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씨 가문 사람들은 하용의 태도가 이렇게 단호할 줄 몰랐다.이제 아무도 그가 밀당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이때 부장경이 소리를 냈다.“만약 법정 싸움까지 하겠다면 우리 역시 최고의 변호사를 선임할 거야. 기껏해야 상해죄밖에 되지 않고 임신한 상황이라 집행유예를 신청할 수도 있어.”지아는 부씨 가문 사람들이 미셸의 또다시 보호하려고 하는 건 알고 있었으나 직접 보니 무척이나 답답했다.비록 화연과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지만 미셸에게 맞았던 그 화면이 자꾸 떠오르면서 지아는 자기도 모르게 손가락을 오므렸다.세상은 강한 사람을 중심으로 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도 불구하고 말이다.오늘날에도 지아는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않고 많은 일을 할 수 없다.따라서 이 답답한 곳을 벗어나는 것이 상책이다.“할아버지, 저는 부엌에 가서 약을 좀 닳이겠습니다.”부남진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좀 신경 써 주거라.”지아는 참다못해 한마디 덧붙였다.“부씨 가문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제 환자를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말을 마치고 돌아서면 지아는 여기서 아무 역할도 할 수 없었다.권세가 무엇보다 중요한 이곳에서 말이다.지아는 뒤뜰로 들어서자마자 매화나무 아래 서 있는 도윤을 보게 되었다.하얀 눈이 주르륵 떨어져 그의 잘생긴 얼굴을 비추고 있었는데, 마치 만화에서 나온 남자 주인공과 같았다.“도윤아.”지아는 시무룩한 모습으로 도윤에게 다가갔다.도윤은 지아를 향해 두 팔을 벌려 품속으로 꼭 끌어안았다.“무슨 일 있었어?”지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답한 목소리로 그의 품에서 말했다.“이 집안에서 날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없잖아. 다만 화연 씨가 좀 안쓰러워서 그래.”그 느낌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소계평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뛰어다니던 모습처럼 말이다.도윤이 손가락을 움직이면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으나, 그때 도윤은 질투 때문에 소계훈이 죽어가기를 저주했었다.지아는 오늘날의 하용처럼 무력했었고 그들의
지아가 떠난 후, 하용만 홀로 서 있게 되었다.몸집은 도윤과 비슷하지만 도윤과 달리 사람 앞에서는 유난히 겸손해 보이는 하용이다.윗사람이나 스펙이 높은 사람에게는 무의식적으로 등을 굽히고 겸손하고 자상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도윤처럼 염라대왕이 온다고 하더라도 머리를 쳐들고 자기가 가장 잘났다는 모습과 달리.도윤은 태어날 때부터 이씨 가문의 후계자로 태어났고 어려서부터 이씨 가문의 큰 기대를 받았다.군사 분야에서도 큰 힘을 발휘하면서 모든 걸 내려다보는 존재가 된 것이다.하씨 가문이 상황은 비교적 복잡한 것이 하용은 태어날 때부터 쫓겨 다녔고 내딛는 모든 걸음이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았다.그가 하고 싶은 것은 분명히 이것이 아닌데, 하씨 가문은 화연으로 하용을 위협했었다.하씨 가문은 어둠을 감당할 사람이 필요한데, 하용이 바로 온갖 어두운 면을 대신 처리해 주는 사람이었다.반면 하용의 동생은 어릴 때부터 집안의 망나니로 날마다 술수를 바꿔가며 놀았다.따라서 하씨 가문의 모든 무거운 짐은 모두 그 혼자 짊어진 것이다.미셸을 사랑하지 않지만, 미셸은 부씨 가문으로 걸어갈 수 있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라 하씨 가문에서 밀어붙인 것이다.그 많은 일을 해 온 것도 모두 화연때문이었으나 화연은 미셸의 손에 그렇게 된 것이다.가문의 영광도 명예도 앞날도 오늘 화연이가 당한 일과 어린 목숨을 잃은 것에 비견할 수 없었다.이 길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통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는 하용이다.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인데도 말이다.하씨 가문을 위해 지금껏 살아왔으니 이번만은 자신을 위해 살려고 했다.“하용아, 네가 얼마나 착한 아이인지 잘 알고 있어. 제발 우리 미셸 한 번만 봐 줘. 어찌 됐든 앞으로 미셸 인생에 흠이 되는 일이잖아.”“제가 살길을 열어드리면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그 아이에게 살길을 열어주는 사람은 누굴까요? 제 여동생과 미셸은 얼굴 한번 본 적이 없는 사이입니다. 그런데도 숨이 간당간당하게 남아있을 정도로 때렸습니다
