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깊은 숲속의 분노한 짐승들의 왕처럼, 이 소리는 산림을 진동시키기에 충분했다.재빨리 집으로 달려온 이도윤을 보고 백채원은 당황하여 발톱도 하지 않고 얼른 일어섰는데 아직 다 바르지 못한 매니큐어가 바닥에 떨어졌다.새빨간 매니큐어는 하얀 카펫 위에 떨어져 유난히 뚜렷해 보였다.“도윤 씨, 내 설명 좀 들어봐요.”이도윤은 백채원을 상대하지 않고 아주 빨리 소지아를 향해 다가갔다.그러나 건장한 하녀는 그를 한 번 보았을 뿐, 동작을 멈추지 않았다.이 사람은 백채원이 외국에서 데려온 심복으로서 백 부인이 아직 죽지 않았을 때부터 이미 백씨 집안에 있었고, 주먹질까지 좀 할 줄 아는데 키는 1미터 75센치미터, 몸무게는 75킬로 그람이라, 여자들 중에서 무척 우람했다.그녀도 물론 이도윤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소지아가 바로 백채원의 눈엣가시라는 것을 마음속으로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반드시 이 가시를 뽑아야 했다.그래서 분명히 제지하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소지아의 얼굴을 계속 그으려 했다.한 칼, 한 칼이면 충분했다.단칼에 내려가면 이 예쁜 작은 얼굴은 더 이상 회복할 수 없었다.마치 그녀와 이도윤의 감정처럼, 일단 금이 가면 다시 돌아가기 어려웠다.이 세상에 그 어떤 남자도 얼굴에 흉터가 있는 여자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시간이 지나면 이도윤은 기필코 백채원을 좋아하게 될 것이다.그래서 그녀는 엄청난 위험을 무릅써서라도 소지아에게 손을 대야만 했다.“탕!”방안에서 귀를 찌르는 총 소리가 나더니 하녀들은 놀라서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도망쳤다.총알은 단지 하인의 손에 있는 칼을 날렸을 뿐, 이 틈을 타서 진환은 이미 그 하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종아리를 발로 차서 무릎을 꿇게 했다. 그리고 또다시 그녀의 두 손을 등 뒤로 묶었다.“가만히 있어, 움직이지 말고!”방금 그 총알은 하녀의 팔을 스치고 지나갔는데, 운이 나빴으면 그녀의 손은 틀림없이 쓸 수 없게 됐을 것이다. 그녀는 여전히 총 소리의 위력에 빠져 더는 움직
소지아의 질문에 백채원은 하하 웃었다.“내가 지윤이 엄마가 아니면, 당신이 아이의 엄마인가요?”“당신이 만약 아이의 친엄마라면 이렇게 무관심하지 않았을 거예요. 아이가 알레르기가 있어 넘어졌는데, 당신은 가장 먼저 그를 안고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터무니없이 나를 모함하다니, 양심이 찔리지도 않나봐요?”백채원은 되받아쳤다.“당신 도윤 씨 왔다고 그의 앞에서 나를 헐뜯는 이런 말을 하면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마요. 내가 이 아이를 낳을 때, 도윤 씨는 바로 옆에 있었으니, 이 아이가 누구의 것인지 그는 마음속으로 잘 알고 있죠.”소지아는 그녀와 이런 의미 없는 화제로 다투기가 귀찮았다. 어떤 사람은 어머니가 될 자격이 없었다.평소 이지윤을 돌보던 아줌마는 재빨리 물을 가져왔고, 소지아는 아이의 단추를 풀고 수건으로 그에게 찜질해 주었다.이상한 것은 아이가 가려운 것을 참지 못하고 울고 보채야 하지만, 이지윤은 오히려 조용해졌다.그는 까만 큰 눈으로 소지아를 주시하면서 조금도 시선을 떼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 손으로는 소지아의 옷자락을 꼭 잡아당기며 그녀가 떠나지 못하게 했다.그녀가 있는 한, 그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그만하지 못해요, 내 아들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고요?” 