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가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오자, 부남진의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해졌다. 이전의 부씨 가문은 아주 불안정했는데, 아이들의 등장이 새로운 희망을 가져와 부남진의 마음을 한결 밝게 해주었다. 덕분에 도윤에 대한 태도도 한층 너그러워졌다.부남진은 그동안 도윤이 저지른 일들을 마음속 깊이 원망해 왔지만, 그가 아이들과 함께 있는 화목한 모습을 보자, 그 감정이 조금씩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결국 가족이 함께하는 것이 가장 행복한 일이지 않은가.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면, 젊었을 때는 명예와 이익을 좇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손주들을 품에 안은 채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마음만이 남았다. 식사 자리에서 부남진은 아이들에게 음식을 덜어주는 것뿐만 아니라, 특별히 도윤에게도 한 젓가락 덜어주었다. 이런 행동은 도윤이 놀라움과 기쁨이 섞인 표정을 짓게 했는데, 이전까지의 부남진은 그에게 직접적이고도 냉랭한 적대감을 보였기 때문이었다.한편, 화연은 아이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부러움과 다정함이 가득했다. 하용은 화연이 자신의 아이를 떠올리고 있음을 알고,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을 접시에 담아주었다. 이전의 부씨 가문은 한산하고 썰렁한 분위기였다. 부장경은 먼 곳에 있었고, 미셸은 도윤을 쫓아다녔기에, 명절이 되어도 집안에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오직 부남진과 민연주만이 남겨진 상태였다. 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지아가 새로운 가족을 들여왔고, 도윤과 하용, 그리고 네 명의 아이들까지 더해져, 부남진은 마치 몇 년은 젊어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연말이 가까워지자, 모두가 눈과 바람을 뚫고 집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부남진은 도윤과 하용을 불러 술잔을 기울였고, 평소 차분한 성격의 부장경까지도 얼굴이 붉어질 때까지 술을 마셨다. 지아는 무무를 목욕시킨 후, 무무와 소망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오른쪽과 왼쪽에는 자그마한 머리 두 개가 나란히 있었다. 이야기가 절정에 다다르자, 침대 위에서 작은 머리가 거꾸로 내려오며 한 마디를 외
지아는 지윤이 도윤을 가장 많이 닮았으면서도, 마음이 섬세하고 다정하여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지윤의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아가, 앞으로는 여기가 네 집이야. 우리는 모두 네 가족이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아무도 너를 탓하지 않을 거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해경이 방 안으로 신나게 뛰어 들어와 침대 위로 폴짝 올라왔다.“형, 살려줘!”소망은 화가 난 얼굴로 지윤의 다른 팔을 꼭 붙잡았다.“오빠, 나를 도와줘야 해! 둘째 오빠가 나쁜 행동을 했어!” 지아는 아이들이 한데 모여 장난치는 것을 보며 지윤이 조금씩 마음을 놓고 함께 어울리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결국 지윤은 해경과 소망을 양쪽에 두고 한 침대에서 함께 잠들었다.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한 아이씩 끼고 누운 지윤은 지친 얼굴로 곧 깊은 잠에 빠졌고, 지아는 세 아이를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무무의 옆에 누었고, 무무는 자연스럽게 몸을 말아 그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작은 아이의 따뜻한 체온을 느끼자, 지아의 마음에도 평온과 행복이 가득 차올랐다. 깊은 밤, 지아는 누군가의 손이 다리 사이로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잠시 후, 그녀는 누군가에 의해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졌다. 코끝에 퍼지는 은은한 술냄새, 그녀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지아는 도윤의 품에 안겨 그가 자신을 안고 가는 것을 내버려두었다.“지금까지 마신 거야?”“응.”도윤은 막 샤워를 마친 상태였다. 술냄새와 비누의 상쾌한 향이 섞여, 밤의 분위기 속에 묘한 기운이 감돌았다.그는 문을 닫고 무무를 위해 마련했던 침대 위에 그녀를 눕혔다. “지아야...”술을 마시면 도윤이 더욱 애정을 갈구하는 것을 알기에, 지아는 그가 자신의 품을 조르는 것을 부드럽게 받아주었다. 그러고는 큰 개 한 마리를 달래듯 다정하게 그를 어루만졌다. “보아하니 할아버지와의 이야기가 잘 풀린 것 같네. 할아버지가 도윤 씨를 남겨두셨으니까.” 도윤은 지아를 남자들