미셸은 무척이나 다급해졌다.“아빠, 나는? 나 좀 도와줘.”부남진은 차갑게 미셸을 힐끗 쳐다보았다.“꺼져.”이명란이 미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경중을 가리지 않고 헛소리를 해서 부남진을 화나게 할까 봐 걱정된 것이다.“아가씨, 일단 상처부터 좀 치료합시다. 아직 임신 중이시고 중요한 아이잖아요. 절대 그 어떠한 사고도 생겨서는 안 돼요.”만약 아이가 없다면 정말 감옥에 가게 될 것이니 말이다.부남진은 부장경을 힐끗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데리고 가서 치료받도록 해.”“집사, 다시 차 한잔 내와. 그리고 넌...”그의 시선은 이명란에게로 쏠렸고 이명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남아. 물어볼 게 있어.”“네.”방에 있던 사람들이 거의 다 가버리자 이명란은 자신의 옷을 꼭 잡아당기며 안절부절못하며 입을 열었다.“각하, 말씀하세요.”이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라보는 시선만으로도 이명란은 괴로워 마지 못했다.“그 여자랑 지아가 손잡고 도발해서 미셸이 그만 참지 못하고 손을 댔다고 하지 않았어? 지아가 일부러 유인해 간 거라고. 부씨 가문과 하씨 가문의 갈등을 부추기고 이씨 가문이 어부지리를 얻으려고 한다고 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왜 말이 전혀 다른 거야?”이명란은 부씨 가문에 돌아오자마자 미셸의 죄를 뒤집어씌웠었다.일부러 민연주를 화나게 해서 민연주가 미셸을 위해 나서게끔 했었다.지아가 자리에 없었고 부장경도 그 뒤에 온 것이라 사실을 모르니 말이다.하지만 가장 중요한 CCTV를 놓쳤고 이제 진실이 앞에 나타나 이전의 모든 것이 헛소리였음을 증명하고 말았다.이명란은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황송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각하께서 노하실까 봐 아가씨를 가만두지 않을 것 같아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모두 아가씨를 위해서 한 소리였고 임신한 몸으로 벌을 받게 된다면 절대 감당해낼 수 없었을 겁니다.”“네가 미셸을 거의 홀로 키우다시피 한 거 알아. 근데 지아를 모함하는 이유는 될 수 없어.”“다 제 잘못입니다. 함부로
지아는 주방에서 약을 닳이고 있었고 민연주가 들어와서 도우미에게 보양식 재료를 준비하라고 했다.직접 앞치마까지 두르는 것을 보고 지아는 조금 놀랐다.부남진에게 주려고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병문안하러 갈 때 챙겨가는 음식처럼 보였다.유산하고 난 뒤에 먹으면 좋은 음식으로 말이다.“화연 씨 주려고 준비하는 거예요?”민연주는 처음부터 지아를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오늘 CCTV에서 지아가 다른 사람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지아가 진정한 의사라는 것을 깨달았다.수술대에서 이익을 생각한 게 아니라 자신 그 자체를 생각하면서 말이다.그렇지 않았더라면 오늘 상대 가문의 사람을 옹호하지도 않았을 것이다.다만 예전에 선입견으로 지아를 항상 심술궂은 여자로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었다.민연주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솔직히 이렇게 하는 것도 쇼가 아니란다. 미셸 대신 속죄하고 싶은 마음도 있고 그 애가 정말로 안쓰러워서 그런다.화연이 미셸에게 너무 심하게 얻어맞는 것을 보아서인지 지금도 가슴이 조여들고 있는 민연주이다.지아의 눈빛을 마주하면서 민연주는 자신을 비웃는 듯 덧붙였다.“내 딸이 성질 나쁘고 머리가 나쁘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 다 알아. 어렸을 때부터 우리 곁에 없었고 커서야 데려온 아이라 지나치게 사랑하고 있는 것도 인정해. 근데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어... 부모로서 정말 부끄럽지만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을 뿐이야.”“네.”지아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앞뒤로 준비를 마치고 음식과 한약을 보온 박스에 넣었다.“할머니, 그만 가요.”하용의 사람들은 병실 밖을 지키며 다른 사람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오로지 지아만 제외하고.의술에 관한 한 부남진은 최고의 광고이고 하용은 지아가 화연의 몸을 치료해주기를 바라고 있어서 매우 정중하게 대했다.문가에 도착하자마자 두 사람이 들어가기도 전에 여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윤미래는 허리를 짚고서 기고만장한 모습을 보였다.“우리 하씨 가문에서 너