백채원은 분명히 그녀의 행동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소지아는 그녀를 차갑게 흘겨보았다.“냉찜질은 혈관을 수축시키고 가려움증을 경감시킬 수 있어요. 그는 지금 매우 괴로울 거라서 긁기만 하면 알레르기 면적이 계속 확대되고 심하면 고열을 일으킬 수 있어요.”백채원이 또 무슨 말을 하려고 하자 이도윤은 차갑게 호통쳤다.“입 닥쳐요.”이는 요 2년 동안 소지아가 처음으로 이도윤이 백채원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백채원도 서운한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는 즉시 또 발뺌하기 시작했다.“나는 줄곧 지윤이가 먹는 음식에 주의를 기울였는데, 어떻게 아무런 이유도 없이 알레르기가 있을 수 있지? 그는 무엇을 먹었지?”한 하녀가 말했다
이도윤은 지금 온몸의 포악한 기운을 누르고 있었는데, 그는 자신이 백채원을 계속 보면 그녀의 목을 졸라 죽일 것만 같았다.방금 그가 좀 더 늦게 왔다면, 소지아는 정말 크게 다쳤을 것이다!예전에 백채원은 질투심을 부렸을 뿐, 그는 그저 눈감아 주었다.하지만 이 여자가 부리는 투정이 일을 이렇게 만들 줄은 몰랐다.이도윤은 소지아 눈썹 위쪽의 상처를 보았다.“먼저 가서 상처 처리해. 아이는 주은청에게 맡기면 돼.”주은청은 이지윤을 돌보기 위해 그가 찾은 도우미였다. 소지아는 홍진이 이미 통제된 것을 보고 그제야 한숨을 돌리고 나머지를 주은청에게 넘겨주었다.“엄마, 엄마.” 이지윤은 다시 한번 외쳤다. 그녀가 가려는 것을 보자 그는 무척 당황했고, 방금 전 영리한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소지아는 그의 울음에 가슴이 아파 다시 돌아와서 아이를 안았고, 이지윤은 그제야 떠들지 않고 순순히 그녀의 품에 안겼다.이도윤이 면봉을 들고 오자 소지아는 바로 그를 피하려 했지만 이도윤은 차갑게 말했다.“움직이지 마.”소지아는 온 집안에 있는 백채원의 사람들을 보고 지금은 오직 이도윤 만을 믿을 수밖에 없어 제자리에 서서 그를 기다렸다.그는 그녀가 아픔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고 매우 가볍게 상처를 발라주었다. 그리고 소지아는 아픔을 참으며 조금의 소리도 내지 않았다.전에 그 연약하고 응석받이로 자란 소녀가 오늘처럼 된 것은 모두 그가 초래한 것이었다. 이 2년 동안 그의 정신적 폭력, 그리고 무관심함은 그녀를 지금과 같이 만들었다.웃음도 없고 불평도 없고 심지어 아파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그의 눈빛은 소지아의 머리카락에 떨어졌고, 그 위에는 여전히 계란물이 남아 있었다. 분노는 이도윤의 마음에서 오장육부로 만연되었고, 그의 모든 세포마다 그의 노기를 담고 있었다.그렇게 생각을 하다 그는 조심하지 않아 손에 힘을 주었고, 면봉은 소지아의 상처를 세게 눌렀다.“아.” 소지아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아팠어?”이도윤은 바삐 물었고, 손가락으로
진봉은 다급하게 소지아를 부축했고, 소지아는 곧 깨어났다.“사모님, 괜찮으세요? 병원에 데려다 드릴게요.”소지아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저혈당이라서 그래.”그녀는 전에 백채원과 한바탕 싸운데다 또 이지윤을 구했기에 이미 모든 체력을 소모했다.진봉은 잔뜩 걱정해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근데 저는 왜 사모님의 몸이 점점 허약해지는 것 같다고 느끼는 거죠.”“나 정말 괜찮으니까 집으로 데려다 줘.”소지아가 떠난 지 얼마 안 되자, 진환은 약을 사왔는데, 냉찜질과 해열제의 효과에 이지윤의 알레르기는 멈추었고 더 이상 다른 피해를 초래하지 않았다.