연말이 다가오자 모두가 바빠졌지만, 지아는 오히려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그저 매일을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으로 채웠다. 화연은 지아의 보살핌으로 많이 회복되었고, 하씨 가문의 제약에서 벗어나면서 더 이상 별장에만 갇혀 있지 않아도 되었다. 지아는 마치 다섯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것 같았는데, 화연은 그녀의 곁을 순진한 아이처럼 따라다녔다. “지아야, 이 드레스 말이야, 무무한테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아.”화연은 여전히 힘든 시간을 겪고 있었지만, 하씨 가문은 그녀를 물질적으로 크게 억압하지 않았고, 특히 하용은 언제나 아낌없는 재정 지원을 해주었다. 지아가 진봉을 비롯한 경호원들이 들고 있는 쇼핑백을 보며 말했다.“이미 충분해요. 저 옷들은 제가 열 명의 아이를 낳아도 다 입힐 수 없을 거예요.” 화연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참 좋겠다, 아직 열 명이나 더 낳을 수 있다니.” 지아는 이마를 짚었다. 화연은 아이를 갖는 것에 상당한 집착을 보였다. “고모님...”“괜찮아,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 다 지나간 일이니까 더는 미련 두지 않을 거야. 나도 새로운 계획이 생겼거든.” “무슨 계획이요?”“대학교 졸업 전에 약간의 문제가 생겨서 하용 오빠가 나를 집으로 데려왔어. 그 후로는 몇 년간 집에서 할 일 없이 지냈지.”“이제 친부모님을 찾았고, 부모님도 내 결정을 지지해 주셔. 난 그림을 좋아하니까 해외로 유학하러 가서 공부해 보고 싶어.” 지아는 화연이 스스로 떠나기를 결심할 줄은 몰랐기에 약간 놀랐다. “그럼 하용 씨는요?”“아직 오빠한테 말하진 않았고, 그냥 내 생각일 뿐이야. 하지만 지금은 나도 조금 더 회복이 필요하지.” 화연이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지아야, 난 네가 정말 부러워. 난 평생을 그 작은 세상 속에 갇혀 살 줄 알았거든. 하지만 네 덕분에 이 세상에 무한한 가능성이 있음을 깨달았어.”“여자는 남자의 부속품이 아니야. 하용 오빠가 나를 사랑하는 건 알지만, 나도 스스로 무언가를 하고 싶어. 오빠
이명란은 쪼그리고 앉아 묵묵히 조각들을 치우고 있었다. 하지만 미셸은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듯 그녀의 다리를 발로 걷어차며 소리쳤다. “정말이지 참을 만큼 참았어! 아줌마, 내가 어떤 사람인 줄 알잖아. 그런데도 매일 이렇게 형편없는 걸 먹으라는 거야?” 이명란은 어지럽게 흩어진 조각들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최근 들어 미셸의 짜증은 더욱 심해졌고, 사소한 일에도 화를 내기 일쑤였다. 그래서 그녀의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형편없다니. 이건 누군가가 몇 년 동안 곡물로 키운 자연산 닭이야. 사료 한번 먹여본 적 없는 귀한 닭을 천신만고 끝에 구해온 거고, 거기에 양고기를 몇만 원이나 들여가며 정성껏 끓인 거라고.”“우리 집이 부씨 가문만큼 부유하진 않더라도, 네가 먹고 입는 건 일반 사람들보단 훨씬 좋아. 이 정도로도 너의 불만을 잠재울 수 없다는 거야?” “감히 부씨 가문과 비교해? 아줌마는 우리 엄마의 손톱만큼도 따라오지 못해. 아줌마 같은 악독한 인간 때문에 내가 그런 꼴을 당한 거라고. 우리 부모님은 나를 사랑했고, 우리 오빠도...” 미셸은 매일 같이 부씨 가문을 칭송하며, 그 위대함을 이명란에게 상기시켰다. 하늘에서 떨어져 현실을 마주하게 된 미셸의 고통을 이해하려던 이명란은 결국 한계를 넘어서고 말았다. “그만 좀 해! 네가 그렇게 자랑하는 그 집은 이제 너와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그것도 내가 일깨워줘야겠니?” 이명란은 손에 들고 있던 조각을 바닥에 내던지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맞아. 내가 널 바꿔치기한 거야. 그런데 내가 왜 그랬겠니? 너라도 편안히 살게 해주고 싶어서였어. 그런데 너는 모든 잘못을 나한테 돌리고 있구나. 네가 함부로 굴지만 않았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거야. 너만 아니었으면 모든 비밀은 지금까지도 감춰져 있었을 테고, 이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테니까. 내가 너를 너무 오냐오냐 키운 모양이구나.”진실이 드러나자, 미셸의
