간을 벌 수 있는 준비를 해두셨을 테니까, 당분간은 집에만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어디든 나가면 안 돼, 알겠지?” 시후가 시월의 어깨를 두드리며 다정하게 말했다.“너 자신을 꼭 돌봐야 해. 오빠들은 너까지 잃고 싶지 않아.” “형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월이를 꼭 지킬 겁니다.” “그래.”시후가 고개를 돌려 심장후를 바라보았다.“장후야, 우리가 이 사건과 연관 있는 심세호라는 사람을 찾아냈는데, 혹시 심씨 가문의 사람일까?” 심장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형님께서 말씀하시는 심세호가 저희 할아버지의 사생아인지는 모르겠네요. 저희 아버지에게 큰아버지 이전에 사생아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 사람은 할아버지를 무대에서나 볼 수 있는 하찮은 술집 여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었어요.”“하지만 그 술집 여자와 사생아 모두 우리 심씨 가문에서는 인정받지 못했죠. 제 아버지조차 그 사람과 왕래가 거의 없었으니, 우리 같은 후손들은 더 말할 것도 없죠.
지아는 새로 등장한 인물이 너무도 당황스러웠다. 낯선 얼굴이었지만, 소시월과의 관계는 아주 가까워 보였다. 지아의 의문을 눈치챘는지, 시후가 차분히 설명했다.“심씨 가문의 장남, 심장후예요. 월이의 약혼자이기도 하죠.” ‘심씨 가문?’지아는 순간 이 세상이 참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돌고 돌아 같은 곳으로 되돌아온 셈이었으니 말이다. 도윤의 어머니인 심예지 역시 심씨 가문의 사람이었으나, 과거의 그녀는 사랑을 택하며 심씨 가문과의 인연을 끊었다. 그런 심씨 가문의 후계자가 소시월의 약혼녀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지자, 심장후가 자연스럽게 지아를 바라보았다. “이분은...?”시월이 눈물을 훔치며 소개했다.“내가 얘기했던 뛰어난 의술을 갖춘 소 선생님이셔. 우리 시하 오빠가 마음에 두고 있는 분이기도 하지.” 지아가 심장후의 손을 잡아끌며 지아 쪽으로 향했다.“소 선생님, 제 약혼자예요.” “안녕하세요.”지아가 무심한 듯 담담하게 인사했다. “소 선생님, 반갑습니다. 젊은 나이에 그렇게 뛰어난 의술을 가졌다니, 정말 존경스럽습니다.”지아는 고개를 끄덕일 뿐, 더는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심장후 역시 지아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시후에게 걱정스러운 눈길을 돌렸다.“소 대표님께서는...” 지아의 눈빛이 경계심으로 살짝 굳어지자, 시월이 급히 설명했다.“미안해, 오빠, 내가 이야기했어. 장후 오빠랑 전화하면서 울음을 참지 못하는 바람에...” 시후는 이런 일을 외부에 알리고 싶지 않았지만, 시월과 장후의 사이를 알기에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원래 올해 두 가문이 결혼 문제를 상의할 계획이었으나, 지금 같은 상황에선 모든 것이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장후도 우리 소씨 가문의 사람인 셈이니까.” 이미 온 사람을 돌려보낼 수도 없었으니, 시후는 애써 평정심을 유지했다.하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그의 손끝은 마음속의 혼란을 드러내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께서 타신 비행기가 폭발했어. 아
시하는 시언이 하고 싶었던 말을 대신했다.“나도 잘못이 있어. 그동안 책임은커녕 모두에게 짐이 되었으니까.” “그만 좀 하세요!”지아가 탁자를 치며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지금은 서로에게 사과할 때가 아니에요. 여러분이 이럴수록 심세호를 기쁘게 할 뿐이라고요. 아직 비행기 사고로 대표님의 사망을 확정할 수는 없어요. 섣불리 결론을 내릴 수 없다고요.” 지아는 곧은 자세로 서 있었다.‘내가 소씨 가문에서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여러분은 최악의 상황도 대비해야 해요. 만약 대표님께서 정말 돌아가셨다면, 여러분이 아들로서 소씨 가문을 지켜내야 한다고요. 가족을 슬프게 하고, 원수를 기쁘게 만드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해요.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사모님께서 어디에 계시는지 찾아내는 일이에요. 사모님은 최대한 빨리 눈을 치료해야 한다고요. 그렇지 않으면 회복이 불가능해질 거예요!” “게다가 소 대표님은 해외 사업을 접고 귀국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 일을 이어받을 사람이 필요해요. 나라에는 왕이 하루도 없어선 안 되는 법이잖아요. 이런 상태라면, 소씨 가문은 곧 무너지고 말 거라고요!” 이어서 지아는 시언에게 조언했다.“건강을 반드시 회복하셔야 합니다. 하루라도 빨리 나아지셔야 가족 모두가 안정을 찾고 희망을 가질 수 있을 테니까요.”지아는 몇 마디로 어지러운 상황을 안정시켰다. 함께한 시간이 길지 않았고, 나이도 그들보다 어렸지만, 그녀의 말에는 이상할 정도의 신뢰감이 묻어나고 있었다. “맞습니다. 우리는 절대 무너지면 안 돼요. 소 선생님이 있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지아가 시후를 부축해 앉혔는데, 사실 지아가 가장 걱정하는 사람은 바로 소시후였다. 시후는 지아 다음으로 성공한 실험체였지만, 신장병은 여전히 완치되지 않은 상태였고, 예전보다 살아남을 확률이 조금 더 높아졌을 뿐이었다. 시후의 몸과 마음은 이미 지쳐 있었기에, 지아는 그가 버티지 못할까 봐 걱정되었다. 지아는 이런 걱정을 안고 시후를 부드럽게