이도윤은 인내심을 가지고 그에게 신체검사를 하였는데, 소지아가 그를 아주 잘 보호해서 그는 아무런 부상도 입지 않았다.이리저리 들볶은 끝에 이지윤도 피곤해져 이도윤의 옷자락을 잡고 그의 품속에서 쿨쿨 잠들었다.이도윤은 아이를 주은청에게 건네주었고, 백채원은 그제야 연약한 모습으로 그에게 기대었다.“도윤 씨, 정말 날 믿어야 해요. 소지아 씨는 나를 찾아와 고택을 달라고 했는데, 처음에는 케이크를 만들어 준다며 내 비위를 맞추다가 거절당하자 욕설을 퍼부었고 심지어 칼을 들고 날 죽이려 했어요. 하인은 나를 보호하기 위해 그녀의 손에서 칼을 빼앗았는데, 그녀는 또 아이를 인질로 삼으려 했고요. 도윤 씨가 왔으니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그녀의 말은 허점투성이라 이도윤은 그녀와 이런 무의미한 화제를 쟁론하고 싶지 않아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입을 열었다.“소씨 집안 고택은 내가 가져갈 거야.”백채원은 엄청 놀랐다. 만약 고택이 없다면 그녀는 소지아를 협박할 수 없었기에 무슨 말을 해도 백채원은 이도윤에게 넘겨주지 않을 것이다.“도윤 씨, 나 믿어요. 소지아 씨는 연기를 너무 잘해서…….”이도윤은 달려드려는 그녀의 몸을 뿌리쳤다.“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나는 당신보다 더 잘 알고 있어요. 그리고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나도 잘 알고 있고요. 내가
백채원은 한참 기다려도 이지윤이 말하는 것을 듣지 못하자 모든 분노를 그에게 발산했다.“이 양심도 없는 녀석아, 내가 너를 낳아서 키웠는데 결국 너는 날 엄마라고 부르지 않고 오히려 그 천한 년을 엄마라 부르다니. 내가 어떻게 너 같은 바보를 낳은 거야? 넌 이 얼굴 말고는 정말 아무런 쓸모가 없어.”백채원은 그를 뒤집은 뒤 엉덩이를 호되게 때렸다. 이지윤은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전혀 몰랐기에 줄곧 울기만 했다.주은청이 달려오자 백채원은 멈추고 아이를 그녀의 품속으로 내팽개치며 협박했다.“이 녀석은 성질만 있어가지고. 내가 경고하는데, 한 마디라도 입 밖으로 내뱉으면, 내일 당장 꺼질 줄 알아.”비록 이 아이는 이도윤의 친아들이 아니지만 이 얼굴과 이도윤이 자신의 아이를 잃은 죄책감으로 그는 모든 사랑을 이지윤에게 주었다.백채원은 이 아이를 이용하여 이씨 집안 사모님의 자리까지 올라가야 했으니, 이 일로 이도윤을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백채원이 떠난 후, 주은청은 아이의 엉덩이가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을 보고, 그래도 1년 동안 이지윤을 돌보았으니 이미 정이 들어 그녀는 눈시울을 붉혔다.어린아이의 피부는 본래 여렸는데, 친엄마인 그녀는 소지아보다 못했다.주은청은 원래 이도윤에게 보고하려 했지만, 이것도 큰일이 아니라 생각하고 말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자신의 아이를 훈계하는 것이었으니 아이를 다치게 하지 않은데다, 만약 이도윤이 이 일을 안 다면, 그녀는 자신이 바로 이도윤의 사람이란 것을 백채원에게 먕백히 알리는 거나 다름 없었다.백채원의 성질로는 더 이상 자신으로 하여금 이지윤을 돌보지 않게 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주은청은 억울함을 삼키고 이지윤을 잘 달랠 수밖에 없었다.이때 인해로 길가에서, 진환은 별장 내부에 설치된 스텔스 카메라 기록을 내놓았다. 이도윤은 백채원이 계란물을 소지아의 머리에 뿌리는 것을 보았을 때, 팔걸이에 걸친 손등에 핏줄이 드러났다.그러나 다행히 소지아는 반항했고, 이도윤은 표정이 좀 풀렸다.그러나 이것