이명란은 참다못해 주건에게 달려들어 격렬한 싸움을 벌였고, 싸우는 도중에 그녀의 동생인 이명장의 이름을 불렀다. 옆방에 있던 이명장은 그 소리를 듣고 나가려 했지만, 손톱을 칠하던 그의 아내가 손을 붙잡고 만류했다.“어딜 가려고요? 아주버님이 괜히 속상해서 저러시는 걸 거예요. 나가서 당신까지 얻어맞기라도 하면 어떡해요?”“하지만 나의 누님이잖아. 우리가 이렇게 잘 사는 건 다 누님 덕분이야. 누님이 아니었으면 당신이 그렇게 비싼 옷을 입을 수 있었겠어?” “웃기지 마세요.”“하긴, 맞아요.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게 다 형님 덕분이긴 하죠. 하지만 지금도 그럴까요? 시내에 있는 그 몇 채나 되는 집을, 우리는 쓰지도 못하잖아요. 돈이 있어도 쓸 수가 없고요. 도대체 언제까지 이 산속에 숨어 지내야 하는 거예요? 당신도 형님이 건드린 상대가 누군지 잘 알잖아요. 애초에 형님이 없었다면, 우리가 이렇게 고생하진 않았을 거예요. 가난했더라도 이런 곳에서 숨죽이고 살진 않았을 거라고요!” 이명란은 문 앞에 서서 박은숙이 하는 말을 모두 들었다. 과거의 박은숙은 언제나 활짝 웃으며 그녀에게 ‘형님, 형님’하며 친근하게 굴었는데, 이제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화가 치밀어 오른 이명란이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여태 날 그렇게 생각했겠다?” 예전 같으면 그녀가 살짝 눈썹을 찡그리기만 해도 긴장하던 박은숙은 그저 손톱을 칠하며 차갑게 말했다.“아주버님이 너무 약하게 때린 모양이네요.” 이명장이 그녀를 매섭게 노려보았다.“말 좀 가려서 해!” “내 말이 틀렸어요? 우리는 원래 A시에서 잘 나갔다고요. 그런데 형님 때문에 다 여기로 도망 온 거잖아요. 당신은 참을 수 있을지 몰라도, 나는 못 참아요!” 이명란이 붉게 붉어오른 뺨과 이마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차갑게 대답했다.“싫으면 떠나. 누가 붙잡을 줄 알고?” “떠나라고요? 형님이 부씨 가문을 건드렸잖아요. 우리한테 무슨 선택지가 남았는데요?” 박은숙은 발밑에 놓인 나무 의자를 걷어차며 이명란을
미셸은 한 번도 그런 표정을 짓는 하용을 본 적이 없었다. 비록 그가 그녀에게 잘해주던 시절에도 미소를 띠곤 했지만, 화연을 바라볼 때의 그 미소와는 차원이 달랐다. 따스함이 감도는 눈빛과 눈썹, 그리고 눈동자. 그것이야말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었다.마치 화연이 깨지기 쉬운 도자기라도 되는 듯, 살짝만 부딪혀도 부서질까 조심스럽게 다루는 모습... 그에 비하면, 미셸에게 보여준 것은 그저 겉치레에 불과한 가짜 애정이었다. 진실을 알게 된 순간, 미셸은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한기가 서서히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고, 하용과 화연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분명 난방이 잘 되는 곳에 서 있었지만, 온몸은 얼음장같이 차가웠고 얼굴에는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설령 미셸이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이제는 알 수 있을 것이었다. 하용이 단 한 번도 그녀를 사랑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그가 수년간 미셸에게 다가간 이유는 오로지 부씨 가문에 접근하기 위해서였다. ‘오빠와 아빠가 일찍부터 경고했었어. 하지만 그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어. 내 머릿속에는 오로지 이도윤에 대한 복수밖에 없었으니까.’ 미셸은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았다. 하용이 화연을 위해 하씨 가문의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다는 건, 화연이 그의 마음속에서 그 무엇보다 중요한 존재임을 의미했다. 그녀가 아랫배를 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내 계획이 모두 물거품이 되었구나.’ 이번에 미셸이 돌아온 것은 배 속의 아이를 핑계로 하용에게 자신을 받아달라고, 잘 지내보자고 부탁과 설득을 하기 위해서였다. 어쩌면 하용과 화연의 관계를 미리 알게 된 것이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경솔하게 하용의 앞에 달려들어 시체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미셸은 화연이 자신의 자리, 자신의 남자를 빼앗아 가는 모습을 두고만 볼 수 없었다.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그 순간, 지아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화연이 그녀의 이상한