민연주가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오지 않았더라면 평소에 따님에게 어떤 모습인지 알 수 없었겠죠.”“우리가 입양한 아이일 뿐입니다. 밥 한 끼 먹여 주었더니 오히려 우리 아들이랑 미셸 관계를 부추겨 혼사를 이렇게 만들어 버렸지 뭡니까. 아주 잘 맞았습니다. 맞아도 싼 년입니다.”지아는 갑자기 미셸이야말로 윤미래의 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두 사람이 내뱉는 말은 그토록 귀를 찔렀으니 말이다.민연주는 자식을 아끼는 좋은 엄마로 어렸을 때부터 엄격한 요구로 받았던 부장경을 뒤에서 몰래 아껴줬었다.부장경이 벌을 받아 무릎을 꿇을 때 몰래 수를 써서 조금이나마 힘이 덜 들게 하고 말이다.그렇지 않았다면 미셸을 지금처럼 총애하지 않았을 것이다.민연주는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이 자신의 아이를 해치는 것을 볼 수 없는 사람이다.윤미래의 말에 상대하지 않고 공기처럼 무시해버리고 화연 곁으로 가서 부드럽게 말했다.“얘야, 좀 괜찮으냐?”화연은 낯설지만 예쁘고 고급스러운 여인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대답했다.“네, 괜찮아요.”“괜찮을 리가 있겠어... 얼굴이 빨개지고 부은 것 좀 봐.”윤미래는 미셸이 그런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민연주가 겉치레하러 온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재빨리 화연에게 눈짓하며 말했다.“이분은 미셸의 엄마시다. 널 직접 보러 온 것에 영광으로 생각해야 할 거야.”화연은 민연주를 훑어보았는데 전혀 닮지 않아서 이상했다.생김새나 기질이나 닮은 구석이 없어 친근하게 느껴졌다.곧 정신을 차리고 자신이 어떤 신분인지 다시 인식하고 대답했다.“네, 감사합니다.”지아는 부기를 가라앉히고 멍을 없애는 연고를 가져왔다.들어오자마자 화연이 지극히 비천하고 심지어 침대에서 내려오고 싶어 하는 모습을 보고 화연에 대해 안쓰러움이 더 커졌다.“이제 막 수술을 마쳤으니 배가 많이 아플 거예요. 그냥 누워 계시면 됩니다. 침대에서 내려오지 마세요. 할머니께서 그런 것에 개의치 않으실 겁니다.”민연주는 화연을 부축하여 눕혔다.“그래
화연은 단순하지만, 바보가 아니다.조금 윤미래가 했던 말로 어느 정도 짐작이 되었으니 말이다.하용이 화연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있기에 화연이 이렇게 된 것을 보고 무슨 극단적인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윤미래는 자기 아들을 통제할 수 없어서 화연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화연은 자기 때문에 하용의 앞길을 망친 것 같아 민연주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려고 했다.겁에 질린 화연의 모습을 보고서 지아와 민연주는 얼른 화연을 부축하여 눕혔다.지아는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가만히 있어요! 피 터져서 죽고 싶어요?”화연은 의술에 대해서 아는 게 없었다.하지만 방금 움직인 후에 확실히 몸 아래서 피가 나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수술하고 난 뒤의 정상적인 생리 현상이나 지아의 말을 듣고서 화연은 놀라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죽는데 두렵기는 했다.왜냐하면, 자기가 죽게 되면 하용이 미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순하기 그지없는 화연의 모습을 보고서 민연주는 한숨을 내쉬었다.‘안쓰러워...’아마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민연주가 이렇게 한 것은 단지 미셸의 죄에 대해 속죄하기 위해서일 것이다.하지만 마음속으로 화연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듣자니 하씨 가문에서 재앙을 막기 위해 입양한 딸이라고 하는데 윤미래의 태도를 보아하니 집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알 것 같았다.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맞고 쓰러졌는데도 사과까지 하다니 불쌍하기 짝이 없었다.“그럴 필요 없어. 긴장 풀고 편안하게 있어.”민연주는 약을 발라주며 물었다.“몸은 어디 아픈 데 없어?”목소리가 부드러워서 그런지 어려서부터 모성애가 부족했던 화연은 갑자기 긴장이 풀렸다.“저... 배 아파요...”그 말을 듣고서 지아는 눈살을 찌푸렸다.“진작 말하지 그랬어요! 진통제 안 썼어요?”수술을 받고 나면 원래 배가 아플 텐데 체질까지 나쁘다 보니 남들보다 몇 배는 더 아팠을 것이다.“깜빣했나봐요...”만약 보통 사람들은 돈이 부족하여 진통제를 쓰지 않은 것이라면 하씨 가문은 그러기에 돈이