진환은 일 처리 효율이 아주 빨라 그날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부동산 공증을 하게 했다. 소지아는 자신이 어떻게 이 집을 얻었는지 똑똑히 알고 있었다.그녀가 몸을 던져 이지윤을 보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그녀는 전혀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설사 이지윤이 백채원의 아이라 하더라도 그녀의 눈에 그것은 무고한 아이였다.그녀는 눈썹에 작은 상처를 입었을 뿐인데 고택을 얻었다니, 소지아는 씁쓸하게 웃었다.눈을 감으면 백채원이 그녀에게 억지로 무릎을 꿇으라고 강요하는 장면이 떠올랐고, 소지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소씨 집안 고택을 찾은데다 이도윤도 와서 그녀를 귀찮게 하지 않았기에 소지아는 요 며칠간 기분이 아주 좋았다.그녀가 소계훈은 조사하라고 불렀던 개인 탐정은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그녀에게 사진을 보냈다.소지아는 김민아가 방금 씻은 체리를 받아 아직 입에 넣지 않았는데, 이 사진들을 본 순간, 체리는 카펫에 떨어졌다.김민아는 체리를 먹고 있었는데, 입은 이미 빨갛게 물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소지아의 창백한 표정을 보고 그녀는 바로 물었다.“왜? 주식이 떨어졌어, 아니면 네가 좋아하는 아이돌이 연애했어?”소지아는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얼굴은 창백해진 채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대체 무슨 일이야? 귀신에 홀린 것처럼. 나 겁이 많으니까 날 이렇게 놀리지 마!”김민아는 중얼거리며 휴대전화를 주웠다.핸드폰 화면이 밝아지자 김민아는 일부 사진을 보았다.그것은 교통사고 현장이었다. 검은 차는 녹지대 맞은 편에서 돌진하는 큰 화물차에 부딪혀 완전히 찌그러졌다.“이거 아저씨 차 아니야? 너 괜찮니? 이런 걸 왜 보는 거야?”소지아는 그제야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너, 뒤에 있는 사진 좀 봐.”김민아는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즉시 엄숙해졌다.“이거 개도윤 아니야?”그 뒤의 사진에서, 이도윤은 교통사고가 난 곳과 멀지 않은 나무 밑에 조용히 서 있었다. 얼룩덜룩한 햇빛은 나무그늘을 가
소지아는 절망에 빠졌다. 그녀는 이도윤이 착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마음이 이토록 모질고 악랄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야 이도윤에 대해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민아야, 너 그거 알아? 우리 아빠 사고난 날 나는 심지어 집에서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어. 왜냐하면 그날은 이도윤의 생일이었거든…….”김민아는 티슈 몇 장을 뽑아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지만, 소지아의 눈물은 마치 샘구멍처럼 모든 휴지를 촉촉하게 적셨다.“이도윤은 종래로 생일을 보내지 않았어. 왜냐하면 그는 그의 여동생과 생일이 같은 날이거든. 그래서 매번 생일 때마다 그는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고, 그를 달래기 위해 나는 모든 방법을 생각했고. 난 아주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 그날 나는 정성껏 모든 것을 안배했지만 그가 집에 돌아오는 것 대신 우리 아빠가 교통사고로 위독한 상황에 처해있다는 전화를 받았지 뭐야.”