부남진은 지아가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온 것과 부씨 가문이 친딸을 찾은 일을 기념하여, 대대적인 연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제 모든 사람에게 자기 딸이 미셸이 아닌 화연임을 알릴 계획인 것이었다. 이 소식은 삽시간에 퍼져, 사회의 중요한 인물들에게도 초대장이 전해졌다. 그 무렵 지아는 오랜만에 전화 한 통을 받았는데, 전화의 주인공은 바로 장민호였다. 민호가 한동안 연락이 없었던 터라, 지아는 그가 다시 나타난 것이 흥미로웠다. 그녀가 민호의 삶에 진한 흔적을 남기고 돌연 자취를 감추었을 때, 그는 심각한 상사병에 걸린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그의 어머니조차도 지아가 훌륭한 사람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며, 그녀를 꼭 붙잡으라 권하기도 했다. 민호는 지아와 자신의 사이에 피맺힌 원한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언젠가 지아가 자신이 강미연을 살해한 장본인임을 알게 된다면, 분명히 분노할 테니까.그런데도 마음은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심장 속에는 지아에 대한 감정이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민호는 지난 2년간의 채팅을 보면서 지아와의 만남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그는 자신이 이미 깊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요 며칠 지아가 냉담하게 민호를 대했던 것은 본래 그가 바란 결과였다. 하지만 막상 그녀의 무관심이 지속되자, 그는 그녀에 대한 생각에 밤을 지새우는 날이 많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민호는 새로운 지령을 받고 지아에게 다시 연락할 구실을 찾은 듯했다. 그는 급한 일이 있다며 그녀와 한적한 식당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민호는 맑은 눈망울과 새하얀 치아를 가진 지아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웠고, 몇 년 전보다 더 매혹적이고 고귀해 보였다. 마치 빛나는 진주처럼 눈부신 지아, 민호는 그녀를 정면으로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원래 민호는 지아가 자신에게 접근한 목적을 의심하곤 했으나, 오랫동안 연락이 끊긴 뒤에는 그녀에 대한 마음을 더욱 키우게 되었다.“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요?”민호가 먼저
민호는 무언가 말하려다가 망설이는 듯했다. 지아는 그에게 따지듯 몰아붙이지 않고, 그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천천히 빼냈다.“말하기 힘들면 안 해도 돼요. 일단 식사나 해요. 저는 곧 돌아가야 하니까요.”“지아 씨, 나는...”마침내 결단을 내린 듯, 민호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지아 씨, 나한테는 친구가 하나 있어요. 어떤 비밀 조직에 속한 녀석인데, 최근에 한 가지 소식을 들었다고 했어요.” “비밀 조직이요? 그게 뭔데요?”지아가 모르는 척하며 물었다. “국제 용병 조직 같은 거예요. 돈만 받으면 어떤 임무든 맡는데, 이를테면... 살인 같은 것도요.” “살인이요?”지아는 과거의 나쁜 기억이 떠오른 듯 얼굴을 굳혔다. “두려워하지 마요.”민호는 조산한 그날 밤이 그녀의 악몽이 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나는 당신을 다치게 두지 않을 거예요.” “미스터 정의 친구분이 들었다는 소식이 뭔데요?” “최근에 살해 의뢰를 받았대요.” “나를 죽이라는 의뢰군요, 맞죠?”지아가 씁쓸하게 웃었다.“이젠 익숙해요. 이미 수많은 살해 위협을 받아왔으니까요. 이번이 처음도, 마지막도 아닐 거예요. 저를 친구로 여겨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나는 이만 가볼게요.” 지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려 하자, 민호가 그녀의 손목을 급히 붙잡았다.“가지 말아요.” “나는 불행을 몰고 다니는 사람이에요. 가족도, 친구도, 심지어 애완동물조차도 나 때문에 해를 입었죠. 당신에게도 불행이 닥칠 거예요.”“지아 씨, 내가 진실을 밝히는 건, 당신을 돕고 싶기 때문이에요.” 민호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이번에 당신을 노리는 사람은 평범한 상대가 아니에요. 지아 씨, 제발 나와 함께 가요. 여기 머물면 언젠가는...” 오래도록 놓은 미끼가 드디어 물고기를 건진 순간이었다. 게다가 이 물고기는 그야말로 대어라고 할 수 있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아주 오래전부터 누군가가 날 죽이려 하고 있어요. 여러 방법으로 계속해서 날 쫓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