방 안에는 두 사람만 남아 있었고 화연은 진통제를 사용했고 고통은 조금 누그러졌다.민연주는 화연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물었다.“좀 괜찮아졌어?”화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 괜찮아졌어요. 저 진짜 괜찮고 미셸 씨 탓도 하지 않아요. 모든 게 다 제 잘못이니 우리 오빠 탓하지 말아 주세요.”“남매가 참 정이 좋네.”민연주는 한숨을 내쉬었다.하용은 화연을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었다.혼자서 부씨 가문을 쳐들어왔을뿐더러 하씨 가문과 관계를 끊으려고 했다.그리고 화연은 이렇게 당하게 되었음에도 계속 하용만 생각하고 있다.“걱정하지 마. 난 내 딸을 대신해서 사과하려고 온 거야. 네가 괜찮다고 하더라고 잘못은 한 건 사실이니 절대 감싸주지 않을 거야.”처음엔 민연주는 이런 생각을 하고 왔었다.하용에게 사법 절차를 밟지 말라고 대신 좀 충고해달라고.하지만 화연의 비천한 모습과 미셸의 태도가 선명하게 대조를 이루면서 도통 말이 나오지 않았다.“배고프겠어. 지아랑 맛있는 거 좀 해 왔어. 다른 일은 당분간 생각하지 마.”이렇게 허약한 모습을 보고서도 윤미래는 그 어떠한 음식도 가지고 오지 않았다.친딸이 아니어서 그러한지 정말로 아끼지 않았다.민연주는 푹 끓여 온 곰탕을 꺼내 들었다.“이거부터 좀 마셔봐. 내가 몇 시간 동안 끓인 건데 간이 맞는지 모르겠어.”놀라워 마지 못하면서 자격지심이 엄청난 화연의 모습에 민연주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어서 맛 좀 봐. 괜찮아 마음 편히 먹어도 돼. 좀 뜨거워 조심해서 마시고.”몇 모금 마시더니 민연주가 또 물었다.“어때? 몸조리 잘해야 해.”눈물이 한 방울씩 곰탕으로 뚝뚝 떨어졌다.“맛있어요.”화연은 정신없이 눈물을 훔쳤다.“일부러 울려고 한 게 아니에요. 죄송합니다.”만약 윤미래가 있었다면 또 눈물을 흘려 사람을 홀린다고 각종 더러운 말을 했을 것이다.민연주 역시 똑같이 생각할 것이라고 여겼다.그러나 민연주는 화연의 손을 살포시 잡으며 말했다.“울지 마. 눈 아파
민연주는 화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난 정말로 네가 안쓰러워서 그래. 엄마가 잘해주지 않지?”화연은 감히 다른 사람을 헐뜯지 못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그냥 화가 나서 그러신 것뿐이에요.”“그런 엄마 밑에서 힘들었겠어. 괜찮으면 앞으로 나를 또 다른 엄마로 받아주지 않을래? 앞으로 부씨 가문에서 널 지켜줄게.”화연은 어리둥절해서 하며 더듬거렸다.“저...”민연주가 그냥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실은 정말로 그럴 필요가 없다면서 미셸을 추궁할 의사도 전혀 없었으니 말이다.이때 문이 열리고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하용이 나타났다.“화연아.”초조한 얼굴로 민연주를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민연주가 여기 나타난 의도를 알아차리고는 금세 눈빛을 경계로 돌렸다.“사모님.”민연주는 하용이 전에 부씨 가문에서 한 말을 화연을 보고 모두 이해할 수 있어서 화를 내지 않았다.“화연이 보려고 온 거야. 조금 전까지 화연이랑 연이 있는 것 같아 수양딸로 삼고 싶다고 했어.”하지만 하용은 전혀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오히려 비아냥거리는 웃음을 드러내면서 말했다.“사모님, 미셸의 죄를 씻기 위해서 애를 쓰시네요.”민연주는 조금 난감했다. “그래. 처음에는 그런 생각을 했지만, 지금은 아니야.”하용은 한마디도 듣지 않았고 화연을 선택할 때 모든 사람과 적이 되기로 결심했었다.“사모님, 저는 이미 정식으로 하씨 가문과 관계를 끊었습니다. 하씨 가문이 부씨 가문에 어떻게 아부하든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만 화연의 오빠로서 대가를 치르게 해주고 싶습니다. 그러니 다른 마음은 그냥 접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일은 물러설 여지가 없습니다.”하용은 손짓하며 말했다.“병원 같은 곳은 있으신 건 사모님 신분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제 동생은 제가 알아서 잘 챙기겠습니다. 그만 돌아가 주세요.”민연주는 입을 딱 벌렸지만 끝내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다.사실 이 지경에 이르자 무슨 말을 해도 하용의 생각을 바꿀 수 없었다.민연주는 화연의 어깨를 두드렸다.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