지금 소씨 가문 사람들이 가장 듣기 싫은 소식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그 말이 전해지자 모두의 눈가가 떨리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장 집사님, 장 집사님은 집안의 어른이시잖아요. 어쩜 그렇게 경솔할 수 있으세요?” 지아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지아는 처음 소씨 가문에 왔을 때 자신을 맞이하던 장덕수의 침착함과 신중함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지금 이토록 당황하며 문턱에서 넘어질 정도로 급하게 들어왔다는 갓은, 사건이 간단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장 집사님, 대체 무슨 일이에요?”시월이 다급히 그를 부축하며 물었다. 장덕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께서 탑승하신 개인 비행기가... 비행 중에 화염에 휩싸였습니다. 비행기가... 폭발했다고요!” “뭐, 뭐라고요?!”시월은 그 자리에서 바로 기절하고 말았다. “월아!”시후는 곧장 시월을 안아 들었는데, 이는 혼란스러운 소씨 가문이 더욱 큰 혼란에 빠져드는 순간이었다. 지아는 빠르게 다가가 시월의 상태를 살폈다.“걱정하지 마세요. 아가씨는 단지 충격으로 실시하신 것뿐이에요. 잠시 쉬면 곧 깨어나실 거예요.” “누가 월이 좀 방으로 옮겨주세요! 휴식이 필요합니다!” “예, 도련님!”고용인이 시월을 방으로 데려가자, 거실에 남은 사람들의 표정은 말 그대로 참혹해졌다. 시후는 아직 치료받지 않아 병약한 얼굴로 서 있었고, 시언은 수술을 막 끝낸 상태에서 시하와 마찬가지로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게다가 시월은 너무 놀라 혼절하기까지.“형, 아버지는...”가장 강인하던 시언의 눈시울조차 붉어져 있었다. 하지만 가장 어려운 상황에 놓인 것은 장남인 시후였다. 그는 집안의 가장으로서, 누구보다 힘들었지만 지금은 더욱 강한 척해야만 했다. “괜찮을 거야. 단지 비행기 사고일 뿐이야. 기적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시하는 두 주먹을 꽉 쥔 채 휠체어를 세게 내리쳤는데, 그의 눈가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 “분명 심세호가 한 짓이야! 사랑이 증오로 변한
다행히 지금은 60년 전처럼 정보가 부족한 시대가 아니어서, 원하기만 하면 충분히 알아낼 수 있을 것이었다. 게다가 조경숙은 조씨 가문 출신으로, 이름 높은 명문가 자제였다.집안에는 여섯 명의 오빠가 있었고, 조경숙은 유일한 딸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온 가족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즉, 집안의 보석 같은 존재로, 아름다운 외모와 온화한 성품을 겸비한 인물이 된 것이었다.조경숙은 성인이 되기 전부터 이미 여러 집안에서 혼인을 청했고, 심지어 해외의 명문가들도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조경숙의 수많은 구혼자 중에서도 한 사람만이 유독 특별했다.그 시절 조경숙을 쫓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부호들이었기에, 단순히 재산만으로는 그들의 우열을 가릴 수 없었다.하지만 그중 한 명은 천재 발명가로 불리며, 동시에 뛰어난 의술로 이름을 떨쳤던 인물이었다. 그의 사랑은 그야말로 뜨겁고 격렬했으며, 조경숙을 얻기 위해 극단적인 행동까지 서슴지 않았다.조경숙이 소임호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음에도, 그는 결코 그녀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소임호가 무슨 방법을 썼는지, 그 천재 발명가는 갑작스레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 의학 미치광이의 소개서를 읽은 지아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역시 지아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 천하의 악당 같은 의학 천재는 루이스가 길러낸 첫 번째 제자였는데, 이미 사제 관계가 파탄 나긴 했으나, 지아는 그를 ‘선배’라고 불러야 했다. ‘이미 파문되었다던 그 사람이 사모님과 그렇게 깊은 연관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어.’ ‘그래서 그 사람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피부에서 별다른 징후를 발견하지 못했던 거구나.’그의 나이를 추정하면 이미 50세가 되었을 것이었다.얼굴은 가면으로 감출 수 있겠지만, 몸은 속일 수 없지 않겠는가?그 사람의 피부는 마치 20대나 30대처럼 매끄럽고 탱탱해, 지아는 그가 소명담이 아닐 거라고 의심하지 못했다. 루이스 역시 젊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