소지아는 자신의 가슴을 꼭 누르며 울음을 터뜨렸다.“난 전에 이도윤 사이의 악연을 죽음으로 해결해야 한다면 그 사람이 차라리 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러나 지금은 후회하고 있는걸. 왜 죽어야 하는 사람이 그 남자가 아닌 나여야만 하는데? 왜 내가 불치병에 걸렸을까! 하느님은 왜 이렇게 눈이 없는 것일까!”“지아야, 일단 좀 진정해. 그가 현장에 나타난 것은 그가 이 일을 계획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어. 이건 누가 너에게 보낸 문자지? 만약 다른 속셈을 가진 사람이라면?”“이건 내가 돈을 써서 우리 아빠의 일을 전문적으로 조사하는 개인 탐정이 보낸 거야. 나는 그와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그는 날 해칠 이유가 없잖아? 그날은 이도윤 여동생의 생일이기 때문에, 그 남자는 이 또한 우리 아빠의 기일로 만들고 싶었던 거야! 아마 그도 그렇게 오래 지체됐으면서 우리 아빠가 여전히 살아있을 줄은 몰랐겠지.”소지아는 씁쓸하게 웃었다.“난 또 그가 나 때문에 소씨 집안을 궁지로 몰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마 그도 날 죽이고 싶었을 거야. 참, 아이도 있었
김민아의 마음속에 소지아는 줄곧 밝고 에너지가 넘쳤고, 또 어릴 때부터 교육을 잘 받아 올바른 인생관과 교양을 지니고 있었다.그녀는 여태껏 더러운 수단으로 남을 상대하는 것을 하찮게 여겼다. 비록 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 소지아는 일반인을 조금도 무시하지 않았고, 자신감이 있으면서도 존귀했으니, 이도윤이 그녀와 같은 여자를 좋아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김민아 자신도 여자로서 소지아를 좋아했는데, 그녀의 깨끗하고 해맑은 모습은 자주 자신으로 하여금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게 했다.그러나 지금 앞에 있는 여자는 그런 소지아의 그림자가 조금도 없었다. 그녀는 마치 망가진 인형처럼, 정교하고 아름다운 눈에는 감정이 조금도 없어 김민아를 두려워하게 만들었다.“지아야, 너 지금 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 거야?”소지아는 마치 미친 듯이 울고 또 웃었다.이 몇 장의 사진은 그녀를 무너뜨렸고 또 다시 일어서게 만들었다.소지아는 이제야 호의는 다른 사람이 마음대로 자신을 괴롭히는 기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또박또박 말했다.“그는 나를 도와 레오를 찾지 않을 거야. 그는 단지 나를 괴롭힐 이유를 찾고 싶었을 뿐이니까. 하지만 나는 단순하게 아빠가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니.”“지아야.”“나는 그가 기르는 개와 같아. 그는 기분이 좋으면 가끔 나에게 선심을 베풀었고, 나는 또 그의 은혜에 감사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하며 그에게 미움을 살까 봐 두려웠지. 그의 눈에 난 아마 광대와 같은 존재일 거야. 분명히 그렇게 아픈데도 그를 기쁘게 해야 하다니. 그리고 그는 거리낌없이 나의 상처를 줄곧 짓밟고 있었어!”“지아야, 진정해.”“진정해? 민아야, 나더러 어떻게 진정하라는 거지? 내가 당한 불행은 모두 그들 때문인데, 왜 죽어야 하는 사람은 그들이 아니라 나인 거지?”이런 소지아는 김민아를 두렵게 만들었다.“지아야, 너 절대로 무슨 바보 같은 짓 하지마. 그래, 그 백채원은 아주 꼴보기 싫은 년이지, 나도 인정해. 그러나 그녀의 아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